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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개와 돼지(마태복음 7 : 6)

by 【고동엽】 2024.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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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돼지(마태복음 7 : 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이제 주신 본문 말씀은 매우 짧은 것이지만 그 의미상으로 보아서는 매우 심각한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평소에 예수님께서는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하시면서 그 대상을 가려서 하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저 만나지는 대로 유대 사람에게나 이방 사람에게나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그 누구에게든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지상 명령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어떤 의도에서 왜 이렇게 구별하라는 말씀을 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떠한 처지에서도 결코 복음을 전해야 할 대상을 차별하거나 구별하시는 일은 없으신 분인데 오늘 본문에서는 분명히 제한적인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어떤 경우, 어떤 대상에게는 아예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말씀처럼 들려옵니다.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보고 아는 바와 같이 오늘 여기에서 말하는 "거룩한 것"이란 복음을 말함이요. 이 복음을 개에게 주지 말라! 즉 개 같은 사람에게는 복음을 주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진주라는 것 역시 생명의 말씀인 복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돼지같은 인간 앞에는 복음의 진주를 던지지 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오늘 본문 말씀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도 역시 시간과 장소, 또한 상대방의 태도와 상태 등에 따라 우리가 무엇인가 생각할 것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거기에도 선택이 여지가 있고 삼가 해야 할 것이 있는 제한적인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는 전도하는 일이라 하여 그저 아무 곳에서, 아무나 붙들고 떠들어대는 식의 그런 전도이어서는 되겠느냐는 뜻의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복음은 어느 장소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든 전해져야 할 것입니다마는 오늘 여기 주신 말씀은 분명히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개다, 돼지다 하는 것은 잘 아시다시피 그 동물 자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분명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요, 그 인격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매우 심각한 말씀으로, 잠깐 듣고 간단히 귓전으로 흘려 버릴 성질의 말씀이 아니며 또한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말씀도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바대로 동물을 비유로 사람을 지칭하는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있어 온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여우같은 사람, 곰 같은 사람, 돼지 같은 사람, 혹은 양 같은 사람, 개 같은 사람 등으로 표현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럴 때마다 거기에 알맞은 내용과 느낌을 모두가 같이 갖게 됩니다. 가령 여우같다는 말은 보통 여자들에게 쓰이는 말로 이는 앙큼하고 간사하다는 것이요, 곰 같다고 할 때에는 미련하고 고집스러우며 하나밖에 모르는 사람을 일컬어 말합니다. 또한 돼지 같다는 것은 욕심이 많다는 것이요, 그리고 개 같다는 말은 어디에나 있는 말로서 이것은 분명히 하나의 욕입니다. 그 때문에 서양 사람들 심지어 날씨가 험악하여 뇌성벽력을 칠 때에도 개 같은 날씨라며 투정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무튼 이 개 같다는 말은 일반적으로 물어뜯고 싸운다는 것이요, 무절제한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것들에 비해 양 같다는 말은 순하다는 뜻의 좋은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은 주위의 동물들을 다 들어서 그 사람의 됨됨이를 평가하는데 적절한 상징으로 쓰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비유를 들어서 오늘 이렇게 개에게, 돼지에게 라며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개에게는 거룩한 것을 주지 말며, 또한 돼지에게는 진주를 던지지 말라고 하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오늘 본문 말씀 자체에서 이미 그 의미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보아 먼저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뜻을 모르는 자에게는 거룩한 것을 던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도대체가 무슨 말인지를 전혀 알아듣지를 못하고 게다가 그 근본 중심이 아주 비뚤어져 있기 때문에 사람 같지를 않고 개와 돼지 같단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듣는 마음이 없고 받아들이는 마음이 없어요. 뿐만 아니라 한 계단 더 나아가서는 아예 사람답지를 못하고 개 같고, 돼지 같은 그런 것으로 꽉 차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거기에다 거룩한 것을 주고 진주를 던지면 어떻게 되겠느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영락없이 오해하고 곡해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진리를 엉뚱하게 달리 해석해버림으로 이 진리 자체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의 일은 많이 있습니다.

