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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전능자인 줄 알리라(이사야 60장 15절~22절)

by 【고동엽】 2023.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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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자인 줄 알리라(이사야 60장 15절~22절)

 

전에는 네가 버림을 입으며 미움을 당하였으므로 네게로 지나는 자가 없었으나 이제는 내가 너로 영영한 아름다움과 대대의 기쁨이 되게 하리니, 네가 열방의 젖을 빨며 열왕의 유방을 빨고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 네 구속자, 야곱의 전능자인 줄 알리라. 내가 금을 가져 놋을 대신하며 은을 가져 철을 대신하며 놋으로 나무를 대신하며 철로 돌을 대신하며 화평을 세워 관원을 삼으며 의를 세워 감독을 삼으리니, 다시는 강포한 일이 네 땅에 들리지 않을 것이요 황폐와 파멸이 네 경내에 다시 없을 것이며 네가 네 성벽을 구원이라, 네 성문을 찬송이라 칭할 것이라.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취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영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영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마칠 것임이니라. 네 백성이 다 의롭게 되어 영영히 땅을 차지하리니 그들은 나의 심은 가지요 나의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인즉, 그 작은 자가 천(千)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여러분, 영화 좋아하십니까? 저는 서부활극을 좋아합니다. 어떠한 총격전이나 난투극이 벌어져도 주인공은 끝까지 살아남기 때문입니다. 악한 사람은 모조리 죽고 선한 사람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끝까지 살아남는 것이 마음에 듭니다. 영화는 하나의 예정된 드라마이기에 거기에는 반드시 지향하는 목표가 있습니다. 사건 하나하나에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역사는 드라마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한편의 드라마입니다. 그래서 우연이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필연일 뿐입니다.

