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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법사의 지혜(사도행전 5:33~42)
저희가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교법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말하되 이스라엘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 사람이 약 사백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좇던 사람이 다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본문은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심문을 받고 섰는 베드로와 및 사 도들의 담대한 모습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몇 달 전에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신 바로 그 공회입니다. 빌라도 앞에서 사형선고를 받으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마는, 실제로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먼저 처형을 결정하고, 그리고 나서 빌라도의 이름을 빌려서 십자가에 못박은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님을 십 자가에 못박도록 한 원흉이요 본거지인 것입니다. 지금 그 현장에 베드로와 요한과 제자들이 서 있습니다. 잘못 삐끗하는 날이면 그들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는 것은 불을 보듯 환한 일입니다. 이렇듯 심각하고 위험한 시간입니다.
보십시오. 지금 사도들은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서서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이 산헤드린 공회는 얼마 전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함으로 부끄러움을 샀던 곳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 현 장에 베드로가 다시 섰습니다. 그 때는 공회의 문밖에 앉았다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재판장 안에 당당히 나서서 담대하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합니다. 상황이 이렇듯 바뀔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 재판 받으실 때에 도망갔던 제자들이 이제 용기를 얻어 다시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담대하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디서 이런 담력이 생겼겠습니까? 사도행전 4장을 보십시오. 베드로와 요한은 말씀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19절)."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이 옳다고 시간마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저들은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보다 더 큰 위안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것보다 더 큰 용기가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만이 아신다고 하는 사실이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고 거리낀다면 그 사람은 죄인입니다. 세상사람 다 몰라도 좋다, 하나님만 아시면 된다 - 바로 이런 단순한 마음이 무서운 용기의 근본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독해지고 쓸쓸해지고 약해지고 의심이 많아지고 하는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는 다 내 가 하나님 앞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망각하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내 운명, 내 생명, 내 영원한 생명이 지금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말하고 듣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바로 참된 의미에서의 이 같은 경건이 필요합니다. 신학적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경건의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경건의식이 있을 때에 용기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두려울 게 아무 것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어 나와 함께 하신다고 하는 사실이 용기를 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확실하게 분명하게 믿기에 나의 부활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저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생명을 지금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원과 만나는 시간입니다. 이제는 죽어도 좋습니다.
죽으면 부활할 것이니까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에 거칠 것이 없습니다. 부활생명을 피부로 체험하는 시간입니다. 여기에서 용기가 비롯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성령충만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사도들의 마음을 감동시킴으로 부활생명이 믿기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나 자신을 위한 사건이라는 확신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부활생명이 저들의 마음을 충만하게 감동시킬 때에 거칠 것이 없어집니다. 이제는 원수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오히려 핍박하는 자들을 불쌍하게 여깁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충만한 마음을 가지게 됨으로 사도들이 저렇듯 의연하게, 담대하게 나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지 말라고 집중적으로 협박하는 순간에 그 핍박 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그리스도 되신다고 정면으로 증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베드로와 사도들이 핍박 자들을 향하여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32절)". 이 말씀이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을 크게 격분시켰다고 본문은 증거 합니다. "저희가 듣고 크게 노하여(33절)" -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는 그 말씀을 듣고 크게 노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도들은 의인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메시야이신 그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증거 합니다. 그 말씀대로 하면 저들은 의인의 피를 흘리게 한 죄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하고 크게 반박합니다. 이 위협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 합니다. 우리가 그 증인이라고 담대하게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당신들이 메시야를 죽였소, 당신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죄를 범한 것이오, 하고 핍박 자들을 정면으로 정죄하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이 말씀을 듣고 충격을 받은 저들은 "어찌할꼬"하고 회개해야 마땅했습니다마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회개는커녕 더욱 격분하여 펄펄 뛰었습니다. 이를 갈고 부들부들 떨며 분노했습니다. 이 분노가 극에 달한 저들은 결국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이게 됩니다(행 7:54). 이렇듯 살기 등등하고 험악한 상황을 오늘의 본문은 "크게 노하여"라는 한마디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본문을 말씀합니다.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33절)" - 분노한 저들의 마음이 사도들을 죽이겠다는 마음으로 굳어지고 있는 순간입니다.
바로 그 때에 가말리엘이라고 하는 바리새인 교법사가 이를 만류하고 나섭니다. 앞에 나아가 지혜로운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 가말리엘에 대하여 우리가 아는 바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다만 사도 바울이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다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바입니다.
