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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수난자의 신앙 고백(욥기 23 : 10~17)

by 【고동엽】 2023.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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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자의 신앙 고백(욥기 23 : 10~17)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 나름대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만이 남보다 가장 어려운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점에 고통의 무게가 있고 고통이 고통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나보다 더 어려운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할 수만 있어도 그 고통의 무게는 반으로 줄어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당한 고통은 나만 당한 것이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는 나만의 쓰린 고통을 겪고 있다고 저마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고통이 점점 더 가중해지는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 그 누구를 보아도 성경에 나타난 욥과 같은 고난을 당한 사람은 없다고 보여집니다. 욥처럼 억울하고 욥처럼 무겁고 욥처럼 그렇게 괴로운 고통을 당한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어려운 고통을 당했습니다.

욥은 모든 고난 당하는 자의 대표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가 당한 고난에는 일반적인 고통과 성격이 다른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끝까지 의인의 고통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인의 고난이 아니고 의인의 고난이라는 것과 죄 없는 욥이 고난을 당한다는 사실을 계속 확증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같은 죄 많은 사람들은 고난을 당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절반은 다 내 책임이니 이보다 더 어려운 고난을 당해도 유구무언입니다. 그러나 욥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욥은 그 고난을 당해야 할 아무런 도덕적 이유가 없었습니다. 의인의 고난 바로 이 점에 특징이 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당한 고난입니다. 우상을 섬기고 죄 가운데 살던 사람이 벌받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욥기 1장 1절에 보면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성경은 증거해 줍니다. 그뿐 아니라 4절로 5절에 보면 잔치를 베풀고 나면 혹시 자녀들 가운데 죄를 범하지 않았을까 하여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그는 조심스럽게 악에서 떠나려고 애를 썼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욥이 고난을 당했습니다.

셋째는 끝가지 욥은 왜 이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를 몰랐습니다. 주의해서 살펴보면 욥은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다시 크게 보상해 주시는 그날까지 왜 이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를 모르면서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까닭을 알지 못하는 고난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때는 너무너무 괴로워서 자기 생을 저주하기도 했습니다. 어머니가 왜 나를 낳았던고, 어찌하여 젖을 먹였던고 하는 슬픈 노래까지 읊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던 것이 욥이 당한 고난의 특징입니다.

이제 욥이 당한 고난의 양상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일반적으로 우리 모두가 당하는 고난과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가 재산을 잃음으로 인해서 얻어지는 고난입니다. 애써서 모은 재산,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참으로 마음 아픈 일입니다. 평생토록 애써서 모아 놓은 재산을 하루 아침에 빼앗기고 거지가 될 때 이건 정말로 마음 아픈 일입니다. 욥은 부자였습니다.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레요 암나귀가 오백이요 그리고 종들도 많았습니다. 한 마디로 동방에 제일가는 큰 사람이었다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이렇게 큰 부자가 스바 사람, 갈대아 사람들이 와서 무참하게 많은 재산을 약탈해 가니 하루 아침에 거지가 되었습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었는데 무슨 대책을 세워 볼 여지도 없이 까닭도 모른 채 억울하게 당했습니다.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이런 어려운 고난을 겪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자식으로 인한 고통입니다. 재물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자식과 비하지는 못합니다. 욥에게는 칠남 삼녀가 있었는데 늘 모여서 잔치를 했다니 형제간에 화친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잘 지내던 자녀들이 하루 형님 댁에서 잔치를 하다가 집이 무너지면서 열 남매가 한꺼번에 죽음을 당했습니다. 아마 열 자녀를 한꺼번에 잃은 욥의 고통은 뼈를 깎는 고통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그것뿐이 아니었습니다.

세 번째로 그는 아내를 잃었습니다. 다 잃어 버렸다고 해도 한 사람 아내가 고난에 동참하면서 같이 참아 보자고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었다면 그 고난은 참고 견디기가 한결 쉬웠을 텐데 그 한 사람 아내가 욥이 당하는 이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는 한 마디를 남긴 채 집을 나가 버렸습니다.

