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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승점에 선 사람(디모데후서 4장 6절~8절)
관제(灌祭)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누구나 자기 생을 선택해서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잘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기가 자기 부모를 선택해서 이런 아버지 이런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가장 중요한, 태어나는 시점도 자기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낳아주어서 세상에 났고 태어나게 해주어서 태어난 것이지 '내가 이 시점에서 태어나는 것이 좋겠다'라고 생각해서 스스로 정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느니 없느니, 잘났느니 못났느니 하고 서로 시비를 벌여보아도 별것이 아닙니다. 결국은 주어진 생을 살아갈 뿐입니다. 극히 작은 자유, 극히 작은 선택권을 향유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죽는 시점도 그렇습니다. 그 양상과 그 형편을 스스로 선택하지 못합니다. 간혹 자기 생명을 자기가 끊는 자살자도 있습니다마는 그것도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알고 보면 전부가 주어진 생 가운데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출발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종착점이 더 중요합니다. 시작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 마감하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이렇게 저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과거는 묻지 마십시다. 여태껏 잘못되었다느니, 잘못 시작되었다느니, 잘못 살아왔다느니……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아 있는 하나의 시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지막으로 마감하는 일입니다. 마지막 종착, 이것만은 바로 해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시작은 미비하였으나 끝은 똑바로 맺어야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그 종말을 알고 살아야 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가장 상식적인 것을 모르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첫째, 사람은 죽습니다.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알고 살아야 합니다.
둘째, 언제 죽을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현실적인 것이 아니니까 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나이가 많건 적건 상관없습니다. 올 때에는 순서적으로 오지만 갈 때에는 순서도 없습니다.
언제 죽을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셋째, 오늘이 나의 마지막날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대학의 학장을 지낸 분이 갑자기 중한 병에 걸려서 그만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간에 하던 일이 많았는데 아직 정리를 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부인되는 여집사님이 얼마나 안타까워하는지 모릅니다.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본인도 짐작했을 것 같은데 그 사실을 영 인정하지를 않습니다. 이제 유언도 해야 하고, 남은 일도 정리해야 할 때인데도 그것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할 수 없이 부인이 제게 부탁을 해요. "목사님, 이제 하던 일을 정리해달라고 말씀 좀 해주십시오." 한마디로, 유언을 하게 해달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환자에게 그 말을 조심스럽게 꺼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내가 왜 죽어?"라고 합니다. 그래 죽을 때까지 "내가 왜 죽어?"하다 갔습니다.
아무 것도 정리하지 않고 그대로 가버린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소위 지성인이라는 사람들의 이 '지성'이 어디에 간 것입니까? 일생을 두고 무엇을 배웠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시작이야 어쨌든 마지막만은 좀 근사하게 끝맺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실례의 말씀입니다만, 우리 교회 교역자님들이 열세 분인데 그 부인들 간에 서로 얼굴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은 생각에, 지난해에 다같이 모이는 자리를 마련해보았습니다.
부부동반으로 함께 제주도 관광을 하게 했습니다. 아침에 갔다가 그날 저녁에 돌아오는 당일 여행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녀오면서 제가 깜짝 놀란 것이 있습니다. 비행기 사고란 불의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만일에 이대로 비행기 사고라도 난다면, 신문에 뭐라고 기사가 실리겠습니까? '소망교회 교역자 몽땅 죽다'--이것 참 큰일이더군요. 그래서 이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싶어서 거기서 제가 결심을 했습니다. 앞으로는 절대 그렇게 한꺼번에 타지는 않기로 말입니다.
이제는 함께 어디를 가게 되면, 비행기 세 대에 나누어 탈것입니다.
어떤 일에도 버스 한 대에 다 타지 않기로 결심했어요. 이것은 꼭 실천할 것입니다. 여러분, 비행기 사고는 언제나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자동차 사고도 언제나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요즈음 같은 때에 무사한 것이 기적이지요. 이 점을 인정하고, 여기에 내가 어떻게 대처하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사고가 없기만을 바라고 무사하기만을 바라는 생각은 멍청한 생각입니다. 그래 안 죽기만 바랄 작정입니까? 아닙니다. 반드시 죽습니다. 이제 언제 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날이 바로 오늘일 수도 있다는 것을 항상 잊지 말 것입니다.
