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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1:6~8)

by 【고동엽】 2022. 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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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1:68)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사심이 이 때이니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하시는 본문 8절말씀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자 지상명령(至上命令)입니다. 어쩌면 사도행전 전체에 걸쳐 가장 핵심이 되는 요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귀하고도 중차대(重且大)한 분부입니다.

형식상으로 볼 때에 이 말씀은 주님께서 땅 위에 계실 때에 주신 말씀으로는 마지막 당부말씀입니다. 곧 유언(遺言)의 말씀,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이 됩니다. 일반적으로 유언이라고 하면 숨거두기 직전에 하는 말입니다. 'Last word'입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예수님의 이 유언은 여느 사람의 여느 유언과 좀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유언은 숨거두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이 아니라 승천(昇天)하시기 직전에 주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의 저 성만찬의 밤에도 '유언'같은 말씀을 하셨고, 내용상으로는 어느 말씀이건 더없이 귀하고 중요한 말씀입니다 마는 굳이 '형식상'으로 구분해보자고 한다면 하늘로 올리워 가시기 직전에 감람원에서 남기신 바 본문 8절의 이 말씀이 '진짜' 유언이 된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비록 모든 말을 다 잃어버린다 하더라도 주님의 이 마지막 말씀만은 반드시 기억하고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부모의 유언을 망각하는 자는 그 부모의 자녀랄 수 없듯이 주님의 '유언'을 명심하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랄 수 없는 것입니다.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하고, 제자들이 끈질기게 질문을 하는 데서 오늘의 본문말씀은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저들의 정치적인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질문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이전부터 저들이 간절하게 기다려왔던 소망이었던 것 같습니다. 흔히 말하는 메시야 대망사상-Messianic expectation은 이스라엘의 혼()이라 할만큼 끈질긴 것이었습니다. 정치고 경제고 문화고 할 것 없이 모든 게 엉망이어서 무엇 하나 기대할 것이 없었던 저들에게 남은 유일한 소망이 메시야 오심이었습니다. 메시야만 오시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것이라고, 그 때만을 일구월심(日久月深)으로 앙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문제를 정치적인 입장에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라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나라 찾기를 소망했습니다. 가난했기 때문에 부해지기를 소망했습니다. 눌렸기 때문에 자유해 지기를 소망했습니다. 흩어져 살았기 때문에 모여 살기를 소망했습니다. 하도 억울하게 살다보니 '다윗의 권세를 회복하여 우리도 한번 빛을 보고 살아보았으면' 했습니다. 간절하게 소망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욕망이라 하겠습니다. 그렇게 살아오던 저들인지라 예수님의 공생애(共生涯) 3년 동안에도 기회 있을 때마다 여쭈어보지 않습니까? 이 때입니까, 저 때입니까, 언제가야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 이제나저제나 하고 메시야의 나라가 하루속히 이루어지기를 애타게 고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엄연히 눈앞에 메시야 예수님을 뵈오면서도 저들은 정치적인 엄청난 변혁이 언제가야 있을지, 세상이 뒤집어지는 대사건이 언제가야 일어날지 몰라, 그것만을 생각하고 조바심이 났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다음에도 저들은 이 문제를 노골적으로 말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2421절을 보십시다. "우리는 이 사람(예수님)이 이스라엘을 구속(救贖)할 자라고 바랐노라." 그런데 실없게도 십자가에 죽으시고 말았다며 실망하는 두 제자, 엠마오로 가는 그 제자들의, 부활하신 예수님과 번연히 같이 걸으면서도 예수님임을 알아 뵙지 못하는 허약한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부활을 하셨습니다. 잔뜩 기대를 하고 있는 터에 덜컥 십자가를 지심으로 크게 낙담했었던 저들의 눈앞에 예수님께서 버젓이 큰 권능과 함께 다시 나타나신 것입니다. 저들은 다시금 '이 때로다' 싶었습니다. 이제야말로 '메시야의 나라'가 이루어지려나 보다 싶고, 마침내 결정적인 때가 왔나보다 싶었습니다.

감람원에 모였을 때에 저만치 예루살렘이 내려다보입니다. 주님께서 저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하고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이 여쭙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조바심이 나서 간절하게 여쭈어보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서 우리는 세 가지의 관심사를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타이밍에 관한 것입니다. 이 때입니까, 즉각적입니까, 바로 지금입니까 하는 물음이요, 또 하나는 저들의 선민사상의 발로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를……"하고 말합니다.

