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깨닫지 못하는 사람(요 8:21~30)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저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저가 자결하려는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저희는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세상에서 답답한 일 중의 하나가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일입니다.
말이란, 입으로 하는 말만 말이 아니라 손짓, 발짓, 눈짓 등 소위 몸으로 통하는 언어(body language)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주 어린아이가 울거나 몸짓으로 자기 의사를 표현하면 그 어머니는 무슨 뜻인가를 알아듣습니다. 이렇게 말이란 여러 가지 형태가 있지만, 어쨌든 서로 통하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같은 말을 사용하면서도, 또는 함께 살면서도 통하지 않는 불행이 있습니다. 요즘 흔히 기성 세대와 젊은이들간에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고 대화 단절의 심각성을 논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부부 간에 또는 부모와 자식 간에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의사 소통이 잘된다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나의 말을 상대방이 알아듣고 내가 상대방의 말을 알아듣게 되면,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칼 바르트는 행복론을 다음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행복이란 첫째, 서로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를 보고싶어 하고 그도 나를 보고싶어 해야 합니다. 만약, 나는 그를 보고싶어 하는데, 그는 나를 생각치 않는다면 이것은 비극입니다. 둘이 함께 그리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서로 마주보는 것입니다. 나는 그를 보는데, 그가 다른 사람을 본다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눈과 눈이 서로 마주쳐야 합니다. 아기들은 엄마와 눈을 맞추기를 좋아합니다. 마주친 엄마의 눈동자 속에서 자기 얼굴을 보며, 엄마 눈 속에 자기가 들어있다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점점 자라면서 자기의 세계를 갖기 시작하면서부터 엄마의 눈을 피합니다. 벌써 행복의 요소가 엄마에게서부터 멀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자기마음을 다 주고 그의 마음도 다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든지 그에게 말할 수 있고, 그는 나의 말이면 어떤 말이라도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가리지 않고 무슨 말이라도 할 수 있는 대상이 있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동시에 나도 그의 말이면 무엇이든 이해하고 전부가 사실이고 진실로 듣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완전한 소통이요 행복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하나님의 얼굴은 우리를 향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쳐다보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이렇게 서로 소통될 때, 이것이야말로 최대의 행복입니다. 예수님은 이 소통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셨다고 하는 역사적 사건 자체가 하나의 말씀입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대화적 관계」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병도 고치고, 죽은 사람도 살리고, 귀신도 내어쫓고, 바다도 고요하게 하며, 배고픈 사람도 먹이는 등 여러 가지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 모두가 말씀입니다. 그런데, 답답한 것은 이 말씀이 통하지를 못했습니다. 보고 듣고도 몰라서 또 다른 징조가 없습니까, 다른 표적이 없느냐고 계속 물었습니다.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유식한 니고데모나 천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눌 때도 예수님께서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상상이 갑니다.
이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계속 영적인 말씀을 하시는데,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육적으로 듣습니다. 하늘의 이야기를 말씀하시는데, 땅에 마음을 붙이고 있으니,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믿지 못하는 근본 이유는 믿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들이며, 또한 사랑이 없고 교만하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겸손은 배우는 자의 기본 자세입니다. 언제나 상대방이 나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발전이 있으나, 내가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것으로 끝이며 발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마음으로 긍정적인 자세로 경청해야 계속 깨닫고 발전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요 8:21). "간다, 온다, 오지 못한다" 등 예수님께서는 어려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들은 전혀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해 기껏 해석한다는 것이 "도대체 어디로 가시려고 하는 것일까? 아마, 자결하시려나 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요 8:22). "내가 가는 곳에 너희가 오지 못한다"는 말씀에서 자살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그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자살이 큰 죄였습니다. 자살은 자기 몸에 대한 살인이므로 무서운 죄목입니다. 어쨌든 그들은 알아듣지 못하고 엉뚱한 상상을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놓고 그래도 예수님은 계속 영적인 세계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들은 예수님을 핍박하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그당시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도 확실한 것은 몰랐던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예수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또 이어서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나 있는 곳에 영접하겠다"(요14:3)고 말씀하셨는데, 도마는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요 14:5)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도 이렇게 몰랐으니 다른 사람들은 알기가 더욱 어려웠을 것입니다. 제자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시고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서야 비로소 그 의미를 확실하게 알았던 것입니다.
이 본문의 중요성은 언젠가는 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 수 있을 때에 알지 아니하면 그 다음엔 모르게 됩니다.
