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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담대하라(사도행전 23:1~1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바울이 가로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바울이 가로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원을 비방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바울이 그 한 부분은 사두개인이요 한 부분은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이니……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이 바울이 저희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사를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문으로 들어가라 하니라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오늘의 본문에는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자기 변명을 하는 장면이 나타나 있습니다. 특별히 "담대하라(11절)"하신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 아주 귀한 계시의 말씀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이제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사실상 재판을 받게 됩니다. 산헤드린 공의회는 그실 빌라도 법정보다 더 잔인한 법정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자 거짓 증인을 세워가면서까지 재판을 했던 바로 그 자리입니다. 공의나 의가 실현되리라고는 애시 당초 기대할 수 없는 재판정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불의한 재판정입니다.
두 번째로, 스데반을 재판하여 로마법을 어겨가면서까지 끌어내서 돌로쳐 죽이던, 아주 무서운 재판정입니다. 의도, 진리도, 공의도 없는, 물론신앙도 없는 재판정입니다. 여기서 재판을 어떻게 받으며, 또 재판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은 보나마나한 일입니다. 바로 이런 자리에 서서 사도 바울은 지금 담대하게 자기 변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은 이미 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용기 있게, 담대하게, 할말은 해야겠다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말론적인 기회입니다. 마지막 기회입니다.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기회인 귀한 시간입니다.
그는 간결하게 자기 변명을 합니다.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1절)"-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에 있어서 양심이라는 것은 일반적인 양심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히브리인의 양심,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경건적 신앙 위에 선 양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 중에도 정결한 양심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보십시오, 양심이 타락하고, 양심이 변질되고, 양심이 이질화한 경우가 많습니다. 양심이 빗나가면 모든 일이 다 빗나갑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고 있지 않습니까? 양심이 빗나가 있는 경우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시간에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이렇게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 뜻은 이렇습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희생하고, 이렇게 수고하는 것은 어떤 학술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라, 무슨 철학의 문제나 어떤 지식이나 사상의 문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양심을 따라 섬기는 것입니다. 즉, 신앙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문제입니다. 결코 철학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또 한 가지, "양심을 따라"--이 말은 '억지로 한 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자유롭게, 양심의 자유를 따라 했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양심이 두 가지로 작용해요. 하나는 두려운 마음으로, 또 하나는 기쁜 마음으로. 어린이들에게 "양심이 뭐냐?"하고 물으면, 한참 생각하다가 "거짓말하려고 할 때에 가슴이 두근두근하는 것, 못된 짓 한 다음에 얼굴이 빨개지는 것"이랍니다. 이것은 부정적인 면이지요. 그러나 진짜 양심은 좋은 일 하려고 할 때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할 대에 아주 벅찬 행복감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게 보다 높은 차원의 양심입니다. 여기에는 억압이 없어요. 꼭 잊지 말아야합니다. 양심의 가책에 눌려서 심판을 두려워하며 행하는 일이 있고, 양심에 끌려서 기쁜 마음으로 행하는 일이 있어요. 사도 바울은 그 후자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한테 끌려서, 죄책에 끌려서, 저주 의식에 매여서…… 이렇게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가장 자유로운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직업적으로 돈벌려고 한 것도 아니고, 강제로 일을 하려고 한 것도 아닙니다. 그야말로 깨끗한 양심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김 바에 의하여 오늘까지 수고해왔습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유로이 신앙적 양심으로, 자유롭게 하나님을 섬겼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신앙적 의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이것은 신앙이다, 내가 믿는 하나님, 그가 나에게 계시하였고, 그가 나를 부르셨고,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인도하셨고, 내가 아는 율법, 그 진리를 따라서 내가 행했다, 하심입니다. 다시 말하면 확실한 신앙적 의지 안에서 내가 오늘까지 수고했노라, 하는 것입니다. 아주 담담합니다. 아주 깨끗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어요. 이 때,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분노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을 듣고, 당장에 저 놈의 입을 치라고 명령을 합니다. 그가 왜 이렇게 화를 냈을까-생각해 볼만한 문제입니다. 지금 대제사장은 바울을 죄인으로 잡아놓고 있습니다. 정죄 하려고 합니다. 결론은 이미 났습니다. 죄인으로 취급해서 다루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가 의인이라는 거예요. 잘못한 게 없다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대제사장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잘못이 노출되는 것이니, 저야말로 양심에 가책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바울의 당돌함에 대해서 그는 벌써 그 마음에 찔림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입장은 이렇습니다. 자신은 그 옛날 스데반을 정죄하고, 스데반을 돌로 쳤습니다. 천하에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이라고 생각해서 죄인으로 심판을 하고, 출교하고, 끌어내서 돌로 친 것입니다.
