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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18,185편 ◑/곽선희목사 1,910편

금식의 바른자세(마 6:16~18)

by 【고동엽】 2024.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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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식의 바른자세(6:1618)

 

 

"금식할 때는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금식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궁금한 점을 갖고 있습니다. 가령, 금식은 꼭 해야 하는지, 금식을 하더라도 물은 마셔도 되는지, 또는 음료수 정도는 마시면서 한 금식 기도가 효력이 있는지, 그리고 금식 기도는 며칠 정도가 좋은지? 하는 질문 등입니다. 이제부터 이런 문제들에 대해 하나씩 하나씩 생각하면서 금식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가졌으면 합니다.

급적이면 귀납적 논리를 피하려고 하니, 지금까지 가졌던 금식에 대한 자기 편견을 버렸으면 합니다. 과거에 금식했다는 사실에 얽매이게 되면, 그것은 내게 대한 평가이고 또 다른 사람에게 대한 평가가 되어 오늘 이 말씀에 대해 오해가 있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금식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서 객관적인 자세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가졌던 금식에 대한 생각들을 잊어버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본문의 교훈들을 상고했으면 합니다.

20세기 현대에 와서 금식을 많이 강조하는 종교는 마호멧교입니다. 여기서는 종교의식 가운데 필수적으로 금식이 들어있어, 교인이면 누구나 금식해야 하는 날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 날은 마호멧이 처음 계시받은 날을 기념하기 위한 날로써 이른 새벽부터 일몰까지 금식을 합니다. 새벽과 일몰의 기준은 흰 실과 검은 실을 구별할 수 있는 새벽 시간부터 사람을 식별할 수 없을 정도의 저녁 시간까지입니다. 금식하는 동안에는 첫째, 물을 몸에 묻혀서는 안 됩니다. 세수는 물론 발을 씻어도 안 되고 어떤 음료수를 마셔도 안 됩니다. 둘째, 음식 냄새나 향수 냄새를 맡아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냄새를 맡는 것도 즐거움의 일종으로 향락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일체의 음식을 금합니다. 단 임산부나 간호원 그리고 출전하는 군인들은 제외했습니다. 이상으로 회교에서는 이렇게 강한 금식 풍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사람들의 금식이 회교와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유대인들의 금식을 보면 그들의 월력으로 710일이 속죄날(16 :31, 29:7), 국가적으로 금식을 정한 날입니다. 이 날은 온 국민이 여호와 앞에서 자기 잘못을 자복하며 금식하여 철저하게 안식하는 것입니다. 이들 역시 일체의 음료수나 음식을 먹지 않고, 향수를 몸에 바르지 않으며, 목욕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샌들도 신지 않으며, 물론 금욕 생활도 요구했습니다. 이렇게 국가적으로 일제히 행하는 공동 금식이 있는가 하면 또한 개인적인 금식도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금식 형식을 보면, 첫째는 물도 마실 수 없는 완전한 금식이 있습니다. 모세의 금식이나 예수님의 40일의 금식은 여기에 속합니다. 둘째는 새벽부터 저녁까지만 하는 부분 금식이 있습니다. 요한 웨슬레이는 옥스포드에서 부흥 운동할 때에 초대교회로부터 내려오는 전승으로 일주일 중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을 했다고 합니다. 초대감리교인들도 전승대로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셋째도 부분 금식으로 고기와 술을 먹지 않거나, 또는 특별히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는 방법입니다. 소위 즐기기 위한 음식은 먹지 않고, 살기 위한 최소한의 식사만 하는 것입니다. 청교도들이 이 금식 방법을 주로 사용하여 주일에는 빵을 굽지 않고 먹었으며, 고기는 일체 금했다고 합니다. 즉 몸을 지탱하기 위한 최소한의 음식만 먹으면서 깨끗한 정신으로 주일을 지키겠다는 정성입니다. 외경에 보면, 요셉이 팔려갈 때에 맏형인 루우벤이 어찌해서라도 그를 놓아주려고 하다가 성공하지 못하자 자책감으로 7년 동안을 금식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금식은 한 끼를 규칙적으로 금식했거나 또는 고기를 금한 부분 금식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또한 요셉을 판 장본인인 시몬도 2년 동안을 금식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렇게 가족들과 더불어 생활하면서 혹은 일하면서 하는 부분 금식이 있고, 넷째는 가족들과 별거하여 특별한 장소를 택하여 기도하는 금식이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금식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전도사업을 시작하시기 바로 직전에 40일간을 금식 기도하셨습니다. 그 외에는 그 당시 바리새인들처럼 일주일에 두 번이나 혹은 일년에 몇 번씩 규칙적으로 금식하셨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특히 우리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우리와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주 단식을 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왜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대답하시기를 "잔치에 온 신랑의 친구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야 어떻게 슬퍼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곧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터인데 그 때에 가서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라고 대단히 도전적인 대답을 하십니다. 신랑이 떠나고 나면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라고, 금식이란 역시 슬플 때 하는 것임을 시사하셨습니다. 이 말씀으로 미루어 보아 기독교에서의 금식은 그렇게 높은 미덕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에서는 금식이나 고행등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행등이 법으로 간주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슬픔의 종교가 아니라 기쁨의 종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식이 경건의 중요 훈련임에는 틀림없으나 기독교 교리 안에서는 높이 취급하지 않습니다. 즉 금식을 잘한다고 믿음이 좋은 사람이다라고 보지 않는단 말입니다. 비록 40일간을 금식 기도했어도 금식 기도하지 않은 사람보다 더 높이 평가하거나 흠모의 대상이 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개인의 사정에 의하여 금식 기도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하는 정도이지 그 이상의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면, 금식이란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보았듯이 마음에 있는 강한 슬픔을 외적으로 나타내는 표식입니다. 구약의 사사기 20:26, 사무엘상 7:6, 느헤미야 9:1에 보면 금식이 모두 회개로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 큰 죄를 지었거나, 큰 고통이 있거나, 또는 원수들이 쳐들어오는 어려운 사정이 있을 때, 금식 기도를 했습니다. 