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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복음 중의 복음(요한복음 3장 16절~21절)

by 【고동엽】 2023.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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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중의 복음(요한복음 3162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첫 성탄을 생각해 봅니다. 베들레헴 마구간에 예수께서 탄생하시는 바로 그 시간에 들판에서 양을 치는 목자들께 천사가 나타나서 첫번 성탄의 복음을 전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2:14).---하늘에 영광, 땅에 평화가 성탄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도 성탄이 되면 하늘에 영광, 땅에 평화를 생각합니다. 해마다 이 기원을 드려 봅니다만 그 영광과 그 평화로부터 오히려 점점 멀어져 가는 요즈음입니다. 하늘에 영광, 땅에 평화는 단순한 기구가 아니라 메시지요 말씀으로, 그대로 실현되어야 할 하나의 사건입니다.

그러면, 하늘에 영광, 땅에 평화는 어떤 통로를 통해서 오늘 우리들에게 현실적으로 나타나게 됩니까? 이 땅에는 지금 평화 대신에 전쟁이 있고 영광 대신에 많은 굴욕이 있는데 그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죄와 증오 때문입니다. 남을 미워하고, 자기를 증오하며 자포자기하고 자기학대를 하다가 나아가서 이웃에게 포악한 행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은 증오입니다. 많은 사건 가운데 특히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사건은 동반 자살입니다. 내가 살기 어렵고 괴롭다고 해서 천진난만한 아이들까지 죽이고 죽는 그런 어른들의 모습을 볼 때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이웃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나를 사랑할 때에 비로소 다른 사람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런고로 문제의 해결은 사랑입니다.

동물은 음식만 먹고도 살 수 있지만 사람은 사랑을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식었고 변질되었으며 타락하였기에 문제입니다.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은 알므로 사랑이라는 단어가 곳곳에서 흘러 넘치지만 참사랑의 의미를 바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 사랑은 교만에 빠졌고 이웃 사랑은 상업화하였으며 사회 사랑이란 말은 정치적이고 처세적인 것으로 변질된 지 이미 오래입니다. 그러니 참사랑을 어디 가서 찾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서야 살 수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사랑의 문제는 깊이 생각하면, 이것은 곧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믿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믿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세상에 사랑 없이 사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사랑 받지 못하고 살았다고 누가 감히 이야기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저는 언젠가 증오와 미움으로 가득찬 한 청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고아원에서 자랐고 커서는 나쁜 일에 가담하여 감옥살이도 했던 전과자였습니다. 그는 세상에 대해 철저히 부정적이었고 사랑 따위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거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부모가 자기를 버렸다고 믿고 있기에 세상 사람들 모두를 불신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자네 혼자 우유를 먹었고 자네 혼자서 기저귀를 갈아 차며 스스로 컸다고 생각하는가? 누군가가 자네를 위해서 먹여주고 입혀주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가?" 그제서야 그 청년은 자기를 키워 준 사람이 있었음을 시인했습니다. "그러면 부모도 아닌 그 누군가가 자기 자식도 아닌 자네를 사랑하여 키웠기에 오늘 자네가 있는 것이 아닌가! 어찌 생각하면 다른 사람들은 부모로부터 당연한 보통 사랑을 받고 자라지만 자네는 자기 자식도 아닌 자를 사랑해 준 더 높은 더 고상한 사랑을 받고 자랐다고 생각되지 않는가?"하고 되물었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는 덧붙여서 말하기를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잘 먹고 잘 자란 것 같아도 약하고 비실비실한 경우가 많은데, 자네는 헐하게 먹고 고생했지만 지금 이렇게 건강하지 않은가. 이래도 사랑을 받지 않았다고 거부하겠는가?"하고 다그쳤습니다. 그는 갑자기 밝은 표정으로 변하더니 "지금 곰곰이 생각하니 지난날 고마운 분들이 많았습니다. 어려운 순간 순간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셨음을 이제야 알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세상을 밝게 보는 청년으로 완전히 바뀌는 극적인 변화를 보였습니다. 고아든 독신이든 빈부귀천(貧富貴賤)간에 사랑 없이 산 사람이 있습니까? 문제는 사랑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 사랑을 믿을 수 없고 모르기 때문에 사랑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고 사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은 여러 가지 채널을 통하여 우리에게 사랑을 계시하고 계십니다.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시고, 이웃과의 인간관계를 통해서도 사랑을 보여 주시며, 도덕적으로도 이 사랑을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웃으로부터도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까? 도덕적으로도 이렇게 부족하고 허물 많은 우리들에게 많은 관용과 사랑을 베푸셨기에 오늘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오늘이라도 우리의 죄를 심판하신다면 살아 남을 자가 누구이며, 죄짓는 현장에서 벼락이라도 내리신다면 누가 살아 남겠습니까? 너그럽게 용서하시고 사랑하셨으며 덮어 주셨고 참아 주셨기에 우리 모두가 오늘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내가 얼마나 철저하게 회개해서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 내가 얼마나 깨끗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 많은 사랑과 긍휼과 인내가 있었기에 오늘도 우리가 성탄을 맞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사랑을 받지 않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몰랐고 사랑을 믿지 않았을 뿐입니다.