무릇 죄인은 죽을 때에 비참하게 죽어야 되지 않습니까? 이를 갈면서 억울하다고, 분하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오히려 사람들을 용서하면서 천사의 얼굴을 하고, 얼굴에 광채를 띠고 그렇게 죽어갔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바울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죄인이 저렇게 죽을 수가 있나, 마땅히 돌에 맞아 죽어 천벌을 받아야 할 사람이 어떻게 저런 얼굴을 하고 죽을 수가 있느냐-심리적으로 바울이 그 마음에 크게 찔림을 받았다고 많은 사람들이 설명을 합니다. 사실이 그런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 가책으로 인해 바울은 더 악해져서 예수 믿는 사람을 말살해버리고자 거친 행동을 하게 됐다고 합니다. 일리가 있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 보니 제사장이 부드럽지 못하고 여유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이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하니까, 당장에 "그 입을 치라(2절)"고 명합니다. 이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죄됨을 판단하고 죄가 있을 때에 매질(태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도 정하지 않고, 말을 다 들어보지도 않고, 먼저 입부터 치라는 것은 말도 안됩니다. 또 바울이 못할 말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한 것이 어째서 죄가 됩니까? 다시 말하면 제사장의 입장에서 볼 때에 바울이 벌벌 떨면서 용서해달라고 하든지, 지난날에 잘못했다고 하든지, 어쨌든 죄인된 모습이 있어야 하는데, 그가 너무 당당한 것입니다. 이것이 괴로웠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저들은 양심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해석합니다. 양심을 경건한 사람의 인격에서 나오는 도덕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고로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는 말씀이 저들에게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처럼 들린 것입니다. '저 천하에 용서할수 없는 죄인이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인다'고 생각합니다. 참람하다 여깁니다. 바울의 그 말이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는 것처럼 들린 것입니다. 바울은 사실을 말하고 있으나, 사실과는 거리가 먼 이 악한 사람들의 생각에는 이렇게도 전혀 다르게, 참람한 비방을 하는 죄로 들려졌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분노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만일에 바울이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섬겨서 정말로 잘못한 바가 없다면, 그를 죄인이라고 끌어다놓고, 죄인을 만들려던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반대로 이쪽이 죄인이 되는 거예요. 피고의 입장에서, 재판 받고 있는 사람이 '내가 죄가 없노라'한다면 그를 끌어온 재판장이 그 순간 당장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죄 없는 예수를 죄인이라고 재판한 빌라도는 그 자신이 죄인입니다.
결국은 자기의 죄인 됨을 증거 하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죄 없는 바울의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하는 선언을 들으면서 제사장 자기의 죄인 된 모습이 드러납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전면적으로 제사장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비양심적인 제사장을 심판하는 선언으로 들리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는 이렇게 발작을 하게 됩니다. 분노한 나머지 그 입을 치라고 소리를 지르게 됩니다. 오늘도 그러한 일을 많이 봅니다. 자, 잘못된 일을 하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의롭습니다. 저가 의로울 때에 내가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저가죄인이라고 책망하고 있는데 저가 옳다고 한다면, 그 순간에 내가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옳다고 할 때에 다른 사람이 나쁘고, 내가 바르다고 할 때에 다른 사람이 그르다고 하는, 그런 비판의 말로 들려지는 것입니다. 가끔 이런 문제 때문에 말없이 남을 비판하고 남을 심판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서 반항합니다.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3절)"-너는 회칠한 무덤과 같다, 겉으로는 멀쩡한 제사장이지마는 속에는 악이 있구나, 하나님 앞에서 공의를 재판하는 네가 이렇게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너를 치실 것이다 하심입니다. 당당한 얘기입니다 얼마나 용기 있는 얘기입니까? 특별히 오늘의 본문 3절을 자세히 보면 바울은 엄청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대단합니다. 아주 용기 있는 태도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입장입니다.