간혹 이것을 미처 생각지 못한 사람들이 역사를 가리켜 서로 물고 찢는 생존경쟁이라느니, 자연적인 것이라느니 합니다만, 역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역사는 분명코 하나님께서 이루어가시는 작품이요 드라마입니다. 그러기에 거기에는 지향하는 바가 있고 의미가 있습니다. 뚜렷한 종말론적 목표가 있습니다. 개인의 일생도 한편의 드라마입니다. 지나온 나의 반생을 생각해보십시오. 필요없는 사건이 있었습니까? 의미없는 사건이 있었습니까? 사건 하나하나가 모두 내게 필연적으로 있었습니다. 나의 생애를 통하여 의미있는 일이었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이 거기에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 이르십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2)." 그러므로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아브라함은 그곳이 어디인지 모릅니다. 모르는 대로 짐을 꾸려 짊어지고 온 식구가 대 이동을 합니다. 마침내 가나안땅에 들어갑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 12:7)."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 일흔 다섯이었습니다 마는 자신의 기업을 이을 자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약속하십니다.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 : 4,5)." 이렇듯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은 약속적인 것이었습니다.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이 두 약속을 받고 아브라함은 그대로 믿고 순종합니다. 거기에 운명을 걸고 모험을 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복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으로 가는 길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순례의 길이요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때로 지쳐서 쓰러지기도 합니다. 보십시오. "네 자손에게 주리라"하신 그 가나안땅에 흉년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 왜 흉년이 듭니까? 하는 수없이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리고 먹을 것을 찾아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총으로 무사히 돌아는 왔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그 일로 장차 네 후손이 사백 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실수를 했습니다. 굶어죽건말건 약속의 땅을 그대로 지켰어야 합니다. 그런 아브라함이 또하나의 실수를 범합니다. 일흔 다섯에 하나님께로부터 자식을 주겠다시는 약속을 받았는데 십 년이 지나도록 자식이 없습니다. 나이는 자꾸 드는데 사라는 생산치 못합니다. 결국 사라의 여종 하갈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을 얻습니다. 이스라엘과 이스마엘의 후손 사이에 분쟁이 끊이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큰 실수입니다. 백 세가 되건 이백 세가 되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과정에서 우리는 곧잘 지칩니다. 내 나름대로 판단하려듭니다. 휘청휘청합니다. 창세기 1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자꾸만 휘청거리는 아브라함을 보시고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1절)." 실수를 거듭하는 아브라함이지만 그에게는 참으로 훌륭한 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마다 실패한 과거를 딛고 다시 일어섭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의로 여기시고(창 15:6)." 하나님께서는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새롭게 약속을 재확인하시고 그에게 복을 더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의 내용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고 순종하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앞에 있는 약속을 믿으며 그 약속에 따른 현재의 축복을 믿고, 복된 자가 되어지는 것보다 복된 자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바른 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나약성, 인간의 이성적 비판, 인간의 무능, 더욱이 지난날 실패했던 것을 다 십자가 앞에 묻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새롭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그대로 다시 받고, 다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새로운 존재를 발견하여 복된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내 앞에 어떠한 일이 있든지 상관하지 말 것입니다. 실패하건 성공하건, 부하건 가난하건 문제되지 않습니다. 소유나 지위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떻게 복된 자로 살아가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피조물로서의 한계, 피조물로서의 제한성 안에 살아갑니다. 시간․공간의 제한, 지식․능력의 제한---많은 제한 안에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사랑하시고 공의의 길로 인도하시고 은혜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때로는 심판하시고 때로는 구원하십니다. 끊임없이 당신의 백성을 어디엔가로 인도하십니다. 어떠한 존재에로 가르치시고 다듬어가시고 훈련시키신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축복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종종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다섯 가지의 질문을 하게 됩니다. 첫째, 왜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무엇 때문에, 누구의 죄 때문에 내가 고통을 당해야 하느냐 입니다. 나의 잘못 때문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을 다른 데로 돌려 원인을 밖에서 찾으려 듭니다. 둘째, 내가 왜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세상에 나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하필이면 내가 왜 희생 양이 되어야 하느냐 입니다. 왜 내가, 왜 나만 당해야 하는가?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두가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만 당하는 고통이 아닙니다. 셋째, 언제까지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도대체 몇 년이나 당해야 하는가? 갈수록 태산이라고, 더 큰 문제가 꼬리를 물고 생깁니다. 언제 우리에게 문제없던 때가 있었습니까? 구약성경을 보면 많은 선지자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질문을 합니다. "주여, 어느 때 까지니이까?" 이것은 또한 우리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넷째, 고통의 보상이 무엇인가? 이 어려운 고통을 치르고 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슨 상을 내리실 것인가? 농부는 가을의 풍성한 수확을 바라보고 한여름의 무더위를 마다 않습니다. 부지런히 일을 합니다. 그런데 천재지변으로 모든 농사를 망치게 되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크게 낙심하고 맙니다. 도대체 이 수고에 따르는 약속된 보상이란 무엇입니까? 모르기 때문에 답답한 것입니다. 보상만 확실하다면 참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다섯째, 마지막은 무엇인가? 맨 끝에 가서 어떻게 될 것이냐 그 말입니다. 영화를 볼 때에 가령, 해피엔드로 끝맺으면 기분이 참 좋습니다. 그 동안 답답했던 것이 탁 풀리는 느낌입니다. 반면 주인공이 죽기라도 해보십시오. 괜한 돈 버렸다는 생각에 억울하기만 합니다. 여러분, 마지막만 좋다면 어떠한 고생도 괜찮습니다. 그런 고생이라면 할수록 좋습니다. 마지막에 어떻게 될 것입니까? 우리는 그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고민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 그 안에 있는 우리 인간의 길이란 참으로 신비로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오묘한 역사 앞의 한편의 드라마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숨겨진 것으로 보일 때가 많습니다. 피조물의 역사에 선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요, 이미 계획하신대로 당신의 역사를 경륜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종종 숨겨진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는지, 계시면 무엇을 하시는지, 왜 침묵하시는지, 답답하고 막연하게 느껴지는 것은 숨겨진 탓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코 당신의 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숨겨졌다고 모르는 사람은 영원히 모르는 상태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믿는 자만이, 하나님의 사람만이 그 하시는 역사를 믿음으로 보고 체험하고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역사의 주체이십니다. 역사에 관여하시고 역사를 주장하십니다. 사람들이 하는 대로 사역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역사의 객체가 아닌 주체로서 당신께서 친히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역사와 축복은 미래지향적입니다. 항상 저 앞에, 저 먼 미래에 있습니다.

