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깨달음이 없는 사람(시편 49편 6절~20절)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 저로 영존하여 썩음을 보지 않게 못하리니 저가 보리로다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우준하고 무지한 자도 같이 망하고 저희의 재물을 타인에게 끼치는도다 저희의 속 생각에 그 집이 영영히 있고 그 거처가 대대에 미치리라 하여 그 전지를 자기 이름으로 칭하도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저희의 이 행위는 저희의 우매함이나 후세 사람은 오히려 저희 말을 칭찬하리로다(셀라)……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하시리로다(셀라) 사람이 치부하여 그 집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 말지어다 저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 영광이 저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저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그 역대의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영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인도의 교육학자 케일리 여사는 "현대인에게는 세 가지의 정신적 죄악이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많은 것을 아는 것처럼 자처하지만, 정말로 배워야 할 것은 배우러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귀한 진리가 있을 때에는 이것을 남에게 가르쳐야 되는데, 더 많은 사람이 알도록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할 수 있으면서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는 것도 많지 않지만, 그 아는 것마저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상의 세 가지가 현대인의 정신적 죄악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 개념에 대한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배운다는 것도 항상 배울 수 있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배울 수 있는 때가 있습니다. 이 때를 놓치면 배울 길이 없습니다. 가르치는 것도 가르칠 수 있는 때가 있습니다. 이 시간을 놓치면 가르치지도 못합니다. 행한다는 것도 언제나 행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내게 주어지는 기회가 있을 때에 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만 기회를 놓쳐버리고 마는 어리석음, 이것이 곧 죄악인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비극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별로 귀중하지도 않은 것을 취하고 진짜로 귀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가장 귀한 것은 소홀히 여기고, 사실은 별 쓸모도 없는 것을 붙들려고 하는, 그러면서 아주 중요한 것을 소모해버리는 그러한 어리석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비참한 것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얼마나 비참한 처지에 있고, 얼마나 한심한 짓을 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깨닫지 못합니다.
세 번째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포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깨달은 것도 적고, 아는 것도 적고, 배운 것도 적지만 그것마저 실천하지 않습니다. 뿐만아니라, 그 가진 지식마저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문이나 방송 등에서 '자살'이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대부분, 어떻게 자살합니까? 약을 먹고 자살하고, 총으로 자살하고, 목을 매어 자살하고…… 끔찍한 이야기입니다마는 그럼에도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스스로 제 목숨을 끊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을 참으로 아프게 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식량 사정이 너무나 어려운 북한에서는 나이 많은 사람들이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서 일부러 얼어죽는답니다. 젊은 사람들 좀더 먹으라고 말입니다. 괜히 늙은이 때문에 식량이 축나면 젊은사람들까지 못살게 되니까, 밖으로 나가서 조용히 없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살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우리는 누가 자살한다고 하면 꼭 순간적으로 목숨을 끊는 것만 자살인 줄 알지만, 자살의 개념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가는 것, 그게 자살이지요. 자기도 빤히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몸에 나쁘고, 이런 것을 먹으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 먹습니다. 