그런 때에 옆에서 누군가 말합니다.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4절)." 그 때에 사도 바울은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5절)"하고 말씀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학설이 있습니다.
사실로 사도 바울은 아나니아가 대제사장인 것을 몰랐다는, 문자 그대로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바울이 시력이 나쁘다, 지금 같으면 안경을 썼을 테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못했고, 바울은 편지를 잘 쓰고 읽을 만큼 눈이 좋지 못한데, 하물며 멀리 앉은 대제사장을 어떻게 알아봤겠느냐, 친분이 있는 사이도 아니니 못 알아봐서 이런 실수도 할 수 있지 않느냐'고 동정적으로 이야기해보기도 합니다. 또, 법정이 워낙 소란했기 때문에 누가 말하는지 몰라서 그렇게 말했다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 칼뱅은 아니라고, 바울이 몰랐을 리가 없다고 합니다. 분명히 대제사장인 줄 알고 한 말이라 합니다. 또 일부러 빈정거리면서 한 말이다, 라고까지 해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옆에서 저가 대제사장이라고 할 때에 바울은 곧 말을 돌립니다. 출애굽기 22장 28절을 인용해서 말씀합니다.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원을 비방치 말라 하였느니라(5절)"-재판정에 앉은 사람, 특별히 제사장을 함부로 비방하지 말라고 성경은 말씀하셨다, 그런고로 그가 대제사장인 줄 모르고 비방을 한 것이지,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았다면 나는 그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확실히 대제사장에게 팔리셨습니다. 대제사장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일에 원고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단 한번도 '화 있을진저 제사장들이여'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바리새인보다 대제사장이 훨씬 더 악합니다. 훨씬 더 잘못했어요. 그게 원형입니다. 악의 근본입니다.
'화 있을진저 서기관들이여, 화 있을진저 바리새인들이여'라고는 말씀하셨지만, '화 있을진저 제사장들이여'라는 말씀은 하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대제사장은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사사로운 단체입니다. 서기관도 그렇습니다. 종교 단체이기는 하지만 사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성전 섬기는 일로 기름부어 세워진 자는 제사장들뿐입니다. 그런고로 예수님께서는 제사장에게 체포되셔서 제사장의 고소를 당하시고 제사장으로 인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을 생각해서 '화 있을진저 제사장들이여'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그 이름을 소중히 여기시고 계십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도 보면, 바울이 '이랬든 저랬든 간에 저가 제사장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나는 이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방하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경건이자 신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오늘의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이 나름대로 하나의 작전계획을 세웁니다. 어떻게 하든 이 위기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하나의 계책을 세워봅니다. 이는 지극히 인간적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자세히 보았더니 거기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바리새인들이 이쪽에, 사두개인들이 저쪽에, 이렇게 두 패로 갈라져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서로서로 원수입니다. 사상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대결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일에만은 일치했습니다. 한마음이 됐어요. 심지어는 헤롯당까지. 헤롯당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은 본디 서로 하나가 되지 못하지만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그 한 가지 일에는 일치단결을 해서 결국에는 못박았습니다. 그런 그들이 오늘도 바울을 죽이기 위해서 모인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지혜를 냅니다. 썩 좋은 지혜는 아닙니다. 서로 싸움을 붙입니다. 그래서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6절)"-내가 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내가 부활이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라 말씀합니다. 이것, 말이 됩니다. 정말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바리새인들의 교리에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것이지요. 역사적으로 볼 때에 본래 사두개인들은 인간의지를 소중히 여기고,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예정과 뜻과 섭리를 소중히 여깁니다.
