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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히 여기는 자(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다섯째 복을 공부할 순서입니다. 이미 보았듯이 첫째 복에서 셋째 복까지는 개인의 심령에 대한 것이었고 넷째 복부터는 한 걸음 발전해 이웃으로 향해 방향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넷째 복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 대한 복이었고, 오늘 다섯째 복은 긍휼을 베푸는 자에 대한 복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을 베푸는 자가 긍휼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긍휼이란 무엇입니까? 흔히 사랑을 이야기할 때 세 가지로 나누어서 말합니다. 첫째는 나보다 높은 사람에게 대하는 사랑으로, 위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이것은 존경을 겸한 사랑으로 부모를 공경하거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랑입니다. 둘째는 나와 같은 위치에서 동등하게 대하는 사랑으로 휠리아라고도 말합니다. 우리말로는 친하다 친애하다 라고 표현되어 집니다. 셋째는 나 보다 못한 사람, 즉 나보다 어리고 어려운 사람에게 대하는 사랑으로, 이것을 긍휼이라고 합니다. 긍휼(mercy)을 가장 쉽게 보여주는 예는 부모님들이 어린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부모는 아이들이 잘못을 했어도, 그것은 실수이고 아직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며 사랑으로 덮어 줍니다. 이렇게 부모가 자식을 돌보는 사랑을 긍휼이라고 합니다. 이 긍휼을 우리가 이웃에게 베풀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긍휼의 축복을 내리시겠다고 본문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긍휼과 자비로 일관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약 2 : 13)는 말씀과 같이, 우리가 이웃에게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긍휼 없는 심판을 내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과의 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로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18 : 35에서도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네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긍휼은 신약 전반에 걸친 교리로써, 우리들이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무서운 경고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절대조건으로 말씀하신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어린아이와 같아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내가 형제를 용서해야 하나님도 나를 용서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용서란 가능하다 불가능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다만 용서하는 자에게 용서가 있을 뿐입니다. 용서란 돈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권리를 포기함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아무튼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나를 용서하지 않으심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주기도문에서도 용서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즉 우리가 남에게 용서한 분량만큼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는 조건부 기도입니다. 다른 일에는 제한이 있고 한계가 있지만 용서만은 제한도 한계도 없습니다. 내가 남을 용서하지 못했으면 하나님께 나의 용서를 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용서에 대해서만은 완전해야 합니다. 혹시 누군가와 원수 맺은 일이 있습니까? 그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한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내가 베풀지 않은 긍휼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긍휼이 가진 보다 깊은 뜻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긍휼을 헬라어로는 '엘레몬'이고 라틴어로는 '케세드'로, 단순한 감정의 표현이 아닌, 좀 특이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톨릭교의 기도문에 보면 라틴말로 "엘레이 에메" 즉 긍휼을 베푸소서 라는 기도문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장례식에서 하는 기도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 죽은 자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옵소서"라고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의 내용이 이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참 좋은 기도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먼저 불쌍히 여기고 나서, 그리고 불쌍히 여기어 주옵소서 라고 구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문의 뜻으로는 그 사람의 피부 속으로 깊숙히 들어가서 그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의 생각, 감정, 경험 속에 동참하면서 사랑해야 긍휼이라는 것입니다.
영어로는 "identification with him"으로 그와 나를 동격시하는 참 좋은 표현이 있습니다. 나는 높은 자리에 앉아서 낮은 자리에 있는 그에게 불쌍하다고 동정하는 그런 감상적인 긍휼이 아니라 내가 그와 같은 처지와 형편으로 내려와서 함께 체험한다는 뜻입니다. 동정(sympathy)한다는 것과는 의미가 다릅니다. 그의 감정이나 느낌을 함께(together with) 나누는 것, 즉 공감(empathy)하는 것을 말합니다. 가령, 한 어린이가 지금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면 그 어린이의 마음으로 들어가서 함께 경험하고 함께 생각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긍휼인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상대방의 입장으로 돌아가서 그의 생각과 감정을 함께 경험하고 느끼며 이해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긍휼을 베풀어야 나도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을 수 있으니 어찌합니까? 누가복음 10 : 38-42에 보면, 예수께서 며칠 후면 십자가를 지시는 어려운 기간 중에 마르다와 마리아의 가정을 방문하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르다는 귀한 손님을 잘 대접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서 음식을 장만하느라고 분주했고, 동생 마리아는 귀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여 주님 앞에서 말씀듣기에 열중했습니다. 그러면, 누가 더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한 것입니까? 예수님은 좋은 음식을 대접하기 위해 말씀 듣는 동생을 꾸짖는 마르다의 태도를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마리아를 두둔하셨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베풀면 고맙기보다는 오히려 부담을 주고 괴로움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고 동참한다는 것은 어렵고도 중요한 일입니다.