복음은 바로 이것입니다. 복음 중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번역을 좀 바꾸어 보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대로 사랑하셨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나를 이 모습 이대로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여건이 좀더 나으면 사랑하고 좀더 깨끗해지면 사랑하고 더 의로워지면 사랑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 모습 이대로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의 사랑은 그 대상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창조하신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창조적인 사랑입니다. 사랑할만하니 사랑하고 사랑 받을만한 존재가 되었으니 사랑한다는 상대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절대적인 사랑이요 창조적인 사랑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키울 때에 방긋방긋 웃고 잘 놀아주면 아주 귀엽지만 계속 보채고 잠도 잘 자지 않으면 내동댕이치고 싶은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내 아들 아니라 할 수 있습니까? 인내하며 사랑 받을 만한 사람으로 교육하여 키워나가서 사람으로 제구실하기까지 큰 희생과 아픔을 겪어야 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 사랑은 일방적이요 절대적이요 창조적이며 효과적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이 사랑을 믿고 받아들인 때에 구원이 있고 영생이 있습니다. 믿는다는 말은 곧 사랑을 안다는 말로, 주님은 바로 이 사랑을 믿게 하고 알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사랑은 분명히 있습니다. 벌써부터 있었습니다. 그 사랑을 알고 믿게 하기 위하여, 즉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하여 주는 오셨습니다. 어느 성도가 빨래비누 공장 주인의 친구였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신자이고 또 한 사람은 신자가 아니기에 만나기만 하면 서로 논쟁을 벌였습니다. 어느 날 빨래비누 공장 사장이 성도인 친구에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자네가 믿는 복음이 그렇게도 귀하고 또 열심히 전하는데, 왜 세상은 점점 죄악이 늘어나고 부조리가 날로 심하여 가는지 설명 좀 하게." 교회가 그렇게도 많은데 세상은 왜 악해지는지 말해 보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자네는 열심히 빨래비누를 많이 만드는데 왜 거리에는 아직도 더러운 것이 많으며 더러운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가?" 그랬더니 사장은 "그거야 그들이 빨래비누를 사다가 쓰지 않기 때문이야"라고 너무나 당연한 듯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바로 그거야! 복음은 분명히 복음이지만 사람들이 믿고 받아들이지 않으니 어찌하겠는가. 자네도 이 복음을 믿지 않으니까 그 모양이지. 복음을 복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데 어찌 변화가 있겠는가?"라고 재치 있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시어 그 사랑을 계시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입니다. 그리므로 성숙한 믿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사랑의 방법을 찬동하고 시인합니다. 내 방법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의 방법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단 말입니다. 그런데 미숙한 인격의 사람은, 즉 고집스럽고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은 자기의 좁은 채널 안에서 사랑을 비판하고 평가합니다. 그래서 나의 소원, 나의 욕망, 나의 이상대로 되어야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자기 손바닥만한 것을 딱 내어놓고 이대로 되어야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다고 채널을 좁게 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에게 고등학교 2학년인 사랑스런 딸이 있었습니다. 그는 부모님과 교회 식구들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습니다.

