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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한복음 5장 19절~29절)

by 【고동엽】 2024.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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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한복음 5장 19절~29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우리 주 예수님의 고통을 생각해봅니다.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어떠한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입니다. 양손과 양발에 못을 박히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시며 죽어 가셨습니다. 그 육체적 고통이 얼마나 견디기 힘드셨겠습니까? 그러나 그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이 있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의 간교한 계략이요, 제자들의 배신입니다.

로마 군병들의 잔혹한 행위나 빌라도의 그릇된 재판보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혹 지나는 사람들과 옆에서 함께 죽어 가는 강도조차 예수님을 모욕하고 조롱한 것이었습니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지어다(막 15 : 31, 32)"----갖은 조소와 비난과 저주를 퍼붓습니다. 육체적인 고통보다도 이러한 모욕이 더 견디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높이 계셔서 무지몽매한 저들을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 34)." 지금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얼마나 엄청난 죄를 범하고 있는지를 모르기에 저지르는 일이라고, 저들의 죄사함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기도하고 계십니다.

호세아 4장에 보면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6절)"라는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정치․경제․사회․문화, 심지어 종교에까지 망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저마다 안다고들 떠들어대지만 사실은 모르기에 그렇습니다.

저 미래를 모르고 있습니다. 참뜻을 모르고 있습니다. 개인이건 사회건 국가건, 모르기에 망하는 것입니다. 우리 남한의 국민들, 특히 젊은이들, 자기의 행복을 몰라서 문제입니다. 전 세계를 다니면서 가만히 보니 우리만큼 살면 참 잘사는 것입디다. 땅 좋고 물 좋고 계절 좋은 곳이 바로 우리 나라입니다. 잘먹고 잘삽니다.

게다가 자유롭고 행복합니다. 저는 다른 나라를 돌아다니다가 돌아올 때면 늘 공항에 도착해서 먼저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가 참 좋구나 하는 것입니다. 이만하면 잘삽니다. 그러나 그 행복을 모르고 있습니다. 몰라서 불평이요, 몰라서 점점 더 어려운 문제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북한은 어떻습니까? 사실 그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부자유합니다. 참으로 불행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네가 얼마나 불행하게 사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전혀 모르고 삽니다. 자기네들이 사는 세계 이외의 그 어느 세계도 본 일이 없고 들은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교할만한 것이 없으니 당연히 모를 수밖에요. 남쪽은 행복을 몰라서 문제요, 북쪽은 불행을 몰라서 문제입니다.

북한은 평양이나 시골이나 할 것 없이 물질적인 빈곤이 눈에 확연합니다. 그 정도가 말할 수 없이 비참합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못삽니다. 더욱이 마음 아픈 것은 북한 전지역에 라디오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예 라디오 자체를 생산하지 않습니다.

대신 집집마다 유선 스피커가 달려 있습니다. 이것은 끌 수도 켤 수도 없게 만들어져 있어서 밤이건 낮이건 소리가 나오면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현실이 이렇습니다. 저는 평양에 들어가면서 특별허가를 받아 조그마한 라디오를 하나 가지고 갔었습니다.

틀어보니 전 세계의 방송이 다 잡힙니다. 특히 남한의 기독교방송, 극동방송, 아세아방송이 아주 깨끗하게 들립니다. 새벽 다섯 시에 트니까 제 목소리가 나옵니다. 제가 하는 욥기 강해가 흘러나옵니다. 자, 이렇습니다. 다 들을 수 있는데 그들에겐 라디오가 없습니다. 그 좋은 음악, 그 좋은 복음이 이미 전파를 타고 북녘 땅 곳곳에 도달해 있지만 수신기가 없어서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문도 없습니다. 듣는 것도 보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에 깜깜합니다. 슬픈 현실입니다.

사람은 들어야 합니다. 최소한 다섯 가지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 생명의 소리, 복음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잘사느니 못사느니 하며 아우성입니다만, 다 소용없습니다. 문제는 나의 생명입니다. 생명의 소리, 복음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반드시 들어야 합니다. 못 들으면 죽습니다.

