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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살아 있는 말씀(히브리서 4장 12절~16절)

by 【고동엽】 2023.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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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말씀(히브리서 4장 12절~16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한 남편이 아내가 집을 비운 사이에 슬그머니 부엌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벽에 걸려 있는 메모판에 큼직한 종이가 한 장 붙어 있는 것이 눈이 띕니다. 가까이 다가가 읽어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하나, 내일 아침 목사님 심방 오심. 둘, 성경에 먼지 털어놓을 것.'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보십시다. 교인 가정을 심방해보면 목사님을 맞이한다 하여 여러 가지 준비로 분주합니다마는 정작 성경책은 미리 챙겨놓지 못합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금방 찾지도 못할 뿐더러 찾았다 해도 잔뜩 앉은 먼지를 툭툭 털면서 가지고 나옵니다. 참 마음이 아닙니다. 신학자 본회퍼는 그의 저서 「윤리」 가운데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좋은 말씀(good words)도 아니고, 옳은 말씀(right words)도 아니고, 아름다운 말씀(beautiful words)도 아니고, 재미있는 말씀(interesting words)도 아니다. 이것은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s) 이다.'

제가 신학대학을 다닐 즈음은 전쟁 직후여서 기숙사는 말만 기숙사지 거의 피난민수용소와 흡사했습니다. 방 하나에 열 여덟 명의 학생이 부비고 들어가서 자고 공부하고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같은 방 친구 하나가 새벽기도회에서 돌아와 큰 소리로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건말건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실인즉 약간은 방해가 되었습니다마는 성경을 읽는 것이니 말릴 수가 없기에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한참동안 큰 소리로 야고보서를 읽고 성경을 덮더니 무릎을 탁 치면서 하는 말이 "참 잘 썼다"입니다. 여러분은 성경말씀을 읽고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옳은 말씀이지. 그렇고 말고' ---- 이렇게 보십니까? 아니면 '참 귀한 말씀이다, 좋은 말씀이다, 재미있는 말씀이다'----이렇게 보십니까? 그러나 이렇게들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성경은 살아 있는 말씀이다' '바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 내 마음속에 이렇게 다가올 때부터 나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신학자 칼 바르트의 신학 주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입니다. 그의 저서에는 이 말이 수 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이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살아 있는 그리스도 그분이 바로 말씀이다----이것이 첫째 입니다. 둘째는 케리그마(Kerygma)입니다. 초대교회 시절, 제자들을 통해서 선포된 말씀을 의미합니다. 기독교의 특징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느 누가 깨달은 진리가 아닙니다. 경험한 바를 증거 합니다. 말씀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증거하는 것입니다. 증거--witness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주께서 보이시고, 주께서 행하시고, 주께서 죽으시고, 주께서 부활하신 것을 제자들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듣습니다. 몸소 체험한 것입니다. 그 체험한 바를 순교적인 생활을 통하여 그대로 증거 합니다. 증거되는 그 내용이 케리그마입니다. 셋째는 기록입니다. 증거되는 내용이 기록됩니다. 기록된 계시의 말씀입니다. 그런고로 칼 바르트는 이렇게 정리해서 말합니다. 'The words of God waits for us in the Bible.'----'하나님의 말씀이 성경 안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하나님의 말씀, 이의 개념은 아주 중요합니다. 육신으로 나타났고 선포되었고, 성경 안에서 오늘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살아서 역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증거입니다.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한 젊은이가 성경을 하도 열심히 보기에 좀 유식하다고 자처하는 교만한 다른 젊은이가 빈정거리듯이 그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뭘 안다고 그리 성경을 열심히 보는가?"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오." "그래? 그러면 그 책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임을 아는가?" "내가 성경을 읽어 가는 동안 성경이 나에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오." 아주 간단하게 대답합니다. 성경 그 자체가 나에게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언젠가 영국의 유명한 어느 저널리스트가 국회의원, 변호사, 의사, 교수 등 소위 지성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앙케트를 하나 냈습니다. 그 설문은 이렇습니다. '당신이 만약 3년 동안 감옥에 갈 일이 있다면 가지고 들어가서 읽고 싶은 책은 무슨 책인가? 세 권만 소개하라.' 결과가 어떠했겠습니까? 응답자의 98퍼센트가 가장 먼저 성경을 꼽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내가 지금 감옥에 있다고 해봅시다. 무슨 책을 읽어야 하겠습니까? 성경밖에는 없습니다. 저는 늘 저를 키워주신 할아버지나 어머니나 집안 식구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저에게는 외삼촌이 계셨는데 그분은 피난을 내려와 의사로 평생을 사신 분입니다. 늘그막에는 무의촌에 내려가서 주민들을 진료하면서 보내셨습니다. 장로님이었는데 아흔 둘의 연세로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몸소 환자들을 돌보셨습니다. 제가 그분에게 받은 인상은 항상 과묵하다는 것입니다. 통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친구들이 찾아오면 '오늘은 몇 마디 했는가'하고 물을 정도였습니다. 그럴 정도로 말이 없으셨습니다. 그런가하면 손에서 책을 놓는 법이 없으셨습니다. 응접실에도 진찰실에도 책이 그득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찾아뵐 때마다 '참으로 책을 많이 보시는 분이다'하고 생각하곤 했는데, 어느 날 가보니 책이 한 권도 보이지 않습니다. 모조리 치워져 있었습니다. 단지 진찰실 책상 위에 큼지막한 글씨로 씌어진 성경책만 한 권 놓여 있을 뿐입니다. "책은 다 어떻게 하셨습니까?"하고 제가 물었습니다. 그때 대답하시는 말씀이 참 의미심장합니다. "나이 여든이 넘으니 이제는 어떤 책도 필요가 없구나. 신문을 읽거나 뉴스를 들을 필요도 없다. 이제 내가 읽어야 할 책은 오직 이 성경뿐이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나이 쉰이 넘은 분들은 생각을 바로해야 합니다. 이 책 저 책 읽어보았댔자 기억에 남지도 않습니다.

