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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불신 시대의 신앙(마가복음 9 : 14~24)

by 【고동엽】 2023.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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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 시대의 신앙(마가복음 9 : 14~24)

 

어느 날 아침 잘 아는 아주머니 한분이 아파트의 계단을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고, 또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왜 그렇게 오르락내리락 하느냐고 물었더니 아파트의 문을 잠그고 내려왔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안 잠근 것 같기도 하여 확인하기 위해서 세 차례를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아파트의 정문에 수위를 두고도 믿지 못하여 철문을 잠그고, 그 철문을 잠근 자기의 손도 믿지 못하여 몇 번씩 확인을 해야 하며, 또 문잠근 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하루종일 오르락 내리락 하여도 마음이 깨끗하게 놓이지 않는 불안한 세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현대를 가리켜 불신, 불안, 부재의 시대라고 합니다. 믿지 못하기 때문에 불안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불안이란 원인을 알 수 없는 고민이라고들 말을 합니다.

왜 고민하느냐고 물으면 이렇다 하게 뚜렷한 대답을 할 수도 없이 그저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안의 이유는 믿지 못하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을 비롯하여 나 자신까지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불안에 떨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너희와 얼마나 함께 있어야 되겠느냐"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종의 탄식이기도 합니다.

강도가 들었던 집에 수사관을 보냈더니 그 수사관이 도적질을 했다는 기사를 우리가 신문에서 읽었습니다. 정말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세대요 나아가서는 믿어서는 안되는 세대이기도 합니다.

현실에 있어서 우리가 믿지 못하기 때문에 낭비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믿지 못하기 때문에 믿게 하기 위해서 거기에 많은 돈, 많은 시간, 많은 정력을 소비하고 있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도 "의심나면 다시 보고 수상하면 신고하라"고 가르쳐 보았더니 요즘 아이들 모두 이상해졌습니다. 조금만 낯선 곳에서 만나면 반가운 아이가 하나도 없습니다. 아이들이 아래위부터 먼저 훑어보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끝내는 자기 삼촌을 신고한 아이도 생겼습니다. 남의 아이라도 그 천진난만한 모습을 볼 때 좀 안아 주고도 싶고 서로 이야기도 하고 싶지만 수상하다고 신고할 것이니 참으로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이런 상황이 필연적이라고는 하지만 결국은 이 때문에 우리는 지옥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약방에서 감기약을 사온 사람이 1회 정량의 3배를 먹고 죽을 뻔한 사실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정신없는 일을 했느냐니까 약병에 기록된 함량을 믿을 수가 없어서 두둑이 먹은 것이라고 합니다. 불신이 생명에까지 지장을 주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의 일입니다.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공장의 직공들과 같이 수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몇 사람이 시계를 차고 수영을 하기에 깜짝 놀라서 왜 시계를 차고 수영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시계를 보이면서 여기 water proof, "방수"라고 써 있는데 왜 걱정하느냐 면서 나도 수영하고 시계도 수영하고 얼마나 좋은 일이냐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뜨끔하였습니다. 방수라고 쓰여진 그것을 그대로 믿을 수 있는 마음, 시계 백 개를 버리는 한이 있을지라도 그대로 믿을 수 있는 그 깨끗한 마음이 참으로 부러웠습니다.

모름지기 우리 가운데서 그렇게 믿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믿는 사람을 어수룩하고 미련한 사람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방수라고 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 우리의 태도입니다. 믿지 못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도 있겠지만, 아무튼 이러므로써 우리의 생활이 힘들어졌고 살기 어려운 세상이 된 것입니다.

남의 말을 절대로 안 믿는 사람, 이 사람은 똑똑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마지막에 가서 크게 한번 속을 것입니다. 또 지나치게 똑똑하여 남을 잘 믿지 않는 결혼 전의 여자, 그는 노처녀가 되고 맙니다.

사업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안 속는다고 발버둥치다가 제 꾀에 넘어가서 마지막에 크게 실패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 믿지 못하는 결과는 피차 망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믿음이란 우리의 개념으로는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해주는 믿음은 히브리어나 헬라어나 혹은 영어로 보면 신실이라는 개념으로서, 진실하다 충성되다로 번역을 하며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본문을 유의해서 보면 믿음과 의심의 갈등이 잘 나타나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벙어리 귀신 들린 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 귀신은 아이를 잡으면 거품을 흘리게 하고 이를 갈며 파리하게 되며 불 속이나 물 속에 자주 던졌다고 했습니다. 이 아들을 고치기 위하여 아버지는 모든 노력을 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의 효과도 없이 계속 속고 실망한 나머지 예수님께 데리고 왔던 것입니다.

