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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를 믿음으로 묶으라 (마 6:25-34)

by 【고동엽】 2022.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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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를 믿음으로 묶으라  (마 6:25-34)    

우리 가운데 날마다 염려를 하지 않는 분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어떤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 약 절반은 내일에 대한 염려를 하고 있고 노후에 대한 불안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료는 피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반 정도가 염려하는 것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열이면 열 다 염려를 하면서 한 생을 살고 있습니다. 무엇을 염려합니까? 사람마다 염려하는 내용들이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 뿌리를 찾아 내려가 보면 예수님이 말씀에서 지적하신 것이 진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목숨을 위하여, 몸을 위하여, 목숨을 위하여, 몸을 위하여.' 다른 말로 말하면 생명의 안전과 건강, 이것이 우리 모두의 염려의 뿌리요, 중심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목숨과, 몸에 대한 특별한 염려를 오늘 지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염려의 강도가 높고, 어떤 사람은 약해서 심하게 염려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염려를 하는지 안 하는지 잘 모르고 있는데 은근히 밑바닥에는 염려의 통증을 갖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보면 이 염려라는 것이 아주 폭군처럼 우리를 괴롭힐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한때 60% 이상이 되던 중산층이 지난 3,4년 사이에 전부 무너져 버렸습니다. 아주 많이 가진 자, 부유층에서 가족들하고 한번 외식할 때 쓰는 돈을 가지고 모든 식구가 한 달을 살아야 되는 저소득층이 점점 더 늘어 갑니다. 체감 물가는 한해 사이에 두 자리 숫자로 뛰어 오르고, 사교육비는 점점 더 늘어나서 하늘이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녀 하나 교육시키는데 1년 사교육비가 평균 133만원이 든다는 최근의 보도도 있었습니다. 전세가 월세로 바뀌면서 탐욕에 눈이 어두워진 집주인들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을 겪습니까? 쫓기고 쫓겨서 변두리로, 아니면 지하 단칸방으로 전부 쫓겨 들어가는 일을 많이 봅니다. 신용불량자가 300만 명을 넘었다는 신문기사가 하루가 멀다 하고 나옵니다.

그뿐입니까? 우리의 목숨과 건강을 위협하는 가상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교통사고 세계 제 1위. 교통 사망자 세계 1위. 정말로 교통사고의 천국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1등인지, 2등인지는 잘 모르지만 자연이 얼마나 오염되었는지 전부다 90점 이상 받을 정도로 자연이 엉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우리가 매일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숨이 얼마나 위협을 받고 있습니까? 우리의 몸이 얼마나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까? 나 하나만 아니라 우리의 가족들이 어려운 상황에 노출되어서 매일매일 마치 줄타기를 하는 것 같은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런 형편에서 염려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뭔가 비정상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죽하면 그렇게 팔자 좋게 한 생을 산 솔로몬도 인생을 정리하면서 인생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평생 근심하면서 수고하다 가는 것이라고 정의했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염려는 인간됨의 실존이요, 참 모습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위대한 믿음의 인물들이 참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한분 한분을 뜯어 보면 그렇게 믿음이 좋은데도 염려를 하지 않고 한 생을 보낸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예를 들면 바울 같은 사람은 얼마나 믿음이 좋습니까? 그래서 자기의 교인들을 보고 아주 자신 있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구하기만 하라는 교훈을 할 정도로 대단한 지도자였지만 막상 자기가 염려를 해야 될 상황에 부닥치자 똑같더라는 말입니다.