사도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입니다. 본래 가말리엘의 제자였습니다. 히브리사람들의 문헌에 보면 힐렐이라고 하는 유명한 율법사가 있습니다. 많은 문헌에 그의 모습이 실려 있습니다. 「탈무드」에도 그가 한 말이 많이 있습니다. 온 민족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유명한 랍비 힐렐의 손자가 바로 가말리엘입니다. 그 역시 힐렐 만큼이나 유명한 사람입니다. '율법의 영광'이라고 하는 별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좀더 높이기 위하여 라반이라고 불렀다 합니다. 그가 죽었을 때에 사람들은 '율법의 영광은 갔고, 그 정결과 성결도 죽었도다'라고 기록하였다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사도 바울의 스승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전설에 따르면 그가 말년에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합니다마는, 그 역사적 근거는 희박합니다. 어쨌든 가말리엘은 당시 대단히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사두개인만 있는 자리에서 바리새인인 가말리엘이 나서서 지혜로운 말을 합니다. 아마도 그 역시 바리새인으로 베드로나 요한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을 증거하고 있으니까요. 적어도 상당 부분에서는 서로 동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신학적으로는 사도들과 의견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말리엘은 사도들을 꼭 죽여야겠다는 생각은 가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가말리엘은 "이스라엘사람들아"라는 말로 말문을 엽니다. "여러분" 하지 않고 "이스라엘사람들아"하고 말합니다. 이것은 선민의 특권, 선민의 영광을 내세우기 위함입니다. 먼저 선민의 긍지를 저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택함 받은 백성입니다. 그러니 소홀히 처신해서는 안될 것입니다'하는 의식을 깨우쳐 주고저 한 것 같습니다.
이어서 그는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36절)"라 고 역사적인 예를 들어 말합니다. 이것은 히브리적 방법입니다. 히브리사람들은 추상적 이론으로 설명하지 않고, 언제나 역사적 사건으로 설명을 합니다.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사실을 들어서 설명하는 것이 이스라엘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가말리엘이 오늘의 본문말씀 에서 예로 들고 있는 역사적 사건은 두 가지입니다. 그 첫 번째 예가 바로 드다라고 하는 사람에 관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드다가 죽은 서기 4년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태어나신 바로 그 때입니다. 드다는 자칭 메시야라고 나섰던 사람으로 그가 갑자기 죽음으로 얼마동안의 혼란기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드다 말고도 여러 사람이 나타나서 자 칭 메시야라고 하면서 선지자의 음성이 사라진 지 오랜 유대에서 많은 일들을 일으켰던 것 같습니다. 드다는 '나는 여호수아의 후예다.
나는 여호수아처럼 이 민족을 구할 것이다. 맨발로 요단강을 건너게 해줄 것이다'하는 이야기도 서슴지 않고 했다고 합니다. 이렇듯 선동을 해서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를 따르던 사람의 수가 약 사백이나 되었다고 오늘의 본문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드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자 그를 따르던 무리들은 모두 흩어져 없어졌다고 합니다.
가말리엘은 두 번째 예로 유다를 들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에서 보는 대로 구레뇨가 시리아 지방의 총독으로 있을 때에 그곳 거민들로 호적을 하게 했습니다. 세금을 더 많이 거두어들이기 위하여 호적을 하게 하는데, 그 때에 갈릴리사람 유다가 나서서 이를 저지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하나님께만 세금을 바칠 것이지, 그 누구에게도 세금을 내지 못한다'라는 말로 민족의식을 고취했습니다.
