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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선한 목자상(요한복음 10:11-18)

by 【고동엽】 2023.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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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목자상(요한복음 10:11-18)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성도 여러분, 복이라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도대체 복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오는 것입니까? 내 노력으로 사는 것이 얼마만큼 이며, 복을 받아 사는 것이 얼마만큼 입니까? 내 노력과 복과의 관계는 어떤 것입니까? 그것을 한번 생각해보셨습니까?

아무리 잘난 사람, 똑똑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세 가지 복은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첫째 복은 부모님을 잘 만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똑똑하다 하는 사람도 자기가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는 없습니다. 부모가 나를 낳아주는 것이지 내가 부모를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를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서 결국은 내 운명이 달라집니다. 이렇게 볼 때에, 적어도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이만큼 주어진' 운명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두 번째 복은 스승을 잘 만나는 것입니다. 학교 다닐 때에 특별히 어떤 선생님을 좋아한 나머지 그분이 전공한 것을 나도 좋아하게 되고, 내 전공 방향이 그 시기에 정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어쩌다 성질이 아주 못된 선생님을 만남으로 공부할 마음도 학교에 갈 마음도 없어지고, 그 때 받은 충격 때문에 일생의 운명이 빗나가기까지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선생님을 잘 만나는 것,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는 것----이것이 얼마나 큰복입니까?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못하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결혼이 그렇습니다. 흔히 우리는 결혼을 내 의지대로 했다고 생각합니다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표현하자면 결혼도 '팔자'입니다.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딴에는 무엇을 바로 한다고 했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만남의 관계란 주어진 축복입니다. 그 많은 사람 중에서 바로 이 사람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 19:6)"라고 결혼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결혼은 주어진 것입니다.

복은 '주어진' 부분을 말합니다. 신학적으로 'Being and Becoming----'존재와 피존재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존재와 피존재는 서로 엄격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미 주어진 것, 존재적인 것이 있습니다. 이 '주어진' 것은 내 마음대로 못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어느 정도 '되어진' 것도 있습니다. 이것은 조성된 부분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것도 내 마음대로 못합니다. 스스로 존재하지도 못하고, 스스로 자기 되지도 못하고, 스스로 성장하지도 못하고, 스스로 배우지도 못하고, 스스로 성공하지도 못합니다. 어느 순간 지도자의 말 한마디에 내 운명이 결정되기도 합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의 일입니다. 어떤 대령이 최일선에서 지프차를 타고 운전병과 함께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 주위는 캄캄해졌지만 최전방에서는 헤드라이트를 켜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저 바로 앞에 보이는 길만 따라가다가 길에 서 있는 헌병 한 명을 발견하고는 "내가 지금 귀대하는 길인데 어느 쪽으로 가야 되겠나?"하고 물어보았습니다. 헌병은 "이쪽으로 가십시오"하고 가리켜주었습니다.

대령은 "알았네"하고 그 방향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가는데 아무래도 뭔가 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차를 세우고 주위를 살펴보았더니 바로 10미터 앞에 긴 다리 하나가 끊어진 채 놓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길고 험한 낭떠러지를 드러내놓고 있었습니다. 깜짝 놀란 대령은 오던 길을 되돌아가서 그 헌병에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아, 자네가 말해준 그쪽으로 가니까 다리가 끊어져 있지 뭔가? 자네 말대로 그리로 계속 갔더라면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을 뻔했잖은가." 헌병은 "그렇습니까? 어쩐지 지금까지 수많은 차를 그쪽으로 보냈는데 이상하게도 이쪽으로 오는 차는 한 대도 없었습니다"하고 대답합니다. 보세요.

여러 갈래의 길에 서서 망설일 때에 "이쪽으로 가십시오"라는 이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아마 여러분도 일생을 놓고 보면, 바로 어느 순간에 들은 말 한마디로 말미암아 일생의 운명이 달라진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래도 여러분 마음대로 만 것입니까? 역시 복은 있습니다. 복을 받아야 합니다. 복이 있고야 복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복 받지 못하고 아무리 버둥거려보아야 거기서 거기입니다. 맴돌다가 끝나는 것입니다.

복중에서 제일 큰복은 역시 지도자를 잘 만나는 것입니다.