둘째, 깨우치는 경고와 훈계를 들어야 합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 할 때의 일입니다. 서울 노량진에 사는 농아 전도사님 한 분을 기용하여 교회에 농아부를 만들었습니다. 50여 명의 농아들이 모여들어 그 전도사님을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예배를 드리고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운동장에서 놀면서 하루종일 교회에 있다가 저녁예배를 보고서야 비로소 집으로 돌아가고는 했습니다. 참 좋은 일을 많이 하는 전도사님이었는데, 어느 날엔가 저녁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다가 그만 사고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아시다시피 노량진역은 한강을 건너서 역으로 들어오는 철로가 굽어져 있어 기차가 가까이 오기 전에는 그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날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플랫폼에서 내려와 철로를 건너려는데, 바로 그때 기적소리가 울렸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고 다 피했는데, 그 전도사님만은 소리를 듣지 못해서 그대로 기차에 치어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평생을 듣지 못하는 것으로 고통을 받으며 살더니 마지막까지 그 듣지 못하는 탓으로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참 가슴아픈 이야기입니다. 듣지 못하면 죽습니다. 깨우치는 경고와 훈계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셋째, 세월이 흐르는 소리, 시계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까뮈는 '죽음에 대한 자각은 인간 실존의 시작'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하이데거도 '죽음은 인간 실존의 한계'라고 말했습니다.

적어도 사람은 죽는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부터 사람입니다. 그 사실을 알면서부터 인간 실존이 비롯됩니다. 또한 그것은 인간 실존의 한계입니다. 우리는 시계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내 인생의 현주소만 알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의 시점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고, 얼마나 남아 있는가----세월 흐르는 소리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넷째, 무지와 편견과 교만을 깨우치는 교훈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무지하고 편견에 치우치기 쉽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를 가르치는 교훈의 소리를 겸손하게 들을 줄 알아야겠습니다. 오래 전의 이야기입니다만, 퍽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미국에 자동차 1급 정비사인 젊은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일부러 아주 낡은 차를 구입해서 자신이 직접 정비하여 새 차 못지 않게 잘 몰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 그 차를 몰고 넓은 광야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시동이 꺼지고 차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어디가 고장이 났나보다 하고 보닛을 열고 이것저것 만져보아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고치느라 애를 쓰고 있는데 마침 아주 좋은 고급 자동차가 지나가다가 보고 멈춥니다. 노신사 한 분이 내려서는 자동차 고치는 것을 들여다봅니다. "젊은이, 내가 좀 도와줄까?" "제가 1급 정비사입니다. 쓸데없는 소리 마십시오." 그리고는 또 차를 들여다보며 이것저것을 만집니다. "내가 좀 도와줄까?" "쓸데없는 소리 마십시오." 이렇게 큰소리를 치고서도 청년은 끝내 차를 고치지 못했습니다. 일이 그렇게 되자 청년은 하는 수없이 노인에게 차를 맡겨봅니다. 노인은 차 속을 들여다보고 어느 한 곳을 뚝뚝 칩니다.

그러자 차의 시동이 걸렸습니다. 청년은 하도 기가 막혀서 노인에게 묻습니다. "선생님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나? 헨리 포드요." 자동차 왕 헨리 포드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아는 체하지 마십시오. 편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나보다 훨씬 지혜롭고 훌륭한 사람이 많습니다. 중요한 교훈이 가득 차 있습니다. 미련스런 아집일랑 버리고 교훈을 받아들일 줄 아는, 들을 줄 아는 귀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다섯째, 영혼을 풍요하게 하는 사랑과 그 사랑의 고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완악하고 교만하더라도 사랑의 고백만큼은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고, 이웃과 형제의 사랑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마음이 없이는 영혼이 살 수 없습니다. 사랑의 고백을 받아들이는 순간, 영혼은 풍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귀한 소리를 듣지 않는 것입니까?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교만 때문에 듣지 않습니다. 나로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아는 지식으로 완벽하다고 믿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경험이 전부인 줄로 압니다. 좀 겸손해 지십시다. 그래야 들려집니다. 교만은 패망의 원인이요, 끝입니다. 겸비해서 마음을 열어야 언제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귀한 교훈이 많습니다. 좋은 말씀이 많습니다. 귀만 기울이면 복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또한 지금 나에게 진정코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필요한 것을 다 가졌다고 생각합니다만, 아직 멀었습니다. 다 안다고 생각합니다만, 알기는 무엇을 안다는 것입니까?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나의 부족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귀가 열리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 나오는 분들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어떤 분은 낮에도 나오고 저녁에도 나오고 새벽에도 나옵니다. 예배 드리고 성경공부 하고, 계속 듣고 배워도 모자라 배우고 또 듣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뭘 그리 자꾸 나가느냐고, 일주일에 한번이면 충분하지 않느냐고 합니다. 여러분, 건강한 사람은 먹어도 먹어도 또 먹어야 하는 것처럼, 건강한 심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들어도 또 듣고 싶고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항상 배고파하는 자세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듣는 마음입니다.

