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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을 참는 자의 복(야고보서 1장 12절~18절)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을 만난 성도들이 교역자를 찾아와, 사정을 털어놓으며 같이 기도해 주기를 청할 때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많은 분들이 대체로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어째서 나만이 이토록 힘겹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남들은 좀 쉽게 사는 것 같은데 나는 왜 이토록 어려운 시험을 끊임없이 당해야 됩니까?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되는가 하면 다시 다른 문제가 또 나서고, 이 정도만 해결하면 되겠지 싶으면 그 다음엔 더 큰 시험이 닥치고…… 늘 이렇게 살아야 하니 갈수록 태산입니다. 어째서 나만이 이렇게 어려운 시험을 줄곧 당해야 하는 것입니까?"-----이런 푸념을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믿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마음에서 허락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마는 이제 믿거나 말거나 분명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생명은 곧 시련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생명이 있는 한 시련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이것만은 꼭 알고 있어야 합니다. 똑같은 사건을 두고도 어떤 때에는 그것을 저주로 여기고 어떤 때에는 시련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면, 또 얼마 후에는 그것이 축복이었음을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어떤 사람은 시험으로, 어떤 사람은 시련으로, 어떤 사람은 저주로 알고, 또 어떤 사람은 축복으로 알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사건이 다른 것은 아닙니다. 그 사건에 임하는 자세와 그 사건에 대한 해석과, 우리의 신앙이 그 사건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시험을 당함에 있어서 많은 오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몇 가지를 함께 생각해 보십시다. 첫 번째 오해는 그 시험을 우연하게 일어나는 일로 여기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사건이다. 남의 사건에 그저 말려들었을 뿐이다, 참 애매한 노릇이다, 아무런 목적이 없는 우연한 사건(액시던트;accident)에 불과하다,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고백해야 될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우연이라는 것이 있을지언정 하나님께는 절대로 우연사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는 필연일 뿐입니다. 그 사건, 그 시험,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하나님의 확실한 경륜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저는 30여 년 목회를 하면서, 지금 생각해도 얼마나 어려웠던가 싶을 만큼 참으로 답답하고 괴로운 시간이 한번 있었습니다.
생 때 같은 네 식구가, 집에 불이 나면서 무너지는 바람에 한꺼번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젊디젊은 내외분과 어린아이 둘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더욱이 그 두 사람 다 제가 세례를 주었고, 두 사람의 결혼도 제가 주례를 했으며, 두 어린아이도 제가 유아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네 식구가 한순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무덤 하나를 크게 파고 함께 장례를 치릅니다. 이런 때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합니까? 무슨 말로 위로를 해야 합니까? 어느 성경을 보아야 하는가? 어떤 말씀으로 위로를 드려야 하는가? 참 괴로웠습니다. 답답했습니다. 저는 많은 시간 기도를 하고 이렇게 말씀을 드린 기억이 있습니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요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맙시다. 사람이 보기에는 잘못된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실수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는 반드시 뜻이 있을 것입니다.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 것입니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여기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고, 그렇게 고백하고 이 사건을 받아들입시다."
여러분, 이 '사건'이라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이 말씀이요 역사가 말씀이요 내가 겪고 있는 작고 큰 사건 하나하나가 전부 말씀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느냐, 받아들일 줄 아는 겸손과 지혜와 믿음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 나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듣도록 꾸준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개별적으로 사건을 통해서 강력하게 말씀하십니다.
시험에 대해 가지는 오해의 두 번째는, 나를 예외시(例外視)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남이 겪는 시련을 번연히 다 보면서도, 성경에 나오는 많은 시험과 시련을 알면서도, 그것들과 나와는 상관이 없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는 자신이 당하는 시험을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만이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나만이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시험이 있고 그 질량(質量)은 똑같습니다. 흔히 젊은 사람들이 연애를 하다가 뭐 좀 잘못되면 훌쩍훌쩍 울면서 하는 소리가 있지요. "요 사정은 아무도 모릅니다"----모르긴 왜 모릅니까? 혼자서만 당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나만이 별나게 당하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일을 점점 파국(破局)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이 다 겪는 것을 나도 겪을 뿐입니다. 가끔 해산의 시각을 앞에 둔 임산부가 고 민을 합니다. "아이고 이거, 낳다가 죽으면 어떡하나? 아기 낳는 것이 그렇게도 어렵다는데……" 이런 때에 위로할 수 있는 말 한마디가 있습니다. 인구(人口)의 절반이 겪는 일이다, 모든 여자가 다 겪는 일이다, 당신이 세상에 태어날 때도 어머니가 이걸 겪었다---아무 것도 아니지요. 보편적인 것입니다. 그 속에 내가 하나 끼여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유별날 것 하나도 없어요. 누구에게나 어느 때나 어디서나 시험은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생각할 것은, 고통만이 시험이라고 여기는 데에 또한 오해가 있습니다. 병들면 시험당한다 하고, 건강하면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실패하면 시험이라 하고 성공을 하면 시험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내 물건 도둑을 맞으면 "아이고 시험에 들었다" 하고, 누가 선물을 가져오면 시험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것이 뇌물일 수가 있습니다. 선물과 뇌물이 참 알쏭달쏭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시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누가 나에게 달갑지 않은 충고나 언짢은 소리를 하면 그걸 견디지 못하고 "시험당했다" "시험에 들었다"고 그럽니다마는, 남에게서 지나치게 칭찬을 받으면 그 때는 좋아라 합니다.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칭찬을 들을 때에는 시험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을 해서, 내 정욕과 욕망에 기준해서 욕심대로 되면 그것은 축복이요, 그대로 안 될 때에는 시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기준이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해서, 나야 어찌되었건, 나는 어떠한 손해를 치를지라도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간다면 다 축복이요, 하나님의 영광에 손해가 된다면 그것이 곧 내가 지금 겪어야 될 시험이라고 생각해야 되겠는데, 그렇지를 않고 자기 중심적으로만 판단을 하는 그 판단의 기준 자체가 오해라는 말입니다.