에바브로디도라고 하는 자기 제자가 자신이 수감되어 있는 로마 감옥에 방문을 왔다가 병이 들었습니다. 소망이 없어 보일 정도로 많이 아팠습니다. 그럴 때 바울이 얼마나 근심을 했던지 나중에 에바브로디도가 하나님의 은혜로 쾌유를 받자마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바브로디도를 고쳐 주심으로 인해서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도다' 이 말은 자신이 근심하고 또 근심했는데 하나님께서 자기를 불쌍히 여기셔서 에바브로디도 고쳐 주심으로 근심을 하나하나 덜어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믿음이 좋은 위대한 지도자라도 근심에서 완전히 자유하지 못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볼 때 25절에서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공감이 잘 안갑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 하시는 말씀이 금방 마음에 와닿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염려 하지 않고 인생을 사느냐는 반응이 더 큰 소리를 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물론 이 염려는 순기능도 있습니다. 염려 때문에 남보다 더 열심히 일하려고 합니다. 염려가 있기 때문에 위험을 대비하기 위해서 긴장합니다. 염려를 하기 때문에 남보다도 더 열심히 뜁니다.  

그렇지만 염려를 이렇게 정당화 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 답지 못하며 예수님의 제자로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주시는 말씀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답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염려를 묶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왜 염려를 안 해야 되는지의 이유도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할렐루야. 우리모두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세상 모든 일을 다 제쳐 놓고 이렇게 나와서 예배 드리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잃지 말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다움을 보여주는 모습 가운데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귀를 열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통해 내 자신이 고침 받고 염려에서 자유함을 얻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의 제자로서의 모습을 회복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읽어보면 우선 먼저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염려는 안 할수록 좋다는 것입니다. 세 가지 이유를 들어서 말씀하십니다. '염려는 안 할수록 더 좋다.' 전혀 안 할 수는 없지만 안 할수록 더 좋다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로 염려는 해로운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참 중요한 교훈을 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못 섬긴다. 하나님도 사랑하고, 돈도 사랑하고 그러지는 못한다. 하나님 사랑하면 돈을 덜 사랑하게 되고, 돈을 사랑하면 하나님 미워하게 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절대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 우리의 마음을 양쪽으로 똑같지 주지는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선택하라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나서 25절에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해 놓고는 갑자기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면 어떻게 앞 뒤가 이어지는가 하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여기에 아주 깊은 진리가 있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돈에 마음을 두기 시작하면 드디어 염려의 종이 되어 버린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하여튼 돈에 마음을 한번 주면 틀림없이 염려에 끌려 다니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염려는 배금 바이러스가 일으키는 열병입니다. 돈을 숭상하는 자는 반드시 그 열병에 걸립니다. 얼마나 위험한지 모릅니다. 심하면 죽습니다.

잠언 17:22절입니다. '마음에 근심은 뼈를 썩히느니라.' 뼈가 썩어 들어가고, 말라가는 병이라면 얼마나 치명적인 것입니까? 근심을 하고 염려를 하면 그것이 우리를 그렇게 병들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21장 34절에, 말세가 되면 성도들이 빠지기 쉬운 악이 세 가지 있다고 합니다. 그 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우리로 하여금 영적으로 깊이 잠이 들도록 만들어서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조차 하지 못하게 하다가 나중에는 주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도록 만들 위험이 있는 악이라고 합니다. 그 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첫째는 방탕이요, 둘째는 술 취하는 것이요, 세 번째는 염려라고 합니다. 우리는 방탕은 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술에 취하고 알코올에 중독 되면 벌써 인간다움을 이미 포기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염려가 방탕과 맞먹는 악이라고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까? 그만큼 염려는 해로운 것입니다. 누구든지 돈에 마음이 빼앗기면 이 염려가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병들게 합니다. 영과 육을 망칩니다. 해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 할수록 좋은 것입니다.        