제가 오래 전에 책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한때 소련 모스크바의 크레믈린 벽보에는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는 데살로니가 후서, 3장의 말씀이 크게 씌여 있었다고 합니다. ! 이것을 공산당의 슬로우건(Slogan)이라면 문제는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습니까? 그런가 하면 가정에서도 말썽꾸러기 애들을 때리면서 성경에 보면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돌려대라고 했겠다 그러니 이번에는 이쪽이다 라며 또 때린다는데 글쎄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그 말씀을 가지고 왜곡해 들어가면서 계속 잘못된 이야기만 하게 될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들을 귀가 없을 뿐만 아니라 못된 것이 속에 도사리고 있어서 이 진리를 주었다가는 이 진리 자체를 물어뜯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진리 자체를 왜곡시키고 변질시키는 것이기에 그런 상대에게는 결코 주어져서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는 진리 자체를 순수하게, 그 본래의 뜻대로 보존하고자 하시는 염려에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장 염려하고 조심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이 복음대로, 진리가 진리대로 순결하고 순전하게 전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진리의 말씀을 처음부터 이상하게 왜곡하고 변질시켜 받아들이게 되면 이것은 차라리 주어지지 않은 것만 못하게 되어 오히려 거룩한 것이 속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의 그 귀한 값어치가 떨어져 짓밟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것이 거룩한 것으로, 진리가 진리대로 지켜질 수 없는 그런 상태, 그런 사람에게는 아예 전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본뜻은, 거듭되는 이야기입니다만 거룩한 것이 거룩하게 지켜지기를 바라시는 것이요, 거룩한 것이 속된 것에 의해서 속화(俗化)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말씀으로 생각합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거룩한 진리는 거룩하게 지켜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보면 점잖다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개 같은 경우가 많아서 문제가 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어쩌자고 진리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자기에게 편리하게 마음대로 해석하며 악용하고 돌아가는지! 참으로 개 같은 마음, 개 같은 행위를 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그 결국을 보면 진리 자체를 속되게 만들고, 진리 자체에 도전하는 결과를 낳기 마련인 것입니다.

이제 다음으로 생각하는 것은 전도자 자체를 아끼시는 예수님의 의도가 여기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무슨 말씀이냐 하면 짧은 본문이지만 여기에 보면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다시 말하면 너희를 물어뜯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전도자를 아끼시는 마음에서 개 같은 사람, 돼지 같은 사람에게 섣불리 복음을 전한다고 하다가 오히려 물려서 찢기고 상처 나는 해를 입을까봐 염려하시며 아끼시는 마음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복음은 때때로 이미 심판적 요소를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복음을 받는 순간에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여 회개를 하느냐? 안느냐?에 따라 하나는 구원으로 그리고 하나는 심판적으로 받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에 일어나는 마음의 가책이 회개로 이어지면 좋으련만 그렇지를 못하고 그 가책이 저들의 양심을 심판하면서 반발로 나타날 때에 이제는 전도자를 물어버리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러한 반발로 인해서 전도자들이 순교하는 경우가 많찼은 것입니다. 저 쪽에서 회개를 해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를 못할 때에는 전도자가 피해를 입게 되겠으니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런 경우에는 아예 하지 말라며 우려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제 개에 대해서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다. 