여러분, 너무 속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당장에 행복하다고, 또는 망했다고 한탄할 것이 아닙니다. 미래를 두고 볼 것입니다.

일전에 미국에서 목사님들의 수양회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삼백여 명의 목사님들이 모였는데 그 가운데 가깝게 지냈던 목사님들과 후배, 제자 목사님들이 모여서 함께 차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중 한 분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하소연을 합니다.

20년 전 한국을 떠나올 때에는 큰 욕심이 두 가지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미국에 가서 공부를 좀더 해보겠다는 생각이 있었고, 또하나는 셋이나 되는 자녀들을 제대로 가르쳐보자는 뜻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부부가 무척이나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지금에 와서는 교포들이 제법 많아져 교회도 하게 되었고, 아이들도 열심히 공부해서 일류대학에 들어가 박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거기까지는 그런 대로 미국에 오기를 잘했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는데 부모가 골라준 배우자는 다 마다하고 미국 여자와 결혼을 하더랍니다. 그것까지도 참았는데 얼마 후부터는 아예 교회에도 나오지 않더니 급기야 이혼을 하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미국에 사는 교포 2세들 가운데 50퍼센트가 국제결혼을 하고, 그중 80퍼센트가 이혼을 한다고 합니다. 인격 파탄의 위기에 처했다고 합니다. 목사님인 그 아버지가 보다못해 한마디 충고를 했더니 그 아들 하는 말이 기가 막힐 소리입니다. "우리를 왜 국제 고아로 만들어서 이 고생을 시킵니까?" 마구 대드는데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그만 정신이 확 들더랍니다. '이럴 수가 있나. 2O년 동안 얼마나 고생하면서 저희들을 키워 왔는데 이제 와서 이런 말을 듣게 되다니……' 가슴이 미어지게 아프더라는 것입니다. 주위에 앉아 있던 몇 분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함께 웁디다. 다 같은 신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대학 들어갔다고 다된 것처럼 생각하지 말 것입니다. 하늘로 올라간 것 마냥 좋아합디다 마는 일장춘몽입니다. 취직해서 돈 벌어 온다고 좋아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된 것이 아닙니다. 좀더 두고보아야 합니다. 실패했다고 마치 끝장난 것처럼 울고불고 할 일도 아닙니다. 조금만 더 두고 보십시오. 좀더 저 먼 미래를 보십시오. 공산화되었다고 망한 것도 아니고 자유화되었다고 다 이룬 것처럼 좋아할 것도 없습니다. 이를테면 소련에 쿠데타가 났다고, 큰일났다고 야단이었습니다 마는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오히려 쿠데타 나기를 잘했다고 합디다. 우리가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유화가 곧 민주화는 아닙니다. 민주화가 곧 복음화는 더더욱 아닙니다.