부모도 지도자요, 스승도 지도자입니다. 무릇 지도자를 잘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양과 목자의 상징적인 비유를 들어서 아름답고 실질적으로 참된 지도자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양으로서는 목자를 잘 만나야 합니다. 어쩌다가 못된 목자를 만나면 그 고생은 말도 못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끝날 것 같습니까? 또 양의 입장에서는 선한 목자를 선한 목자로 알아보아야 합니다. 선한 목자로 알고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선한 목자라 하더라도 만일에 양이 선한 목자로 알고 따르지 않는다면 그 또한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한 목자와 선한 양이 함께 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선한 목자와 선한 양, 이 관계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목자와 양과의 관계는 참으로 아름다운 드라마요 그림이요 귀한 상징적 비유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의 땅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박토입니다. 그런데 옛날과 다름없이 지금도 목장이 있고, 목자가 있습니다. 그 몇천 년 동안 문화와는 관계없이 목자와 양의 유목민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선한 목자라(11절)"라고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요한복음에 보면 '에고 에티미'라는, 영어로 말하면 'I am~(나는 ~이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직설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으로 요한복음 곳곳에 그런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그 중 "에고 에이미 호 포이멘 호 칼로스"--"나는 선한 목자라"라는 말씀이 아주 강조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부활이다, 나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다, 나는 참 포도나무다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일곱 가지 전부가 '나는 ~이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가운데 "나는 선한 목자라"하신 말씀이 가장 아름다운 비사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선한 목자라고 하신 것은 선한 목자가 아닌 목자도 있다는 것입니다. 삯군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삯군이 있다, 그런가 하면 절도 강도도 있다고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생각해보세요. 양에게 접근해오는 자는 많습니다. 선한 목자도 있고, 강도도 있고, 절도범도 있고, 삯군도 있고, 여러 가지 모습으로 양과 관계를 가지려 합니다. 그렇지만 선한 목자, 그만이 양과 사랑이 서로 통한다는 말씀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극진히 사랑합니다. 그 사랑하는 모습을 우리는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왜 사랑하느냐고 물을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절대로 경제적으로나 사회학적으로 설명할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양과 목자의 관계에는 아주 엄청난 사랑이 있습니다. 이 사랑은 양의 소원을 들어준다던가, 양에게 얼마나 자유를 준다던가, 양의 복지를 보장해 준다던가 하는 유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목자는 양을 사랑하고 양과 함께 합니다. 양과 함께 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양의 우리 속에 목자가 있는 것을 보면, 도대체 사람인지 아닌지 모를 정도입니다. 옷도 양의 가죽으로 만든 것을 적당히 걸치고 있고, 세수는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겠고, 사람은 사람이지만 그렇게 모든 것을 양과 함께 합니다.

예루살렘에 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꼭 한번은 방문하는 곳이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에 나치 독일이 이스라엘사람 육 백만 명을 죽였습니다. 참으로 무도하게 학살을 했습니다. 육 백만 명이라고 하면 서울 인구의 절반입니다. 죄 없는 많은 이스라엘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사람들은 유대인 학살 기념관을 세웠습니다. 거기 가면 섬뜩합니다. 세상엔 이럴 수가 있나 할 정도로 끔찍한 장면들을 말해주는 유품과 그림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념관 마당에 하나의 조그마한 동상이 있습니다. 그 동상은 우리에게 대단히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군이 폴란드에 들어왔습니다. 많은 이스라엘사람들이 학살을 당했지만 특별히 폴란드에서 삼 백만 명이 죽었습니다. 바로 독일 군이 폴란드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사람들을 모조리 없애려 할 때의 일입니다. 지금 국민학교에는 학생들이 가득 모여 있습니다.

그 가운데 유대인 어린아이들은 가슴에 노란 다윗의 별을 달고 있습니다. 유대인이라는 표시로 강제로 달게 한 것입니다. 그렇게 별을 달고 있는 아이들과 다른 폴란드 아이들이 거기 함께 있습니다. 다같이 서로 사랑합니다. 그런데 독일 군이 총을 들고 다가옵니다. 아이들은 발발 떱니다. 선생님은 그들을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독일 군은 아이들을 향하여 "가슴에 별을 단 유대인 아이들은 전부 나와!"하고 명령했습니다. 무섭고 당황한 나머지 모두들 소리를 지릅니다. 선생님도 아이들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너무 무서워서 선생님을 끌어안았습니다. 선생님도 그들을 껴 앉고 있습니다. 독일 군은 "선생님은 물러나고 유대인 아이들만 내놓으시오"하고 다그칩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하고 말하면서 유대인 어린아이들과 같이 가려고 했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이 아니니 안됩니다" 하고 독일 군이 말려도 듣지 않고 트럭에 올라탔습니다. 그리고 가스실로 끌려 들어가 이제 정말 죽게 됩니다. 선생님은 가스실로 들어가는 순간에도 아이들이 너무 벌벌 떠니까 이렇게 위로합니다. "내가 너희들과 함께 있을 터이니 걱정하지 말아라. 자, 우리 함께 기도하자." 선생님과 아이들은 함께 기도합니다. "어때? 기도하고 나니까 마음이 편하지?" "예, 이제 편안해요." "내가 너희들과 함께 있으니 마음이 편안하지?" "선생님, 저희는 이제 아무 두려움도 없어요." 여러분, 이 폴란드 선생님은 사실 거기에 유대인 아이들과 같이 가야 될 이유가 없었습니다.

