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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현주소(창세기 3 : 1~10)
어떤 어리석은 청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는 일없이 빈둥거리며 세월만 보내고 있는 그에게 그의 아내가 무명 몇 필을 팔아서 돈을 마련하여 장사를 해 보라고 주었습니다. 이 사람이 돈을 가지고 어떤 마을에 가서 참외를 한 짐 사 가지고 옆 마을에 가서 팔려고 지고 가다가 나무 밑에서 잠깐 쉬게 되었는데,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서 참외를 한 개 먹고 싶어도 부인이 절대로 먹지 말라고 당부한 말이 생각이 나서 먹을 수도 없고 하여 가만히 생각해 보다가 이것을 팔면 얼마만큼의 이익이 남을 테니 그 남는 것만큼만 먹으면 되겠다고 하여 남을 이익만큼 먼저 먹었습니다. 그리고 낮잠을 한잠 자는 동안에 동네의 좋지 못한 사람들이 와서 그 참외를 모두 가져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낮잠에서 깨어난 이 사람이 참외가 없어진 것을 보고 생각하기를 이익 남는 것은 내가 다 먹었으니 그 참외 짐을 가져가 보았자 헛일일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여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웃어 버릴 수밖에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들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그냥 웃어넘길 수만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되어지는 것입니다.
현대의 모든 사람들은 너무나 분주한 생활들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더욱 정신없이 뛰어 다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무엇하나 제대로 이루어 놓은 것은 없고 오히려 건강을 해쳐서 병원에 입원한 사람들을 흔히 만나게 됩니다. 이렇게 건강을 다치고 난 후에 얻은 것이 무엇이며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데, 이 때는 이미 때가 늦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건강뿐만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며 그렇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지 못하여 소중한 것은 잃어버리면서 변변치 않은 것을 쫓아다니는 그러한 어리석은 인생을 사는 것이 오늘 우리의 사는 모습들이 아닌가 생각되어집니다.
인생에 있어서 자기 자신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자신의 건강을 진단해야 되겠고 그리고 자기의 인생을 진단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현재 나는 어떤 모습으로 어느 시점에 서 있으며, 지금 이 시간 내 인생이 끝난다 해도 후회 없는 그러한 시점에 서 있느냐고 하는 내 인생의 현주소를 물어야 되겠다는 말입니다.
우리 스스로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져 봅시다. 우리는 인간입니까? 인형입니까? 인간이란 자율성을 가지고 자신이 선택하고 모든 일에 스스로 결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형은 사람에 의하여 만들어진 물건으로서 사람이 움직여 주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이 인형입니다. 우리는 자율적 요소를 가지고 사는 인간인지 아니면 그 무엇인가 불가피성에 의하여 끌려가고 있는 인형과 같은 존재인지 다시 한번 자신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 자신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을 수 없다."라고 하는 유명한 말을 [기독교 강요] 첫 장 첫 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다시 바꾸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자신에 대한 지식이 없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문제와 나 자신을 안다는 것은 동시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하나님을 알아야 나를 알 수 있고, 또한 나를 알아야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즉 나의 나됨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의 모습에서 보는 것이란 말입니다.
인간은 물리적으로 말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또한 경제적으로 평가되어질 수도 없으며 사회학적으로 논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참 인생이 아닙니다. 참 인생은 다만 하나님 앞에서만 평가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의사 앞에서 옷을 벗고 진찰 받는 한 사람의 환자의 모습이나 엑스레이 앞에서 스크린에 숨김없이 비쳐지는 자기의 내부를 보는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직선적으로 서서 하나님과 나라는 존재가 만나는 바로 그 시점에서 내 모습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인류의 조상 아담을 부르고 계십니다. 아담이란 말은 인생이란 말이기도 하고 한 남자란 말이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아!"하고 부른 것은 "인생아!"라고 부른 것으로 고쳐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내가 숨었나이다."