이제 내가 읽어야 할 책은 오로지 성경뿐입니다. 내가 가까이해야 할 것은 성경이요 내 마음에 담아야 할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뿐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혹 내 기억이 희미해질 때에라도 하나님의 말씀만은 반드시 생각이 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내 운명을 걸고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성경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다고 합니다.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글 자체가 살아 있습니다. 죽은 글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글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고 성령이 살아 역사 하시고 성경이 살아서 역사 합니다. 항상 현재적으로 생명적으로 역사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오늘도 살아서 내게 말씀합니다.

누구에게나 개별적으로 현재적으로 말씀하는 것이 성경의 특징입니다. 우리가 읽는 것은 비록 아브라함의 이야기지만 그 이야기를 통하여 내게 말씀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2천 년 전의 사건이지만 마음문을 열고 기도하면 읽는 사람의 마음 속에 언제나 현재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실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선포된 말씀, 기록된 말씀이 살아서 역사한다는 것을 우리가 체험하게 됩니다. 또한 이 말씀은 살리시는 능력을 가지고 역사합니다.

저는 이번 여행에서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 선교하기로 결심하고 이미 시작한 어느 목사님 한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독일 함부르크에서 모스크바를 향해 떠나오면서 러시아어로 씌어진 성경 세 권을 사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찮아 더는 살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도착하자마자 그는 모스크바대학 정문으로 가서 막 나오는 청년 하나를 붙들고 그 성경을 건네주었습니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청년은 묵묵히 성경을 받아들고 가더라는 것입니다. 다음날 다시 그 자리에 서 있는데 어제의 그 청년이 영어를 할 줄 아는 친구를 데리고 와서 말하더랍니다. "어제 밤새껏 이 책을 읽어보았습니다. 이렇게 귀한 책은 처음입니다. 너무 좋은 책이라 이 사랑하는 친구에게도 주고 싶습니다. 한 권 더 주실 수 있습니까?" 그래서 가지고 있던 성경을 마저 주었다고 합니다. 성경 3천 권이 필요하다고 합니다마는 가만히 계산해보니 엄청난 비용이어서 '차차 생각 좀 해보자' 하고는 그냥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말씀은 읽는 순간에 그 사람의 마음을 변하게 합니다. 공산주의 이념 속에서 자라난 모스크바의 청년인데도 하룻밤 사이에 마음이 변하지 않습니까? 마음이 바꾸어집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사람을 살리시는 말씀입니다. 읽는 사람에게 지식을 주고 지혜를 주고 능력과 용기를 줍니다마는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생명을 준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살리시는 말씀입니다.

