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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자의 승리(고린도전서 2:1-5)

by 【고동엽】 2024.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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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자의 승리(고린도전서 2:1-5)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남극 탐험으로 유명한 영국의 탐험가 스코트(Scott, Robert F.;1868~1912)는 남극탐험에 성공하고 돌아오는 길에 실종되었습니다. 몇 달이 지난 뒤에 발견된 그의 주검에서 편지가 한 장 나왔습니다. 그가 남긴 마지막 편지에는 '용기, 용기, 용기'라는 말이 씌어 있었습니다. 18세기 영국의 문학․저술가인 사무엘 존슨(Johnson, S.)은 'A man's most precious possession is his courage라고 하여 인간이 지닌 가장 소중한 재산으로 용기를 꼽은 바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참된 용기입니다. 지금 당장 먹을 것이 없는 것도 아니요, 처지가 옛날보다 나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용기가 없습니다. 왜 이렇듯 비겁해지고 초라해졌습니까? 흔히 용기와 담력은 호주머니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경제적 사정이 나아지면 용기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사실 '장사(壯士)도 무일푼이면 무안색(無顔色)'이라는 말도 있듯이 돈이 없으면 초라해지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그러나 돈이 있다고 용기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돈이 진정한 용기의 바탕이 되지는 못합니다.

또한, 지식이 부족해서 용기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는 것만 많으면 용기의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비교적 공부를 많이 한 사람, 남보다 많이 아는 사람이 용기가 더 없습니다. 그 자신 너무나 부족한 것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자신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스스로 점점 더 약해지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때로는 경험이 부족해서 용기가 없다고도 생각합니다. 내가 지금껏 안 해본 일을 하기에, 경험 없는 일을 하기에 용기가 없다고 합니다만, 그실 경험이 많은 일일수록 점점 더 자신이 없어집니다. 오히려 경험도 없고 지식도 없는 사람들이 만용에 가깝도록 마구 뛰어듭니다. 정말로 경험이 있는 사람은 온유하고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용기가 없는 것을 환경 때문이라고도 말합니다. 환경이 너무 어려워서, 주위 사람들이 협력하지 않고 성원하지 않아서 용기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인즉 환경이 아무리 좋아도 용기가 생기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역설적으로, 환경이 어려울 때에 더 큰 용기의 사람이 된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참 용기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진정한 인격적 의지란 도덕성에 있습니다. 죄인은 용기가 없습니다. 양심에 가책되는 일을 많이 한 사람은 비굴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나약함과 시련에 대한 책임을 경제니 지식이니 사회니 환경에 돌리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문제는 죄 때문입니다.

내 죄 때문에 비겁해지는 것입니다. 의롭게 살고, 양심대로 살고, 진실하게 살고, 떳떳하게 살았다면 그렇듯 초라해질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실패했다고 비굴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하다고 초라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도덕적 문제 때문에 사람이 비굴해 지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종교성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됨을 확인하고, 하나님께서 날 성원하시고 하나님께서 내 편만 되어주신다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자신만 있다면 용기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분명히 믿지도 않는 사람, 정말로 하나님께서 계시다면 나는 저주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정도의 사람이라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이웃을 보나 자신을 보나 도저히 일어설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용기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을 단행할 때에 참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어느날, 루터를 몹시도 싫어하는 한 사람이 비아냥거리며 그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교회, 국가, 황제, 그리고 백성들까지, 이렇듯 온 세상이 당신을 반대하고 있소. 이제 당신이 설 땅은 어디 있소?"라고. 이에 루터는 "나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장중(掌中)에 있을 뿐입니다"라고 담담하게 대답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하나님께서 내 편에 서 계시기 때문에 이렇듯 용기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루터는 1521년에 자신의 종교개혁운동을 탄압할 목적으로 열린 보름스(Worms)의회에 소환 당하여 재판을 받았습니다. 황제와 교황을 대리한 재판장은 그에게 신설(新設)의 번복과 25부에 달하는 저서의 취소와 가톨릭 교회에 대한 95개항의 항의서를 철회하도록 요구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화형에 처하겠다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끝내 이에 응하지 않고 추방을 당하게 됩니다. 이 때에 루터는 그 재판장을 향하여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성경과 명백한 이성에 어긋나지 않는 한 나는 아무 것도 철회할 수 없고 철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여기에 확고부동하게 서 있습니다. 나는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와주소서." 'Here I stand, Oh, God!'하나님이여, 나 여기 서 있습니다. 홀로 서 있습니다. 나를 도와주소서-----루터는 생사가 오가는 그 급박한 순간에도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용기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이러한 용기가 개혁자의 용기요, 개혁자의 능력이요, 개혁자의 마음입니다. 본디 개혁이라는 것이 고독한 일입니다. 선구자는 언제나 외롭습니다. 그 앞에는 숱한 난관과 적들이 있습니다.

