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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그리스도인의 표지(2)(빌1장 3절~11절)

by 【고동엽】 2024.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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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표지(2)(빌1311)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내가 너희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니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됨이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본문에 나타난 그리스도인의 표지는 첫째 감사요, 둘째 선교요, 셋째기도입니다. 감사에 대해서는 앞장에서 살펴보았으므로 본 장에서는 두 번째로 선교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7절에서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된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은혜'라는 것은 바로 선교요 전도를 뜻합니다.

선교에 따르는 모든 행위와 사건들이 은혜입니다. 원래 '은혜'에는 기쁘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신령한 기쁨이요, 복음적인 기쁨이요, 구속받은 자의 기쁨이요, 하나님의 자녀된 특권에서 비롯된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그 마음에 끓어오를 때, 그로 인해 오는 벅찬 기쁨과 감격 이러한 것을 은혜라 합니다. 즉 신령한 선물로 인한 감격입니다. 우리에게 신령한 선물은 무엇입니까? 먼저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구속이요, 내게 주신 건강, 물질, 자녀…… 이와 같은 것들이 모두 선물입니다. 또한 이것은 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서 온 선물입니다. 이렇게 선물 받은 기쁨으로 충만한 것, 이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은 보다 높은 차원에서의 은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 바로 은혜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 능력, 그리고 내가 지금 복음을 전하며 산다는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그래서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되었다'할 때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지금 복음을 전하고 있는 이것을 은혜로, 또 특권으로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바 은혜가 많지마는 전도하는 기쁨과 그 영광이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은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복음을 어떻게 전해야 합니까? 첫째, 고백(confession)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는 그리스도십니다, 그분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하고 신앙고백 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하여 우리는 늘 고백을 하여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전도 이야기만 나오면 그것은 성경공부를 많이 해야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나는 이렇게 믿습니다, 지금 내가 어려운 형편에 있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믿습니다, 틀림없이 나를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하고 내가 믿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둘째, 선포(proclamation)하는 것입니다. 전도란 다른 사람에게 널리 알리는 것입니다. 지난번 국회의원 선거 때에 후보들이 자기 선전하느라고 대단히 애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한 장만 붙여도 될 것을 벽마다 왜 같은 사진을 그렇게 많이 붙이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인물이라지만 한 벽에다 수십 장씩 숫제 도배를 해버립니다. 제가 궁금해서 어떤 분에게 물었더니 ", 한 장씩 붙이면 어디 보입니까? 쫙 붙여 놓아야 보이지요. 선전입니다, 선전!" 이렇게 대답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소문내어야 합니다. 요즘 말로 피아르(PR)해야 합니다.

, 우리가 돌아다니면서 예수님 선전 좀 합시다. 냉정하게 말해서 조용히 믿는 사람은 참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보십시오. 고백 없는 사랑, 아무도 몰래 나 혼자 숨겨 놓고 하는 사랑, 이를테면 짝사랑 같은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자랑할 수 있는 사랑만이 참사랑입니다.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고 자랑하고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원래 '선포'란 전쟁의 소식 혹은 승리를 널리 알리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전쟁에서 이겼다!"하고 외칠 때 이 소문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그렇게 선포하여야 합니다.

셋째, 변증(apology)하는 것입니다. 전도는 변명입니다. 여기에 이미 결론나 있는 것 예수님이 만 왕의 왕이시오 구주시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기 위하여 변증하는 것입니다.

넷째, 가르치는 것(teaching)입니다. 누구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조목조목 이유를 들어가면서 설명해야 합니다. 역사와 자연과 사회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소재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 모든 것을 이용하여 성경을 끊임없이 가르치는 것입니다.

다섯째, 봉사하는 것(action works)입니다. 이것은 행동으로 전도하는 것입니다.

