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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배로운 믿음 (벧후1:1-4)
베드로전서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초대교회 성도들은 여러 가지 곤경과 문제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해 주고, 힘이 되게 하려고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베드로후서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살고 있던 그 당시의 세상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비슷한 점이 너무 많습니다. 그들은 안팎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영적인 견지에서 이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이 세상 삶의 근본적인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어떤 일들을 심각하고 중대하게 느낍니다. 그러면서 2천년 전의 사람들이 직면하고 있었던 환경은 우리와 달리 아주 사소한 것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오늘의 문제들이 우리에게 심각한 것처럼, 그 당시 사람들이 겪었던 문제들은 그들에게 심각하고 진지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사는 양식이 달라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세상은 고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의 사람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에 직면해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었지만, 그들은 아마도 처음에는 그 복음을 부분적으로 오해하여, 자신들의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것이고 더이상 문제에 직면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에게는 반대가 있었고, 핍박이 있었고, 시련이 있었고, 심지어 음식물과 의복에 있어서까지도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런 것 외에도 교회 내부로부터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는 이 문제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언제나 부딪치게 되는 것은 불신이라는 문제입니다. 이 베드로후서의 위대한 메시지가 믿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흔들고 있었던 여러 가지 요소들에 대항하여 힘을 얻게 하기 위해서 쓰여진 것임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어려움이 심해지면 마음속에 의심이 생기기 쉽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약속의 가치에 대한 의문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베드로후서를 읽으면서 염두에 두어야 할 배경입니다. 이 편지는 외부로부터의 어려움에 포위되어 있고 동시에 내부로부터의 어려움에 의해서 공격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쓰여졌습니다.
저는 이 편지가 지금의 우리 상태와 조건에 참으로 잘 맞는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지적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움이 많은 때에 가장 빠지기 쉬운 죄는 아마도 낙심의 죄일 것입니다. 그래서 의심과 공포에 빠지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처지를 확실히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굳게 섰으나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심리를 잘 파악한 말입니다.
이 세상은 죄로 가득합니다. 세상에서는 죄밖에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놀랄 것이 전혀 없습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 그리고 그리스도 밖에 머물러 있는 한, 그와 같으리라는 것이 성경의 근본 가르침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처지에 대해서 분명한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 세상에 대항할 수 있겠으며 세상이 우리를 보고 어떻게 죄를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과거 위대한 교회 부흥의 역사가 우리에게 아주 분명히 보여주듯이 교회 자체가 살아 있는 것이 부흥의 첩경입니다. 그래야 교회는 언제나 세상에 강력하고 힘찬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이 편지의 목적입니다. 여러분은 베드로가 어떻게 이 첫 장의 한 구절 안에 그것을 나타내고 있는지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복음이 이런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두 가지 중요한 일이 아주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 하나는, 그들은 반드시 그들이 믿고 있는 것을 절대적으로 확실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의 근거와 기초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그 확신 안에서 자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 요점은 이렇습니다. 베드로는 이 처음 두 절 말씀에서 모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편지 전체는 그가 처음 말했던 것을 부연하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은 자신이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지를 반드시 알고, 그 다음에 그것에 덧붙여 그것을 증가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전부입니다. 우리는 시작할 때의 확실함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 주제를 계속 설명해 나아가면서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하면서 이 편지를 마쳤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그리스도 예수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서 계속 자라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토대를 확실히 하는 것입니다. 교회나 성도가 토대가 불확실하고 튼튼하지 못하면 그 교회는 세상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진리입니다. 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 진리, 이 토대, 이 믿음이 강조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나 자신이 어디에 서 있으며 누구를 믿는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가 맨 처음 강조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직 한 믿음입니다. 베드로전서에서도 보여주듯이 그때 예수를 믿는 사람 가운데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많은 이방인들이 있었습니다. 믿음은 인간의 모든 계층과 모임과 부류에 관계없이 똑같습니다. 이것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중심이며 근본적인 영광 가운데 하나입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10장 34절에서도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복음은 온 세계가 하나로 이루어져 있으며 하나님과 대면하고 있다고 선언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 그리고 우리가 복음과 마주치게 될 때, 우리의 과거는 어떤 의미에서는 아주 관계가 없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유대인도 이방인도, 종도 자유자도 없습니다. 중간에 막힌 담이 모두 헐렸고, 유능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학식이 있거나 없거나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권력이나, 사회적 지위나, 부나 이런 모든 것이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오직 보배로운 믿음만 있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사도들의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 보배로운 믿음을 사도들과 같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이 편지가 쓰여진 때나 지금이나 한 가지입니다. 이 시대가 변했다고 복음이 변했거나 달라진 것은 전혀 없습니다.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같이” 받은 것입니다. 거의 2천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세월은 우리의 처지를 전혀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오직 한 믿음만이 있고, 오직 한 복음만 있으며 지나가는 모든 세월은 그것에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복음은 영원하고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복음이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이 질문에 대답을 줍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가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두고 있음을 보시게 되실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기본이 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기본 요소들이 잊혀져 가고 있는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했습니다.
무엇이 믿음입니까?