자살입니다. 적어도 사람은 자기의 건강에 대해서도 위임받은 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식량을 주셨습니다. 또, 이런 것을 먹으면 좋고, 이런 것을 먹으면 나쁘다 하는 기본적인 상식을 주셨습니다. 사람은 고사하고 동물도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소한테 풀을 먹여보세요. 소가 풀을 먹을 때에 그냥 덥석덥석 아무 것이나 먹는 게 아닙니다. 자기 몸에 이롭도록 이것 먹고 저것 먹고, 다 골라서 먹습니다. 동물도 이럴진대 하물며 사람이 이것을 모를 리 있겠습니까?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쁜 줄을 압니다. 그런데 일부러 나쁜 것만 골라 먹습니다. 그 사람, 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이게 바로 자살입니다. 스스로 자기에게 주어진 생명에 대하여 위임받은 능력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길인 줄 알면서 그 길을 가고, 죽음을 재촉하는 것인 줄 알면서 그것을 먹는다--이것은 스스로 자기의 깨달음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좀더 나아가서, 망각되는 것이 아니라 망각하는 것입니다. 미처 몰라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그렇게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여름방학에 한번 공장에서 일을 해보았습니다. 일부러 제일 힘든 일을 시켜달라고 부탁해서 일을 했는데, 바로 제 옆에서 일하는 사람이 참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목요일에 주급을 받으면 그날 밤에 늘어지게 술을 퍼먹고, 다음날인 금요일에는 공장에 못나오는 것입니다. 매주 금요일마다 못나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사람에게 대체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마침 옆에 있던 어떤 사람이 먼저 이런 말을 해줍니다. "저 사람은 얼마 전에 위암수술을 받았는데, 위를 거의 다 잘라버렸다고 합니다. 의사가 '당신은 이제 술을 먹으면 죽는다' 했는데도 불구하고 저렇게 술을 먹습니다" 그래, 저는 또 한번 본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당신은 위수술도 받았고, 이제 술을 먹으면 죽는다는데 왜 이렇게 술을 마십니까?" 그랬더니 이 사람 대답이 "술을 먹으면 죽는다는 그 말을 잊어버리려고 먹습니다"합니다. 그리고 아주 슬픈 말을 덧붙이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이 직장에서 일한 지도 어언 20년이오 그런데 더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허구헌날 똑같은 생활일 뿐인데 더 살아서 무엇하겠습니까?" 자살입니다. 이것은 망각이 아니라, 일부러 기억을 없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방편이 술이요, 아편이요, 마약이요, 폭력입니다. 이것은 고의적인 타락입니다. 어찌 사람이 그럴 수 있느냐 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일부러 그러는 것입니다. 세대가 이렇게 달라진 것입니다. 옛날에는 죄를 짓든, 타락을 했든, 폭력을 저질렀든, 그것은 어찌하다보니 부득이하게 그랬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게 아닙니다. 고의로 그럽니다. 또한 남의 생명만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내 생명도 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것은 전적인 자살행위입니다. 처음부터 자살이요, 살인행위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인생에 있어, 인간됨이란 깨달음에 있고, 그 행복과 가치는 인격에 있습니다.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인격은 그가 가진 깨달음과 그 깨달음에 대한 실천력에 있습니다. 얼마나 많이 아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적어도 아는 만큼은 행할 수 있어야 됩니다. 나쁜 길이면 그리로 안가야 인격이 있는 것이고, 먹어서 나쁜 것이면 그것을 안먹어야 인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그리로 간다면, 그의 아는 것은 거짓이요, 그의 행위는 비인격적입니다. 곧 비인간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고민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민이 있기에 인간은 아름답습니다. 고민한 결과가 어떻게 되느냐--그런 의미에서 사람에게 상당한 깨달음을 줍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너무나도 쉬우면서 절실한 교훈이 있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20절)"--깨닫지 못하는 자는 짐승과 같은 것입니다. 바로 며칠 전에 저는 어느 조그마한 간이식당에 점심을 먹으려고 들어갔었는데, 그 식당 안에 누군가가 '성공의 비결'이라는 글을 써 붙였습니다. 별로 시원치 않은 글씨였지만 그래도 글이라고 써다 붙였는고로 자세히 읽어보았더니, 성공의 비결에는 일곱 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그 내용이 아주 그럴듯합니다. 제가 또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 그 일곱 가지를 다 기억은 못합니다마는, 저는 기억해서 좋을 것만은 기억합니다. 어쨌든, 뭐라고 씌어 있는고 하니, 첫째가 '주도적으로 일하라'입니다. 