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가장 온유했던 사람(민수기 12 : 1-8)

by 【고동엽】 2023. 12. 3.
처음 목차로 돌아가기

가장 온유했던 사람(민수기 12 : 1-8)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여호와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르시되 "너의 삼인은 회막으로 나아오라" 하시니 그 삼인이 나아가매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서 강림하사 장막 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는지라. 그 두 사람이 나아가매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와 이상으로 그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지금 위험한 세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는 생태계의 질서가 파괴되었다고 하는 때문이 아닙니다. 또한 가공할 만한 무기가 발명되어 저장되고 보다 더 큰 힘의 균형을 이어가며 살아간다는 그것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로 무서워하는 것은, 소위 위기라고 말하게 되는 그것은 바로 사람의 마음 때문입니다. 그 기술과 그 무기를 손에 쥐고 있는 사람 때문이란 말입니다. 예로부터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까? "뭐니 뭐니해도 사람이 제일 무섭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밤길을 다녀도 제일 무서운 것이 사람이요, 여행 중 어딜 가도 제일 무서운 것은 역시 사람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람 자체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사실은 사람의 마음이 무서운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 때문에 최근에 와서는 테러(terror)의 시대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됩니다. 폭력의 시대! 사실이 그러합니다. 인간성이 더 없이 포악해지고 있습니다. 그 어떤 포악한 동물보다도 더 잔인한 인간의 포악성을 우리가 압니다. 그 생각이 점점 사악해지고 행동은 날이 갈수록 거칠어만 갑니다. 실로 걷잡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언어 표현마저 점점 극단적인 말을 사용합니다. 생각해 보면 몸서리가 쳐지는 말들을 평범하고 태연하게 주고받습니다. 날로 거칠어만 가는 세대! 그래서 불안하고 그래서 두렵습니다.

창세기 63절에 보면 홍수로 인하여 천하를 다 멸하여야 할 즈음의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간단하게 표현하여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의 인간 존재는 다 떠났고 죽어 버렸으며 이제는 고깃덩어리인, 아주 잔악한 육체만 남았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생각하면 산 사람을 심판하여 홍수에 죽게 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은 시체를 쓸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홍수의 심판이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오늘에 있어서도 사람됨은 사라지고 무서운 악마로, 사나운 짐승으로 화해버린 육체의 인간을 봅니다. 그 인간의 무서운 마음! 그것이 몸서리치도록 무섭고 두려운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타난 본문 말씀은 난구절입니다. 어렵다는 의미에서의 난구절이 아니라 깊다는 의미에서의 난구절입니다. 해석이 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해석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피상적으로 읽고 보면 도덕이나 규범에 맞지 않는 이야기 같습니다. 일반 상식에 어긋나는 이야기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깊은 뜻을 이해한 후 읽어보면 그 진리가 얼마나 소중한 진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참으로 깊고 오묘합니다. 이는 특별히 오늘이 세대를 향해서 대단히 소중하게 주어지는 말씀이라고 여겨집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모세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사람 모세는 의인이 아닙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의 모세는 더더욱 의인이 아닙니다. 선한 사람도 못됩니다. 윤리 규범으로 볼 때에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모세의 생애에는 실수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쓰셨습니다. 이상한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람을 들어 쓰시는 것을 보면 언제나 그렇게 완전한 사람을 쓰신 것은 아닙니다. 만약 완전한 사람을 찾고 기다리신다면 아무 사람도 쓸 수가 없으시겠지요! 그러기에 부족한 중에 허물 많은 사람들을 들어 쓰셨습니다. 그런데 그 쓰시는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를 자세히 상고해 보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그 어느 한 부분이 있으면 나머지 다른 부분은 하나님께서 다 채워 주시고 덮어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하나님이 봐주셨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저는 사랑의 매력이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의 장점을 봅니다. 단점이 보이면 사랑이 아닙니다. 장점이 보이고 그 장점이 크게 보이므로 그것에 가리워서 모든 단점이 보이지 않게 되고 맙니다. 그럴 때가 진정으로 사랑할 때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사람인데도 오늘에 와서는 단점만으로 꽉 차있고 아무리 찾아도 장점은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아주 멀어졌다는 증거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실 때에는 그 중심에 귀한 점이 하나 있으면 그것을 크게 사랑하시고 다른 것은 다 용서하시며, 용납하시어 덮어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복음이요, 어떤 의미에서 그런 하나님이시기에 믿음직스럽습니다.