어느 날 수학 여행을 간다는 학교 소식에 그는 들떠서 카메라도 빌려오고 나름대로 여러 가지 준비에 바빴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은 그를 불러서 조용히 타이르십니다. 수학 여행을 보낼 수 없는 어려운 집안 사정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충격을 받아서 집을 나가 몇 년 동안 돌아오지 않고 방탕한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돌아왔을 때 제가 만났습니다. 그는 부모가 자기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이런 망상이 어디 있습니까? 가고 싶은 수학 여행 한번 못 갔다고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가지 말라고 할 수밖에 없었던 부모님의 마음을 한번이라도 헤아려 보았는지 묻고 싶었습니다. 자기의 좁은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서 엉뚱한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서는 그 결과를 하나님께 돌리는가 하면, 또한 왜 내 마음대로 하게 했느냐고 원망하는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생각을 가다듬어 2천 년 전 그 당시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그 현장으로 말입니다. 그 당시 유대는 정치적으로 로마의 식민지로서 속박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군인들이 점령하고 있었으며 저들의 하수인들이 마음대로 재물을 갈취하고 세금을 걷어내는 어려운 때였습니다. 경제적으로는 빈부의 차가 격심하여 굶어 죽는 자도 많았습니다. 또 사회적으로는 사람을 마음대로 사고 파는 노예 제도가 있어 혼란이 극심했고 도처에 강도가 우글거려 뺏고 빼앗기는 무서운 사회였습니다. 종교적으로도 그 부패는 극에 달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화 있을진저 바리새인들이여"라고 책망하셨으며, 또한 더러워진 성전을 뒤엎으시며 만민의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로 만드느냐고 소리치신 일도 있지 않습니까? 그들의 위선, 교만, 외식(外飾)은 목에까지 차 있었습니다. 제사장 가야바가 바로 예수를 잡아죽이는 사건의 원고가 아닙니까? 그러고 보면 종교가 얼마나 부패했는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야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낼 수 있겠습니까? 저들은 예수님이 왕이 되어 주시기를 바랐고, 솔직히 말해서 혁명이 일어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니까 로마 사람들을 일시에 다 몰아내고 독립되기를 바랐단 말입니다. 그래서 저 위선적이고 거짓된 사람들이 벼락을 맞아 죽는, 세상이 완전히 뒤집히는 그 날을 원했습니다.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정말 메시야의 나라가 그대로 오기를 소원했었습니다. 얼마나 끈질기게 원했으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실망했다가, 부활하시니까 다시 찾아가서 "나라에 임하실 때가 이 때입니까?" 라고 물었겠습니까? 그 때까지도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끝까지 바랐습니다. , 그러면 이 소원을 들어주어야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말없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말았습니다. 학자들 중에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똑똑하고 성급한 가룟 유다가 능력도 있고 권능이 있으신 예수께서 자기네의 뜻대로 혁명을 일으키지 않으시니 코너로 몰아서 혁명을 일으킬 수밖에 없도록 유도하느라고 주님을 팔았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에는 예수께서 극적인 능력을 발휘하실 것으로 유다는 믿고 있었는데, 기대와는 달리 그대로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시니 그도 자살할 수밖에 없었다는 해석입니다. 어느 면으로는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정말 혁명적인 어떤 사건이 나타나기를 바랐던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대로 되지 않고 어이없게도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복음은 여전히 복음대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까? 죽은 사람 몇 명을 살려냈다고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됩니까? 아니면 오천 명에게 빵 좀 먹였다고 경제 문제가 해결됩니까? 그렇다면 이것이 어떻게 사랑입니까?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여기에 계속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속죄구령(贖罪救靈)의 사랑이 있습니다. 죄를 속하고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는 근본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 방법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베들레헴 사건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십자가에 자기 독생자를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십자가를 지시기까지(Even the Cross), 십자가와 함께(With the Cross), 십자가 안에서(In the Cross)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뇨"(8:32)하고 고백했습니다. 독생자란 내 목숨보다 귀한 것으로, 가문의 대표자입니다.

