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목차로 돌아가기 |
예수의 휴식(요한복음 4:27-38)
이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너희가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이스라엘 사람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고 안식일이 이스라엘 사람을 지킨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정도로 안식일을 빼고는 이스라엘을 생각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됨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안식일을 지키는 데 있었습니다. 안식일을 지킴으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고 이스라엘의 혼이 이어져 나갔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에 의하면 살인하지 말라는 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위에 있는 법이 부모를 공경하라 입니다. 즉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죄는 살인한 죄보다 더 중(重)한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를 공경하라보다 더 위에 있는 법이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식일의 의미가 중요하며 비중을 크게 두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주일 지키는 것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주일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주일을 지키지 않고 우리가 신앙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주일을 모든 일 가운데 최고 우선으로 지킬 수 있어야만 주일이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생활과 우리의 운명을 지켜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7일 만에 쉬셨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은 창조 질서 원리에 속하는 것이므로 안식의 원리를 떠나서는 축복된 생(生)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쉰다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아무리 바쁘다 할지라도 휴식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휴식 없는 노동, 쉼이 없는 생활에서는 스트레스가 쌓이고 지치며 쓰러지기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몸도 마음도 쉬어야 하는 것이 창조의 원리입니다. 쉼은 결코 게으름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 새로운 출발을 위한 원동력을 얻는 소생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쉬라고 밤을 주셨고 또 주일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식의 중요한 의미를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기독교는 안식과 휴식을 아는 종교입니다.
안식의 신학적 의미를 생각해보면 첫째,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일을 중지하고 쉼에 있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쉬는 시간에는 쉬어야 하고, 아무리 급해도 주일은 최우선으로 지켜져야 합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안식일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겐 쉬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영원한 안식으로 향하는 하나의 수련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는 새롭게(refresh) 하는 것이며 힘을 소생시키는 것입니다.
새로운 힘을 위해서 힘을 기르는 의미가 있습니다.
셋째로는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가까이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평가받고, 하나님의 뜻을 다시 한 번 묻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신령한 면으로 자기의 생활을 정리하고 반성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이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일하고 쉰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쉼이 없는 일은 저주입니다. 휴식은 하나님께서 일하는 자에게 주신 큰 은사요, 은총입니다.
매일 놀고 쉬는 사람은 진정한 쉼의 의미를 모르게 됩니다. 밤에 잠이 잘 오지 않는 사람은 일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부지런히 땀흘리고 수고한 자는 하나님이 주신 밤에 깊은 잠으로 안식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시편 127:2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귀한 말씀입니다. 잠이 오지 않아 술을 먹어야 하고, 수면제를 먹어야 하며 그래도 잠이 오지 않아 몸부림치는 자는 일하지 않은 벌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부지런히 일하는 자에게는 단잠의 은총을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육체의 휴식도 하나님의 선물이며 은총이거늘 마음의 휴식은 더 없는 큰 축복입니다.
죄사함을 받는 자만이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인에게는 안식이 없으며 어느 곳을 가더라도 안식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장소에서 편안히 누웠다고 하더라도 결코 마음속에는 평안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죄의 은총을 베푸시고 사랑의 빛을 비춰주실 때만 안식할 수가 있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주님 안에서 내가 안식을 얻기까지는 어디에서도 안식을 얻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떠나서는 어느 하늘 아래서도 안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용서하는 자와 용서받는 자, 화목 하는 자, 해야 할 일을 다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크신 은총으로 휴식을 주십니다. 번민이 없는 휴식, 근심 걱정이 없는 안식, 이것은 곧 자유입니다. 이 안식이야말로 무한한 자유가 깃들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떤 장소에서 어떤 자세로 휴식을 하며 안식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됨이 결정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번민하고 피곤할 때 술집을 찾아서 쉼을 얻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곳에서 무슨 안식이 있겠습니까? 그 정도의 수준밖에 안 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참으로 자유 하는 안식은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안식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은 선한 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통 때 하는 일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깨끗한 선한 일입니다. 즉 생명을 구하는 일로서 안식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한적한 곳에서 쉬셨습니다. 요즘 현대인들은 맑은 정신으로는 도저히 갈 수 없는, 시끄럽고 혼을 빼는 장소를 휴식하겠다고 찾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곳을 찾아서 휴식하셨습니다.