또 한 가지 오해는, 죄 때문에 시련을 겪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시련을 겪는 것만도 괴로운데, 설상가상으로 그때마다 죄책감이 듭니다. "아이고, 죄 탓이지." 이렇게 자책을 합니다. 죄를 지은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죄 저런 죄가 다 떠오릅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회개를 해야 됩니다마는, 그러나 중요한 것을 죄 때문에만 시험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내 죄는 주님께서 이미 십자가에 못박히시면서 다 사하셨고, 믿음으로 내 죄는 다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런고로 죄 때문에 내가 시험을 당한다 하는 생각으로부터 우리는 완전히 자유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죄 때문이다 하고 마음이 무거워지고 괴로워져서 끝내 아주 절망을 하고 맙니다. 마귀는 그 틈을 노립니다. 여기서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비록 나에게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유명한 마르틴 루터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귀가 찾아와서, 너는 이렇게 죄가 많다, 그래서 이렇게 실패했다, 너는 이렇게 부족한 사람이다, 너는 이러이러한 죄인이다! 하고 몰아붙입니다. 이에 루터는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Never the less!---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이래서 이긴 것입니다.
여러분, 어떠한 시련을 당하더라도 그것을 죄 때문이라고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이야말로 부질없는 큰 오해입니다. 예수님도 시험 당하셨습니다. 잘 믿는 사람들도 시험 당했습니다. 훌륭한 성도들도 시험, 시험, 시험을 당해서 순교했습니다. 갖은 누명을 쓰고 순교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능력으로 시험을 식별할 수도 있고 이길 수도 있다는 착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귀라는 것은 참으로 교활해서 사람을 참 잘도 속입니다. 까딱하면 어느 결에 그만 덜커덕 걸려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아무쪼록 시험 조심해야 됩니다.
마귀는 간사하기 짝이 없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힘입지 아니하면 하릴없이 시험에 빠지고 맙니다. 시험은 식별하기가 어렵고 또 스스로는 이기지 못한다는 것도 알아야 됩니다. 구약성경 사무엘하 11장에 보면, 다윗 왕이 우리아를 없애고 그 아내 밧세바를 취해 들이는 크나큰 실수를 범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를 내려치십니다. 그러자 다윗은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자복(自服)을 합니다. 다윗 왕이 열심히 참회의 기도를 하자 하나님께서 마침내 용서를 하시는데, 그가 간증한 것처럼 "동(東)이 서(西)에서 먼 것같이 죄과(罪過)를 멀리" 옮기셨습니다.(시 103: 12). 제 생각 같아서는, 이렇게까지 엄청난 죄를 범했으니 "너희들은 영원히 함께 살지 못한다!" 하시든지, 밧세바가 벼락을 맞기라도 하든지 했을 것 같은데 그렇지를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시되 깨끗이 용서하셨을 뿐 아니라 그 둘 사이에서 솔로몬 왕이 태어납니다. 이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용서받은 것만 해도 고마운데 이토록 엄청난 선물까지 주시다니요. 가이없는 은혜에 감사하고 기뻐하는데 덜커덕 그만 시험에 들었습니다. 국력(國力)을 측정해 보겠다고, 군사로 나설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기 위해 인구 조사를 실시한 것입니다(삼하 24:2). 사람의 힘을 믿는 이러한 교만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다시 내려치심으로 정신이 번쩍 나게 하십니다. "네가 언제 인구 믿고 살았더냐? 사람의 능력으로 살았더냐? 어찌하여 쓸데없이 사람 숫자나 세고 앉았느냐?"
여러분, 시험이란 언제나 있습니다. 더욱이 칭찬을 받을 때에, 형통하는 날에, 그 때에 무서운 시험이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시험은 필요해서 있는 것입니다. 필요하고 아니하고는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그 분량과 정도와 때도 하나님께서 정하십니다. 이 사람에게는 이런 시험이 있어야 되겠다, 이 사람은 이런 정도로 시련을 겪어야 되겠다, 이 사람은 이렇게 다루어야 되겠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시는 이것을 믿고 겸손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출발을 해야 합니다. 시험은 특별히 나에게 꼭 필요하다고 믿는 데서부터 새롭게 신앙을 고백하고 출발해야 합니다. 시험은 있어야 하고 또한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시험에는 약속이 있습니다. 앞날을 기약하는 미래 지향적인 분명한 약속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약속이 문제입니다. 영국 빅토리아 왕조 때의 최대의 시인(詩人)으로 추앙 받는 알프레드 테니슨(Alfred Tennyson)경이 젊었을 때의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인이 있어서 열렬히 연애를 하던 끝에 결혼을 '약속'했습니다.