그러므로 독생자의 생명은 곧 가문의 생명입니다. 얼마나 귀중한 존재입니까? 이런 독생자까지 주시는 그 사랑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접하시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설사 나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주님은 나를 사랑하심이 분명합니다. 비록 나는 가난하고 병들고 실패해도, 아니, 오늘 죽는다 해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심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저 베들레헴 사건을 보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가슴에 찡한 것이 전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내 마음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그 순간이야말로 하나님이 오늘도 나를 사랑하시고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형수가 형 집행장으로 나가다가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만났는데, 울고 있는 어머니를 향해 저주를 했다고 합니다. 아들이 죽는 것만 해도 기가 막히는데, 아들이 욕을 하니 어머니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나 이 아들의 원망에는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자기를 사랑한답시고 자기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고 못된 일에도 그저 잘 했다고 치켜 주었으니 결국 사형장으로 가도록 인도했다는 것입니다. 자식이 잘못했을 때에 왜 책망하지 않았으며 때리지 않았느냐고 하는 원망입니다.

여러분, 지금의 나의 현실, 이 실패, 이 고통, 이 질병, 이 경쟁이대로가 하나님이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기에 있는 사건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까? 이 현실 이 대로를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믿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성탄의 사건이 내 안에서 현실화할 수 있습니다. 미래적이요 종말적이요 영적이며 현실적인 이 사랑 안에서 새로운 성탄의 기적과 그 계시를 받아들이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복음 중의 복음(요한복음 3162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첫 성탄을 생각해 봅니다. 베들레헴 마구간에 예수께서 탄생하시는 바로 그 시간에 들판에서 양을 치는 목자들께 천사가 나타나서 첫번 성탄의 복음을 전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2:14).---하늘에 영광, 땅에 평화가 성탄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도 성탄이 되면 하늘에 영광, 땅에 평화를 생각합니다. 해마다 이 기원을 드려 봅니다만 그 영광과 그 평화로부터 오히려 점점 멀어져 가는 요즈음입니다. 하늘에 영광, 땅에 평화는 단순한 기구가 아니라 메시지요 말씀으로, 그대로 실현되어야 할 하나의 사건입니다.

그러면, 하늘에 영광, 땅에 평화는 어떤 통로를 통해서 오늘 우리들에게 현실적으로 나타나게 됩니까? 이 땅에는 지금 평화 대신에 전쟁이 있고 영광 대신에 많은 굴욕이 있는데 그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죄와 증오 때문입니다. 남을 미워하고, 자기를 증오하며 자포자기하고 자기학대를 하다가 나아가서 이웃에게 포악한 행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은 증오입니다. 많은 사건 가운데 특히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사건은 동반 자살입니다. 내가 살기 어렵고 괴롭다고 해서 천진난만한 아이들까지 죽이고 죽는 그런 어른들의 모습을 볼 때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이웃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나를 사랑할 때에 비로소 다른 사람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런고로 문제의 해결은 사랑입니다.

