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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뱀 비유(요한복음3:14-17)

by 【고동엽】 202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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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뱀 비유(요한복음3:14-17)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만남은 앞장에서 이미 이야기한 바가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처음 뵙는 상황을 보면 그의 신분이 신분이니 만큼 밤에 조용히 찾아와서 장황한 인사를 늘어놓으면서 예의를 갖추고 체면을 차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던 니고데모가 어느 사이에 예수님의 말씀과 그 인격, 그 매력에 흡수되어 완전히 빠져들어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유대 나라의 종교적 정치적 고관이었던 그가 이제는 마치 어린아이가 호기심으로 인해 어른들에게 "이것은 무엇이죠? 왜 그렇지요?"하며 줄곧 질문을 하는 것과 같은 모습을 느끼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예수님으로부터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모르느냐?"는 말씀까지 듣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거듭남의 교리를 말씀하시자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수 잇습니까 하는 것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잇습니까? 하는 두 가지의 질문을 하게 됩니다. 생각하면 이러한 질문은 사실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에서 나온 질문인 것입니다. 만약 이 질문을 지식적으로 평가한다면 그렇게 유치한 질문이 있을 수가 없겠습니다마는 신령한 눈으로 볼 때에는 참으로 순진하고 깨끗한 마음에서 하는 질문인 것입니다. 그의 질문에는 일반적인 지식이나 합리적인 이론, 그리고 교리적인 변론 같은 것이 전혀 없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습니까?"하는 질문을 두고 재해석을 해본다면 "사람이 워낙 고질적인 인간이 되어버리면 어떻게 변하겠습니까?"하는 질문이 되기도 합니다. 가끔 우리 주위에서도 보면 공부도 많이 하고 지위도 있으며 교양도 있는 듯한데 그 사람됨이 크게 잘못되어 있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 성격이나 생각하는 바가 잘못 고질화되어 자신을 괴롭히고 다른 사람을 괴롭힘에도 영 바꾸어지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무덤에 갈 때까지 못 고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것에 관한 한 예수를 아무리 오래 믿었어도 바꾸어지기가 힘든 일입니다. 흔히들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있는 고질적인 관념이나 성격, 체질, 등을 벗어나지 못해 힘들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것으로부터 깨끗이 벗어나지 못하는 한 제대로 사람노릇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되면 자신에 대해서나 남에게 대해서나 마찬가지로 "구제불능인가 보다"라는 낙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주 고질화된 문제를 생각하며 예수님께 인간의 수양이나 교양으로는 고칠 수 없는 그런 고질적인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하는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문제더란 말입니다. 저가 아는 어떤 여집사님 한 분은 남편이 은행 지점장인데 도박하는 습관이 있어서 계속 불행하게 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집사님인 부인도 의사인지라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편인데도 남편이 도박 몇 번만 하고 나면 집도 날리고 빚까지 지는가하면 심지어는 공금까지 횡령을 하면서도 도박을 해온지가 20년이 되고 보니 이 부인이 지칠 대로 지쳐서 이제는 아예 그만둘까요 하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구제불능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경우에 정말 이런 사람도 예수 믿으면 고쳐질 수 있을까요 하는 질문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생각하면 이런 고질적인 병패가 어디 그것뿐이겠습니까? 참으로 많은 것들이 잘못 고질화되어 문화화 되고 습관화되어 있음에도 그 변화는 전혀 기대할 수가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습니까?" "그래도 예수를 믿으면 달라질까요?"하는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50년 60년이 된 이 고질도 달라질 수가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사람으로서는 하지 못해도 하나님께서는 하신단 말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에 육으로서는 아무리 결심을 하고 교양을 쌓아 보아도 육일뿐이지만 성령으로 나는 것은 영이기에 오직 위로부터 나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중생 하는 역사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하는 두 번째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의 뜻을 집약하면 내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리라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이를 앞에서 주신 말씀과 종합해 보면 성령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만이 사람을 중생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 외의 어떠한 수단과 방법으로도 고질화된 인간을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 민수기 21장을 보면 이 말씀의 배경이 나오고 있습니다. 21장 4절 말씀에 보면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쫓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부터 나와 홍해를 건너고 광야 길을 거처 요단강 가까이에 까지 이르러 가나안을 정탐까지 하였으나 저들의 불신앙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다시 홍해의 광야 길로 돌아서 가게 하십니다. 