새로운 일을 하고자 할 때,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고자 할 때에 그 마음은 벌써 저 미래에 가 있기에 현실 안에서는 언제나 외롭고 고독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점을 잊지 말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라고 말씀합니다. 개혁자의 마음은 이미 먼 미래에 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현재가 불합리하게, 불확실하게, 때로는 어리석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생각하지 못하는 세계를 생각하고, 저 먼 미래만을 고독하게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개혁이란 낡은 것, 낡은 것에 속한 것들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과감하게 시정하는 행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옛것을 과감하게 끊어버려야 합니다. 여기에 아픔이 있고 고통이 있습니다.

모름지기 개혁자는 언제나 홀로 결정합니다. 주위 사람의 지지를 받지도, 의논하지도, 성원과 협력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개혁자는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삽니다. 먼훗날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든 상관없습니다. 그러므로 외롭습니다. 많은 난관을 극복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아주 중요한 개인적인 문제는 혼자서 결정하지 않습니까? 누구에게 의논할 것입니까, 누구를 따를 것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홀로 결정하고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적 결단입니다. 바로 여기에 개혁자의 능력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개혁자의 관심은 땅에 있는 것도 아니요 사람의 환심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개혁자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있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에 있습니다. 개혁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외에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려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포기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의 영광은 일찌감치 포기했습니다. 이것이 개혁자의 관심입니다. 나아가 개혁자는 자신의 철학적 용기도 포기했습니다. 지식을 포기하고 인간적 지혜를 완전히 포기해버렸습니다. 다만, 신앙적 용기에 살아갈 뿐입니다.

철학적 용기란 합리적인 것이요 인간적인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신앙적 용기란 역설적인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인 것입니다. 이것이 개혁자의 용기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먼저, 본문말씀의 배경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온세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수 차례 전도 여행을 떠납니다. 제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제 2차 전도여행길에 헬라의 수도 아덴에 들어가게 됩니다. 아덴은 헬라 철학의 본거지입니다. 이곳은 소크라테스를 위시하여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대철학자가 살았던 곳으로, 많은 철학자들의 역사가 숨쉬는 곳입니다. 바로 그곳에 도착하는 순간, 사도 바울의 마음이 이상하게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사도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하여 히브리 종교에 정통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본래 그는 로마에서 태어나 로마시민권까지 지닌 터이라 헬라 철학에도 능통합니다. 그런 그가 아덴에 도착하자 그 철학적 사고가 다시 그의 생각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지닌 철학적 지식을 그곳의 헬라 철학자들과 비교해보고, 자신이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고, 나아가서는 헬라철학적 약점을 자신이 갖춘 히브리적 종교로 대치하려고도 생각합니다. 여러모로 이렇게 생각해본 나머지 그는 철학적 방법으로 선교를 합니다. 아레오바고에 가서는 철학적 사상을 가지고 변론을 하기도 합니다. 원래의 본분에서 벗어나 전도가 아닌 변론을 했던 것입니다. 철학적으로 토론을 벌였던 것입니다.

철학적 사고를 지닌 채 전도 아닌 변론을 하며 다니던 바울은 그곳에서 '이름모르는 신'이라는 신상이 모셔진 신전을 발견합니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unknown God'가 됩니다. 사실, 우상을 많이 섬기는 사람들은 아주 복잡합니다. 곳곳에 '신'이 있습니다. 나무신, 바다신, 하늘신, 별신…… 가지각색을 섬깁니다.

