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목차로 돌아가기 |
천사의 얼굴(사도행전 7 : 54~60)
레오날드 다빈치를 비롯하여 많은 화가들이 성화를 그렸습니다. 우리는 성화를 사랑하고 또 각 가정에서는 이 성화를 벽에다 걸어 놓고 경건한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합니다.
성만찬의 그림에 대해서는 전해 내려오는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화가가 성만찬의 그림을 그리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화가의 고충은 모델을 선택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생각으로만 그릴 수 없기 때문에 비슷한 느낌을 주는 모델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과 열 두 제자, 모두 열 세 사람의 모델이 필요한데 제일 어려운 것은 예수님과 가롯 유다의 모델을 찾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먼저 예수님의 모델을 찾기 위하여 온 도시와 동리를 발이 닿는 데까지 돌아다녀 보았으나 예수님이라고 느낄 만한 모델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가 출석하는 교회의 성가 대원 가운데 얼굴에 빛이 있고 인상이 좋은 청년을 발견하여 그를 예수님의 모델로 정하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후 이 화가는 어떤 사정으로 인하여 그림을 그리지 못하다가 몇 년 뒤 다시 그리기 시작하여 그 그림을 완성할 생각으로 가롯 유다의 모델을 찾아다니게 되었습니다. 어느 술집 골목으로 지나가는데 한 청년이 비틀거리며 오는 것을 보고 저 사람이면 가롯 유다와 비슷한 인상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다가가서 그림 한 장만 그리자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 얼굴을 한참 그리고 있는데 그 청년이 왜 자기의 얼굴을 그리느냐고 묻기에 화가는 솔직하게 사정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청년은 통곡을 하며 몇 년 전에 당신이 예수님의 얼굴 모델로 그린 사람이 바로 자기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동안 타락하여 지금은 가롯 유다의 모델이 되었다고 하며 울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한 사람이 어느 때는 예수님의 모델이 될 수 있었고, 어느 때는 가롯 유다의 모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 마음의 모습대로 얼굴에 보여진다고 합니다. 또 의학적으로는 4년마다 피부가 달라진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몇 년 동안 찌푸리고 살다 보면 얼굴 모습이 달라지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 6:15에 보면,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33:10에는 야곱이 형님과 불화한 관계에 있다가 20년만에 다시 만나게 될 때 너무 감격하여 형님의 얼굴을 보니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 형님은 에서라는 이름 그대로 붉다는 뜻입니다. 얼굴이 붉고 또 양의 가죽과 비교할 만큼 털이 많은 사람이며, 먼길을 걸어오면서 먼지 투성이었으므로 외모로서는 그렇게 보일 리가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마음입니다. 이십 년 동안 원수로 지내다가 이제 화해하려는 순간 그 마음으로 형님을 보니 마치 하나님의 얼굴처럼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천사를 본 사람이 없는데 천사의 얼굴 같다는 말은 과장입니다. 그러나 천사의 얼굴은 못 보았어도 천사의 얼굴 같은 느낌의 사람은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은 체험을 할 수는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편지 가운데서 항상 새로운 피조물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새롭게 되었다면 얼굴도 새롭게 되었을 것입니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얼굴에도 빛이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 본문 중에 보면 스데반이 공회 앞에 서 있습니다. 이 공회는 산헤드린 공회로서 72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고, 종교와 정치의 권력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로마가 이스라엘을 점령한 다음 사형권, 다시 말하면 최고형의 권력만은 빼앗겼지만 그러나 엄연히 이들은 생사를 좌우하는 권력을 가진 회의입니다.
스데반은 이런 공회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각오하고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한 이스라엘의 역사와 함께 주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증거했습니다. 특별히 구약의 문맥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한 것은 대단히 귀중한 신학적 방법론이었습니다. 이 공회는 얼마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재판하여 빌라도의 권력을 빌려서 십자가에 못 박는 정죄를 했습니다. 스데반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그들 앞에 서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주요 메시야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를 정회한 이 사람들이 정죄 당하면서 취할 길은 두 길밖에 없습니다. 회개를 하든지 아니면 스데반을 죽이는 길입니다.