우리는 이 물음과 대답 속에서 생각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물음과 아담의 대답 속에 넌센스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것은 그가 있는 장소를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니라 현재 아담이 처해 있는 상태를 물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장소적인 대답을 했으며 또 한 가지 어리석은 것은 숨어있으면서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의 숨바꼭질 놀이에도 숨어 있으면서 대답하지는 않습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는 것은 참으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자기 일에만 너무 집착한 나머지 남의 말을 들을 때 말하는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지 않고 자기 입장에서만 듣기 때문에 동문서답 격인 유감된 대화를 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물으신 것은 장소가 아니라 그 상태를 물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질문에 대하여 좀더 귀를 기울여 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내 인생의 현주소를 묻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물음은 하나님이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스스로 깨닫기를 원하셔서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물음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탕자가 자기 몫의 재산을 타 가지고 외국에 나가 살면서 그 재산을 모두 탕진해 버리고 거지가 되어 돼지 치는 사람들 틈에 끼어 쥐엄 열매를 주워 먹는 비참한 처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처지에서 탕자가 생각한 것이 아버지의 집이었습니다. 자신의 절망적인 처지에서 낙심하지 않고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아버지를 생각할 때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생각할 때는 무가치하지만 자기를 기다려 주는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자기의 가치가 소중한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탕자는 아버지를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담은 하나님이 물으실 때 계속 자기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에서 아담이 하나님께 한 말은 첫째로 "두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두렵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원인을 모르는 고통에는 처방이 없는 것입니다. 현대 의학으로 지금 우리에게 알려진 병이 3만 가지라고 하는데 그 치료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은 불과 5천 가지밖에 되지 않고, 나머지 2만 5천 가지는 원인도 모르고 치료 방법은 물론 없다는 것입니다. 아픈 것은 분명한데 그 원인을 모르는 것입니다.
고통을 당하면서 그 원인을 알 수 없고 불안과 공포 속에 있으면서 이 불안과 공포가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아담이 처한 현주소였습니다.
두 번째로 아담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진실을 떠나서 변명을 늘어놓는 존재가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죄의 책임을 물으시는 하나님께 아내가 먹으라고 해서 먹었다고 하는 책임 회피의 대답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와가 먼저 따먹은 사실을 몰라서 아담에게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대답은 하나님이 바라셨던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여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가다가 이 배가 갑자기 풍랑을 만났을 때 요나는 이 풍랑이 자기 때문이라고 하며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했습니다. 아담과 함께 지금 우리에게는 이 요나와 같은 "나 때문"이라고 하는 그 중심이 아쉽다는 것입니다.
항상 변명이 많고 자기 책임을 될 수 있는 대로 남에게 전가시키려고 하는 그런 병리적인 심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변명하는 상태에 있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아담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왜 내게 아내를 주었습니까? 장가를 안 갔으면 이런 죄 안 지었을 것인데 하나님 때문에 이렇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여 죄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심령 상태가 이런 변명하는 자리에 놓여 있지 않은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엄연히 자기의 책임을 남에게 돌리고 직장과 사회에 돌리고 가정에 돌리고 심지어는 팔자에 돌리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나님께 돌리는 이러한 계속 변하는 상태에 있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명하는 동안에는 진실을 찾을 수 없고 진실하기 이전에는 절대로 행복과 평안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아담이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여 한 마디만 용서를 구했더라면 하나님은 분명히 용서해 주셨으리라고 생각되어지기도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내의 실수도 다스려야 하는 남편의 위치에서 실수의 책임을 아내에게 전가시키므로 인해 남편된 위치에서 아내의 위치로 전락했고, 또 하나님께서 하와에게 물으실 때 하와는 그 책임을 뱀에게 돌림으로 인하여 아내의 위치에서 뱀 위치로 떨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책임을 그 누구에게로 돌린다면 우리의 위치는 계속 그 나쁜 사람의 위치로 내려가고, 만일 물질에 돌리면 물질 이하로 내려가서 비인간화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책임을 전가시키는 순간마다 우리의 위치는 계속 격하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셋째로 숨었다는 사실입니다.
신문의 기사 가운데 강도나 도둑질한 돈을 가지고 몇 달 동안 쫓기며 숨어살다가 자수하는 사람들의 고백을 가끔 볼 수 있는데, 그들이 하는 말은 숨어서는 못 살겠더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몸이나 위신이나 처지 등 무엇인가 숨기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학 졸업장을 위조해 가지고 취직을 한 사람이 무려 15 년을 두고 괴로워하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숨어산다는 것과 숨긴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괴로운 일입니다.