말씀하시는 분에 대한 신뢰도도 문제가 됩니다. 좀더 겸손한 자세로 한 계단만 내려서 보십시오. 다 훌륭하게 보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어른들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으려 합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른들은 적어도 나보다 인생의 선배이며, 몇십 년 더 살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들을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부모의 말을 듣고 선배의 말을 듣고 스승의 말을 듣고 역사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좀더 신뢰를 가지고 상대방을 존경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십시다.

더욱이 이미 배신당한 경험이 있기에 더는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속은 것에 대한 상처와 나쁜 경험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여 새로운 진리에 대해서도 귀를 기울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에 보면 아주 극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변화산 상에 계셨습니다. 그때 마침 산아래 남은 아홉 제자에게 벙어리귀신 들린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와서 병을 고쳐달라고 합니다. 의사에게도 가보고 무당에게도 가보다가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온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도 고치지 못했습니다. 실망을 하고 있던 차에 예수님께서 내려오시자 예수님을 붙들고 또 간청을 합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지금까지 줄곧 배신만 당해왔으므로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책망의 말씀을 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여러분, 지금까지 속아왔더라도 이제는 믿어야 합니다. 과거에 백 번 천 번 속았더라도 이제부터는 믿음을 가지고 대해보십시다. 새로운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 저는 북한에 들어가서 그쪽의 고관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지금까지는 믿지 못하고 대치해왔지만 이제부터라도 믿고 대화를 나누자는 진지한 마음으로 대화의 문을 여니 얼마나 이야기가 잘 풀려나가는지 모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신뢰성의 회복은 어느 누군가의 작은 믿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끝까지 믿지 않으면 이야기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바로 들려지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 아주 귀한 명제가 있습니다.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라는 요절입니다. 그리스도는 말씀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도 말씀으로 계시됩니다. 이것은 인격적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기계론적으로, 혹은 물리적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인격적으로 나타납니다.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자연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전도자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계속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말씀하시는 자와 말씀 듣는 자 사이에 인격적 관계가 형성됩니다.

주먹이 아니요 말로 이루어지는 관계입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인격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셔서 적극적으로 우리를 만나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말씀을 비유를 들어 하셨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을 비유로 들어 '천국은 마치 이와 같으니라'라고 자세하게 설명해주십니다. 또한 권능으로 말씀하십니다. 말씀 자체가 능력이었습니다. "일어나라"하시니 병자가 일어났고, "물러나라"하시니 귀신이 물러났고, "조용하라"하시니 풍랑이 고요해졌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지나가는 상여를 멈추시고 "청년아 일어나라"하시니 곧 시체가 일어납니다. 죽은 지 나흘된, 이미 무덤에 장사지낸 시체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너라"하고 외치시니 그 죽은 자가 무덤으로부터 걸어나왔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들이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본문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지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언적으로 심판적으로 나타납니다. 여러분, 죽음이 무엇입니까? 불신과 반항과 절망과 실의, 그리고 변화가 없는, 생명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아무런 감각도 없습니다.