우리는 분명히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서는 이 질문에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가 그분을 얼마나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까? 베드로의 편지의 시작인 이 말씀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없는 복음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요사이 어떤 기독교 운동은 그리스도가 중심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교도 하나님을 믿고, 마호멧 교도도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 베드로가 말하는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편지 서두에 그리스도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믿음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인격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좀더 자세히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위대한 교리를 말했는데, 베드로는 이 구절에서 자기 나름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복음의 메시지는 인간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워질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의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께 의롭게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가서 그를 믿는 것은 분명히 올바른 일입니다. 그러나 첫 번째 질문은 어떻게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절대적이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리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구약의 율법은 우리가 이런 저런 일을 하면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비극적인 일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행하려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의롭게 되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께 의롭게 될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그 새로운 삶을 살 수가 있습니까? 나는 계명들을 읽고 그것들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의롭게 되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나 자신의 노력과 수고로써는 절대로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그렇게 할 수가 있다고 믿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정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된 믿음”입니다. 사도들이 그 당시에 세상에 전파했던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시며 그는 오직 한 가지 일을 위하여 세상에 오셨고, 그 일은 바로 그 자신이 인간의 죄를 짊어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의 죄를 처리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의 죄를 벌하시고, 없애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죄를 씻는 것은 예수의 피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께 의롭게 될 수가 있습니까?
우리 스스로는 의롭게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써 옷 입혀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서 그와 그의 의를 대면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할 일은, 인간은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으며, 그들의 모든 수고와 노력은 결국 무력하게 끝나게 될 것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의의 새로운 방법 다시 말하면 “믿음에 의한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보면 “보배로운 믿음”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첫 번째 편지에서도 이 말씀을 사용했고 나중 편지인 여기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보배로운”이란 말은 어떤 의미에서는 생명 자체보다도 훨씬 더 귀중한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왜 보배롭습니까?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은 믿음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 없이 설 수 있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보배로운 믿음입니까? 돈이 우리 마음에 참 평안을 줄 수 있습니까? 학식이 줄 수 있습니까? 권력이 줄 수 있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그것을 나에게 줄 수가 있습니다.
믿음이 또 무엇을 우리에게 줍니까?
우리를 성화의 단계로 이끌어 줍니다. 성화가 무엇인데요? 성화는 내가 율법적인 의미에서 죄가 없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내게서 흠과 티와 모든 허물을 제거해 주시기 위해서 성령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시고 계신다는 이 복음의 보배로운 약속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 위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영화의 단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영화가 무엇인데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완전한 상태로 서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사도 요한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장차 어떤 존재가 될지 아직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뵐 때 그와 같게 되리라는 것을 압니다.
성도들의 영화는 그들이 이 세상에서 빠져 나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것이며 결국은 영원히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바로 이런 것을 가져다주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렇게 될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음을 믿음으로 압니다. 바로 믿음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영원히 살게 될 것을 압니다. 이 얼마나 보배로운 믿음입니까?
그런데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우리를 바라보시고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 것도 우연히 우리가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우리를 붙잡고 지금도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우리 자신은 하찮은 존재이지만 빛의 아버지시며 모든 능력과 권력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관심을 두시고 우리를 알고 계시며, 우리를 위해 염려하고 계시고, 그의 권능의 손을 우리에게 얹으셨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믿음은 정말 보배롭습니다.
이 믿음은 우리가 거듭나서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여러분은 이 보배로운 믿음을 가지고 계십니까? 스스로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사도가 말한 것처럼 그 믿음은 우리를 마음의 평화, 하나님과의 평화, 모든 사람들과의 평화로 이끌어 줍니다. 그러므로 이 믿음이야말로 참으로 놀랍고 보배로운 믿음인 것입니다.
또한 사도는 토대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누구든, 어디서 왔든 상관이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모든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없다면 보잘것없는 자이지만 그리스도 안에만 있으면 완전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전부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 안에 계시며 모든 것이 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우리 영혼에 대단히 “보배로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놀라운 일을 행하셨으며, 지금도 행하고 계시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행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얼마나 보배롭습니까?
이제 베드로 사도는 믿음 안에 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건물에 이상이 있으면 기초를 조사해 봐야 하고, 줄기에 이상이 있으면 뿌리를 조사해 봐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닙니다. 이 복음을 믿고 그 믿음을 갖게 된 결과로 우리가 은혜와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제 베드로 사도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은혜와 평강이 믿는 사람에게 더욱 많아지고 그들이 성장하고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말씀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3절을 보세요.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위해서 행해진 것이 무엇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소유해야 하고 살아가야 할 생활의 성격과 유형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란 무엇입니까? 베드로 사도는 여기서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기도 중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최고선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앎이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골로새서 1장에서도 같은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 드리는 것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확신하고, 하나님께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장해야 하는 이유도, 하나님을 아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최상의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만 멈춰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같아져야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4절 말씀을 보세요.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베드로의 생각은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가 하나님과 같이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입니까?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사람,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특성을 나타내야 합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하여 우리가 부름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살아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완벽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죄라는 것이 들어와 인간을 부패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타고난 삶의 특징은 정욕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인간은 그저 “그것을 내가 좋아하는가”라고 묻습니다. 베드로의 말대로 썩어질 것을 위해 삽니다. 신문을 보세요. 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이 그 내용입니다.
이제 복음이 하는 일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그렇게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잊어가고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다른 일들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가 이렇게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알게 하고, 우리가 안팎으로 썩어 있음을 알게 하며,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가고 있음을 알게 해 줍니다.
여러분은 바울이 에베소교회를 위하여 기도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그들의 이해의 눈이 밝아져 그들이 어떤 것들을 알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멋대로 놓아두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되고 만들어진 하나님의 솜씨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셨고, 성령께서 역사하신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우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좋아합니까? 우리는 그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한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으면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낸다면 우리의 생활을 통하여 죄로 가득 찬 이 세상을 깨우치고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보배로운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세상의 빛된 생활 다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박조준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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