영국의 어떤 기자가 열 한 명의 고위층 정치가들에게 당신이 한일이 모두 발각되었으니 빨리 피하시오 라는 무명의 전보를 쳤더니, 그 다음 날 한 사람도 출근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현대를 가리켜 위장의 시대라고도 하고 위장 문화라고도 합니다. 왜 이렇게 거짓이 많고 위장이 많은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 오는 물건들 가운데 포장이 굉장히 좋은 것이 있는데 그 포장에 비하여 내용은 좋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이것도 하나의 위장술인 것입니다.
께름직한 상태, 석연치 않은 상태, 그리고 계속되는 어두움의 상태입니다.
언제까지 숨어 있기를 원하며 또 진실을 숨기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아담이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치마를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침에 해가 뜨면 곧 말라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피해서 동산 나무숲에 숨었다고 했는데 이 얼마나 부끄럽고 허무한 이야기인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도 숨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을 곳이라고는 한 곳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어린아이들의 맑은 눈동자를 보나 전혀 부끄럽지 않은 깨끗한 양심 바로 이것이 행복인 것입니다.
이제 연말이 가까워 옵니다. 그리고 실패와 질병과 불황과 낙심의 소식이 계속 우리 귀에 쟁쟁하게 들려옵니다. 내 인생의 현주소가 어디냐고 한번 물어 보십시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하실 때에 두려워하여 숨고, 또 내 잘못이 아니라고 하는 어리석은 변명은 더 이상하지 않아야 될 것입니다.
자기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내어놓고 내가 죄인이며 모든 것은 나 때문이라고 반성할 때 우리에게는 분명히 하나님의 용서하여 주시는 음성과 함께 두려워하지 말고 안심하라고 하시는 음성이 들려질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앞에 내 자신을 숨김없이 내어놓고 하나님으로부터 들려지는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실 때 가장 겸손한 자세로 내 인생의 현주소를 말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두려움과 변명과 그리고 숨김 그 속에서 불안과 공포에 떠는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그리고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 되어 주님 앞에 설지라도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는 내 인생의 현주소가 분명한 아름다운 생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기를 원하옵나이다. 아멘.
내 인생의 현주소(창세기 3 : 1~10)
어떤 어리석은 청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는 일없이 빈둥거리며 세월만 보내고 있는 그에게 그의 아내가 무명 몇 필을 팔아서 돈을 마련하여 장사를 해 보라고 주었습니다. 이 사람이 돈을 가지고 어떤 마을에 가서 참외를 한 짐 사 가지고 옆 마을에 가서 팔려고 지고 가다가 나무 밑에서 잠깐 쉬게 되었는데,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서 참외를 한 개 먹고 싶어도 부인이 절대로 먹지 말라고 당부한 말이 생각이 나서 먹을 수도 없고 하여 가만히 생각해 보다가 이것을 팔면 얼마만큼의 이익이 남을 테니 그 남는 것만큼만 먹으면 되겠다고 하여 남을 이익만큼 먼저 먹었습니다. 그리고 낮잠을 한잠 자는 동안에 동네의 좋지 못한 사람들이 와서 그 참외를 모두 가져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낮잠에서 깨어난 이 사람이 참외가 없어진 것을 보고 생각하기를 이익 남는 것은 내가 다 먹었으니 그 참외 짐을 가져가 보았자 헛일일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여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웃어 버릴 수밖에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들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그냥 웃어넘길 수만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되어지는 것입니다.
현대의 모든 사람들은 너무나 분주한 생활들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더욱 정신없이 뛰어 다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무엇하나 제대로 이루어 놓은 것은 없고 오히려 건강을 해쳐서 병원에 입원한 사람들을 흔히 만나게 됩니다. 이렇게 건강을 다치고 난 후에 얻은 것이 무엇이며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데, 이 때는 이미 때가 늦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건강뿐만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며 그렇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지 못하여 소중한 것은 잃어버리면서 변변치 않은 것을 쫓아다니는 그러한 어리석은 인생을 사는 것이 오늘 우리의 사는 모습들이 아닌가 생각되어집니다.
