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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주인을 섬기는 사람(마 6:19~24)

by 【고동엽】 2024.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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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주인을 섬기는 사람(마 6:19~24)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심리학자 언겔스마(Ungelsma)는 그의 저서『가면으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Phoniness)에서 인간을 정의하기를 "인간은 being(존재)이 아니고 becoming(되어진 자)"이라고 했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선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자존하는 존재냐 아니면 피존하는 존재냐 즉, 있어지는 자로 존재하느냐 또는 되어지는 자로 존재하느냐는 우리의 사생활에까지 관계가 있는 중요한 현대철학입니다. 쉬운 말로 돌려서 표현하면 인간이 환경을 만드느냐, 환경이 인간을 만드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한 영이 세상을 만드느냐, 세상이 영을 만드느냐 하는 이야기와도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중 불평과 불만 또는 원망들을 하는데 그 원망하는 순간은 사실, 내가 being이 되지 못하고 becoming으로 전락하는 시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날 한 청년이 제게 와서 고민을 말하며 좀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그의 이야기 속에는 부모도 원망하고, 사회도 원망하고, 친구도 원망하고, 그저 그의 주변의 모든 사람과 환경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의 이야기를 다 듣고 묻기를, 만약에 그 모든 사람들이 당신에게 다 잘해 주었다면 당신은 지금 어떻게 되었겠느냐고요. 즉, 그러면 당신은 도대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환경에다 나 됨을 돌린다면 나는 무엇이냐 그 말입니다.

자, 우리가 사랑 받았다고 다 사랑합니까? 도둑맞았다고 다 도둑질하는 것입니까? 가난하다고 해서 다 도둑이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란 말입니다. 또한 병들었다고 다 절망합니까? 분명히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환경의 존재가 아닙니다. 적어도 이 역설적인 진리 가운데에 인간의 인간된 존재가 있는 것입니다.

환경을 탓하고 누구를 원망하며 사는 동안은 "나"라고 하는 존재가 상실되어 감을 알아야 합니다. 오래 전에 타임지에 실린 논문으로 "어떻게 부모를 가르칠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사실 좋은 부모를 만드는 것도 자식의 책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있어지는 모든 것들을 다 내가 책임지는 것입니다. 나에 의해서 환경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해마다 밤 벚꽃놀이 때가 되면 창경원은 인산인해라고 합니다. 구경을 하고 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사람이 너무 많아 벚꽃은 커녕 사람만 구경하고 왔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내가 다른 사람 구경한 것만 생각하지 남들이 나를 구경한 것은 생각지도 않습니다.

여러분, 나라고 하는 존재가 무엇입니까? 나를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중요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피조물입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존재케 하는 그런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자유가 있고 선택이 있고 또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는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만물 앞에서는 주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는 되어진 바요, 만물 앞에서는 존재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인간 존재 자기의 그 본연의 위치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섬기고, 모든 것은 다스려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여기서 자칫 잘못하면 두 가지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하나는 내가 다스릴 수가 있다고 해서 인간이 하나님을 부인하면서까지 스스로 존재한다고 교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큰 죄입니다. 또 한 가지는 만물은 무엇이든지 우리가 다스려야 하는데 그에게 매이든지, 그를 섬기는 것입니다. 피조물을 섬기는 것은 우상 숭배의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신앙적으로 살아야 하고, 만물 앞에서는 주관자로 살아야 하는 그 존재 본연의 위치를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 문제에 대해 중요한 대답을 하십니다.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리라." 두 주인을 섬기는 자는 고민이 많습니다. 이것은 고통입니다. 원래 헬라 말로 고민이라는 말은 분열된 마음을 의미합니다. 갈등, 모순, 고민 이런 것들은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가 두 주인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분열된 마음에서 오는 것이며, 모순된 인격에서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경험했듯이 어느 순간에든지 한 가지로 결정을 내리고 나면 그 순간부터 마음이 편해집니다. 이럴까 저럴까 망설일 때가 고민이 많습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이렇게 망설이다가 생을 다 보내놓고 진작 결정하지 못한 것까지 후회합니다. 이러한 갈등은 바로 존재 질서의 파괴요, 궤도 이탈입니다. 본연 상실이요, 자기 존재의 상실입니다. 이것이 타락입니다. 우리는 순간 순간 이 문제를 확실히 해야 합니다.