온 국민이 통회하고 자복하며 열심히 기도하는 장면을 구약에서는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금식은 슬픔과 고통의 결과이지 기쁨이 있는 곳에 금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둘째, 금식 기도는 중요한 문제를 놓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마음자세입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계시를 기다리는 자세란 뜻입니다. 가령, 결혼을 하고자 하는 대상이 나타났다고 합시다. 결혼이란 개인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문제로써 금식 기도할 만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를 놓고서는 울고불고 하며 금식 기도하면서, 진작 중요한 문제는 감정대로 순간적으로 결정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또한 자신은 별로 기도하지 않으면서 "목사님, 기도해 주세요" 하고 기도를 부탁하는 것을 봅니다. 본인이 열심히 기도하면서 혼자 힘으로는 모자라니 기도로 지원해 달라는 것이 올바른 태도입니다. 어쨌든 중요한 결정을 앞에 놓고 금식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지시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다니엘서 9 : 3에 보면, 다니엘이 삼베옷을 입고 단식하며 하나님께 마음을 털어놓고 기도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니엘은 회개와 탄원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영혼이 잘못되어 가고 있을 때, 즉 죄로 기울어지는 영혼에 고통을 가하는 의미에서 금식 기도를 합니다. 이 금식은 심령에 고통을 가하므로 다른 곳으로 흐르는 것을 방지하여 하나님께 묶어 놓는 중요한 의미입니다. 영적으로 반드시 해야 합니다. 이 금식은 경건을 위한 강한 훈련으로 필요할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께로 향한 전적인 자기 헌신이 있을 때 금식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께 바칠 때, 며칠이든 금식 기도하는 예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제 금식의 목적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기에게 관심을 끌게 하기 위한 목적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부모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별 이유 없이 우는 것처럼, 하나님의 관심을 자신에게 집중시키기 위해 금식 행위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둘째, 끈기와 헌신과 진실을 입증하고자 금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며 사랑한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셋째, 사죄하는 행위로 금식 기도를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물론 금식을 통해 회개를 입증하는 것은 좋습니다만 금식으로 죄가 사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금식이 죄 사함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얼마나 깊이 회개하고 있는가를 하나님께 나타내는 증거는 될 수 있어도 그 자체가 대속의 조건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넷째, 자기 부정의 목적이 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대해 욕망이 전혀 없고, 다만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으로 즐거워합니다 라는 자기 고백의 결과로 금식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가 겸손과 헌신적인 마음입니다. 가장 낮은 마음으로 하나님께 생명을 맡기는 헌신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금식에 있어서 몇 가지의 위험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금식을 잘못하다가는 금식으로 인해 오히려 실수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자칫하면 금식을 경건의 높은 표식으로 인정받으려는 유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금식을 잘한다고 해서 금식하지 않은 사람보다 신앙이 좋다든지 높은 수준의 경건으로 인정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필자는 삼각산에 볼일이 있어서 올라가던 중 가는 길목에서 능금밭을 보았습니다. 능금을 몇 개 사려고 들어갔더니 마침 그 곳에는 산에서 기도를 마치고 내려오는 몇 분을 만났습니다. 그 중 한 아주머니가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여서 화제의 주인공이 되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40일간 금식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은 부러운듯 쳐다보며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았느냐, 무슨 계시를 받았느냐, 문제에 대한 대답을 들었느냐고 질문하며 그를 격찬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40일간을 금식 기도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물론 칭찬할 만한 일입니다. 그 아주머니는 의기양양하게 뭐라고 그들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그 일행들이 모두 능금을 사는데, 가격이 좀 비싸다고 싸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과수원 주인이 깎아 주지 않자 금식 기도를 했다는 아주머니가 앞장서서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지 않겠습니까? 40일간을 그 어려운 고통을 인내하며 기도한 사람이 돈 몇 푼에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필자뿐 아니라 그를 높이 보던 주위 사람들의 기분을 완전히 뒤엎어 버린 것입니다. 그는 40일간 기도해서 겸손해진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더욱 교만해진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얼마나 큰 위험입니까? 다음,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금식 기도하지 말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금식 기도가 위선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시기를 "금식할 때에 너희는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6:16),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 기도는 하나님과 상관없음을 말씀하십니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예루살렘에서는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하는 법이 있었다고 합니다. 일주일에 이틀을 새벽부터 저녁까지 금식한다는 것은 보통사람에게는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전문적인 바리새인들은 할 수 있었습니다. 마침 월요일과 목요일이 장날인지라 금식을 하는 바리새인들은 헤진 옷을 입고 금식을 한답시고 흉한 얼굴들을 하고서는 장터를 걸어다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반 백성들은 그들을 우러러보았으므로 그 재미에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금식이 많았던 것입니다.