인생에 있어서 자기 자신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자신의 건강을 진단해야 되겠고 그리고 자기의 인생을 진단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현재 나는 어떤 모습으로 어느 시점에 서 있으며, 지금 이 시간 내 인생이 끝난다 해도 후회 없는 그러한 시점에 서 있느냐고 하는 내 인생의 현주소를 물어야 되겠다는 말입니다.
우리 스스로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져 봅시다. 우리는 인간입니까? 인형입니까? 인간이란 자율성을 가지고 자신이 선택하고 모든 일에 스스로 결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형은 사람에 의하여 만들어진 물건으로서 사람이 움직여 주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이 인형입니다. 우리는 자율적 요소를 가지고 사는 인간인지 아니면 그 무엇인가 불가피성에 의하여 끌려가고 있는 인형과 같은 존재인지 다시 한번 자신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 자신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을 수 없다."라고 하는 유명한 말을 [기독교 강요] 첫 장 첫 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다시 바꾸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자신에 대한 지식이 없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문제와 나 자신을 안다는 것은 동시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하나님을 알아야 나를 알 수 있고, 또한 나를 알아야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즉 나의 나됨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의 모습에서 보는 것이란 말입니다.
인간은 물리적으로 말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또한 경제적으로 평가되어질 수도 없으며 사회학적으로 논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참 인생이 아닙니다. 참 인생은 다만 하나님 앞에서만 평가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의사 앞에서 옷을 벗고 진찰 받는 한 사람의 환자의 모습이나 엑스레이 앞에서 스크린에 숨김없이 비쳐지는 자기의 내부를 보는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직선적으로 서서 하나님과 나라는 존재가 만나는 바로 그 시점에서 내 모습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인류의 조상 아담을 부르고 계십니다. 아담이란 말은 인생이란 말이기도 하고 한 남자란 말이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아!"하고 부른 것은 "인생아!"라고 부른 것으로 고쳐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내가 숨었나이다."
우리는 이 물음과 대답 속에서 생각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물음과 아담의 대답 속에 넌센스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것은 그가 있는 장소를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니라 현재 아담이 처해 있는 상태를 물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장소적인 대답을 했으며 또 한 가지 어리석은 것은 숨어있으면서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의 숨바꼭질 놀이에도 숨어 있으면서 대답하지는 않습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는 것은 참으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자기 일에만 너무 집착한 나머지 남의 말을 들을 때 말하는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지 않고 자기 입장에서만 듣기 때문에 동문서답 격인 유감된 대화를 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물으신 것은 장소가 아니라 그 상태를 물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질문에 대하여 좀더 귀를 기울여 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내 인생의 현주소를 묻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물음은 하나님이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스스로 깨닫기를 원하셔서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물음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탕자가 자기 몫의 재산을 타 가지고 외국에 나가 살면서 그 재산을 모두 탕진해 버리고 거지가 되어 돼지 치는 사람들 틈에 끼어 쥐엄 열매를 주워 먹는 비참한 처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처지에서 탕자가 생각한 것이 아버지의 집이었습니다. 자신의 절망적인 처지에서 낙심하지 않고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아버지를 생각할 때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생각할 때는 무가치하지만 자기를 기다려 주는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자기의 가치가 소중한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탕자는 아버지를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담은 하나님이 물으실 때 계속 자기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에서 아담이 하나님께 한 말은 첫째로 "두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두렵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원인을 모르는 고통에는 처방이 없는 것입니다. 현대 의학으로 지금 우리에게 알려진 병이 3만 가지라고 하는데 그 치료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은 불과 5천 가지밖에 되지 않고, 나머지 2만 5천 가지는 원인도 모르고 치료 방법은 물론 없다는 것입니다. 아픈 것은 분명한데 그 원인을 모르는 것입니다.
고통을 당하면서 그 원인을 알 수 없고 불안과 공포 속에 있으면서 이 불안과 공포가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아담이 처한 현주소였습니다.
두 번째로 아담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진실을 떠나서 변명을 늘어놓는 존재가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죄의 책임을 물으시는 하나님께 아내가 먹으라고 해서 먹었다고 하는 책임 회피의 대답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와가 먼저 따먹은 사실을 몰라서 아담에게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대답은 하나님이 바라셨던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여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가다가 이 배가 갑자기 풍랑을 만났을 때 요나는 이 풍랑이 자기 때문이라고 하며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했습니다. 아담과 함께 지금 우리에게는 이 요나와 같은 "나 때문"이라고 하는 그 중심이 아쉽다는 것입니다.