긍휼을 또 다른 의미로는 용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마음에 동참하고 이해하면 용서하지 못할 것이 있겠습니까? 나에게 아직도 용서하지 못한 어떤 응어리가 있다면, 그를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그의 형편과 사정으로 들어가서 생각하면 이해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먼 위치에서, 아니 나의 위치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비판하게 되고 이해가 불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격언에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용서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해에는 용서가 있기 마련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긍휼을 베푸는 자에게 긍휼의 복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여왕 퀸 빅토리아는 20세에 왕이 되었는데, 즉위하자마자 아주 어려운 문제에 부딪쳤습니다. 그 당시 일선의 군인이 탈영을 하면 사형을 하도록 엄한 법이 있었는데, 어느 군인이 탈영을 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여왕이 서명을 하면 그 군인은 총살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서명을 해야하는 서류가 여왕 앞에 오자, 어린 빅토리아는 한 생명의 결정권이 자기에게 있음을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주변에 있는 군인들에게 이 탈영병에 대해서 무슨 할 말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모두가 침묵하고 있을 때 어느 한 군인이 말하기를 "그가 죽을 죄는 지었지만, 사실 그는 참 좋은 사람이었습니다"라고 한 마디 했습니다. 여기서 여왕은 용기를 얻어 서명을 하지 않고 그 군인을 살려 냈다고 합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누군가가 그를 불쌍히 여겨주기를 원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남의 죄에 대해서 지나치게 객관시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서 그의 입장으로 돌아가서 생각할 수 있다면 그의 문제가 곧 나의 문제일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이해가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필자가 어느 책에서 본 내용으로 기억에 남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일상 대화 중에서 "항상"(always)이라는 말을 빼라는 것입니다. 가령, 어린아이들이 실수를 했을 경우, 너는 '항상' 그 모양이냐고 나열형으로 실수를 강조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실수한 사건 그 하나만으로 한정하자는 것입니다. 항상 실수한다고 나열형으로 말하면 용서할 여지가 없지만, 큰 실수도 작은 실수인 것처럼, 생리적인 것도 단 한번의 실수로 보아주면 용서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때로는 묵인하고 모르는 척 하는 기술도 필요합니다. 실수할 때마다 알고 꼬집어서 들어내는 곳에서는 진정한 긍휼은 없는 것입니다.
용서 중에 가장 큰 용서요, 긍휼 중에 가장 큰 긍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가 이 땅에 오심은 먼 위치에서, 높은 자리에서 사람들을 비판하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긍휼히 보셨기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유명한 성 프란치스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그가 말을 타고 길을 가는데, 웬 거지가 추위에 떨며 구걸을 했습니다. 프란시스는 말에서 내려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거지가 너무 춥다고 대답하자, 그는 자기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거지에게 입혀주었습니다. 거지를 불쌍히 여긴다면 내 옷을 벗어 주고 내가 대신 추워야 합니다. 자신의 추위를 계산하면 옷을 벗어줄 수가 없지만, 긍휼이란 나의 손해를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다만 그가 얼마나 추울까만 생각하고 옷을 벗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지는 계속해서 떨면서 프란시스에게 옷을 입어도 추우니 나를 꼭 안아 주실 수 없느냐고 다시 요구합니다. 이 거지는 문둥병 환자였습니다. 프란시스는 얼마나 더럽고 병이 옮으면 어찌하나 하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진심으로 그를 끌어안았습니다. 그런데, 사랑으로 꼭 끌어안았던 그 거지가 뜻밖에도 사라지는 기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어서 "네가 이처럼 나를 사랑하는 것을 이제 알았다"는 음성이 하늘로부터 들려왔습니다. 이후로 그는 부자집 아들로서의 상속도 저버리고 수도를 해서 유명한 성 프란시스가 된 것입니다.
긍휼이란 뒤로 미루는 마음이 아닙니다. 즉각적인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사실 사람의 마음은 그 순간만 지나면 생각이 달라지는 가변적인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는 "선을 행할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인이다"라고 했습니다. 선을 행해야 될 것을 알면서도 행치 아니한다는 뜻은 선을 행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고 그 선을 뒤에 하겠다고 미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선을 미루는 마음이 바로 죄란 말입니다. 왜냐하면 기회란 지나가는 것으로 선을 행하겠다는 내 마음도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불쌍한 사람을 보았을 때 즉각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몇 분만 보내고 나면 마음이 느긋해져 나 말고도 누군가가 돕겠지 또는 가난은 나라도 구제 못한다는 구실이 생기게 됩니다. 긍휼은 언제나 직선적으로 역사 해야 합니다. 성 프란시스처럼 자기 희생은 아랑곳없이 상대방을 긍휼히 여길 때 거기에 하나님의 계시적 사랑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 신학적 문제가 있습니다. 긍휼히 여긴다고 할 때에, 긍휼을 하나의 공로와 같이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남을 긍휼히 여김은 공로로써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구원받은 자의 마땅한 행위일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 구하는 긍휼 때문에 이 긍휼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우리 죄를 하나님께 무조건 용서해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우리가 하는 용서에도 조건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에게는 무조건적인 용서를 베풀 수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일곱 번씩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하고 용서에 대한 한계를 물었을 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주님은 대답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용서를 몇 번으로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유대 랍비의 교훈에서는 세 번까지 용서하라고 되어있지만, 그리스도인의 용서는 한계가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구하는 용서가 바로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적으로, 긍휼은 공로가 아닙니다.