약혼을 한 것이지요. 그러나 아직은 수업(修業)중이고 가난한 데다 유명해지기도 전이어서, 섣불리 결혼을 했다가는 도대체 생활을 꾸려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1년 뒤에 보자.' '좀더 기다려보자.' '조금 더, 조금 더……' 하다가 무려 17년이나 흘려보내 고야 맺어지게 되었답니다. 요새 같으면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무엇이 그토록 오랜 세월도 기다릴 수 있게 했습니까? 다름 아닌 '사랑'과 '약속'입니다.
제가 잘 알고 있는 권사님 한 분이 계십니다. 오래 전에 중국에서 태어나시고 상해에서 결혼을 하신 분입니다. 한 50여 년쯤 전의 그 옛날, 권사님이 결혼하시던 무렵의 이야기입니다. 여자 기숙사로 찾아오는 총각 하나가 있었는데, 날마다 찾아와서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루는 눈보라치는 험한 겨울날인데, 여느 때처럼 또 찾아왔더랍니다. 하는 수 없이 창문을 열고 "내려갑니다" 해 놓고는, 그 때부터 천천히 목욕을 하고 느릿느릿 준비를 하면서 무려 두 시간이나 내버려 둔 채 시간을 끌었답니다.
"어디, 언제까지 기다리나 보자" 했더니, 청년은 그 긴 시간을 요지부동으로 서서 기다리더라는 것입니다. 내리는 눈을 고스란히 뒤집어쓰면서요. 보다못한 한 방의 동료 친구들이 채근을 합니다. "얘 그만하면 됐잖니? 결혼해 줘라, 이젠"---사랑의 시금석은 인내입니다. 얼마나 기다려 내느냐, '약속'을 얼마나 참을성 있게 기다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주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런 줄 알고 순히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걸 기다리지 못해서 안달하고 원망, 불평하면서 40년 동안 그 숱한 시련 속에서 얼마나 많은 매를 맞습니까? 40년 아니라 4백 년이라도 "기다려라" 하시면 기다릴 것이지 무슨 불평이 그리 많습니까?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분명한 약속이 있고 그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참는 일이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 13)"----하나님께 핑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동안에 어쩌다가 조금 어려운 일을 감당해야 할 때면 "내가 십자가를 진다"고 거리낌없이 말하는 분들을 더러 봅니다. 무슨 십자가가 그리도 쉽습니까? 자기 자식을 낳아 키우면서도 십자가를 진다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 싸구려 십자가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나 아닌 누구에게도 구실을 대지 마시기 마랍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가족도 원망합니다. "내가 본래 성격이 좋은 사람인데, 그만 저 사람 때문에 고약해졌어" 하고 아내를 원망하는 남편들이 있습니다. 내 성격 나쁜 것이 어찌 남의 탓입니까? 아이들한테 핑계를 대는 부모님들도 있습니다. "이 주름살 좀 봐라. 너희들이 속을 썩여서 이렇게 주름살이 생겼다." 주름살이야 나이 먹어서 생겼지 달리 생겼습니까? 모두가 당찮은 소리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핑계를 대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고도 하지 마십시오. 그런 생각, 그런 마음가짐은 다 잘못된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나 자신의 문제요, 나와 하나님과의 문제일 뿐입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대로, 욕심 때문에 문제는 생겨납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 1: 14)---욕심에 끌려 미혹된다는 말의 헬라 원문을 보면 '덫에 걸린다' 또는 '낚시에 물린다'는 뜻입니다. 욕심에 걸려서 시험을 받는 것이지 누가 시험을 한다는 얘기입니까? 이번에 제가 잠시 미국을 여행하면서 그곳에서 유학하고 있는 몇몇 우리네 청년들을 만나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소망교회에서 자란 청년들이거나 제가 결혼 주례를 해 준 청년들이었습니다. 모두들 찾아와서 반갑게 인사를 하고 환담을 나누며 지냈습니다마는, 공교롭게도 그중 세 사람이 똑같은 말을 해서 '아, 이 사람들은 바로 그것이 문제로구나!' 하고 놀랐습니다. 얼굴이 상했고, 몹시 피곤해하기에 "너, 고생하는구나?" 하고 바라보았더니 뜻밖에도 "저요? 제가 욕심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제가 이렇게 겉으로는 겸손해 보이지만 속에는 욕심이 많거든요." 한 사람도 아닌 세 사람이나 같은 소리를 하더라는 말입니다. 저는 이 사랑하는 청년들에게 똑같은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욕심이 동기가 되어서 공부를 하면 건강을 지탱하지 못한다. 동기를 바꾸어라. 욕심을 버려라.