예를 들면 성경 중에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비실비실한 그야말로 휘청거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어떤 때는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17 : 1)는 말씀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역시 아브라함은 불완전합니다. 허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좋은 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믿음입니다. 이에 성경은 증거하기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4 : 3)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을 보시고 모든 부족한 것을 다 채워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대하시는 자세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다윗은 또 어떠한 사람입니까? 그는 결정적인 실수가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사람의 차원에서는 구제 불능한 정도의 어려운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다윗에게는 대단히 귀중한 겸손이 있습니다. 그 겸손한 중심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사랑하십니다. "내 종 다윗처럼" “내 종 다윗이라고 들추시며 얼마나 사랑하고 좋아하시는지 모릅니다. 좌우간 성경에 다윗의 이름이 8백여 회나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본문에 나타난 모세는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의 온유와 충성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대하면서 여러 가지의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실수는 모세가 했습니다. 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다고 했는데 이 때의 모세는 나이로 보아서도 무려 백세가 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이에 무슨 소실이며 그것도 이방 여자입니까? 구스 곧 에디오피아 여자, 피부색도 검은 종을 소실로 취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그의 형님 아론과 누나 미리암이 이 일을 비방하게 됩니다. 사실, 비방할 만한 일이요, 비방하는 것 또한 당연합니다. 물론 당시의 제도로는 일부다처주의요 더구나 노예에 대해서는 아무 상관이 없을 때입니다. 그러니 만큼 일반적으로는 문제될 것이 없는 처지입니다만 원체 거룩한 하나님의 종이란 말입니다. 온 이스라엘을 지도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종으로서의 지도자가 이게 무슨 만행이란 말입니까? 그래서 저들이 비난을 하는 것입니다. 일단 이 사건 하나를 과녁으로 하고 나머지는 모두 무시하려 합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는 비방의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아론은 형님이요 미리암은 누나입니다. 더구나 누나 미리암은 모세를 위해 목숨을 건 역사적 모험을 한 사람입니다. 그는 모세가 나일 강변의 갈대 사이에 버려졌을 때에 이를 지켜보았고 바로의 딸인 공주가 목욕하러 왔다가 갈대 상자 속의 어린 동생을 발견하고 측은히 여기는 모습을 보고는 히브리 사람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당신을 위해서 이 아이에게 젖을 먹이게 할까요(2:7)라며 곧장 어머니를 데리고 간 사람입니다. 그러고 보면 모세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도와 준 사람입니다.

미리암의 입장에서 볼 때 자기 동생 모세가 이제 와서 이런 실수를 하는 것을 보자 참을 수가 없어서 마음대로 비난을 합니다. 그 실수 하나만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성직, 그의 거룩한 역사까지도 비난을 하려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온유함을 보시고 오히려 모세의 편을 드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다음 부분을 보게 되면 미리암을 치시어 문둥병에 걸리게 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온유함을 보셨습니다. 그러면 그 온유라는 것이 무엇이며 어떤 것입니까? 이는 '아바나' 라고 하는 히브리말인데 원어의 뜻은 굽힌다는 뜻입니다. 마음을 굽힌다, 굴복한다, 절한다, 구부린다, 낮아진다, 혹은 비천해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뜻을 굽힌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좋은 의미에서 겸손과 경건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만 이 말들은 어디까지나 사람에게만 불려지는 덕성입니다. 그 때문에 겸손한 사람, 혹은 경건한 사람이라고는 말하지만 하나님을 가리켜 겸손하다, 경건하다는 말은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온유라는 말은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까지 쓰여지는 특별한 성격의 말입니다. 이에 사무엘하 2236절에 보면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온유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와 나아가 하나님에게까지 관계되는 특별한 성격의 묘사입니다. 그런고로 이 온유라는 말은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인간의 몸은 살아 있는 동안 부드럽습니다. 그 중에서도 어린아이들의 몸과 그 살갗은 매우 부드럽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크게 자라가면서 점점 딱딱해지고 마지막에는 굳어집니다. 굳었다는 것은 죽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의 마음도 쉽게 발전할 때에 부드럽습니다. 잘 받아들이며 잘 휘어집니다. 그러나 점점 굳어져서 완고해지면 마지막에는 망하고 맙니다. 교만은 멸망의 선봉입니다. 굳어진 마음, 완악해진 마음은 결국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 온유라고 하는 말은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11:29)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강하면서도 스스로 약해지는 것이요, 높으면서도 스스로 낮아지는 것이며, 알면서도 스스로 모른 것이요, 능력이 있으면서도 아주 능력이 없는 자로 허리를 굽히고 뜻을 굽히는 것을 온유라고 합니다. 이것은 절대로 약한 것이 아닙니다. 진정 온전한 강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에 지도력이 주어지고 능력이 주어지며 승리가 주어집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할 것이라(37:11)고 말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도 이 말씀을 인용하여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시기를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포악한 자는 거기에서 끊어지고 말지만 온유한 자는 기업으로 땅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곧 길이길이 이어질 축복이요, 생명에서 생명으로 이어지는 영원한 축복입니다. 기업이 있는 생은 바로 온유한 생입니다.