이 어려운 때에 아내가 집을 나감으로 해서 가정을 잃는 괴로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가정을 잃고 홀로 고독하게 있는 욥에게 이번에는 더 어려운 고난이 다가 왔습니다. 자신의 건강을 잃은 것이었습니다. 재산이나 자식이 중요하다고 해도 궁극적으로 제일 중요한 것은 내 건강입니다. 그래서 건강을 잃은 고통은 천하를 잃은 고통보다 더하다는 말도 있습니다. 욥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심한 종처가 나서 기왓장으로 긁고 잿더미에 뒹굴었다고 했습니다.

너무 괴로워서 나중에는 이렇게 시로 읊었습니다. 19장 26절에 보면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그는 상처가 나서 썩어지는 아픔을 겪으면서 생의 의욕을 잃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으므로 몸이 다시 회복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욥은 몸이 썩어진 후에 육체를 떠나 하나님 앞에 가서 주를 뵈올 것이라고 미래를 내다봅니다. 건강을 잃어버린 괴로움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욥의 고통은 그치지 않고 연달아 따라왔습니다. 그것은 명예를 잃은 것이었습니다. 친구를 잃은 일이었습니다. 욥기 2장 11절 이하에 보면 세 친구가 욥이 어려운 일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위로하러 찾아 왔다가 너무 기가 막혀서 아무 말도 못하고 옆에 앉아 일 주일을 보낸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주일 후에 입을 열어서 말을 하는데 죄 없이 고난 당하는 자가 어디 있으며 하나님이 살아 계신데 네가 죄가 없다면 왜 이 고난을 받겠느냐고 고난의 원인을 욥에게 돌리는 이야기만 했습니다.

이 말들이 욥에게는 다 괴로움이었습니다.

마지막엔 욥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같은 말은 나도 할 수 있다. 16장 20절에 보면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는구나 라는 결론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욥을 조롱하기 위하여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위로한다고 한 말인데 그에게 위로가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있을 때 누군가 찾아와서 얼마나 괴로우냐고 하는 말이 비웃는 것같이 들릴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땐 그의 방문이 반갑지 않습니다.

어느 때 상갓집에 조문간 사람이 그 집에 들어서면서 안녕하십니까? 하는 실수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상주가 안녕하지 못하니까 상복입고 있지 않소 하더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 이런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에게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이게 되고 무엇이라고 말하면 위로가 될지 난처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라는 인사를 하기도 합니다.

무엇이라고 말을 해 보아야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으면 이 말이 좋을 것 같습니다.

위로한다고 찾아오는 사람의 얼굴이 반갑지 않고 마치 비웃는 것같이 보이며 조롱하는 것 같아 보이는 그런 상황에선 방문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위로한답시고 찾아가는 것이 오히려 그 사람에겐 더 마음 아픈 일이 되고 끄집어내어 이야기하는 것은 더 큰 괴로움으로 그 마음에 받아들여진다는 말입니다. 아픔이 이 정도가 되고 나면 이젠 자존심도 명예도 다 잃은 것입니다. 아무런 위로도 받을 수 없는 어려운 고통입니다.

그러나 더 큰 괴로움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괴로움이었습니다.

13장 24절에 보면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를 주의 대적으로 여기시나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날리는 낙엽을 놀래시며 마른 검불을 따르시나이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볼 때 고민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 사람이 나를 어떻게 평판한다 해도 하나님만 밝은 얼굴로 쳐다볼 수 있고, 하나님만 나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내게 향하신 사랑만 확증할 수 있다면 부러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알 수 없는 내 죄를 향하여 화살을 쏘는 것만 같고, 내게 저주를 퍼붓는 것만 같았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칭찬하고 일이 잘 되고 건강할 때는 하나님도 내 편인 것 같았는데, 사람에게로부터 배신당하고 사람들에게로부터 멸시받는 처지가 되고 보니 하나님도 나를 버리신 것처럼만 느껴집니다.

그리하여 그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대적으로 삼으시나이까 하고 몸부림쳤습니다. 이 종교적 고통이 고통의 극치라고 생각합니다.