여호수아 24장 15절에 보면,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는 말합니다. 지금 둘 사이에서 기웃거리고 있고 망설이고 있는 소극적인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외칩니다. "너희는 오늘날 섬길 자를 택하라 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섬길 자를 빨리 결정하라고 재촉합니다. 우리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섬길 자를 바로 택하지 못하면 섬기지 말아야 할 것을 섬기게 됩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게 됩니다. 당연히 생각해야 할 일을 생각하지 못하면 잡생각을 하게 됩니다.

즉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섬길 자를 바로 택하여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아픔을 압니다. 그러나 아픔의 원인을 모릅니다. 내가 이렇게 갈등 속에서, 고민 속에서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두 주인을 섬기는 모순 때문인 줄을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무의식화된 자기 존재가 얼마나 깊이 병든 상태임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자존자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벌써 자존자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누군가를 지배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완전히 지배당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무엇을 좀 아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아는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줄줄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청년이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을 힘들게 하면서 자기가 승리했노라고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사이에 가정의 노예가 되어 있는 자신을 보았습니다. 아내의 노예가 되고, 아이들의 노예가 되고, 돈벌려고 애쓰다 보니 돈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귀찮아서 자유다 하고 가출을 하고 보니 방탕의 노예가 됩니다. 자유란 이름만 있었지 사실은 없었습니다. 사람은 철저하게 환경의 노예가 되어버렸기에 즉, becoming이 되었기에, 이제 being(존재)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다고, 현대인의 고민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나라 축구 선수들이 국제 선수들과 자주 시합을 하는데 TV를 보면 안타깝습니다. 대개가 전반적인 잘 싸우는데 후반전에 약합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약한 체력이 말을 듣지 않으니 어찌합니까? 발이 움직여 주어야지요.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지성인들은 말을 곧 잘 합니다. 생각도 대단하지요, 결심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이 너무 초라한 데 문제가 있습니다. 축구협회에 계시는 분이 한번은 중공에 가셨을 때 중국에 있던 청년들에게 그들이 훈련하는 방법을 물어보았답니다. 그들이 대답하기를 5년이나 7년이나 긴 시간을 자기들을 실전 하는 것과 똑같이 매일 시합을 하거나 뛴다고 했답니다. 그러니 시합 날이라고 해서 특별히 더 힘들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몇 달 합숙하는 선수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마음이나 결심만 가지고 되는 것은 없습니다. 이상과 현실, 합리성과 모순, 지성과 갈등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이 고민 속에서 살다보니 모두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소위 철학을 한다는 사람, 문학을 한다는 지성인들이 내린 마지막 결론은 "모순, 이대로 이것이 실존이다" 라고 합니다. 이것이 지성인들의 결론입니다. 이 모순, 이 갈등을 이대로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것, 벌써 깊이 병들어버린 의식 구조입니다. 사람이 원래 그렇게 태어났다나요. 이것이 인간실존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다 끝났습니다. 더 바랄 것이 없으니까요. 갈등과 모순을 하나의 사실로, 실존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그런 철학에 우롱되어서는 안 됩니다.