마침 예수님은 변화 산에서 기도하고 계셨고 산밑에는 아홉 명의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은 얼마 전에 귀신을 내어쫓아 본 경험이 있는지라 이 아홉 제자가 차례대로 귀신을 내어쫓으려고 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아이의 아버지는 뭔가 기대를 하고 왔다가 이제 한번 더 낙심하고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 실의에 찬 순간에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 오셔서 왜 이렇게 소란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이 아이의 아버지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였는데 그 마지막 말이 대단히 절망적입니다.

당신의 제자들은 고치지 못했는데 그래도 당신은 스승이니까 혹시 제자들보다 조금 나아서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달라고 하는 반신반의로서 말을 하였습니다.

이 아이의 아버지가 이렇게 말을 하는 데는 상당한 이유가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의심하는 자의 마음도 괴롭지만 의심받는 자의 마음은 더욱 괴로운 것입니다.

책망을 들은 아이의 아버지는 당황하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구하였습니다.

이 말에는 상당한 모순이 있습니다. 믿나이다 라고 하면서도 믿음 없는 것을 도와 달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한 가닥 가냘픈 희망을 바라보는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완전히 믿지 못하는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계속 속아만 왔던 것입니다. 의사에게 속고 무당에게 속고 마지막 예수님의 제자들에게까지 또 한번 속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을 만났는데 이 사람이 예수님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 바로 여기에 그의 고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의심과 불신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은 우리 믿음의 대상을 동일시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백번 속고 실망했다 할지라도 그 불신을 예수님에게까지 보편화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통계적 진리라고 하는 것처럼 무서운 거짓말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아흔 아홉 사람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 사람은 그렇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통계적으로는 이 한 사람까지 보편화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이 보편화(general-ize)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죄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몇 사람에게 속았다고 하여 세상 모든 사람을 믿지 못하거나 또 한 남자에게 배신당했다고 하여 모든 남자를 다 증오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여 아흔 아홉 번 속았다 하더라도 마지막 한번까지 믿어야 합니다. 속을 때 속더라도 속는 그 시간까지는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속는 순간에 가슴을 치더라도 그때까지는 마음이 편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믿음으로써 모든 대상을 향하여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믿음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나로서의 할 일을 다 한 것으로 하나님 앞에 거리낄 것이 없습니다. 속인 상대방이 나쁜 것이지 내가 나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똑똑한 척하고 안 속겠다고 계속 의심하고 불신하다가 꼭 믿어야 할 순간에 믿지 못하여 귀중한 기회를 놓치고 마는 불행을 당해서는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사람은 지금까지 계속 속아 왔습니다.

한 사람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서 만난 예수님만큼은 믿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지 못함으로써 예수님의 책망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 사람 다 못 믿어도 자기만은 믿어야 된다는 것이며, 계속 속아만 왔지만 이제는 믿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복음이 있고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어느 가정에 4대 독자가 있었는데 이 아들을 너무 귀하게 키워서 버릇이 없고 돈의 낭비가 무척 심했습니다. 학비를 받아 가지고 나가서 다른 곳에 다 써 버리고는 부모의 속을 상하게 하고 실망을 시켰던 것입니다. 이 아들이 군에 입대하여 어느 날 휴가를 나왔다가 귀대 시간을 넘겨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부모님께 사정을 했습니다. 귀대 시간을 넘겨서 사정이 어렵게 되었으니 용돈을 좀 많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는 그의 말을 믿어 주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에게까지 찾아왔으나 똑같은 대답으로 믿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대로 부대에 들어가서 많은 기합을 받고는 자살해 버렸습니다. 그야 그 동안 많이 속이고 나쁜 짓을 했으나 마지막 한 마디만은 진실이었습니다. 계속 속았다고 하여 마지막 한 마디까지 믿지 못함으로써 이런 엄청난 불행을 초래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의심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속았다고 의심하고 자기를 믿어주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도 믿지 않고, 배신당했다고 배신하고, 도적 맞았다고 도적질하고, 사람에게 속았다고 하여 하나님까지 의심하며 항상 원수를 원수로 갚는다면 불신의 악순환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속을 셈치고 희생의 제물이 되어 어리석게 믿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새 출발을 해야만 이 불신의 악순환은 끝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계속 의심했지만 한 분 예수님만은 다른 눈으로 보아야 하고 꼭 믿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일반적인 책을 보듯이 성경을 보아서는 안 될 것이며, 세상에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듣던 마음으로 교회에 나와서 설교를 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과거야 어쨌든지 이 한 시간만은 가장 진실한 마음과 전적인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곧 능력인 동시에 모든 일이 가능합니다. 내가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을 수 있고, 또한 나의 처한 현실 이대로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사랑으로 소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은혜를 믿을 때 감사하고, 현재의 은혜를 믿을 때 능력에 살고, 미래의 은혜를 믿을 때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믿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알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우리의 소원대로 되지 않는 것도 많고 답답한 일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대로가 하나님의 축복이요 사랑이며 은총인 줄 믿는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만능의 신앙을 가지신 분입니다. 믿음으로 병자를 고쳤고, 바다 위를 걸어 갔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이런 놀랍도록 위대한 믿음을 가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것은 고린도전서 1:24의 말씀대로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임을 믿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자기가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살 것을 믿었으며, 또한 부활의 아침을 믿었기에 요한복음 18:11 말씀대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이라고 믿고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 앞에 제자들은 몹시 부끄러워졌고 믿음이 없는 세대라는 책망을 들었던 것입니다.

