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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복된 사람(마태복음 16장 13절~20절)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사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며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였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한 인간의 불행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스스로 좋아하는 일만을 하는 데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불행한 사람은 유감스럽게도 자기가 해야 할 일과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 별도로 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좋아하는 일은 해서는 아니 될 일이요,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자기가 원치 않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분리되고 모순된 생을 살아가려면 아주 피곤합니다. 그 일생 전체가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여러분의 직장생활 그 자체가 자신의 즐거움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 또한 내가 즐기는 일이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별도의 것이 되어서 해야 할 일은 죽기보다 싫고, 꼭 해서는 아니 될 일만 좋아합니다. 음식으로 말해보더라도 그렇습니다. 먹어서 유익한 것이 입에도 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병적인 사람들은 먹어서는 안될 것만 좋아하고 몸에 유익한 것은 아주 싫어합니다.
자, 그렇다면 인간의 교양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인격의 수준이라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즐기는 것이요, 즐거운 일이 곧 해야 할 일이다---이렇게 사는 사람, 이렇게 체질화한 사람, 이렇게 오리엔테이션된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더 큰 불행은 행복이 소유에 있다고 착각하는 데에 있습니다. 요사이도 보면 많은 사람들이 '돈만 벌면, 돈만 많으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황금만능주의지요. 이것을 철학으로 믿고 따라가다가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얼마나 불행해집니까? 얼마나 부끄러워집니까? 이것으로 인하여 구제불능으로 불행해지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이것은 잘못입니다. 소유가 곧 행복은 아닙니다. 그것은 크나큰 근심만 더할 따름입니다.
이보다 더 큰 불행은 알아야 할 것은 알지 못하고 쓸데없는 것만 많이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어떤 사람은 공부를 많이 했어요. 10여 년 동안 열심히 했는데 정작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 많은 세월을 헛되게 보냈어요. 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지식이라는 것이 워낙 그렇습니다. 알아야 할 것만 알면 되는 것이지, 쓸데없는 것을 알면 머리만 복잡해지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옛날에 기자(箕子)가 주나라의 무왕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복이란 무엇이냐?" 기자가 무왕에게 대답합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오복에 대한 얘기입니다. "복에는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장수하는 것이요, 둘째는 부유함이요, 셋째는 강령(건강하고 평안한 것)이요, 넷째는 유호덕(덕을 좋아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제 명대로 살다가 편하게 맞는 임종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것이 정말 복입니까? 그렇게 살고, 그렇게 죽으면 복된 사람이겠습니까? 사실은 복을 복으로 안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무엇이 복입니까? 무엇이 행복입니까? 더 큰 불행은 믿을 것을 믿지 못하는 데에 있습니다. 불신(不信)이면 부지(不知)입니다. 그러므로 불행은 무지요, 깨달음이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행복인 줄 모르면 행복이 아닙니다. 엄청난 행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행복인 줄 모르면 복이 아니지 않습니까? 시편 49편 20절은 말씀합니다.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사실입니다. 깨달음이 없으면 짐승과 같습니다. 결국 가장 큰 불행은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믿어야 할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가장 큰 불행의 사람은 아무도 못 믿는 사람입니다. 어쩌다가 아무도 못 믿게 되어버렸어요. 나도 못 믿고, 다른 사람도 못 믿어요. 이런 사람이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예일대학의 존 도널드라고 하는 교수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을 일곱 가지로 분석하였습니다. 첫째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요, 둘째는 이성에 대한 두려움이요, 셋째는 자기 약점이 드러날까 하는 공포에서 오는, 자기 방어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 다음은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없다는 두려움이요, 다섯째는 생각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요, 여섯째는 말하는 것에 실수가 있을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마지막 일곱째가 중요합니다. 홀로 있기가 두렵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홀로 떨어진 것 같은 존재다 하는, 이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두려움이 있는 동안에는 지식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두려움은 곧 무능으로 통합니다. 두려운 일이 있으면 지능이 떨어집니다. 우리도 잘 알지 않습니까? 학생들이 벌벌 떨고 있으면 알던 것까지 다 모르게 됩니다. 시험장에 가서 벌벌 떤다면 그 많은 공부가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두려운 가운데 생각한 것은 반드시 실수로 돌아가고, 두려운 가운데 발악해보았자 그것은 아무 힘도 없습니다. 평안함과 고요함이 있고야 지능도 있고, 체념도 있고, 능력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내 마음의 힘, 곧 믿음이 있고야 지능이 성립합니다.
참 행복은 참 진리를 아는 데에 있고, 또한 참 진리를 믿는 데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 69절은 말씀합니다.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헬라어로는 '페피스튜카멘 카이 에그노카멘'--믿었으니 그 결과로 알았습니다 하는 뜻입니다. 아인슈타인 박사의 유명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모든 지식의 근본은 믿음이다.' 믿음이 있고야 지식이 생깁니다. 믿지 않으면 아무 지식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곧 두려운 마음의, 믿음이 흔들리는 상태에서는 아무 것도 알아지지 않고, 지식이 성립하지 않는다 하는 말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베드로의 유명한 신앙고백을 듣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 하시기에 베드로는 주님을 따랐습니다. '내게 배우라' 하시기에 베드로는 3년 동안 주님을 따르면서 주님을 배웠습니다.