이제 잠깐 생태학적인 이야기를 좀 해봅시다. 칼 막스(K.Marx)는 여기에서 실수했습니다. 약육강식(弱肉强食), 곧 강자는 살아 남고 약자는 없어진다 했습니다만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강한 동물은 다 멸종되거나 쇠퇴했지만 약한 동물은 그대로 남아 번식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온유한 동물이 온 지면을 덮고 있습니다. 강한 동물은 살아 남지를 못합니다. 이 중요한 원리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점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온유한 자가 승리합니다. 그가 진정 강한 자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 나타난 모세의 온유함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생각해 보십시다. 거기에는 대단히 신비스러운 의미들이 있습니다.

먼저는 자기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됨을 잘 지켜나갔습니다. 사람이 자기를 잃어버리는 데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지나친 칭찬을 들을 때이며 나머지 하나는 억울한 말을들을 때입니다. 그 때문에 그 사람을 시험해 보려면 일단 칭찬을 해보면 안다고 합니다. 분수에 넘치는 칭찬을 해보아 교만해지면 그 사람은 별 사람이 아닙니다. 칭찬을 들으면서도 자기 페이스(pace), 자기됨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또한 억울한 말을 듣고 분한 말을 들었다고 하여 불끈하여 화를 낸다면 이 또한 별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모세는 억울한 말을 들어도 절대로 원망하지 않습니다. 성공, 실패, 영광, 굴욕, 그 어느 때든지 그는 자기됨을 잘 지켰습니다.

"가장 겸손한 선지자 칼빈"이라는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종교 개혁자 칼빈이 이태리에서 스트라스버그로 가는 길에 그의 친구 윌리암스 페넬(W. Penel)을 만나기 위해 제네바에서 잠깐 머물게 됩니다. 이때 이 친구 페넬이 말하기를 제네바에서 종교개혁 운동을 하자고 자꾸만 권합니다. 본래 칼빈은 연구 생활을 해서 훌륭한 학자가 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친구의 끈질긴 권유를 받은 칼빈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제네바에 머물면서 종교 개혁 운동에 가담합니다. 하지만 이 칼빈은 너무나도 엄격하고 철저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반발을 사게 되어 결국 3년 후에 제네바 시의 시의회의 결의 따라 추방을 당하게 됩니다. 그럴 때에 그는 아무 원망도 불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3년 후, 아무래도 칼빈이 있어야 이 일이 바로 되겠다고 생각하여 다시 초청을 합니다. 이 때에도 역시 칼빈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다시 돌아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쫓아낼 땐 언제이고 오랄 때는 언제이냐며 역겨워할 것입니다만 그는 가라고 할 때 갔으며 오라고 할 때에 아무 말 없이 온유한 마음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아무로 미워하지 않는 중에 그대로 돌아와 제네바에서 큰 역사를 이루며 종교 개혁을 성공시켰고 나아가 오늘이 제네바를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 상상을 해보세요. 이것이 온유한 것입니다.