자유세계에 산다고 하여 다 잘살고 행복합니까? 돈 몇푼 가졌다고 진정코 잘된 것입니까? 동독 드레스덴에 갔을 때, 그곳 주교를 만났는데 그분이 참 의미있는 이야기를 합니다. 공산 핍박하에 있을 때에는 교회가 넘치도록 교인이 모였다고 합니다. 젊은이고 늙은이고 할것없이 하루에 네 번을 나오는가 하면, 강대상 위에까지 올라앉아 예배를 드릴 정도로 많았다고 합니다. 교회를 나오지 않는 사람들도 교회를 선망의 대상으로 우러르며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유화되고보니 젊은 사람들은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다. 교회가 텅 비게 되었습니다. 돈 몇푼 생긴 것으로 방탕하고 모두들 댄스홀로 가버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자유화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체제가 바뀌었다고 행복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좀더 두고보아야 합니다. 어느 쪽이 행복한지, 누가 복을 받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Nobody knows. 더 두고보십시다. 저 미래, 저 앞날을 잊지 말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나올 때에 얼마나 기쁘고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40년 후에야 비로소 가나안땅으로 들어갑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가 됩니다. 70년 후에야 풀려납니다. 하나님께서는 길게 잡으십니다. 이삼 년으로, 한두 사건으로 복되다거니 불행하다거니, 시작이라거니 끝났다거니 하지 마십시다. 쓸데없는 소리입니다. 더 먼 곳을 지향하는 축복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종말론적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직선적으로 마지막을 향하여 인도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참으로 복된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장례식장에 가봐야 알겠습니까? 하나님나라에 가봐야 압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런 비사를 써서 말합디다. 하늘나라에 가면 깜짝 놀랄 것이 두 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당연히 그곳에 왔어야 할 사람이 오지 못했다는 것이요, 또 하나는 정작 올 것 같지 않던 사람이 와 있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해보십시다. 거지 나사로는 평생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만, 죽어 아브라함 품에 안겼기에 그는 복된 사람입니다. 부자는 평생 호화로이 살았지만 죽어서 지옥으로 떨어졌기에 불행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복된 자는 누구입니까?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된 자는 단적으로 순교자를 가리킵니다.

요한계시록을 비롯한 모든 성경이 그렇습니다. 가정을 빼앗기고 재산을 빼앗기고 고향을 빼앗기고 유리 방황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순교자입니다. 순교자는 세상복을 하나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마지막 죽음까지도 비참합니다. 장례식은커녕 사자의 밥이 되고 만 사람, 그러나 그 사람이 복된 사람임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묘비 하나 없는 그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성경, 특별히 요한계시록을 보면 순교자만이 가장 높은 명예를 얻고 있습니다.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나폴레옹은 "나는 불행한 사람이었다"라고 마지막에 가서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평생을 장님이요 벙어리요 귀머거리로 산 헬렌 켈러 여사는 뭐라고 했습니까? "나의 일생은 참으로 아름다웠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누가 복된 사람이겠습니까?

우리는 종말론적 차원에서 축복을 바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내가 그것을 얼마나 알고 있으며, 얼마나 현실성 있게 믿고 있으며, 얼마나 내 생활 속에서 구현해나가느냐가 문제입니다. 믿음은 축복이요 은사입니다. 이 축복을 믿지 못하고 깨닫지 못해서 초조해 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불행합니까? 확실한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깨달음 속에 진정한 행복이 있습니다. 성숙된 신앙인이 되는 길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보십시오. 지식이 무엇입니까? 전부가 나의 경험으로 얻는 것입니까? 다른 사람의 지식이나 혹은 책의 가르침을 통하여 비로소 얻게 됩니다. 이른바 과거적, 곧 과거로부터의 지식입니다. 그런가하면 현재적 지식이 있습니다. 당장 나에게 부딪쳐와야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가장 귀한 지식은 믿음으로 아는 지식입니다. 들은 일도 없고 본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믿습니다. 나는 저분을 믿습니다, 나는 저분의 말씀을 믿습니다 --- 믿음의 지식을 따라 사는 사람이 성숙된 인격자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고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을 것이요, 마침내 공의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자연의 햇빛이 아닌 그보다 더 소중한 도덕의 빛, 진리의 빛, 영원한 생명의 빛이 온 우주를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화평이 이루어지고 슬픔과 고통이 사라지고 아름다운 세계만이 우리 앞에 다가올 것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지는 날에 전능자임을 알 것이라 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전능이란 기계적 전능이나 폭력적 전능이나 정치적 전능이 아닙니다. 인격적 전능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 혹은 악과 실패와 고통으로 여겨지는 것도 합동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전능입니다. 인격적 전능이 여기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제는 믿음으로 알고 믿음으로 깨닫고 믿음으로 살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다시한번 깊이 음미해보십시다. "네 백성이 다 의롭게 되어 영영히 땅을 차지하리니 그들은 나의 심은 가지요 나의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인즉,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  

