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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사랑

사랑의 찬가 (고전13:1-13)

by 【고동엽】 2022.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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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찬가   (고전13:1-13)


1. 어떤 진정한 연인, 정직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일 년 내내 사막의 동굴 속에서 명상했습니다. 그러고 난 뒤 자기 애인의 집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닫혀진 문 뒤에서 애인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누구신가요?"

"나요."

하고 남자가 말했습니다.

"지금 문밖에 있소."

"집안에 당신과 나 두 사람이 있을 자리는 없어요."

하고 닫힌 문 뒤에서 애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습니다. 그러자 이 정직한 사내, 진정한 연인은 다시 사막으로 돌아가 일 년 동안 명상했습니다. 마침내 그가 같은 집에 와서 또 문을 두드렸을 때, 그는 다시 애인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녀는 또 묻고 있었습니다.

"누구신가요?"

충직한 남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바로 그대 자신이오."

문은 곧 열렸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입니다.


"(엡4: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엡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엡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4: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엡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엡4: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하나님께서는 만유를 통일하시고자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만유가 하나되는 방법으로 겸손과 온유, 인내와 사랑, 그리고 평안 등 성령의 열매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열매가 있어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이신 하나님, 하나이신 성령은 사랑으로 우리 모두를 하나되게 하십니다. 고린도 전서는 무엇보다 분열된 고린도 교회를 염두에 두고, 교회가 하나되기 위하여 기록된 말씀입니다. 교회를 완전히 통일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사랑을 제시하면서 영적으로 무지와 교만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교회 분쟁을 해결하고 영적 은사들을 올바로 활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사랑을 제시한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의 영을 가졌다면 성령으로부터 주어진 영적 은사들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 영적 은사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사용되어지는 "제일 좋은 길"로써 "사랑"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지나치게 강조했던 예언과 방언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교회 분열은 그 원인이 사랑의 부재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결여된 모든 영적 은사는 거짓이며 공동체에 아무런 유익를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매개로 하여 그리스도인의 모든 영적 은사들은 비로소 빛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은사들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오직 사랑밖에 없습니다. 어떤 비상한 영적인 은사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만일 거기에 사랑이 함께 하지 않으면 그 은사는 무익한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영적 은사와 능력에 생명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생명력이 없는 은사의 활동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과 무관한 은사의 활용은 거짓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 중에 가장 으뜸 되고 그리스도의 마음에 가장 부합되는 것이 사랑일진대 모든 은사와 능력들이 사랑이라는 근본 정신에서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 하나님께로 갈 수 없는 것처럼, 성령의 은사와 능력들도 사랑을 통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효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천사의 방언을 한다해도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방언을 말하는 것은 이교도들이 축제 때에 떠들며 우상 숭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방언뿐만 아니라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진정한 효력은 바로 사랑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악기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태도가 없을 때 그것은 이교도들이 우상 숭배할 때 악기들을 사용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관현악단을 동원한 예배라고 해도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신의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변화된 마음이 없다면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예배를 결코 기쁘게 받으시지 않으십니다.