 

그래도 혹시 빠뜨리는 신이 있어, 그 신이 노여워하여 재앙이라도 내릴까 걱정하여 '이름 모르는 신'이라는 신을 하나 더 만들어놓고 섬기는 것입니다. 일본사람들도 다신교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네들에게는 8백만 정도의 각종 신이 있다고 합니다. 각 신마다 이름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신이 많다고 하더라도 빠뜨리는 신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결국은 '이름 모르는 신'이라고 만들어 놓고 마치 무명용사의 무덤을 찾듯이 여기에 와서 제사를 드린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 '이름 모르는 신' 앞에 서서 궤변을 논합니다. "모르고 섬기는 하나님을 내가 알게 하겠노라"하며 변론을 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이십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어쨌든 사도 바울은 이렇게 시작해서 아덴사람들에게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설명해 나갑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부딪쳐 초점을 잃고 맙니다. 결국 그는 전도에 실패함으로 헬라의 수도 아덴에는 교회를 세우지 못하고 맙니다. 어디를 가든지, 일주일을 머물든 이틀을 머물든 간에, 그 머무는 곳마다 교회를 설립한 위대한 사도 바울이 헬라의 수도 아덴에서는 전도에 실패를 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 큰 핍박도 없었는데 교회를 설립하지 못하고 그만 고린도로 옮겨갑니다. 고린도에 도착한 바울은 완전히 실의에 빠져 더는 전도를 하지 못합니다. 호구지책으로 가지고 있던 기술, 천막을 만들고 깁는 기술로 그 방면의 업자들에게 붙어서 일을 합니다. 이렇듯 나약하게 지내다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나 개인 전도를 하게 됩니다. 그 때에 성령이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성에도 하나님의 백성이 많으니 주저하지 말고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라"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그 명령을 듣고야 복음을 다시 전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그는 고린도에 일 년 반을 거하면서 어렵게 고린도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그 때의 일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을 보세요. 바울은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3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석가 라이트푸드(Lightfood)는 사도 바울이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며 떨었는지 추리를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육신의 병이 있었다(갈 4:13)하니 그 병이 재발을 해서 약해졌는지, 고린도사람들에 비하여 사도 바울이 육체적으로 외모적으로 초라했다(고후 10:10)하니 그래서 약해졌는지, 언변에 능치 못했다(고후 10:10)하니 말을 달변으로 철학자와 같이 잘 하지 못하고 어눌해서 약해졌는지, 심리적으로 고독감을 느꼈다(고전 2:13)하니 그래서 약해졌는지, 혹은 그 자신 핍박을 당할 때에 보호해줄 수 있는 대상이 아무도 없이 무방비상태에 있다고 하는 외로움 때문에 약해졌는지, 그도 아니면 커다란 상업도시인 고린도의 위용과 그 많은 우상의 위협에 눌려 약해졌는지…… 이런저런 추측들을 해봅니다. 그러나 그 모두가 참 원인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실 바울은 그 때에 마음속으로부터 신앙적 위기를 맞았던 것입니다.

신학적 고민에 빠진 것입니다. 철학적 방법으로 전도를 하려다가 결국은 복음을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복음에 변질이 왔습니다. 순수성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 때문에 나약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신앙은 결단을 요구합니다. 은혜 앞에 스스로 하는 결단(de-cision)이 필요합니다. 특별히 바울에게도 세 번의 결단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결단으로 그는 예수님을 핍박하던 사람에서 예수님의 사람으로 변화합니다. 바로 그 결단을 내리는 순간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주로, 하나님으로 섬기는 하나님의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두 번째 결단은 full-time ministry, 다른 일은 전혀 하지 않고 전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온 생을 바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세 번째 결단은 오늘의 본문말씀에 있는 바와 같이 철학적 방법을 완전히 포기하고, 십자가만 믿고 십자가만 의지하고 십자가만 높이고 십자가만 전파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결단을 이렇게 피력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2절)"-----여기서 '작정하다'는 헬라어 원문에 '크리네인'으로 되어 있으며, 이는 '판단하다' 또는 '재판정에서의 결정'을 의미합니다. 중대한 결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매우 의지적인 표현입니다.