특별히 종말 직전에 인간이 자기의 생을 회고하고 정리하고 마무리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사람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인생의 마지막 길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는 로마감옥에 있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순교하게 될 것을 그는 미리 감지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로마에 갈 때마다 마음에 참 감명 깊게 충격을 받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도 바울이 순교한 장소입니다. 일반적으로 관광객들은 거기에 잘 찾아가지 않습니다. 그곳에 조그마한 성당이 지어져 있는데, 거기에는 그림이 있고 모형이 장식되어 있습니다. 그 모형인즉, 동그란 나무토막과 절구통 같은 것입니다. 그것을 도마로 삼아서 사도 바울의 목을 그 위에 비스듬히 걸쳐놓게 하였던 것입니다. 도끼로 내려치면 단칼에 목을 베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을 처형할 때, 사도 바울의 목이 떨어지면서 털렁털렁 세 번 굴렀는데 거기서 샘물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거기에 가보면 지금도 샘터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순교할 것을 훤히 내다보고 그 날이 이제 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런 시간에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세요.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6절)"--떠날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이 떠난다는 말은 헬라어로 '아날루시스'라고 하는데, 그 뜻이 재미있기에 잠깐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아날루시스'라고 하는 말은, 어떤 동물에게 달구지나 쟁기를 끌게 하려고 멍에를 씌웠다가 이제 일이 다 끝난 다음에 '멍에를 벗긴다'라는 뜻입니다. 또 천막을 쳤다가 이제 거기서 해야 할 일을 다 했기에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하여 '천막줄을 푼다'라는 뜻입니다. 혹은 정박되었던 배가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하여 '닻줄을 푼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지금이 정말로 기나긴 인생의 길을 마치고, 이제 장막줄을 끊는, 멍에를 벗는 그런 순간이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의 인생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현 시점에서 지난 과거를 돌아보고, 다시 앞에 있는 미래를 전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인생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무엇에다 비유하며 살고 있습니까? 옛날 어른들은 인생은 마치 담배연기와 같다고 했습니다. 잠깐 뿌옇게 머물러 있다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혹은 하나의 낙엽과도 같다, 잠깐 있다가 보이지 않는 안개와도 같다, 일엽편주에 의지하여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항해사와도 같다고 합니다. 또한 인생은 그 자체가 하나의 나그네이다, 농사하는 사람과 같다, 잠깐 피었다가 시들어 없어지는 꽃과 같은 것이다, 정처없이 방랑하고 있는 하나의 방랑자다, 라고들 말합니다. 여러분은 인생을 무엇에다 비유하고 있습니까? 어떤 인생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인생관이요 현실관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의 본문에서 그의 인생을 세 가지로 비유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관제다, 하나의 제물이다, 싸우는 군인이다, 그리고 경기자다'--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쳐진 하나의 제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물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마는 관제라는 말은 특별한 것입니다. 관제(灌祭)는 '스펜도'라고 하는데 본문에서는 '스펜도마이'라는 수동형으로 표현합니다. 이 '스펜도'라고 하는 말은 동물의 목을 쳐서 그 선지피가 솟아오를 때, 그것을 제단에 가져다가 붓는 것입니다. 피 바케쓰를 붓는 것--이것이 관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나의 생명을 부어드리는 관제'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눈물을, 땀을, 피를, 모든 생명력을 다 쏟아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치는 하나의 제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물에는 몇 가지 엄격한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는 깨끗해야 합니다. 흠이 있으면 안됩니다. 본인이 생각할 때에는 깨끗하다 하더라도, 제사장이 검사할 때에 조그마한 점이라도 있다든가 흠이 있으면 제물이 될 수가 없습니다. 아주 온전하고 깨끗한 제물로 드려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물이란 살아 있는 것입니다. 이미 죽은 것은 어떤 것이라도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제물은 살아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도 건강하게 살아 있어야 합니다. 병든 동물은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완전하고 건강하게 살아 있는 것이라야 제물이 됩니다.