간혹 사회학이다. 교육학이다 심리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하나의 문제를 놓고 그것은 무엇 때문이며 누구 때문이다 라고 전부 환경으로 돌려서 변명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아무도 책임이 없습니다.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과학적 방법론을 사람을 상대로 응용한 것입니다. 아니, 이 방법론 자체가 인간을 비인간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환경의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환경을 만들어야 하고, 창조할 책임이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바른 궤도에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말씀하시기를 "눈은 몸의 등불이니 눈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냐" 그렇습니다. 눈이 어두워지고 나면, 즉 무지하면 이것처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죄 중에 큰 죄가 무식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짓을 모르기 때문이옵나이다." 모르기 때문에 무서운 것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노예가 되었는지, 죽어 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이제 어디서 구원을 찾아야 합니까? 돈의 노예가 되고 명예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자존심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줄줄 끌려가고 있으면서 자기는 그대로 섰는 줄로 압니다.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돈을 벌었으면 벌어서 자유한 줄 알았는데 돈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출세하면 그것으로 자유할 줄 알았는데 명예의 노예가 되어 불안해 떨고 있습니다. 감정과 분노, 한과 억울함에 묻혀 눈이 어두어지면 비참한 것입니다. 더구나 정욕과 욕심에 끌려가는 비굴한 자기를 한 번 객관시하고 보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원하는 선은 행할 수 없고 원치 않는 죄만 짓는구나 하며 두 자아가 있음을 고백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골짜기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며 자기의 비참한 모습을 바로 보는 안목을 지녔습니다. 시기와 질투는 무서운 것입니다. 여기에 한 번 눈이 어두워지면 정신없습니다. 아무 것도 보이는 게 없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인데, 이 눈이 어두워지면 온 마을, 온 세상이, 온 환경이 얼마나 어둡겠느냐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니와 혹 이를 중히 여기면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니라"(마 6:24)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절대로 같이 섬길 수가 없습니다. 적당히 정치적으로, 처세적으로 어물쩍 넘어갈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가끔 젊은이들하고 대화를 하는 도중 그들의 대답 중에 아주 못마땅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알았어요"라고 대답하는 말입니다. "알았어요, 알았다니까요"라는 그 말의 분위기가 아주 좋지 않습니다. 이 말을 어떻게 소화해야 합니까? 생각해 보니 그 말의 뜻은 "잔소리 그만 하시오, 하고 안하고는 내 마음대로요"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듯 했습니다. 기회주의적인 답변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중에 사람은 점점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기회주의란 인격적 자살 행위란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외식과 위선은 자기 배신입니다. 자기 양심을 스스로 배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부득이 양자 택일을 해야 합니다. 두 주인은 섬기지 못합니다. 하나는 버려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백세에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는 경건하게 하나님만 섬기는 귀한 하나님의 자녀였지만 그 아들이 어느 정도 장성하니 너무 귀엽고 든든해서 그 아들에게만 정신이 팔려 하나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좀 등한히 되었던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이제 결정적인 순간이 옵니다. "아브라함, 네 아들을 모리아산에 데리고 가서 내게 바쳐라." 깜짝 놀랐습니다. 이 때에 비로소 정신을 차립니다. 하나님이냐, 이삭이냐 두 길에서 한 길로 가야 합니다. 그 순간에 결단을 내려 아들을 바치고자 합니다. 이점이 아브라함의 위대한 점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눈앞에 있을 때에 그 언젠가 자기도 모르게 아들이 자기의 우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보시고 네 아들을 내게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두 주인을 섬기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두 친구는 있을 수 있으되 두 애인은 안 됩니다. 두 종은 있을 수 있으나 두 주인은 안 됩니다. 우리 모두 만물을 지배하며 살지만 하나님이 둘이 될 수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서 정과 욕심까지 다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합니다. 전에 좋아하던 것 다 목 박았습니다.

예수님은 네 아내와 형제나 제물이나 네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쉽게 생각하지 맙시다.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어느 결정적인 순간에 가서는 모든 것을 즉, 나의 목숨까지도 포기해야 하는 그 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둘을 다 손에 쥘 수는 없습니다. 갈라디아 1장 10절에서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즉, 하나님과 사람, 어느 쪽입니까? 하나님과 재물, 어느 쪽입니까? 내가 버리지 못하면 하나님이 버리게 하십니다. 내가 헐어버리지 못하는 우상은 하나님이 버리게 하십니다. 만약 내가 나의 명예나 자존심을 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어느 순간에 그것을 제거하실 것입니다. 한 주인을 섬기기 위해서는 또 다른 주인에게 배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니 한 주인을 섬기고 다른 주인은 종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주인은 하나입니다. 어거스틴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라 그리고 모든 것을 너 마음대로 하라." 하나님만이 나의 주인이요, 그 외에 모든 것은 내 종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다스려야 합니다.

마태복음 6:33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말씀을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문맥을 바꾸어 보면 "하나님만 주로 섬기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네 종이 될 것이니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면 모든 것이 바로 우리 손에 있어질 것입니다.