메시야의 나라라면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민족, 이 선택받은 민족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이런 마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회복'입니다.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합니다. 다윗의 왕국, 솔로몬의 그 영광을 회복하는 결정적인 때가 지금입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저들은 정치적 변혁, 경제사회적인 큰 변화를, 눈에 보이는 그런 외적 변화를 기대하고 있음입니다. 천지개벽과도 같은 변화를 통하여 오는 민족의 영광을, 그 회복을 기대하고 있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뜻밖이었습니다. 저들의 메시야 대망을 바로 대고 꾸짖거나 비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정치적으로 이스라엘나라가 회복되는 것과 같은 일은 없다고 잘라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쓸데없는 것 기다리지 마라, 메시야의 나라가 어디에 있다는 말이냐 하고 말문을 막으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때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현상에 대하여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메시야 대망사상 그 자체를 비판하거나 잘못됐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어느 때에고 메시야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은 기정사실이니까요. 메시야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교회가 건설되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그 날은 당연히 있기 때문에 그 문제에 대해서는 비록 그들에게 다소간의 오해가 있다 해도 그것을 비난하거나 꾸짖으시지는 않으시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때와 기한을 말씀하실 뿐입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오늘인지, 내일인지, 아니면 10년 후인지, 이 문제에 관해서 만은 너희의 알 바가 아니라고 말씀하심입니다. 여기에는 귀중한 의미가,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너희의 알 바 아니다-생각해보십시다. 조금 다르게 설명하면 이렇게도 됩니다. '너희의 수준이 아직은 그것을 알 때가 못된다, 그런 것은 너희가 생각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요사이도 보면 결정적 종말론이니 시한부적 종말론이니 하다가 실수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천 년 역사를 통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실수했습니까? 어느 날에 오신다 어느 날에 오신다 하다가 심지어는 흰옷을 입고 산에까지 올라가 있다가 공치고 내려온 사람도 많습니다. 어느 날이다 했다가 틀리니까 1년 후다 했다가 또 안되니까 망신당한 사람이 참 많습니다. 저도 하나 겪은 일이 있는데 30여 년 전에 제가 인천에서 목회 할 때입니다. 1226일 날에 예수님 오신다고 하는 분이 한 분 있었어요. 자기가 계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서 김치 해놓았던 것 다 남들에게 퍼주고 입던 것도 남 주고 그날만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할 수 없이 내기를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만일에 그날 오시지 않으면 어떡하겠소? 나는 분명히 안 오실 줄로 압니다만……" 그랬더니 "안 오시면 제가 일생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교회에 충성하겠습니다"라는 말도 합니다. 이윽고 26일 날이 되었습니다. 그분은 부끄러웠던지 그 다음날로 사라져버렸어요.

어디론지 소리소문 없이 이사를 가버렸습니다.

모름지기 겸손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때와 기한을 우리가 아는 게 좋겠습니까, 모르는 게 좋겠습니까? 더 쉽게 생각해봅시다. 내가 죽을 날을 내가 알아야 좋겠습니까, 몰라야 좋겠습니까? 모르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죽 잘 알아하시겠어요? 별것을 다 알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너희의 알 바 아니다 하셨으면 ""하고 말 것입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왜 오늘이다 내일이다 하고 촐싹거리는 것입니까? 어느 누가 뭐라 해도 믿지 말 것입니다.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주님의 이 한마디 말씀만 믿고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에만 "Yes, I do"할 것입니다.

언젠가 실제로 목도한 일입니다. 열 살배기 어린아이가 어머니하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엄마, 내가 어디서 나왔어?" "내가 낳았지." "어디로 낳았느냐니까." 어머니가 설명을 해주겠어요? 그래도 눈치 없는 아이는 자꾸만 물어봅니다. 어머니가 어떻게 하나 보자 했더니, ''하고 아이를 쥐어박아요. 그러면서 하는 소리가 "짜식아, 너도 크면 알아!"입니다. 자식 교육 잘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생각해보니 제가 그런 경우를 당했다 해도 별 재주가 없어요.

여러분, 이런 것이 대답할 수 있는 성격의 문제입니까? 사람들이 주책없이 알겠다는 것이 참 많습니다. 필요 없이 알겠다는 것이 참 많습니다. 내 알 바 아닌 것을 다 알겠다고 합니다. 몰라야 될 것은 모르는 것이 좋아요. 묻지도 말 것입니다. 호기심부터 가지지 말 것입니다.

"너희의 알 바 아니요" 하셨으니 "알았습니다. 누가 뭐라해도 관심을 가지지 않겠습니다"하고 믿어둘 것입니다. 이렇게 믿는 사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여기에 그리스도가 있다 하면 그리로 가보고, 이 사람 이 소리, 저 사람 저 소리에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할 것이 아닙니다. 대체로 꿈과 현실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정신병자가 따로 있나요? 그런 사람이 정신병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알 바 아니요……" 그러니 그런 줄 아십시다. 하나님의 권한에 두셨다고 말씀하셨으니 하나님께 위탁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알아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면 알려주십니다. 몰라야 할 것이니까, 모르는 것이 좋으니까 숨겨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것이지 나의 문제가 아니라고 믿는 겸손이 필요한 것입니다. 믿음과 인내로 소화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맡길 것입니다. 모르는 게 좋으니까 모르게 하시는가보다 하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시한부 종말론 따위에 호기심조차 가지지 말 것입니다. 언제 오실까 하는 문제에는 관심을 둘 것이 아니요,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따로 있습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하셨습니다. 공연히 천지개벽 따위에 마음쓰지 말고, 우주가 어떻게 돌아가고 세계가 어떻게 망하고에는 관심을 두지 말고, 주께서 내게 맡기신 일에 오로지 충실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문법상으로 보면 미래 수동태(受動態)입니다.

단어는 두 단어입니다. "능력을 받게 되리라""증인이 되리라"입니다. 두 말씀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능력을 받게 되리라, 그리하면 증인이 되리라 하심입니다. 문제는 세상이 아니고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고 우주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너희가 권능을 받고, 또 증인이 되리라 말씀하심입니다. 가끔 우리는 성경에 없는 이야기들을 많이 듣습니다. "증인이 되라"라고 비성서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증인이 되라는 말은 성경에 없어요. 증인이란 되라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이 부족하시기에 우리보고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성경을 똑바로 읽어야 됩니다. "증인이 되리라"입니다. 마가복음 1615절에 보면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전파한다는 말과 증인이 된다는 말은 다릅니다. "증인이 되리라"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가끔 보면 별생각 없이 그저 "증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적 없습니다. "증인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to do'가 아니고 'to be done'입니다. 주동자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되게 하시리라, 하나님께서 너희로 증인이 되게 하시리라, 그래서 증인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으로 증인이 될 것이다 - 이 말씀인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권능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권능이 문제입니다.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권능을 받아야 합니다. 권능을 받고야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헬라어로 '뒤나미스'라고 하는 이 권능(權能)은 내가 받고자 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께서 내게 임하심으로 저절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권능의 성격을 한번 깊이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세상을 개혁한다거나 혁명한다거나 하는 권능이 아닙니다. 천지개벽시키는 권능이 아닙니다. 외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권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권능의 내용은 제자를 향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제자들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권능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되게 하는 권능, 참된 제자 되게 하는 권능, 사도 되게 하는 권능, 나아가 증인되게 하는 권능인 것입니다. 비겁한 제자, 도망간 제자, 형편없는 제자를 변화시켜서 능력의 증인 되게 하는 권능인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권능입니다. 최고의 권능입니다. 명심할 것입니다.