동물은 음식만 먹고도 살 수 있지만 사람은 사랑을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식었고 변질되었으며 타락하였기에 문제입니다.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은 알므로 사랑이라는 단어가 곳곳에서 흘러 넘치지만 참사랑의 의미를 바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 사랑은 교만에 빠졌고 이웃 사랑은 상업화하였으며 사회 사랑이란 말은 정치적이고 처세적인 것으로 변질된 지 이미 오래입니다. 그러니 참사랑을 어디 가서 찾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서야 살 수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사랑의 문제는 깊이 생각하면, 이것은 곧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믿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믿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세상에 사랑 없이 사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사랑 받지 못하고 살았다고 누가 감히 이야기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저는 언젠가 증오와 미움으로 가득찬 한 청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고아원에서 자랐고 커서는 나쁜 일에 가담하여 감옥살이도 했던 전과자였습니다. 그는 세상에 대해 철저히 부정적이었고 사랑 따위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거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부모가 자기를 버렸다고 믿고 있기에 세상 사람들 모두를 불신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자네 혼자 우유를 먹었고 자네 혼자서 기저귀를 갈아 차며 스스로 컸다고 생각하는가? 누군가가 자네를 위해서 먹여주고 입혀주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가?" 그제서야 그 청년은 자기를 키워 준 사람이 있었음을 시인했습니다. "그러면 부모도 아닌 그 누군가가 자기 자식도 아닌 자네를 사랑하여 키웠기에 오늘 자네가 있는 것이 아닌가! 어찌 생각하면 다른 사람들은 부모로부터 당연한 보통 사랑을 받고 자라지만 자네는 자기 자식도 아닌 자를 사랑해 준 더 높은 더 고상한 사랑을 받고 자랐다고 생각되지 않는가?"하고 되물었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는 덧붙여서 말하기를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잘 먹고 잘 자란 것 같아도 약하고 비실비실한 경우가 많은데, 자네는 헐하게 먹고 고생했지만 지금 이렇게 건강하지 않은가. 이래도 사랑을 받지 않았다고 거부하겠는가?"하고 다그쳤습니다. 그는 갑자기 밝은 표정으로 변하더니 "지금 곰곰이 생각하니 지난날 고마운 분들이 많았습니다. 어려운 순간 순간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셨음을 이제야 알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세상을 밝게 보는 청년으로 완전히 바뀌는 극적인 변화를 보였습니다. 고아든 독신이든 빈부귀천(貧富貴賤)간에 사랑 없이 산 사람이 있습니까? 문제는 사랑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 사랑을 믿을 수 없고 모르기 때문에 사랑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고 사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은 여러 가지 채널을 통하여 우리에게 사랑을 계시하고 계십니다.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시고, 이웃과의 인간관계를 통해서도 사랑을 보여 주시며, 도덕적으로도 이 사랑을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웃으로부터도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까? 도덕적으로도 이렇게 부족하고 허물 많은 우리들에게 많은 관용과 사랑을 베푸셨기에 오늘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오늘이라도 우리의 죄를 심판하신다면 살아 남을 자가 누구이며, 죄짓는 현장에서 벼락이라도 내리신다면 누가 살아 남겠습니까? 너그럽게 용서하시고 사랑하셨으며 덮어 주셨고 참아 주셨기에 우리 모두가 오늘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내가 얼마나 철저하게 회개해서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 내가 얼마나 깨끗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 많은 사랑과 긍휼과 인내가 있었기에 오늘도 우리가 성탄을 맞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사랑을 받지 않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몰랐고 사랑을 믿지 않았을 뿐입니다.