둘째로는 홀로 쉬셨습니다. 사람들을 다 보내고 제자들까지도 물리치시고 홀로 지내신 것입니다. 요즈음 현대인들은 꼭 동반자가 있어야 하고, 와글와글 하는 가운데서 휴식한다고 야단입니다. 고독을 즐길 줄 아는 자는 혼자서 조용히 명상하고 좋은 책을 가까이 하며, 좋은 음악을 듣는 고상한 휴식을 취할 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휴식이 왜 이렇게 시끄럽고 저속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본래 본질적으로 혼자입니다. 아무리 가족과 함께 산다고 하더라도 때로는 홀로 생각하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나만이 홀로 조용한 시간을 갖는 휴식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기도하시며 안식하셨습니다. 홀로 신비한 대화를 하시며 하나님 앞에서 안식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신령한 휴식을 배워야 하며 여기에 참 안식이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일을 시작할 때, 즉 제자를 임명하거나, 십자가를 앞에 놓았을 때 기도하셨습니다. 또 일이 끝났을 때도 기도하셨습니다. 5천명을 먹이신 다음에 그 많은 사람들을 감격하고 놀라워하며 그를 높이고 마침내 그를 강제로 유대의 왕으로 삼으려고 하는 그 시간에 이 모든 것을 다 거절하시고 홀로 광야에 남아서 하나님과 대화하시며 기도하시고 쉬셨습니다. 이런 휴식은 게으름이 아니라 새로운 힘을 얻는 생산적 휴식입니다.
넷째로는 예수님은 일하심으로 휴식하셨습니다. 일을 끝내고는 물론 일 자체를 휴식으로 생각하셨습니다. 본문에 예수님은 사마리아 땅을 지나가십니다.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요 4:6). 지금으로 말하면 낮 12시쯤입니다. 햇빛이 뜨겁게 내리쪼이는 시간에 우물가에 곤해서 앉아 쉬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대접하기 위해 음식을 구하러 마을에 들어간 사이입니다.
이 때 한 여인이 물을 길러 나왔는데 그녀는 품행이 좋지 못한 여자였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또 지금은 남의 소실로 있는 듯했으므로 다른 사람과 같이 물을 길러 다니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햇빛이 내리쪼이는 어려운 시간에 짜증을 내며 혼자 물을 길러 나왔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아시고 전도를 하며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라는 귀한 말씀을 주십니다. 이 때 그 여자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았고, 기뻐했으며,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 내가 예수를 만났고 메시야를 만났다고 기뻐 전도를 합니다. 이 소리를 들은 많은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모여듭니다. 바로 이 순간에 제자들은 떡을 사와서 예수님께 잡수시라고 권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음식이 내게 있으며,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답답하게도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누가 잡수실 것을 드렸는가 하고 둔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미 한 심령을 구원하시고 한 사람에게 자유를 주시고 그가 기뻐하는 것을 보는 순간 배고프고 피곤한 생각이 다 없어지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양식이다. 즉 선한 일을 하고 그가 기뻐하고 구원을 얻었고 자유함을 얻고 생명을 얻는 것을 볼 때에 피곤함이 사라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휴식을 하셨으며 무엇을 얻었습니까? 어떤 힘을 얻었습니까? 일 자체를 휴식으로 생각하는 귀한 진리를 깨달았으면 합니다. 하고 싶은 일, 당연히 해야 할 일, 그리고 사랑해서 하는 일을 하면 그것이 곧 휴식입니다. 일 자체가 휴식입니다. 제가 아는 음악 교수 한 분은 하루에 피아노를 5시간씩 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휴식으로서 피곤해도, 머리가 아파도, 짜증이 나도 피아노를 치면 다 해소되기 때문입니다. 이분이야말로 피아노를 침으로써 휴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림을 그리는 자는 그림 그리는 것이 휴식이며 목사는 설교하는 것이 휴식입니다. 이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야곱은 참 힘들게 장가를 간 사람입니다. 14년 동안 머슴을 살고 장가갔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29:20에 보면, 7년 동안 장가 갈 조건으로 양을 치는데 7년을 수일같이 여겼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자와 연애하면서 7년 후에는 결혼할 것을 생각하니 7년을 며칠처럼 지냈다는 것은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인생은 바로 이렇게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아내는 부엌에서 일하는 것이 휴식이고, 즐거움이어야 합니다. 일 자체가, 기쁨이요, 영광인 삶을 살아갈 수 없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17,18에서 "너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피를 쏟아서 관제를 드릴지라도 기뻐하리라 나와 함께 기뻐하자." 피를 쏟아 부어도 기뻐하리라는 말씀 앞에 다시 무슨 휴식이 필요합니까?
어느 자가용 기사가 공휴일날 주인 가족과 함께 청평 유원지에 놀러 갔습니다. 고급 차를 타고 좋은 장소에 가서 평소에 먹어보지도 못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돌아왔습니다. 그는 자기 집에 들어가자마자 몹시 피곤함을 느꼈습니다. 그 다음날 어제 공휴일날 수고했었다고 주인이 하루 쉬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 가족들과 함께 변변찮은 점심을 싸서 먼저 나는 시외버스를 타고 바로 어제 갔던 그 장소에서 종일 놀다가 집으로 왔습니다. 집에 오자마자 오늘 하루 잘 쉬었다는 소리가 그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진정한 휴식이 어디 있는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좋은 음식이나 좋은 차가 있다고 휴식이 되지 않습니다. 보람이 있고, 칭찬이 있고, 자유가 있고 사랑이 넘치는 곳에 휴식이 있습니다.