말씀은 운동력이 있습니다. 살아서 역사할 뿐더러 살리시고 성장케 하시고 승리케 하십니다. 생명은 언제나 사망과 더불어 싸웁니다. 오늘도 우리는 음식을 먹습니다. 모든 음식에는 다 독소가 들어 있습니다. 모름지기 내게 그 독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을 때에야 그 음식이 내게 유익하게 됩니다. 의사들의 말에 따르면 우리 몸을 흐르고 있는 피 속에는 끊임없이 싸움이 진행되고 있다고 합니다. 몸에 해로운 병균이 들어왔을 때, 임파구가 나서서 싸워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백혈구가 이기지 못하고 지고 말면 병에 걸리고 마지막에는 죽고 맙니다. 이와같이 생명은 사망과 더불어 끊임없이 싸웁니다. 이 전쟁은 어디에서나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죄와 싸우고 불신앙과 싸우고 절망과 싸웁니다. 생명의 말씀이 공급되지 않으면 이길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허망해져본 적이 있습니까? 해서는 안될 말을 했습니까? 깜짝 놀랄 행동을 했습니까? 다시한번 생각해보십시다. 그 이유는 내 입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기 때문이요, 내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리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요, 인간 지식이나 내 의지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에 벌써 마귀가 나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내 입이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내 눈이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고, 내 마음에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계셔서 내 마음을 주관하고 계실 때에만 죄를 이기고, 나를 이기고,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나아가 악령의 역사를 이길 수 있습니다.

흔히 교회개혁에서 두 기둥을 꼽습니다. 하나는 아우구스티누스요, 또하나는 마르틴 루터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본디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 사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탕아였다고 말합니다마는 따지고보면 그렇지만도 않았습니다. 그는 마니교 철학에 심취한 자로서 타락은 했으되 철학적으로 타락한 사람이었습니다. 옳다고 생각하고 방탕했습니다. 철저하게 의식적으로 타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펴보라' 하시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13장 12절로 13절을 읽으면서 비로소 중생하게 됩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 이 구절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강력하게 받아들이면서 마침내 완전히 방탕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으며,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죄의 고민으로 인하여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괴로워하던 마르틴 루터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는 한 사람의 수도사로서 오랜 수도생활에서도 전혀 해결할 수 없었던 죄의 문제를 말씀 가운데에서 해결합니다. 로마서 1장 17절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는, 수없이 읽어온 이 말씀이 어느 날 새삼스럽게 그의 마음에 강하게 다가왔습니다. 마침내 그는 이 말씀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게 되고 종교개혁을 단행하게 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이 말씀을 의지하고, 이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편 말씀은 심판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모든 것을 딱 자르고 분석합니다. 신학적으로 분석하여 우리 영혼의 그릇됨을 예리하게 잘라냅니다. 수술해버립니다. 거짓된 위선, 율법주의, 가장된 바리새주의, 그릇된 심령을 강하게 비판해버립니다. 또한 의사와도 같이 우리의 육체와 관절과 골수도 찔러서 해부해버립니다. 사실 말씀에 강한 은혜를 받아서 병든 사람이 건강해지고 육체가 새롭게 되는 체험을 우리가 얼마든지 겪고 보지 않습니까? 심리학적으로도 우리의 마음을 비판하십니다. 마음과 생각을 감찰하십니다. 우리의 감정을 날카롭게 비판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치유하십니다.

본문 13절에 "드러나느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드러난다는 이 말은 헬라어 원문대로 보면 '짐승의 가죽을 벗기듯이'라는 뜻이 됩니다. 짐승의 가죽을 벗기는 것처럼 우리의 모든 더러운 것들을 다 벗겨버려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모습으로 드러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을 읽는 동안에는 교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든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인 아닌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를 비판할 수도, 사랑하지 아니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 그 사랑에만 의존하게 됩니다. 그릇된 사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도 악한 사람과 폭력을 숱하게 보면서 '사람이 저럴 수가 있을까' 합니다마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있을 때에는 충분히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철학,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사회학,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인간학이 사람을 이토록 무섭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도덕이란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저는 주로 동구권을 돌아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주교들과도 만나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특히 동․서 독일을 유심히 비교해보았습니다. 동독과 서독, 같은 독일입니다. 독일사람들은 부지런하고 진실하기로 유명합니다.