 

기도 자비로우신 주님, 두 주인을 섬기기 위하여 고달픈 생을 살아 왔으며 오늘도 만신창이가 된 가운데에서 고통과 갈등 속에 헤매는 어리석고 우둔한 생을 이제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기도하옵나이다.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여 하나님을 스스로 섬기며 하나님만을 섬길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게 해 주시옵소서.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할 때 이 모든 것을 더하시라고 하신 주님, 주님의 약속을 우리 생애에서 다 받아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귀한 백성들로 삼아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두 주인을 섬기는 사람(마 6:19~24)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심리학자 언겔스마(Ungelsma)는 그의 저서『가면으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Phoniness)에서 인간을 정의하기를 "인간은 being(존재)이 아니고 becoming(되어진 자)"이라고 했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선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자존하는 존재냐 아니면 피존하는 존재냐 즉, 있어지는 자로 존재하느냐 또는 되어지는 자로 존재하느냐는 우리의 사생활에까지 관계가 있는 중요한 현대철학입니다. 쉬운 말로 돌려서 표현하면 인간이 환경을 만드느냐, 환경이 인간을 만드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한 영이 세상을 만드느냐, 세상이 영을 만드느냐 하는 이야기와도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중 불평과 불만 또는 원망들을 하는데 그 원망하는 순간은 사실, 내가 being이 되지 못하고 becoming으로 전락하는 시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날 한 청년이 제게 와서 고민을 말하며 좀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그의 이야기 속에는 부모도 원망하고, 사회도 원망하고, 친구도 원망하고, 그저 그의 주변의 모든 사람과 환경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의 이야기를 다 듣고 묻기를, 만약에 그 모든 사람들이 당신에게 다 잘해 주었다면 당신은 지금 어떻게 되었겠느냐고요. 즉, 그러면 당신은 도대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환경에다 나 됨을 돌린다면 나는 무엇이냐 그 말입니다.

자, 우리가 사랑 받았다고 다 사랑합니까? 도둑맞았다고 다 도둑질하는 것입니까? 가난하다고 해서 다 도둑이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란 말입니다. 또한 병들었다고 다 절망합니까? 분명히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환경의 존재가 아닙니다. 적어도 이 역설적인 진리 가운데에 인간의 인간된 존재가 있는 것입니다.

환경을 탓하고 누구를 원망하며 사는 동안은 "나"라고 하는 존재가 상실되어 감을 알아야 합니다. 오래 전에 타임지에 실린 논문으로 "어떻게 부모를 가르칠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사실 좋은 부모를 만드는 것도 자식의 책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있어지는 모든 것들을 다 내가 책임지는 것입니다. 나에 의해서 환경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해마다 밤 벚꽃놀이 때가 되면 창경원은 인산인해라고 합니다. 구경을 하고 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사람이 너무 많아 벚꽃은 커녕 사람만 구경하고 왔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내가 다른 사람 구경한 것만 생각하지 남들이 나를 구경한 것은 생각지도 않습니다.

여러분, 나라고 하는 존재가 무엇입니까? 나를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중요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피조물입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존재케 하는 그런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자유가 있고 선택이 있고 또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는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만물 앞에서는 주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는 되어진 바요, 만물 앞에서는 존재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인간 존재 자기의 그 본연의 위치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섬기고, 모든 것은 다스려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여기서 자칫 잘못하면 두 가지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하나는 내가 다스릴 수가 있다고 해서 인간이 하나님을 부인하면서까지 스스로 존재한다고 교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큰 죄입니다. 또 한 가지는 만물은 무엇이든지 우리가 다스려야 하는데 그에게 매이든지, 그를 섬기는 것입니다. 피조물을 섬기는 것은 우상 숭배의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신앙적으로 살아야 하고, 만물 앞에서는 주관자로 살아야 하는 그 존재 본연의 위치를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 문제에 대해 중요한 대답을 하십니다.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리라." 두 주인을 섬기는 자는 고민이 많습니다. 이것은 고통입니다. 원래 헬라 말로 고민이라는 말은 분열된 마음을 의미합니다. 갈등, 모순, 고민 이런 것들은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가 두 주인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분열된 마음에서 오는 것이며, 모순된 인격에서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경험했듯이 어느 순간에든지 한 가지로 결정을 내리고 나면 그 순간부터 마음이 편해집니다. 이럴까 저럴까 망설일 때가 고민이 많습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이렇게 망설이다가 생을 다 보내놓고 진작 결정하지 못한 것까지 후회합니다. 이러한 갈등은 바로 존재 질서의 파괴요, 궤도 이탈입니다. 본연 상실이요, 자기 존재의 상실입니다. 이것이 타락입니다. 우리는 순간 순간 이 문제를 확실히 해야 합니다.