두 번째로 염려는 무익하기 때문에 안 할수록 좋습니다. 해봐야 소용이 없고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27절에 유명한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하므로 그 키를 한자나 더할 수 있느냐' 키 작은 사람에게 염려 주사를 놓는다고 해서 한번에 한자나 자라는 것을 보셨습니까? 아무도 염려해서 키가 자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본문은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합니다. '염려한다고 해서 네 생명을 한자나 더 늘릴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염려해서 생명을 1년 연장할 수 있고, 2년 연장 할 수만 있다면 염려만 잔뜩 하고서 1000년도 살 수 있지 않습니까? 누구나 그것이 소용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이렇게 염려는 무익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염려를 재미있는 사실에다 비유했습니다. 자동차에 앉아서 기어를 중립에 놓고 시동을 건 다음 엑셀레이터를 밟아 대는 것입니다. 기어를 중립에 놓고 엑셀레이터를 밟아 보십시오. 소리는 요란합니다. 엔진은 나 죽는다고 돌아갑니다. 기름은 펑펑 들어갑니다. 그러나 차는 한치도 안 움직입니다. 에너지만 소비합니다. 소음만 요란합니다. 염려가 무엇입니까? 꼭 기어를 중립에 놓고 엑셀레이터를 밟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사람만 요란합니다.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육신적으로 모든 에너지만 소모돼 버립니다. 그러니까 무익한 겁니다. 쓸모 없는 겁니다. 그걸 왜 해야 됩니까?

오래 전 일입니다. 미국에서 한때 유명했던 감리교 목사, 웰치 감독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 분이 그 당시로서는 드물게 101세 생일을 맞게 됐습니다. 101살 생일이니 대단하지 않겠습니까? 기자들이 모여 축하하면서 기자회견을 했는데 이때 기자들이 이렇게 물었답니다. "목사님, 101살이십니다. 남은 생을 생각하면 걱정이 안되십니까?" 그랬더니 그 목사님이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나는 30년 전 70대에 은퇴를 했는데 그 때서야 비로소 깨달은 중요한 진리가 하나 있다네. 나는 일평생 살아오면서 부끄럽지만 목사로서 매일 염려를 끌어 안고 살았어. 날마다 염려하고 근심하며 살았는데 나중에 은퇴할 때 가만히 보니 내가 평생에 끌어안고 씨름한 것 중에 실제로 일이 터진 것은 거의 없었어." 터지지도 않는 문제를 놓고 평생을 씨름하면서 염려한 것이 태반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쓸데없이 염려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이런 과거를 돌아보면서 교훈을 받았기 때문에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 모르지만 앞날에 대해서 걱정 안 하기로 했어." 해봐야 소용없는 염려를 왜 합니까? 그렇다면 하지 않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세 번째로 염려는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에 안 할수록 좋습니다. 34절을 읽어 보십시오. 제일 끝에 있는 구절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너무나 유명한 말씀입니다. 내일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직 나에게 이르지 아니한 시간입니다. 내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내일입니다. 아직 이르지도 않았고 내 것도 아닌 시간과 날을 놓고 걱정 한다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짓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헨리 나우웬이, 재미있는 표현을 했습니다. 염려한다는 건 뭐냐. '아직 내 앞에 오지도 아니한 시간과 장소를 무언가로 가득 채우려고 하는 것이다.' 말을 바꾸면 '마음이 혹시로 가득찬 것이다.' '혹시 암에 걸리지 않을까, 혹시 자동차 사고가 나지 않을까, 혹시 실직하지 않을까, 혹시 시집 못 가면 어쩌나, 혹시 학교 간 애가 안 돌아 오면 어떻게 하나' 이런 식으로 아직도 오지 아니한 시간과 장소를 가득 채우는 것이 염려라는 말입니다. 얼마나 멍청한 짓입니까? 이런 '혹시'가 내 마음에 염려로 자꾸 차 오르기 시작하면 불안해지고, 두려워지고, 의심이 많아지고, 탐욕이 생기고, 조급해지고, 나중에는 우울해져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고통은 이와 같은 쓸데없는 염려와 깊은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삶을 망가지게 만듭니다. 우리 안에서 자유롭게 호흡하시고 우리의 영혼을 날마다 새롭게 창조하시고자 하는 성령의 발목을 잡아 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비참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아직도 나에게 오지 아니하는 내일을 놓고 왜 그렇게 염려해야 합니까?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의 시구 가운데 유명한 시구가 하나 있습니다. '이런 자만이 행복하리라. 오늘을 내 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만이 행복하리라.' 옳은 말입니다. 염려는 오늘로부터 나의 행복을 앗아가는 강도입니다. 주어진 오늘도 제대로 살 줄 모르면서 내일을 끌어안고 씨름하고 염려한다는 것은 바보짓입니다. 여러분 스스로를 잘 돌아 보십시오. 이처럼 염려라는 것은 하지 아니 할 수록 좋습니다. 해로운 것이요, 쓸데없는 것이요, 무익한 것입니다. 이런 것을 왜 해야 됩니까?