독일사람들이 만든 물건이라면 일단 믿지 않습니까? 그만큼 신실한 국민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라는 이념 때문에 동독은 40여 년 동안 아주 나빠지고 말았습니다. 주교들은 이 점에 대해서 모두 한가지 생각입니다. 이들은 공산주의 때문에 가난하게 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가장 중요한 인간성이 상실되고 파괴되었다고 말합니다.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하고 한탄합니다. 가난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동독이 사회주의 국가였을 때에는 실업자가 없었습니다. 이제 통일이 되어 자유로워지고 보니 실업자가 몇만 명씩이나 늘어나 참으로 큰일이라고 걱정들이 대단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있는 주교들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전에는 한 가지 일을 하는데 열 사람이 동원되었다고 합시다. 물론 실업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책임감이 없어서 생산품이 엉망입니다. 물건이 제대로 생산되지 못합니다. 이제는 열 사람이 하던 일을 한 사람이 합니다. 아홉 명의 실업자가 생겼습니다. 그들은 이 사회가 당분간은 고생 좀 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그 동안 너무 무책임한 사회가 되어버렸다는 것이지요. 아무튼 동독, 얼마나 가난하고 어렵게 사는지 모릅니다.

그런가하면 서독의 경우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벤츠며 BMW같은 고급 차들이 거리에 즐비한데 동독 쪽의 차는 얼마나 안좋은지 마치 경운기 같습니다. 오죽하면 탈 때마다 경운기라 했겠습니까? 하여간 덜컹덜컹하는 것이 자동차라 할 수조차 없습니다. 매연도 얼마나 심한지 눈을 뜰 수가 없습니다. 자, 같은 독일이 어떻게 이리도 다르게 되었습니까? 사상이란 이처럼 무서운 것입니다. 한번은 어느 목사님 댁에 초대를 받아서 갔는데 잘 대접하겠다고 하여 차린 음식이 마른 빵 몇 가지와 토마토 몇 개, 치즈 서너 조각이 전부입니다. 가만히 보니 먹어야 할 사람은 많습니다. 제가 몇 조각 더 먹었다가는 굶을 사람이 있겠습니다. 그래서 몇 쪽 먹는 체하다가 '다 먹었습니다'하고는 물러앉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배고픈 여행은 처음이었습니다. 참 비참합니다. 피난민수용소가 따로 없습디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의아합니다. 사회주의 40년에 이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가 막힙니다. 같은 독일인데 어찌 이리도 다를 수가 있습니까? 전적으로 사상 때문입니다. '사상'이 이토록 무섭습니다.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빠져나가는 순간에 전혀 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국․공립학교에서도 성경을 가르치라고 한답니다. 사람을 바꾸어 놓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경을 가르치기는 해야 되겠는데 성경책도 없고 가르칠 선생도 없어 또 문제라고 합니다. 그곳뿐만 아니라 문이 열린 공산국가들은 거의가 가르칠 선생이 없어 쩔쩔매는 형편입니다. 여러분,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할 자리에 이상한 사상이 들어가면 그 꼴이 되고 맙니다. 특히 무신론이 들어가서 이렇게 되었다고 저들은 한결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만이 문제의 해결입니다. 말씀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만이 죄를 깨우치며, 영혼을 변화시키며, 양심을 밝게 하며, 이성을 깨끗하게 만들며, 몸도 사회도 바르게 개혁해 나갈 수 있습니다. 이를 가리켜 '뉴 휴머니제이션(New humanization)'--새로운 인간화 운동이라고 합니다. 이는 오직 복음 안에서 이루어지고 말씀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굳게 잡을지어다(14절)." 말씀은 자유 합니다.