여호수아 24장 15절에 보면,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는 말합니다. 지금 둘 사이에서 기웃거리고 있고 망설이고 있는 소극적인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외칩니다. "너희는 오늘날 섬길 자를 택하라 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섬길 자를 빨리 결정하라고 재촉합니다. 우리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섬길 자를 바로 택하지 못하면 섬기지 말아야 할 것을 섬기게 됩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게 됩니다. 당연히 생각해야 할 일을 생각하지 못하면 잡생각을 하게 됩니다.

즉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섬길 자를 바로 택하여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아픔을 압니다. 그러나 아픔의 원인을 모릅니다. 내가 이렇게 갈등 속에서, 고민 속에서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두 주인을 섬기는 모순 때문인 줄을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무의식화된 자기 존재가 얼마나 깊이 병든 상태임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자존자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벌써 자존자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누군가를 지배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완전히 지배당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무엇을 좀 아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아는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줄줄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청년이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을 힘들게 하면서 자기가 승리했노라고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사이에 가정의 노예가 되어 있는 자신을 보았습니다. 아내의 노예가 되고, 아이들의 노예가 되고, 돈벌려고 애쓰다 보니 돈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귀찮아서 자유다 하고 가출을 하고 보니 방탕의 노예가 됩니다. 자유란 이름만 있었지 사실은 없었습니다. 사람은 철저하게 환경의 노예가 되어버렸기에 즉, becoming이 되었기에, 이제 being(존재)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다고, 현대인의 고민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나라 축구 선수들이 국제 선수들과 자주 시합을 하는데 TV를 보면 안타깝습니다. 대개가 전반적인 잘 싸우는데 후반전에 약합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약한 체력이 말을 듣지 않으니 어찌합니까? 발이 움직여 주어야지요.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지성인들은 말을 곧 잘 합니다. 생각도 대단하지요, 결심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이 너무 초라한 데 문제가 있습니다. 축구협회에 계시는 분이 한번은 중공에 가셨을 때 중국에 있던 청년들에게 그들이 훈련하는 방법을 물어보았답니다. 그들이 대답하기를 5년이나 7년이나 긴 시간을 자기들을 실전 하는 것과 똑같이 매일 시합을 하거나 뛴다고 했답니다. 그러니 시합 날이라고 해서 특별히 더 힘들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몇 달 합숙하는 선수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마음이나 결심만 가지고 되는 것은 없습니다. 이상과 현실, 합리성과 모순, 지성과 갈등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이 고민 속에서 살다보니 모두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소위 철학을 한다는 사람, 문학을 한다는 지성인들이 내린 마지막 결론은 "모순, 이대로 이것이 실존이다" 라고 합니다. 이것이 지성인들의 결론입니다. 이 모순, 이 갈등을 이대로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것, 벌써 깊이 병들어버린 의식 구조입니다. 사람이 원래 그렇게 태어났다나요. 이것이 인간실존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다 끝났습니다. 더 바랄 것이 없으니까요. 갈등과 모순을 하나의 사실로, 실존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그런 철학에 우롱되어서는 안 됩니다.