이런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맞았어, 옳은 말이야.' 하면서 고개는 끄덕끄덕 하는데 문제는 내가 공감하는 이 진리가 내 마음으로 전달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머리에만 남아 끄덕끄덕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는 염려가 제 집 드나들듯이 드나드는 것입니다. 굉장히 좋지 않은 현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머리로 인식을 하고 확인했으면 그 말씀에 능력과 감동이 내 가슴으로 전해져야 됩니다. 그리고 내 마음에 뿌리를 내려야 됩니다. 그래서 내 인격과 삶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서 염려로부터 자유 하는 축복을 누려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말씀을 바로 들은 것인데 머리만 끄덕끄덕 해 가지고는 안됩니다.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 속에 뿌리를 내리도록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해롭고 쓸데없고 무익한 염려를 오늘까지 끌어안고 자식처럼 끼고 앉아서 내 놓지를 않는 이런 바보 같은 짓은 내가 안 하겠다. 주여, 옳습니다. 이 염려로부터 내가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주여 이 염려를 묶어서 꼼짝 못하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한다면 성령께서 이 시간 우리를 도와 주실 줄 믿습니다. 이제 중요한 그 다음 메시지를 들으십시오. 염려를 묶어 놓을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이 너무 험하기 때문에 우리가 염려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리지는 못하지만 염려가 함부로 날뛰지 못하도록 묶어 놓을 수는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묶어 놓을 수 있는지 주님의 말씀이 이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 비결은 믿음입니다. 세 가지 믿음입니다. 세 가지의 믿음이라고 하는 쇠사슬로 염려를 콱 묶어 놓고 꼼작 못하도록 만들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믿음은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의 믿음입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잘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 성경 말씀을 그대로 따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염려하는 그의 제자들을 보고 하시는 말씀을 잘 들어 보십시오.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저 새는 심지도 않고 추수도 않고 곡간에 쌓아 두지도 않았어. 그러나 너희 천부께서 다 기르시고 먹이시지 않느냐." 또 염려하는 제자들 보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나라의 백합화는 길쭉하고 보기 싫은 꽃이지만 유대나라 백합화는 새빨간 것이 얼마나 이쁜지 모릅니다. "들에 저 백합화를 봐라. 저렇게 아름다운 백합화에 누가 저렇게 옷을 잘 입혔냐. 하나님이 입히셨다." 30절을 보십시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플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공중에 새도 먹이시는 하나님, 들에 백합화도 입히시는 하나님이신데 하물며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 두시겠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자료를 보니 지구상에 있는 조류가 약 1000억 마리 정도 된다고 합니다.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 새들이 어떻게 매일 먹고 사는지 상상이 잘 안갑니다. 우리나라에 절기 따라서 왔다갔다하는 제비에 대해서 어느 교수가 연구한 자료를 보니, 제비는 새끼에게 하루 100번 이상 먹이를 갖다 준다고 합니다. 숫놈과 암놈이 번갈아 가면서 곤충을 잡아다가 100번 이상 먹인다고 합니다. 그러니 하루에 줄잡아 7000마리의 날파리 곤충을 갖다가 새끼에게 먹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끼를 키우는 3주간 동안에는 무려 15만 마리를 먹이는 것입니다. 우리 보고 그렇게 제비에게 먹을 것을 주라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제비가 한 두 마리입니까? 하나님이 그 모든 날짐승을 다 먹이고 키우신단 말입니다. '그 전능하시고 부유하신 하나님이 날짐승도 먹이고 키우는데 하물며 나일까 보냐,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이 믿음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날짐승을 먹이시는 하나님, 들판에 있는 풀도 키우시는 하나님. 그것에 비해서는 너무나 중요한 우리를 가만히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믿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를 볼 때마다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십니다. 너무 사랑 받는 자녀이기에 우리에게 있는 모든 악과 죄와 모든 범죄를 예수의 십자가로 깨끗이 씻으시고, 이제는 죄와 흠이 하나도 없는 거룩한 자기 자녀들처럼 날마다 보시면서 그 머리터럭도 다 세시고, 눈동자 같이 지켜 주시고, 어디를 가나 동행하시고 모든 기도를 귀담아 들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소중한 존재입니까? 공중에 새도 저렇게 먹이시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소중한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절대 그럴 수가 없을 것이다.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이 믿음을 가지면 염려는 힘을 잃어 버립니다.

