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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몸과 마음 (로마서 7:19~25)
사람은 누구나 마음을 가지고 있다. 사람의 몸은 그 형상이 육체로 남아 있기에 보고 알 수 있지만 마음은 손으로 만질 수도 없고 코로 냄새를 맡을 수도 없다. 무게를 다를 수도 없고 모양을 알 수도 없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분명히 존재함을 알고 있다. 마음은 몸으로 드러난다. 우리는 마음을 갖고 있다. 내가 갖고 있는 마음을 내 마음이라고 한다. 나의 마음이 내 마음이라면 내가 내 마음을 자유자재(自由自在)하게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관리하고 지배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없음을 알게 한다. 이것은 내 마음이면서 내 마음이 아님을 알게 한다. 우리의 이성과 의지가 한계에 있음을 아는 것이다.
동서고금의 많은 구도자들이 정신수양에 관심을 가진 것도 여기에 연유(緣由)함을 알게 한다. 실례를 들면 원효대사는 한국불교의 최고의 존재로 40세 때 중국 유학의 길을 가던 중 산속의 토굴에 들어가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마침 목이 갈(渴)하여 캄캄한 밤중에 옆에 놓인 바가지에 물이 있음을 알고 그 물을 마셨다. 그 물맛은 감로수(甘露水)처럼 시원하고 맛이 있었다. 그런데 하룻밤을 지낸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어제 밤에 먹은 물이 해골바가지의 물인 것을 보고 구역질이 나온 것이다. 똑같은 물이 어제 밤에는 잘 마셨는데 아침에 일어나 그 물을 보니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하는 의문에서 그것은 사람의 마음에 문제 있음을 깨닫게 된다.
동일한 물건이나 현상이 자기의 마음에 따라서 그 몸에 이상이 달라진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모두가 사람의 몸을 다스리는 마음의 문제임을 아는 것이다. 몸을 상대한 세상의 모든 것은 마음의 산물임을 알게 한다. 마음이 몸의 주인이요 마음이 사람의 관리자임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몸의 행동은 다 마음의 표현이다. 성서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나라는 내 마음속에 있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하늘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우선(于先) 우리는 기도와 믿음으로 마음을 회개하고 정결케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의 산상수훈에서 첫 번째로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라고 함에 유의한다.
그러므로 몸(육체)과 마음(영혼)은 일원이다. 예컨대 포도주가 포도주병에 담겨 있다고 가정해 보면 포도주병에 담겨 있는 포도주가 핵심이고 포도주병은 포장임을 아는 것이다. 사실로 포도주가 포도주병에 담겨 있는데도 미리 버리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 포도주병의 용도는 포도주가 비워질 때까지 포도주병의 가치를 살려야만 하는 그 병의 쓰임이기에 쓰이기 전에 버리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 됨을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몸과 마음은 그와 같은 관계가 있음을 아는 것이다. 흔히 죽음을 말할 때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상태를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손가락 하나 움직이려면 마음이 작용한 후 실제로 몸의 작용이 동시에 작동함을 아는 것이다. 몸과 마음을 분리해서는 아니 된다.
몸과 마음을 하나 되게 해야 존재의 의미를 갖는다. 몸과 마음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사상의 여명기 이래로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의 관심을 사로잡아 왔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예전보다 더 해결 상태에 가까워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모든 철학의 핵심 문제로 지적되어 왔으며 따라서 인식론, 윤리학, 종교, 모두가 공통적으로 기본적인 문제로 남아 있음을 아는 것이다. 마음의 연구를 위해 심리학은 마음의 구조와 본질의 법칙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여기에 프로이트는 심층심리학을 제창하고 잠재의식과 무의식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마음의 본체와 구조에 대해서는 지금도 연구해 가는 과정으로 남는다.
몸과 마음의 사이의 관계를 풀 수 있는 해결은 물질이나 몸이 실재적, 또는 실체적인 것인 반면에 마음은 그것의 산물이거나 그 존재와 특성 양면을 물질이나 몸에 의존하고 있다는 견해로서 유물론에서의 해결방안이 되고 한편으로 마음만이 실재적, 또는 실체적이며 물질이나 몸은 마음의 현상 또는 나타남이거나 또는 어디에선가 그 존재 및 특성을 마음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으로서 관념론과 유심론의 해결 방안이 된 것이다. 여기서 또한 마음과 물질이 똑같이 실재적이며 독립적인 실체들이라고 보거나 또는 하나의 동일한 실재의 두 가지 양상, 현상, 면(面)으로서 따로 분리시키면 똑같이 비실재적이라고 보는 견해를 가지고 있음도 알게 된다. 몸은 궁극적으로 마음으로 드러난다. 유한한 몸과 마음과의 관계는 상호작용의 관계로 드러난다.