종말론적으로,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영혼불멸과 육체의 부활을 믿습니다. 또 영적 존재로 볼 때에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은 천사나 악마를 믿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천사와 영을 다 믿고 있습니다. 종교적 권위로 말하면 사두개인들은 모세오경,즉 기록된 성명만 믿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구약과 미쉬나, 즉 구전으로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도 믿고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릅니다. 더더욱 정치적으로 사두개인들은 요샛말로 하면 여당이라고볼 수가 있습니다. 정치적 권한을 쥐고 있어요. 대제사장도 그 쪽에 속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당시로 말하면 야당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서로 대치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간에 바울이 바리새인 편을 듭니다. 사도 바울이 본디 바리새인이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그가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 있다고 믿고, 부활이 있다고 주장해서 이것 때문에 핍박을 받습니다'합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을 보세요. "크게 훤화가 일어날새(9절)"--그들이 뭐라고 떠들었을 것 같습니까? 한쪽에서 바리새인들이 '그것 봐라, 부활이 있다', 사두개인들은 '없다'고 합니다. 있다 없다, 있다 없다. 그 자리에서 왈가왈부 합니다.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악한 것이 없도다(9절)"-벌써 싹바뀌었어요. 바리새인들이 바울 편으로 돌아서서 한 마디 하는 것입니다.
나쁜 것이 없다, 게다가 "혹 영이나 혹 천사가 저더러 말하였으면 어찌하겠느뇨(9절)"합니다. 이는 사두개인들은 믿지 않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천사가 바울에게 말하고 영에게 말한 것이라면 우리가 따라야 될 것 아니냐'함입니다. 지극히 바리새주의적인 표현입니다. 이렇게 바울을 옹호합니다. 자, 그래서 옹호되었을 것 같습니까? 바울의 말씀으로 해서 바리새인들은 어느 정도 바울 편을 들어주고, 밀어 주려고도 하고, 옹호하려고 하지만 이것을 본 사두개인들은 더 악해집니다. 제사장 파에서는 더 극악해집니다. 이제 좌우를 돌아볼 필요가 없어요. 바울을 찢어 죽이고자 합니다. 그래서 본문에 보니까, 바울이 찢길 것 같아서 천부장이 군사들에게 바울을 빨리 뒤로 빼내라고 하여영 문으로 데리고 들어갑니다. 그래서 바울이 죽음을 면했다 하는 것이 오늘의 본문의 내용입니다. 바울이 그 자리를 모면해 보려고 수단과 작전계획을 세워봤지만 결국에는 소용없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날 밤에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말씀하시고 위로하실 때에 "너 왜 쓸데없는 짓 했느냐?"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가만히 보면 바울이 머리를 깎은 것도 그렇고, 달리 여러 가지로 이 방법 저 방법을 써봅니다만, 그실 다 좋지 않은 일입니다. 엄격한 의미에서는, 전적으로 신앙으로 말미암은 행위도 아닙니다. 바울에게는 이런 인간적인 데가 있었어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것을 크게 책망하시지 않았습니다. 실수는 실수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사두개인들이 더 악해집니다. 이제는 정말 바울을 예루살렘에서는 석방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뒤에서 보겠습니다마는 바울이 석방되면 암살해버리겠다는 정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아주 바울을 죽이겠다고 맹세한 사람까지 생겼어요. 자, 이러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제는 정말 바울은 예루살렘 온 천지에, 유대 땅에 머무를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로 가게 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가 있는 것입니다.
만일에 바리새인들이 옹호하고 사두개인들이 이해했더라면 사도 바울은 이럭저럭 예루살렘에 머물렀을 거예요. 그러나 상황이 그렇지 못합니다.
그는 예루살렘과 유대에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게 되었어요. 사두개인들이 너무 악하게 되어 바울을 죽이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부득불 로마에 가기로 작정을 합니다. 정말로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본래적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11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이렇게 상황이 참 어려워졌을 때에 주께서 그의 곁에서 이르시니 이 얼마나 고맙습니까? 이것은 바로 계시입니다. 여러분, 어떤 분들은 환상을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 꿈이라도 꾸어봤으면 합니다. 그런데, 어느 때에 꾸는지 아십니까? 바로 이러할 때에 꾸는 것입니다. "그날 밤에"-아주 어려울 때, 바로 그날 밤에 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매를 맞고 환난을 당하고 아주 어려울 때, 생명이 경각에 이르렀을 때, 그 때에 주께서 위로하십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혹 여러분이 어려운 시련에 빠지게 될 때, 그 때에 주께서 여러분을 만나주십니다.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그러니까, 멀쩡한 사람들은 이상한 것 보려고 하지 마세요. 그렇게 바람직한 소원이 아닙니다. 자, 다시 한번 본문을 보세요.