디모데후서 2장 9절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와 같이 살아서 역사 합니다. 말씀은 오늘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에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영접하고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을 섬겨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는 바로 그 순간에도 말씀이 우리를 주님 앞으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살아 있는 말씀(히브리서 4장 12절~16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한 남편이 아내가 집을 비운 사이에 슬그머니 부엌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벽에 걸려 있는 메모판에 큼직한 종이가 한 장 붙어 있는 것이 눈이 띕니다. 가까이 다가가 읽어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하나, 내일 아침 목사님 심방 오심. 둘, 성경에 먼지 털어놓을 것.'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보십시다. 교인 가정을 심방해보면 목사님을 맞이한다 하여 여러 가지 준비로 분주합니다마는 정작 성경책은 미리 챙겨놓지 못합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금방 찾지도 못할 뿐더러 찾았다 해도 잔뜩 앉은 먼지를 툭툭 털면서 가지고 나옵니다. 참 마음이 아닙니다. 신학자 본회퍼는 그의 저서 「윤리」 가운데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좋은 말씀(good words)도 아니고, 옳은 말씀(right words)도 아니고, 아름다운 말씀(beautiful words)도 아니고, 재미있는 말씀(interesting words)도 아니다. 이것은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s) 이다.'

제가 신학대학을 다닐 즈음은 전쟁 직후여서 기숙사는 말만 기숙사지 거의 피난민수용소와 흡사했습니다. 방 하나에 열 여덟 명의 학생이 부비고 들어가서 자고 공부하고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같은 방 친구 하나가 새벽기도회에서 돌아와 큰 소리로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건말건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실인즉 약간은 방해가 되었습니다마는 성경을 읽는 것이니 말릴 수가 없기에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한참동안 큰 소리로 야고보서를 읽고 성경을 덮더니 무릎을 탁 치면서 하는 말이 "참 잘 썼다"입니다. 여러분은 성경말씀을 읽고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옳은 말씀이지. 그렇고 말고' ---- 이렇게 보십니까? 아니면 '참 귀한 말씀이다, 좋은 말씀이다, 재미있는 말씀이다'----이렇게 보십니까? 그러나 이렇게들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성경은 살아 있는 말씀이다' '바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 내 마음속에 이렇게 다가올 때부터 나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신학자 칼 바르트의 신학 주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입니다. 그의 저서에는 이 말이 수 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이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살아 있는 그리스도 그분이 바로 말씀이다----이것이 첫째 입니다. 둘째는 케리그마(Kerygma)입니다. 초대교회 시절, 제자들을 통해서 선포된 말씀을 의미합니다. 기독교의 특징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느 누가 깨달은 진리가 아닙니다. 경험한 바를 증거 합니다. 말씀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증거하는 것입니다. 증거--witness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주께서 보이시고, 주께서 행하시고, 주께서 죽으시고, 주께서 부활하신 것을 제자들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듣습니다. 몸소 체험한 것입니다. 그 체험한 바를 순교적인 생활을 통하여 그대로 증거 합니다. 증거되는 그 내용이 케리그마입니다. 셋째는 기록입니다. 증거되는 내용이 기록됩니다. 기록된 계시의 말씀입니다. 그런고로 칼 바르트는 이렇게 정리해서 말합니다. 'The words of God waits for us in the Bible.'----'하나님의 말씀이 성경 안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하나님의 말씀, 이의 개념은 아주 중요합니다. 육신으로 나타났고 선포되었고, 성경 안에서 오늘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살아서 역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증거입니다.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한 젊은이가 성경을 하도 열심히 보기에 좀 유식하다고 자처하는 교만한 다른 젊은이가 빈정거리듯이 그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뭘 안다고 그리 성경을 열심히 보는가?"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오." "그래? 그러면 그 책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임을 아는가?" "내가 성경을 읽어 가는 동안 성경이 나에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오." 아주 간단하게 대답합니다. 성경 그 자체가 나에게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언젠가 영국의 유명한 어느 저널리스트가 국회의원, 변호사, 의사, 교수 등 소위 지성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앙케트를 하나 냈습니다. 그 설문은 이렇습니다. '당신이 만약 3년 동안 감옥에 갈 일이 있다면 가지고 들어가서 읽고 싶은 책은 무슨 책인가? 세 권만 소개하라.' 결과가 어떠했겠습니까? 응답자의 98퍼센트가 가장 먼저 성경을 꼽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내가 지금 감옥에 있다고 해봅시다. 무슨 책을 읽어야 하겠습니까? 성경밖에는 없습니다. 저는 늘 저를 키워주신 할아버지나 어머니나 집안 식구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저에게는 외삼촌이 계셨는데 그분은 피난을 내려와 의사로 평생을 사신 분입니다. 늘그막에는 무의촌에 내려가서 주민들을 진료하면서 보내셨습니다. 장로님이었는데 아흔 둘의 연세로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몸소 환자들을 돌보셨습니다. 제가 그분에게 받은 인상은 항상 과묵하다는 것입니다. 통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친구들이 찾아오면 '오늘은 몇 마디 했는가'하고 물을 정도였습니다. 그럴 정도로 말이 없으셨습니다. 그런가하면 손에서 책을 놓는 법이 없으셨습니다. 응접실에도 진찰실에도 책이 그득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찾아뵐 때마다 '참으로 책을 많이 보시는 분이다'하고 생각하곤 했는데, 어느 날 가보니 책이 한 권도 보이지 않습니다. 모조리 치워져 있었습니다. 단지 진찰실 책상 위에 큼지막한 글씨로 씌어진 성경책만 한 권 놓여 있을 뿐입니다. "책은 다 어떻게 하셨습니까?"하고 제가 물었습니다. 그때 대답하시는 말씀이 참 의미심장합니다. "나이 여든이 넘으니 이제는 어떤 책도 필요가 없구나. 신문을 읽거나 뉴스를 들을 필요도 없다. 이제 내가 읽어야 할 책은 오직 이 성경뿐이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나이 쉰이 넘은 분들은 생각을 바로해야 합니다. 이 책 저 책 읽어보았댔자 기억에 남지도 않습니다.