2.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인격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야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들은 여러분이 천국에 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 제일 많이 없어진 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유일하게 남은 것은 경쟁뿐입니다. 경쟁적으로 교회를 키우고, 경쟁적으로 교회를 자랑하고, 경쟁적으로 은사와 능력을 자랑하고, 경쟁적으로 자기 잘난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능력을 찾아다니며 성공을 추구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마20: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마20:2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마20:23)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마20:24)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마20: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마20: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마20: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서로 으뜸이 되고자 다투어 경쟁하지 말고 서로 사랑으로 희생하며 섬기는 종이 되며 대속물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과 소망이 왜 필요한 것입니까? 지식이 무엇 때문에 필요합니까? 이 모든 은사들과 능력들은 사랑을 만들어 내기 위해 보조 수단으로 주어진 것들입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열매를 맺지 아니하고 은사나 능력 자체를 가지고 자신을 증명하거나 그것이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서 경쟁적으로 은사나 능력을 추구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기도원에 가서 금식 기도하고 내려와서는 겨우 한다는 말이 우리 교회는 사랑이 없어, 우리 교회는 기도가 없어, 우리 교회 목사는 은사도 없고 기도도 없고 사랑도 없어, 누구누구는 교만해, 이와 같은 것은 금식 기도한 것이 아니라 굶주리고 와서 우는 사자처럼 공격하며 대드는 것이지 주님의 형상을 닮기 위해 금식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율법 중의 첫째 율법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선지자 사명을 받았기 때문에 죄를 드러내고 공격하고 찌르고 하는 것이 대강령인줄 알고, 그렇게 하는 것이 선지자 사명을 잘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식 있는 사람으로 만들고, 믿음 있는 사람으로 만들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우리를 부르셨고, 사랑의 열매를 맺으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열매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은사가 왜 주어지는 것입니까? 우리가 사랑의 열매를 맺어 가는 데 부족한 것이 많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하나되라고 은사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는데 보조 수단으로 주어지는 것이 은사와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은사가 많다, 너희 교회는 은사가 적다, 나는 은사가 여러 가지다, 너는 은사가 별로다 하는 것은 어린애들이 골목에서 서로 자기 집 자랑하거나 자기 자랑하는 것에 불과 합니다. 은사는 이처럼 자기 자랑이나 자기 증명을 하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열매를 맺는데 제일 좋은 길이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교회에서는 방언은 기본이고 방언 통역이나 예언 등을 해야 신령하며 영권(靈權), 즉 영적 권위를 지닌 것처럼 여긴다고 합니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은 여러분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고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사는 사랑을 위해서 사용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실패한 것은 바로 이점이었습니다.


3. 오늘날 영적 권위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는 은사 충만과 영성의 표준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한국 교회는 오순절 계통의 은사집회에 깊은 영향을 받아 신자의 인격을 변화시키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게 하는 성령의 내면적이고 은밀한 역사보다는 외적으로 현저하게 나타나 보이는 방언, 예언, 신유와 같은 은사들을 일방적으로 치켜세우고 추구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인격이 훌륭하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목회자보다는 기적을 행하고 신유의 능력이 있는 목사가 보다 신령한 분으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비록 영적인 충만함을 소유하고 여러 비상한 은사들을 받았다고 주장하더라도 그들은 분쟁과 싸움, 사랑의 결핍, 비평, 불화 그리고 부도덕과 같은 거짓 영들의 지배를 받아 도덕적 위기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이 신령한 사람들이라고 주장했으나 바울이 볼 때는 어린아이들에 불과 했고 육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은사를 소유했다고 해서 신령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 은사들을 사용하여 교회 공동체의 덕을 세우고 그 은사들을 사랑을 따라 사용하는 사람이 바로 신령한 사람인 것입니다. 신령한 사람은 성령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입니다.


"(고전2: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신령한 사람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판단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고전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한 사람이 신령한 사람입니다.


"(고전2: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신령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마음, 즉 사랑의 마음을 따라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마음의 능력을 소유한 사람을 말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신령한 은사들을 소유했다고 주장하면서도 그들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었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할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망각하고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하였습니다.


"(고전3:3)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진정한 영성의 표지는 성령의 열매를 맺음으로써 성도가 얼마나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보이는가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발생한 수많은 문제들은 모두가 다 사랑의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분당을 지어 분쟁하고 싸우는 문제도 사랑의 마음을 따라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온전히 합하지 못한 때문이었습니다. 교우들끼리 서로 치고 박고 싸우면서 불신 법정 앞에 서는 것도 사랑이 없기 때문에 생긴 문제였습니다. 약한 형제를 실족케 하는 것도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남보다 비범한 은사들을 소유하려고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도 결국 사랑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마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마7:16)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마7: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마7: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마7: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마7:20)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7: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성령의 은사들을 받아 선지자 노릇하면 최고라고 생각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능력을 행하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성경은 분명히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열매를 보라는 것입니다.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선지자 행위의 열매가 참 선지자면 참 선지자 된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참 선지자의 직분은 열매가 아닙니다. 선지자 직분을 행하면서 어떤 열매를 맺느냐에 따라서 그가 참이냐, 거짓이냐가 판명되고 귀신을 쫓아내었다고 다 된 것이 아니라 귀신을 쫓아내면서 어떤 열매를 맺었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진짜냐 가짜냐를 분별하는 것은 은사나 직분 자체가 아니라 그 주어진 은사와 직분을 따라 어떤 열매를 맺었냐에 달려 있습니다. 가짜 선지자, 가짜 목사, 가짜 집사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가짜도 얼마든지 귀신도 쫓아내고 능력을 행하기도 합니다. 진짜 성령의 열매는 "(갈5:22)...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5:23) 온유와 절제" 등입니다. 아무리 신령한 일을 행한다고 해도 성령을 쫓고 있지 않고 육체를 쫓으면 가짜입니다.