전능자인 줄 알리라(이사야 60장 15절~22절)

 

전에는 네가 버림을 입으며 미움을 당하였으므로 네게로 지나는 자가 없었으나 이제는 내가 너로 영영한 아름다움과 대대의 기쁨이 되게 하리니, 네가 열방의 젖을 빨며 열왕의 유방을 빨고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 네 구속자, 야곱의 전능자인 줄 알리라. 내가 금을 가져 놋을 대신하며 은을 가져 철을 대신하며 놋으로 나무를 대신하며 철로 돌을 대신하며 화평을 세워 관원을 삼으며 의를 세워 감독을 삼으리니, 다시는 강포한 일이 네 땅에 들리지 않을 것이요 황폐와 파멸이 네 경내에 다시 없을 것이며 네가 네 성벽을 구원이라, 네 성문을 찬송이라 칭할 것이라.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취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영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영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마칠 것임이니라. 네 백성이 다 의롭게 되어 영영히 땅을 차지하리니 그들은 나의 심은 가지요 나의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인즉, 그 작은 자가 천(千)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여러분, 영화 좋아하십니까? 저는 서부활극을 좋아합니다. 어떠한 총격전이나 난투극이 벌어져도 주인공은 끝까지 살아남기 때문입니다. 악한 사람은 모조리 죽고 선한 사람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끝까지 살아남는 것이 마음에 듭니다. 영화는 하나의 예정된 드라마이기에 거기에는 반드시 지향하는 목표가 있습니다. 사건 하나하나에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역사는 드라마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한편의 드라마입니다. 그래서 우연이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필연일 뿐입니다.