저들이 그 날짜를 모르고 있었습니다마는 하나님께서는 40년에 걸쳐 광야를 헤매게 하십니다. 아무튼 이렇게 됨으로 더욱 지치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길이 못마땅하여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먹을 것도 없는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며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여호와께서 인도하시는 길이요 하나님께 필요해서 주시는 과정인데 이 백성들은 그것이 못마땅하여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불신한 것입니다. 이를 두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9에서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 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라고 하였습니다. 감히 주를 시험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를 범함에도 믿는 사람이 범하는 죄가 있고 믿지 않는 사람이 범하는 죄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죄, 즉 절도나 강도, 사기, 살인 등의 이러한 범죄는 믿지 않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믿는 자들에게도 있을 수 있는 요소들입니다. 그런데 그것과는 달리 믿는 사람들이 범하는 죄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가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예 믿지 않는 사람은 원망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생각도 없는데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하나님을 믿기에 또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에게 이 두 가지의 결정적인 죄가 있음을 기억하고 거기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할 것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바로 그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어떠한 지경에서도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의심하거나 하나님의 훈련 코-스에 대해서 불평하지 마십시다. 길로 인하여 마음 상해하지 말 것이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동으로 인도하시든 서로 인도하시든, 가난으로 인도하시든 부로 인도하시든, 어느 길로 인도하시든 원망하지 마십시다. 저는 오래 전에 본 영화이긴 하지만 '지붕 위의 바이올린'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매우 인상깊게 남아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소련에서 고생을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한 이스라엘인 아버지가 소련인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나쁘게 놀아나는 자기 딸로 인해 무척 마음 상해합니다. 아무리 가르치고 바로 잡으려해도 들어주지를 않습니다. 그 때문에 이 아버지는 자기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전개되는 딸의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당장에 그 딸을 내리쳐서라도 어떻게 처리해버리고 싶은 충격을 받게 되지만 바로 그런 순간에 그는 행동을 멈추고 하늘을 쳐다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 저 꼴을 좀 보십시오!" "하나님! 그래도 저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으렵니다!"하고서는 서서 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러분! 답답하고 괴로운 일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마십시다. 우리의 기도는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래도 저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으렵니다"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여 하나님을 원망하는 큰 죄를 범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저들에게 불 뱀을 보내시어 물려 죽게 하십니다. 우리 성경에는 이렇게 불 뱀으로 되어있지만 어떤 성경에는 날아다니는 뱀으로 기록된 것도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 뱀은 땅으로 기어다니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 저곳으로, 나뭇가지에서 나뭇가지로 날아다니면서 마구 무는 것입니다. 그러자니 피할 길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 물리면 그 독이 얼마나 지독한지 불을 먹은 것처럼 목이 타면서 온몸이 불덩어리처럼 달아오르고 부어서 죽게 됩니다. 그래서 불 뱀이라고 한 것인데 아무튼 이렇게 무서운 뱀들이 떼를 지어 몰려들어서는 사람들을 마구 물어 죽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를 깨닫고 모세로 하여금 하나님께 기도하여 이 뱀들이 물러가게 해 줄 것을 부탁합니다. 이에 모세는 백성을 위한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그래 너희들이 이렇게 회개하니 내가 용서하겠다. 이제 다 나아라"는 식으로 일괄적으로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구리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아놓고 그것을 쳐다보면 살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간단한 지시입니까? 그러나 그것을 쳐다보지 않고 죽은 사람들이 있으니 참으로 기막힌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저 간단히 쳐다보면 될 것을 그것을 안쳐다보고 죽을 이유가 뭐란 말입니까?