여러분, 철학과 신앙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신앙을 위주로 생활한다 하면서도 어느 사이엔가 철학에 기울기를 잘합니다. 인간 지식에 기울이 쉽습니다. 요즘도 보십시오.

많은 신학적 사조 가운데 십자가 없는 신학이 많습니다. 십자가 없는 신앙이 많습니다. 십자가를 부인하는 교인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복 받고 잘살겠다는 기복사상에 빠지는 것이 바로 십자가 없는 신앙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안일하고 평안해지겠다는 안일주의 신앙은 예수님의 능력을 수단화하는 것으로, 이 역시 십자가를 부정하는 신앙입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그 사역과 그 교훈을 합리적으로 설명한 나머지 하나의 이상주의적 합리주의에 빠지고 맙니다. 이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이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십자가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기피하고, 십자가를 부인하는 신학이 교회를 죽입니다.

오늘날도 보십시오. 유럽에 가보면 크고 오래된 예배당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에 비하여 교인의 수는 터무니없이 적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기독교의 복음을 철학화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을 생명적인 십자가의 복음으로 밀고 나가지 못하고, 어느 사이에 합리화하고 철학화하면서 관념에 빠져버리고 인도주의에 빠져들면서 교회가 죽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르틴 루터는 하이델베르크 논쟁에서 당시 가톨릭의 스콜라 신학을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이라고, 자기 자신의 신학을 '십자가의 신학(theologia crucis)'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십자가가 그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종교의 가장 큰 위험은 바로 혼합주의에 있습니다. 오늘날도 보면 합리적으로 생각한다 하는 사람들, 기독교인들에게 왜 너희들만 잘 믿는다고 하느냐며 불평합니다. 합리적으로는 기독교도 좋고 불교도 좋고 유교도 좋고 다른 종교도 좋다, 다만 내가 기독교를 믿으니 기독교가 조금 더 좋다고 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당치도 않은 소리입니다. 만일에 그렇다면 기독교에는 순교가 필요 없습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혼합주의는 상대주의에서 나오는 것이요, 상대주의는 인본주의입니다. 인본주의는 기독교를 파괴하는 것이요 무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복음은 절대화하여야 합니다. 한치의 양보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이 십자가의 신앙만을 지키고 밀고 나가야 합니다. 혹 이 십자가 신앙이 유대사람에게는 거리끼는 것으로, 헬라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것으로 보였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에게 이 십자가는 능력이요 생명입니다. 여기에 내 지혜의 전부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능력의 실재(實在)를 믿습니까? 복음은 곧 십자가요, 십자가는 곧 신우(神佑)의 은사를 말합니다. 십자가 안에 의롭게 하는 능력이 있어서 우리가 의를 얻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는 능력이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에 충만하게 되고, 성결케 하는 능력이 있어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 안에 승리케 하는 능력이 있어서 우리는 그 구원의 약속을 확실히 믿고 오늘도 승리하게 됩니다. 십자가 안에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철학이 아니요 능력입니다. 다시 한번 본문말씀을 봅시다.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2절)"------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신학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송명희 자매는 신체가 부자유한 분입니다. 걷지도 못하고 말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분입니다. 그분이 「주님의 십자가」라고 하는 시를 우리에게 지어주어서 오늘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내가 내 몸에 부끄러워할 것이 많으나 주님의 십자가는 내 몸의 부끄러움을 모두 가리워주십니다.

내가 연약해 쓰러져 힘을 구할 때에 주님의 십자가는 연약한 나를 도움의 손길로 구원해주십니다.

내가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있을 때에 주님의 십자가는 강건하여 나를 안식하게 하십니다.

내가 죄의 형벌에 쫓겨다닐 때에 주님의 십자가는 나를 용서하시고 피난처가 되시어 숨어 있게 하십니다.

내가 굶주리고 목마를 때에 주님의 십자가는 내게 생명의 떡과 물을 주십니다.

내가 갈 길을 잃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에 주님의 십자가는 나의 길이 되어주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지 못할 때에 주님의 십자가는 내게 지혜를 주십니다.

내게 의가 없을 때에 주님의 십자가는 나의 의가 되어주십니다.

인간의 생명은 영원하지 못하여도 주님의 십자가는 나를 영원히 살게 합니다.'  