로마정부를 대항하여 일종의 혁명을 일으킨 것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로마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유다 역시 결국은 잡혀서 죽었습니다. 그가 죽고 나니 그 무리들이 다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두 사건에서 보는 대로 주동자가 없어지는 순간에 추종자들이 조용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생각해보십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따르던 그 무리들이 흩어질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흩어지기는커녕 자꾸만 일어나고 있단 말입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위하여, 복음을 듣기 위하여,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모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은 섣불리 대항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에서 가말리엘은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 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38, 39절)"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이 되고, 이것이 사람들의 광적인 운동이요 인간적인 조작으로 이루어진 운동이라면 이제는 없어질 때가 되었으니 조용히 기다려도 답답할 것이 없지 않느냐, 라는 지혜로운 말을 하게 됩니다. 저들이 이 말을 받아들임으로 베드로와 사도들이 풀려 나오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사건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가말리엘의 설득을 따라 사도들을 풀어주기로 결정하고도 사도들에게 계속 채찍질을 가하고 있습니다. 매질을 합니다.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을 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40절)" - 채찍질을 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복음전하는 것을 금한 뒤에 풀어주었다고 합니다. 놓아줄 양이면 그냥 놓아줄 일이지 왜 때리고 놓아주는 것입니까? 참으로 못된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잠깐 이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히브리사람들의 문헌 가운데「미쉬나」라고 하는 책에 보면 이 체형(體刑)에 대하여 자세하게 기록해놓은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수형자의 상반신을 벗겨서 두 손을 기둥에 묶어놓고 가슴과 어깨를 열세 번씩 채찍으로 때리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이 태형(笞刑)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신명기 25장 을 보십시오.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 일 그것을 넘겨 과다히 때리면 네가 네 형제로 천히 여김을 받게 할 까 하노라(3절)." 매는 어디까지나 그 사람의 죄를 책하기 위하여 때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매가 지나치다 싶으면 그 사람의 인권은 무너지고 맙니다. 그 사람의 명예는 추락하고 맙니다. 때문에 태형을 가하려거든 40대를 넘기지 말라고 성경은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말 씀에 따라서 저들은 39대를 때립니다. 이것이 저들의 관례입니다. 저 들이 사용하는 채찍은 두 개의 가죽끈을 묶어놓은 것입니다. 그 가죽 끈 하나는 송아지 가죽으로 끝이 네 가닥으로 있고, 또 하나는 나귀 가죽으로 끝이 두 가닥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 채찍으로 39대의 매를 때린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이 태형을 가할 때에 보면 재판장이 멀리서 "때려라"하고 명령하면 한 사람은 때리고 한 사람은 옆에서 그 수를 셉니다. 이렇게 해서 39대를 때리는 것입니다.
특별히 재미있는 것은 매질을 하는 동안에 제사장은 성경을 읽는다는 점입니다. 그 때에 읽는 성경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너의 재앙과 네 자손으로 재앙을 극렬하게 하시리니 그 재앙이 크고 오래고 그 질병이 중하고 오랠 것이라(신 28:58, 59)." 이것이 가장 먼저 읽는 성경말씀입니다. 다음으로 신명기 29장 9절 의 말씀을 읽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 그리고 "오직 하나님은 자비하심으로 죄악을 사하사 멸하지 아니하시고 그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 분을 다 발하지 아니하셨으니"라는 시편 78편 38절 의 말씀을 읽습니다. 이 말씀들을 읽는 동안에 태형이 치러지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참으로 대단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4절을 한번 보세요.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니……" 사도 바울도 40에 하나 감한 39대의 매를 무려 다섯 번이나 맞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 이 매를 맞았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 문제를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 같은 형벌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다'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본문말씀을 통하여 가말리엘의 말을 자세히 살펴보십시다.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 (35절)." 이 말의 내용인즉 상관하지 말자, 그대로 내버려두자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먼저 이 일은 하나님의 섭리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자는 것입니다. 이 일이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면 막을 길이 없을 것이요, 사람에게서 난 것이면 저절로 없어질 것이 아니냐, 없어질 때가 되었으나 두고보자는 것입니다. 아주 지혜로운 말같이 들립니다마는 너무나 소극적입니다. 더욱이 이 말에는 만일 우리가 이 일을 임의적으로 대하다가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고 하는 걱정스러움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기회주의적인 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가말리엘은 지금 뒤로 물러서서 두고보자, 하나님의 섭리 에 맡기자, 굳이 우리 손을 대지 말자, 하는 아주 지혜로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인간의 판단이라고 하는 것이 때로는 편견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하나님을 대신하여 재판장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 나라는 더 큰 악을 막기 위하여, 사회적인 악을 막기 위하여 사형이라는 처형제도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엄격히 따져 말하면 그 누구에게도 사람을 살리고 죽이고 할 권리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특별히 사람의 판단이라는 것은 아무리 잘한다고 해봐야 얼마 뒤에 생각해보면 잘못한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더구나 사람을 죽이는 일입니다. 어딘가 가두어 놓았다가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그 자리에서 사도들을 죽이고자 합니다. 여러분, 이런 판단을 섣불리 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가말리엘이 만류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으면 됐지, 그 제자까지 죽이려고 하느냐, 한 번으로 족하다, 라고 만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적, 인도주의적 겸손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적 겸손이기에 앞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할 지혜입니다. 내가 누군데 남을 심판합니까?