또한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힘입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여 말씀을 들었고 그로 인해 얼굴에는 광채가 났으며 그 빛난 광채를 두려워하는 백성들 앞에서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우기까지 해야 했습니다.(34:29-35) 그는 권능의 사람이요 기적의 지도자였습니다. 누가 보아도 위대한 지도자 모세입니다. 큰소리칠 만도 하고, 대중을 무시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자기됨을 잃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 나타난 비난은 매우 참기 어려운 비난입니다. 이 어려운 비난을 들으면서도 그는 온유했습니다. 결코 자기 방어를 하지 않았습니다. 상대방을 끝까지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온유하게, 침묵하면서 잘 참았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큼, 하나님께서 친히 보상하실 만큼, 그렇게 깨끗한 마음으로 이 참기 힘든 비난을 참았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귀한 자세입니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비난을 듣게 되면 자기 변명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맨 먼저 들추어 나오는 변명이 상황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상황이 워낙 불가피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자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자면 모세는 할 말이 많은 사람입니다. 특히 남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더욱 그렇습니다. 모세는 40세에 미디안 광야로 피난을 갑니다. 외롭게, 혼자 쫓기는 도망자로 방랑의 길에 오릅니다. 그러는 중에 미디안에서 이드로의 집에 머물게 되고 거기서 십보라라고 하는 이드로의 딸과 결혼을 하여 함께 살게 됩니다. 하지만 결혼할 당시의 모세의 형편이란 참으로 말이 아닙니다. 그뿐만 아니라 40년 동안 처가살이를 합니다. 자고로 처가살이하는 남자는 시원치가 못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40년을 처가살이했으면 이제 볼일 다 보았지 누구에겐들 존경받을 여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모세는 이렇게 결혼 생활을 시작한 사람입니다. 그 때문에 온 이스라엘이 다 모세를 존경하여도 그 아내 십보라는 예외인 것입니다. 저 남자는 처음부터 시원치 않은 남자이다! 이렇게 해서 이 억센 아내로부터 이렇다할 위로를 얻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백세가 넘은 피곤한 인생 여정 속에서 그는 따뜻한 위로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 한 구스 여인을 취했습니다. 이만하면 할 말이 있고 변명의 여지가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모세는 말이 없습니다. 한 마디의 변명도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인간의 나약함까지 덧붙여 변명하려 합니다. 그래서 인용하는 말이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니라"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변명 끝에 이제는 나를 비난하는 자를 공격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래 내가 실수했다고 하자 너는 실수없느냐?"는 것이지요. 다시 이렇게 말하자고 들면 모세 또한 할 말이 많습니다. 아론은 그 옛날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대면하고 있을 때에 금붙이를 모아다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긴 괴수입니다.(32:2-6) 그야말로 천하에 용서받지 못할 죄인입니다. 저를 향해 "너는 어떠했느냐?"고 충분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만 모세는 아무도 비난하지 않고 원망하지도 않으며, 미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얼마나 깨끗하게, 온유한 마음으로 참았던지 이제 하나님께서 모세의 편을 들어 위로하십니다. 실수는 모세가 했습니다만 그의 깨끗이 참는 자세와 온유함을 보시고 오히려 비난하는 자를 책망하시고 벌하시는 것입니다.

이 신비스러운 엄청난 진리를 우리는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9:13)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장 중요한 것! 그것은 바로 온유함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일 앞에, 다시 말해 사명과 소명 앞에 온유했습니다. 그는 큰 은혜를 받았으나 자기 존재를 잃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맡은 직분과 자기와를 혼돈치 않았습니다. 큰 일을 한다고 해서 내 자신이 커진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내 지위가 높아졌다고 내가 높아진 것이 아닙니다. 내가 돈을 벌어 부자가 되었다해서 내 인격이 높아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지위와 내 자체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일은 일이요, 지위는 지위이며 나는 나입니다. 모세는 엄청난 지위를 얻었고 엄청난 명예를 얻었습니다. 따라서 엄청난 높임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말씀 중에 보면 다른 모든 선지자와는 이상이나 꿈으로 말하였지만 내 종 모세와는 직접 대면하여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내가 특별히 뽑아 세웠고, 특별한 일을 맡겼으며, 특별하게 취급한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모세는 분명히 특별한 일을 하였고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생각하기를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곧 온유입니다. 결코 자기 됨을 잃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기를 특별하게 생각하여 자기의 인격, 자기 존재, 뿐만 아니라 자기의 족보까지도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는 이 교만이 얼마나 무서운 자기 착각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모세는 엄청난 존경을 받으면서도 자기 됨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겸손할 때 하나님께서 들어 왕으로 삼으셨으나 왕이 된 후에 교만해지므로 하나님께서 낮추시고 마침내 멸망케 하셨습니다.

여러분!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쓰시고 그 크신 은혜로 자기를 통해 역사하신다는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됨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312절에 보면 베드로가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을 고치자 많은 사람들이 기이히 여기고 놀라며 모여들 때에 베드로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며 자신에 대한 칭송을 강력히 부인합니다. 이 일은 내가 한 것이 아니랴 예수님이 하신 것이요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노라는 말입니다. 나는 오직 심부름꾼이요, 사환이며 충성된 종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모세는 온유하고 충성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가로채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자기가 하는 것처럼 나서는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는 온유한 사람입니다.

합동해서 선을 이룰 것으로 믿으며 매우 온유하게 참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온유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날의 이 세대는 말이 너무 많습니다. 너무도 강퍅합니다. 마음도 행위도 포악해만 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며 주님의 뜻을 하나님께 굴복시키던 그 온유함! 바로 그 온유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 그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며 그가 주인이 될 것입니다.