종교개혁자의 승리(고린도전서 2:1-5)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남극 탐험으로 유명한 영국의 탐험가 스코트(Scott, Robert F.;1868~1912)는 남극탐험에 성공하고 돌아오는 길에 실종되었습니다. 몇 달이 지난 뒤에 발견된 그의 주검에서 편지가 한 장 나왔습니다. 그가 남긴 마지막 편지에는 '용기, 용기, 용기'라는 말이 씌어 있었습니다. 18세기 영국의 문학․저술가인 사무엘 존슨(Johnson, S.)은 'A man's most precious possession is his courage라고 하여 인간이 지닌 가장 소중한 재산으로 용기를 꼽은 바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참된 용기입니다. 지금 당장 먹을 것이 없는 것도 아니요, 처지가 옛날보다 나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용기가 없습니다. 왜 이렇듯 비겁해지고 초라해졌습니까? 흔히 용기와 담력은 호주머니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경제적 사정이 나아지면 용기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사실 '장사(壯士)도 무일푼이면 무안색(無顔色)'이라는 말도 있듯이 돈이 없으면 초라해지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그러나 돈이 있다고 용기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돈이 진정한 용기의 바탕이 되지는 못합니다.

또한, 지식이 부족해서 용기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는 것만 많으면 용기의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비교적 공부를 많이 한 사람, 남보다 많이 아는 사람이 용기가 더 없습니다. 그 자신 너무나 부족한 것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자신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스스로 점점 더 약해지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때로는 경험이 부족해서 용기가 없다고도 생각합니다. 내가 지금껏 안 해본 일을 하기에, 경험 없는 일을 하기에 용기가 없다고 합니다만, 그실 경험이 많은 일일수록 점점 더 자신이 없어집니다. 오히려 경험도 없고 지식도 없는 사람들이 만용에 가깝도록 마구 뛰어듭니다. 정말로 경험이 있는 사람은 온유하고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용기가 없는 것을 환경 때문이라고도 말합니다. 환경이 너무 어려워서, 주위 사람들이 협력하지 않고 성원하지 않아서 용기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인즉 환경이 아무리 좋아도 용기가 생기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역설적으로, 환경이 어려울 때에 더 큰 용기의 사람이 된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참 용기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진정한 인격적 의지란 도덕성에 있습니다. 죄인은 용기가 없습니다. 양심에 가책되는 일을 많이 한 사람은 비굴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나약함과 시련에 대한 책임을 경제니 지식이니 사회니 환경에 돌리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문제는 죄 때문입니다.

내 죄 때문에 비겁해지는 것입니다. 의롭게 살고, 양심대로 살고, 진실하게 살고, 떳떳하게 살았다면 그렇듯 초라해질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실패했다고 비굴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하다고 초라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도덕적 문제 때문에 사람이 비굴해 지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종교성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됨을 확인하고, 하나님께서 날 성원하시고 하나님께서 내 편만 되어주신다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자신만 있다면 용기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분명히 믿지도 않는 사람, 정말로 하나님께서 계시다면 나는 저주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정도의 사람이라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이웃을 보나 자신을 보나 도저히 일어설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용기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을 단행할 때에 참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어느날, 루터를 몹시도 싫어하는 한 사람이 비아냥거리며 그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교회, 국가, 황제, 그리고 백성들까지, 이렇듯 온 세상이 당신을 반대하고 있소. 이제 당신이 설 땅은 어디 있소?"라고. 이에 루터는 "나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장중(掌中)에 있을 뿐입니다"라고 담담하게 대답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하나님께서 내 편에 서 계시기 때문에 이렇듯 용기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루터는 1521년에 자신의 종교개혁운동을 탄압할 목적으로 열린 보름스(Worms)의회에 소환 당하여 재판을 받았습니다. 황제와 교황을 대리한 재판장은 그에게 신설(新設)의 번복과 25부에 달하는 저서의 취소와 가톨릭 교회에 대한 95개항의 항의서를 철회하도록 요구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화형에 처하겠다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끝내 이에 응하지 않고 추방을 당하게 됩니다. 이 때에 루터는 그 재판장을 향하여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성경과 명백한 이성에 어긋나지 않는 한 나는 아무 것도 철회할 수 없고 철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여기에 확고부동하게 서 있습니다. 나는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와주소서." 'Here I stand, Oh, God!'하나님이여, 나 여기 서 있습니다. 홀로 서 있습니다. 나를 도와주소서-----루터는 생사가 오가는 그 급박한 순간에도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용기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이러한 용기가 개혁자의 용기요, 개혁자의 능력이요, 개혁자의 마음입니다. 본디 개혁이라는 것이 고독한 일입니다. 선구자는 언제나 외롭습니다. 그 앞에는 숱한 난관과 적들이 있습니다.