복음은 바로 이것입니다. 복음 중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번역을 좀 바꾸어 보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대로 사랑하셨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나를 이 모습 이대로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여건이 좀더 나으면 사랑하고 좀더 깨끗해지면 사랑하고 더 의로워지면 사랑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 모습 이대로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의 사랑은 그 대상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창조하신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창조적인 사랑입니다. 사랑할만하니 사랑하고 사랑 받을만한 존재가 되었으니 사랑한다는 상대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절대적인 사랑이요 창조적인 사랑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키울 때에 방긋방긋 웃고 잘 놀아주면 아주 귀엽지만 계속 보채고 잠도 잘 자지 않으면 내동댕이치고 싶은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내 아들 아니라 할 수 있습니까? 인내하며 사랑 받을 만한 사람으로 교육하여 키워나가서 사람으로 제구실하기까지 큰 희생과 아픔을 겪어야 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 사랑은 일방적이요 절대적이요 창조적이며 효과적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이 사랑을 믿고 받아들인 때에 구원이 있고 영생이 있습니다. 믿는다는 말은 곧 사랑을 안다는 말로, 주님은 바로 이 사랑을 믿게 하고 알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사랑은 분명히 있습니다. 벌써부터 있었습니다. 그 사랑을 알고 믿게 하기 위하여, 즉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하여 주는 오셨습니다. 어느 성도가 빨래비누 공장 주인의 친구였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신자이고 또 한 사람은 신자가 아니기에 만나기만 하면 서로 논쟁을 벌였습니다. 어느 날 빨래비누 공장 사장이 성도인 친구에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자네가 믿는 복음이 그렇게도 귀하고 또 열심히 전하는데, 왜 세상은 점점 죄악이 늘어나고 부조리가 날로 심하여 가는지 설명 좀 하게." 교회가 그렇게도 많은데 세상은 왜 악해지는지 말해 보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자네는 열심히 빨래비누를 많이 만드는데 왜 거리에는 아직도 더러운 것이 많으며 더러운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가?" 그랬더니 사장은 "그거야 그들이 빨래비누를 사다가 쓰지 않기 때문이야"라고 너무나 당연한 듯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바로 그거야! 복음은 분명히 복음이지만 사람들이 믿고 받아들이지 않으니 어찌하겠는가. 자네도 이 복음을 믿지 않으니까 그 모양이지. 복음을 복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데 어찌 변화가 있겠는가?"라고 재치 있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시어 그 사랑을 계시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입니다. 그리므로 성숙한 믿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사랑의 방법을 찬동하고 시인합니다. 내 방법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의 방법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단 말입니다. 그런데 미숙한 인격의 사람은, 즉 고집스럽고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은 자기의 좁은 채널 안에서 사랑을 비판하고 평가합니다. 그래서 나의 소원, 나의 욕망, 나의 이상대로 되어야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자기 손바닥만한 것을 딱 내어놓고 이대로 되어야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다고 채널을 좁게 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에게 고등학교 2학년인 사랑스런 딸이 있었습니다. 그는 부모님과 교회 식구들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습니다.