 

기도

은혜로우신 아버지!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바로 깨닫지 못하는 저희들의 어리석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주께서는 믿음과 겸손의 사람을 원하시며 오늘도 온유한 자를 받으시는 줄을 아옵니다. 모세의 온유함을 귀하게 보시고 크게 들어 쓰시던 주님, 오늘도 주의 백성들로 하여금 온유하게 하시고, 그 온유를 배우게 하셔서 그 온유로 인해 강한 자가 되게 하시고 나아가 승리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가장 온유했던 사람(민수기 12 : 1-8)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여호와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르시되 "너의 삼인은 회막으로 나아오라" 하시니 그 삼인이 나아가매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서 강림하사 장막 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는지라. 그 두 사람이 나아가매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와 이상으로 그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지금 위험한 세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는 생태계의 질서가 파괴되었다고 하는 때문이 아닙니다. 또한 가공할 만한 무기가 발명되어 저장되고 보다 더 큰 힘의 균형을 이어가며 살아간다는 그것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로 무서워하는 것은, 소위 위기라고 말하게 되는 그것은 바로 사람의 마음 때문입니다. 그 기술과 그 무기를 손에 쥐고 있는 사람 때문이란 말입니다. 예로부터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까? "뭐니 뭐니해도 사람이 제일 무섭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밤길을 다녀도 제일 무서운 것이 사람이요, 여행 중 어딜 가도 제일 무서운 것은 역시 사람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람 자체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사실은 사람의 마음이 무서운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 때문에 최근에 와서는 테러(terror)의 시대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됩니다. 폭력의 시대! 사실이 그러합니다. 인간성이 더 없이 포악해지고 있습니다. 그 어떤 포악한 동물보다도 더 잔인한 인간의 포악성을 우리가 압니다. 그 생각이 점점 사악해지고 행동은 날이 갈수록 거칠어만 갑니다. 실로 걷잡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언어 표현마저 점점 극단적인 말을 사용합니다. 생각해 보면 몸서리가 쳐지는 말들을 평범하고 태연하게 주고받습니다. 날로 거칠어만 가는 세대! 그래서 불안하고 그래서 두렵습니다.

창세기 63절에 보면 홍수로 인하여 천하를 다 멸하여야 할 즈음의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간단하게 표현하여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의 인간 존재는 다 떠났고 죽어 버렸으며 이제는 고깃덩어리인, 아주 잔악한 육체만 남았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생각하면 산 사람을 심판하여 홍수에 죽게 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은 시체를 쓸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홍수의 심판이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오늘에 있어서도 사람됨은 사라지고 무서운 악마로, 사나운 짐승으로 화해버린 육체의 인간을 봅니다. 그 인간의 무서운 마음! 그것이 몸서리치도록 무섭고 두려운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타난 본문 말씀은 난구절입니다. 어렵다는 의미에서의 난구절이 아니라 깊다는 의미에서의 난구절입니다. 해석이 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해석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피상적으로 읽고 보면 도덕이나 규범에 맞지 않는 이야기 같습니다. 일반 상식에 어긋나는 이야기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깊은 뜻을 이해한 후 읽어보면 그 진리가 얼마나 소중한 진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참으로 깊고 오묘합니다. 이는 특별히 오늘이 세대를 향해서 대단히 소중하게 주어지는 말씀이라고 여겨집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모세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사람 모세는 의인이 아닙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의 모세는 더더욱 의인이 아닙니다. 선한 사람도 못됩니다. 윤리 규범으로 볼 때에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모세의 생애에는 실수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쓰셨습니다. 이상한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람을 들어 쓰시는 것을 보면 언제나 그렇게 완전한 사람을 쓰신 것은 아닙니다. 만약 완전한 사람을 찾고 기다리신다면 아무 사람도 쓸 수가 없으시겠지요! 그러기에 부족한 중에 허물 많은 사람들을 들어 쓰셨습니다. 그런데 그 쓰시는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를 자세히 상고해 보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그 어느 한 부분이 있으면 나머지 다른 부분은 하나님께서 다 채워 주시고 덮어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하나님이 봐주셨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저는 사랑의 매력이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의 장점을 봅니다. 단점이 보이면 사랑이 아닙니다. 장점이 보이고 그 장점이 크게 보이므로 그것에 가리워서 모든 단점이 보이지 않게 되고 맙니다. 그럴 때가 진정으로 사랑할 때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사람인데도 오늘에 와서는 단점만으로 꽉 차있고 아무리 찾아도 장점은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아주 멀어졌다는 증거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실 때에는 그 중심에 귀한 점이 하나 있으면 그것을 크게 사랑하시고 다른 것은 다 용서하시며, 용납하시어 덮어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복음이요, 어떤 의미에서 그런 하나님이시기에 믿음직스럽습니다.