단지 아이들을 사랑해서, 아이들이 너무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고 참을 수가 없어서 그들을 끌어안고 같이 가스실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 육 백만 명의 학살을 기념하는 기념관 앞마당에, 이 폴란드 국민학교의 여자 선생님이신 코르자크 선생님이 벌벌 떨고 있는 어린아이들을 끌어안은 모습을 동상으로 세워놓은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사람이 선한 목자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의 세계를 복지의 세계로 인도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양과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양들과 함께 거합니다.

우리가 슬프게 생각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지도자로 믿었던 분들, 우리를 인도했던 분들을 보십시오. 이제 와서 재산 공개니 뭐니 하고 들춰보니까 너무나 잘살고 있더군요. 그들이 우리를 얼마나 복지의 세계로 인도했는지는 알 바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와 같이하지 않았다는 데에 슬픔이 있는 것입니다. 목자는 양과 함께 잡니다. 함께 합니다.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그가 있는 곳에 내가 있는 것입니다. 멀리 있으면서 '이리 와라, 어디로 인도하마, 무엇을 주마'하는 것은 다 쓸데없는 소리입니다. 어느 공무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나보다 잘사는 사람은 다 도둑놈'이라고 말입니다. 맞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잘살고 못살고… 그런 것에 우리 너무 신경 쓰지 맙시다.

문제는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의 본문인 요한복음 10장을 자세히 읽어보면, 목자는 양보다 앞서 간다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목자가 수백 마리의 양들을 이끌고 갈 때, 가만히 보면 앞에 먼저 갑니다. 그렇게 목자가 방울을 울리면서 가면 양들은 쫄랑쫄랑 따라갑니다.

그냥 죽 따라갑니다. 목자는 언제나 앞서 갑니다. 위험한 일을 만나도 먼저 만나고 죽어도 먼저 죽습니다. 뒤에서 모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솔선수범해서 먼저 위험한 길을 앞서 갑니다. 그래서 지도자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지도자가 아쉽습니다.

또한 목자는 양을 압니다. 양의 사정을 개인적으로 잘 압니다. 그리고 양들을 인도합니다. 운명을 책임집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의 풍습을 그대로 살펴보십시오. 목자가 양을 몰고 다니다가 들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면, 돌을 모아서 돌담을 둥그렇게 만듭니다. 그 돌담 한쪽에 조그마한 문을 만들고 그 문을 통해서 양들을 전부 들여놓습니다. 그래놓고 맨 마지막에는 그곳을 돌로 막아놓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거기 가로누워서 잡니다. 양들은 절대로 목자를 밟고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이것이 목자의 모습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의 운명을 책임지는 것입니다.

특별히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18절)"----내가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하심입니다. 만일에 이것을 사회학, 경제학적으로 생각한다면 목자는 주인이요, 양은 소유물입니다.

그 양 한 마리 죽어도 그만, 살아도 그만입니다.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관계는 높고 깊은 것입니다.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아 헤매는 모습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이 남아 있습니다. '그까짓 양 한 마리를 위해서 내가 밤잠을 설치는 것은 말도 안돼. 위험을 무릅써? 그것은 더더욱 말도 안돼'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자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혹시 그 양이 어디서 무엇에 걸리지 않았을까, 얼마나 고생을 할까, 숲의 나뭇가지에 걸려서 밤새 울고 있겠구만. 그러다가 금수에게라도 찢기어 죽는다면……' 가만히 생각하니 기가 막힙니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나서서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어떻게 설명되어야 합니까? 양이 목자를 위해 죽는다면 말이 되지만, 목자가 양을 위해 죽는다면 그것은 말로 설명될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에 선한 목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너무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목자가 양을 위하여 나서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니 누가 뺏는 것도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라고 말씀합니다. 자원적이요, 자발적입니다. 바로 여기에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양을 위하여 양이 위험할 때에 스스로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지도자, 바로 그러한 지도자가 아쉬운 것입니다.