예수를 정죄 하여 죽인 그들 앞에서 예수가 메시야라고 증거하고 살아 남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들은 독기에 찬 시선으로 스데반을 노려봅니다. 이와 같이 악한 원수들 앞에서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더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얼굴은 곧 마음인 줄 압니다. 천사의 마음이기에 천사의 얼굴로 보여진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도 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이 장면을 한 마디로 성령이 충만하였다고 말을 했습니다. 성령 충만이란 무아지경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알지 못하던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은 바로 천사의 얼굴입니다. 성령 충만한 자의 얼굴에는 천사의 얼굴과 같이 빛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충만한 순간 이 같은 귀한 현상이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스데반은 이 무서운 시간에 하늘을 우러러보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늘을 쳐다보는 자만이 이 같은 귀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골로세 3:1에 보면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고 했고, 거기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했습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저 살기 등등하고 교활하고 위선적인 사람들을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그들과 같이 악해지는 것입니다. 선한 싸움도 싸움이기 때문에 피가 묻게 되고 결국은 독기로 가득 차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높은 곳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내 앞에 있는 가증한 원수를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위를 쳐다보고 거기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스데반이 위를 보았더니 인자가 서 계신 것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인자라고 하는 말은 참 중요한 말입니다. 성서 신학적으로 보면 예수님에 대한 명칭이 여러 가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인자라고 하는 말은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도란 헬라말이며 히브리말은 메시야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것은 이스라엘을 회복할 수 있는 정치적 권력을 지닌 존재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킬 때 항상 인자라고 하였습니다. 신약 성경 가운데 인자라는 말이 무려 백회 이상 나옵니다. 그런데 딱 한번 예외를 제외하고는 모두 예수님이 자기를 가리켜 한 말입니다.
제자 가운데 그 누구도 예수님을 인자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메시야로 불렀습니다. 다른 사람이 예수님을 인자라고 부른 것은 오직 한 번으로서 오늘 본문 말씀대로 스데반이 예수님을 인자라고 불렀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그 순간에도 사실은 상당히 정치적이요 또 어떤 인간적인 요소가 개입된 고백이었다고 생각되어집니다. 왜냐하면, 고백을 한 바로 뒤에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예수님께 꾸중을 들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이 그리스도를 인자라고 부르는 바로 이 순간만은 깨끗한 순간입니다.
인자란 성육신 되신 말씀을 의미하며, 고난 당하시는 메시야를 의미하며, 부활과 그리고 심판주가 되시는 하나님의 종말적 계시자를 의미합니다.
스데반은 그런 의미로서 인자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천사의 얼굴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용서와 화해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또한 천사의 얼굴이 되었던 것입니다.
웃는 자 앞에서 같이 웃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화내는 자 앞에서 웃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쉬운 일이지만,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스데반은 지금 자기를 미워하여 죽이려는 사람들을 벌써 마음으로 용서하였습니다. 용서는 높은 차원의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면서 자기를 죽이는 자를 위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비록 육신적으로는 십자가에 달려 죽어 가지만 그 정신은 높은 위치에서 그들을 용서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스데반의 용서에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죄를 사해 주시기를 원하는 사죄의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을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 달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의 마지막 편지라고 하는 디모데후서 4:16에서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평생 자기를 괴롭힌 몇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이 자기를 괴롭히고 결국은 자기를 버리고 떠났지만 허물을 그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것은 모름지기 자기에게도 잘못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허물을 그들에게만 돌리지 말라고 하는 정말 중요한 겸손의 고백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스데반의 이 용서의 고백도 그런 뜻이 있다고 보여지는 것입니다. 사랑이 부족했든지, 방법이 잘못되었든지 혹 자기에게 무슨 허물이 있었든지 저들이 돌로 치게 된 동기에 대해서 자기에게도 얼마간의 잘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감히 자기가 대신 그 벌을 받겠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용서, 이러한 사랑, 이러한 화해의 순간에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던 것입니다. 미워하고 원망하고 복수하고자 하는 얼굴은 결코 밝을 수가 없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그 죄를 대신 받겠다고 하는 그 마음에 이 같은 은혜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에게 생명을 위탁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전적으로 그를 섬겼고 그를 위해 살다가 이제 그 생명까지도 그리스도에게 맡겨 버렸습니다. 인자는 하나님 우편에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서서 기다리는 그 예수님께 자기 영혼을 위탁하는 그 순간에도 아무도 미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를 영접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품에 안기는 마음으로 그는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미지의 세계로 끌려가는 죽음이 아니라 약속된 미래, 확실한 미래를 환히 바라보면서 전적인 영혼의 위탁이 그로 하여금 이같은 평화를 얻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더욱 중요하게 생각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스데반의 순교의 결과로 사울을 얻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위대한 그리스도인을 한 사람 만난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먼저 만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한 사람 그리스도인을 만나고 난 후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스데반의 순교의 죽음을 보면서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깊은 감화가 있었다고 종교심리학자들은 한결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죄인이라고 생각하여 돌로 쳐죽이는데 어떻게 죄인이 저렇게 평화스럽게 죽을 수 있느냐고 하는 의문이 바울의 가슴속에 깊이 인상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도 바울의 회개의 동기가 되었다고 말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스데반으로부터 깊은 감화를 받았을 것입니다.