예를 들면 성경 중에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비실비실한 그야말로 휘청거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어떤 때는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17 : 1)는 말씀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역시 아브라함은 불완전합니다. 허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좋은 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믿음입니다. 이에 성경은 증거하기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4 : 3)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을 보시고 모든 부족한 것을 다 채워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대하시는 자세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다윗은 또 어떠한 사람입니까? 그는 결정적인 실수가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사람의 차원에서는 구제 불능한 정도의 어려운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다윗에게는 대단히 귀중한 겸손이 있습니다. 그 겸손한 중심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사랑하십니다. "내 종 다윗처럼" “내 종 다윗이라고 들추시며 얼마나 사랑하고 좋아하시는지 모릅니다. 좌우간 성경에 다윗의 이름이 8백여 회나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본문에 나타난 모세는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의 온유와 충성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대하면서 여러 가지의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실수는 모세가 했습니다. 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다고 했는데 이 때의 모세는 나이로 보아서도 무려 백세가 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이에 무슨 소실이며 그것도 이방 여자입니까? 구스 곧 에디오피아 여자, 피부색도 검은 종을 소실로 취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그의 형님 아론과 누나 미리암이 이 일을 비방하게 됩니다. 사실, 비방할 만한 일이요, 비방하는 것 또한 당연합니다. 물론 당시의 제도로는 일부다처주의요 더구나 노예에 대해서는 아무 상관이 없을 때입니다. 그러니 만큼 일반적으로는 문제될 것이 없는 처지입니다만 원체 거룩한 하나님의 종이란 말입니다. 온 이스라엘을 지도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종으로서의 지도자가 이게 무슨 만행이란 말입니까? 그래서 저들이 비난을 하는 것입니다. 일단 이 사건 하나를 과녁으로 하고 나머지는 모두 무시하려 합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는 비방의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아론은 형님이요 미리암은 누나입니다. 더구나 누나 미리암은 모세를 위해 목숨을 건 역사적 모험을 한 사람입니다. 그는 모세가 나일 강변의 갈대 사이에 버려졌을 때에 이를 지켜보았고 바로의 딸인 공주가 목욕하러 왔다가 갈대 상자 속의 어린 동생을 발견하고 측은히 여기는 모습을 보고는 히브리 사람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당신을 위해서 이 아이에게 젖을 먹이게 할까요(2:7)라며 곧장 어머니를 데리고 간 사람입니다. 그러고 보면 모세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도와 준 사람입니다.

미리암의 입장에서 볼 때 자기 동생 모세가 이제 와서 이런 실수를 하는 것을 보자 참을 수가 없어서 마음대로 비난을 합니다. 그 실수 하나만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성직, 그의 거룩한 역사까지도 비난을 하려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온유함을 보시고 오히려 모세의 편을 드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다음 부분을 보게 되면 미리암을 치시어 문둥병에 걸리게 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온유함을 보셨습니다. 그러면 그 온유라는 것이 무엇이며 어떤 것입니까? 이는 '아바나' 라고 하는 히브리말인데 원어의 뜻은 굽힌다는 뜻입니다. 마음을 굽힌다, 굴복한다, 절한다, 구부린다, 낮아진다, 혹은 비천해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뜻을 굽힌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좋은 의미에서 겸손과 경건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만 이 말들은 어디까지나 사람에게만 불려지는 덕성입니다. 그 때문에 겸손한 사람, 혹은 경건한 사람이라고는 말하지만 하나님을 가리켜 겸손하다, 경건하다는 말은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온유라는 말은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까지 쓰여지는 특별한 성격의 말입니다. 이에 사무엘하 2236절에 보면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온유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와 나아가 하나님에게까지 관계되는 특별한 성격의 묘사입니다. 그런고로 이 온유라는 말은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인간의 몸은 살아 있는 동안 부드럽습니다. 그 중에서도 어린아이들의 몸과 그 살갗은 매우 부드럽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크게 자라가면서 점점 딱딱해지고 마지막에는 굳어집니다. 굳었다는 것은 죽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의 마음도 쉽게 발전할 때에 부드럽습니다. 잘 받아들이며 잘 휘어집니다. 그러나 점점 굳어져서 완고해지면 마지막에는 망하고 맙니다. 교만은 멸망의 선봉입니다. 굳어진 마음, 완악해진 마음은 결국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 온유라고 하는 말은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11:29)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강하면서도 스스로 약해지는 것이요, 높으면서도 스스로 낮아지는 것이며, 알면서도 스스로 모른 것이요, 능력이 있으면서도 아주 능력이 없는 자로 허리를 굽히고 뜻을 굽히는 것을 온유라고 합니다. 이것은 절대로 약한 것이 아닙니다. 진정 온전한 강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에 지도력이 주어지고 능력이 주어지며 승리가 주어집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할 것이라(37:11)고 말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도 이 말씀을 인용하여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시기를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포악한 자는 거기에서 끊어지고 말지만 온유한 자는 기업으로 땅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곧 길이길이 이어질 축복이요, 생명에서 생명으로 이어지는 영원한 축복입니다. 기업이 있는 생은 바로 온유한 생입니다.