욕심을 채우려고 공부하려 들면 그것은 지킬 수가 없느니라." 모든 시험, 모든 시련이 무엇을 말해 주겠습니까? 가치 판단을 새로이 하게 하고, 새로운 의미를 깨닫게 해 주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의 유명한 비사(比辭)가 있습니다. '포도를 따서 포도주 틀에다 넣고 포도물을 만들기 위해 발로 밟는다(옛날에는 그렇게 했습니다). 발로 밟아 짓이겨서 짜면 한쪽으로는 깨끗한 포도물이 나오고 한쪽에는 찌꺼기가 남는다.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도 그러하다. 이 시련, 이 고난들이 나를 짓이겨서 고통을 준다. 그럼으로써 필요한 것과 필요치 않은 것, 유익한 것과 무익한 것, 거짓된 것과 참된 것을 갈라놓는 것이다.'---이것이 시험입니다. 내 마 음에 있는 이 쓸데없는 욕심, 버려야 할 허영심, 반드시 버려야 할 이 위선(僞善), 부질없는 명예욕과 교만, 허영, 거짓…… 이와 같은 찌꺼기를 모조리 없애야 하는 것입니다. 시험은 그러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깨닫고도 끊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어이 끊게 해 주십니다. 버려 마땅한 것을 버리지 못하고 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찍어 버리십니다. 여기에 아픔이 있습니다. 그 아픔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순수하게 만듭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을 보면,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고 하십니다. 욕심이 탓이니까 그것을 없애느라고 시험이 있습니다. 욕심으로 죄가 생기니 죄 못 짓게 하느라고, 그리고 죄가 자라면 죽으니 죄 못 자라게 하여 사망을 면케 하려고 잘라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픕니다. 이것이 잘못된 일입니까?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내 버리라……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내 버리라……(마 5:29-30)." 내가 빼어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내가 찍어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여기에 잘못이 있습니까? 그리해서 생명을 보전(保全)케 하고, 그리해서 영혼을 순수하게 하고, 그리해서 인격을 바로잡아 주시겠다는데,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로 온전히 세워 주시겠다는데, 이제 우리가 무슨 불평을 할 것입니까? 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시련을 통하여 나 자신을 알게 하시고 이웃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께로 나를 인도하십니다.
때로 우리는 스스로 죄 없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완전하다고요. 어림없는 이야기입니다. 게으름의 죄가 있습니다. 교만한 죄가 있습니다. 남 죄짓게 한 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役事)에 등한한 죄가 있습니다. 얼마든지 죄가 있습니다.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이것을 언제라야 깨닫게 됩니까? 시험 중에 깨닫습니다. 시험은 새로운 방향을 깨닫게 합니다. 깊은 지혜를 얻게 합니다. 그리고 신령한 세계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실수하는 일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시험을 판정하는 자가 누구냐를 올바로 분별하지 못하는 실수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보십시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약 1: 12)"---하나님만이 판정하십니다. 시험 겪는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옳다고 인정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말고는 어느 누구도 옳다 그르다 할 자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판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실수의 두 번째는,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되 그 디데이(D-day)는 하늘 나라에 있다는 것을 망각하는 어리석음입니다. 일껏 잘 참아 내다가도 어느 순간에 이르면 "이제 더는 못 참겠다!" 하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끝까지 참으세요.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생명의 면류관을 주께로서 받는 그 시각까지 참을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인내(忍耐)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을 내려오실 때에 가룟 유다가 찾아와 다가오더니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합니다(마 26:47-48). 얼마나 간사합니까? 베드로가 참지 못하고 칼을 휘둘렀습니다마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것까지 참으라(눅 22:51)"---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주님께서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는 그 순간까지 참아내야 합니다. 끝까지 시험은 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모세가 죽은 다음에도 시체를 놓고 천사와 마귀가 싸웠습니다. 우리는 세상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 귀한 싸움에서 패자(敗者)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고, 또 오늘도 믿음을 주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지혜롭게도 하시고 능력 있게도 하시고, 또 어떤 때에는 겸손하게도 하시고 진실하게도 하시고, 그리고 강하게 하십니다. 위어스비라는 목사님에게 여비서가 있었습니다. 사고를 당해서 그 여자의 남편은 장님이 된 채 사경(死境)을 헤매고 있으며, 그 여자 자신도 많은 시험을 겪고 고생을 하더랍니다. 딱하고 답답한 나머지 목사님이 비서를 위로합니다. "나는 당신과 당신 가정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비서가 묻습니다. "뭐라고 기도하십니까?" 목사님이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은총을 주시어 당신의 고난을 면케 해 달라고 기도하지요." 그랬더니 여비서는 "그렇게 기도하지 마세요, 목사님" 하고 뜻밖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저는 이 시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은혜를 다 받으려고 합니다. 끝까지 참고 견디어서 받아내야 되겠어요. 그러니 목사님, 제가 그 축복을 받아냄으로써 오늘 당하는 이 고난이 헛된 고난으로 끝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해 주세요"----비서가 목사한테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옳은 이야기지요. 내가 당하는 이 고난이 헛된 것으로 돌아가지 않게 해 주세요. 그리하여 크고 놀라운 축복,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예비하신 축복을 꼭 받을 수 있게 해 주세요…… 이것이 시험을 당하는 자의 올바른 인내의 자세입니다. 시험은 당하는 것이 아니고 이기는 것입니다. 참는 것이 아니고 극복하는 것입니다. 손해보는 것이 아니라 유익한 것입니다. 약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슬퍼할 것이 아니라 기뻐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1장 2절이 못박아 말씀하십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바로 여기에 면류관이 있고 승리의 생활이 있는 것입니다.