본문 28절에 보면 제자들이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느냐고 조용히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기도 이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산 밑에서 졸고 떠들고 있었으니 기도하지 아니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능력을 행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능력을 행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고 믿음이 지속되어 능력화하기 위해서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믿음을 지켜 나갈 수가 없고, 믿음 없이 능력을 행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기도와 함께 믿음을 얻고, 믿음을 얻을 때에 권세있는 생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믿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음으로 자신을 믿을 수 있고 그리고 이웃과 형제를 믿을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믿음을 심어 나가는 귀한 역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인하여 고생하였으나 그 아픔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또 한번 능력의 사람이 되었고, 자기가 왜 죄인으로서 로마에 호송되어 가는지 몰랐으나 빌립보서 1:12에 보면 이것이 복음 전파의 지름길인 것을 깨닫고 또 한번 하나님께 감사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며 그 사랑 안에 내가 있습니다. 이 확실한 믿음 안에 거할 때 능치 못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불신하지 말고 불신의 시대에 믿음을 심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 믿음 없는 세대에 사는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어서 저희들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시옵소서. 세상 사람들에게 속았다고 하여 한 분 예수님까지도 믿지 못하는 저희들이 되지 않게 해 주시고, 확실한 믿음을 주셔서 이 불신 시대를 믿음의 시대로 바꾸어 나아가서 주님의 거룩하신 뜻에 동참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불신 시대의 신앙(마가복음 9 : 14~24)

 

어느 날 아침 잘 아는 아주머니 한분이 아파트의 계단을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고, 또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왜 그렇게 오르락내리락 하느냐고 물었더니 아파트의 문을 잠그고 내려왔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안 잠근 것 같기도 하여 확인하기 위해서 세 차례를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아파트의 정문에 수위를 두고도 믿지 못하여 철문을 잠그고, 그 철문을 잠근 자기의 손도 믿지 못하여 몇 번씩 확인을 해야 하며, 또 문잠근 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하루종일 오르락 내리락 하여도 마음이 깨끗하게 놓이지 않는 불안한 세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현대를 가리켜 불신, 불안, 부재의 시대라고 합니다. 믿지 못하기 때문에 불안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불안이란 원인을 알 수 없는 고민이라고들 말을 합니다.

왜 고민하느냐고 물으면 이렇다 하게 뚜렷한 대답을 할 수도 없이 그저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안의 이유는 믿지 못하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을 비롯하여 나 자신까지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불안에 떨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너희와 얼마나 함께 있어야 되겠느냐"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종의 탄식이기도 합니다.

강도가 들었던 집에 수사관을 보냈더니 그 수사관이 도적질을 했다는 기사를 우리가 신문에서 읽었습니다. 정말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세대요 나아가서는 믿어서는 안되는 세대이기도 합니다.