이제 잠깐 생태학적인 이야기를 좀 해봅시다. 칼 막스(K.Marx)는 여기에서 실수했습니다. 약육강식(弱肉强食), 곧 강자는 살아 남고 약자는 없어진다 했습니다만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강한 동물은 다 멸종되거나 쇠퇴했지만 약한 동물은 그대로 남아 번식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온유한 동물이 온 지면을 덮고 있습니다. 강한 동물은 살아 남지를 못합니다. 이 중요한 원리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점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온유한 자가 승리합니다. 그가 진정 강한 자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 나타난 모세의 온유함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생각해 보십시다. 거기에는 대단히 신비스러운 의미들이 있습니다.

먼저는 자기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됨을 잘 지켜나갔습니다. 사람이 자기를 잃어버리는 데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지나친 칭찬을 들을 때이며 나머지 하나는 억울한 말을들을 때입니다. 그 때문에 그 사람을 시험해 보려면 일단 칭찬을 해보면 안다고 합니다. 분수에 넘치는 칭찬을 해보아 교만해지면 그 사람은 별 사람이 아닙니다. 칭찬을 들으면서도 자기 페이스(pace), 자기됨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또한 억울한 말을 듣고 분한 말을 들었다고 하여 불끈하여 화를 낸다면 이 또한 별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모세는 억울한 말을 들어도 절대로 원망하지 않습니다. 성공, 실패, 영광, 굴욕, 그 어느 때든지 그는 자기됨을 잘 지켰습니다.

"가장 겸손한 선지자 칼빈"이라는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종교 개혁자 칼빈이 이태리에서 스트라스버그로 가는 길에 그의 친구 윌리암스 페넬(W. Penel)을 만나기 위해 제네바에서 잠깐 머물게 됩니다. 이때 이 친구 페넬이 말하기를 제네바에서 종교개혁 운동을 하자고 자꾸만 권합니다. 본래 칼빈은 연구 생활을 해서 훌륭한 학자가 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친구의 끈질긴 권유를 받은 칼빈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제네바에 머물면서 종교 개혁 운동에 가담합니다. 하지만 이 칼빈은 너무나도 엄격하고 철저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반발을 사게 되어 결국 3년 후에 제네바 시의 시의회의 결의 따라 추방을 당하게 됩니다. 그럴 때에 그는 아무 원망도 불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3년 후, 아무래도 칼빈이 있어야 이 일이 바로 되겠다고 생각하여 다시 초청을 합니다. 이 때에도 역시 칼빈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다시 돌아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쫓아낼 땐 언제이고 오랄 때는 언제이냐며 역겨워할 것입니다만 그는 가라고 할 때 갔으며 오라고 할 때에 아무 말 없이 온유한 마음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아무로 미워하지 않는 중에 그대로 돌아와 제네바에서 큰 역사를 이루며 종교 개혁을 성공시켰고 나아가 오늘이 제네바를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 상상을 해보세요. 이것이 온유한 것입니다.