"(갈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육체를 쫓는 것은 무엇입니까?


"(갈5: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갈5: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갈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사도 바울은 삼층천을 올라갔다 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본 것을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아무에게도 그것은 유익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 본인으로 하여금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체험을 허락하신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이지 남에게 그것을 자랑하고 자신이 사도이며 선지자인 것을 증명 받고 이해시키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고전13: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은사와 그에 따르는 능력과 권능이 그 사람의 직분을 증명하거나 그 사람의 권위를 세워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나타내고 증명해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어진 성령의 능력과 권능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라고 주어진 것이지 자신의 직분을 증명하라고 주어진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자랑한 것이 있다면 오직 그 자신의 약함이었습니다.


"(고후11: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아씨시의 성프란시스는 제자들과 함께 금식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 번 금식을 한 사람들입니다만 40일 금식기도를 하기로 했는데 제자 중의 하나가 이런 제안을 했다고 합니다. 그냥 하는 것은 맥이 좀 빠지니까 먹을 것을 앞에 놓고 하자고. 그래서 매일 죽을 쑤어서 떠놓고 둘러앉아서 금식을 했습니다. 고약한 금식을 한 것입니다. 한 20여일이 지나서 그 제자 중의 하나가 배고픔을 못 참고 그 죽을 떠먹었습니다. 그 제자를 지켜보고 있던 모든 제자들이 그를 잡아먹을 것처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스승인 프란시스가 죽을 통째로 들고 마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금식하는 목적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금식은 회개를 통해서 거룩해지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금식을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할 것이고 잃어버린 하나님 형상을 회복하는 데 그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의 인격을 이룩하는데 금식의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신앙 생활이란 궁극적으로 예수의 인격을 이루어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룩하며 사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요 그리스도의 모습을 자신의 삶 속에 나타내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이 신령한 사람인 것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 이러한 삶을 사랑하는 것이 신령한 것입니다.


4. 사랑은 영원한 것입니다. 예언이나 방언이나 지식과 같은 은사들은 일시적이며 불완전하며 하늘의 완전한 것이 올 때는 폐하여질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면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히 어린 시절의 일을 버리게 되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성도들이 받는 지식과 예언, 그리고 방언과 같은 영적 은사들은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성취될 완전한 은사로 대치될 것입니다.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설 때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영원합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없어지지 아니하며 영원토록 그 효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인들처럼 예언과 방언과 같은 은사들에 집착하여 영원한 것을 잃어버리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현재의 모든 영적 은사들은 미래에 완성될 사랑에 비교할 수 없으며 종말에 가서는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할 불완전한 은사들을 자랑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며 견디는 소망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능케 하는 본질적 요소들입니다. 그러나 믿음과 소망보다 사랑의 가치가 더 큰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하나님 자신의 본질인데 비해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신앙적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인간이 스스로 성취해야 할 덕목들 중에 하나는 아닌 것입니다. 사랑이 위대한 것은 바로 사랑의 영원한 위대성입니다.


"(고전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5.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고전13: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전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우리는 우리의 원수들까지도 그들이 회개하며 예수 믿고 구원받기를 바라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서 성도로 부름 받거나 은사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 누구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 믿어 변화되어 구원받기를 바라는 사랑의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주님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원수들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던 것입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원수들에 대해 참으셨습니다. 그야말로 그분은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셨습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 아니라 상대방이 구원받을 때까지, 상대방이 변화될 때까지 성내지 아니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그의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그가 잘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사랑이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미국의 고전적 우화 작가 밀레가 쓴 <바보 위니>(Winnie the Fool)가 있습니다. 이 우화에는 네 명의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부엉이는 머리가 좋고 지식이 많아 자기의 지혜에 의지하여 행동하지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토끼는 활동적이고 계산에 밝지만 문제가 여전히 계속됩니다. 당나귀는 초조하고 급하고 모든 문제를 남의 탓으로 여기고 불평하지만 여전히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보스럽고 조롱 받는 위니는 기다리고 생각하여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임을 알기 때문에 늘어진 것 같아도 결국 문제를 해결한다는 이야기입니다.