시험을 참는 자의 복(야고보서 1장 12절~18절)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을 만난 성도들이 교역자를 찾아와, 사정을 털어놓으며 같이 기도해 주기를 청할 때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많은 분들이 대체로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어째서 나만이 이토록 힘겹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남들은 좀 쉽게 사는 것 같은데 나는 왜 이토록 어려운 시험을 끊임없이 당해야 됩니까?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되는가 하면 다시 다른 문제가 또 나서고, 이 정도만 해결하면 되겠지 싶으면 그 다음엔 더 큰 시험이 닥치고…… 늘 이렇게 살아야 하니 갈수록 태산입니다. 어째서 나만이 이렇게 어려운 시험을 줄곧 당해야 하는 것입니까?"-----이런 푸념을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믿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마음에서 허락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마는 이제 믿거나 말거나 분명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생명은 곧 시련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생명이 있는 한 시련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이것만은 꼭 알고 있어야 합니다. 똑같은 사건을 두고도 어떤 때에는 그것을 저주로 여기고 어떤 때에는 시련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면, 또 얼마 후에는 그것이 축복이었음을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어떤 사람은 시험으로, 어떤 사람은 시련으로, 어떤 사람은 저주로 알고, 또 어떤 사람은 축복으로 알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사건이 다른 것은 아닙니다. 그 사건에 임하는 자세와 그 사건에 대한 해석과, 우리의 신앙이 그 사건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시험을 당함에 있어서 많은 오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몇 가지를 함께 생각해 보십시다. 첫 번째 오해는 그 시험을 우연하게 일어나는 일로 여기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사건이다. 남의 사건에 그저 말려들었을 뿐이다, 참 애매한 노릇이다, 아무런 목적이 없는 우연한 사건(액시던트;accident)에 불과하다,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고백해야 될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우연이라는 것이 있을지언정 하나님께는 절대로 우연사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는 필연일 뿐입니다. 그 사건, 그 시험,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하나님의 확실한 경륜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저는 30여 년 목회를 하면서, 지금 생각해도 얼마나 어려웠던가 싶을 만큼 참으로 답답하고 괴로운 시간이 한번 있었습니다.
생 때 같은 네 식구가, 집에 불이 나면서 무너지는 바람에 한꺼번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젊디젊은 내외분과 어린아이 둘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더욱이 그 두 사람 다 제가 세례를 주었고, 두 사람의 결혼도 제가 주례를 했으며, 두 어린아이도 제가 유아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네 식구가 한순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무덤 하나를 크게 파고 함께 장례를 치릅니다. 이런 때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합니까? 무슨 말로 위로를 해야 합니까? 어느 성경을 보아야 하는가? 어떤 말씀으로 위로를 드려야 하는가? 참 괴로웠습니다. 답답했습니다. 저는 많은 시간 기도를 하고 이렇게 말씀을 드린 기억이 있습니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요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맙시다. 사람이 보기에는 잘못된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실수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는 반드시 뜻이 있을 것입니다.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 것입니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여기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고, 그렇게 고백하고 이 사건을 받아들입시다."
여러분, 이 '사건'이라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이 말씀이요 역사가 말씀이요 내가 겪고 있는 작고 큰 사건 하나하나가 전부 말씀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느냐, 받아들일 줄 아는 겸손과 지혜와 믿음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 나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듣도록 꾸준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개별적으로 사건을 통해서 강력하게 말씀하십니다.
시험에 대해 가지는 오해의 두 번째는, 나를 예외시(例外視)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남이 겪는 시련을 번연히 다 보면서도, 성경에 나오는 많은 시험과 시련을 알면서도, 그것들과 나와는 상관이 없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는 자신이 당하는 시험을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만이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나만이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시험이 있고 그 질량(質量)은 똑같습니다. 흔히 젊은 사람들이 연애를 하다가 뭐 좀 잘못되면 훌쩍훌쩍 울면서 하는 소리가 있지요. "요 사정은 아무도 모릅니다"----모르긴 왜 모릅니까? 혼자서만 당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나만이 별나게 당하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일을 점점 파국(破局)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이 다 겪는 것을 나도 겪을 뿐입니다. 가끔 해산의 시각을 앞에 둔 임산부가 고 민을 합니다. "아이고 이거, 낳다가 죽으면 어떡하나? 아기 낳는 것이 그렇게도 어렵다는데……" 이런 때에 위로할 수 있는 말 한마디가 있습니다. 인구(人口)의 절반이 겪는 일이다, 모든 여자가 다 겪는 일이다, 당신이 세상에 태어날 때도 어머니가 이걸 겪었다---아무 것도 아니지요. 보편적인 것입니다. 그 속에 내가 하나 끼여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유별날 것 하나도 없어요. 누구에게나 어느 때나 어디서나 시험은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생각할 것은, 고통만이 시험이라고 여기는 데에 또한 오해가 있습니다. 병들면 시험당한다 하고, 건강하면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실패하면 시험이라 하고 성공을 하면 시험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내 물건 도둑을 맞으면 "아이고 시험에 들었다" 하고, 누가 선물을 가져오면 시험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것이 뇌물일 수가 있습니다. 선물과 뇌물이 참 알쏭달쏭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시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누가 나에게 달갑지 않은 충고나 언짢은 소리를 하면 그걸 견디지 못하고 "시험당했다" "시험에 들었다"고 그럽니다마는, 남에게서 지나치게 칭찬을 받으면 그 때는 좋아라 합니다.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칭찬을 들을 때에는 시험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을 해서, 내 정욕과 욕망에 기준해서 욕심대로 되면 그것은 축복이요, 그대로 안 될 때에는 시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기준이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해서, 나야 어찌되었건, 나는 어떠한 손해를 치를지라도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간다면 다 축복이요, 하나님의 영광에 손해가 된다면 그것이 곧 내가 지금 겪어야 될 시험이라고 생각해야 되겠는데, 그렇지를 않고 자기 중심적으로만 판단을 하는 그 판단의 기준 자체가 오해라는 말입니다.