새로운 일을 하고자 할 때,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고자 할 때에 그 마음은 벌써 저 미래에 가 있기에 현실 안에서는 언제나 외롭고 고독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점을 잊지 말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라고 말씀합니다. 개혁자의 마음은 이미 먼 미래에 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현재가 불합리하게, 불확실하게, 때로는 어리석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생각하지 못하는 세계를 생각하고, 저 먼 미래만을 고독하게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개혁이란 낡은 것, 낡은 것에 속한 것들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과감하게 시정하는 행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옛것을 과감하게 끊어버려야 합니다. 여기에 아픔이 있고 고통이 있습니다.

모름지기 개혁자는 언제나 홀로 결정합니다. 주위 사람의 지지를 받지도, 의논하지도, 성원과 협력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개혁자는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삽니다. 먼훗날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든 상관없습니다. 그러므로 외롭습니다. 많은 난관을 극복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아주 중요한 개인적인 문제는 혼자서 결정하지 않습니까? 누구에게 의논할 것입니까, 누구를 따를 것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홀로 결정하고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적 결단입니다. 바로 여기에 개혁자의 능력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개혁자의 관심은 땅에 있는 것도 아니요 사람의 환심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개혁자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있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에 있습니다. 개혁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외에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려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포기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의 영광은 일찌감치 포기했습니다. 이것이 개혁자의 관심입니다. 나아가 개혁자는 자신의 철학적 용기도 포기했습니다. 지식을 포기하고 인간적 지혜를 완전히 포기해버렸습니다. 다만, 신앙적 용기에 살아갈 뿐입니다.

철학적 용기란 합리적인 것이요 인간적인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신앙적 용기란 역설적인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인 것입니다. 이것이 개혁자의 용기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먼저, 본문말씀의 배경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온세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수 차례 전도 여행을 떠납니다. 제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제 2차 전도여행길에 헬라의 수도 아덴에 들어가게 됩니다. 아덴은 헬라 철학의 본거지입니다. 이곳은 소크라테스를 위시하여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대철학자가 살았던 곳으로, 많은 철학자들의 역사가 숨쉬는 곳입니다. 바로 그곳에 도착하는 순간, 사도 바울의 마음이 이상하게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사도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하여 히브리 종교에 정통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본래 그는 로마에서 태어나 로마시민권까지 지닌 터이라 헬라 철학에도 능통합니다. 그런 그가 아덴에 도착하자 그 철학적 사고가 다시 그의 생각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지닌 철학적 지식을 그곳의 헬라 철학자들과 비교해보고, 자신이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고, 나아가서는 헬라철학적 약점을 자신이 갖춘 히브리적 종교로 대치하려고도 생각합니다. 여러모로 이렇게 생각해본 나머지 그는 철학적 방법으로 선교를 합니다. 아레오바고에 가서는 철학적 사상을 가지고 변론을 하기도 합니다. 원래의 본분에서 벗어나 전도가 아닌 변론을 했던 것입니다. 철학적으로 토론을 벌였던 것입니다.

철학적 사고를 지닌 채 전도 아닌 변론을 하며 다니던 바울은 그곳에서 '이름모르는 신'이라는 신상이 모셔진 신전을 발견합니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unknown God'가 됩니다. 사실, 우상을 많이 섬기는 사람들은 아주 복잡합니다. 곳곳에 '신'이 있습니다. 나무신, 바다신, 하늘신, 별신…… 가지각색을 섬깁니다.