염려가 끼어 들어 와서 나를 괴롭힐 때마다 창문을 열어 제끼고 나무 위에서 지저귀는 새를 한참 바라보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회상하십시오. '저 새를 하나님이 저렇게 먹이고 입히시네요. 하나님,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입니까? 저는 지금 실직했습니다. 가족들이 딸렸습니다. 염려가 나를 짓밟아 놓으려고 합니다. 하나님, 나에게 믿음 주십시오. 너희일까 보냐의 믿음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십시오.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믿음대로 인도해 주신다고 저는 믿습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믿어야 됩니다. 믿음이 염려를 묶어 놓습니다.

두번째로 '있어야 할 줄을 아느니라.'의 믿음입니다. 이것도 이상하게 생각할 지 모르지만 성경에 있는 그대로 기억하기 위해서 이대로 부칩니다. 32절을 한번 보세요. 31절에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고 해 놓고는 32절에 가서 '이러 것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있어야 할 줄 아신다고 하는 믿음은 하나님이 내 사정을 다 알고 계심을 확신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방인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이방인이 누굽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귀신을 섬기고, 우상을 섬기고, 어떤 면에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악한 자들이 아닙니까? 우리 주변에 예수 안 믿는 많은 사람들,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이 다 이방인입니다. 그들을 한번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 아시고 얼마나 골고루 공급해 주십니까? 5장 4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악한자들에게 비를 주시고 해를 주셔서 악인과 의인을 구별하지 아니하시고 다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5장 45절은 우리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비록 이방인이더라도, 악인이라도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이라도 다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다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사랑하는 자녀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모르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염려가 몰려오면 길에 나가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리고 마음으로 이렇게 외치십시오. '하나님, 저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참 건강합니다. 좋은 자동차도 타고 다니지 않습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제가 아는데 좋은 집에 살지 않습니까? 하나님, 저런 사람에게 다 무엇이 있어야 할 줄을 알고 주셨는데 하물며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다고 저는 믿습니다.' 하고 스스로 한번 장담해 보십시오.