당시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개라고 하는 것은 요즈음 흔히들 즐기는 애완동물인 개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미국을 볼 것 같으면 개를 얼마나 위하는지 그 정도가 대단합니다. 그런데 저는 서양 사람의 집에 초대되어 갔을 때에 제일 기분 나쁜 것이 바로 그 개 냄새입니다. 들어서자마자 어찌나 개 냄새가 지독하게 나는지 모르겠어요. 아무튼 어떤 집에 가보면 말만한 개를 침대 위에 올려 놓고 있는가 하면 시끄럽게 짖는 것이 싫다 하여 목을 수술하여 짖지도 않는 개가 많이 있습니다. 게다가 개에다가 유산을 물려 주기도하고 공동묘지에 가보면 개의 무덤도 많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서양 사람들의 개에 대한 사랑은 대단한 것인데 그 이유인즉 자식을 키웠다가는 물려 죽는 수가 있어도 개를 키워 가지고는 물려 죽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이는 한 마디로 말해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개에게다가 유산을 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개는 요즈음의 그런 개를 두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집을 떠나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들개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들개들이 떼를 지어 다니는가 하면 또한 미친개들이 많았기 때문에 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거의 필수적으로 지팡이를 가지고 다녀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지팡이는 요즈음 나이 많은 사람들이 넘어질까봐 의지하는 지팡이가 아니라 개를 쫓는 하나의 무기와 같은 지팡이인 것입니다. 만약 이것을 준비하지 않고 그냥 다니다가는 잘못하면 개에게 물리게 될 것이란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개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개에 대한 히브리 사람들의 인상이란 본문에서 나타나는 대로 먼저는 싸우고 무는 것입니다. 그저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며 싸우는 것이 개의 생리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싸우고자 하는 마음, 물어 찢는 마음, 도전하는 마음의 소유자 앞에서는 직선적으로 복음을 전할 생각은 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지금이라도 당장에 대들며 물어 찢고자 하는 사람을 향하여 "예수 믿으세요, 그래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한다면 그게 어떻게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온유한 마음이 아닌 완악한 마음의 소유자, 근본적으로 그 마음이 비뚤어져서 달리 도리가 없는, 거기 그 순간에는 복음을 전하려고 하지 말라는 말씀인 줄 압니다. 만약 무턱대고 전했다가 도대체 예수가 누군데 그러느냐며 여러 말로 반발하고 나오게 되면 이제는 진리를 모독하게 되고 그로 인해 그 사람에게도 이중, 삼중의 죄를 짓게 하는 결과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 개라는 것은 떠드는 동물입니다. 떠들며 짖어대는, 다시 말하면 시끄러워요. 이는 곧 듣는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32절에서 아무런 해석없이 "개들을 삼가라"며 가르치고 있습니다. 물어 찢고 떠드는 개들! 이런 것들이 있는 동안 그 속에는 복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개라는 것은 음란하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이 개를 음란의 대표자로 말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요한계시록 2215절 말씀을 보면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렇게 성서의 마지막 부분에서까지 표현되고 있는 개들이라는 말은 역시 부도덕하고 음란한 자들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것은 육욕적인 인간, 그 더러운 것에 매여 있는 그러한 사람을 가리킨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쉽게 생각지 못하는 부분으로, 그러나 성경에 여러 번 기록되어 심각하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 바로 베드로 후서 222절의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보면 토했던 것을 다시 먹는 것이 개란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 개를 키우면서 보면 감기가 걸리기도 하고 그러는데 그 때문에 쿨룩거리며 기침을 하다가는 먹었던 것을 다 토해 내놓습니다. 이제 그것을 지켜보면서 참 시원하겠구나 하면 이런 웬걸! 어느 사이에 도로 다 핥아먹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개 같다는 말은 회개했다가 또 다시 죄를 짓고, 내놓았다가 도로 집어삼키고, 토했다, 먹었다, 토했다, 먹었다 하며 밤낮 그런 것이란 말입니다. 이는 곧 정욕으로의 악순환을 말하는 것입니다.