선한 목자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선한 양입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선한 목자에 선한 양이 있어야 합니다. 양은 목자를 절대 신뢰합니다. 그리고 목자가 자기보다 자기를 더 잘 안다고 믿습니다. 때로는 부모자식 간에도 이런 점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까? 부모는 인생의 선배로서 자식의 사정과 앞날을 자기가 더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식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내 운명은 내가 결정합니다, 내가 나를 더 잘 압니다, 내 사정은 내가 압니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건방진 소리입니다. 저가 언제 알았다는 것입니까? 부모가 자식을 더 잘 아는 법입니다. 무엇이 필요한지,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 환합니다. 그래서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까? 문제가 있다면 여기에 있습니다. 부모가 나보다 나를 더 잘 안다고 자식이 믿어주기만 한다면 여기에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양들은 분명히 이것을 믿고 있습니다. 목자가 자기보다 자기를 더 잘 안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에 있는 그림 하나를 보세요. 돌에 조각을 해놓은 것이라 색을 칠한 것처럼 분명하지는 않습니다만, 이 앞에 나가다보면 오른쪽에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건지는 목자의 모습이 있고 또 한쪽에는 목자가 새끼 양을 안고 가는 모습이 있습니다. 저는 목자가 양을 안고 가는 그림을 좋아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에 제 방에 걸려 있던 그림이 바로 이 그림이었습니다. 차츰 자라면서 수십 년 동안 보아온 것이어서, 저에게는 짙은 향수를 느끼게 합니다. 자세히 보면, 이 그림의 아름다움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목자가 시냇물을 건널 때, 큰 양들은 줄렁줄렁 따라서 건널 수가 있지만 어린양들은 건너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린양을 목자가 안고 건너가면, 어미 양은 목자가 자기 새끼를 안고 가는 것이 너무나 좋아서 쳐다봅니다. 그 시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자기 새끼를 목자가 안고 건널 때 그 어미가 쳐다보면서 기뻐하는 그런 눈, 동경어린 눈으로 올려다보는 바로 그 모습을 보세요. 이보다 더 행복한 순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나는 선한 목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팔레스타인에 가보면 지금도 풀 한 포기 없고, 있다 해도 노랗게 다 말랐는데, 그 동산이 전부 하얗게 줄무늬가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그렇게 산에 줄이 있는 이유는 이러합니다. 양의 코를 꿴 것도 아니고 목을 맨 것도 아닌데도, 목자가 방울을 울리면서 앞서 가면 수백 마리의 양은 한 줄로 따라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번 지나가면 저절로 길이 생깁니다. 줄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을 보니 목자가 언덕을 향해서 바로 올라가지 않고, 바로 올라가면 양들이 오르기 힘들까봐 옆으로 옆으로 올라갑니다. 그래서 줄이 옆으로 떡하니 나 있습니다. 그것을 볼 때, 목자는 양을 알았고 양은 목자를 믿고 따랐구나 하는 것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간다고 할지라도 저 목자가 이 길을 통해서 좋은 길로, 푸른 초장으로, 잔잔한 물가로 인도해주실 것이라고 전적으로 믿고, 목자가 가는 길 그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왜'라는 물음이 필요 없습니다. 곁길도 없고, 한눈 팔 것도 없습니다. 이렇듯 그 많은 양들이 단 한사람의 목자를 따라 줄지어 가는 모습은 참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신뢰와 사랑, 참 평화가 거기에 깃들어 있습니다. 양들은 목자의 지혜와 능력과 사랑을 전적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목자 앞에서 모든 양은 하나가 됩니다. 협력하여 하나가 됩니다. 선한 목자와 선한 양, 이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나는 선한 목자다. 이제 너희는 선한 양이 되어다오'라고 당부하십니다.

여러분, 만약 오늘이 나의 임종이라면 세상 떠날 때에 마지막으로 읽어볼 성경말씀이 무엇입니까? 마지막으로 듣고 싶은 성경말씀이 무엇입니까? 이천 년 동안 많은 성도들이 임종 때에 읽어본 성경말씀을 살펴보니, 제일 많이 읽은 부분이 바로 시편 23편이라고 합니다. 세상 떠날 때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없을 것입니다. 목자와 양의 아름다운 관계와 그 푸른 목장을 생각하면서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여러분, 선한 목자를 바라보면서 세상을 살아갑시다.*  

선한 목자상(요한복음 10:11-18)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성도 여러분, 복이라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도대체 복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오는 것입니까? 내 노력으로 사는 것이 얼마만큼 이며, 복을 받아 사는 것이 얼마만큼 입니까? 내 노력과 복과의 관계는 어떤 것입니까? 그것을 한번 생각해보셨습니까?