 

그래도 혹시 빠뜨리는 신이 있어, 그 신이 노여워하여 재앙이라도 내릴까 걱정하여 '이름 모르는 신'이라는 신을 하나 더 만들어놓고 섬기는 것입니다. 일본사람들도 다신교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네들에게는 8백만 정도의 각종 신이 있다고 합니다. 각 신마다 이름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신이 많다고 하더라도 빠뜨리는 신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결국은 '이름 모르는 신'이라고 만들어 놓고 마치 무명용사의 무덤을 찾듯이 여기에 와서 제사를 드린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 '이름 모르는 신' 앞에 서서 궤변을 논합니다. "모르고 섬기는 하나님을 내가 알게 하겠노라"하며 변론을 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이십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어쨌든 사도 바울은 이렇게 시작해서 아덴사람들에게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설명해 나갑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부딪쳐 초점을 잃고 맙니다. 결국 그는 전도에 실패함으로 헬라의 수도 아덴에는 교회를 세우지 못하고 맙니다. 어디를 가든지, 일주일을 머물든 이틀을 머물든 간에, 그 머무는 곳마다 교회를 설립한 위대한 사도 바울이 헬라의 수도 아덴에서는 전도에 실패를 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 큰 핍박도 없었는데 교회를 설립하지 못하고 그만 고린도로 옮겨갑니다. 고린도에 도착한 바울은 완전히 실의에 빠져 더는 전도를 하지 못합니다. 호구지책으로 가지고 있던 기술, 천막을 만들고 깁는 기술로 그 방면의 업자들에게 붙어서 일을 합니다. 이렇듯 나약하게 지내다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나 개인 전도를 하게 됩니다. 그 때에 성령이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성에도 하나님의 백성이 많으니 주저하지 말고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라"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그 명령을 듣고야 복음을 다시 전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그는 고린도에 일 년 반을 거하면서 어렵게 고린도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그 때의 일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을 보세요. 바울은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3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석가 라이트푸드(Lightfood)는 사도 바울이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며 떨었는지 추리를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육신의 병이 있었다(갈 4:13)하니 그 병이 재발을 해서 약해졌는지, 고린도사람들에 비하여 사도 바울이 육체적으로 외모적으로 초라했다(고후 10:10)하니 그래서 약해졌는지, 언변에 능치 못했다(고후 10:10)하니 말을 달변으로 철학자와 같이 잘 하지 못하고 어눌해서 약해졌는지, 심리적으로 고독감을 느꼈다(고전 2:13)하니 그래서 약해졌는지, 혹은 그 자신 핍박을 당할 때에 보호해줄 수 있는 대상이 아무도 없이 무방비상태에 있다고 하는 외로움 때문에 약해졌는지, 그도 아니면 커다란 상업도시인 고린도의 위용과 그 많은 우상의 위협에 눌려 약해졌는지…… 이런저런 추측들을 해봅니다. 그러나 그 모두가 참 원인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실 바울은 그 때에 마음속으로부터 신앙적 위기를 맞았던 것입니다.

신학적 고민에 빠진 것입니다. 철학적 방법으로 전도를 하려다가 결국은 복음을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복음에 변질이 왔습니다. 순수성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 때문에 나약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신앙은 결단을 요구합니다. 은혜 앞에 스스로 하는 결단(de-cision)이 필요합니다. 특별히 바울에게도 세 번의 결단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결단으로 그는 예수님을 핍박하던 사람에서 예수님의 사람으로 변화합니다. 바로 그 결단을 내리는 순간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주로, 하나님으로 섬기는 하나님의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두 번째 결단은 full-time ministry, 다른 일은 전혀 하지 않고 전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온 생을 바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세 번째 결단은 오늘의 본문말씀에 있는 바와 같이 철학적 방법을 완전히 포기하고, 십자가만 믿고 십자가만 의지하고 십자가만 높이고 십자가만 전파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결단을 이렇게 피력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2절)"-----여기서 '작정하다'는 헬라어 원문에 '크리네인'으로 되어 있으며, 이는 '판단하다' 또는 '재판정에서의 결정'을 의미합니다. 중대한 결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매우 의지적인 표현입니다.