우리는 재판장이 아니더라도 어느 경우에 재판장이 될 때가 있습니다. 옳다 그르다, 좋은 사람이다 나쁜 사람이다, 하고 판단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어떤 때에 누군가를 나쁜 사람이라 고 실컷 떠들어놨는데 나중에 보니 좋은 사람입니다. 아차 합니다마는 이미 늦었습니다. 얼마나 큰 실수입니까? 그 때에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것을 왜 말을 해버렸던가, 하고 얼마나 후회를 합니까? 그러므로 가말리엘은 말합니다. "너희가 이 사람들에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 참으로 지혜로운 충고입니다. 지성인의 자세입니다.
세 번째로 가말리엘은 지금 저들이 무척 흥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여러분, 무슨 일이든 흥분된 가운데서 처리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또한 피해의식에 매여 일을 처리하면 더욱 큰 실수에 빠지게 됩니다. 지금 저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죽이자 살리자 하는 것은 심리학적으로 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데 대한 가책 때문입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이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버렸습니다. 그것이 잘한 것으로 인정되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잘한 짓이 아닙니다. 더욱이 오늘의 되어지는 사건을 보니 정말로 잘못한 것 같습니다. 이제라도 바른 자세를 취하고자 한다면 회개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저들에게는 회개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바로 그 가책의식이 역작용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없이하겠노라 하게 된 것입니다.
심리학적으로 똑같이 적용되는 이야기가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도 바울이 사울일 때에 스데반을 돌로 쳐죽인 일입니다.
이에 대하여 어떤 분이 심리학적으로 연구해서 박사논문을 썼는데 그것을 제가 읽어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울일 때에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큰 고민이 생겼습니다. 보십시오. 천하에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이,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이 죽는데 그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이것이 사울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더구나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죽이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마 사울은 제대로 잠도 못 잤을 것입니다.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스데반은 의인이다 하는 생각과 함께 아니다 죽어 마땅한 놈이다 하는 생각이 대립되어 있었습니다. 만일 그가 의인이면 사울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의인을 죽인 죄를 범한 것이 되고 맙니다. 이 갈등 때문에 절반은 미쳤다는 것입니다. 미치지 않고야 다메섹까지 왜 가려 했겠습니까? 다메섹까지 피난간 사람들을 잡아다가 죽이겠다고 하는 극악한 마음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심리적으로 그 마음속에 내가 한 일이 잘못이었다고 하는 가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역작용으로 나타나서 더욱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좋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마는 가끔 보면 손찌검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손찌검을 하는 것입니까? 가책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한 일에 대하여 자신만만하고 스스로 잘했다고 생각하는 데 남들이 잘못되었다고 합니다. 그럴 때에 내 말이, 내 행동이 옳았다고 말하면 그만일 것을 왜 소리가 커지고 손이 나가느냐는 말입니다. 가책 때문입니다. 찔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없애버리려고, 죽여 버리려고 합니다. 또 살인을 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죽인 데에 대한 가책 때문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이 하는 말이 정면으로 저들의 가슴을 찌르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처럼 극악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들은 지금 객관적 진리, 우주적 진리, 성서적 진리에 의하여 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재판은 직접적으로 자기 자신들의 피해의식에 의하여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재판은 흥분적인 재판이요, 전혀 냉정함이 없는 재판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냉정을 잃어버리면 법은 무너지고 맙니다. 더구나 자신의 이해관계가 개입되면 그 재판은 잘못되고 맙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 가말리엘은 '지금은 때가 아니다, 이 문제는 그렇게 처리할 것이 아니다. 그러니 흥분을 가라앉히고 냉정을 찾아라'하고 저들에게 충고합니다. 저들은 가말리엘의 말을 듣고 냉정을 찾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옳다 그르다 하고 그 당장에 다툴 것이 아닙니다. '하룻밤만 자고 내일 다시 만납시다, 일주일 뒤에 다시 만나 좀더 기도해보고 만납시다'하고 흥분을 가라앉힐 줄 알아야 합니다. 당장 그 자리에서 판단을 해버리는 순간, 지위로부터 멀어진 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흥분을 멈추어야 합니다. 바로 이 흥분된 자세가 문제입니다. 이 피해의식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각 가말리엘은 '냉정하십시다. 지금은 냉정을 찾아야 할 시간입니다. 객관적 진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시간입니다'하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가말리엘은 저들에게 역사적 의식을 가질 것을 권유합니다. 역사가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과거에 되어졌던 일들을 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이렇게 흥분할 것이 아니라고 말하게 됩니다.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교법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34절)……" 가말리엘이 아주 지혜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가말리엘은 베드로와 요한을 밖으로 내 보낸 연후에 저들에게 말을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으려는 의도에서였습니다. 조용한 분위기에서 자유롭게 말을 주고받으려는 데에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람은 일대 일로 단둘이 마주할 때에는 말을 바로 할 수도, 자기 잘못을 인정할 수 도 있습니다마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 잘못을 인정하기란 어려운 법입니다. 여기에 형제가 있습니다. 어머니가 동생 앞에서 형을 때리면서 잘못했다고 빌라고 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죽어도 안 합니다.