간혹 사회학이다. 교육학이다 심리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하나의 문제를 놓고 그것은 무엇 때문이며 누구 때문이다 라고 전부 환경으로 돌려서 변명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아무도 책임이 없습니다.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과학적 방법론을 사람을 상대로 응용한 것입니다. 아니, 이 방법론 자체가 인간을 비인간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환경의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환경을 만들어야 하고, 창조할 책임이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바른 궤도에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말씀하시기를 "눈은 몸의 등불이니 눈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냐" 그렇습니다. 눈이 어두워지고 나면, 즉 무지하면 이것처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죄 중에 큰 죄가 무식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짓을 모르기 때문이옵나이다." 모르기 때문에 무서운 것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노예가 되었는지, 죽어 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이제 어디서 구원을 찾아야 합니까? 돈의 노예가 되고 명예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자존심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줄줄 끌려가고 있으면서 자기는 그대로 섰는 줄로 압니다.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돈을 벌었으면 벌어서 자유한 줄 알았는데 돈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출세하면 그것으로 자유할 줄 알았는데 명예의 노예가 되어 불안해 떨고 있습니다. 감정과 분노, 한과 억울함에 묻혀 눈이 어두어지면 비참한 것입니다. 더구나 정욕과 욕심에 끌려가는 비굴한 자기를 한 번 객관시하고 보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원하는 선은 행할 수 없고 원치 않는 죄만 짓는구나 하며 두 자아가 있음을 고백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골짜기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며 자기의 비참한 모습을 바로 보는 안목을 지녔습니다. 시기와 질투는 무서운 것입니다. 여기에 한 번 눈이 어두워지면 정신없습니다. 아무 것도 보이는 게 없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인데, 이 눈이 어두워지면 온 마을, 온 세상이, 온 환경이 얼마나 어둡겠느냐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니와 혹 이를 중히 여기면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니라"(마 6:24)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절대로 같이 섬길 수가 없습니다. 적당히 정치적으로, 처세적으로 어물쩍 넘어갈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가끔 젊은이들하고 대화를 하는 도중 그들의 대답 중에 아주 못마땅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알았어요"라고 대답하는 말입니다. "알았어요, 알았다니까요"라는 그 말의 분위기가 아주 좋지 않습니다. 이 말을 어떻게 소화해야 합니까? 생각해 보니 그 말의 뜻은 "잔소리 그만 하시오, 하고 안하고는 내 마음대로요"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듯 했습니다. 기회주의적인 답변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중에 사람은 점점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기회주의란 인격적 자살 행위란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외식과 위선은 자기 배신입니다. 자기 양심을 스스로 배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부득이 양자 택일을 해야 합니다. 두 주인은 섬기지 못합니다. 하나는 버려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백세에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는 경건하게 하나님만 섬기는 귀한 하나님의 자녀였지만 그 아들이 어느 정도 장성하니 너무 귀엽고 든든해서 그 아들에게만 정신이 팔려 하나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좀 등한히 되었던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이제 결정적인 순간이 옵니다. "아브라함, 네 아들을 모리아산에 데리고 가서 내게 바쳐라." 깜짝 놀랐습니다. 이 때에 비로소 정신을 차립니다. 하나님이냐, 이삭이냐 두 길에서 한 길로 가야 합니다. 그 순간에 결단을 내려 아들을 바치고자 합니다. 이점이 아브라함의 위대한 점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눈앞에 있을 때에 그 언젠가 자기도 모르게 아들이 자기의 우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보시고 네 아들을 내게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두 주인을 섬기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두 친구는 있을 수 있으되 두 애인은 안 됩니다. 두 종은 있을 수 있으나 두 주인은 안 됩니다. 우리 모두 만물을 지배하며 살지만 하나님이 둘이 될 수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서 정과 욕심까지 다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합니다. 전에 좋아하던 것 다 목 박았습니다.

예수님은 네 아내와 형제나 제물이나 네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쉽게 생각하지 맙시다.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어느 결정적인 순간에 가서는 모든 것을 즉, 나의 목숨까지도 포기해야 하는 그 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둘을 다 손에 쥘 수는 없습니다. 갈라디아 1장 10절에서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즉, 하나님과 사람, 어느 쪽입니까? 하나님과 재물, 어느 쪽입니까? 내가 버리지 못하면 하나님이 버리게 하십니다. 내가 헐어버리지 못하는 우상은 하나님이 버리게 하십니다. 만약 내가 나의 명예나 자존심을 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어느 순간에 그것을 제거하실 것입니다. 한 주인을 섬기기 위해서는 또 다른 주인에게 배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니 한 주인을 섬기고 다른 주인은 종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주인은 하나입니다. 어거스틴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라 그리고 모든 것을 너 마음대로 하라." 하나님만이 나의 주인이요, 그 외에 모든 것은 내 종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다스려야 합니다.

마태복음 6:33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말씀을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문맥을 바꾸어 보면 "하나님만 주로 섬기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네 종이 될 것이니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면 모든 것이 바로 우리 손에 있어질 것입니다.

 

기도 자비로우신 주님, 두 주인을 섬기기 위하여 고달픈 생을 살아 왔으며 오늘도 만신창이가 된 가운데에서 고통과 갈등 속에 헤매는 어리석고 우둔한 생을 이제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기도하옵나이다.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여 하나님을 스스로 섬기며 하나님만을 섬길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게 해 주시옵소서.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할 때 이 모든 것을 더하시라고 하신 주님, 주님의 약속을 우리 생애에서 다 받아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귀한 백성들로 삼아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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