이와 같은 경우는 구약 성경 열왕기하 5장에 기록된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에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문둥병이 든 아람의 군대 장관 나아만이 사마리아에 있는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가 문둥병을 고쳐줄 것을 부탁하자엘리사선지는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면 몸이 깨끗하여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나아만 장군은 대노하여 우리 나라에는 더 좋은 강들이 얼마든지 있는데 여기까지 와서 저 보잘것없는 요단강에서 목욕을 할 것이 무엇이냐며 돌아갈 것을 재촉합니다. 이 때에 그의 지혜로운 종이 나아만 장군께 간청하기를 이보다 더 큰일을 명하여도 해야할 것인데 하물며 몸을 씻으라는 이 간단한 일을 하지 않고 그냥 갈 것이 무엇이겠느냐고 말합니다. 종의 말을 들은 나아만 장군이 그 말이 옳다는 생각으로 요단강에 들어가 일곱 번 몸을 잠그고는 어린아이의 살결같이 깨끗하여졌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저 시선만 높여 간단히 쳐다보면 될 것을 안쳐다보고 죽은 사람들을 말입니다. 불 뱀의 독으로 일각을 다투는 지경에서 아무리 어려운 일을 명하여도 해야 할 것인데 '쳐다 보라'는 이 간단한 것을 쳐다보지 않고 죽는다면 그것은 죽어도 싼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 마디로 살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이 이야기는 결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 신앙인들이 꼭 그와 같습니다. 믿음으로 주만 바라보면 되는 것을 안쳐다보고 죽는 것입니다. 위를 보는 것이 아니라 땅만 보고 기어 들어가면서 원망을 하니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사죄와 용서가 있고 약속이 있습니다마는 이 허락이 적용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쳐다보는 조건이 수행되어져야 합니다.

여러분, 구리 뱀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뱀은 뱀이되 진짜 뱀이 아닙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짜 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는 뱀은 악의 상징이요 사탄과 마귀의 상징입니다. 이는 에덴 동산의 사건에서부터 이어져온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장대에 달려있는 뱀은 뱀의 모양은 있으나 뱀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죄인의 모습으로 죽으셨으나 죄인은 아니며 저주받은 자의 모습으로 죽었으나 저주 받은 자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구리 뱀의 모습인 것입니다. 사실 신앙의 눈으로 깊이 쳐다보면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리시는 시간이 아니라 사탄이 십자가에 속박되는 시간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리 뱀을 장대 위에 매달고 그리고 쳐다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쳐다보라는 말씀이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쳐다보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된다. 안 된다"구원 받을 것이다. 못 받을 것이다. "가능하다 불가능하다"라고 하는 것을 말하거나 물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쳐다보라면 쳐다보는 것입니다. 분명 거기에 확실한 구원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약속이 내게 효력을 발하는데 있어서는 내가 쳐다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 내놓을 수 있는 믿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의 의가 아닌 쳐다보는 믿음,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그리하여 오직 하나님의 긍휼 만을 원하는 것입니다.

쳐다본다는 것은 앙망 하는 것을 뜻합니다. 주를 앙망하면서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하는 마음으로 쳐다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를 말합니다. "오직 믿음으로서"를 강조한 마틴 루터는 오직 믿음이란 오직 긍휼, 오직 은혜, 오직 영광을 말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보면 내용도 많고 소원도 많습니다. 그러나 단적으로 말하면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는 이 말 외에 다른 말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주님을 쳐다보는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나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은혜로, 주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믿으며, 뿐만 아니라 이제는 나의 영광을 위함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고 드러내기 위해 사는 그것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칼 발트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 적어도 두 가지의 의미를 생각하라고 합니다. 그 하나는 십자가를 볼 때 내가 저만큼 큰 죄인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는 구원 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쳐다보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칼 발트는 알키메데스의 원리를 비유로 마치 물이 가득 채워진 목욕탕에 누군가가 들어가게 되면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내 죄의 무게만큼 빠져나가야 되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볼 때에 거기에 내 죄의 무게가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거기로부터 내 가치를 보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구원할만한 귀중한 가치의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엄청난 값을 치루셨습니다 마는 그만한 가치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기에 그 값을 치루시고 구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볼 때마다 내가 저만큼 무서운 죄인이라는 것과 또한 그만큼 소중한 존재임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리뱀을 쳐다보면서 생각할 것은 옛사람인 나는 저 죽은 구리뱀과 함께 죽었음을 깨닫고 그 구리뱀과 나를 완전히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십자가와 하나가 된 사람은 말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이 어떻게 무슨 말을 하고 불평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죽은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와 함께 완전히 죽었고 그런 후에 비로소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사야 45:22말씀에 보면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를 쳐다 보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란 말입니다. 또한 로마서 10:13말씀에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쳐다본다"는 것과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이 뜻하는 바를 깊이 생각해야할 것입니다.

