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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기도하는 마음(마 7:7~11)

by 【고동엽】 2024.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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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마음(7:711)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약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예수를 믿는 신앙 생활이 무엇이냐고 할 때에 진실 되고 의로운 생활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필자는 한 마디로 신앙 생활이란 곧 기도 생활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위로 모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대화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하나님이라는 뜻에서 남자의 머리 위에 하얀 모자를 올려놓고 다닙니다. 군대에 나갈 때도 철모 위에까지 하얀 모자를 올려놓고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안에서 기도로 하나님과 계속적으로 교통하며 살아갑니다. 기도란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이 응답하심을 듣기도 합니다. 즉 일방도로가 아니라 쌍방도로(two way system)로써, 서로 말하고 듣는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수준이란 그의 기도 생활에 의해 알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가 어떻게 얼마나 기도하고 계속적으로 응답을 듣고 사느냐에 의해 그의 신앙 수준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응답이 없는 기도는 피곤하여 금방 지치지만 응답받는 기도는 신이 나며 윤택한 신앙 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기도해야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까? 기도의 바른 자세를 알아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을 알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를 알아야만 그에 맞추어서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마틴 루터의 말대로 하나님이 하나님 되게 하는 기도만이 응답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되면 나의 기도 자세도 바로 됩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어떤 기도를 응답하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식성을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기도해야지 눈치도 없이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기도만 되풀이하면 되겠습니까? 구약성경을 잘 관찰하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여러 가지로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된 일에 대해 오래도록 잘 참으십니다. 죄를 지었다고 해서 당장 벌을 내리거나 물리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급하게 진노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우상화할 때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섬기는 일까지도 참으시고 기다리지만 하나님 당신을 우상화하면 당장 진멸하신 것을 구약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우상화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이므로 참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모세가 없는 동안 금우상을 만들어 놓고 ", 이것이 우리를 애굽에서 빼낸 여호와 하나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단번에 때려 부셨습니다. 차라리 "하나님도 모르겠고 모세도 없으니 우상이나 섬기자"라고 말했다면 하나님께서 좀 참으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상을 만들어서 하나님을 우상화한 큰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도전한 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잘못 기도하면 오히려 하나님을 우상화해서 그의 진노를 사게 할지도 모릅니다.

우상에게 하던 버릇을 이름만 바꾸어서 그대로 기도하는 잘못을 저지를까 삼가 조심해야 합니다.