아무리 잘난 사람, 똑똑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세 가지 복은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첫째 복은 부모님을 잘 만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똑똑하다 하는 사람도 자기가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는 없습니다. 부모가 나를 낳아주는 것이지 내가 부모를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를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서 결국은 내 운명이 달라집니다. 이렇게 볼 때에, 적어도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이만큼 주어진' 운명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두 번째 복은 스승을 잘 만나는 것입니다. 학교 다닐 때에 특별히 어떤 선생님을 좋아한 나머지 그분이 전공한 것을 나도 좋아하게 되고, 내 전공 방향이 그 시기에 정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어쩌다 성질이 아주 못된 선생님을 만남으로 공부할 마음도 학교에 갈 마음도 없어지고, 그 때 받은 충격 때문에 일생의 운명이 빗나가기까지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선생님을 잘 만나는 것,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는 것----이것이 얼마나 큰복입니까?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못하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결혼이 그렇습니다. 흔히 우리는 결혼을 내 의지대로 했다고 생각합니다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표현하자면 결혼도 '팔자'입니다.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딴에는 무엇을 바로 한다고 했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만남의 관계란 주어진 축복입니다. 그 많은 사람 중에서 바로 이 사람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 19:6)"라고 결혼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결혼은 주어진 것입니다.

복은 '주어진' 부분을 말합니다. 신학적으로 'Being and Becoming----'존재와 피존재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존재와 피존재는 서로 엄격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미 주어진 것, 존재적인 것이 있습니다. 이 '주어진' 것은 내 마음대로 못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어느 정도 '되어진' 것도 있습니다. 이것은 조성된 부분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것도 내 마음대로 못합니다. 스스로 존재하지도 못하고, 스스로 자기 되지도 못하고, 스스로 성장하지도 못하고, 스스로 배우지도 못하고, 스스로 성공하지도 못합니다. 어느 순간 지도자의 말 한마디에 내 운명이 결정되기도 합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의 일입니다. 어떤 대령이 최일선에서 지프차를 타고 운전병과 함께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 주위는 캄캄해졌지만 최전방에서는 헤드라이트를 켜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저 바로 앞에 보이는 길만 따라가다가 길에 서 있는 헌병 한 명을 발견하고는 "내가 지금 귀대하는 길인데 어느 쪽으로 가야 되겠나?"하고 물어보았습니다. 헌병은 "이쪽으로 가십시오"하고 가리켜주었습니다.

대령은 "알았네"하고 그 방향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가는데 아무래도 뭔가 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차를 세우고 주위를 살펴보았더니 바로 10미터 앞에 긴 다리 하나가 끊어진 채 놓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길고 험한 낭떠러지를 드러내놓고 있었습니다. 깜짝 놀란 대령은 오던 길을 되돌아가서 그 헌병에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아, 자네가 말해준 그쪽으로 가니까 다리가 끊어져 있지 뭔가? 자네 말대로 그리로 계속 갔더라면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을 뻔했잖은가." 헌병은 "그렇습니까? 어쩐지 지금까지 수많은 차를 그쪽으로 보냈는데 이상하게도 이쪽으로 오는 차는 한 대도 없었습니다"하고 대답합니다. 보세요.

여러 갈래의 길에 서서 망설일 때에 "이쪽으로 가십시오"라는 이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아마 여러분도 일생을 놓고 보면, 바로 어느 순간에 들은 말 한마디로 말미암아 일생의 운명이 달라진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래도 여러분 마음대로 만 것입니까? 역시 복은 있습니다. 복을 받아야 합니다. 복이 있고야 복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복 받지 못하고 아무리 버둥거려보아야 거기서 거기입니다. 맴돌다가 끝나는 것입니다.

복중에서 제일 큰복은 역시 지도자를 잘 만나는 것입니다.