이것을 아신 예수님은 "슬픈 기색을 짓지 말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 얼굴을 흉하게 하지 말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금식이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결과로 칭찬을 얻을 수도 있지만 칭찬을 얻기 위해 경건을 수단화하면 큰 죄가 됨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금식을 바로 하는 것입니까?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6:17-18)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에게 금식한다는 소문이 나지 않도록 몸을 잘 가다듬으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금식 기도는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비밀한 교제이므로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알아야 할 중요한 문제는, 먼저 자기 헌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깊은 회개와 탄원과 자기 헌신이 먼저 있고 그것 때문에 금식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자기 헌신 없이 하는 금식은 형식일 뿐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식이 먼저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함으로써 저절로 금식이 따라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금식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이틀 금식 기도하겠다. 또는 열흘 금식 기도하겠다"고 하는 결정이 앞서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중에 열 시간이 지나가고, 기도하다 보니 사흘이 지나가 금식이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미리 사흘을 정해 놓고 세상일을 다 보면서 사흘을 채우느라고 애를 씁니다. 특히 기도원에 가보면 40일 금식기도 한답시고 들락날락 하면서 소문을 내며 날짜 채우느라고 안간힘을 씁니다. 금식은 소문 없이 하나님과 나만 아는 일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향한 헌신이 우선이고 기도가 우선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가다 보면 철야도 되고 금식도 되는 것이지 철야가 먼저고 금식이 먼저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즉 금식은 밖으로 나타난 형식으로서, 기도와 헌신 뒤에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행위인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주의할 것은 금식을 하나님을 시험하는 기구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가끔 하나님과 인간이 누가이기나 하고 시합을 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필자가 아는 한 분은 진짜 금식을 하겠다고 물조차 거부하며 12일을 버티다가 마침내는 죽고 말았습니다. 물을 마시면서 하는 금식 기도는 틀렸다고 비난하며 자기 방법이 가장 옳다고 우기다가 죽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이것은 어리석음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것입니다. 마귀가 높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는 시험에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면 죽는 것이나,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굶으면 죽는 것이나 무엇이 다를 바 있습니까? 하나님이 살려 주시나 아닌가를 보자는 이야기 밖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대항하여 씨름하려고 하지 맙시다. 전혀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될 때는 냉정하게 받아들이는 그런 믿음도 있어야 합니다. 무조건 하나님께 "있어야겠습니다. 살아야겠습니다. 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간구입니다. 금식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시험하는 죄를 저질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또한 금식을 공로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보상이나 속죄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금식은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기도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나만의 비밀입니다. 가끔 믿음이 약한 자들은 금식 기도를 잘 해야만 되는 것으로 오해하고 신앙과 헌신 없이 형식부터 따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큰 실수가 있게 됩니다. 금식 기도란 하나님 앞에 진실한 참회와 겸손과 헌신의 결과로 오는 아름다운 기도임을 명심하여 올바른 금식 기도의 자세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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