현실에 있어서 우리가 믿지 못하기 때문에 낭비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믿지 못하기 때문에 믿게 하기 위해서 거기에 많은 돈, 많은 시간, 많은 정력을 소비하고 있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도 "의심나면 다시 보고 수상하면 신고하라"고 가르쳐 보았더니 요즘 아이들 모두 이상해졌습니다. 조금만 낯선 곳에서 만나면 반가운 아이가 하나도 없습니다. 아이들이 아래위부터 먼저 훑어보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끝내는 자기 삼촌을 신고한 아이도 생겼습니다. 남의 아이라도 그 천진난만한 모습을 볼 때 좀 안아 주고도 싶고 서로 이야기도 하고 싶지만 수상하다고 신고할 것이니 참으로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이런 상황이 필연적이라고는 하지만 결국은 이 때문에 우리는 지옥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약방에서 감기약을 사온 사람이 1회 정량의 3배를 먹고 죽을 뻔한 사실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정신없는 일을 했느냐니까 약병에 기록된 함량을 믿을 수가 없어서 두둑이 먹은 것이라고 합니다. 불신이 생명에까지 지장을 주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의 일입니다.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공장의 직공들과 같이 수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몇 사람이 시계를 차고 수영을 하기에 깜짝 놀라서 왜 시계를 차고 수영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시계를 보이면서 여기 water proof, "방수"라고 써 있는데 왜 걱정하느냐 면서 나도 수영하고 시계도 수영하고 얼마나 좋은 일이냐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뜨끔하였습니다. 방수라고 쓰여진 그것을 그대로 믿을 수 있는 마음, 시계 백 개를 버리는 한이 있을지라도 그대로 믿을 수 있는 그 깨끗한 마음이 참으로 부러웠습니다.

모름지기 우리 가운데서 그렇게 믿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믿는 사람을 어수룩하고 미련한 사람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방수라고 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 우리의 태도입니다. 믿지 못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도 있겠지만, 아무튼 이러므로써 우리의 생활이 힘들어졌고 살기 어려운 세상이 된 것입니다.

남의 말을 절대로 안 믿는 사람, 이 사람은 똑똑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마지막에 가서 크게 한번 속을 것입니다. 또 지나치게 똑똑하여 남을 잘 믿지 않는 결혼 전의 여자, 그는 노처녀가 되고 맙니다.

사업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안 속는다고 발버둥치다가 제 꾀에 넘어가서 마지막에 크게 실패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 믿지 못하는 결과는 피차 망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믿음이란 우리의 개념으로는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해주는 믿음은 히브리어나 헬라어나 혹은 영어로 보면 신실이라는 개념으로서, 진실하다 충성되다로 번역을 하며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본문을 유의해서 보면 믿음과 의심의 갈등이 잘 나타나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벙어리 귀신 들린 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 귀신은 아이를 잡으면 거품을 흘리게 하고 이를 갈며 파리하게 되며 불 속이나 물 속에 자주 던졌다고 했습니다. 이 아들을 고치기 위하여 아버지는 모든 노력을 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의 효과도 없이 계속 속고 실망한 나머지 예수님께 데리고 왔던 것입니다.

마침 예수님은 변화 산에서 기도하고 계셨고 산밑에는 아홉 명의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은 얼마 전에 귀신을 내어쫓아 본 경험이 있는지라 이 아홉 제자가 차례대로 귀신을 내어쫓으려고 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아이의 아버지는 뭔가 기대를 하고 왔다가 이제 한번 더 낙심하고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 실의에 찬 순간에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 오셔서 왜 이렇게 소란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이 아이의 아버지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였는데 그 마지막 말이 대단히 절망적입니다.

당신의 제자들은 고치지 못했는데 그래도 당신은 스승이니까 혹시 제자들보다 조금 나아서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달라고 하는 반신반의로서 말을 하였습니다.

이 아이의 아버지가 이렇게 말을 하는 데는 상당한 이유가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의심하는 자의 마음도 괴롭지만 의심받는 자의 마음은 더욱 괴로운 것입니다.

책망을 들은 아이의 아버지는 당황하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구하였습니다.

이 말에는 상당한 모순이 있습니다. 믿나이다 라고 하면서도 믿음 없는 것을 도와 달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한 가닥 가냘픈 희망을 바라보는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완전히 믿지 못하는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계속 속아만 왔던 것입니다. 의사에게 속고 무당에게 속고 마지막 예수님의 제자들에게까지 또 한번 속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을 만났는데 이 사람이 예수님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 바로 여기에 그의 고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의심과 불신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은 우리 믿음의 대상을 동일시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백번 속고 실망했다 할지라도 그 불신을 예수님에게까지 보편화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통계적 진리라고 하는 것처럼 무서운 거짓말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아흔 아홉 사람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 사람은 그렇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통계적으로는 이 한 사람까지 보편화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이 보편화(general-ize)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죄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몇 사람에게 속았다고 하여 세상 모든 사람을 믿지 못하거나 또 한 남자에게 배신당했다고 하여 모든 남자를 다 증오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여 아흔 아홉 번 속았다 하더라도 마지막 한번까지 믿어야 합니다. 속을 때 속더라도 속는 그 시간까지는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속는 순간에 가슴을 치더라도 그때까지는 마음이 편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믿음으로써 모든 대상을 향하여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믿음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나로서의 할 일을 다 한 것으로 하나님 앞에 거리낄 것이 없습니다. 속인 상대방이 나쁜 것이지 내가 나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똑똑한 척하고 안 속겠다고 계속 의심하고 불신하다가 꼭 믿어야 할 순간에 믿지 못하여 귀중한 기회를 놓치고 마는 불행을 당해서는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사람은 지금까지 계속 속아 왔습니다.