또한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힘입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여 말씀을 들었고 그로 인해 얼굴에는 광채가 났으며 그 빛난 광채를 두려워하는 백성들 앞에서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우기까지 해야 했습니다.(34:29-35) 그는 권능의 사람이요 기적의 지도자였습니다. 누가 보아도 위대한 지도자 모세입니다. 큰소리칠 만도 하고, 대중을 무시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자기됨을 잃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 나타난 비난은 매우 참기 어려운 비난입니다. 이 어려운 비난을 들으면서도 그는 온유했습니다. 결코 자기 방어를 하지 않았습니다. 상대방을 끝까지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온유하게, 침묵하면서 잘 참았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큼, 하나님께서 친히 보상하실 만큼, 그렇게 깨끗한 마음으로 이 참기 힘든 비난을 참았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귀한 자세입니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비난을 듣게 되면 자기 변명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맨 먼저 들추어 나오는 변명이 상황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상황이 워낙 불가피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자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자면 모세는 할 말이 많은 사람입니다. 특히 남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더욱 그렇습니다. 모세는 40세에 미디안 광야로 피난을 갑니다. 외롭게, 혼자 쫓기는 도망자로 방랑의 길에 오릅니다. 그러는 중에 미디안에서 이드로의 집에 머물게 되고 거기서 십보라라고 하는 이드로의 딸과 결혼을 하여 함께 살게 됩니다. 하지만 결혼할 당시의 모세의 형편이란 참으로 말이 아닙니다. 그뿐만 아니라 40년 동안 처가살이를 합니다. 자고로 처가살이하는 남자는 시원치가 못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40년을 처가살이했으면 이제 볼일 다 보았지 누구에겐들 존경받을 여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모세는 이렇게 결혼 생활을 시작한 사람입니다. 그 때문에 온 이스라엘이 다 모세를 존경하여도 그 아내 십보라는 예외인 것입니다. 저 남자는 처음부터 시원치 않은 남자이다! 이렇게 해서 이 억센 아내로부터 이렇다할 위로를 얻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백세가 넘은 피곤한 인생 여정 속에서 그는 따뜻한 위로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 한 구스 여인을 취했습니다. 이만하면 할 말이 있고 변명의 여지가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모세는 말이 없습니다. 한 마디의 변명도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인간의 나약함까지 덧붙여 변명하려 합니다. 그래서 인용하는 말이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니라"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변명 끝에 이제는 나를 비난하는 자를 공격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래 내가 실수했다고 하자 너는 실수없느냐?"는 것이지요. 다시 이렇게 말하자고 들면 모세 또한 할 말이 많습니다. 아론은 그 옛날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대면하고 있을 때에 금붙이를 모아다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긴 괴수입니다.(32:2-6) 그야말로 천하에 용서받지 못할 죄인입니다. 저를 향해 "너는 어떠했느냐?"고 충분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만 모세는 아무도 비난하지 않고 원망하지도 않으며, 미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얼마나 깨끗하게, 온유한 마음으로 참았던지 이제 하나님께서 모세의 편을 들어 위로하십니다. 실수는 모세가 했습니다만 그의 깨끗이 참는 자세와 온유함을 보시고 오히려 비난하는 자를 책망하시고 벌하시는 것입니다.

이 신비스러운 엄청난 진리를 우리는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9:13)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장 중요한 것! 그것은 바로 온유함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일 앞에, 다시 말해 사명과 소명 앞에 온유했습니다. 그는 큰 은혜를 받았으나 자기 존재를 잃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맡은 직분과 자기와를 혼돈치 않았습니다. 큰 일을 한다고 해서 내 자신이 커진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내 지위가 높아졌다고 내가 높아진 것이 아닙니다. 내가 돈을 벌어 부자가 되었다해서 내 인격이 높아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지위와 내 자체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일은 일이요, 지위는 지위이며 나는 나입니다. 모세는 엄청난 지위를 얻었고 엄청난 명예를 얻었습니다. 따라서 엄청난 높임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말씀 중에 보면 다른 모든 선지자와는 이상이나 꿈으로 말하였지만 내 종 모세와는 직접 대면하여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내가 특별히 뽑아 세웠고, 특별한 일을 맡겼으며, 특별하게 취급한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모세는 분명히 특별한 일을 하였고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생각하기를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곧 온유입니다. 결코 자기 됨을 잃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기를 특별하게 생각하여 자기의 인격, 자기 존재, 뿐만 아니라 자기의 족보까지도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는 이 교만이 얼마나 무서운 자기 착각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모세는 엄청난 존경을 받으면서도 자기 됨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겸손할 때 하나님께서 들어 왕으로 삼으셨으나 왕이 된 후에 교만해지므로 하나님께서 낮추시고 마침내 멸망케 하셨습니다.

여러분!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쓰시고 그 크신 은혜로 자기를 통해 역사하신다는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됨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312절에 보면 베드로가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을 고치자 많은 사람들이 기이히 여기고 놀라며 모여들 때에 베드로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며 자신에 대한 칭송을 강력히 부인합니다. 이 일은 내가 한 것이 아니랴 예수님이 하신 것이요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노라는 말입니다. 나는 오직 심부름꾼이요, 사환이며 충성된 종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모세는 온유하고 충성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가로채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자기가 하는 것처럼 나서는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는 온유한 사람입니다.

합동해서 선을 이룰 것으로 믿으며 매우 온유하게 참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온유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날의 이 세대는 말이 너무 많습니다. 너무도 강퍅합니다. 마음도 행위도 포악해만 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며 주님의 뜻을 하나님께 굴복시키던 그 온유함! 바로 그 온유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 그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며 그가 주인이 될 것입니다.

 

기도

은혜로우신 아버지!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바로 깨닫지 못하는 저희들의 어리석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주께서는 믿음과 겸손의 사람을 원하시며 오늘도 온유한 자를 받으시는 줄을 아옵니다. 모세의 온유함을 귀하게 보시고 크게 들어 쓰시던 주님, 오늘도 주의 백성들로 하여금 온유하게 하시고, 그 온유를 배우게 하셔서 그 온유로 인해 강한 자가 되게 하시고 나아가 승리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