당신이 하고 있는 일에 책임을 지라는 뜻입니다. 둘째가 '끝을 생각하고 시작하라'입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 째가 '건강을 생각하라'입니다. 아주 쉬운 얘기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쉬운 얘기를 실천하지 못하므로 더 형편없는 것입니다. 끝을 생각하고 시작하라--끝을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흔히들 그 다음에 되어질 일을 생각 안 합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욕을 해버린다면, 저쪽에서는 이쪽에 대고 욕을 안 할 것 같습니까? 미처 그 생각도 못했습니까? 내가 하는 나쁜 말을 그저 듣기만 하고 있을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합니다. 인격자는 적어도 남을 해롭게는 하지 않습니다. 왜요? 그 뒤에 자기에게 돌아올 해(害)가 있으니까요. 내가 불친절하게 대하면, 도리어 그 불친절한 것이 내게 돌아올 테니까요. 이것은 불 보듯 뻔한 사실인데, 무엇 때문에 벌어가며 이런 욕을 먹겠습니까? 문제는 깨달음입니다. 그실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사건에 부딪혀서 그대로 당하는 것은 짐승이요, 사건에 부딪혀서 깨달음이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사건에 부딪힘 없이 깨닫는 것은 보다 높은 인격입니다. 다 잃어버려도 지혜만 얻으면 성공입니다. 다 잃어버리고 손을 든다 해도 깨달음만 있으면 인간입니다.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입니다. 한 30여년 전만 해도, 겨울에 너무 추우니까 방안에 난로를 놓고 살았습니다. 여러분도 다 기억하시겠지마는 한창 뛰어 노는 아이들이 데지 않도록 난로가에 마치 돼지우리처럼 울타리를 만들어놓았습니다. 심방을 해보면 집집마다 다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 집에도 난로를 놓았는데 그 옆에서 아이 둘이 뛰어 놀고 있는 것을 교인들이 보고는 이런 말을 합니다. "아이구, 여기에다가 돼지우리처럼 울타리를 만들어야지요. 그냥 이렇게 놔두다가 행여 아이들이 부딪히기라도 하면 큰일날 텐데 왜 이렇게 두십니까?" 그래서 괜찮다고, 우리 집 아이들은 여기에 데지 않는다고 대답했습니다. 난로가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하고, 아직 데지는 않을 정도일 때에 두 아이를 끌어다가 난로에 한 번씩 손을 대게 했었습니다. 손이 뜨거우니까 아이들이 놀라서 '악'하고 울었습니다. 자, 이제는 상관 없습니다.
이 정도 해두면, 어린애들이라도 다시는 난로 가까이 안갑니다. 괜히 울타리를 만들어서 아이들이 혹 그 위에 올라갔다가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정말 큰일나는 것이지요. 깨달음이 있다는 게 얼마나 중요합니까? 안다는 것과 깨닫는 것은 같은 게 아닙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실제적인 말씀을 줍니다. 재물의 무상함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을 보면, 돈이라는 것, 건강이라는 것, 지식이라는 것, 명예라는 것에 대하여 줄줄이 이어집니다. 명예, 명성, 이런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런 전설이 있습니다. 로마의 시저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할 때였습니다. 로마의 전성기, 온 세계를 장악했다고 말할 수 있는 자랑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군중의 환호와 함께 큰 영광을 누립니다. 이 때, 그는 번쩍거리는 면류관을 벗으면서 말했습니다. "겨우 이것이 전부냐? 도대체 이게 무엇인데 사람들이 이것 때문에 생명을 바친다는 말이냐?" 끝을 알고 시작할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재물이라는 것은 살아가는 수단의 일부이지, 결코 목적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나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나를 속량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어떤 부자가 많은 재산을 모아놓고, 스스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먹고 마시고 즐기자'--그런데 이 때에 하나님께서는 웃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취할 것이다. 그러면 네 재산은 뉘 것이 되겠느냐'--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재산은 생명을 구속하지 못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재산은 자손에게 물려줄 수 없습니다. 물려줄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세요. 돈은 줄 수 있을지 모르나 돈의 가치를 물려주지 못하고, 돈의 소중한 느낌을 물려주지 못하고, 그 돈으로 인해서 오는 행복감을 물려주지 못합니다. 돈을 물려줄 수 있다고 착각하는 데서부터 세상이 시끄러워지는 것입니다. 실명제니 뭐니, 돈 문제가 복잡합니다마는 그실 간단합니다. '당신이 번 돈은 당신만 쓰고 가시오'하면 세상은 조용해집니다. 얼마 못 쓸 것을 다 알고 있으니까요. 돈 문제 때문에 어디서부터 시끄러워지느냐 하면, 자손에게 물려주려고 하는 때부터입니다. 누구에게 이것을 물려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오늘의 성경은 분명히 물려주지 못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환상 중에 지옥에 가보았더니, 웬 아버지가 지옥에 먼저 와 있고, 그 다음에 아들이 또 왔다고 합니다. 