이제 내가 읽어야 할 책은 오로지 성경뿐입니다. 내가 가까이해야 할 것은 성경이요 내 마음에 담아야 할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뿐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혹 내 기억이 희미해질 때에라도 하나님의 말씀만은 반드시 생각이 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내 운명을 걸고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성경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다고 합니다.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글 자체가 살아 있습니다. 죽은 글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글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고 성령이 살아 역사 하시고 성경이 살아서 역사 합니다. 항상 현재적으로 생명적으로 역사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오늘도 살아서 내게 말씀합니다.

누구에게나 개별적으로 현재적으로 말씀하는 것이 성경의 특징입니다. 우리가 읽는 것은 비록 아브라함의 이야기지만 그 이야기를 통하여 내게 말씀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2천 년 전의 사건이지만 마음문을 열고 기도하면 읽는 사람의 마음 속에 언제나 현재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실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선포된 말씀, 기록된 말씀이 살아서 역사한다는 것을 우리가 체험하게 됩니다. 또한 이 말씀은 살리시는 능력을 가지고 역사합니다.

저는 이번 여행에서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 선교하기로 결심하고 이미 시작한 어느 목사님 한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독일 함부르크에서 모스크바를 향해 떠나오면서 러시아어로 씌어진 성경 세 권을 사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찮아 더는 살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도착하자마자 그는 모스크바대학 정문으로 가서 막 나오는 청년 하나를 붙들고 그 성경을 건네주었습니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청년은 묵묵히 성경을 받아들고 가더라는 것입니다. 다음날 다시 그 자리에 서 있는데 어제의 그 청년이 영어를 할 줄 아는 친구를 데리고 와서 말하더랍니다. "어제 밤새껏 이 책을 읽어보았습니다. 이렇게 귀한 책은 처음입니다. 너무 좋은 책이라 이 사랑하는 친구에게도 주고 싶습니다. 한 권 더 주실 수 있습니까?" 그래서 가지고 있던 성경을 마저 주었다고 합니다. 성경 3천 권이 필요하다고 합니다마는 가만히 계산해보니 엄청난 비용이어서 '차차 생각 좀 해보자' 하고는 그냥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말씀은 읽는 순간에 그 사람의 마음을 변하게 합니다. 공산주의 이념 속에서 자라난 모스크바의 청년인데도 하룻밤 사이에 마음이 변하지 않습니까? 마음이 바꾸어집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사람을 살리시는 말씀입니다. 읽는 사람에게 지식을 주고 지혜를 주고 능력과 용기를 줍니다마는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생명을 준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살리시는 말씀입니다.