들려지는 것도 없고 소망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죽은 자가 말씀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저는 종종 북경을 갑니다. 일전에는 북경에 가서 너무 감격스러운 일을 보았습니다. 고맙게도 중국 전역에는 라디오가 보급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들을 수가 있습니다. 제가 10년 동안 방송을 해오고 있는데, 그곳에서도 다섯 시 반이면 어김없이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해가 뜨면 전파가 약해지니 더 이른 새벽에 해달라는 부탁까지 해옵니다. 한번은 하얼빈에서 온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10년 동안 제가 하는 새벽 방송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들어왔다고 합니다. 호텔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제 음성을 듣자 반색을 합니다. 10년 동안 들어와서 잘 안다고 합니다. "늘 목사님의 음성을 들어왔지만 이렇게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제 얼굴은 모르지만, 어느 날 우연히 성경을 강해하는 방송을 들었고, 이후로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40년 동안 받아온 공산주의 교양도 아랑곳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면서 마침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너무 반갑고 좋아서 이웃 사람들에게도 듣도록 권하고, 듣고 나서는 서로 모여서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이렇게 하기 시작한 것인데 지금에 와서는 3백여 명이 모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공안부에 요청하여 정식으로 예배를 허락 받아 냈습니다. 그때 마침 제게 4천 불이 있어서 주었더니, 그 돈으로 장소를 구했습니다. 그 다음에 갔더니 예배당 사진을 보여줍니다.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누구든지, 제아무리 죽은 자와 같다 해도 말씀만 들으면 살아납니다.

말씀의 능력으로 살아납니다. 예나 오늘이나 말씀은 살아 역사 합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오신 그리스도께 감사해야 합니다. 전도자가 있어 들을 수 있음을 감사하고, 마음이 열려 말씀을 수용할 수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성령을 보내사 믿게 하시니 감사하고, 순종하여 자유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시니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합디다. 조물주가 사람을 창조할 때 몇 가지의 실수를 했다는 것입니다. 눈은 감았다 떴다 할 수 있고 입 또한 열었다 닫았다 할 수 있는데, 귀와 코는 늘 열어 놓은 것입니다. 보기 싫은 것은 눈감고, 말하기 싫으면 입만 다물면 그만이지만, 듣기 싫은 소리는 안들을 재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실수이겠습니까? 이것도 말씀입니다. 보고 싶지 않거든 눈감으면 그만이고 말하고 싶지 않거든 입을 다물면 됩니다만, 듣는 것만큼은 살아 있는 한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자면서까지 들으라, 항상 들으라, 귀는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 어른의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들어두십시다. 많이 들어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듣게 됨을, 들려짐을 감사할 것입니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지는 거기에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그 말씀이 내게 주는 말씀으로 들려지는 거기에 영생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온 백성으로 하여금 듣게 할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는, 그래서 구원받지 못하는 심령이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다시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입시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시겠습니까?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한복음 5장 19절~29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우리 주 예수님의 고통을 생각해봅니다.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어떠한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입니다. 양손과 양발에 못을 박히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시며 죽어 가셨습니다. 그 육체적 고통이 얼마나 견디기 힘드셨겠습니까? 그러나 그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이 있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의 간교한 계략이요, 제자들의 배신입니다.

로마 군병들의 잔혹한 행위나 빌라도의 그릇된 재판보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혹 지나는 사람들과 옆에서 함께 죽어 가는 강도조차 예수님을 모욕하고 조롱한 것이었습니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지어다(막 15 : 31, 32)"----갖은 조소와 비난과 저주를 퍼붓습니다. 육체적인 고통보다도 이러한 모욕이 더 견디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높이 계셔서 무지몽매한 저들을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 34)." 지금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얼마나 엄청난 죄를 범하고 있는지를 모르기에 저지르는 일이라고, 저들의 죄사함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기도하고 계십니다.

호세아 4장에 보면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6절)"라는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정치․경제․사회․문화, 심지어 종교에까지 망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저마다 안다고들 떠들어대지만 사실은 모르기에 그렇습니다.

저 미래를 모르고 있습니다. 참뜻을 모르고 있습니다. 개인이건 사회건 국가건, 모르기에 망하는 것입니다. 우리 남한의 국민들, 특히 젊은이들, 자기의 행복을 몰라서 문제입니다. 전 세계를 다니면서 가만히 보니 우리만큼 살면 참 잘사는 것입디다. 땅 좋고 물 좋고 계절 좋은 곳이 바로 우리 나라입니다. 잘먹고 잘삽니다.

게다가 자유롭고 행복합니다. 저는 다른 나라를 돌아다니다가 돌아올 때면 늘 공항에 도착해서 먼저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가 참 좋구나 하는 것입니다. 이만하면 잘삽니다. 그러나 그 행복을 모르고 있습니다. 몰라서 불평이요, 몰라서 점점 더 어려운 문제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북한은 어떻습니까? 사실 그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부자유합니다. 참으로 불행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네가 얼마나 불행하게 사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전혀 모르고 삽니다. 자기네들이 사는 세계 이외의 그 어느 세계도 본 일이 없고 들은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교할만한 것이 없으니 당연히 모를 수밖에요. 남쪽은 행복을 몰라서 문제요, 북쪽은 불행을 몰라서 문제입니다.