한 사람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서 만난 예수님만큼은 믿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지 못함으로써 예수님의 책망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 사람 다 못 믿어도 자기만은 믿어야 된다는 것이며, 계속 속아만 왔지만 이제는 믿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복음이 있고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어느 가정에 4대 독자가 있었는데 이 아들을 너무 귀하게 키워서 버릇이 없고 돈의 낭비가 무척 심했습니다. 학비를 받아 가지고 나가서 다른 곳에 다 써 버리고는 부모의 속을 상하게 하고 실망을 시켰던 것입니다. 이 아들이 군에 입대하여 어느 날 휴가를 나왔다가 귀대 시간을 넘겨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부모님께 사정을 했습니다. 귀대 시간을 넘겨서 사정이 어렵게 되었으니 용돈을 좀 많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는 그의 말을 믿어 주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에게까지 찾아왔으나 똑같은 대답으로 믿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대로 부대에 들어가서 많은 기합을 받고는 자살해 버렸습니다. 그야 그 동안 많이 속이고 나쁜 짓을 했으나 마지막 한 마디만은 진실이었습니다. 계속 속았다고 하여 마지막 한 마디까지 믿지 못함으로써 이런 엄청난 불행을 초래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의심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속았다고 의심하고 자기를 믿어주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도 믿지 않고, 배신당했다고 배신하고, 도적 맞았다고 도적질하고, 사람에게 속았다고 하여 하나님까지 의심하며 항상 원수를 원수로 갚는다면 불신의 악순환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속을 셈치고 희생의 제물이 되어 어리석게 믿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새 출발을 해야만 이 불신의 악순환은 끝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계속 의심했지만 한 분 예수님만은 다른 눈으로 보아야 하고 꼭 믿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일반적인 책을 보듯이 성경을 보아서는 안 될 것이며, 세상에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듣던 마음으로 교회에 나와서 설교를 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과거야 어쨌든지 이 한 시간만은 가장 진실한 마음과 전적인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곧 능력인 동시에 모든 일이 가능합니다. 내가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을 수 있고, 또한 나의 처한 현실 이대로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사랑으로 소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은혜를 믿을 때 감사하고, 현재의 은혜를 믿을 때 능력에 살고, 미래의 은혜를 믿을 때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믿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알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우리의 소원대로 되지 않는 것도 많고 답답한 일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대로가 하나님의 축복이요 사랑이며 은총인 줄 믿는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만능의 신앙을 가지신 분입니다. 믿음으로 병자를 고쳤고, 바다 위를 걸어 갔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이런 놀랍도록 위대한 믿음을 가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것은 고린도전서 1:24의 말씀대로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임을 믿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자기가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살 것을 믿었으며, 또한 부활의 아침을 믿었기에 요한복음 18:11 말씀대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이라고 믿고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 앞에 제자들은 몹시 부끄러워졌고 믿음이 없는 세대라는 책망을 들었던 것입니다.

본문 28절에 보면 제자들이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느냐고 조용히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기도 이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산 밑에서 졸고 떠들고 있었으니 기도하지 아니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능력을 행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능력을 행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고 믿음이 지속되어 능력화하기 위해서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믿음을 지켜 나갈 수가 없고, 믿음 없이 능력을 행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기도와 함께 믿음을 얻고, 믿음을 얻을 때에 권세있는 생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믿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음으로 자신을 믿을 수 있고 그리고 이웃과 형제를 믿을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믿음을 심어 나가는 귀한 역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인하여 고생하였으나 그 아픔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또 한번 능력의 사람이 되었고, 자기가 왜 죄인으로서 로마에 호송되어 가는지 몰랐으나 빌립보서 1:12에 보면 이것이 복음 전파의 지름길인 것을 깨닫고 또 한번 하나님께 감사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며 그 사랑 안에 내가 있습니다. 이 확실한 믿음 안에 거할 때 능치 못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불신하지 말고 불신의 시대에 믿음을 심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 믿음 없는 세대에 사는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어서 저희들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시옵소서. 세상 사람들에게 속았다고 하여 한 분 예수님까지도 믿지 못하는 저희들이 되지 않게 해 주시고, 확실한 믿음을 주셔서 이 불신 시대를 믿음의 시대로 바꾸어 나아가서 주님의 거룩하신 뜻에 동참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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