6. 예수님은 이 세상에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질문을 던졌습니다. 계명 중에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것이냐는 것이었습니다.


"(마22:35)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마22: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마22:37).....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케 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께서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은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율법과 선지자의 완성은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율법을 다 지켜야 의롭게 되며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들이 말하는 율법은 좋아하는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義)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5: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5: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마5:40)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마5: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마5: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마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과 완성은 사랑이며,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로써 천국에 들어가려면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원수에 대한 사랑이 기독교인이 거쳐야 할 최고의 시험입니다. 그러나 유교의 경전 예기(禮記)에는 "불구대천지수"(不俱戴天之?,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란 뜻으로 반드시 죽여야 할 원수를 일컫는 말)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습니다.

부지수불여공여천(父之?弗與共戴天)

<아버지의 원수와는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 없고>

형제지수불반병(兄弟之?不反兵)

<형제의 원수를 보고 무기를 가지러 가면 늦으리>

교유지수부동국(交遊之?不同國)

<친구의 원수와는 나라를 같이해서는 안 된다>

즉, 아버지의 원수와는 함께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으므로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형제의 원수를 만났을 때 집으로 무기를 가지러 갔다가 놓쳐서는 안 되므로 항상 무기를 휴대하고 다니다가 그 자리에서 죽여야 합니다. 친구의 원수와는 한 나라에서 같이 살 수 없으므로 나라 밖으로 쫓아내던가 아니면 역시 죽여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정신은 무엇입니까? 교회 안팎에서 자신에 대해 호의나 적의 등 어떤 태도를 취하든 항상 사랑의 동기를 지니고 상대방을 대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 참 기독교인의 정신입니다. 바로 이것이 천국의 의입니다. 이 사랑은 단순히 느낌이나 감정이 아니라 실제 관심입니다. 사랑은 관심 대상의 최고 번영을 구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사도 바울은 사랑이 무엇인지, 사랑이 어떻게 역사(役事)하고 있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전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고전13: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고전13: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전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이처럼 실제 호의를 베풀고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한 청년이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상대가 된 처녀는 아름답기는 해도 아주 표독스럽고 잔인한 취미가 있는 여자였습니다. 처녀는 청년에게 나를 사랑한다면 그 증거로 당신 어머니의 심장을 가져다 달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에 눈이먼 청년은 망설이긴 했지만 결국 어머니에게서 심장을 빼앗았습니다. 그는 심장을 가지고 자기가 사랑하는 처녀를 만나기 위해 달려갔습니다. 달려가다가 그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심장이 그의 손에서 빠져나와 데굴데굴 굴러갔습니다. 그렇게 굴러가면서 어머니의 심장은 말했습니다.

"얘야, 어디 다치지는 않았느냐?"

사랑은 원수까지일지라도 그의 최고의 번영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 원수에게 구했던 축복이 저주로, 온유함이 폭력으로, 친절이 나쁜 것으로 원수에게 응답될 수 있습니다. 복수의 마음에서가 아니라 진정한 사랑의 관심 속에서 그렇게 했을 경우입니다. 사랑은 바로 천국의 의입니다. 그러므로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지만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는 영원한 것입니다. 사랑 없는 믿음은 냉랭하며, 사랑 없는 소망은 암담한 것입니다. 사랑은 믿음을 불태우는 불이며, 소망을 현실로 변화시키는 빛입니다. 꽃은 제아무리 화려해도 시들어 떨어지고 사라지지만, 그 열매는 영원한 것입니다. 기도로써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면서 사랑하지 않는다면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날이 되면 모든 은사는 없어지나 사랑의 열매는 영원히 남습니다. 기도로써 사람을 변화시키려고 하면서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변화되지 않습니다. 사단의 역사를 단절시키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기도의 능력은 알면서도 사랑의 능력을 모른다면 그 기도는 주문에 불과 한 것입니다. 원수를 이기는 비결이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매를 맞아도 핍박을 받아도 모든 일에 실패를 해도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기만 하면 성공자요 승리자요 행복한 사람입니다. 어려움과 사단의 대적이 강할 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감사하며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생활 속에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사랑을 실천하며 이 사랑을 노래하며 세상을 이기는 사랑의 실존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이동휘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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