셋째는 그 살아 있는 것을 제단 앞에 가지고 와서 죽여야 합니다. 거기서 비로소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산 제물을 제단 앞에서 죽이는데, 그 고기를 바치는 것이 아니고 생명을 바치는 것입니다. 고깃덩이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바치는, 바로 거기에 진정한 제물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넷째 의미가 있습니다. 제물은 대신 죽는다는 것입니다. 양이 죽습니다. 그러나 자기 죄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죄 때문에 양이 죽는 것입니다. 제물이란, 대신 죽을 때에만 제물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복음 전파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도 바울은 죽습니다. 자기는 하나님 앞에 관제로 드려졌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인생관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바쳐진 제물이다 하며 자기 생명을, 모든 생명력을 고스란히 주께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 제물됨을 특권으로 여기고, 영광으로 여기고, 기뻐했습니다. 빌립보서 2장 17절을 보세요. 이 말씀은 제가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요절입니다.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관제로, 피를 쏟아 부어도 나는 기뻐하리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귀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사랑하고 있습니까? 사랑에 기쁨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눈물의 씨앗'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행복해야 사랑입니다. 여러분이 수고를 하였습니까? 기쁨으로 수고한 것이라야 수고입니다. 봉사도 기뻐하며 해야 봉사지, 슬퍼하며 하는 것은 봉사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누구에게 무엇을 베풀었습니까? 기쁨으로 준 것은 봉사요 억지로 준 것은 강도 만난 것입니다. 그것은 남에게 준 것이 아닙니다. 기뻐함이 항상 함께 해야 합니다.
아인슈타인 박사에게는 그를 사랑하는 제자들이 평생동안 따라다녔다고 합니다. 그들이 같이 지내면서 보니, 아인슈타인 박사는 너무너무 귀한 분입니다. 그 인격이 고결하고 존경스러운 바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에게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박사님, 성공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공이란 X, Y, Z다." X는 말을 적게 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말이 많으면 실수가 많고 생각도 복잡해집니다. 그런고로 말을 적게 하라는 것입니다. Y는 생활을 즐기라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서 즐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직장생활을 하십니까? 직장생활을 하면서 항상 온 집안 사람들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다 벌어 먹인다'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자기 피곤한 것을 전부 여기에다 전가시킵니다. 너희들 때문에, 처자식 때문에 나는 이 고생을 한다--이런 사람, 아주 멍청한 사람입니다. 불행한 사람입니다. 일은 일대로 즐겨야 합니다. 직장에서는 그곳대로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 하는 의미를 깨달아서 일 자체를 만끽하며 즐기는 사람이라야 성공한 사람이지요. 이것을 피곤한 것, 돈벌기 위한 것, 호구지책으로 하는 것, 식구를 부양하기 위한 것……, 이렇게 생각하고 사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가든지 오든지, 내가 하는 모든 일과 생활을 즐기는 것, 이것이 성공입니다. Z는 한가한 시간을 갖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일에든 거기에 몰두하여 정신 못 차려서는 안되고,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생각할 수 있는 여유, 적어도 이것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6절)"라고 말씀합니다. 눈물과 땀과 피와 생명을 벌써 다 쏟아 부었다, 관제와 같이 내가 부음이 되었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싸우는 군인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는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도처에서 가르쳤습니다. '인생은 하나의 싸움이다. 신앙생활도 싸움이다'라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어떤 뜻으로 말씀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초긴장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싸우는 사람과 같이 항상 긴장하고 있다는, 깨어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생명을 건 노력을 하고 있다, 온 생명을 다 바쳐 수고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옛날의 전쟁이라는 것은 무조건 대장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전쟁할 때, 내가 이리 가고 저리 가는 것이 아닙니다. 대장의 명령을 따라서 순종합니다. 목숨을 건 절대순종입니다. 그것이 군인입니다. 군인은 가부(可否)를 말하지 않습니다. 가라고 할 때에 가고, 오라고 할 때에 오고, 죽으라고 할 때에 죽습니다. 그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래야 진짜 군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미 생명을 바쳤습니다.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그리스도만을 영화롭게 하면서, 그리스도께 절대순종, 절대복종 하는 군인으로 자처하고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영화롭게 하고자 합니다.