몸이 우리의 감각이나 지각이나 사고에 의해 알게 됨을 보아왔다. 이제 다양한 사회적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그 몸을 단순히 우리의 개인적 또는 주관적 인상으로 간주하지 못하게 한다. 이것의 결론은 우리 자신의 몸뿐만 아니라 점차적으로 우리의 것과의 구별을 익히게 되는 타인의 몸은 정신적이거나 영적인 실재, 우리 자신과는 별개이고 독립적인 실재이고 그럼에도 우리와 유사한 실재, 외양임도 알게 한다. 또한 이 실재들은 그들이 도달하여 온 그리고 도달 가능한 정신적 발달정도에 있어서 서로가 크게 다르고 우리와도 다르다는 점도 인정한다. 이것은 우리의 몸으로 나타나는 실체 또는 실체들의 체계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그 실재들은 동일한 매개물을 통해서만 우리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의 몸은 또 다른 마음의 표현이 된다. 이것은 마음의 표현이 외양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대해 상당히 독자적임을 아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의 개발은 마음과 그토록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몸의 개발과 밀접한 관련 맺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생명이 있는 동안 몸의 성장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 즉 두뇌는 대부분이 우리 마음의 작용에 의해 결정되는 구조와 조직을 갖고 있고 두뇌는 그 같은 작용에 의해서 높든 낮든 간에 우리의 욕망과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한 더욱 더 완전한 도구가 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07년 기독교사상 5월호 ‘목회현장을 찾아서’에 이병창 목사는 “뫔”이란 단자(單字)를 “뫔”(=몸+마음)으로 그의 고유의 단자로 특허 까지 냈다. 창세기 1장에서 ‘빛이 있으라’ 라는 말을 풀이하여 그는 그 빛의 발사로 이르게 하는 것은 먼저 빛이란 생각을 한 점에 유의케 하고 생각과 현실이 마주하면 ‘빛이 있으라’는 형체가 현실로 존재함을 일깨운다. 사람이 삶을 기쁘게 사는 방법은 생각과 현실이 즉 우리의 마음과 몸이 일치할 때 기쁨을 갖는다는 이치를 터득케 하는 그의 뜻에 호감(好感)을 갖는다. 사람들의 모든 문제는 기본적으로 몸과 마음의 분리에서 기인되어 삶에 갈등이 생김을 알게 하는 것이다. 사람은 마음을 갖고 있다. 내 마음은 나의 마음이다. 나의 마음은 내 것이기에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내 마음이다. 그런데 사실로 나는 내 마음을 내 뜻대로 지배할 수 가없다.
예를 들면 내가 상처입거나 사랑하는 이를 잃었을 때 내 마음으로는 속히 잊어버리고 싶으나 죽은 이의 생각에 잠 못 이루지 않는가? 과거의 쓰라린 멸시와 천대를 받았던 그 기억을 아무리 잊으려 해도 분노와 악의가 가슴 깊이 솟아오른 증오를 견딜 수가 없음은 어이한 일인가? 하고 생각해 본다. 사람에게는 망각의 자유와 기억의 자유가 없음을 안다.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이성과 의지대로 지배할 수 없는 사람임을 알게 한다. 마음은 나의 마음이지만 내 맘대로 안 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인정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바울 선생도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내가 원치 않는 악을 행함이라’고 한다. ‘내가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몸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몸속에 거하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가는 것을 내가 본다’고 했다.
‘몸과 마음’, ‘육신과 영혼’의 갈등을 보여 준다. 일찍이 괴테와 파스칼도 영,육의 갈등을 말하였다. 우리는 선을 원하면서도 선을 행하지 못하고 악을 원치 않으면서도 악을 행하게 된다. 이것이 사람의 선과악의 갈등이요 양심의 갈등이다. 사람에게는 기쁨과 감사의 맑은 해가 비치는가 하면 분노와 질투의 회오리바람이 분다. 사람의 생활하는 삶에는 이기심과 탐욕과 허영과 나태와 교만의 검은 구름이 끼는가 하면 영광과 환희와 사랑과 희망의 따스한 햇살이 퍼진다. 사람의 마음도 그렇다. ‘천국이다, 지옥이다’. ‘평안하다, 불안하다’. ‘행복하다, 불행하다’, ‘낙관한다, 비관한다’는 것들이 철학적 종교적 관점에서도 모두가 몸과 마음가짐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을 하나 되게 하는 것은 마음을 닦고 몸을 닦아 마음을 쓰면 맑아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쇠가 녹이 슬듯이 우리 몸과 마음도 내버려 두면 녹이 슨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야 한다. 사람의 마음은 기름진 옥토와 같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마음씨’라고 한다. 좋은 씨를 뿌리면 좋은 열매가 자라고 나쁜 씨를 뿌리면 나쁜 열매가 자란다. 아무것도 안 뿌리면 잡초만 자란다. 마음은 몸으로 모으면서 사람의 존재를 실현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 마음은 다른 마음과 어울려 울을 만들어 큰마음과 한 마음이 된다. 그러므로 마음은 몸을 통하여 ‘우리’(a fold)로 모이면서 마을(동네)이 되는 이치를 터득하며 ‘마음씨’라는 말도 실감하게 한다. 어차피(於此彼)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은 곧 마음이요 또한 마음 씀이다.
사람이 죽은 사람이 아니고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것 자체가 마음이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마음이 쓰이는 때에는 몸이 항상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온전한 사람은 몸과 마음이 둘이면서 하나인 사람이다. 반면에 하나이면서 몸과 마음이 둘로 분리될 때 그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사람은 탄성(歎聲)을 지른다.
출처/배성산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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