북한은 평양이나 시골이나 할 것 없이 물질적인 빈곤이 눈에 확연합니다. 그 정도가 말할 수 없이 비참합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못삽니다. 더욱이 마음 아픈 것은 북한 전지역에 라디오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예 라디오 자체를 생산하지 않습니다.

대신 집집마다 유선 스피커가 달려 있습니다. 이것은 끌 수도 켤 수도 없게 만들어져 있어서 밤이건 낮이건 소리가 나오면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현실이 이렇습니다. 저는 평양에 들어가면서 특별허가를 받아 조그마한 라디오를 하나 가지고 갔었습니다.

틀어보니 전 세계의 방송이 다 잡힙니다. 특히 남한의 기독교방송, 극동방송, 아세아방송이 아주 깨끗하게 들립니다. 새벽 다섯 시에 트니까 제 목소리가 나옵니다. 제가 하는 욥기 강해가 흘러나옵니다. 자, 이렇습니다. 다 들을 수 있는데 그들에겐 라디오가 없습니다. 그 좋은 음악, 그 좋은 복음이 이미 전파를 타고 북녘 땅 곳곳에 도달해 있지만 수신기가 없어서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문도 없습니다. 듣는 것도 보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에 깜깜합니다. 슬픈 현실입니다.

사람은 들어야 합니다. 최소한 다섯 가지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 생명의 소리, 복음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잘사느니 못사느니 하며 아우성입니다만, 다 소용없습니다. 문제는 나의 생명입니다. 생명의 소리, 복음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반드시 들어야 합니다. 못 들으면 죽습니다.

둘째, 깨우치는 경고와 훈계를 들어야 합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 할 때의 일입니다. 서울 노량진에 사는 농아 전도사님 한 분을 기용하여 교회에 농아부를 만들었습니다. 50여 명의 농아들이 모여들어 그 전도사님을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예배를 드리고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운동장에서 놀면서 하루종일 교회에 있다가 저녁예배를 보고서야 비로소 집으로 돌아가고는 했습니다. 참 좋은 일을 많이 하는 전도사님이었는데, 어느 날엔가 저녁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다가 그만 사고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아시다시피 노량진역은 한강을 건너서 역으로 들어오는 철로가 굽어져 있어 기차가 가까이 오기 전에는 그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날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플랫폼에서 내려와 철로를 건너려는데, 바로 그때 기적소리가 울렸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고 다 피했는데, 그 전도사님만은 소리를 듣지 못해서 그대로 기차에 치어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평생을 듣지 못하는 것으로 고통을 받으며 살더니 마지막까지 그 듣지 못하는 탓으로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참 가슴아픈 이야기입니다. 듣지 못하면 죽습니다. 깨우치는 경고와 훈계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셋째, 세월이 흐르는 소리, 시계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까뮈는 '죽음에 대한 자각은 인간 실존의 시작'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하이데거도 '죽음은 인간 실존의 한계'라고 말했습니다.

적어도 사람은 죽는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부터 사람입니다. 그 사실을 알면서부터 인간 실존이 비롯됩니다. 또한 그것은 인간 실존의 한계입니다. 우리는 시계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내 인생의 현주소만 알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의 시점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고, 얼마나 남아 있는가----세월 흐르는 소리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넷째, 무지와 편견과 교만을 깨우치는 교훈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무지하고 편견에 치우치기 쉽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를 가르치는 교훈의 소리를 겸손하게 들을 줄 알아야겠습니다. 오래 전의 이야기입니다만, 퍽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미국에 자동차 1급 정비사인 젊은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일부러 아주 낡은 차를 구입해서 자신이 직접 정비하여 새 차 못지 않게 잘 몰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 그 차를 몰고 넓은 광야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시동이 꺼지고 차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어디가 고장이 났나보다 하고 보닛을 열고 이것저것 만져보아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고치느라 애를 쓰고 있는데 마침 아주 좋은 고급 자동차가 지나가다가 보고 멈춥니다. 노신사 한 분이 내려서는 자동차 고치는 것을 들여다봅니다. "젊은이, 내가 좀 도와줄까?" "제가 1급 정비사입니다. 쓸데없는 소리 마십시오." 그리고는 또 차를 들여다보며 이것저것을 만집니다. "내가 좀 도와줄까?" "쓸데없는 소리 마십시오." 이렇게 큰소리를 치고서도 청년은 끝내 차를 고치지 못했습니다. 일이 그렇게 되자 청년은 하는 수없이 노인에게 차를 맡겨봅니다. 노인은 차 속을 들여다보고 어느 한 곳을 뚝뚝 칩니다.