그러나 일대 일로 단둘이 있을 때에는 잘못했다고 하라면 얼마든지 합니다. 하지만 동생이 옆에 있는 상황에서는, 자신이 매맞는 것을 동생이 지켜보는 상황에서는 좀처럼 잘못했다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및 사도들이 서있는 그 앞에서 대제사장이 어떻게 '가말리엘 당신 말이 옳소'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잘못한 것 같소'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일대 일로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조용한 충고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공개적으로 여러 사람 앞에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말리엘은 또 한번 냉정을 찾는 비결로 사도들을 나가라 해놓고 자기들끼리만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순간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아이들 앞에서 부부싸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나 형 앞에서 동생을 나무라도 안되고, 동생 앞에서 형을 때려서도 안됩니다. 그리고 때리면서 '너는 왜 동생만 못하냐'하고 꾸중해서도 안됩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어떤 교훈도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보십시오. 오늘 가말리엘이 지혜롭게 행합니다. 먼저 사도들을 나가게 한 뒤에 감정을 가라앉히고 냉정을 되찾아서 말하게 합니다.
그런가하면 가말리엘은 소극적인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아주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면이 있었습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나느니라(마 5: 37)"라고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Yes면 Yes, No면 No 요, 옳으면 옳고 그리면 그른 것입니다. 두고 보자니요.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이것은 올바르지 못한 자세입니다. 분명하지 못합니다.
말을 똑바로 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자기의 명예와 자기의 운명을 다 걸어서라도 이것은 옳은 일이요 저것은 틀린 일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가말리엘은 지혜로운 것 같았으나 그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지혜에 불과했습니다. 이것은 신앙적인 지혜가 아닙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가 아닙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자기의 위치를 지키고 있는 태도입니다. 지극히 소극적이고 불 신앙 적입니다.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른 것이지 두고 봅시다라니요. 이런 미온적인 자세가 문제입니다. 말이 분명해야 합니다. 태도가 분명해야 합니다.
본문말씀 말미에 참으로 감동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41절)."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매를 맞고 좋아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매맞았으니까요.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이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몸에 채우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이요, 이로써 하늘의 영광이 있는 것을 알기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 5 :10)"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기에 저들은 매맞고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저들은 매맞고 고난 당하면서 신세타령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팔자가 기구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어쩌다 이 신세가 되었느냐고 한탄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을 특권으로 여겼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특권으로 여기고 감내합니다. 이것은 내게 주신 은혜입니다. 특별한 은혜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봉사할 수 있는 것도, 수고할 수 있는 것도 은혜요 특권입니다. 더구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순교하는 것은 최고의 영광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매를 맞는 것은 아주 아름답고 귀한 일입니다.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우리 나라에 마포삼열이라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 마포삼랑 목사님도 우리 나라에 와서 일생을 한국교회를 위하여 수고했습니다. 그런데 마포삼열 목사님의 얼굴에는 큰 활자국 같은 흉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노방전도를 할 때에 어느 술 취한 사람이 술병을 깨뜨려서 던졌는데 그것이 그대로 얼굴에 맞아 생긴 상처였습니다. 옛날에는 수술하는 재주가 좋지 않아서였든지 사진에도 확연히 드러날 정도로 큰 상처를 남기고 말았습니다. 목사님은 그 때에 자신에게 병을 던진 사람을 용서함으로 결국 그 사람은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기 흉한 이 상처가 오히려 선교활동을 하는 데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이 어디 가서 설교를 하거나 헌금을 거둘 때에는 으레 성황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상처한번 보고 모두가 눈물을 흘리면서 감격했다고 합니다. 그 상처가 훈장이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감상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몸에 상처가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예수님을 위하여 어느 한쪽이 뚝 떨어져나간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희생한 흔적이 전혀 없으면서 어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매맞고 능욕 받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영광으로 여겼다고 말씀합니다. 이어서 본문은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42절)"라고 말씀합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가르치기를, 전도하기를 쉬지 않고 더욱 열심히 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말씀입니까?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도들은 방금 매를 맞고 나와서, 그 위험을 알면서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고 증거하기를 쉬지 아니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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