또한 선한 싸움을 싸워서 선으로 악을 이깁니다. 그는 신령한 싸움을 늘 머리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승리점에 와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그 분의 사랑으로 인하여 넉넉히 이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대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그로부터 받은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충성을 다합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 : 37)"--이렇게 승리를 확신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오늘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은 스스로를 경기자로 비유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목표가 있는 길을 갔고 향방 없이 가지 않았습니다. 뚜렷한 목표를 정하고 달려갔습니다. 빌립보서 3장 13절에서 사도 바울은 '달려갈 길이 자기에게 따로 있음'을 생각합니다. 온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전심전력으로 방향을 분명히 하고 달려갔습니다. 달려가되 정코스로 갔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5절은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법대로 경기를 했습니다. 파울을 범하지 않았고, 반칙하지 않았고, 정법(定法)대로 경기에 임했습니다. 그리고 이 경기를 위하여 절제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에 보면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25절)"--온전히 절제하라고 말씀합니다. 상을 얻기 위해서는 self-control--자기절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지켰다고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모든 것이 죄라고 외치는 사도 바울입니다. 믿음, 고귀한 믿음, 순수한 믿음, 복음적 신앙을 내가 굳게 지켰노라 하는 것입니다. 그는 싸우고, 지켰고, 승리했고, 마치고, 이제 스스로 훌륭하다고 자평하고 있습니다.
눈앞에 결승점이 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결승점을 넘어 저 앞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자기를 위하여 준비해놓은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결승점에서 면류관을 바라보고 있는 것--사도 바울이 임종 직전에 가진 자기의식이었습니다. 굉장한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어떤 성자가 예수님의 영접을 받아서 하늘나라에 가고 있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직전, 문간에서 그는 지나온 생을 돌아다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험준하게 살아왔던 그 일생이 한눈에 보입니다. 그 발자취가 보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발자취가 두 사람의 것입니다.
성자는 예수님께 여쭈어보았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혼자 살아왔는데 어째서 발자취가 두 줄로 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동행하였기 때문이니라." 그런데 골짜기를 지나거나 아주 어려운 곳을 지나는 길에는 발자취가 한 사람의 것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왜 저기는 발자취가 한 줄입니까? 왜 저 혼자 가도록 내버려두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아니다. 네가 너무 힘들어해서 내가 업고 갔기 때문이니라." 성자는 여태껏 자기 혼자 살아온 생애인 줄 알았는데 이제 회고해보니 주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고, 동행하시고, 업어주시고, 보호하셔서 오늘날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성공과 실패가 어디에 있습니까? 두 가지를 한번 비교해 보실까요? 어떤 분이 이것을 재미있게 비교해놓았더군요. 이긴 자와 진자를 보면, 승자는 언제나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될 때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패자는 원인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승자는 '다 내가 잘못했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패자는 언제나 다른 사람이 잘못했다고 말합니다. 승자는 고난이 있을 때에 그것을 겪고, 그것을 이기고, 그것을 딛고 일어섭니다. 그러나 패자는 언제나 고난을 피해가려고만 합니다. 승자는 언제나 행동력이 있어서 실천합니다. 그러나 패자는 항상 약속만 하고 말만 하지 실천하지는 않습니다. 승자는 스스로 언제나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패자는 스스로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승자는 앞에 뛰어가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자기보다 뛰어난 그 사람으로부터 배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패자는 꼭 깎아 내리려고 합니다. 승자는 더 나은 길이 있었고 더 잘할 수 있는 길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패자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패자의 변명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결승점에 서 있습니다. 이 결승점을 넘어서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제물이라면 어떤 제물로 드려졌습니까?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제물입니까? 군인이라면 얼마나 충성을 다했습니까? 경기자라면 언제나 최선을 다했습니까? 끝나기 전, 아직 끝이 아닌 끝에, 이 종말론적 기회에 서서 스스로 평가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이 기다릴는지 생각해보세요. 심판입니까? 징계입니까? 아니면 상급입니까, 면류관입니까?
이 결승점에 서서 저 앞에 있는 소망의 세계를 밝게 전망할 수 있는 승리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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