여섯째, 순종(discipline)입니다. 내가 복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조용히 그 말씀대로 살면서 나의 생활을 통하여 증거 하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는 좋은 일일 수도 있고 나쁜 일일 수도 있는 그 모든 상황에 대하여 기뻐하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슬퍼해야 할 사람인데 심방을 가보면 찬송가를 부르고 있습니다. 병원에 위문을 가보면 오히려 병원에 온 것을 기뻐하는 환자들이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저더러 좀 쉬라고 하십니다" "아마 이 세상에서 그만 살고 이제 하늘나라로 들어 오라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 대합실에와 있습니다." 아주 명랑하게 대답합니다. 이렇게 될 때에,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 신앙을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복음이 그 속에서 그대로 열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전도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본문에서는 특별히 복음을 변명하는 일과 복음을 확정하는 일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변명한다는 것은 영어로 defense 또는 apology라고 합니다. 헬라어로는 아폴로기아입니다. 이것은 이미 결론 난 것을 가지고 세상 철학에 대하여, 혹은 이방 종교에 대하여 반박하면서 복음을 변증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변증가입니다. 그래서 율법에 대하여 복음을 변증했고, 헬라철학에 대하여, 이방 문화에 대하여 복음을 변증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율법학자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답게 그는 어느 곳을 가나 유식하고 논리적인 변증가로 나타납니다. 실로 사도 바울은 변증에 대하여 매우 특기할 만한 역사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변명 이외에 확정했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영어로 confirmation, 헬라어로 베바이오시스라고 합니다. 이것은 튼튼하게 서도록 확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변명'은 밖에서 밖으로 복음을 변증하는 일이요, '확정'은 믿고 있는 사람을 똑바로 확실하게 믿도록, 흔들리지 않도록 격려하는 것 교회 안에서 이미 가지고 있는 신앙을 더 확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변명과 확정 두 가지를 다 했습니다. 간혹 비행기로 해외 여행을 할 때 비행기 표를 콘펌(confirm)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저는 한번 콘펌하는 것을 잊었다가 크게 당황한 적이 있습니다. 얼마전 대만을 다녀올 때 바로 그 다음날로 돌아오는 표이기에 콘펌하지 않아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떠나는 날 그냥 비행장에 나갔더니 좌석을 다 채우고 제 자리가 없었습니다. 콘펌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전화 한 통이면 될 일을 하지 않아서 크게 애를 태운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가지고 있는 신앙이지만 재삼재사(再三再四)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변명도 하고 확정도 한다'고 합니다.

본문 7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은혜는 복음을 위하여 당하는 고난 그 자체를 가리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왜정 말년에 꼭 순교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지금 바울이 감옥에 갇혀 고생한다는 것이 겉보기에는 정체되고 퇴보적이며 모순적인 사건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것으로 인하여 많은 역사가 파급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바라보며 '내가 받은 은혜에 너희가 참예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참예한 자만이 바울이 고난에서 얻은기쁨도 함께 나눌 것이 아닙니까?

그리스도인이란 복음을 전하고 변명하며 확정할 뿐만 아니라 이 일을 귀하게 여기고 동참, 곧 참예하는 사람입니다. '참예'란 헬라어로 슁코이노노스 입니다. '참예한 자'를 요즘 말로 번역하면 동반자(partner)입니다. 곧 복음의 동반자, 협력자라는 뜻입니다. 마치 남편과 아내처럼 동반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동반자란 서로 분담하여 일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를테면 부부를 동반자라고 할 때 한 사람은 벌어 오고 한 사람은 쓰는 것입니다. 똑같이 돈을 벌어 온다면 동반자가 아니라 동업자입니다. 한 사람은 땅을 파고 한 사람은 씨를 뿌리고 이런 사이가 동반자의 관계입니다.

지금 바울이 '참예한 자'를 말하는 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바로 복음 전파의 일을 서로 분담하는 동반자를 뜻합니다. 앞에 나가서 전도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만 뒤에서 기도하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권사님들이 기도 많이 하시는 것을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새벽마다 나와서 교회를 위하여, 구역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동반자로서 할 일입니다. 내가 직접 복음을 들고 나가지 못해도 이미 선교사로 나가 있는 분을 위해 기도한다면 그 자체로 복음의 동반자가 됩니다. 최일선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군인이 있는가 하면 뒤에서 수고하는 의무병도 있는 것입니다.

제가 최일선에서 복무할 때였습니다. 한번은 위문단이 찾아왔습니다.

그때 가수 명국환 씨가 노래를 불렀는데 얼마나 인기였는지 앵콜을 세번이나 받았습니다. 그는 군복차림으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저 사람이 군인이냐?"하고 묻자 "일선에서 싸우는 군인들을 위해 노래부르니 저 사람도 역시 군인이지"하고 답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후방 없는 전방이 있습니까? 전방이 든든하려면 뒤에서 군용 물자도 만들고 음식도 만들어서 날라다 주어야합니다. 일선에서 군인들 몸만 가지고 싸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사도바울은 그래서 자신은 로마 감옥의 최일선에서 고생을 하고 빌립보 교인들은 그를 위해 기도하며 은혜의 동반자가 된 것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기도로 돕고, 물질로 돕고,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을 잘 돌보는 일들이 다 복음의 동반자가 되는 길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꼭 다니면서 노방전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바울의 목회서신을 보면 복음 전하는 자로 하여금 아주 기분 좋게 편한 마음으로 일할 수 있도록 우리가 뒤에서 도와야 한다는 말씀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제가 늘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많은 선교사들이 해외로 나가고 있지만 그 가족 때문에 늘 문제가 됩니다. 가족과 함께 선교지로 가게 되면 자녀교육 문제라든가 여러 가지로 곤란한 일들이 많습니다. 바람직하기로는 선교사들이 선교 외적인 일에 골치를 앓지않도록 우리가 그들의 가족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입니다. 남아 있는 우리가 선교사 가족들을 돌볼 수 있는 기숙사를 지어서 그 자녀들을 잘 가르치고 돌봐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또한 선교에 참여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기관들이 없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가족 걱정까지 모두 도맡아야 합니다. 그러니 어디 마음 편하게 선교할 수 있겠습니까? 전도는 꼭 내가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전도자를 여러모로 돕는 것이 전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게 맡겨진 일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 3:6)"라고 말합니다.