최근 신문에도 났습니다만 포르노 잡지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정말로 인간을 더러운 음란의 쓰레기통에다 집어 넣는데 공헌을 한 플레이보이지 창업주 헤프너라고 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생각 같으면 천벌을 받아서 30살도 못 살 것 같은데 지금 75세 생일을 맞았어요. 한때는 뇌졸증에 걸려서 다 죽어 간다 했더니 완전히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지금도 20대 미녀를 7명을 데리고 같이 삽니다.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가 생각을 해야 됩니다. '하나님, 저 보십시오. 헤프너도 필요하니까 전부 다 주시지 않습니까? 건강 주시지, 장수하게 하시지, 여자도 하나로는 모자라 7명이나 붙여 놓고 살게 하시지. 다 주시면서 하나님의 자녀인 나를 그대로 두시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필요한 것 다 아신다고 저는 믿습니다. 반드시 때가 되면 주신다고 믿습니다'. 하고 소리를 지르십시오. 그 믿음이 내 안에서 소리를 지르는 이상 염려는 꼼짝 못합니다. 그 믿음이 그 염려를 묶어 놓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마지막 세 번째 믿음입니다.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의 믿음입니다. 33절은 다 외우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는 믿음은 좋은 믿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때를 따라 필요한 것을 구하지 아니해도 다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좋은 믿음입니까?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는 말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렇게 바쁜 세상에서도 시간 내서 주님 앞에 나와 경배하고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찬양하는 예배가 너무 소중한 줄 알고 모든 들판으로 나가고 싶은 유혹을 끊어 버리고 함께 모여서 예배 드리는 이 생활 자체가, 행동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기도문에 나오는 말씀대로 '하나님이여 어떻게 하면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온 땅에 영광을 받으실 수 있습니까?' 하는 관심을 갖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 이땅에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하는 소원을 갖고 사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완성되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영원한 영생을 누리도록 하신다는 그 아름다운 약속을 붙들고 그 날의 청사진을 가슴에 품고 꿈을 꾸는 삶이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구한다는 말을 주의하십시오. 가만히 앉아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노력해야 됩니다. 훈련해야 됩니다.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 악한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가만히 앉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 직장을 나갑니다. 똑 같은 생활이 반복 됩니다만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자의 태도는 다릅니다. 조금이라도 일찍 일어나서 아무리 바쁘고 쫓기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펴 놓고 골방에 들어가 "하나님, 오늘 나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내 스케줄은 이렇습니다. 이 스케줄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확장되기를 원합니다. 나를 사용해 주시고 하나님의 뜻에 나를 일치시켜 주십시오." 하고 단 5분, 10분이라도 기도하고 일어나는 노력을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사람답게 살려고 하는 노력, 이것이 영적이 삶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관심사와 우리의 관심사를 일치 시키고 우리의 삶의 무게를 하나님의 나라에다가 두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항상 제일 먼저, 내가 좋아하는 것은 제일 뒤에' 하는 식으로 우선 순위를 바로 정하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는 나의 젊음과 나의 인생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우리교회 교구장들이 양화진에 있는 선교사 공동묘지에 다녀왔습니다. 가서 보기만 해도 은혜가 됩니다. 그 미개한 한국나라, 100여년 전에 이 땅에 찾아온 위대한 선교사들. 20대 꽃다운 처녀로 찾아 와서 복음을 전하다가 몇 년 안 되서 20대에 세상을 떠난 처녀 선교사의 묘지에 뭐라고 적혀 있는지 아십니까? '나는 다시 100번을 태어나도 한국에 복음 들고 올 것이다.' 바로 이런 자세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 헌신된 자세입니다. 어떤 선교사는 42살에 복음 전하기 위해서 배 타고 가다가 물에 빠져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묻혀 있는 묘지에 가보면 그날 낳다가 그날 죽은 아이도 있습니다. 태어난 날과 죽은날이 똑같습니다. 그 당시 의료시설이 전혀 없었습니다. 애가 태어 나서 문제가 생기면 손을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어났다가 그냥 죽은 것입니다. 이 나라에 복음을 위하여 전부 썩는 밀알로 다 희생된 거룩한 생명들입니다. 이렇게 자기 생명을 주를 위해서 바치기를 헌신하는 것, 이것은 곧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평범하게 주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던지, 완전히 헌신하고 주의 나라와 의를 구하던지 간에 주님의 나라를 구하면 하나님이 약속하십니다. "이방인들이 날마다 걱정하는 것, 내가 다 매일매일 공급해 주겠다. 너희는 내 나라를 걱정하라. 나는 너희들을 걱정하마. 내가 너희들을 걱정하면 너희는 염려 하지 않아도 돼.' 하시는 말씀입니다. 한 두 번 말씀을 드린 일이 있습니다. 홍해 선교회를 만들어 한평생 중동지역 회교권에 가서 헌신하다가 세상을 떠난 거니 박사가 있습니다. 선교사입니다. 캐나다 사람이고 의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정 때문에 결혼도 하지 아니하고 저 중동 사우디아라비아 이란을 갔습니다.