부모도 지도자요, 스승도 지도자입니다. 무릇 지도자를 잘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양과 목자의 상징적인 비유를 들어서 아름답고 실질적으로 참된 지도자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양으로서는 목자를 잘 만나야 합니다. 어쩌다가 못된 목자를 만나면 그 고생은 말도 못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끝날 것 같습니까? 또 양의 입장에서는 선한 목자를 선한 목자로 알아보아야 합니다. 선한 목자로 알고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선한 목자라 하더라도 만일에 양이 선한 목자로 알고 따르지 않는다면 그 또한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한 목자와 선한 양이 함께 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선한 목자와 선한 양, 이 관계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목자와 양과의 관계는 참으로 아름다운 드라마요 그림이요 귀한 상징적 비유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의 땅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박토입니다. 그런데 옛날과 다름없이 지금도 목장이 있고, 목자가 있습니다. 그 몇천 년 동안 문화와는 관계없이 목자와 양의 유목민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선한 목자라(11절)"라고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요한복음에 보면 '에고 에티미'라는, 영어로 말하면 'I am~(나는 ~이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직설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으로 요한복음 곳곳에 그런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그 중 "에고 에이미 호 포이멘 호 칼로스"--"나는 선한 목자라"라는 말씀이 아주 강조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부활이다, 나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다, 나는 참 포도나무다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일곱 가지 전부가 '나는 ~이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가운데 "나는 선한 목자라"하신 말씀이 가장 아름다운 비사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선한 목자라고 하신 것은 선한 목자가 아닌 목자도 있다는 것입니다. 삯군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삯군이 있다, 그런가 하면 절도 강도도 있다고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생각해보세요. 양에게 접근해오는 자는 많습니다. 선한 목자도 있고, 강도도 있고, 절도범도 있고, 삯군도 있고, 여러 가지 모습으로 양과 관계를 가지려 합니다. 그렇지만 선한 목자, 그만이 양과 사랑이 서로 통한다는 말씀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극진히 사랑합니다. 그 사랑하는 모습을 우리는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왜 사랑하느냐고 물을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절대로 경제적으로나 사회학적으로 설명할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양과 목자의 관계에는 아주 엄청난 사랑이 있습니다. 이 사랑은 양의 소원을 들어준다던가, 양에게 얼마나 자유를 준다던가, 양의 복지를 보장해 준다던가 하는 유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목자는 양을 사랑하고 양과 함께 합니다. 양과 함께 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양의 우리 속에 목자가 있는 것을 보면, 도대체 사람인지 아닌지 모를 정도입니다. 옷도 양의 가죽으로 만든 것을 적당히 걸치고 있고, 세수는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겠고, 사람은 사람이지만 그렇게 모든 것을 양과 함께 합니다.

예루살렘에 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꼭 한번은 방문하는 곳이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에 나치 독일이 이스라엘사람 육 백만 명을 죽였습니다. 참으로 무도하게 학살을 했습니다. 육 백만 명이라고 하면 서울 인구의 절반입니다. 죄 없는 많은 이스라엘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사람들은 유대인 학살 기념관을 세웠습니다. 거기 가면 섬뜩합니다. 세상엔 이럴 수가 있나 할 정도로 끔찍한 장면들을 말해주는 유품과 그림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념관 마당에 하나의 조그마한 동상이 있습니다. 그 동상은 우리에게 대단히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군이 폴란드에 들어왔습니다. 많은 이스라엘사람들이 학살을 당했지만 특별히 폴란드에서 삼 백만 명이 죽었습니다. 바로 독일 군이 폴란드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사람들을 모조리 없애려 할 때의 일입니다. 지금 국민학교에는 학생들이 가득 모여 있습니다.

그 가운데 유대인 어린아이들은 가슴에 노란 다윗의 별을 달고 있습니다. 유대인이라는 표시로 강제로 달게 한 것입니다. 그렇게 별을 달고 있는 아이들과 다른 폴란드 아이들이 거기 함께 있습니다. 다같이 서로 사랑합니다. 그런데 독일 군이 총을 들고 다가옵니다. 아이들은 발발 떱니다. 선생님은 그들을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독일 군은 아이들을 향하여 "가슴에 별을 단 유대인 아이들은 전부 나와!"하고 명령했습니다. 무섭고 당황한 나머지 모두들 소리를 지릅니다. 선생님도 아이들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너무 무서워서 선생님을 끌어안았습니다. 선생님도 그들을 껴 앉고 있습니다. 독일 군은 "선생님은 물러나고 유대인 아이들만 내놓으시오"하고 다그칩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하고 말하면서 유대인 어린아이들과 같이 가려고 했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이 아니니 안됩니다" 하고 독일 군이 말려도 듣지 않고 트럭에 올라탔습니다. 그리고 가스실로 끌려 들어가 이제 정말 죽게 됩니다. 선생님은 가스실로 들어가는 순간에도 아이들이 너무 벌벌 떠니까 이렇게 위로합니다. "내가 너희들과 함께 있을 터이니 걱정하지 말아라. 자, 우리 함께 기도하자." 선생님과 아이들은 함께 기도합니다. "어때? 기도하고 나니까 마음이 편하지?" "예, 이제 편안해요." "내가 너희들과 함께 있으니 마음이 편안하지?" "선생님, 저희는 이제 아무 두려움도 없어요." 여러분, 이 폴란드 선생님은 사실 거기에 유대인 아이들과 같이 가야 될 이유가 없었습니다.