항상 뉘우치면서 또한 언제나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가는 거예요. 생각으로는 이 생각 저 생각 제법 하는데 생활에는 전혀 변화가 없어요. 그래서는 밤낮 후회만 하고 앉아서 눈물은 눈물대로 흘리면서도 여전히 자기의 죄와 정욕의 현주소에서는 떠나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것을 가리켜서 개와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이 돼지라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할 때에 이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먹기만 하는 동물입니다. 소는 일을 하고 개도 집을 지킵니다마는 이 돼지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먹기만 탐하는 동물입니다. 이처럼 먹는 것만 위해서 사는 사람, 곧 다시 말하여 거룩한 것과 속된 것에 대한 분별이 없는 마음, 그리고 어디까지나 육적이고 물질적이며 심지어는 식욕에 빠져 먹는 것만 탐하는 그런 사람을 가리켜 돼지 같은 사람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저들에게는 신령한 것에 대한 지식이나 관심이 전혀 없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신령한 것과 영원한 가치의 것에 대한 관심이 있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이 마음 이대로를 가지고는 예수를 믿어도 문제가 될 뿐입니다. 이는 예수를 믿는다 하더라도 먹기 위해서, 즉 잘 살기 위해서 믿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복음을 바로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생각할 것은 이 돼지는 아무리 깨끗이 씻었다가도 다시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눕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깨끗하게 해 주어도 소용이 없어요, 아예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을 구분할 줄 모른단 말입니다. 모처럼 애써 깨끗하게 해주어도 이에 상관하지 않고 다시금 더러운 곳에 가서는 거기에 도로 눕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에 대한 구별 의식이 전혀 없는 그런 사람에게다 대고 복음을 전해 보았댔자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라는 말씀이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여기에서 좀더 깊은 진리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이에 개와 돼지! 라고 할 때에 이 말은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방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이방 사람들이 음란하다 하여 개라고 하였으며 또한 저들은 신령한 세계에 대한 지식이 없이 물질밖에 모른다 하여 돼지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이 "개와 돼지 같다"라는 말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 사람을 무시하는 하나의 일상적인 용어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예수님께서도 그런 의미에서의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이냐 하면 이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어떤 특수한 대상의 사람을 지칭하여 개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모든 사람이 어떤 순간, 어떤 상황에서 개나 돼지 같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러한 개와 돼지의 상태에서는 결코 복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전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불행하게도 복음으로부터 완전히 제외된 인간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대단히 죄송스러운 말씀이 되겠습니다마는 만약 아직도 우리의 마음이 개 같고, 돼지 같은 마음이 있고 또 그대로를 가지고 나와 있다면, 그 마음 그대로 가지고 있는 한 나와 복음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리 전해도 소용이 없어요. 그리고 오히려 역효과만 나게 되어 복음을 들으면서도 속에서는 계속 악한 생각만 들끓어 이상한 방향으로 반발을 하고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개와 돼지"의 의미는 어떤 대상인가를 가리지 않고 그 사람의 성품과 인격, 그리고 마음가짐의 상태와 태도를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영적인 신령한 것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는 가운데 세속적인 것에 뿌리 박고, 그것에 완전히 젖어버린 그런 상태의 인간을 지칭하는 말씀입니다. 더러움에 매여 있고, 욕심에 매여 있고, 육욕에 매여서 깊이 노예가 되어 버린 극단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이를 위해 좀더 구체적인 말씀을 드리자면 인간은 천사와 악마 사이를 오르내리는 존재라는 철인의 말이 있듯이 동일한 한 사람이 어느 순간에는 비둘기도 되고 개도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저의 상태가 개의 상태인가? 양의 상태인가? 또한 돼지의 상태인가 비둘기의 상태인가?에 따라 전도의 가능 여부가 결정 지워진다는 것입니다. 가령 기분 나쁜 일로 술에 만취가 되어 아무하고나 붙들고 싸우고 싶은 사람에게 "당신 예수 믿으시오"한다면 거기에서 무슨 대답을 듣게 될 것 같습니까? ", 그래야지요"하며 "다음 주일부터 교회에 나가겠습니다."하는 대답을 들을 수 있겠느냔 말입니다. 오히려 되돌려 내뱉을 말이 뻔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예수님께 욕을 돌리게 되고, 그리고 전한 이쪽은 이쪽대로 마음만 상하는 백해무익한 것이 된단 말입니다. 차라리 그런 경우라면 일단 재워 놓고 술이 깬 다음에 무슨 이야기를 하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학에서는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혹시 부부싸움이 벌어져서 아이들이나 제 삼자로부터 당장 말려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을 때에 그 일을 위해서 나흘 전에는 절대로 찾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한창 치고 받고 싸우며 감정이 격할 대로 격해 있는 순간인데 거기에 가서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리스도께서 당신들을 용서하시고"하는 등의 이런 말들을 한다고 해서 무슨 해결이 될 것이냐 하면 그렇지를 않다는 것입니다. 