욥은 이 어려운 고난 속에서도 계속적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첫째는 주께서 주셨고 주께서 거두신다는 고백입니다. 1장 21절에 보면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고 고백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셨고 하나님이 걷어 가셨으니 다만 찬송할 뿐입니다.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스바 사람, 갈대아 사람을 원망하지도 않았고, 충성 되이 양을 지켜 주지 못한 종들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자기를 저주하고 도망간 아내를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셨고 하나님이 가져가셨으니 나는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이것이 욥의 자세였습니다. 그 누구와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끝까지 하나님과 직선적인 관계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그의 철저한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둘째는 내세관이었습니다. 이 육체가 썩어 육체의 낡은 옷을 벗어버리고 육체 밖에서 주를 뵈올 것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19장 27절에 보면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대한 욕망은 다 버렸습니다. 이 몸이 썩어지고 이 육체를 벗고 주 앞에 가서 평생 그리던 하나님을 뵈올 때에는 외인처럼 낯설게 대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실 것이고 나는 반갑게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내다보았습니다.

우리에게도 확실한 내세관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 발을 붙이고, 이 세상에 성공 여부를 두고, 이 세상에 목적을 두고 사는 사람은 절대로 세상 문제에 대해서 담대할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아무 때 죽든지 하나님께 가는 거라는 생명 문제에 대한 내세관이 분명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멀어지는 세상에 대해서 아쉽지 않고 병든 몸에 대해 미련을 가지지 않습니다. 아무 때 가도 갈 것이며, 가는 대로 주님을 반갑게 맞이할 것을 바라보며 확실한 약속을 가지고 사는 내세관이 분명한 사람이어야 오늘 현재의 문제에 대해서도 해결을 얻을 수 있고 담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은총의 섭리를 믿었습니다. 확실하신 긍휼을 믿고 있었습니다. 본문 13절에 보면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시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하나님의 일정한 뜻이 있으며 작정하신 것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잠시 욥 자신이 당한 고난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내게 향하신 뜻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지난 날을 돌이켜 볼 때 어느 것 하나 우연한 일이 없었던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잠깐 보기에는 모순과 부조리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큰 섭리 중에 하나님의 계획 속에 내가 오늘 들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확실한 사랑이 있어야 오늘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아오리라 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이 모든 것이 훈련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당장 썩어 죽어 갈 지경이 되어 가지고도 하나님은 내 믿음을 훈련시키시고 내 인격을 내 영혼을 훈련시키신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은 필요한 시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직 그가 아시며 그가 사랑으로 내게 베푸신 시련이라고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1절 12절에 있는 말씀대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나를 훈련시키신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이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코스에 대하여 불평이 없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신앙 고백을 들어보십시다. 42장 5절에 "내가 주께 대하여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하나님께서 다시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고 모든 재산을 배나 주었습니다. 이러한 큰 축복을 받은 다음 비로소 하는 말입니다.

그는 부자도 살 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역경과 환난과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낮에도 별은 있으나 삼라만상을 다 볼 수 있을 때에는 별을 볼 수 없습니다. 주위가 어두워지고 사물을 잘 구별할 수 없을 때 가서야 영롱한 별빛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상 명예와 욕심과 세상에 대한 미련과 아름다움에 끌려 있는 동안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르기는 하지만 멀리서 가물가물 들려올 뿐이며, 이 모든 것에 대한 미련을 깨끗이 씻어 버리고 이 모든 가치를 완전히 부정해 버리 순간 확실하게 주님의 얼굴을 뵐 수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나아가서는 42장 6절에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하고 고백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고통 속에서 드린 회개가 아닙니다. 다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후에 하나님께 드리는 회개인데 여기에서 비로소 회개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회개의 내용은 이러한 줄로 짐작합니다. 즉 내가 왜 하나님을 시험했던가 내가 왜 슬픈 마음으로 눈물을 흘렸던가. 하나님께서 오늘 같은 날을 주실 것을 믿었더라면 원망하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약했던 지난 날의 믿음에 대해서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회개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욥의 인내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신앙 고백은 야고보서의 말씀대로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데에 두어야 하겠습니다. 이 시험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게 하고, 이 시험이 나로 하여금 온전케 하고, 더 큰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미래가 약속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시험을 만날 때마다 크게 기뻐하는 신앙 고백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어리석고 미련하여 믿음을 가졌노라고 하면서도 주를 원망하며, 주님만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세상으로 기울어지는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환난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환난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해 주시며, 환난을 통하여 우리를 당신에게로 인도해 주시는 주님께 감사하며, 아는 것은 아는 대로 하나님께 찬양하고, 모르는 것은 믿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수난자의 신앙 고백(욥기 23 : 10~17)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 나름대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만이 남보다 가장 어려운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점에 고통의 무게가 있고 고통이 고통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나보다 더 어려운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할 수만 있어도 그 고통의 무게는 반으로 줄어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당한 고통은 나만 당한 것이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는 나만의 쓰린 고통을 겪고 있다고 저마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고통이 점점 더 가중해지는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 그 누구를 보아도 성경에 나타난 욥과 같은 고난을 당한 사람은 없다고 보여집니다. 욥처럼 억울하고 욥처럼 무겁고 욥처럼 그렇게 괴로운 고통을 당한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어려운 고통을 당했습니다.