언젠가 있었던 목사고시 때의 일입니다. 신학대학을 나온 뒤에 2년 동안 훈련을 받고 나서 목사고시를 치르게 됩니다. 목사고시에 합격하면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게 되고, 그리고 곧바로 교회의 일꾼으로서의 목사가 됩니다. 그 목사고시의 마지막에 면접시험이 있습니다. 그 면접시험 시간에 제가 30명을 맡아서 그들 한사람 한사람과 만나 이력서와 자기 소개서에 적힌 경력을 보면서 면접을 했습니다. 여러 가지로 물어보고 여러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그 가운데 제가 가장 중점을 두고 물어본 것이 하나 있습니다. "당신은 이제 목사가 될 것입니다. 당신이 목사가 되어서 앞으로 일을 해나가는 가운데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일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앞으로 목회 하면서 목사의 길을 가면서 부딪히게 될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출발할 것인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예배당 짓는 것이 가장 큰일이라느니, 교회의 정치적인 문제가 가장 큰 문제라느니, 어쩌고저쩌고 대답이 가지각색 이었습니다마는, 제가 바라는 대답이 나오지를 않아 좀 섭섭했습니다. 그래도 비슷하게 대답한 사람이 30명 가운데 한 사람이나마 있었기에 다소 위안은 되었습니다. 제가 바라는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나 자신을 이기는 것이 제일 어려운 일이겠지요." 이 말 한마디만 나오면 더는 아무 것도 묻지 않고 합격시키려고 했는데, 좀처럼 그 대답이 나오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성경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성경이 말씀하는 권능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원수를 때려부수는 권능이 아닙니다. 세상을 둘러엎는 변화가 아닙니다. 로마정부를 때려부수는 권능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권능은 자기를 이기는 권능입니다. 비겁한 사람들이 변해서 용기 있는 사람이 되는, 핍박도 죽음도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의 참 증인되는 권능인 것입니다. "너희가 권능을 받고" - 얼마나 귀중한 말씀입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세상이 잘못되었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위하여 기도하십니까? 중요한 문제는 나 자신을 이기는 것입니다. 나 자신에 대한 문제가 가장 큰 문제입니다. 돈버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이기지는 못합니다.

좀더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이 권능은 자기를 이길 뿐더러 하나님의 사람으로 굳게 서게 합니다. 이 권능은 핍박이 있는 세상을 넉넉히 이기게 할 뿐더러 원수도 용서하게 합니다. 악한 세대에도 절망하지 않고 저들을 사랑합니다. 사랑해야 복음을 전할 것이 아닙니까? 미워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할 수는 없습니다. 악한 세대이지만 그래도 여기에 소망을 걸고, 조금도 낙심하지 않고 저들을 향하여 복음을 전합니다. 이것은 뜨거운 사랑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이 사랑으로 원수를 사랑합니다.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뜨거운 사랑이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것 - 이것이 권능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권능입니다.

우리가 권능을 받아서 권능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좀더 근본적인, 좀더 원천적인 것이 필요합니다. 먼저, 성령께서 임하심으로 우리가 권능의 사람이 됩니다. 오늘의 본문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을 받으면 권능을 받고, 권능을 받으면 주인이 됩니다. 이것이 순서입니다. 문제는 성령입니다. 여러분, 성령이란 무엇입니까? 성령은 곧 권능입니다.

성령은 단순한 깨달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지식만 얻는 것이 아닙니다. 감동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만 얻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성령은 곧 권능입니다. 그렇습니다. 뒤나미스는 능력이요 power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는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은 여기에 있습니다. 무엇을 좀 배우고 깨닫고 지식을 얻었다고 해서 기뻐하고 감격하고 할렐루야 할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받았으면 당장 문간에 나서서 원수를 사랑할 수 있고, 나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게 더는 원수도 없고 미워하는 사람도 없고 질투도 없고 실망도 없어야 합니다. 이것이 권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풀지 못한 문제가 많고 쉽게 화를 내고 섭섭해하고 원망불평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권능이 아닙니다. 권능 가까이에 조차 가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임하심으로 권능을 받습니다. 성령은 곧 권능이요 능력을 주시는 존재입니다. 권능으로서의 성령, 능력으로서의 성령-이것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은 이어서 말씀합니다.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성령을 못받으면 증인될 수 없습니다. 권능을 못 받으면 증인될 수 없습니다. 증인은 되란다고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못 받은 사람이 무슨 증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성령을 받아야만 권능을 받고, 권능을 받아야만 증인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증인'은 헬라어로 '말투리아'라고 하는데 아주 재미있는 말입니다. '말투리아'를 영어로 옮겨놓으면 '마터(martyr)'가 됩니다. '마터''순교자'라는 뜻입니다. 프랑스 파리에 가면 몽마르트르(Montmartre)라는 잘 알려진 언덕이 있습니다. '몽마르트르'''''이라는 뜻이고 '마르트르''순교자'라는 뜻입니다. 옛날 그 자리에서 사람들이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순교자의 마을이라 해서 몽마르트르라고 이름 붙여진 것입니다.