단지 아이들을 사랑해서, 아이들이 너무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고 참을 수가 없어서 그들을 끌어안고 같이 가스실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 육 백만 명의 학살을 기념하는 기념관 앞마당에, 이 폴란드 국민학교의 여자 선생님이신 코르자크 선생님이 벌벌 떨고 있는 어린아이들을 끌어안은 모습을 동상으로 세워놓은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사람이 선한 목자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의 세계를 복지의 세계로 인도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양과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양들과 함께 거합니다.

우리가 슬프게 생각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지도자로 믿었던 분들, 우리를 인도했던 분들을 보십시오. 이제 와서 재산 공개니 뭐니 하고 들춰보니까 너무나 잘살고 있더군요. 그들이 우리를 얼마나 복지의 세계로 인도했는지는 알 바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와 같이하지 않았다는 데에 슬픔이 있는 것입니다. 목자는 양과 함께 잡니다. 함께 합니다.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그가 있는 곳에 내가 있는 것입니다. 멀리 있으면서 '이리 와라, 어디로 인도하마, 무엇을 주마'하는 것은 다 쓸데없는 소리입니다. 어느 공무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나보다 잘사는 사람은 다 도둑놈'이라고 말입니다. 맞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잘살고 못살고… 그런 것에 우리 너무 신경 쓰지 맙시다.

문제는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의 본문인 요한복음 10장을 자세히 읽어보면, 목자는 양보다 앞서 간다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목자가 수백 마리의 양들을 이끌고 갈 때, 가만히 보면 앞에 먼저 갑니다. 그렇게 목자가 방울을 울리면서 가면 양들은 쫄랑쫄랑 따라갑니다.

그냥 죽 따라갑니다. 목자는 언제나 앞서 갑니다. 위험한 일을 만나도 먼저 만나고 죽어도 먼저 죽습니다. 뒤에서 모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솔선수범해서 먼저 위험한 길을 앞서 갑니다. 그래서 지도자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지도자가 아쉽습니다.

또한 목자는 양을 압니다. 양의 사정을 개인적으로 잘 압니다. 그리고 양들을 인도합니다. 운명을 책임집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의 풍습을 그대로 살펴보십시오. 목자가 양을 몰고 다니다가 들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면, 돌을 모아서 돌담을 둥그렇게 만듭니다. 그 돌담 한쪽에 조그마한 문을 만들고 그 문을 통해서 양들을 전부 들여놓습니다. 그래놓고 맨 마지막에는 그곳을 돌로 막아놓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거기 가로누워서 잡니다. 양들은 절대로 목자를 밟고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이것이 목자의 모습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의 운명을 책임지는 것입니다.

특별히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18절)"----내가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하심입니다. 만일에 이것을 사회학, 경제학적으로 생각한다면 목자는 주인이요, 양은 소유물입니다.

그 양 한 마리 죽어도 그만, 살아도 그만입니다.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관계는 높고 깊은 것입니다.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아 헤매는 모습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이 남아 있습니다. '그까짓 양 한 마리를 위해서 내가 밤잠을 설치는 것은 말도 안돼. 위험을 무릅써? 그것은 더더욱 말도 안돼'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자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혹시 그 양이 어디서 무엇에 걸리지 않았을까, 얼마나 고생을 할까, 숲의 나뭇가지에 걸려서 밤새 울고 있겠구만. 그러다가 금수에게라도 찢기어 죽는다면……' 가만히 생각하니 기가 막힙니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나서서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어떻게 설명되어야 합니까? 양이 목자를 위해 죽는다면 말이 되지만, 목자가 양을 위해 죽는다면 그것은 말로 설명될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에 선한 목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너무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목자가 양을 위하여 나서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니 누가 뺏는 것도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라고 말씀합니다. 자원적이요, 자발적입니다. 바로 여기에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양을 위하여 양이 위험할 때에 스스로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지도자, 바로 그러한 지도자가 아쉬운 것입니다.