말씀은 운동력이 있습니다. 살아서 역사할 뿐더러 살리시고 성장케 하시고 승리케 하십니다. 생명은 언제나 사망과 더불어 싸웁니다. 오늘도 우리는 음식을 먹습니다. 모든 음식에는 다 독소가 들어 있습니다. 모름지기 내게 그 독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을 때에야 그 음식이 내게 유익하게 됩니다. 의사들의 말에 따르면 우리 몸을 흐르고 있는 피 속에는 끊임없이 싸움이 진행되고 있다고 합니다. 몸에 해로운 병균이 들어왔을 때, 임파구가 나서서 싸워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백혈구가 이기지 못하고 지고 말면 병에 걸리고 마지막에는 죽고 맙니다. 이와같이 생명은 사망과 더불어 끊임없이 싸웁니다. 이 전쟁은 어디에서나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죄와 싸우고 불신앙과 싸우고 절망과 싸웁니다. 생명의 말씀이 공급되지 않으면 이길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허망해져본 적이 있습니까? 해서는 안될 말을 했습니까? 깜짝 놀랄 행동을 했습니까? 다시한번 생각해보십시다. 그 이유는 내 입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기 때문이요, 내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리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요, 인간 지식이나 내 의지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에 벌써 마귀가 나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내 입이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내 눈이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고, 내 마음에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계셔서 내 마음을 주관하고 계실 때에만 죄를 이기고, 나를 이기고,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나아가 악령의 역사를 이길 수 있습니다.

흔히 교회개혁에서 두 기둥을 꼽습니다. 하나는 아우구스티누스요, 또하나는 마르틴 루터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본디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 사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탕아였다고 말합니다마는 따지고보면 그렇지만도 않았습니다. 그는 마니교 철학에 심취한 자로서 타락은 했으되 철학적으로 타락한 사람이었습니다. 옳다고 생각하고 방탕했습니다. 철저하게 의식적으로 타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펴보라' 하시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13장 12절로 13절을 읽으면서 비로소 중생하게 됩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 이 구절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강력하게 받아들이면서 마침내 완전히 방탕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으며,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죄의 고민으로 인하여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괴로워하던 마르틴 루터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는 한 사람의 수도사로서 오랜 수도생활에서도 전혀 해결할 수 없었던 죄의 문제를 말씀 가운데에서 해결합니다. 로마서 1장 17절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는, 수없이 읽어온 이 말씀이 어느 날 새삼스럽게 그의 마음에 강하게 다가왔습니다. 마침내 그는 이 말씀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게 되고 종교개혁을 단행하게 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이 말씀을 의지하고, 이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편 말씀은 심판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모든 것을 딱 자르고 분석합니다. 신학적으로 분석하여 우리 영혼의 그릇됨을 예리하게 잘라냅니다. 수술해버립니다. 거짓된 위선, 율법주의, 가장된 바리새주의, 그릇된 심령을 강하게 비판해버립니다. 또한 의사와도 같이 우리의 육체와 관절과 골수도 찔러서 해부해버립니다. 사실 말씀에 강한 은혜를 받아서 병든 사람이 건강해지고 육체가 새롭게 되는 체험을 우리가 얼마든지 겪고 보지 않습니까? 심리학적으로도 우리의 마음을 비판하십니다. 마음과 생각을 감찰하십니다. 우리의 감정을 날카롭게 비판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치유하십니다.

본문 13절에 "드러나느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드러난다는 이 말은 헬라어 원문대로 보면 '짐승의 가죽을 벗기듯이'라는 뜻이 됩니다. 짐승의 가죽을 벗기는 것처럼 우리의 모든 더러운 것들을 다 벗겨버려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모습으로 드러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을 읽는 동안에는 교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든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인 아닌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를 비판할 수도, 사랑하지 아니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 그 사랑에만 의존하게 됩니다. 그릇된 사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도 악한 사람과 폭력을 숱하게 보면서 '사람이 저럴 수가 있을까' 합니다마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있을 때에는 충분히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철학,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사회학,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인간학이 사람을 이토록 무섭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도덕이란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저는 주로 동구권을 돌아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주교들과도 만나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특히 동․서 독일을 유심히 비교해보았습니다. 동독과 서독, 같은 독일입니다. 독일사람들은 부지런하고 진실하기로 유명합니다.