글레멘드(Clement)교부는 순교자를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피 흘리기까지 증거 하는 사람이 순교자다. 순교자만이 증인이다.' 여기서 증인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증인(證人)이 무엇입니까? 증인은 자신의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지식을 공급하는 사람을 가리켜 증인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재판정에서 증인을 세우고 재판할 때에도 한번 보십시오. 증인으로 나온 사람이 "내 생각에는요, 내가 느끼기에는요……"라고 말하다가는 대번에 판사가 저리 가라 합니다. 증인은 간단합니다. '보았습니다, 들었습니다'하면 끝나는 것입니다. 경험한 바 그대로만 말하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증인이란 어떠한 진리를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의 사실성을 말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사실이냐 아니냐, 보았느냐 못 보았느냐, 경험했느냐 안했느냐 - 그 진실만을 말하는 것이 증인입니다. 때문에 증인은 반드시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경험 없는 사람은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경험적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일생동안 책을 읽었다고 해서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간증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증인에게는 내가 위하여 증거 하는 분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내가 보았다고는 하지만 끌려가서 증인이 되는 것은 사실 귀찮지 않습니까? 그래서 흔히들 못봤다 하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저분이 억울하게 고생하고 있기 때문에 부끄럽지만, 귀찮지만 그것을 떨치고 증인으로 나설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증인은 사실을 사실이라고 말함으로 오는 불이익을, 손해를, 핍박을 받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 굳건한 결단이 있을 때에야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도 가끔 보면 도둑맞은 집, 강도 당한 집은 많은데 신고는 잘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신고를 왜 안 하느냐 물어보면 신고했다가 그 다음에 당할 보복이 두렵고 귀찮아서랍니다. 그래서 손해보고 말지 합니다. 때문에 고발정신이 점차로 희미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손해가 나더라도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사실을 사실대로 밝혀야 하겠다고 하는 용기가 있어야 하는데 사람들은 거개가 그렇지를 못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사건의 진실을 진실대로 말함으로써 오는 모든 불이익과 손해를 내가 위하여 증거 하는 그분과 함께 할 수 있는 마음이 있을 때에야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에 증인이 되었다고 할 때에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운명을 함께 할 마음이 없으면 증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나아가 증인에게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담력이 필요합니다. 목이 떨어져도 할말은 해야 합니다.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 - 내가 본 것이요 진리입니다. 이것을 증거해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용기와 담력이 있어서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 증거 하는 방법을 알아봅시다. 첫째는 말로 증거 합니다.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다 하고 말로 증거 합니다. 둘째는 몸으로 증거 합니다. 행동으로 증거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되어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기에 몸으로 증거 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죽음으로 증거 합니다. 여러분, 증거 가운데서도 가장 큰 증거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증인입니다. 부활의 증인은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증거 함으로 오는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거의가 순교했습니다.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 사실을 증거하기 위하여 저들은 서슴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죽을 수 있었습니다. 보십시오. 증인은 순교로 연결됩니다. 순교가 아니고는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천국을, 부활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죽을 때가 되어서는 벌벌 떱니다. 안 죽겠다고 살려달라고 바득바득 소리를 질러댑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까? 가끔 임종을 앞둔 분을 병원으로 찾아가 만나보는 일이 있습니다. 예수 잘 믿는 사람들은 이미 준비를 다해놓고 기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럴 때면 저는 "내일 아침 다시 만납시다, 죽어서 천당가서 만납시다"라고 인사를 건넵니다. 그러면 그분은 "그럼요, 제가 조금 먼저 갈 것이니 할 일 다하시고 나중에 오세요"하고 되받습니다. 이쯤 되어야 예수 믿는 사람이지요. "천당이 어디 있어요?"-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예수를 믿고 내세를 믿고 부활을 믿는 사람은 평안을 맞을 수 있습니다. 순교마저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 속에 증거가 있습니다. 순교가 아니고는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결국, 순교자는 증인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천사의 얼굴을 할 수 있었던 스데반도, 칼로 목베임을 당한 야고보도,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힘을 당한 베드로도, 도끼로 목베임을 당한 바울도,…… 그 죽음이 순교였기에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에 가보면 사도 바울을 목베어 죽일 때에 사용했던 도구를 만들어 전시해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보니 옛 우리 나라에서처럼 앉혀놓고 칼로 친 것이 아니라, 커다란 절구통같이 생긴 나무토막을 가져다놓고 그 위에 목을 걸치게 해서 도끼질을 했더군요. 이렇게 비참한 죽음이었으나, 바울은 이것조차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부활이 확실하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부활할 것을 믿기 때문에 기쁨으로 죽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자가 증인입니다.

베드로는 늘 말씀합니다. 사도행전 232, 315, 532, 1039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다"라고 거듭거듭 말씀합니다. 우리가 보았고 우리가 경험했다고 증거 합니다. 베드로는 입버릇처럼 말씀합니다. 내가 눈으로 보았고 손으로 만졌고 분명히 예수님과 함께 했다고 말입니다. 다 경험한 것이요, 우리가 증인이라고 말입니다. 신학적으로 의미를 생각한다면 증인이란 증거 함으로 사건의 뜻을 현실화하는 사람입니다. 엄연한 사실이지만, 이것이 다시 사건으로 재현되기 위해서는, 능력화하기 위해서는 증인이 필요합니다. 증거가 되면서 이것이 현실화하고, 능력화하고, 생명화 하는 것입니다. 생명력으로 화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증거와 함께 믿어지고, 믿어지는 그 순간에 마음속에서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증거는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은 곧 증거의 영()입니다. 다시 한번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 공간적으로는 온 세계에 이 복음이 전파될 것이요, 시간적으로는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세상 끝날까지 이 복음이 전파될 것이라고 말씀함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심으로 우리가 권능을 받고, 권능을 받음으로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지막 당부의 말씀이요, 마지막 약속의 말씀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1:68)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사심이 이 때이니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하시는 본문 8절말씀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자 지상명령(至上命令)입니다. 어쩌면 사도행전 전체에 걸쳐 가장 핵심이 되는 요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귀하고도 중차대(重且大)한 분부입니다.