거기에 바로 믿음의 유무가 있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정리해 본다면 여기에 구원의 약속이 있습니다. 지금 이내 다 죽은 사람들이 여기 있습니다. 그들은 뱀에 물렸기 때문에 그대로 두면 다 죽을 것이므로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살 것이다"라고 하는 생명의 복음이 전해집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쳐다보라는 단 하나의 조건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쳐다보는 자에게만 살게되는 능력이 나타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직 하나의 조건! 쳐다 보라! 이것은 종말적인 메시지요 마지막 통첩입니다. 쳐다보면 살고 쳐다보지 않으면 죽는 것입니다. 이제 와서 쳐다보지 않기 때문에 새삼스레 죽는 것이 아니라 뱀에게 물리는 순간 이미 죽은 것입니다. 본문 18절 말씀에 보면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5:24말씀을 보면"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 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십니다. 이 귀중한 모든 말씀을 비유로 상징으로 나타낸 것이 구리뱀 이야기입니다. 구리 뱀을 매달아 놓고 쳐다 보라! 그러면 살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입니다. 이치를 따지지도 말고 변명을 하지도 마십시다. 순종하는 마음으로 쳐다보면 그렇게 쳐다보는 중에 십자가 안에 있는 생명의 능력이 내게로 전달되어 상상 밖의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저런 사람도 될까요?"했던 그 못된 사람도 변화가 됩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너무도 난폭하여 부부싸움을 하면 아예 문을 잠그고 칼부림을 하기가 일쑤여서 부인의 고통이 말이 아니였습니다. 하루는 그 부인이 저를 찾아와 이제는 겁에 질려서 도저히 살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길래 그 부인에게 "그러지 마시고 예수를 믿으시지요"하고 권유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부인이 하는 말이 "예수가 누군지 모르지만 그 사람 사람 안됩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그 사람이 사람이 되어서 집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포악하고 잔인했던 사람이 정말 다른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앉아서 되느니 안 되느니 할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쳐다보라고 하셨으니 쳐다보면 거기에서 신비로운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내가 가진 능력이나 계산으로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도 누구이든 나는 구제불능인 것 같다라는 생각을 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쳐다보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아무리 고질적인 구제불능의 것도 성령과 십자가의 능력 앞에서만은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1장에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힘주어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생명의 능력 앞에서 녹아지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독사의 독에 의해서 온 몸의 열기가 불덩이 같고 몸이 부어 당장에 터져 죽을 지경이라 하더라도 쳐다만 보면 신비롭게 구원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십자가는 능력입니다. 그것은 지식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묻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오직 십자가의 능력으로 그것이 가능한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가능성을 물을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에 우리의 전부를 맡겨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리 뱀을 쳐다봄으로 살게 되자 마치 구리 뱀에게 무슨 마력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어 그 뒤에는 구리 뱀을 성전에 갖다 놓고 구리 뱀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구리 뱀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쳐다본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잊고 이것을 우상화한 것입니다. 그래서 열왕기하 18:4에 보면 모세가 만들었던 구리 뱀을 부수어 버렸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결코 구리 뱀 자체에 어떤 마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구리 뱀을 매달라는 것이요, 그리고 그것을 쳐다보면 살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이와 같은 어리석은 방법으로 하나님을 우상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 두고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야될 문제라 여겨집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소중한 진리를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네가 진정 중생하고 싶으냐? 중생의 이치를 알고 싶으냐? 그렇다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십자가에 들릴 것이니 그 때에 너는 십자가를 쳐다 보라! 그리하면 그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중생케 될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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