간혹 이것을 미처 생각지 못한 사람들이 역사를 가리켜 서로 물고 찢는 생존경쟁이라느니, 자연적인 것이라느니 합니다만, 역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역사는 분명코 하나님께서 이루어가시는 작품이요 드라마입니다. 그러기에 거기에는 지향하는 바가 있고 의미가 있습니다. 뚜렷한 종말론적 목표가 있습니다. 개인의 일생도 한편의 드라마입니다. 지나온 나의 반생을 생각해보십시오. 필요없는 사건이 있었습니까? 의미없는 사건이 있었습니까? 사건 하나하나가 모두 내게 필연적으로 있었습니다. 나의 생애를 통하여 의미있는 일이었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이 거기에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 이르십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2)." 그러므로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아브라함은 그곳이 어디인지 모릅니다. 모르는 대로 짐을 꾸려 짊어지고 온 식구가 대 이동을 합니다. 마침내 가나안땅에 들어갑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 12:7)."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 일흔 다섯이었습니다 마는 자신의 기업을 이을 자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약속하십니다.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 : 4,5)." 이렇듯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은 약속적인 것이었습니다.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이 두 약속을 받고 아브라함은 그대로 믿고 순종합니다. 거기에 운명을 걸고 모험을 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복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으로 가는 길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순례의 길이요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때로 지쳐서 쓰러지기도 합니다. 보십시오. "네 자손에게 주리라"하신 그 가나안땅에 흉년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 왜 흉년이 듭니까? 하는 수없이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리고 먹을 것을 찾아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총으로 무사히 돌아는 왔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그 일로 장차 네 후손이 사백 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실수를 했습니다. 굶어죽건말건 약속의 땅을 그대로 지켰어야 합니다. 그런 아브라함이 또하나의 실수를 범합니다. 일흔 다섯에 하나님께로부터 자식을 주겠다시는 약속을 받았는데 십 년이 지나도록 자식이 없습니다. 나이는 자꾸 드는데 사라는 생산치 못합니다. 결국 사라의 여종 하갈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을 얻습니다. 이스라엘과 이스마엘의 후손 사이에 분쟁이 끊이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큰 실수입니다. 백 세가 되건 이백 세가 되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과정에서 우리는 곧잘 지칩니다. 내 나름대로 판단하려듭니다. 휘청휘청합니다. 창세기 1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자꾸만 휘청거리는 아브라함을 보시고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1절)." 실수를 거듭하는 아브라함이지만 그에게는 참으로 훌륭한 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마다 실패한 과거를 딛고 다시 일어섭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의로 여기시고(창 15:6)." 하나님께서는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새롭게 약속을 재확인하시고 그에게 복을 더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의 내용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고 순종하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앞에 있는 약속을 믿으며 그 약속에 따른 현재의 축복을 믿고, 복된 자가 되어지는 것보다 복된 자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바른 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나약성, 인간의 이성적 비판, 인간의 무능, 더욱이 지난날 실패했던 것을 다 십자가 앞에 묻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새롭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그대로 다시 받고, 다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새로운 존재를 발견하여 복된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내 앞에 어떠한 일이 있든지 상관하지 말 것입니다. 실패하건 성공하건, 부하건 가난하건 문제되지 않습니다. 소유나 지위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떻게 복된 자로 살아가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피조물로서의 한계, 피조물로서의 제한성 안에 살아갑니다. 시간․공간의 제한, 지식․능력의 제한---많은 제한 안에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사랑하시고 공의의 길로 인도하시고 은혜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때로는 심판하시고 때로는 구원하십니다. 끊임없이 당신의 백성을 어디엔가로 인도하십니다. 어떠한 존재에로 가르치시고 다듬어가시고 훈련시키신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축복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종종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다섯 가지의 질문을 하게 됩니다. 첫째, 왜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무엇 때문에, 누구의 죄 때문에 내가 고통을 당해야 하느냐 입니다. 나의 잘못 때문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을 다른 데로 돌려 원인을 밖에서 찾으려 듭니다. 둘째, 내가 왜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세상에 나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하필이면 내가 왜 희생 양이 되어야 하느냐 입니다. 왜 내가, 왜 나만 당해야 하는가?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두가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만 당하는 고통이 아닙니다. 셋째, 언제까지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도대체 몇 년이나 당해야 하는가? 갈수록 태산이라고, 더 큰 문제가 꼬리를 물고 생깁니다. 언제 우리에게 문제없던 때가 있었습니까? 구약성경을 보면 많은 선지자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질문을 합니다. "주여, 어느 때 까지니이까?" 이것은 또한 우리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넷째, 고통의 보상이 무엇인가? 이 어려운 고통을 치르고 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슨 상을 내리실 것인가? 농부는 가을의 풍성한 수확을 바라보고 한여름의 무더위를 마다 않습니다. 부지런히 일을 합니다. 그런데 천재지변으로 모든 농사를 망치게 되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크게 낙심하고 맙니다. 도대체 이 수고에 따르는 약속된 보상이란 무엇입니까? 모르기 때문에 답답한 것입니다. 보상만 확실하다면 참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다섯째, 마지막은 무엇인가? 맨 끝에 가서 어떻게 될 것이냐 그 말입니다. 영화를 볼 때에 가령, 해피엔드로 끝맺으면 기분이 참 좋습니다. 그 동안 답답했던 것이 탁 풀리는 느낌입니다. 반면 주인공이 죽기라도 해보십시오. 괜한 돈 버렸다는 생각에 억울하기만 합니다. 여러분, 마지막만 좋다면 어떠한 고생도 괜찮습니다. 그런 고생이라면 할수록 좋습니다. 마지막에 어떻게 될 것입니까? 우리는 그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고민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 그 안에 있는 우리 인간의 길이란 참으로 신비로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오묘한 역사 앞의 한편의 드라마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숨겨진 것으로 보일 때가 많습니다. 피조물의 역사에 선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요, 이미 계획하신대로 당신의 역사를 경륜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종종 숨겨진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는지, 계시면 무엇을 하시는지, 왜 침묵하시는지, 답답하고 막연하게 느껴지는 것은 숨겨진 탓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코 당신의 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숨겨졌다고 모르는 사람은 영원히 모르는 상태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믿는 자만이, 하나님의 사람만이 그 하시는 역사를 믿음으로 보고 체험하고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역사의 주체이십니다. 역사에 관여하시고 역사를 주장하십니다. 사람들이 하는 대로 사역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역사의 객체가 아닌 주체로서 당신께서 친히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역사와 축복은 미래지향적입니다. 항상 저 앞에, 저 먼 미래에 있습니다.