형식상으로 볼 때에 이 말씀은 주님께서 땅 위에 계실 때에 주신 말씀으로는 마지막 당부말씀입니다. 곧 유언(遺言)의 말씀,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이 됩니다. 일반적으로 유언이라고 하면 숨거두기 직전에 하는 말입니다. 'Last word'입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예수님의 이 유언은 여느 사람의 여느 유언과 좀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유언은 숨거두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이 아니라 승천(昇天)하시기 직전에 주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의 저 성만찬의 밤에도 '유언'같은 말씀을 하셨고, 내용상으로는 어느 말씀이건 더없이 귀하고 중요한 말씀입니다 마는 굳이 '형식상'으로 구분해보자고 한다면 하늘로 올리워 가시기 직전에 감람원에서 남기신 바 본문 8절의 이 말씀이 '진짜' 유언이 된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비록 모든 말을 다 잃어버린다 하더라도 주님의 이 마지막 말씀만은 반드시 기억하고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부모의 유언을 망각하는 자는 그 부모의 자녀랄 수 없듯이 주님의 '유언'을 명심하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랄 수 없는 것입니다.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하고, 제자들이 끈질기게 질문을 하는 데서 오늘의 본문말씀은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저들의 정치적인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질문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이전부터 저들이 간절하게 기다려왔던 소망이었던 것 같습니다. 흔히 말하는 메시야 대망사상-Messianic expectation은 이스라엘의 혼()이라 할만큼 끈질긴 것이었습니다. 정치고 경제고 문화고 할 것 없이 모든 게 엉망이어서 무엇 하나 기대할 것이 없었던 저들에게 남은 유일한 소망이 메시야 오심이었습니다. 메시야만 오시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것이라고, 그 때만을 일구월심(日久月深)으로 앙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문제를 정치적인 입장에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라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나라 찾기를 소망했습니다. 가난했기 때문에 부해지기를 소망했습니다. 눌렸기 때문에 자유해 지기를 소망했습니다. 흩어져 살았기 때문에 모여 살기를 소망했습니다. 하도 억울하게 살다보니 '다윗의 권세를 회복하여 우리도 한번 빛을 보고 살아보았으면' 했습니다. 간절하게 소망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욕망이라 하겠습니다. 그렇게 살아오던 저들인지라 예수님의 공생애(共生涯) 3년 동안에도 기회 있을 때마다 여쭈어보지 않습니까? 이 때입니까, 저 때입니까, 언제가야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 이제나저제나 하고 메시야의 나라가 하루속히 이루어지기를 애타게 고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엄연히 눈앞에 메시야 예수님을 뵈오면서도 저들은 정치적인 엄청난 변혁이 언제가야 있을지, 세상이 뒤집어지는 대사건이 언제가야 일어날지 몰라, 그것만을 생각하고 조바심이 났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다음에도 저들은 이 문제를 노골적으로 말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2421절을 보십시다. "우리는 이 사람(예수님)이 이스라엘을 구속(救贖)할 자라고 바랐노라." 그런데 실없게도 십자가에 죽으시고 말았다며 실망하는 두 제자, 엠마오로 가는 그 제자들의, 부활하신 예수님과 번연히 같이 걸으면서도 예수님임을 알아 뵙지 못하는 허약한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부활을 하셨습니다. 잔뜩 기대를 하고 있는 터에 덜컥 십자가를 지심으로 크게 낙담했었던 저들의 눈앞에 예수님께서 버젓이 큰 권능과 함께 다시 나타나신 것입니다. 저들은 다시금 '이 때로다' 싶었습니다. 이제야말로 '메시야의 나라'가 이루어지려나 보다 싶고, 마침내 결정적인 때가 왔나보다 싶었습니다.

감람원에 모였을 때에 저만치 예루살렘이 내려다보입니다. 주님께서 저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하고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이 여쭙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조바심이 나서 간절하게 여쭈어보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서 우리는 세 가지의 관심사를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타이밍에 관한 것입니다. 이 때입니까, 즉각적입니까, 바로 지금입니까 하는 물음이요, 또 하나는 저들의 선민사상의 발로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를……"하고 말합니다.