욥은 모든 고난 당하는 자의 대표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가 당한 고난에는 일반적인 고통과 성격이 다른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끝까지 의인의 고통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인의 고난이 아니고 의인의 고난이라는 것과 죄 없는 욥이 고난을 당한다는 사실을 계속 확증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같은 죄 많은 사람들은 고난을 당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절반은 다 내 책임이니 이보다 더 어려운 고난을 당해도 유구무언입니다. 그러나 욥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욥은 그 고난을 당해야 할 아무런 도덕적 이유가 없었습니다. 의인의 고난 바로 이 점에 특징이 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당한 고난입니다. 우상을 섬기고 죄 가운데 살던 사람이 벌받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욥기 1장 1절에 보면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성경은 증거해 줍니다. 그뿐 아니라 4절로 5절에 보면 잔치를 베풀고 나면 혹시 자녀들 가운데 죄를 범하지 않았을까 하여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그는 조심스럽게 악에서 떠나려고 애를 썼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욥이 고난을 당했습니다.

셋째는 끝가지 욥은 왜 이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를 몰랐습니다. 주의해서 살펴보면 욥은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다시 크게 보상해 주시는 그날까지 왜 이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를 모르면서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까닭을 알지 못하는 고난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때는 너무너무 괴로워서 자기 생을 저주하기도 했습니다. 어머니가 왜 나를 낳았던고, 어찌하여 젖을 먹였던고 하는 슬픈 노래까지 읊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던 것이 욥이 당한 고난의 특징입니다.

이제 욥이 당한 고난의 양상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일반적으로 우리 모두가 당하는 고난과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가 재산을 잃음으로 인해서 얻어지는 고난입니다. 애써서 모은 재산,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참으로 마음 아픈 일입니다. 평생토록 애써서 모아 놓은 재산을 하루 아침에 빼앗기고 거지가 될 때 이건 정말로 마음 아픈 일입니다. 욥은 부자였습니다.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레요 암나귀가 오백이요 그리고 종들도 많았습니다. 한 마디로 동방에 제일가는 큰 사람이었다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이렇게 큰 부자가 스바 사람, 갈대아 사람들이 와서 무참하게 많은 재산을 약탈해 가니 하루 아침에 거지가 되었습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었는데 무슨 대책을 세워 볼 여지도 없이 까닭도 모른 채 억울하게 당했습니다.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이런 어려운 고난을 겪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자식으로 인한 고통입니다. 재물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자식과 비하지는 못합니다. 욥에게는 칠남 삼녀가 있었는데 늘 모여서 잔치를 했다니 형제간에 화친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잘 지내던 자녀들이 하루 형님 댁에서 잔치를 하다가 집이 무너지면서 열 남매가 한꺼번에 죽음을 당했습니다. 아마 열 자녀를 한꺼번에 잃은 욥의 고통은 뼈를 깎는 고통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그것뿐이 아니었습니다.

세 번째로 그는 아내를 잃었습니다. 다 잃어 버렸다고 해도 한 사람 아내가 고난에 동참하면서 같이 참아 보자고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었다면 그 고난은 참고 견디기가 한결 쉬웠을 텐데 그 한 사람 아내가 욥이 당하는 이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는 한 마디를 남긴 채 집을 나가 버렸습니다.