여러분, 너무 속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당장에 행복하다고, 또는 망했다고 한탄할 것이 아닙니다. 미래를 두고 볼 것입니다.

일전에 미국에서 목사님들의 수양회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삼백여 명의 목사님들이 모였는데 그 가운데 가깝게 지냈던 목사님들과 후배, 제자 목사님들이 모여서 함께 차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중 한 분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하소연을 합니다.

20년 전 한국을 떠나올 때에는 큰 욕심이 두 가지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미국에 가서 공부를 좀더 해보겠다는 생각이 있었고, 또하나는 셋이나 되는 자녀들을 제대로 가르쳐보자는 뜻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부부가 무척이나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지금에 와서는 교포들이 제법 많아져 교회도 하게 되었고, 아이들도 열심히 공부해서 일류대학에 들어가 박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거기까지는 그런 대로 미국에 오기를 잘했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는데 부모가 골라준 배우자는 다 마다하고 미국 여자와 결혼을 하더랍니다. 그것까지도 참았는데 얼마 후부터는 아예 교회에도 나오지 않더니 급기야 이혼을 하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미국에 사는 교포 2세들 가운데 50퍼센트가 국제결혼을 하고, 그중 80퍼센트가 이혼을 한다고 합니다. 인격 파탄의 위기에 처했다고 합니다. 목사님인 그 아버지가 보다못해 한마디 충고를 했더니 그 아들 하는 말이 기가 막힐 소리입니다. "우리를 왜 국제 고아로 만들어서 이 고생을 시킵니까?" 마구 대드는데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그만 정신이 확 들더랍니다. '이럴 수가 있나. 2O년 동안 얼마나 고생하면서 저희들을 키워 왔는데 이제 와서 이런 말을 듣게 되다니……' 가슴이 미어지게 아프더라는 것입니다. 주위에 앉아 있던 몇 분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함께 웁디다. 다 같은 신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대학 들어갔다고 다된 것처럼 생각하지 말 것입니다. 하늘로 올라간 것 마냥 좋아합디다 마는 일장춘몽입니다. 취직해서 돈 벌어 온다고 좋아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된 것이 아닙니다. 좀더 두고보아야 합니다. 실패했다고 마치 끝장난 것처럼 울고불고 할 일도 아닙니다. 조금만 더 두고 보십시오. 좀더 저 먼 미래를 보십시오. 공산화되었다고 망한 것도 아니고 자유화되었다고 다 이룬 것처럼 좋아할 것도 없습니다. 이를테면 소련에 쿠데타가 났다고, 큰일났다고 야단이었습니다 마는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오히려 쿠데타 나기를 잘했다고 합디다. 우리가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유화가 곧 민주화는 아닙니다. 민주화가 곧 복음화는 더더욱 아닙니다.