또 한 가지 오해는, 죄 때문에 시련을 겪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시련을 겪는 것만도 괴로운데, 설상가상으로 그때마다 죄책감이 듭니다. "아이고, 죄 탓이지." 이렇게 자책을 합니다. 죄를 지은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죄 저런 죄가 다 떠오릅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회개를 해야 됩니다마는, 그러나 중요한 것을 죄 때문에만 시험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내 죄는 주님께서 이미 십자가에 못박히시면서 다 사하셨고, 믿음으로 내 죄는 다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런고로 죄 때문에 내가 시험을 당한다 하는 생각으로부터 우리는 완전히 자유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죄 때문이다 하고 마음이 무거워지고 괴로워져서 끝내 아주 절망을 하고 맙니다. 마귀는 그 틈을 노립니다. 여기서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비록 나에게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유명한 마르틴 루터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귀가 찾아와서, 너는 이렇게 죄가 많다, 그래서 이렇게 실패했다, 너는 이렇게 부족한 사람이다, 너는 이러이러한 죄인이다! 하고 몰아붙입니다. 이에 루터는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Never the less!---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이래서 이긴 것입니다.
여러분, 어떠한 시련을 당하더라도 그것을 죄 때문이라고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이야말로 부질없는 큰 오해입니다. 예수님도 시험 당하셨습니다. 잘 믿는 사람들도 시험 당했습니다. 훌륭한 성도들도 시험, 시험, 시험을 당해서 순교했습니다. 갖은 누명을 쓰고 순교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능력으로 시험을 식별할 수도 있고 이길 수도 있다는 착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귀라는 것은 참으로 교활해서 사람을 참 잘도 속입니다. 까딱하면 어느 결에 그만 덜커덕 걸려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아무쪼록 시험 조심해야 됩니다.
마귀는 간사하기 짝이 없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힘입지 아니하면 하릴없이 시험에 빠지고 맙니다. 시험은 식별하기가 어렵고 또 스스로는 이기지 못한다는 것도 알아야 됩니다. 구약성경 사무엘하 11장에 보면, 다윗 왕이 우리아를 없애고 그 아내 밧세바를 취해 들이는 크나큰 실수를 범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를 내려치십니다. 그러자 다윗은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자복(自服)을 합니다. 다윗 왕이 열심히 참회의 기도를 하자 하나님께서 마침내 용서를 하시는데, 그가 간증한 것처럼 "동(東)이 서(西)에서 먼 것같이 죄과(罪過)를 멀리" 옮기셨습니다.(시 103: 12). 제 생각 같아서는, 이렇게까지 엄청난 죄를 범했으니 "너희들은 영원히 함께 살지 못한다!" 하시든지, 밧세바가 벼락을 맞기라도 하든지 했을 것 같은데 그렇지를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시되 깨끗이 용서하셨을 뿐 아니라 그 둘 사이에서 솔로몬 왕이 태어납니다. 이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용서받은 것만 해도 고마운데 이토록 엄청난 선물까지 주시다니요. 가이없는 은혜에 감사하고 기뻐하는데 덜커덕 그만 시험에 들었습니다. 국력(國力)을 측정해 보겠다고, 군사로 나설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기 위해 인구 조사를 실시한 것입니다(삼하 24:2). 사람의 힘을 믿는 이러한 교만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다시 내려치심으로 정신이 번쩍 나게 하십니다. "네가 언제 인구 믿고 살았더냐? 사람의 능력으로 살았더냐? 어찌하여 쓸데없이 사람 숫자나 세고 앉았느냐?"
여러분, 시험이란 언제나 있습니다. 더욱이 칭찬을 받을 때에, 형통하는 날에, 그 때에 무서운 시험이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시험은 필요해서 있는 것입니다. 필요하고 아니하고는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그 분량과 정도와 때도 하나님께서 정하십니다. 이 사람에게는 이런 시험이 있어야 되겠다, 이 사람은 이런 정도로 시련을 겪어야 되겠다, 이 사람은 이렇게 다루어야 되겠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시는 이것을 믿고 겸손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출발을 해야 합니다. 시험은 특별히 나에게 꼭 필요하다고 믿는 데서부터 새롭게 신앙을 고백하고 출발해야 합니다. 시험은 있어야 하고 또한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시험에는 약속이 있습니다. 앞날을 기약하는 미래 지향적인 분명한 약속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약속이 문제입니다. 영국 빅토리아 왕조 때의 최대의 시인(詩人)으로 추앙 받는 알프레드 테니슨(Alfred Tennyson)경이 젊었을 때의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인이 있어서 열렬히 연애를 하던 끝에 결혼을 '약속'했습니다.