메시야의 나라라면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민족, 이 선택받은 민족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이런 마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회복'입니다.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합니다. 다윗의 왕국, 솔로몬의 그 영광을 회복하는 결정적인 때가 지금입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저들은 정치적 변혁, 경제사회적인 큰 변화를, 눈에 보이는 그런 외적 변화를 기대하고 있음입니다. 천지개벽과도 같은 변화를 통하여 오는 민족의 영광을, 그 회복을 기대하고 있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뜻밖이었습니다. 저들의 메시야 대망을 바로 대고 꾸짖거나 비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정치적으로 이스라엘나라가 회복되는 것과 같은 일은 없다고 잘라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쓸데없는 것 기다리지 마라, 메시야의 나라가 어디에 있다는 말이냐 하고 말문을 막으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때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현상에 대하여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메시야 대망사상 그 자체를 비판하거나 잘못됐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어느 때에고 메시야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은 기정사실이니까요. 메시야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교회가 건설되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그 날은 당연히 있기 때문에 그 문제에 대해서는 비록 그들에게 다소간의 오해가 있다 해도 그것을 비난하거나 꾸짖으시지는 않으시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때와 기한을 말씀하실 뿐입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오늘인지, 내일인지, 아니면 10년 후인지, 이 문제에 관해서 만은 너희의 알 바가 아니라고 말씀하심입니다. 여기에는 귀중한 의미가,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너희의 알 바 아니다-생각해보십시다. 조금 다르게 설명하면 이렇게도 됩니다. '너희의 수준이 아직은 그것을 알 때가 못된다, 그런 것은 너희가 생각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요사이도 보면 결정적 종말론이니 시한부적 종말론이니 하다가 실수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천 년 역사를 통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실수했습니까? 어느 날에 오신다 어느 날에 오신다 하다가 심지어는 흰옷을 입고 산에까지 올라가 있다가 공치고 내려온 사람도 많습니다. 어느 날이다 했다가 틀리니까 1년 후다 했다가 또 안되니까 망신당한 사람이 참 많습니다. 저도 하나 겪은 일이 있는데 30여 년 전에 제가 인천에서 목회 할 때입니다. 1226일 날에 예수님 오신다고 하는 분이 한 분 있었어요. 자기가 계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서 김치 해놓았던 것 다 남들에게 퍼주고 입던 것도 남 주고 그날만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할 수 없이 내기를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만일에 그날 오시지 않으면 어떡하겠소? 나는 분명히 안 오실 줄로 압니다만……" 그랬더니 "안 오시면 제가 일생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교회에 충성하겠습니다"라는 말도 합니다. 이윽고 26일 날이 되었습니다. 그분은 부끄러웠던지 그 다음날로 사라져버렸어요.

어디론지 소리소문 없이 이사를 가버렸습니다.

모름지기 겸손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때와 기한을 우리가 아는 게 좋겠습니까, 모르는 게 좋겠습니까? 더 쉽게 생각해봅시다. 내가 죽을 날을 내가 알아야 좋겠습니까, 몰라야 좋겠습니까? 모르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죽 잘 알아하시겠어요? 별것을 다 알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너희의 알 바 아니다 하셨으면 ""하고 말 것입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왜 오늘이다 내일이다 하고 촐싹거리는 것입니까? 어느 누가 뭐라 해도 믿지 말 것입니다.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주님의 이 한마디 말씀만 믿고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에만 "Yes, I do"할 것입니다.

언젠가 실제로 목도한 일입니다. 열 살배기 어린아이가 어머니하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엄마, 내가 어디서 나왔어?" "내가 낳았지." "어디로 낳았느냐니까." 어머니가 설명을 해주겠어요? 그래도 눈치 없는 아이는 자꾸만 물어봅니다. 어머니가 어떻게 하나 보자 했더니, ''하고 아이를 쥐어박아요. 그러면서 하는 소리가 "짜식아, 너도 크면 알아!"입니다. 자식 교육 잘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생각해보니 제가 그런 경우를 당했다 해도 별 재주가 없어요.

여러분, 이런 것이 대답할 수 있는 성격의 문제입니까? 사람들이 주책없이 알겠다는 것이 참 많습니다. 필요 없이 알겠다는 것이 참 많습니다. 내 알 바 아닌 것을 다 알겠다고 합니다. 몰라야 될 것은 모르는 것이 좋아요. 묻지도 말 것입니다. 호기심부터 가지지 말 것입니다.

"너희의 알 바 아니요" 하셨으니 "알았습니다. 누가 뭐라해도 관심을 가지지 않겠습니다"하고 믿어둘 것입니다. 이렇게 믿는 사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여기에 그리스도가 있다 하면 그리로 가보고, 이 사람 이 소리, 저 사람 저 소리에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할 것이 아닙니다. 대체로 꿈과 현실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정신병자가 따로 있나요? 그런 사람이 정신병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알 바 아니요……" 그러니 그런 줄 아십시다. 하나님의 권한에 두셨다고 말씀하셨으니 하나님께 위탁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알아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면 알려주십니다. 몰라야 할 것이니까, 모르는 것이 좋으니까 숨겨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것이지 나의 문제가 아니라고 믿는 겸손이 필요한 것입니다. 믿음과 인내로 소화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맡길 것입니다. 모르는 게 좋으니까 모르게 하시는가보다 하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시한부 종말론 따위에 호기심조차 가지지 말 것입니다. 언제 오실까 하는 문제에는 관심을 둘 것이 아니요,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따로 있습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하셨습니다. 공연히 천지개벽 따위에 마음쓰지 말고, 우주가 어떻게 돌아가고 세계가 어떻게 망하고에는 관심을 두지 말고, 주께서 내게 맡기신 일에 오로지 충실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문법상으로 보면 미래 수동태(受動態)입니다.

단어는 두 단어입니다. "능력을 받게 되리라""증인이 되리라"입니다. 두 말씀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능력을 받게 되리라, 그리하면 증인이 되리라 하심입니다. 문제는 세상이 아니고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고 우주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너희가 권능을 받고, 또 증인이 되리라 말씀하심입니다. 가끔 우리는 성경에 없는 이야기들을 많이 듣습니다. "증인이 되라"라고 비성서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증인이 되라는 말은 성경에 없어요. 증인이란 되라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이 부족하시기에 우리보고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성경을 똑바로 읽어야 됩니다. "증인이 되리라"입니다. 마가복음 1615절에 보면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전파한다는 말과 증인이 된다는 말은 다릅니다. "증인이 되리라"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가끔 보면 별생각 없이 그저 "증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적 없습니다. "증인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to do'가 아니고 'to be done'입니다. 주동자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되게 하시리라, 하나님께서 너희로 증인이 되게 하시리라, 그래서 증인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으로 증인이 될 것이다 - 이 말씀인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권능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권능이 문제입니다.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권능을 받아야 합니다. 권능을 받고야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헬라어로 '뒤나미스'라고 하는 이 권능(權能)은 내가 받고자 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께서 내게 임하심으로 저절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권능의 성격을 한번 깊이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세상을 개혁한다거나 혁명한다거나 하는 권능이 아닙니다. 천지개벽시키는 권능이 아닙니다. 외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권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권능의 내용은 제자를 향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제자들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권능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되게 하는 권능, 참된 제자 되게 하는 권능, 사도 되게 하는 권능, 나아가 증인되게 하는 권능인 것입니다. 비겁한 제자, 도망간 제자, 형편없는 제자를 변화시켜서 능력의 증인 되게 하는 권능인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권능입니다. 최고의 권능입니다. 명심할 것입니다.