스데반은 죽었으나 그의 믿음, 그의 신학은 사도바울에게서 열매 맺어졌습니다. 성서 신학적으로 자세히 연구해 보면 바울의 많은 편지의 신학적인 내용이 모두 스데반의 이 마지막 설교에서부터 시작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학의 초점, 신학의 방향, 신학의 방법론, 이 모든 것이 그대로 스데반의 것입니다.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구약을 보는 것이나, 십자가 중심의 신학이나, 신약적 입장에서 구약을 보는 것이나, 모든 것을 그리스도적으로 재해석한 귀중한 방법은 모두 스데반의 것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울에게서 다시 살았습니다. 스데반의 천사의 얼굴이 바울을 사로잡고도 남는 충분한 능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이나 소리가 없습니다. 천사의 얼굴, 바로 그 얼굴이 완악한 사울을 포로해서 사도 바울을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하늘을 우러러 인자를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온전히 위탁해 버림으로써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여 천사의 얼굴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 얼굴이 승리의 얼굴이며 사울을 포로 하여 바울 되게 하는 능력이 있는 얼굴입니다. 거칠고 완악하고 부조리한 세대라고 하지만 우리는 천사의 얼굴로써 저들을 정복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 : 어렵고 괴로운 세상이지만 스데반이 공회 앞에서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하늘을 우러러 인자를 바라봄으로써 그들을 용서하고, 천사의 얼굴이 되어 사울을 바울되게 한 것같이 우리들도 저 높은 곳을 바라보며 확실한 미래를 가짐으로써 스데반과 같은 천사의 얼굴로써 완악한 이 세대를 정복하며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의 증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천사의 얼굴(사도행전 7 : 54~60)
레오날드 다빈치를 비롯하여 많은 화가들이 성화를 그렸습니다. 우리는 성화를 사랑하고 또 각 가정에서는 이 성화를 벽에다 걸어 놓고 경건한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합니다.
성만찬의 그림에 대해서는 전해 내려오는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화가가 성만찬의 그림을 그리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화가의 고충은 모델을 선택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생각으로만 그릴 수 없기 때문에 비슷한 느낌을 주는 모델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과 열 두 제자, 모두 열 세 사람의 모델이 필요한데 제일 어려운 것은 예수님과 가롯 유다의 모델을 찾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먼저 예수님의 모델을 찾기 위하여 온 도시와 동리를 발이 닿는 데까지 돌아다녀 보았으나 예수님이라고 느낄 만한 모델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가 출석하는 교회의 성가 대원 가운데 얼굴에 빛이 있고 인상이 좋은 청년을 발견하여 그를 예수님의 모델로 정하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후 이 화가는 어떤 사정으로 인하여 그림을 그리지 못하다가 몇 년 뒤 다시 그리기 시작하여 그 그림을 완성할 생각으로 가롯 유다의 모델을 찾아다니게 되었습니다. 어느 술집 골목으로 지나가는데 한 청년이 비틀거리며 오는 것을 보고 저 사람이면 가롯 유다와 비슷한 인상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다가가서 그림 한 장만 그리자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 얼굴을 한참 그리고 있는데 그 청년이 왜 자기의 얼굴을 그리느냐고 묻기에 화가는 솔직하게 사정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청년은 통곡을 하며 몇 년 전에 당신이 예수님의 얼굴 모델로 그린 사람이 바로 자기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동안 타락하여 지금은 가롯 유다의 모델이 되었다고 하며 울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한 사람이 어느 때는 예수님의 모델이 될 수 있었고, 어느 때는 가롯 유다의 모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 마음의 모습대로 얼굴에 보여진다고 합니다. 또 의학적으로는 4년마다 피부가 달라진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몇 년 동안 찌푸리고 살다 보면 얼굴 모습이 달라지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 6:15에 보면,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33:10에는 야곱이 형님과 불화한 관계에 있다가 20년만에 다시 만나게 될 때 너무 감격하여 형님의 얼굴을 보니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 형님은 에서라는 이름 그대로 붉다는 뜻입니다. 얼굴이 붉고 또 양의 가죽과 비교할 만큼 털이 많은 사람이며, 먼길을 걸어오면서 먼지 투성이었으므로 외모로서는 그렇게 보일 리가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마음입니다. 이십 년 동안 원수로 지내다가 이제 화해하려는 순간 그 마음으로 형님을 보니 마치 하나님의 얼굴처럼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천사를 본 사람이 없는데 천사의 얼굴 같다는 말은 과장입니다. 그러나 천사의 얼굴은 못 보았어도 천사의 얼굴 같은 느낌의 사람은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은 체험을 할 수는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편지 가운데서 항상 새로운 피조물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새롭게 되었다면 얼굴도 새롭게 되었을 것입니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얼굴에도 빛이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 본문 중에 보면 스데반이 공회 앞에 서 있습니다. 이 공회는 산헤드린 공회로서 72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고, 종교와 정치의 권력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로마가 이스라엘을 점령한 다음 사형권, 다시 말하면 최고형의 권력만은 빼앗겼지만 그러나 엄연히 이들은 생사를 좌우하는 권력을 가진 회의입니다.