선한 목자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선한 양입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선한 목자에 선한 양이 있어야 합니다. 양은 목자를 절대 신뢰합니다. 그리고 목자가 자기보다 자기를 더 잘 안다고 믿습니다. 때로는 부모자식 간에도 이런 점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까? 부모는 인생의 선배로서 자식의 사정과 앞날을 자기가 더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식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내 운명은 내가 결정합니다, 내가 나를 더 잘 압니다, 내 사정은 내가 압니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건방진 소리입니다. 저가 언제 알았다는 것입니까? 부모가 자식을 더 잘 아는 법입니다. 무엇이 필요한지,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 환합니다. 그래서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까? 문제가 있다면 여기에 있습니다. 부모가 나보다 나를 더 잘 안다고 자식이 믿어주기만 한다면 여기에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양들은 분명히 이것을 믿고 있습니다. 목자가 자기보다 자기를 더 잘 안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에 있는 그림 하나를 보세요. 돌에 조각을 해놓은 것이라 색을 칠한 것처럼 분명하지는 않습니다만, 이 앞에 나가다보면 오른쪽에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건지는 목자의 모습이 있고 또 한쪽에는 목자가 새끼 양을 안고 가는 모습이 있습니다. 저는 목자가 양을 안고 가는 그림을 좋아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에 제 방에 걸려 있던 그림이 바로 이 그림이었습니다. 차츰 자라면서 수십 년 동안 보아온 것이어서, 저에게는 짙은 향수를 느끼게 합니다. 자세히 보면, 이 그림의 아름다움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목자가 시냇물을 건널 때, 큰 양들은 줄렁줄렁 따라서 건널 수가 있지만 어린양들은 건너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린양을 목자가 안고 건너가면, 어미 양은 목자가 자기 새끼를 안고 가는 것이 너무나 좋아서 쳐다봅니다. 그 시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자기 새끼를 목자가 안고 건널 때 그 어미가 쳐다보면서 기뻐하는 그런 눈, 동경어린 눈으로 올려다보는 바로 그 모습을 보세요. 이보다 더 행복한 순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나는 선한 목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팔레스타인에 가보면 지금도 풀 한 포기 없고, 있다 해도 노랗게 다 말랐는데, 그 동산이 전부 하얗게 줄무늬가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그렇게 산에 줄이 있는 이유는 이러합니다. 양의 코를 꿴 것도 아니고 목을 맨 것도 아닌데도, 목자가 방울을 울리면서 앞서 가면 수백 마리의 양은 한 줄로 따라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번 지나가면 저절로 길이 생깁니다. 줄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을 보니 목자가 언덕을 향해서 바로 올라가지 않고, 바로 올라가면 양들이 오르기 힘들까봐 옆으로 옆으로 올라갑니다. 그래서 줄이 옆으로 떡하니 나 있습니다. 그것을 볼 때, 목자는 양을 알았고 양은 목자를 믿고 따랐구나 하는 것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간다고 할지라도 저 목자가 이 길을 통해서 좋은 길로, 푸른 초장으로, 잔잔한 물가로 인도해주실 것이라고 전적으로 믿고, 목자가 가는 길 그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왜'라는 물음이 필요 없습니다. 곁길도 없고, 한눈 팔 것도 없습니다. 이렇듯 그 많은 양들이 단 한사람의 목자를 따라 줄지어 가는 모습은 참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신뢰와 사랑, 참 평화가 거기에 깃들어 있습니다. 양들은 목자의 지혜와 능력과 사랑을 전적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목자 앞에서 모든 양은 하나가 됩니다. 협력하여 하나가 됩니다. 선한 목자와 선한 양, 이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나는 선한 목자다. 이제 너희는 선한 양이 되어다오'라고 당부하십니다.

여러분, 만약 오늘이 나의 임종이라면 세상 떠날 때에 마지막으로 읽어볼 성경말씀이 무엇입니까? 마지막으로 듣고 싶은 성경말씀이 무엇입니까? 이천 년 동안 많은 성도들이 임종 때에 읽어본 성경말씀을 살펴보니, 제일 많이 읽은 부분이 바로 시편 23편이라고 합니다. 세상 떠날 때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없을 것입니다. 목자와 양의 아름다운 관계와 그 푸른 목장을 생각하면서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여러분, 선한 목자를 바라보면서 세상을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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