독일사람들이 만든 물건이라면 일단 믿지 않습니까? 그만큼 신실한 국민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라는 이념 때문에 동독은 40여 년 동안 아주 나빠지고 말았습니다. 주교들은 이 점에 대해서 모두 한가지 생각입니다. 이들은 공산주의 때문에 가난하게 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가장 중요한 인간성이 상실되고 파괴되었다고 말합니다.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하고 한탄합니다. 가난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동독이 사회주의 국가였을 때에는 실업자가 없었습니다. 이제 통일이 되어 자유로워지고 보니 실업자가 몇만 명씩이나 늘어나 참으로 큰일이라고 걱정들이 대단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있는 주교들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전에는 한 가지 일을 하는데 열 사람이 동원되었다고 합시다. 물론 실업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책임감이 없어서 생산품이 엉망입니다. 물건이 제대로 생산되지 못합니다. 이제는 열 사람이 하던 일을 한 사람이 합니다. 아홉 명의 실업자가 생겼습니다. 그들은 이 사회가 당분간은 고생 좀 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그 동안 너무 무책임한 사회가 되어버렸다는 것이지요. 아무튼 동독, 얼마나 가난하고 어렵게 사는지 모릅니다.

그런가하면 서독의 경우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벤츠며 BMW같은 고급 차들이 거리에 즐비한데 동독 쪽의 차는 얼마나 안좋은지 마치 경운기 같습니다. 오죽하면 탈 때마다 경운기라 했겠습니까? 하여간 덜컹덜컹하는 것이 자동차라 할 수조차 없습니다. 매연도 얼마나 심한지 눈을 뜰 수가 없습니다. 자, 같은 독일이 어떻게 이리도 다르게 되었습니까? 사상이란 이처럼 무서운 것입니다. 한번은 어느 목사님 댁에 초대를 받아서 갔는데 잘 대접하겠다고 하여 차린 음식이 마른 빵 몇 가지와 토마토 몇 개, 치즈 서너 조각이 전부입니다. 가만히 보니 먹어야 할 사람은 많습니다. 제가 몇 조각 더 먹었다가는 굶을 사람이 있겠습니다. 그래서 몇 쪽 먹는 체하다가 '다 먹었습니다'하고는 물러앉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배고픈 여행은 처음이었습니다. 참 비참합니다. 피난민수용소가 따로 없습디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의아합니다. 사회주의 40년에 이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가 막힙니다. 같은 독일인데 어찌 이리도 다를 수가 있습니까? 전적으로 사상 때문입니다. '사상'이 이토록 무섭습니다.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빠져나가는 순간에 전혀 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국․공립학교에서도 성경을 가르치라고 한답니다. 사람을 바꾸어 놓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경을 가르치기는 해야 되겠는데 성경책도 없고 가르칠 선생도 없어 또 문제라고 합니다. 그곳뿐만 아니라 문이 열린 공산국가들은 거의가 가르칠 선생이 없어 쩔쩔매는 형편입니다. 여러분,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할 자리에 이상한 사상이 들어가면 그 꼴이 되고 맙니다. 특히 무신론이 들어가서 이렇게 되었다고 저들은 한결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만이 문제의 해결입니다. 말씀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만이 죄를 깨우치며, 영혼을 변화시키며, 양심을 밝게 하며, 이성을 깨끗하게 만들며, 몸도 사회도 바르게 개혁해 나갈 수 있습니다. 이를 가리켜 '뉴 휴머니제이션(New humanization)'--새로운 인간화 운동이라고 합니다. 이는 오직 복음 안에서 이루어지고 말씀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굳게 잡을지어다(14절)." 말씀은 자유 합니다.

디모데후서 2장 9절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와 같이 살아서 역사 합니다. 말씀은 오늘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에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영접하고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을 섬겨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는 바로 그 순간에도 말씀이 우리를 주님 앞으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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