그러면, 용서라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줍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하나님을 닮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잘 아는 대로 너그러운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은 너그러움을 베풀 줄 알고, 손님 대접을 잘하는 집에서 자란 사람은 손님 대접을 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하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긍휼처럼 우리도 그 긍휼을 베풀어야 함은 당연한 일입니다.
둘째, 내 공로로 구원받지 못한 죄인임을 스스로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긍휼이 유출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받았으니 그 긍휼을 이웃에게 베푸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받은 그 많은 은혜를 생각하면 어떻게 베풀지 않겠습니까?
셋째, 계속적으로 긍휼을 힘입어 그 긍휼 속에서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우리들은 과거도 그랬고 앞으로도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나는 긍휼을 베풀지 않으면서 긍휼을 바라기만 하면 되겠습니까? 긍휼을 구하는 마음은 곧 긍휼을 베푸는 마음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의 죄를 무조건 용서해 주기를 원했으니, 나도 역시 이웃에 대해서 무조건 용서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즈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인색하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웬 일입니까? 우리는 좀더 너그러워야 합니다. 남을 위해서는 될수록 손을 길게 넓게 펴고 자신을 위해서는 짧게 인색하게 손을 펴자는 것입니다.
필자는 결혼 주례를 부탁하러 오는 신랑 신부 후보생들에게 가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 일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결혼식을 하는 사람들로써 그대들의 결혼식을 위해 주변에서 수고하는 사람들에게 인색하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가령 반주하는 분에게도 특별히 인사하고, 교회에서 청소하는 분에게도 좀 후하게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자기들에게 좋은 날이면 청소하는 사람들도 좋은 마음으로 일하도록 함께 즐겁자는 것입니다. 일생동안 인색한 사람이라도 이날 하루만은 후하게 주위 사람들과 함께 즐긴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좀 비약해서 그리스도인은 적어도 주일날만은 좀 후하게 너그럽게 살았으면 합니다. 우리는 어차피 긍휼을 받아야 할 사람이고 긍휼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도 이웃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이제 긍휼히 여기는 자가 받는 복에 대해서 생각하겠습니다. 첫째는 내적으로 오는 복이 있습니다. 잠언 11 : 17에 보면,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도 해롭게 하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긍휼을 베푸는 자는 언제나 마음이 평안하지만 남에게 악하게 하는 사람은 우선 자기 영혼이 손해를 봅니다. 늘 불안하여 잠조차 제대로 잘 수 없는 형편입니다. 가끔 우리들은 누군가의 흉을 보면서 우리끼리만 알고 있자고 비밀스럽게 이야기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런 짓을 자주 하는 사람은 신경쇠약에 걸립니다. 우리끼리만 알자고 했는데 저 사람이 과연 비밀을 지켜줄 것인가 하고 불안해서 안절부절입니다.
비밀을 많이 가진다는 것은 그만큼 괴롭습니다. 언제나 누가 들어도 좋은 말만하면 얼마나 편합니까? 그런데도 누가 들으면 안될 말, 큰일나는 말만 하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결국 신경쇠약으로 고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마음도 후하고, 말도 후하고, 행위도 후해서 이웃에게 긍휼을 베푸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곧 자기 영혼을 이롭게 하는 길입니다. 잠언 14 : 21에도 보면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자는 전혀 뜻밖으로 긍휼을 되돌려 받는 복을 얻습니다. 필자가 이북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는데 특별히 기억나는 선생님이 한 분계십니다. 그 분은 정말 인심 좋은 선생님으로 알려졌었습니다. 그런데 전쟁 중에 그 선생님이 월남을 하시다가 한밤중에 백령도 부근에서 붙잡혔습니다. 꼼짝없이 죽게 되었는데, 총을 든 감시원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그의 제자였습니다. 감시원도 깜짝 놀라 당황하더니 "선생님, 이 길을 따라서 빨리 떠나세요"하고 길까지 안내하며 보내주었다는 것입니다. 평소에 후하셨던 선생님의 후덕으로 죽을 지경에서 긍휼을 힘입어 살아났던 이야기입니다. 긍휼을 많이 베푸는 자는 그 언젠가 그 긍휼을 되돌려 받습니다. 잔악하게 구는 자는 언젠가 그 잔악함을 자신이 거두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로, 긍휼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디모데후서 1:16에 "원컨데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만났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부지런히 긍휼을 베풀면 하나님께서 갚으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죄인도 비판하거나 멸시하지 말고 불쌍히 여기십시다. 항상 이해하고 그의 입장에 동참해서 마치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긍휼히 여기듯이 그 긍휼을 베풀어 나가십시다. 누구의 잘못에 대해서도 본래성이라고 말하지 말고 단 한번의 실수로 보고, 긍휼히 여기십시다. 그의 실수는 언젠가 내게도 있을 수 있는 실수라고 보아야 합니다. 항상 긍휼을 베푸는 자에게는 자유함의 은총이 베풀어질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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