"그날 밤에"-이것이 어느 때입니까? 이 얼마나 중요한 시간입니까? 이얼마나 어렵고 괴로운 시간입니까?
그리고 주께서 바울의 곁에 서서 이르십니다.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11절)"-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먼저,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네가 재판받을 때에 옆에 섰노라, 하심입니다.
우리집 얘기를 하나 해보겠습니다. 토요일 밤에 제가 손녀와 같이 기도를 했습니다. 저는 잠 잘자게 해달라고 기도했지요, 그랬더니 손녀가 "할아버지, 나도 기도할께" 하고는 "하나님, 할아버지가 피곤하신데도 내일 네 번 설교를 하시게 됩니다. 주님께서 곁에 서 계셔주세요"하고 기도합니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그렇게 기도하니까 얼마나 예쁘던지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주님이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외로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네 곁에 있다, 네가 듣고 보지 못했지만, 네 눈에는 안보이지만 나는 항상 네 곁에 있다 하심입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이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너와 함께 고난을 당하고 있느니라,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담대하라(11절)"-용기를 내라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담대하라는 이 말이 헬라어 원문상으로 잘 살펴보면 성경에 365번 나옵니다. 이것을 연구한 어느 학자는 '성경에 이 말씀이 365번 있는 것은 매일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것은 아니겠습니다마는 재미있는 얘기입니다.
어쨌든 주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 담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주십니다. 이제는 용기만이 문제입니다. 그 다음에 주님께서는 용기의 근거를 말씀하십니다.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참 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로마에서 네가 증거하리라, 네가 가서 가이사 앞에 서리라, 말씀하시면서도 네가 어느 달 어느 날에 서리라, 어떤 과정을 통해 가리라, 하시는 말씀은 없습니다. ending은 분명한데 어느 길로 통해서 가는지 바울은 모릅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좀더 깊이 말씀드리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분명히 행복합니다. 그런데 어떤 과정을 통해서 내게 행복이 오는지 그것은 미지수입니다. 주님께서 사도 바울은 분명히 로마에 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이사 앞에 설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어느 달 어느 날에, 어떻게 어떻게…… 그런 말씀은 없으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이 있은 2년 후에로마에 갑니다. 배를 타고 가다가 배가 파손되어 어려운 고생을 치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금 말씀하십니다. 걱정 말라, 너는 로마로 간다, 가는 것은 틀림이 없다, 모로 가든 바로 가든 가기는 간다 하심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종말은 주님께서 허락해주십니다.
또 이것은 약속적 신앙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실 때에 가나안을 네게 주마,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을 네게 준다 하셨습니다. 그러면 주시는 줄로 아는 것입니다. 언제 가든지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믿기를 원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오늘도 바울에게 이 신앙을 확정해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약속한다, 너는 로마에 가서도 복음을 증거하리라, 너는 살아남을 것이야, 죽지 않아, 누가 너를 때린다고 맹세해도 걱정하지 말라, 누가 너를 죽인다고 해도 절대 죽지 않는다 하심입니다.
서부영화를 보게 되면 재미있는 게 뭐냐 하면 주인공은 절대 안 죽는 것입니다. 참 이상하죠? 아무리 총을 쏘아도 안 죽어요. 영화 끝날 때까지 주인공은 살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happy ending입니다. 이게 서부영화의 특징입니다.
바울 역시 틀림없는 happy ending입니다. 결국에 그는 로마까지 갑니다. 주님께서는 '누가 이를 갈든 욕을 하든 저주하든 걱정하지 말아라, 너는 로마에 간다, 그곳에서도 증거하리라'라고 약속 신앙을 확정해주십니다. 이것을 믿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고로 "담대하라"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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