스데반은 이런 공회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각오하고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한 이스라엘의 역사와 함께 주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증거했습니다. 특별히 구약의 문맥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한 것은 대단히 귀중한 신학적 방법론이었습니다. 이 공회는 얼마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재판하여 빌라도의 권력을 빌려서 십자가에 못 박는 정죄를 했습니다. 스데반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그들 앞에 서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주요 메시야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를 정회한 이 사람들이 정죄 당하면서 취할 길은 두 길밖에 없습니다. 회개를 하든지 아니면 스데반을 죽이는 길입니다.
예수를 정죄 하여 죽인 그들 앞에서 예수가 메시야라고 증거하고 살아 남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들은 독기에 찬 시선으로 스데반을 노려봅니다. 이와 같이 악한 원수들 앞에서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더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얼굴은 곧 마음인 줄 압니다. 천사의 마음이기에 천사의 얼굴로 보여진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도 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이 장면을 한 마디로 성령이 충만하였다고 말을 했습니다. 성령 충만이란 무아지경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알지 못하던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은 바로 천사의 얼굴입니다. 성령 충만한 자의 얼굴에는 천사의 얼굴과 같이 빛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충만한 순간 이 같은 귀한 현상이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스데반은 이 무서운 시간에 하늘을 우러러보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늘을 쳐다보는 자만이 이 같은 귀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골로세 3:1에 보면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고 했고, 거기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했습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저 살기 등등하고 교활하고 위선적인 사람들을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그들과 같이 악해지는 것입니다. 선한 싸움도 싸움이기 때문에 피가 묻게 되고 결국은 독기로 가득 차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높은 곳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내 앞에 있는 가증한 원수를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위를 쳐다보고 거기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스데반이 위를 보았더니 인자가 서 계신 것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인자라고 하는 말은 참 중요한 말입니다. 성서 신학적으로 보면 예수님에 대한 명칭이 여러 가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인자라고 하는 말은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도란 헬라말이며 히브리말은 메시야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것은 이스라엘을 회복할 수 있는 정치적 권력을 지닌 존재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킬 때 항상 인자라고 하였습니다. 신약 성경 가운데 인자라는 말이 무려 백회 이상 나옵니다. 그런데 딱 한번 예외를 제외하고는 모두 예수님이 자기를 가리켜 한 말입니다.
제자 가운데 그 누구도 예수님을 인자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메시야로 불렀습니다. 다른 사람이 예수님을 인자라고 부른 것은 오직 한 번으로서 오늘 본문 말씀대로 스데반이 예수님을 인자라고 불렀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그 순간에도 사실은 상당히 정치적이요 또 어떤 인간적인 요소가 개입된 고백이었다고 생각되어집니다. 왜냐하면, 고백을 한 바로 뒤에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예수님께 꾸중을 들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이 그리스도를 인자라고 부르는 바로 이 순간만은 깨끗한 순간입니다.
인자란 성육신 되신 말씀을 의미하며, 고난 당하시는 메시야를 의미하며, 부활과 그리고 심판주가 되시는 하나님의 종말적 계시자를 의미합니다.
스데반은 그런 의미로서 인자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천사의 얼굴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용서와 화해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또한 천사의 얼굴이 되었던 것입니다.