거기는 드러내 놓고 복음도 못 전합니다. 비밀리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삽니다. 평생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알라알라알라' 하다가 죽는 그 사람들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러니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갔는데 내 놓고 복음 전하지 못하니까 1년 내 가도 열매가 하나도 없을 때가 수두룩한 것입니다. 한국에 오셨을 때 제가 만났습니다. 그가 나에게 편지 하나를 주었습니다. 사우디에서 온 편지입니다. '선교사님, 제가 예수 믿는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면 제 등에 칼을 꽂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가족들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기뻐요. 예수님 믿었기 때문에 구원 받은 것이 너무 기뻐요." 얼마나 가슴이 뭉클했는지 모릅니다.

점심시간에 둘이서 같이 식사하다가 제가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거니 박사님, 40여년 동안 중동에서 선교생활 할 때 뒤에서 후원하는 선교단체가 어느 곳이었습니까? 어느 단체가 후원했나요?" 그랬더니 저를 한참 쳐다 보신 후 하시는 말씀이 "내 후원단체는 마태복음 6장 33절입니다."라고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나는 이 약속을 믿고, 이 말씀을 붙들고 중동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지난 40년 동안 하나님이 한번도 굶어서 끼니를 거르도록 하시지 않았고, 한번도 옷이 없어서 헐벗고 다니도록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했더니 하나님이 필요한 것 때를 따라 항상 주셨습니다." 하고 간증을 했습니다. 얼마나 제가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저는 그 당시에 교회를 개척하고 고생을 한참 할 때인데, 아 그렇게 놀라운 간증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이 말씀이 진리인지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더하시리라 하는 믿음을 가지면 염려는 묶어 놓을 수가 있습니다.

초대교회 문헌을 보면 그 초대교회 성도들이 별명처럼 자기 이름 앞에 붙이고 다니는 말이 하나 있었습니다. 티테디오스라고 하는 말입니다. 티테디오스는 염려에서 해방된 사람을 뜻입니다. 초대 교회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식합니다. 가난합니다. 그들의 삶에 무슨 인간적인 기쁨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나서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그들이 보고 나서부터는 그들의 가슴이 얼마나 은혜로 충만했는지 모릅니다. 한 생을 주님의 복음 위해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이 종사하는 모든 생업을 통해서 자기들이 몸담고 있는 가정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지도록 최선을 노력을 다 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로마가 그들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전세계 복음이 증거 될 수 있도록 발판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이렇게 헌신된 삶을 살자 염려가 다 날라 가는 것을 알았습니다. 염려에서 해방되니 이것을 좀 자랑하고 싶어서 테테디오스 베드로, 티테디오스 요한, 티테디오스 도마 하고 이름을 붙이고 다녔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아무리 염려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현실이라 할지라도 티테디오스 옥하면 얼마나 신납니까? 여러분 한번 해 보십시오. 티테디오스 자기이름 한번 불러 부십시오. 티테디오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모습은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염려에서 자유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새롭게 볼 수 있는 세계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믿음의 세계입니다. 죠지 뮬러가 말한 것처럼 '믿음의 시작은 염려의 끝이요, 염려의 시작은 믿음의 끝이다. 그러므로 염려하느냐, 믿음이 죽는다. 믿음을 가지느냐, 염려가 죽는다.' 옳은 말 아닙니까? 그러므로 말씀 드린 세 가지 믿음을 가지십시오. 첫째는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하는 믿음입니다. 두 번째는 더하시리라의 믿음입니다.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모든 것이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세 번째는 무엇입니까?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하는 믿음입니다. 집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묵상하십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가운데 상당수는 교회에 오시면서 염려한테 끌려 오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믿음으로 염려를 꽁꽁 묶으십시오. 그리고 질질 끌고 가십시오. 끌고 집에 가서 저 뒤에 있는 창고에다가 집어 넣어 버리십시오. 가두어 버리십시오. 자물통을 잠그십시오. 여러분에게 이와 같은 변화가 안 일어나면 오늘 말씀을 들은 효과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이 시간 믿음을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이런 담대한 믿음 주셔서 염려가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염려 없이는 도무지 하루를 살 수 없는 불안한 세상에 살지만은 티테디오스. 염려에서 해방된 사람으로 세상 앞에 우리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도록 우리 모두 기도하고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염려를 묶어서 끌고 가십시오.


출처/옥한흠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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