언젠가 있었던 목사고시 때의 일입니다. 신학대학을 나온 뒤에 2년 동안 훈련을 받고 나서 목사고시를 치르게 됩니다. 목사고시에 합격하면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게 되고, 그리고 곧바로 교회의 일꾼으로서의 목사가 됩니다. 그 목사고시의 마지막에 면접시험이 있습니다. 그 면접시험 시간에 제가 30명을 맡아서 그들 한사람 한사람과 만나 이력서와 자기 소개서에 적힌 경력을 보면서 면접을 했습니다. 여러 가지로 물어보고 여러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그 가운데 제가 가장 중점을 두고 물어본 것이 하나 있습니다. "당신은 이제 목사가 될 것입니다. 당신이 목사가 되어서 앞으로 일을 해나가는 가운데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일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앞으로 목회 하면서 목사의 길을 가면서 부딪히게 될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출발할 것인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예배당 짓는 것이 가장 큰일이라느니, 교회의 정치적인 문제가 가장 큰 문제라느니, 어쩌고저쩌고 대답이 가지각색 이었습니다마는, 제가 바라는 대답이 나오지를 않아 좀 섭섭했습니다. 그래도 비슷하게 대답한 사람이 30명 가운데 한 사람이나마 있었기에 다소 위안은 되었습니다. 제가 바라는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나 자신을 이기는 것이 제일 어려운 일이겠지요." 이 말 한마디만 나오면 더는 아무 것도 묻지 않고 합격시키려고 했는데, 좀처럼 그 대답이 나오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성경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성경이 말씀하는 권능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원수를 때려부수는 권능이 아닙니다. 세상을 둘러엎는 변화가 아닙니다. 로마정부를 때려부수는 권능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권능은 자기를 이기는 권능입니다. 비겁한 사람들이 변해서 용기 있는 사람이 되는, 핍박도 죽음도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의 참 증인되는 권능인 것입니다. "너희가 권능을 받고" - 얼마나 귀중한 말씀입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세상이 잘못되었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위하여 기도하십니까? 중요한 문제는 나 자신을 이기는 것입니다. 나 자신에 대한 문제가 가장 큰 문제입니다. 돈버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이기지는 못합니다.

좀더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이 권능은 자기를 이길 뿐더러 하나님의 사람으로 굳게 서게 합니다. 이 권능은 핍박이 있는 세상을 넉넉히 이기게 할 뿐더러 원수도 용서하게 합니다. 악한 세대에도 절망하지 않고 저들을 사랑합니다. 사랑해야 복음을 전할 것이 아닙니까? 미워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할 수는 없습니다. 악한 세대이지만 그래도 여기에 소망을 걸고, 조금도 낙심하지 않고 저들을 향하여 복음을 전합니다. 이것은 뜨거운 사랑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이 사랑으로 원수를 사랑합니다.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뜨거운 사랑이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것 - 이것이 권능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권능입니다.

우리가 권능을 받아서 권능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좀더 근본적인, 좀더 원천적인 것이 필요합니다. 먼저, 성령께서 임하심으로 우리가 권능의 사람이 됩니다. 오늘의 본문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을 받으면 권능을 받고, 권능을 받으면 주인이 됩니다. 이것이 순서입니다. 문제는 성령입니다. 여러분, 성령이란 무엇입니까? 성령은 곧 권능입니다.

성령은 단순한 깨달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지식만 얻는 것이 아닙니다. 감동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만 얻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성령은 곧 권능입니다. 그렇습니다. 뒤나미스는 능력이요 power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는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은 여기에 있습니다. 무엇을 좀 배우고 깨닫고 지식을 얻었다고 해서 기뻐하고 감격하고 할렐루야 할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받았으면 당장 문간에 나서서 원수를 사랑할 수 있고, 나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게 더는 원수도 없고 미워하는 사람도 없고 질투도 없고 실망도 없어야 합니다. 이것이 권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풀지 못한 문제가 많고 쉽게 화를 내고 섭섭해하고 원망불평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권능이 아닙니다. 권능 가까이에 조차 가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임하심으로 권능을 받습니다. 성령은 곧 권능이요 능력을 주시는 존재입니다. 권능으로서의 성령, 능력으로서의 성령-이것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은 이어서 말씀합니다.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성령을 못받으면 증인될 수 없습니다. 권능을 못 받으면 증인될 수 없습니다. 증인은 되란다고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못 받은 사람이 무슨 증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성령을 받아야만 권능을 받고, 권능을 받아야만 증인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증인'은 헬라어로 '말투리아'라고 하는데 아주 재미있는 말입니다. '말투리아'를 영어로 옮겨놓으면 '마터(martyr)'가 됩니다. '마터''순교자'라는 뜻입니다. 프랑스 파리에 가면 몽마르트르(Montmartre)라는 잘 알려진 언덕이 있습니다. '몽마르트르'''''이라는 뜻이고 '마르트르''순교자'라는 뜻입니다. 옛날 그 자리에서 사람들이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순교자의 마을이라 해서 몽마르트르라고 이름 붙여진 것입니다.