웃는 자 앞에서 같이 웃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화내는 자 앞에서 웃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쉬운 일이지만,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스데반은 지금 자기를 미워하여 죽이려는 사람들을 벌써 마음으로 용서하였습니다. 용서는 높은 차원의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면서 자기를 죽이는 자를 위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비록 육신적으로는 십자가에 달려 죽어 가지만 그 정신은 높은 위치에서 그들을 용서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스데반의 용서에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죄를 사해 주시기를 원하는 사죄의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을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 달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의 마지막 편지라고 하는 디모데후서 4:16에서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평생 자기를 괴롭힌 몇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이 자기를 괴롭히고 결국은 자기를 버리고 떠났지만 허물을 그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것은 모름지기 자기에게도 잘못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허물을 그들에게만 돌리지 말라고 하는 정말 중요한 겸손의 고백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스데반의 이 용서의 고백도 그런 뜻이 있다고 보여지는 것입니다. 사랑이 부족했든지, 방법이 잘못되었든지 혹 자기에게 무슨 허물이 있었든지 저들이 돌로 치게 된 동기에 대해서 자기에게도 얼마간의 잘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감히 자기가 대신 그 벌을 받겠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용서, 이러한 사랑, 이러한 화해의 순간에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던 것입니다. 미워하고 원망하고 복수하고자 하는 얼굴은 결코 밝을 수가 없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그 죄를 대신 받겠다고 하는 그 마음에 이 같은 은혜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에게 생명을 위탁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전적으로 그를 섬겼고 그를 위해 살다가 이제 그 생명까지도 그리스도에게 맡겨 버렸습니다. 인자는 하나님 우편에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서서 기다리는 그 예수님께 자기 영혼을 위탁하는 그 순간에도 아무도 미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를 영접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품에 안기는 마음으로 그는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미지의 세계로 끌려가는 죽음이 아니라 약속된 미래, 확실한 미래를 환히 바라보면서 전적인 영혼의 위탁이 그로 하여금 이같은 평화를 얻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더욱 중요하게 생각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스데반의 순교의 결과로 사울을 얻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위대한 그리스도인을 한 사람 만난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먼저 만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한 사람 그리스도인을 만나고 난 후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스데반의 순교의 죽음을 보면서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깊은 감화가 있었다고 종교심리학자들은 한결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죄인이라고 생각하여 돌로 쳐죽이는데 어떻게 죄인이 저렇게 평화스럽게 죽을 수 있느냐고 하는 의문이 바울의 가슴속에 깊이 인상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도 바울의 회개의 동기가 되었다고 말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스데반으로부터 깊은 감화를 받았을 것입니다.
스데반은 죽었으나 그의 믿음, 그의 신학은 사도바울에게서 열매 맺어졌습니다. 성서 신학적으로 자세히 연구해 보면 바울의 많은 편지의 신학적인 내용이 모두 스데반의 이 마지막 설교에서부터 시작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학의 초점, 신학의 방향, 신학의 방법론, 이 모든 것이 그대로 스데반의 것입니다.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구약을 보는 것이나, 십자가 중심의 신학이나, 신약적 입장에서 구약을 보는 것이나, 모든 것을 그리스도적으로 재해석한 귀중한 방법은 모두 스데반의 것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울에게서 다시 살았습니다. 스데반의 천사의 얼굴이 바울을 사로잡고도 남는 충분한 능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이나 소리가 없습니다. 천사의 얼굴, 바로 그 얼굴이 완악한 사울을 포로해서 사도 바울을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하늘을 우러러 인자를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온전히 위탁해 버림으로써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여 천사의 얼굴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 얼굴이 승리의 얼굴이며 사울을 포로 하여 바울 되게 하는 능력이 있는 얼굴입니다. 거칠고 완악하고 부조리한 세대라고 하지만 우리는 천사의 얼굴로써 저들을 정복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 : 어렵고 괴로운 세상이지만 스데반이 공회 앞에서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하늘을 우러러 인자를 바라봄으로써 그들을 용서하고, 천사의 얼굴이 되어 사울을 바울되게 한 것같이 우리들도 저 높은 곳을 바라보며 확실한 미래를 가짐으로써 스데반과 같은 천사의 얼굴로써 완악한 이 세대를 정복하며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의 증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 자료 18,185편 ◑ > K자료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앙인의 자화상(민수기 13 : 25~33) (0) | 2024.08.17 |
---|---|
은사에 따른 일꾼(에베소서 3 : 1~9) (0) | 2024.08.17 |
내 인생의 현주소(창세기 3 : 1~10) (0) | 2024.08.17 |
인간 됨의 현주소 (행 10:23~33) (0) | 2024.08.17 |
은혜의 승리 (롬 5:17~21) (0) | 2024.08.1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