어느 날 수학 여행을 간다는 학교 소식에 그는 들떠서 카메라도 빌려오고 나름대로 여러 가지 준비에 바빴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은 그를 불러서 조용히 타이르십니다. 수학 여행을 보낼 수 없는 어려운 집안 사정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충격을 받아서 집을 나가 몇 년 동안 돌아오지 않고 방탕한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돌아왔을 때 제가 만났습니다. 그는 부모가 자기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이런 망상이 어디 있습니까? 가고 싶은 수학 여행 한번 못 갔다고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가지 말라고 할 수밖에 없었던 부모님의 마음을 한번이라도 헤아려 보았는지 묻고 싶었습니다. 자기의 좁은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서 엉뚱한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서는 그 결과를 하나님께 돌리는가 하면, 또한 왜 내 마음대로 하게 했느냐고 원망하는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생각을 가다듬어 2천 년 전 그 당시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그 현장으로 말입니다. 그 당시 유대는 정치적으로 로마의 식민지로서 속박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군인들이 점령하고 있었으며 저들의 하수인들이 마음대로 재물을 갈취하고 세금을 걷어내는 어려운 때였습니다. 경제적으로는 빈부의 차가 격심하여 굶어 죽는 자도 많았습니다. 또 사회적으로는 사람을 마음대로 사고 파는 노예 제도가 있어 혼란이 극심했고 도처에 강도가 우글거려 뺏고 빼앗기는 무서운 사회였습니다. 종교적으로도 그 부패는 극에 달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화 있을진저 바리새인들이여"라고 책망하셨으며, 또한 더러워진 성전을 뒤엎으시며 만민의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로 만드느냐고 소리치신 일도 있지 않습니까? 그들의 위선, 교만, 외식(外飾)은 목에까지 차 있었습니다. 제사장 가야바가 바로 예수를 잡아죽이는 사건의 원고가 아닙니까? 그러고 보면 종교가 얼마나 부패했는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야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낼 수 있겠습니까? 저들은 예수님이 왕이 되어 주시기를 바랐고, 솔직히 말해서 혁명이 일어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니까 로마 사람들을 일시에 다 몰아내고 독립되기를 바랐단 말입니다. 그래서 저 위선적이고 거짓된 사람들이 벼락을 맞아 죽는, 세상이 완전히 뒤집히는 그 날을 원했습니다.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정말 메시야의 나라가 그대로 오기를 소원했었습니다. 얼마나 끈질기게 원했으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실망했다가, 부활하시니까 다시 찾아가서 "나라에 임하실 때가 이 때입니까?" 라고 물었겠습니까? 그 때까지도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끝까지 바랐습니다. , 그러면 이 소원을 들어주어야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말없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말았습니다. 학자들 중에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똑똑하고 성급한 가룟 유다가 능력도 있고 권능이 있으신 예수께서 자기네의 뜻대로 혁명을 일으키지 않으시니 코너로 몰아서 혁명을 일으킬 수밖에 없도록 유도하느라고 주님을 팔았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에는 예수께서 극적인 능력을 발휘하실 것으로 유다는 믿고 있었는데, 기대와는 달리 그대로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시니 그도 자살할 수밖에 없었다는 해석입니다. 어느 면으로는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정말 혁명적인 어떤 사건이 나타나기를 바랐던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대로 되지 않고 어이없게도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복음은 여전히 복음대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까? 죽은 사람 몇 명을 살려냈다고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됩니까? 아니면 오천 명에게 빵 좀 먹였다고 경제 문제가 해결됩니까? 그렇다면 이것이 어떻게 사랑입니까?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여기에 계속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속죄구령(贖罪救靈)의 사랑이 있습니다. 죄를 속하고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는 근본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 방법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베들레헴 사건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십자가에 자기 독생자를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십자가를 지시기까지(Even the Cross), 십자가와 함께(With the Cross), 십자가 안에서(In the Cross)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뇨"(8:32)하고 고백했습니다. 독생자란 내 목숨보다 귀한 것으로, 가문의 대표자입니다.

그러므로 독생자의 생명은 곧 가문의 생명입니다. 얼마나 귀중한 존재입니까? 이런 독생자까지 주시는 그 사랑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접하시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설사 나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주님은 나를 사랑하심이 분명합니다. 비록 나는 가난하고 병들고 실패해도, 아니, 오늘 죽는다 해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심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저 베들레헴 사건을 보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가슴에 찡한 것이 전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내 마음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그 순간이야말로 하나님이 오늘도 나를 사랑하시고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형수가 형 집행장으로 나가다가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만났는데, 울고 있는 어머니를 향해 저주를 했다고 합니다. 아들이 죽는 것만 해도 기가 막히는데, 아들이 욕을 하니 어머니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나 이 아들의 원망에는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자기를 사랑한답시고 자기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고 못된 일에도 그저 잘 했다고 치켜 주었으니 결국 사형장으로 가도록 인도했다는 것입니다. 자식이 잘못했을 때에 왜 책망하지 않았으며 때리지 않았느냐고 하는 원망입니다.

여러분, 지금의 나의 현실, 이 실패, 이 고통, 이 질병, 이 경쟁이대로가 하나님이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기에 있는 사건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까? 이 현실 이 대로를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믿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성탄의 사건이 내 안에서 현실화할 수 있습니다. 미래적이요 종말적이요 영적이며 현실적인 이 사랑 안에서 새로운 성탄의 기적과 그 계시를 받아들이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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