약혼을 한 것이지요. 그러나 아직은 수업(修業)중이고 가난한 데다 유명해지기도 전이어서, 섣불리 결혼을 했다가는 도대체 생활을 꾸려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1년 뒤에 보자.' '좀더 기다려보자.' '조금 더, 조금 더……' 하다가 무려 17년이나 흘려보내 고야 맺어지게 되었답니다. 요새 같으면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무엇이 그토록 오랜 세월도 기다릴 수 있게 했습니까? 다름 아닌 '사랑'과 '약속'입니다.
제가 잘 알고 있는 권사님 한 분이 계십니다. 오래 전에 중국에서 태어나시고 상해에서 결혼을 하신 분입니다. 한 50여 년쯤 전의 그 옛날, 권사님이 결혼하시던 무렵의 이야기입니다. 여자 기숙사로 찾아오는 총각 하나가 있었는데, 날마다 찾아와서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루는 눈보라치는 험한 겨울날인데, 여느 때처럼 또 찾아왔더랍니다. 하는 수 없이 창문을 열고 "내려갑니다" 해 놓고는, 그 때부터 천천히 목욕을 하고 느릿느릿 준비를 하면서 무려 두 시간이나 내버려 둔 채 시간을 끌었답니다.
"어디, 언제까지 기다리나 보자" 했더니, 청년은 그 긴 시간을 요지부동으로 서서 기다리더라는 것입니다. 내리는 눈을 고스란히 뒤집어쓰면서요. 보다못한 한 방의 동료 친구들이 채근을 합니다. "얘 그만하면 됐잖니? 결혼해 줘라, 이젠"---사랑의 시금석은 인내입니다. 얼마나 기다려 내느냐, '약속'을 얼마나 참을성 있게 기다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주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런 줄 알고 순히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걸 기다리지 못해서 안달하고 원망, 불평하면서 40년 동안 그 숱한 시련 속에서 얼마나 많은 매를 맞습니까? 40년 아니라 4백 년이라도 "기다려라" 하시면 기다릴 것이지 무슨 불평이 그리 많습니까?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분명한 약속이 있고 그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참는 일이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 13)"----하나님께 핑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동안에 어쩌다가 조금 어려운 일을 감당해야 할 때면 "내가 십자가를 진다"고 거리낌없이 말하는 분들을 더러 봅니다. 무슨 십자가가 그리도 쉽습니까? 자기 자식을 낳아 키우면서도 십자가를 진다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 싸구려 십자가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나 아닌 누구에게도 구실을 대지 마시기 마랍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가족도 원망합니다. "내가 본래 성격이 좋은 사람인데, 그만 저 사람 때문에 고약해졌어" 하고 아내를 원망하는 남편들이 있습니다. 내 성격 나쁜 것이 어찌 남의 탓입니까? 아이들한테 핑계를 대는 부모님들도 있습니다. "이 주름살 좀 봐라. 너희들이 속을 썩여서 이렇게 주름살이 생겼다." 주름살이야 나이 먹어서 생겼지 달리 생겼습니까? 모두가 당찮은 소리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핑계를 대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고도 하지 마십시오. 그런 생각, 그런 마음가짐은 다 잘못된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나 자신의 문제요, 나와 하나님과의 문제일 뿐입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대로, 욕심 때문에 문제는 생겨납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 1: 14)---욕심에 끌려 미혹된다는 말의 헬라 원문을 보면 '덫에 걸린다' 또는 '낚시에 물린다'는 뜻입니다. 욕심에 걸려서 시험을 받는 것이지 누가 시험을 한다는 얘기입니까? 이번에 제가 잠시 미국을 여행하면서 그곳에서 유학하고 있는 몇몇 우리네 청년들을 만나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소망교회에서 자란 청년들이거나 제가 결혼 주례를 해 준 청년들이었습니다. 모두들 찾아와서 반갑게 인사를 하고 환담을 나누며 지냈습니다마는, 공교롭게도 그중 세 사람이 똑같은 말을 해서 '아, 이 사람들은 바로 그것이 문제로구나!' 하고 놀랐습니다. 얼굴이 상했고, 몹시 피곤해하기에 "너, 고생하는구나?" 하고 바라보았더니 뜻밖에도 "저요? 제가 욕심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제가 이렇게 겉으로는 겸손해 보이지만 속에는 욕심이 많거든요." 한 사람도 아닌 세 사람이나 같은 소리를 하더라는 말입니다. 저는 이 사랑하는 청년들에게 똑같은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욕심이 동기가 되어서 공부를 하면 건강을 지탱하지 못한다. 동기를 바꾸어라. 욕심을 버려라.