자유세계에 산다고 하여 다 잘살고 행복합니까? 돈 몇푼 가졌다고 진정코 잘된 것입니까? 동독 드레스덴에 갔을 때, 그곳 주교를 만났는데 그분이 참 의미있는 이야기를 합니다. 공산 핍박하에 있을 때에는 교회가 넘치도록 교인이 모였다고 합니다. 젊은이고 늙은이고 할것없이 하루에 네 번을 나오는가 하면, 강대상 위에까지 올라앉아 예배를 드릴 정도로 많았다고 합니다. 교회를 나오지 않는 사람들도 교회를 선망의 대상으로 우러르며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유화되고보니 젊은 사람들은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다. 교회가 텅 비게 되었습니다. 돈 몇푼 생긴 것으로 방탕하고 모두들 댄스홀로 가버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자유화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체제가 바뀌었다고 행복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좀더 두고보아야 합니다. 어느 쪽이 행복한지, 누가 복을 받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Nobody knows. 더 두고보십시다. 저 미래, 저 앞날을 잊지 말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나올 때에 얼마나 기쁘고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40년 후에야 비로소 가나안땅으로 들어갑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가 됩니다. 70년 후에야 풀려납니다. 하나님께서는 길게 잡으십니다. 이삼 년으로, 한두 사건으로 복되다거니 불행하다거니, 시작이라거니 끝났다거니 하지 마십시다. 쓸데없는 소리입니다. 더 먼 곳을 지향하는 축복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종말론적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직선적으로 마지막을 향하여 인도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참으로 복된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장례식장에 가봐야 알겠습니까? 하나님나라에 가봐야 압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런 비사를 써서 말합디다. 하늘나라에 가면 깜짝 놀랄 것이 두 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당연히 그곳에 왔어야 할 사람이 오지 못했다는 것이요, 또 하나는 정작 올 것 같지 않던 사람이 와 있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해보십시다. 거지 나사로는 평생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만, 죽어 아브라함 품에 안겼기에 그는 복된 사람입니다. 부자는 평생 호화로이 살았지만 죽어서 지옥으로 떨어졌기에 불행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복된 자는 누구입니까?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된 자는 단적으로 순교자를 가리킵니다.

요한계시록을 비롯한 모든 성경이 그렇습니다. 가정을 빼앗기고 재산을 빼앗기고 고향을 빼앗기고 유리 방황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순교자입니다. 순교자는 세상복을 하나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마지막 죽음까지도 비참합니다. 장례식은커녕 사자의 밥이 되고 만 사람, 그러나 그 사람이 복된 사람임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묘비 하나 없는 그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성경, 특별히 요한계시록을 보면 순교자만이 가장 높은 명예를 얻고 있습니다.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나폴레옹은 "나는 불행한 사람이었다"라고 마지막에 가서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평생을 장님이요 벙어리요 귀머거리로 산 헬렌 켈러 여사는 뭐라고 했습니까? "나의 일생은 참으로 아름다웠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누가 복된 사람이겠습니까?

우리는 종말론적 차원에서 축복을 바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내가 그것을 얼마나 알고 있으며, 얼마나 현실성 있게 믿고 있으며, 얼마나 내 생활 속에서 구현해나가느냐가 문제입니다. 믿음은 축복이요 은사입니다. 이 축복을 믿지 못하고 깨닫지 못해서 초조해 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불행합니까? 확실한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깨달음 속에 진정한 행복이 있습니다. 성숙된 신앙인이 되는 길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보십시오. 지식이 무엇입니까? 전부가 나의 경험으로 얻는 것입니까? 다른 사람의 지식이나 혹은 책의 가르침을 통하여 비로소 얻게 됩니다. 이른바 과거적, 곧 과거로부터의 지식입니다. 그런가하면 현재적 지식이 있습니다. 당장 나에게 부딪쳐와야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가장 귀한 지식은 믿음으로 아는 지식입니다. 들은 일도 없고 본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믿습니다. 나는 저분을 믿습니다, 나는 저분의 말씀을 믿습니다 --- 믿음의 지식을 따라 사는 사람이 성숙된 인격자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고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을 것이요, 마침내 공의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자연의 햇빛이 아닌 그보다 더 소중한 도덕의 빛, 진리의 빛, 영원한 생명의 빛이 온 우주를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화평이 이루어지고 슬픔과 고통이 사라지고 아름다운 세계만이 우리 앞에 다가올 것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지는 날에 전능자임을 알 것이라 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전능이란 기계적 전능이나 폭력적 전능이나 정치적 전능이 아닙니다. 인격적 전능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 혹은 악과 실패와 고통으로 여겨지는 것도 합동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전능입니다. 인격적 전능이 여기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제는 믿음으로 알고 믿음으로 깨닫고 믿음으로 살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다시한번 깊이 음미해보십시다. "네 백성이 다 의롭게 되어 영영히 땅을 차지하리니 그들은 나의 심은 가지요 나의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인즉,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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