이 본문의 요지는 우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죄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큰 죄 중의 하나입니다. 본문을 읽노라면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이에서 예수님께서 열심히 중계 역할을 하고 있는 모습을 그릴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복을 주시려고 애를 쓰시는데 사람들이 미련해서 받지 못하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화해의 공작으로 지금 말씀하시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가령, 어느 아버지가 아들을 때립니다. 아들은 잘못했다는 소리를 하지 않고 그냥 매를 맞으니 옆에 있는 어머니가 속이 탑니다. 잘못했다고 빌기만 하면 매를 면할 수도 있을 터인데 고집을 부리고 계속 매를 맞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더 이상 참기가 어려워 "얘야, 제발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하라"고 거들게 됩니다. 바로 어머니의 이 모습이 예수님의 모습과 비슷하단 말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조금 과장된 표현을 쓰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7 : 9-10), 천하에 못된 아버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려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인데, 하물며 하나님께서는 어떠하시겠느냐는 비유입니다. 구하면 줄 것인데 하는 예수님의 답답한 심정이 잘 나타나 있으며 동시에 기도를 권하는 간절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 문장은 하나님께 대한 모독의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악한 아버지에게 비유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는 예수님 자신을 강도에 비유한 적도 있습니다만 이 모든 것은 보다 내용을 강하게 전달하려는 의도인줄 압니다. 아무튼 여기서는 아버지와 자녀와의 관계에서 부성을 강조하여 하나님을 알려 주고 계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신의 필요한 모든 것을 청구합니다. 이것은 당연할 뿐 아니라 아들된 특권이기도 합니다. 아들이 아버지께 요구하는 것은 아버지로 아버지 되게 하는 일입니다. 사실, 자식이 부모에게 요구하는 것이 없다면 부모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아들이 달라고 할 때 부모의 마음은 즐겁고 기쁩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바로 이 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주시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왜 달라고 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면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기 위해서, 즉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구하라는 것입니다. 아들의 입장에서는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특권입니다. 그래서 우선 구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가지 더 알아야 할 것은 이미 공부한 마태복음 6:8에서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필자가 어느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는 중에 권사님 한 분이 말씀하시기를, 자기는 기도를 중단한 지가 몇 달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왜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묻자 "하나님께서 구하기도 전에 아신다"는 마태복음 6장을 읽고서는 이제 하나님께서 주실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권사님께 소개하면서 "마태복음 7장도 읽어보세요"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면 "구하라 주실 것이요" 하는 말씀과 "구하기 전에 아신다"는 말씀을 대조해 보십시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아십니다. 그러나, 구하기 전에는 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을 몰라서 주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구할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해야 합니다. 기도란 결코 모르는 사실을 하나님께 지식을 제공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언젠가 타임지란 잡지에 미국의 젊은 학생들이 쓴 글을 보았습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리석은 분이며 인색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변화가 없으니 따분하고 사람들이 무엇이 필요한가를 아시면서도 주지 않으시니 인색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한 바가 있을 때만이 비로소 주십니다. 하나님의 그 깊은 뜻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유대 랍비들의 교훈에 보면 귀와 입이 가까운 것처럼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 가까이 계셔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귀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사람들은 특별히 기도를 많이 합니다. 인간은 두 사람의 말을 동시에 듣기가 어렵지만 하나님은 동시에 온 세계 사람들의 말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간혹 농담으로 세상 사람들이 각자 자기의 소원을 아뢰면 하나님도 머리 아프시니 제목을 모아서 기도하라는 이야기들을 합니다만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한꺼번에 다른 사정을 기도해도 하나님은 다 들으십니다. 아니 열심히 구하면 구할수록 더욱 그를 사랑하십니다. 사람들은 남의 걱정을 한두 번은 들어줘도 이것이 계속되면 싫증이 나고, 더우기 도움을 요청해 오면 짜증이 나게 마련입니다. 요즘같이 바쁜 세상에 한가하게 남의 걱정거리를 계속해서 들어주고 함께 도와주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나에게 와서 의논한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특히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함께 의논하는 데 기쁨이 있고 서로 사랑을 나누는 것이 됩니다. 근심을 함께 나누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와서 다 간구할 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배고파 떡을 달라는 아들에게 어느 아버지가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주겠느냐고 비유로써 설득력 있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뱀을 대단히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생선을 달라는 아들에게 생선 대신 뱀을 내놓을 아버지는 천하에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1 : 12-13 에 보면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고 하나님께서 절대로 우리의 기도를 거절하지 않으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해야 합니다. 땅에 떨어지는 기도는 없습니다. 문제는 언제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방법과 생각이 나의 방법과 생각과는 다르더라도 기도는 이루어집니다. 사람들의 생각이 너무 급해서 당장이 아니면 응답이 없다고 포기하지만 헛된 기도는 없습니다. 돈을 달라고 했으면 돈이어야 하고 수표를 달라고 했으면 수표여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돈이면 어떻고 수표면 어떠합니까? 또 일주일 후면 어떻고 1년 후면 어떻습니까? 우리의 방법과 시간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백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기도의 형태를 일러주고 있습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세 가지 형태로 하나님께 아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이 헬라 원문의 의미로는 계속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 보면 Keep on asking(구하라), Keep on seeking(찾으라), Keep on knocking(두드리라)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번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구하고, 계속해서 찾고, 계속적으로 두드리라는 의미로 풀이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이상 세 가지 형태를 보다 상세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구한다(asking)는 것은 하나님 앞에 우리의 소원을 구체적으로 이것 주세요 저것을 주세요 하고 아뢰는 것을 말합니다. 야고보서 4 : 3에 보면 "우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않음이요, 구하고도 얻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는 야곱의 고백이 있습니다. 우리가 얻지 못한 것은 구하지 않았다는 내용을 다르게 표현하면 실패한 것은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바꿀 수 있습니다. 이런 고백을 해 본 경험이 있습니까? 실패한 이유는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야곱이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믿는 사람들에게는 기도 외에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았으므로 실패했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반대로 기도하고 시작한 일은 모두가 성공하는 일입니다. 혹시 잘 안 되는 것 같아도 성공으로 향하는 과정으로 보면 됩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찾으라(Seeking)는 것입니다. 찾는다는 것은 몸을 움직이는, 즉 행동을 말합니다. 무엇인가 찾으려면 열심히 돌아다녀야 합니다. 이처럼 기도란 단순히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동반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간구함의 진실을 행동으로 입증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행동과 말이 전혀 거리가 먼 기도는 응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찾는 마음, 헤매는 마음은 원래 자기의 마음을 떠나서 다른 것을 구하는 마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 마음속으로 구해온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여 잘못된 것이 있으면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돌리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소원이나 간구가 잘못되었다면 고치며 기도의 제목을 바꾸기도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참된 뜻을 알기 위하여 계속적으로 열심히 찾는 마음이 '찾으라'는 뜻입니다.