이 어려운 때에 아내가 집을 나감으로 해서 가정을 잃는 괴로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가정을 잃고 홀로 고독하게 있는 욥에게 이번에는 더 어려운 고난이 다가 왔습니다. 자신의 건강을 잃은 것이었습니다. 재산이나 자식이 중요하다고 해도 궁극적으로 제일 중요한 것은 내 건강입니다. 그래서 건강을 잃은 고통은 천하를 잃은 고통보다 더하다는 말도 있습니다. 욥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심한 종처가 나서 기왓장으로 긁고 잿더미에 뒹굴었다고 했습니다.

너무 괴로워서 나중에는 이렇게 시로 읊었습니다. 19장 26절에 보면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그는 상처가 나서 썩어지는 아픔을 겪으면서 생의 의욕을 잃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으므로 몸이 다시 회복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욥은 몸이 썩어진 후에 육체를 떠나 하나님 앞에 가서 주를 뵈올 것이라고 미래를 내다봅니다. 건강을 잃어버린 괴로움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욥의 고통은 그치지 않고 연달아 따라왔습니다. 그것은 명예를 잃은 것이었습니다. 친구를 잃은 일이었습니다. 욥기 2장 11절 이하에 보면 세 친구가 욥이 어려운 일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위로하러 찾아 왔다가 너무 기가 막혀서 아무 말도 못하고 옆에 앉아 일 주일을 보낸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주일 후에 입을 열어서 말을 하는데 죄 없이 고난 당하는 자가 어디 있으며 하나님이 살아 계신데 네가 죄가 없다면 왜 이 고난을 받겠느냐고 고난의 원인을 욥에게 돌리는 이야기만 했습니다.

이 말들이 욥에게는 다 괴로움이었습니다.

마지막엔 욥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같은 말은 나도 할 수 있다. 16장 20절에 보면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는구나 라는 결론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욥을 조롱하기 위하여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위로한다고 한 말인데 그에게 위로가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있을 때 누군가 찾아와서 얼마나 괴로우냐고 하는 말이 비웃는 것같이 들릴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땐 그의 방문이 반갑지 않습니다.

어느 때 상갓집에 조문간 사람이 그 집에 들어서면서 안녕하십니까? 하는 실수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상주가 안녕하지 못하니까 상복입고 있지 않소 하더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 이런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에게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이게 되고 무엇이라고 말하면 위로가 될지 난처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라는 인사를 하기도 합니다.

무엇이라고 말을 해 보아야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으면 이 말이 좋을 것 같습니다.

위로한다고 찾아오는 사람의 얼굴이 반갑지 않고 마치 비웃는 것같이 보이며 조롱하는 것 같아 보이는 그런 상황에선 방문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위로한답시고 찾아가는 것이 오히려 그 사람에겐 더 마음 아픈 일이 되고 끄집어내어 이야기하는 것은 더 큰 괴로움으로 그 마음에 받아들여진다는 말입니다. 아픔이 이 정도가 되고 나면 이젠 자존심도 명예도 다 잃은 것입니다. 아무런 위로도 받을 수 없는 어려운 고통입니다.

그러나 더 큰 괴로움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괴로움이었습니다.

13장 24절에 보면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를 주의 대적으로 여기시나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날리는 낙엽을 놀래시며 마른 검불을 따르시나이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볼 때 고민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 사람이 나를 어떻게 평판한다 해도 하나님만 밝은 얼굴로 쳐다볼 수 있고, 하나님만 나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내게 향하신 사랑만 확증할 수 있다면 부러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알 수 없는 내 죄를 향하여 화살을 쏘는 것만 같고, 내게 저주를 퍼붓는 것만 같았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칭찬하고 일이 잘 되고 건강할 때는 하나님도 내 편인 것 같았는데, 사람에게로부터 배신당하고 사람들에게로부터 멸시받는 처지가 되고 보니 하나님도 나를 버리신 것처럼만 느껴집니다.

그리하여 그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대적으로 삼으시나이까 하고 몸부림쳤습니다. 이 종교적 고통이 고통의 극치라고 생각합니다.