내가 맡은 것이 무엇입니까? 땅을 파는 것입니까? 물을 주는 것입니까? 나도 무엇인가 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일이 있겠으나 그 중에서 가장 쉽고 가장 경제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일은 기도입니다. 전도는 바로 기도로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 교역자를 돕고 싶으십니까?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가장 큰 도움입니다. 제가 어느 교회 전도사로 있을 때 그곳 사찰 집사님이 저를 어찌나 어여삐 여기셨던지 늘상 이모저모로 조금씩 도와 주셨습니다. 그 분은 제가 목사 된 다음에도 계속 기도해 주시겠다는 약속까지 했습니다. 그후 20, 그 집사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여전히 저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7절에서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라고 빌립보 교인에 대한 그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랑이란 곧 마음에 있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는 항상 선교가 있어야 하고 성도의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8절 말씀을 봅시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사모한다는 것은 그리워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표현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모하는고 하니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심장'은 헬라어로 스프랑크논 이라고 하는데, 가슴 부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것은 심장, 간장, 폐장을포함한 가슴 전체를 가리킵니다. 헬라인들은 가슴에 감정이 있고 정열이담겨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뜨거운 정열로 사랑하는 것을 뜻합니다. 어떤 주석가는 이 구절을 '피의 순환'이라고 하는 개념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심장으로 인하여 바울에게 왔던 피가 빌립보 교인에게로 가고, 빌립보에 갔던 피가 다시 바울에게로 온다 - 예수님의 심장이 쉬지 않고 펌프질을 하기 때문에 사랑의 피가 순환하고 생명의 피가 순환하게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맺어 주신 뜨거운 사랑과 능력으로 성도의 교제와 선교를 중심한 아름다운 공동체가 이루어졌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의 표지가 무엇입니까? 모든 믿는 자가 전도의 일념으로 사는 선교사가 되는 것입니다. 전도를 기뻐하기에 사람을 보면 반갑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모일 때에 한없이 반갑고 기쁩니다.

기회 있는 대로 전도하고, 또 전도하는 사람을 성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맺어주신 이 심장에 의한 생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에서 터져 나오는 피는 바로 선교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한다는 것은 곧 선교적인 사랑입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 팔순이 넘은 권사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 분한테는 한 가지 곤란한 점이 있었습니다. 교역자와 함께 심방을 가게 되면 예배드린 후 나오는 과자나 사탕을 슬쩍 가방에 집어 놓곤 하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넉넉지 못한 형편도 아닌데 말입니다. 난처해진 전도사가 여러 번 말렸으나 고쳐지지를 않습니다. 나중에 만나서 조용히 여쭈어 보니 심방 가서 맛있는 것만 보면 문뜩 손자들 생각이 나서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게 된다는 것입니다. , 여러분은 좋은 것을 볼 때에 무슨 생각이 먼저 납니까? 길을 지나다 예쁜 화분을 보면 저것 교회 가져다 놓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까? 사람을 소개받으면 내가 이 사람을 꼭 전도해야겠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잘 사귀어 두었다가 앞으로 장사할 때나 출세할 때에 도움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합니까? 좋은 것을 볼 때 첫 번째로 생각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교회에는 좋은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 어느 큰 교회에 갔었는데 그 곳에서 파이프 오르간소리가 웅장하게 울려나오는 것을 보고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죽기 전에 저 오르간을 우리 교회에도 꼭 가져다 놓으리라 마음먹었지만 하나님께 죄송해서 "저것 나 주세요"라고 기도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한국에 나와서 목회할 때 또다시 그 오르간 생각이 났습니다. 그리고 꼭 사리라고 다시 한번 결심했습니다. 무엇을 보든지, 좋은 것이든 아름다운 것이든,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교회와 선교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7절 말씀을 봅시다. '너희가 내 마음에 있다' - 빌립보 교인들의 마음속에 바울이 있고, 바울의 마음속에 저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일선에서 선교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우리가 자리잡고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 16장에는 26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에 대한 문안과 추천의 말이 있습니다. 이중에서도 아굴라와 브리스가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16:4)." 얼마나 굉장한 추천입니까? 이것은 그들이 바울을 위해 내가 이러 이러한 일을 했다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요, 바울이 스스로 보고 느낀 바를, 그 고마운 마음을 그대로 고백하는 말입니다. 선교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그와 같은 감동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분명 축복 받을 일입니다. 또한 '너희가 항상 내 마음에 있다'고 선교사의 동반자로 인정받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우리도 빌립보 교인들처럼 서로 협력하며 선교의 대열에 동참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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