그러자 차의 시동이 걸렸습니다. 청년은 하도 기가 막혀서 노인에게 묻습니다. "선생님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나? 헨리 포드요." 자동차 왕 헨리 포드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아는 체하지 마십시오. 편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나보다 훨씬 지혜롭고 훌륭한 사람이 많습니다. 중요한 교훈이 가득 차 있습니다. 미련스런 아집일랑 버리고 교훈을 받아들일 줄 아는, 들을 줄 아는 귀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다섯째, 영혼을 풍요하게 하는 사랑과 그 사랑의 고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완악하고 교만하더라도 사랑의 고백만큼은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고, 이웃과 형제의 사랑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마음이 없이는 영혼이 살 수 없습니다. 사랑의 고백을 받아들이는 순간, 영혼은 풍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귀한 소리를 듣지 않는 것입니까?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교만 때문에 듣지 않습니다. 나로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아는 지식으로 완벽하다고 믿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경험이 전부인 줄로 압니다. 좀 겸손해 지십시다. 그래야 들려집니다. 교만은 패망의 원인이요, 끝입니다. 겸비해서 마음을 열어야 언제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귀한 교훈이 많습니다. 좋은 말씀이 많습니다. 귀만 기울이면 복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또한 지금 나에게 진정코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필요한 것을 다 가졌다고 생각합니다만, 아직 멀었습니다. 다 안다고 생각합니다만, 알기는 무엇을 안다는 것입니까?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나의 부족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귀가 열리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 나오는 분들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어떤 분은 낮에도 나오고 저녁에도 나오고 새벽에도 나옵니다. 예배 드리고 성경공부 하고, 계속 듣고 배워도 모자라 배우고 또 듣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뭘 그리 자꾸 나가느냐고, 일주일에 한번이면 충분하지 않느냐고 합니다. 여러분, 건강한 사람은 먹어도 먹어도 또 먹어야 하는 것처럼, 건강한 심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들어도 또 듣고 싶고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항상 배고파하는 자세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듣는 마음입니다.

말씀하시는 분에 대한 신뢰도도 문제가 됩니다. 좀더 겸손한 자세로 한 계단만 내려서 보십시오. 다 훌륭하게 보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어른들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으려 합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른들은 적어도 나보다 인생의 선배이며, 몇십 년 더 살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들을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부모의 말을 듣고 선배의 말을 듣고 스승의 말을 듣고 역사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좀더 신뢰를 가지고 상대방을 존경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십시다.

더욱이 이미 배신당한 경험이 있기에 더는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속은 것에 대한 상처와 나쁜 경험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여 새로운 진리에 대해서도 귀를 기울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에 보면 아주 극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변화산 상에 계셨습니다. 그때 마침 산아래 남은 아홉 제자에게 벙어리귀신 들린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와서 병을 고쳐달라고 합니다. 의사에게도 가보고 무당에게도 가보다가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온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도 고치지 못했습니다. 실망을 하고 있던 차에 예수님께서 내려오시자 예수님을 붙들고 또 간청을 합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지금까지 줄곧 배신만 당해왔으므로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책망의 말씀을 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여러분, 지금까지 속아왔더라도 이제는 믿어야 합니다. 과거에 백 번 천 번 속았더라도 이제부터는 믿음을 가지고 대해보십시다. 새로운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 저는 북한에 들어가서 그쪽의 고관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지금까지는 믿지 못하고 대치해왔지만 이제부터라도 믿고 대화를 나누자는 진지한 마음으로 대화의 문을 여니 얼마나 이야기가 잘 풀려나가는지 모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신뢰성의 회복은 어느 누군가의 작은 믿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끝까지 믿지 않으면 이야기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바로 들려지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 아주 귀한 명제가 있습니다.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라는 요절입니다. 그리스도는 말씀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도 말씀으로 계시됩니다. 이것은 인격적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기계론적으로, 혹은 물리적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인격적으로 나타납니다.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자연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전도자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계속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말씀하시는 자와 말씀 듣는 자 사이에 인격적 관계가 형성됩니다.