누가 뭐래도 그 순간은 안돼요, 그래서 잠깐 참았다가 저들도 좀 시들시들해져서 이제 "내가 잘못했지!"하는 후회스런 마음도 가지게 되었을 때에 가서 우리 한번 다시 생각해 봅시다 하고서는 그 다음의 이야기들을 해야 할 것이란 말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한 사람을 두고도 양 같은 때가 있는가 하면 여우같은 때도 있고, 개 같은 때도 있으며 또한 곰 같은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곰 같은 사람, 개 같은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곰 같은 상태의 마음이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상태를 바로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또 어떤 장소를 두고 보아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지금 한창 술을 마시고 돌아가는 술집에서, 아니면 사고 파느라 정신이 없는 새벽시장의 도매상가 앞에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해서야 되겠느냔 말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두고 생각해 볼 때에도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으시는 그 순간, 이미 예수를 못박기로 작정하고 정죄하며 서 있는 그 무리들 앞에서 다시금 그들을 향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인 줄 모르느냐? 이제라도 회개하라"고 하셨다면 이 또한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문제는 그렇게 해도 문제가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소와 시간, 그리고 그 사람의 마음 상태와 태도 여하에 따라 개처럼 될 수도 있고 돼지처럼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극단적인 말씀입니다마는 이와 같은 경우는 실제적으로 성경에서도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에 사도행전 818절 이하에 보면 마술로 돈을 벌어오던 시몬이라는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하자 성령이 내리는 것을 보고는 돈 뭉치를 내어놓으면서 자기에게도 그 능력이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돈 뭉치로 그 능력을 삽시다 하는 것이지요. 이런 마음이 바로 돼지 같은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 사람 시몬의 눈에는 돈밖에 보이지를 않아요. 그래서 한번 손을 얹고 기도를 하면 방언도 하고 병도 낫는 저런 능력을 가지게 되면 이제 많은 돈을 벌 수 있어서 수지가 맞겠다 싶은 것이란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을 가진 자에게 무슨 전도가 필요한 것이겠습니까? 그래서 오히려 베드로가 하는 말이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찌어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 때에 시몬이 두려워 떨며 대신 기도해 주기를 원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만 아무튼 그러고 나서야 복음이 전해지기도 하고 들어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이러한 결론을 맺을 수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마음 상태가 개와 같고, 돼지와 같다면 이제 다시 회개하여 양과 같은 마음으로 또한 비둘기와 같은 마음으로 바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끝까지 복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에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5 : 24)고 하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개와 같고 돼지와 같은 마음일랑 완전히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고 이제는 다시 양과 같고 비둘기와 같은 마음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온유하며 겸손하며, 진정 순결한 마음이 될 때에 비로소 복음의 말씀이 들려지며, 그 말씀이 능력으로 살아 내 안에서 역사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아직도 내 마음의 상태가 개와 돼지의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면 복음의 말씀은 여전히 들려지지 아니할 뿐더러 말씀의 진리마저도 왜곡하며 반발하여 진리를 모독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복음을 전하는 자를 물어뜯으며 상처를 입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 보면 교회에까지 나와서 말씀을 들었으면 이것이 오늘 내게 주신 말씀이구나 하고 감사히 받아들이지는 않고 오히려 왜곡하여 자기를 흉본다며 누가 고자질이라도 했기에 그렇지 하고서는 설교자에게 대드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이 곧 물어뜯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게다가 사랑하라! 고 하면 당신은 얼마나 사랑했소? 하고 나오니 이는 계속 물어뜯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우리는 정욕과 욕심을 깨끗이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고 양과 같고 비둘기 같은 그런 사람, 그런 인격, 그런 태도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런 이후에라야 무슨 말씀을 듣든지 간에 모두가 다 귀한 생명의 말씀으로, 복된 진리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문제는 어디까지나 우리 마음의 태도에 있는 것입니다. 거룩한 것은 거룩한 마음에만 담을 수가 있고 거룩한 진리는 거룩한 심령에만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의 말씀은 살아있는 자에게만 전해질 수 있는 진리입니다. 그래야만 복음의 진리가 주어진 대로 순결하고 깨끗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모든 것을 다 생각하시고 염려하시면서, 그러나 매우 간단한 말씀으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뜻을 깊이 음미하면서 주님의 자상하신 사랑의 손길에 더욱 가까워지는 새로운 은혜를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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