욥은 이 어려운 고난 속에서도 계속적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첫째는 주께서 주셨고 주께서 거두신다는 고백입니다. 1장 21절에 보면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고 고백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셨고 하나님이 걷어 가셨으니 다만 찬송할 뿐입니다.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스바 사람, 갈대아 사람을 원망하지도 않았고, 충성 되이 양을 지켜 주지 못한 종들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자기를 저주하고 도망간 아내를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셨고 하나님이 가져가셨으니 나는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이것이 욥의 자세였습니다. 그 누구와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끝까지 하나님과 직선적인 관계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그의 철저한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둘째는 내세관이었습니다. 이 육체가 썩어 육체의 낡은 옷을 벗어버리고 육체 밖에서 주를 뵈올 것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19장 27절에 보면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대한 욕망은 다 버렸습니다. 이 몸이 썩어지고 이 육체를 벗고 주 앞에 가서 평생 그리던 하나님을 뵈올 때에는 외인처럼 낯설게 대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실 것이고 나는 반갑게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내다보았습니다.

우리에게도 확실한 내세관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 발을 붙이고, 이 세상에 성공 여부를 두고, 이 세상에 목적을 두고 사는 사람은 절대로 세상 문제에 대해서 담대할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아무 때 죽든지 하나님께 가는 거라는 생명 문제에 대한 내세관이 분명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멀어지는 세상에 대해서 아쉽지 않고 병든 몸에 대해 미련을 가지지 않습니다. 아무 때 가도 갈 것이며, 가는 대로 주님을 반갑게 맞이할 것을 바라보며 확실한 약속을 가지고 사는 내세관이 분명한 사람이어야 오늘 현재의 문제에 대해서도 해결을 얻을 수 있고 담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은총의 섭리를 믿었습니다. 확실하신 긍휼을 믿고 있었습니다. 본문 13절에 보면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시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하나님의 일정한 뜻이 있으며 작정하신 것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잠시 욥 자신이 당한 고난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내게 향하신 뜻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지난 날을 돌이켜 볼 때 어느 것 하나 우연한 일이 없었던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잠깐 보기에는 모순과 부조리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큰 섭리 중에 하나님의 계획 속에 내가 오늘 들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확실한 사랑이 있어야 오늘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아오리라 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이 모든 것이 훈련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당장 썩어 죽어 갈 지경이 되어 가지고도 하나님은 내 믿음을 훈련시키시고 내 인격을 내 영혼을 훈련시키신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은 필요한 시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직 그가 아시며 그가 사랑으로 내게 베푸신 시련이라고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1절 12절에 있는 말씀대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나를 훈련시키신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이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코스에 대하여 불평이 없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신앙 고백을 들어보십시다. 42장 5절에 "내가 주께 대하여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하나님께서 다시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고 모든 재산을 배나 주었습니다. 이러한 큰 축복을 받은 다음 비로소 하는 말입니다.

그는 부자도 살 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역경과 환난과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낮에도 별은 있으나 삼라만상을 다 볼 수 있을 때에는 별을 볼 수 없습니다. 주위가 어두워지고 사물을 잘 구별할 수 없을 때 가서야 영롱한 별빛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상 명예와 욕심과 세상에 대한 미련과 아름다움에 끌려 있는 동안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르기는 하지만 멀리서 가물가물 들려올 뿐이며, 이 모든 것에 대한 미련을 깨끗이 씻어 버리고 이 모든 가치를 완전히 부정해 버리 순간 확실하게 주님의 얼굴을 뵐 수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나아가서는 42장 6절에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하고 고백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고통 속에서 드린 회개가 아닙니다. 다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후에 하나님께 드리는 회개인데 여기에서 비로소 회개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회개의 내용은 이러한 줄로 짐작합니다. 즉 내가 왜 하나님을 시험했던가 내가 왜 슬픈 마음으로 눈물을 흘렸던가. 하나님께서 오늘 같은 날을 주실 것을 믿었더라면 원망하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약했던 지난 날의 믿음에 대해서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회개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욥의 인내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신앙 고백은 야고보서의 말씀대로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데에 두어야 하겠습니다. 이 시험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게 하고, 이 시험이 나로 하여금 온전케 하고, 더 큰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미래가 약속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시험을 만날 때마다 크게 기뻐하는 신앙 고백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어리석고 미련하여 믿음을 가졌노라고 하면서도 주를 원망하며, 주님만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세상으로 기울어지는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환난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환난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해 주시며, 환난을 통하여 우리를 당신에게로 인도해 주시는 주님께 감사하며, 아는 것은 아는 대로 하나님께 찬양하고, 모르는 것은 믿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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