여러분, 철학과 신앙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신앙을 위주로 생활한다 하면서도 어느 사이엔가 철학에 기울기를 잘합니다. 인간 지식에 기울이 쉽습니다. 요즘도 보십시오.

많은 신학적 사조 가운데 십자가 없는 신학이 많습니다. 십자가 없는 신앙이 많습니다. 십자가를 부인하는 교인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복 받고 잘살겠다는 기복사상에 빠지는 것이 바로 십자가 없는 신앙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안일하고 평안해지겠다는 안일주의 신앙은 예수님의 능력을 수단화하는 것으로, 이 역시 십자가를 부정하는 신앙입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그 사역과 그 교훈을 합리적으로 설명한 나머지 하나의 이상주의적 합리주의에 빠지고 맙니다. 이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이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십자가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기피하고, 십자가를 부인하는 신학이 교회를 죽입니다.

오늘날도 보십시오. 유럽에 가보면 크고 오래된 예배당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에 비하여 교인의 수는 터무니없이 적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기독교의 복음을 철학화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을 생명적인 십자가의 복음으로 밀고 나가지 못하고, 어느 사이에 합리화하고 철학화하면서 관념에 빠져버리고 인도주의에 빠져들면서 교회가 죽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르틴 루터는 하이델베르크 논쟁에서 당시 가톨릭의 스콜라 신학을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이라고, 자기 자신의 신학을 '십자가의 신학(theologia crucis)'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십자가가 그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종교의 가장 큰 위험은 바로 혼합주의에 있습니다. 오늘날도 보면 합리적으로 생각한다 하는 사람들, 기독교인들에게 왜 너희들만 잘 믿는다고 하느냐며 불평합니다. 합리적으로는 기독교도 좋고 불교도 좋고 유교도 좋고 다른 종교도 좋다, 다만 내가 기독교를 믿으니 기독교가 조금 더 좋다고 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당치도 않은 소리입니다. 만일에 그렇다면 기독교에는 순교가 필요 없습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혼합주의는 상대주의에서 나오는 것이요, 상대주의는 인본주의입니다. 인본주의는 기독교를 파괴하는 것이요 무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복음은 절대화하여야 합니다. 한치의 양보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이 십자가의 신앙만을 지키고 밀고 나가야 합니다. 혹 이 십자가 신앙이 유대사람에게는 거리끼는 것으로, 헬라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것으로 보였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에게 이 십자가는 능력이요 생명입니다. 여기에 내 지혜의 전부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능력의 실재(實在)를 믿습니까? 복음은 곧 십자가요, 십자가는 곧 신우(神佑)의 은사를 말합니다. 십자가 안에 의롭게 하는 능력이 있어서 우리가 의를 얻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는 능력이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에 충만하게 되고, 성결케 하는 능력이 있어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 안에 승리케 하는 능력이 있어서 우리는 그 구원의 약속을 확실히 믿고 오늘도 승리하게 됩니다. 십자가 안에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철학이 아니요 능력입니다. 다시 한번 본문말씀을 봅시다.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2절)"------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신학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송명희 자매는 신체가 부자유한 분입니다. 걷지도 못하고 말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분입니다. 그분이 「주님의 십자가」라고 하는 시를 우리에게 지어주어서 오늘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내가 내 몸에 부끄러워할 것이 많으나 주님의 십자가는 내 몸의 부끄러움을 모두 가리워주십니다.

내가 연약해 쓰러져 힘을 구할 때에 주님의 십자가는 연약한 나를 도움의 손길로 구원해주십니다.

내가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있을 때에 주님의 십자가는 강건하여 나를 안식하게 하십니다.

내가 죄의 형벌에 쫓겨다닐 때에 주님의 십자가는 나를 용서하시고 피난처가 되시어 숨어 있게 하십니다.

내가 굶주리고 목마를 때에 주님의 십자가는 내게 생명의 떡과 물을 주십니다.

내가 갈 길을 잃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에 주님의 십자가는 나의 길이 되어주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지 못할 때에 주님의 십자가는 내게 지혜를 주십니다.

내게 의가 없을 때에 주님의 십자가는 나의 의가 되어주십니다.

인간의 생명은 영원하지 못하여도 주님의 십자가는 나를 영원히 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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