항상 변명이 많고 자기 책임을 될 수 있는 대로 남에게 전가시키려고 하는 그런 병리적인 심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변명하는 상태에 있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아담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왜 내게 아내를 주었습니까? 장가를 안 갔으면 이런 죄 안 지었을 것인데 하나님 때문에 이렇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여 죄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심령 상태가 이런 변명하는 자리에 놓여 있지 않은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엄연히 자기의 책임을 남에게 돌리고 직장과 사회에 돌리고 가정에 돌리고 심지어는 팔자에 돌리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나님께 돌리는 이러한 계속 변하는 상태에 있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명하는 동안에는 진실을 찾을 수 없고 진실하기 이전에는 절대로 행복과 평안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아담이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여 한 마디만 용서를 구했더라면 하나님은 분명히 용서해 주셨으리라고 생각되어지기도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내의 실수도 다스려야 하는 남편의 위치에서 실수의 책임을 아내에게 전가시키므로 인해 남편된 위치에서 아내의 위치로 전락했고, 또 하나님께서 하와에게 물으실 때 하와는 그 책임을 뱀에게 돌림으로 인하여 아내의 위치에서 뱀 위치로 떨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책임을 그 누구에게로 돌린다면 우리의 위치는 계속 그 나쁜 사람의 위치로 내려가고, 만일 물질에 돌리면 물질 이하로 내려가서 비인간화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책임을 전가시키는 순간마다 우리의 위치는 계속 격하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셋째로 숨었다는 사실입니다.
신문의 기사 가운데 강도나 도둑질한 돈을 가지고 몇 달 동안 쫓기며 숨어살다가 자수하는 사람들의 고백을 가끔 볼 수 있는데, 그들이 하는 말은 숨어서는 못 살겠더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몸이나 위신이나 처지 등 무엇인가 숨기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학 졸업장을 위조해 가지고 취직을 한 사람이 무려 15 년을 두고 괴로워하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숨어산다는 것과 숨긴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괴로운 일입니다.
영국의 어떤 기자가 열 한 명의 고위층 정치가들에게 당신이 한일이 모두 발각되었으니 빨리 피하시오 라는 무명의 전보를 쳤더니, 그 다음 날 한 사람도 출근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현대를 가리켜 위장의 시대라고도 하고 위장 문화라고도 합니다. 왜 이렇게 거짓이 많고 위장이 많은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 오는 물건들 가운데 포장이 굉장히 좋은 것이 있는데 그 포장에 비하여 내용은 좋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이것도 하나의 위장술인 것입니다.
께름직한 상태, 석연치 않은 상태, 그리고 계속되는 어두움의 상태입니다.
언제까지 숨어 있기를 원하며 또 진실을 숨기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아담이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치마를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침에 해가 뜨면 곧 말라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피해서 동산 나무숲에 숨었다고 했는데 이 얼마나 부끄럽고 허무한 이야기인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도 숨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을 곳이라고는 한 곳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어린아이들의 맑은 눈동자를 보나 전혀 부끄럽지 않은 깨끗한 양심 바로 이것이 행복인 것입니다.
이제 연말이 가까워 옵니다. 그리고 실패와 질병과 불황과 낙심의 소식이 계속 우리 귀에 쟁쟁하게 들려옵니다. 내 인생의 현주소가 어디냐고 한번 물어 보십시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하실 때에 두려워하여 숨고, 또 내 잘못이 아니라고 하는 어리석은 변명은 더 이상하지 않아야 될 것입니다.
자기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내어놓고 내가 죄인이며 모든 것은 나 때문이라고 반성할 때 우리에게는 분명히 하나님의 용서하여 주시는 음성과 함께 두려워하지 말고 안심하라고 하시는 음성이 들려질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앞에 내 자신을 숨김없이 내어놓고 하나님으로부터 들려지는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실 때 가장 겸손한 자세로 내 인생의 현주소를 말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두려움과 변명과 그리고 숨김 그 속에서 불안과 공포에 떠는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그리고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 되어 주님 앞에 설지라도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는 내 인생의 현주소가 분명한 아름다운 생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기를 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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