그는 이제 어느 수준에서 주님을 알게 됩니다. 그의 믿음과 그의 지식은 함께 이루어집니다. 참지식은 참믿음에서 비롯되고, 참믿음은 참지식과 함께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참믿음과 참지식, 이것이 합쳐지면서 베드로는 신앙을 고백하게 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절)"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5절)"----직선적으로, 너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 다른 사람이야 뭐라고 하든 너는 나를 누구라고 고백하느냐 하심입니다. 참으로 귀중한 말씀입니다. 개인적인 고백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네 하나님은 누구냐고 물으십니다. 네가 믿는 바는 무엇이냐고 물으십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 이것은 일평생의 과제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나를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섬기는 하나님에 의해서 나에 대한 지식이 성립합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프랑스 종교개혁가인 칼뱅은 그의 저서 첫 페이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없이는 나 자신에 대한 지식이 없다'--'Without knowledge of God, there is no knowledge of self.' 나에 대한 지식이 나 혼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본다고 나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보고야 나를 보고, 하나님을 알고야 나를 압니다. 하나님을 발견하기까지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발견하기까지는 자기 가치, 자기 존재, 자기 행복도 없는 것입니다. 이 중요한 진리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포카이서는 '하나님을 모르는 인생이 행복을 찾는다는 것은, 쌓여있는 건초더미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같다. 중요한 것은, 그 건초더미에 바늘은 본래부터 없었다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바늘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찾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바로 찾기 전에는 그 모든 것들, 지식이든, 재산이든, 노력이든, 수고든,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천당 가기 위해서만 예수 믿는 것은 아닙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오늘 나의 생의 의미도 하나님을 아는 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미래의 문제만이 아니라, 현재의 문제도 하나님을 아는 데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기까지는, 하나님을 만나기까지는, 내 모든 존재의 의미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고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 하나님을 아는 것이 나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보면 그 줄거리가 이렇게 이어집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너는 베드로라(18절)" 하십니다. 그 때부터 베드로입니다. 존재가 달라집니다. 바요나 시몬이 베드로가 됩니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말이요, 높은 이름입니다. 바요나 시몬은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는 말인데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갈릴리 어부일 뿐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고백하고 예수를 똑바로 알아보는 바로 그 순간에 바요나 시몬은 베드로가 됩니다. 위대한 베드로가 됩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디 베드로뿐이겠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를 똑바로 알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바로 아는 순간에, 딱 맞닥뜨리는 순간에 내 존재가 높은 의미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고백은 중요한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A.지드는 이런 재미있는 말을 하였습니다. '가장 큰 행복은 사랑을 하고 그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다.' 사랑하지만 혼자서 사랑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짝사랑이지요. 그 옛날, 사랑 고백할 때의 생각을 좀 해보세요. 사랑을 하고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 거기에 행복의 극치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 있고 신앙을 고백할 때, 거기에 내 존재가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그 순간에 베드로가 됩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라다니면서 병 고친 사람들은 아마도 예수님을 훌륭한 의사로 알았겠지요. 이적을 본 사람들은 희한한 마술사로 알았겠지요.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정말 지혜가 많구나. 예수님은 참 훌륭하다'하며 지혜자로 생각했겠지요.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도덕적인 생활을 보면서 성현이라고 거룩한 분이라고 이해하기도 했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랍비라고도 부르고 선생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경우는 다릅니다. 그는 예수님과 3년 동행을 하면서 그 행하신 많은 이적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제 베드로만이 가지는 새로운 인식이 있습니다. 어떤 병자가 낫고, 몇 명이 낫고, 어떤 희한한 능력이 나타났다 하는 유의 얘기가 아닙니다. 많은 이적들 속에서 그는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의 병이 나았느냐'가 아니라 '병 고치는 분이 누구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베드로의 훌륭한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 많은 이적을 보면서 이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는 것을 점점 알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인하여 내가 어떤 이득을 보고, 신앙과 함께 내가 어떤 병을 고치고……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사건, 성공과 실패, 다른 잡다한 사건들 속에서 내가 점점 그리스도의 얼굴을 밝히 보게 되고, 하나님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 점점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복된 사람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교훈을 들었습니다. 많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지금처럼 녹음을 할 수 있는 때도 아니고, 기록으로 남겨두는 때도 아니니까 어쩌면 대충 잊어버렸겠지요. 자, 어쨌든 듣기는 많이 들었어요.