믿을 수 있을 때에 마음 문을 열지 아니하면 후에는 믿으려고 해도 믿어지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들에게도 참 좋은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때 조금 더 겸손하고 낮추어서 그 진리를 받아들였다면 지금쯤은 더 많은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마음을 닫아버렸으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비뚤어지고 완악해져서 진리를 진리로 들을 수 없는 기형적인 인간이 되고 맙니다.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주어집니다. 젊은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공부할 기회가 주어지듯이 우리 모든 사람에게 진리를 영접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주어집니다. 그 때마다 나는 선택할 수도 있고 거역할 수도 있습니다. 말씀을 읽든지 듣든지 교회에 나오든지 그때그때 나에게 들려지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역하면 그 다음에는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게 됩니다. 기회가 제한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진리를 깨닫는 것도 기회가 있는 것으로 늘 열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순간 결정적인 때가 있으므로 놓치면 힘이 듭니다. 많은 사람으로부터 진작 믿었더라면 하는 후회의 소리를 들을 수가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 이제 시작하려니 과거에 놓친 기회들이 아쉬운 것입니다. 기회가 항상 주어지지 않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나 혹은 말씀이 들려진다 하는 것도 심판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거역하는 것이지만 다음에는 들을 수 없게 되므로 기회가 없어진 것이고, 믿을래야 믿을 수 없게 되므로 심판적이란 말입니다. 보고, 듣고 한편으로는 깨닫지만 믿어지지 않는 것처럼 괴로운 일을 없습니다. 믿는 자에게 가장 큰 괴로움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이요,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결정적인 괴로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소통이 끊어졌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인간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말 불행한 사람입니다. 아직도 나쁜 사람보다는 좋은 사람이 훨씬 더 많은 세상이므로, 한두 사람에게 배신당했다고 모든 사람에게 배신당한 것처럼 원망하고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만난 나쁜 몇 사람 때문에 전부가 나쁘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서로서로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믿으려고 해도 믿어지지 않는 것은 그 자체가 심판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현재적 심판이라 하고 앞으로 죽어서 하나님 앞에 갔을 때 받는 심판이 종말론적인 심판이라 합니다. 가야바의 마음이나 바리새인들의 마음가짐은 현재적인 심판입니다.
예수님을 그렇게도 알아듣지 못하는 그들을 향하여 분석, 비판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 하였느니라"(요 8:23) 소속이 다르고 뿌리가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온다는 것은 위로부터 다시 태어난다는 중생을 의미하며, 세상에 속했다는 것은 세상의 정욕과 욕심과 시기와 질투와 교만에 꽉 붙들려 자유가 없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속한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교회에 나오면 십년을 나와도 진리가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것은 큰 문제입니다. 이 사실을 바로 알고 나의 소속을 옮겨야 합니다. 빌립보서 3장에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어야 합니다. 골로새서 3:3에도 보면,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었느니라"고, 벌써 내 이름이 하늘나라에 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는 곳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호적이 있으므로 아무 때나 오라 하시면 그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소속입니다. 기준이 하늘에 있고 중심과 목표가 하늘에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핍박당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화목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모든 것의 이유가 하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가 이 땅에 살지만 땅에 매여서는 안 됩니다. 돈을 벌고 살지만 돈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공도 실패도 하나님의 뜻을 기준해서 생각하고, 얼마나 벌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진실했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의 소속이 이 땅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에 마음을 둔 자는 하나님과 잘 통하며 언제나 새롭게 말씀이 들려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믿어야 하는 중요한 이유를 다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요 8:21)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면 결국은 죄 가운데서 그대로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24절에 보면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즉 믿지 아니하면 죄로 말미암아 죽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믿어도 되고 믿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믿어야 죄에서 벗어나고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죄의 문제와 직결됩니다. 물론, 예수를 믿어서 진실하게 살고 돈도 벌고 출세도 하는 등 여러 가지 소원이 있지만,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죄 사함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내 병이 낫지 않는다 하더라도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앓는 것이지, 죄 때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 받고, 죄 사함 받은 자로서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믿는 자의 고난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고난을 통하여 훈련받은 것이며 또 하나는 선교, 즉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하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다음 두 가지 걱정을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는 죽음에 대한 걱정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언제나 "감사합니다" 하고 본래의 고향으로 가는 것이므로 죽을까 하는 염려는 하지 말아야 하며, 둘째는 저주받을까 하는 걱정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와도 나의 죄 때문에 받는 저주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십자가에 대한 모독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저주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정죄된 고난이 아니라 의인의 고난이요, 성도의 고난입니다. 