주먹이 아니요 말로 이루어지는 관계입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인격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셔서 적극적으로 우리를 만나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말씀을 비유를 들어 하셨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을 비유로 들어 '천국은 마치 이와 같으니라'라고 자세하게 설명해주십니다. 또한 권능으로 말씀하십니다. 말씀 자체가 능력이었습니다. "일어나라"하시니 병자가 일어났고, "물러나라"하시니 귀신이 물러났고, "조용하라"하시니 풍랑이 고요해졌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지나가는 상여를 멈추시고 "청년아 일어나라"하시니 곧 시체가 일어납니다. 죽은 지 나흘된, 이미 무덤에 장사지낸 시체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너라"하고 외치시니 그 죽은 자가 무덤으로부터 걸어나왔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들이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본문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지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언적으로 심판적으로 나타납니다. 여러분, 죽음이 무엇입니까? 불신과 반항과 절망과 실의, 그리고 변화가 없는, 생명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아무런 감각도 없습니다.

들려지는 것도 없고 소망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죽은 자가 말씀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저는 종종 북경을 갑니다. 일전에는 북경에 가서 너무 감격스러운 일을 보았습니다. 고맙게도 중국 전역에는 라디오가 보급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들을 수가 있습니다. 제가 10년 동안 방송을 해오고 있는데, 그곳에서도 다섯 시 반이면 어김없이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해가 뜨면 전파가 약해지니 더 이른 새벽에 해달라는 부탁까지 해옵니다. 한번은 하얼빈에서 온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10년 동안 제가 하는 새벽 방송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들어왔다고 합니다. 호텔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제 음성을 듣자 반색을 합니다. 10년 동안 들어와서 잘 안다고 합니다. "늘 목사님의 음성을 들어왔지만 이렇게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제 얼굴은 모르지만, 어느 날 우연히 성경을 강해하는 방송을 들었고, 이후로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40년 동안 받아온 공산주의 교양도 아랑곳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면서 마침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너무 반갑고 좋아서 이웃 사람들에게도 듣도록 권하고, 듣고 나서는 서로 모여서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이렇게 하기 시작한 것인데 지금에 와서는 3백여 명이 모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공안부에 요청하여 정식으로 예배를 허락 받아 냈습니다. 그때 마침 제게 4천 불이 있어서 주었더니, 그 돈으로 장소를 구했습니다. 그 다음에 갔더니 예배당 사진을 보여줍니다.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누구든지, 제아무리 죽은 자와 같다 해도 말씀만 들으면 살아납니다.

말씀의 능력으로 살아납니다. 예나 오늘이나 말씀은 살아 역사 합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오신 그리스도께 감사해야 합니다. 전도자가 있어 들을 수 있음을 감사하고, 마음이 열려 말씀을 수용할 수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성령을 보내사 믿게 하시니 감사하고, 순종하여 자유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시니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합디다. 조물주가 사람을 창조할 때 몇 가지의 실수를 했다는 것입니다. 눈은 감았다 떴다 할 수 있고 입 또한 열었다 닫았다 할 수 있는데, 귀와 코는 늘 열어 놓은 것입니다. 보기 싫은 것은 눈감고, 말하기 싫으면 입만 다물면 그만이지만, 듣기 싫은 소리는 안들을 재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실수이겠습니까? 이것도 말씀입니다. 보고 싶지 않거든 눈감으면 그만이고 말하고 싶지 않거든 입을 다물면 됩니다만, 듣는 것만큼은 살아 있는 한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자면서까지 들으라, 항상 들으라, 귀는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 어른의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들어두십시다. 많이 들어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듣게 됨을, 들려짐을 감사할 것입니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지는 거기에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그 말씀이 내게 주는 말씀으로 들려지는 거기에 영생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온 백성으로 하여금 듣게 할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는, 그래서 구원받지 못하는 심령이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다시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입시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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