이런 말씀 저런 말씀 자꾸 들었습니다. 보세요. 무엇을 들었느냐, 얼마나 들었느냐, 그 말씀이 옳으냐 그르냐, 합리적이냐 불합리적이냐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베드로는 그 많은 말씀을 들으면서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분은 메시야다'하는 것을 알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교회에 나오십니까? 그 많은 날 동안 성경을 읽었고, 그 많은 날 동안 찬송을 불렀고, 그 많은 날 동안 말씀을 들었습니다. 얼마나 기억했습니까? 기억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 많은 말씀을 듣고, 들으면서 그리스도의 얼굴이 점점 밝아지는 것입니다. 그 앞에 있는 내 모습이 점점 더 분명해집니다. 그리고 내 앞에 있는 하늘나라가 환히 열립니다. 이것이 복된 사람의 모습입니다.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무디선생이 삼천 명 앞에서 설교를 하는데 그날 따라 더욱 은혜로웠다고 합니다. 마이크가 없던 때에 삼천 명이니까 그것만도 굉장한 숫자이지요. 무디 선생은 열변을 토하듯 힘써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가 끝났을 때 어느 저명한 대학교수 한 분이 무디 선생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을 건네었습니다. "선생님, 오늘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몰라서 그러셨겠지만 영문법적으로 틀린 말을 열 여섯 번씩이나 하셨습니다." 무디 선생은 껄껄 웃으면서 대답합니다. "잘못 세었을 것입니다. 그보다 더 많이 했을 건데요. 저는 이렇게 무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느라 애를 쓰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 많은 지식을 가지고 한 일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도대체 하나님의 말씀을 무엇으로 듣습니까?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깨닫자는 것입니까? 주님의 말씀을 계속 들으면서, 베드로에게는 그리스도의 얼굴이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십니다,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왕이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주님 되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주님이십니다, 메시야이십니다 하고 받아들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그를 칭찬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시면 어떠했을까 생각해봅니다. '베드로야, 너 그 동안 많이 배웠구나. 참 괜찮다'--그리하셨으면 베드로가 더 신이 났을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리 아니하시고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절)"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보고 들었다, 보고들은 경험이 있었으나 그것 가지고 안 것이 아니니라, 성령이 임하고 성령이 감동하사 네 눈을 뜨게 하고 네 귀를 열게 해서 네가 깨닫게 되었구나, 그런고로 너는 복되다, 하심입니다. 명심해야 합니다. 지금 설교를 들으면서 그리스도의 얼굴이 환하게 떠오르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아직도 무엇이 그렇게 못마땅한지 몸을 비틀고 있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게다가 아직도 졸고 앉아 있는 사람은 더 불행한 사람입니다. 1부 예배에 나와서 조는 사람, 이것 참 기가 막힌 사람입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립니까? 생각해보세요. 이 얼마나 불행합니까?
중국의 교인들은 새벽 네 시 반에 전파되는 라디오방송을 듣고 기록을 합니다. 그것을 엮어 책을 만들었습니다. 어떤 교인들은 매일 기도하면서 그 책 열두 권을 보았답니다. 중국에 갔을 때, 제가 그 책을 한 권 빌려 가지고 왔습니다. 자, 매일 새벽 네 시 반에 일어나서 방송을 듣고, 그 기록한 것을 가지고 돌아다니면서 전도하고, 모여서 설교하고…… 그들은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듣느라고 애를 쓰는데, 우리는 이 좋은 환경에서, 이 예배당에 아침 일곱 시에 나와서 그래, 졸고 앉았습니까? 이런 불행이 어디에 있습니까? 생각할수록 기가 막힌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다시 한번 들어보세요. '네가 배우고 깨달은 것이 아닌, 보고들은 바 객관적 지식 이외에, 성령이 절대적으로 역사하사 네 생각과 뜻을 바로잡아서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하였구나, 너는 복되다.'--요한복음 17장 3절은 말씀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아는 것, 좀더 깊이 말하면 알게 되는 것, 알아지는 것입니다.
알아져야 아는 것이지요. 알아지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고, 안 믿어지면 못 믿는 것입니다. 도리가 없습니다. 믿어지고 알아지는 것--귀한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이 지식과 믿음 위에 주님께서는 곧바로 말씀하십니다. '너는 베드로다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라.' 바로 이것과 함께 천국이 환하게 열리는 것입니다. 그 앞에 하늘나라가 열리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고로 "네가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여기에 기독론, 성경론, 인간론, 교회론, 종말론 등이 다 종합되었습니다. 귀한 말씀입니다.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누가 복된 사람입니까? 그 옛날, 많은 순교자들은 재산도 빼앗기고, 가족도 흩어지고, 소중한 생명마저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순교자는 복됩니다. 왜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구주 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천국 열쇠를 가졌기 때문에 순교자는 복됩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내 구주이심을 믿고 알게 될 때, 그리고 그것을 고백하게 될 때, 이 사실을 생활 속에서 고백하며 간증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시는 복은 이것뿐입니다.
'베드로야, 너는 참으로 복되다. 네 속에 제대로 된 신앙고백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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