글레멘드(Clement)교부는 순교자를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피 흘리기까지 증거 하는 사람이 순교자다. 순교자만이 증인이다.' 여기서 증인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증인(證人)이 무엇입니까? 증인은 자신의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지식을 공급하는 사람을 가리켜 증인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재판정에서 증인을 세우고 재판할 때에도 한번 보십시오. 증인으로 나온 사람이 "내 생각에는요, 내가 느끼기에는요……"라고 말하다가는 대번에 판사가 저리 가라 합니다. 증인은 간단합니다. '보았습니다, 들었습니다'하면 끝나는 것입니다. 경험한 바 그대로만 말하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증인이란 어떠한 진리를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의 사실성을 말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사실이냐 아니냐, 보았느냐 못 보았느냐, 경험했느냐 안했느냐 - 그 진실만을 말하는 것이 증인입니다. 때문에 증인은 반드시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경험 없는 사람은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경험적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일생동안 책을 읽었다고 해서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간증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증인에게는 내가 위하여 증거 하는 분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내가 보았다고는 하지만 끌려가서 증인이 되는 것은 사실 귀찮지 않습니까? 그래서 흔히들 못봤다 하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저분이 억울하게 고생하고 있기 때문에 부끄럽지만, 귀찮지만 그것을 떨치고 증인으로 나설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증인은 사실을 사실이라고 말함으로 오는 불이익을, 손해를, 핍박을 받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 굳건한 결단이 있을 때에야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도 가끔 보면 도둑맞은 집, 강도 당한 집은 많은데 신고는 잘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신고를 왜 안 하느냐 물어보면 신고했다가 그 다음에 당할 보복이 두렵고 귀찮아서랍니다. 그래서 손해보고 말지 합니다. 때문에 고발정신이 점차로 희미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손해가 나더라도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사실을 사실대로 밝혀야 하겠다고 하는 용기가 있어야 하는데 사람들은 거개가 그렇지를 못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사건의 진실을 진실대로 말함으로써 오는 모든 불이익과 손해를 내가 위하여 증거 하는 그분과 함께 할 수 있는 마음이 있을 때에야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에 증인이 되었다고 할 때에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운명을 함께 할 마음이 없으면 증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나아가 증인에게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담력이 필요합니다. 목이 떨어져도 할말은 해야 합니다.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 - 내가 본 것이요 진리입니다. 이것을 증거해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용기와 담력이 있어서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 증거 하는 방법을 알아봅시다. 첫째는 말로 증거 합니다.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다 하고 말로 증거 합니다. 둘째는 몸으로 증거 합니다. 행동으로 증거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되어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기에 몸으로 증거 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죽음으로 증거 합니다. 여러분, 증거 가운데서도 가장 큰 증거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증인입니다. 부활의 증인은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증거 함으로 오는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거의가 순교했습니다.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 사실을 증거하기 위하여 저들은 서슴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죽을 수 있었습니다. 보십시오. 증인은 순교로 연결됩니다. 순교가 아니고는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천국을, 부활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죽을 때가 되어서는 벌벌 떱니다. 안 죽겠다고 살려달라고 바득바득 소리를 질러댑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까? 가끔 임종을 앞둔 분을 병원으로 찾아가 만나보는 일이 있습니다. 예수 잘 믿는 사람들은 이미 준비를 다해놓고 기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럴 때면 저는 "내일 아침 다시 만납시다, 죽어서 천당가서 만납시다"라고 인사를 건넵니다. 그러면 그분은 "그럼요, 제가 조금 먼저 갈 것이니 할 일 다하시고 나중에 오세요"하고 되받습니다. 이쯤 되어야 예수 믿는 사람이지요. "천당이 어디 있어요?"-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예수를 믿고 내세를 믿고 부활을 믿는 사람은 평안을 맞을 수 있습니다. 순교마저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 속에 증거가 있습니다. 순교가 아니고는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결국, 순교자는 증인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천사의 얼굴을 할 수 있었던 스데반도, 칼로 목베임을 당한 야고보도,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힘을 당한 베드로도, 도끼로 목베임을 당한 바울도,…… 그 죽음이 순교였기에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에 가보면 사도 바울을 목베어 죽일 때에 사용했던 도구를 만들어 전시해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보니 옛 우리 나라에서처럼 앉혀놓고 칼로 친 것이 아니라, 커다란 절구통같이 생긴 나무토막을 가져다놓고 그 위에 목을 걸치게 해서 도끼질을 했더군요. 이렇게 비참한 죽음이었으나, 바울은 이것조차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부활이 확실하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부활할 것을 믿기 때문에 기쁨으로 죽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자가 증인입니다.

베드로는 늘 말씀합니다. 사도행전 232, 315, 532, 1039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다"라고 거듭거듭 말씀합니다. 우리가 보았고 우리가 경험했다고 증거 합니다. 베드로는 입버릇처럼 말씀합니다. 내가 눈으로 보았고 손으로 만졌고 분명히 예수님과 함께 했다고 말입니다. 다 경험한 것이요, 우리가 증인이라고 말입니다. 신학적으로 의미를 생각한다면 증인이란 증거 함으로 사건의 뜻을 현실화하는 사람입니다. 엄연한 사실이지만, 이것이 다시 사건으로 재현되기 위해서는, 능력화하기 위해서는 증인이 필요합니다. 증거가 되면서 이것이 현실화하고, 능력화하고, 생명화 하는 것입니다. 생명력으로 화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증거와 함께 믿어지고, 믿어지는 그 순간에 마음속에서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증거는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은 곧 증거의 영()입니다. 다시 한번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 공간적으로는 온 세계에 이 복음이 전파될 것이요, 시간적으로는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세상 끝날까지 이 복음이 전파될 것이라고 말씀함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심으로 우리가 권능을 받고, 권능을 받음으로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지막 당부의 말씀이요, 마지막 약속의 말씀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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