셋째로 두드리라(Knocking)함은 좀더 가까워졌음을 말합니다. 멀리서 소원을 아뢰고 찾아다니면서 구했기에 지금은 문에 다다랐습니다. 이제는 문을 두드릴 차례입니다. 내가 서있던 자리에서 그리스도가 계신 곳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두드립니다. '두드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문을 사이에 두고 문만 열면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두드리기 위해서는 좀더 가까이 가야 합니다. 인격과 인격 사이에 문 하나가 있으므로 두드리기만 하면 열릴 것입니다. 아니 열릴 때까지 두드려야 합니다. 가끔 교회에서 통성기도 할 때에 목이 아프도록 소리지르며 기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거리가 너무 멀어서 소리를 지릅니까? 옆에서 조용하게 자기 귀에 자기 소리가 들릴 정도로 기도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렇게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하나님은 다 듣고 계십니다. 두드리는 것과 부수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우리는 조용하고도 다정하게 두드립시다. 하나님과 아주 가까워졌으므로 문 하나만 열면 되도록 그런 자세로 계속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문이 열릴 때까지 두드리는 것이 바로 기도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구하는 자에게 주시고 찾는 자가 찾을 것이며 두드리는 자에게 열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꾸어 말하면 구하지 않으면 받지 못하고 찾지 않으면 얻지 못하고 두드리지 않으면 문이 열려지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우리 쪽에서 상당한 준비와 받을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구할 때까지 주시지 않습니다. 즉 바른 자세가 될 때까지 주시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받을 만한 그릇이 되어야 채워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구하지 않는 자에게 그저 주면 은혜를 모릅니다.

은혜가 은혜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구하는 것이 공로가 된다는 말도 아닙니다. 구함으로 받는 자세가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구하는 가운데 소원이 달라지기도 하여서 하나님의 뜻에 점점 가까워지고 받을 만한 그릇으로 준비되는 것입니다. 겸손을 준비하고 지혜를 준비하고 능력을 준비한 다음에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준비란 곧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마음이 변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겸손해지고 기도하는 가운데 믿음이 더욱 견고해지며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 앞으로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구하면 주시겠다는 약속을 가지고 우리는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기도해서 응답 받는 게 아니라 응답 받고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벌써 응답은 주어졌습니다. 단지 그 응답을 받을 그릇이 내게 없을 뿐입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만날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라"는 말씀을 그대로 믿고 구하면 응답 받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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