부자(父子)가 지옥에서 만나게 되니까 기가 막힌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야, 이놈아. 네가 어떻게 이 지옥에 왔느냐? 나는 너를 행복하게 하고, 너를 잘살게 해주려고, 네 장래가 잘되라고 불의한 재물은 물론이고 못할 짓까지 하면서 이 지옥에까지 왔는데……" 그랬더니 그 아들, 뻔뻔스럽게도 이렇게 대답합니다. "차라리 내가 가난했더라면 정직하게 살았을 것을, 아버지가 돈을 많이 물려주었기 때문에 허랑방탕하다가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닙니까? 나는 아버지 때문에 여기에 왔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아들 때문에 지옥에 갔고, 아들은 아버지 때문에 지옥에 가서 부자간에 상봉한 것입니다. 자, 보세요. 하는 짓들이 꼭 이렇지 않습니까? 이것이 꼭 남의 얘기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들 야단이냐--가만히 보면, 전부가 물려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결코 물려주지 못합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나의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내가 죽으면 다 끝나는 것들입니다. 탈무드에 아주 평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에는 주먹을 쥐고 있다. 모든 것을 다 가지려는 것처럼. 그런데 이상하게도 죽을 때에는 손을 펴고 있다.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하므로'--죽음에 대한 상징적 교훈입니다.
여러분, 죽음에 대해서 우리는 세 가지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또한 깨달아야 합니다. 첫 번째는 죽는다는 것입니다. 죽는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보면서 내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남의 죽음을 많이 목격하면서도 나는 안 죽을 줄로 생각합니다.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입니까? 이 지구상에는 50억 이상의 인구가 사는데, 매년 5천만 명이 죽습니다.
매일 13만 6천 9백만 명, 1초에 약 두 사람씩 죽습니다. 그렇게 죽어가다 보면 머지않아 내 차례도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남의 죽음을 나와는 관계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세 번째는 이렇습니다. 대개 보면, 죽는다는 것까지는 인정을 합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오늘이 내 죽는 날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모릅니다. 그 날이 조금 더 멀리 있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이 내 죽음의 날이 될 수 있다는 것과, 그런고로 오늘이 이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행복한 날이라는 것을.
죽음이 있으나 인생은 존귀합니다. 죽음이 있기에 더 존귀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고, 은혜 안에 있고, 깨달음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은혜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깨달음의 능력이 있기에 인간은 존귀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살 수 있기에 행복합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쓰임 받는 생의 의미를 알 수 있는 존재이기에 인간은 소중합니다. 깨달음이 있는 인생은 존귀합니다.
부유해서도 아니고, 성공해서도 아닙니다. 깨달음이 있기에 아름답습니다. 또한 나의 나된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그 때에야 은혜가 은혜 되기 때문입니다.
결혼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거기에 깨달음이 있는 사람은 순간, 순간에 행복합니다. 깨달음이 없는 사람은 남보기 부러운 형편에 있는데도, 본인은 괴롭습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은혜를 성령 안에서 매일매일 확인하면서 삽니다. 그런고로 오늘이 가장 중요한 날입니다. 오늘이 가장 행복한 날입니다. 오늘에 다시 하나님의 귀한 사랑을 확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위험한 시간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 안에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이런 깨달음이 있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것입니다. *
'◑ 자료 18,185편 ◑ > K자료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날 계수하는 지혜(시편 90편 1절~12절) (0) | 2024.02.02 |
---|---|
교회의 권세(마태복음 16장 13절~20절) (0) | 2024.02.02 |
근심 위에 근심(빌립보서 2장 25절~30절) (0) | 2024.02.02 |
나를 바다에 던지라(요나 1장 4절~12절) (0) | 2024.02.02 |
내 인생의 현주소(창세기 3 : 1~10) (0) | 2024.02.0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