욕심을 채우려고 공부하려 들면 그것은 지킬 수가 없느니라." 모든 시험, 모든 시련이 무엇을 말해 주겠습니까? 가치 판단을 새로이 하게 하고, 새로운 의미를 깨닫게 해 주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의 유명한 비사(比辭)가 있습니다. '포도를 따서 포도주 틀에다 넣고 포도물을 만들기 위해 발로 밟는다(옛날에는 그렇게 했습니다). 발로 밟아 짓이겨서 짜면 한쪽으로는 깨끗한 포도물이 나오고 한쪽에는 찌꺼기가 남는다.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도 그러하다. 이 시련, 이 고난들이 나를 짓이겨서 고통을 준다. 그럼으로써 필요한 것과 필요치 않은 것, 유익한 것과 무익한 것, 거짓된 것과 참된 것을 갈라놓는 것이다.'---이것이 시험입니다. 내 마 음에 있는 이 쓸데없는 욕심, 버려야 할 허영심, 반드시 버려야 할 이 위선(僞善), 부질없는 명예욕과 교만, 허영, 거짓…… 이와 같은 찌꺼기를 모조리 없애야 하는 것입니다. 시험은 그러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깨닫고도 끊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어이 끊게 해 주십니다. 버려 마땅한 것을 버리지 못하고 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찍어 버리십니다. 여기에 아픔이 있습니다. 그 아픔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순수하게 만듭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을 보면,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고 하십니다. 욕심이 탓이니까 그것을 없애느라고 시험이 있습니다. 욕심으로 죄가 생기니 죄 못 짓게 하느라고, 그리고 죄가 자라면 죽으니 죄 못 자라게 하여 사망을 면케 하려고 잘라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픕니다. 이것이 잘못된 일입니까?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내 버리라……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내 버리라……(마 5:29-30)." 내가 빼어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내가 찍어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여기에 잘못이 있습니까? 그리해서 생명을 보전(保全)케 하고, 그리해서 영혼을 순수하게 하고, 그리해서 인격을 바로잡아 주시겠다는데,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로 온전히 세워 주시겠다는데, 이제 우리가 무슨 불평을 할 것입니까? 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시련을 통하여 나 자신을 알게 하시고 이웃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께로 나를 인도하십니다.
때로 우리는 스스로 죄 없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완전하다고요. 어림없는 이야기입니다. 게으름의 죄가 있습니다. 교만한 죄가 있습니다. 남 죄짓게 한 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役事)에 등한한 죄가 있습니다. 얼마든지 죄가 있습니다.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이것을 언제라야 깨닫게 됩니까? 시험 중에 깨닫습니다. 시험은 새로운 방향을 깨닫게 합니다. 깊은 지혜를 얻게 합니다. 그리고 신령한 세계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실수하는 일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시험을 판정하는 자가 누구냐를 올바로 분별하지 못하는 실수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보십시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약 1: 12)"---하나님만이 판정하십니다. 시험 겪는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옳다고 인정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말고는 어느 누구도 옳다 그르다 할 자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판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실수의 두 번째는,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되 그 디데이(D-day)는 하늘 나라에 있다는 것을 망각하는 어리석음입니다. 일껏 잘 참아 내다가도 어느 순간에 이르면 "이제 더는 못 참겠다!" 하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끝까지 참으세요.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생명의 면류관을 주께로서 받는 그 시각까지 참을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인내(忍耐)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을 내려오실 때에 가룟 유다가 찾아와 다가오더니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합니다(마 26:47-48). 얼마나 간사합니까? 베드로가 참지 못하고 칼을 휘둘렀습니다마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것까지 참으라(눅 22:51)"---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주님께서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는 그 순간까지 참아내야 합니다. 끝까지 시험은 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모세가 죽은 다음에도 시체를 놓고 천사와 마귀가 싸웠습니다. 우리는 세상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 귀한 싸움에서 패자(敗者)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고, 또 오늘도 믿음을 주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지혜롭게도 하시고 능력 있게도 하시고, 또 어떤 때에는 겸손하게도 하시고 진실하게도 하시고, 그리고 강하게 하십니다. 위어스비라는 목사님에게 여비서가 있었습니다. 사고를 당해서 그 여자의 남편은 장님이 된 채 사경(死境)을 헤매고 있으며, 그 여자 자신도 많은 시험을 겪고 고생을 하더랍니다. 딱하고 답답한 나머지 목사님이 비서를 위로합니다. "나는 당신과 당신 가정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비서가 묻습니다. "뭐라고 기도하십니까?" 목사님이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은총을 주시어 당신의 고난을 면케 해 달라고 기도하지요." 그랬더니 여비서는 "그렇게 기도하지 마세요, 목사님" 하고 뜻밖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저는 이 시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은혜를 다 받으려고 합니다. 끝까지 참고 견디어서 받아내야 되겠어요. 그러니 목사님, 제가 그 축복을 받아냄으로써 오늘 당하는 이 고난이 헛된 고난으로 끝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해 주세요"----비서가 목사한테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옳은 이야기지요. 내가 당하는 이 고난이 헛된 것으로 돌아가지 않게 해 주세요. 그리하여 크고 놀라운 축복,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예비하신 축복을 꼭 받을 수 있게 해 주세요…… 이것이 시험을 당하는 자의 올바른 인내의 자세입니다. 시험은 당하는 것이 아니고 이기는 것입니다. 참는 것이 아니고 극복하는 것입니다. 손해보는 것이 아니라 유익한 것입니다. 약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슬퍼할 것이 아니라 기뻐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1장 2절이 못박아 말씀하십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바로 여기에 면류관이 있고 승리의 생활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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