다시 강조하여 말하지만, 예수로 말미암아 받는 가장 근본적이면서 큰 혜택은 죄를 사함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환자를 향해서도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듯이 죄사함이 우선적이요 근본적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4:12에 보면, 베드로의 설교 가운데 "다른 이름으로써 구원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예수의 이름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귀중한 설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죄를 회개하고 뉘우친다고 해도 그것으로 죄가 사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직 예수 안에서만 죄사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우리 죄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죄의 값은 반드시 치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죄인의 행위는 그대로 죄이므로 죄인이 죄 값을 치룰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죄 값을 치룰 수 있고 그래야만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대신 벌을 담당하셨으며 대표로 치루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속죄하셨다는 것은 제사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믿어야만 그 사건이 내게 효력을 줄 수 있습니다. 즉 믿으면 나는 죄로부터 자유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믿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마지막 계시인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사랑 받을 자격이 없다고 회피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가 얼마나 부끄러운 사람인지 하나님은 벌써 알고 계십니다. 누가복음 15장에 있는 탕자의 비유를 생각하면, 돌아오는 탕자는 정말 면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양심이 말하기를 "나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으니 이제는 품꾼으로 생각해 주세요"라고 아들의 자격을 포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소를 잡아라, 반지를 끼워라, 목욕을 시키고 신을 신켜라"고 아들로서 환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없지만 이 장면을 생각해 보면, 정말 아들은 염치가 없어서 아버지의 환대를 극구 사양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버지, 이러지 마십시오. 저는 이제부터 외양간에서 종의 신분으로 살게 해 주세요. 매도 때리고 꾸지람 받는 것이 차라리 마음 편할 것이라고 아버지께 오히려 사정할 수도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죽었다가 살았고 잃었다가 얻었노라고 기뻐하시는 아버지 앞에서 어찌해야 되겠습니까? 가만히 생각하면, 탕자 자신이 편하기로는 아버지의 환대를 뿌리치고 외양간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만, 그러나 아버지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는 부끄럽지만 비단옷을 입고 아들로서의 대우를 받는 것입니다. 탕자는 결국 아버지의 마음을 선택했습니다. 요즈음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자격이 없다고 베푸는 사랑을 끝내 거절합니다.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받겠느냐고 거절합니다. 이것은 겸손한 것 같으나 겸손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받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자격이 미달해도 사랑을 베푸는 자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 위해 받아들여야 합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마음을 다시는 실망케 할 수가 없어 형님의 질투를 감내하면서도 잔치를 그대로 받았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아버지가 나의 허물과 부족을 다 아시면서 용서하시고 영접하시고 사랑하시므로, 그 사랑을 믿으면 아들의 자격은 부여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종말적인 계시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이처럼 사랑하사"는 무자격한 "나"이지만 사랑하셨습니다. 이 사랑을 믿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됨을 의미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가 연결됨을 의미하며, 그리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수립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 관계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창세기에서 아담은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을 믿지 않고 선악과를 먹었다가 죽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십자가로 우리 죄를 사했다는 귀중한 사실도 믿어야 그 순간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얻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능력으로 놀라운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계시자요 너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를 졌는데, 너희들은 이 사실을 믿지 않으니, 그것은 결국 너희가 죄 중에 그대로 죽어야함을 의미한다고 심판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예수를 알아보고 믿을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세 가지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요 8:28 상반절), 즉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놓고서야 알겠다는 말입니다. 사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로마병정 옆에서 지휘하던 백부장은 예수께서 운명하시는 장엄한 장면을 보았고 지진을 보았으며, 그리고 예수께서 자기를 못박는 자들을 용서하는 사실들을 자세히 보고, 산을 내려가면서 "이 사람은 정녕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때는 늦었습니다.
가끔 주변에서 보면 돈 잃고 사람까지 잃고 나서야 귀한 것을 깨닫는데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둘째는, 심판대 앞에 설 때 알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믿든지 안 믿든지 얼마 있지 않아 종말적으로 하나님 앞에 갔을 때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 가서야 십자가에 의미와 귀중한 진리를 누구나 다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심판적이기 때문에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셋째는 십자가를 통해서 그 십자가를 믿을 때에 예수가 그리스도 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사건을 알게 되고, 이것을 알면 이제부터 나에게 주어지는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구체적인 사랑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전혀 의사 소통이 되지 않는 사람들을 앞에 놓고 종말적인 통첩과 같은 말씀을 하고 계심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됨과 그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복음의 진수를 우리는 바로 듣고 믿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나에게 주신 이가 아들과 함께 어찌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 말을 실존적으로 생각하면, 모든 것이 은사요 모든 것이 사랑의 계시다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결론적으로, 우리가 고백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입니다.
'◑ 자료 18,185편 ◑ > K자료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도하는 마음(마 7:7~11) (0) | 2024.02.24 |
---|---|
개와 돼지(마태복음 7 : 6) (0) | 2024.02.24 |
거저 주어라(마태복음 10장 1절~8절) (0) | 2024.02.24 |
경건에 이르는 훈련 (디모데전서 4장 6절~16절) (0) | 2024.02.24 |
가장 불행한 가정(사도행전 5장 1~11절) (0) | 2024.02.2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