언제, 얼마나 쉬었다고 생각합니까? 우리의 휴식을 통해서 얻은 바가 무엇이며 발견한 것이 무엇입니까? 얼마나 새 힘을 얻었습니까? 얼마나 거룩해졌고 순수해졌습니까? 안식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목적이 분명하고, 결과가 분명하고, 약속이 있고 그리고 종말적인 의미가 확실하고, 사랑의 현재성이 분명할 때 여기에 휴식이 있습니다. 한 심령을 구원하시고 기뻐하며 피곤함도 잊어버리는 휴식을 우리도 배웠으면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온 생은 그대로가 안식이어야 합니다. 삶 자체가 휴식이어야 합니다. 항상 감격하고, 항상 즐거워하며 독수리와 같이 항상 새로운 힘을 얻어 나가는 그러한 생활이어야 합니다. 우리 앞에는 영원한 안식이 있습니다.
기도 : 휴식이 없는 세상에 사는 저희들에게 오늘 거룩한 안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시간시간 하나님 앞에 나와 휴식을 구합니다. 우리의 영혼의 안식을 주시고 우리의 몸의 소생함을 주시고 우리의 뜻에 새로움을 주시옵소서. 항상 그리스도와 함께 하며, 그 사랑을 재확인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으며, 우리의 생 자체가 거룩한 휴식이 되게 하옵소서. 날마다 소생하며, 날마다 힘을 얻고 날마다 새롭게 되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생활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예수의 휴식(요한복음 4:27-38)
이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너희가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이스라엘 사람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고 안식일이 이스라엘 사람을 지킨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정도로 안식일을 빼고는 이스라엘을 생각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됨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안식일을 지키는 데 있었습니다. 안식일을 지킴으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고 이스라엘의 혼이 이어져 나갔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에 의하면 살인하지 말라는 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위에 있는 법이 부모를 공경하라 입니다. 즉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죄는 살인한 죄보다 더 중(重)한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를 공경하라보다 더 위에 있는 법이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식일의 의미가 중요하며 비중을 크게 두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주일 지키는 것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주일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주일을 지키지 않고 우리가 신앙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주일을 모든 일 가운데 최고 우선으로 지킬 수 있어야만 주일이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생활과 우리의 운명을 지켜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7일 만에 쉬셨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은 창조 질서 원리에 속하는 것이므로 안식의 원리를 떠나서는 축복된 생(生)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쉰다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아무리 바쁘다 할지라도 휴식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휴식 없는 노동, 쉼이 없는 생활에서는 스트레스가 쌓이고 지치며 쓰러지기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몸도 마음도 쉬어야 하는 것이 창조의 원리입니다. 쉼은 결코 게으름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 새로운 출발을 위한 원동력을 얻는 소생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쉬라고 밤을 주셨고 또 주일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식의 중요한 의미를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기독교는 안식과 휴식을 아는 종교입니다.
안식의 신학적 의미를 생각해보면 첫째,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일을 중지하고 쉼에 있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쉬는 시간에는 쉬어야 하고, 아무리 급해도 주일은 최우선으로 지켜져야 합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안식일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겐 쉬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영원한 안식으로 향하는 하나의 수련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는 새롭게(refresh) 하는 것이며 힘을 소생시키는 것입니다.
새로운 힘을 위해서 힘을 기르는 의미가 있습니다.
셋째로는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가까이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평가받고, 하나님의 뜻을 다시 한 번 묻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신령한 면으로 자기의 생활을 정리하고 반성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이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일하고 쉰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쉼이 없는 일은 저주입니다. 휴식은 하나님께서 일하는 자에게 주신 큰 은사요, 은총입니다.
매일 놀고 쉬는 사람은 진정한 쉼의 의미를 모르게 됩니다. 밤에 잠이 잘 오지 않는 사람은 일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부지런히 땀흘리고 수고한 자는 하나님이 주신 밤에 깊은 잠으로 안식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시편 127:2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귀한 말씀입니다. 잠이 오지 않아 술을 먹어야 하고, 수면제를 먹어야 하며 그래도 잠이 오지 않아 몸부림치는 자는 일하지 않은 벌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부지런히 일하는 자에게는 단잠의 은총을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육체의 휴식도 하나님의 선물이며 은총이거늘 마음의 휴식은 더 없는 큰 축복입니다.
죄사함을 받는 자만이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인에게는 안식이 없으며 어느 곳을 가더라도 안식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장소에서 편안히 누웠다고 하더라도 결코 마음속에는 평안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죄의 은총을 베푸시고 사랑의 빛을 비춰주실 때만 안식할 수가 있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주님 안에서 내가 안식을 얻기까지는 어디에서도 안식을 얻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떠나서는 어느 하늘 아래서도 안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용서하는 자와 용서받는 자, 화목 하는 자, 해야 할 일을 다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크신 은총으로 휴식을 주십니다. 번민이 없는 휴식, 근심 걱정이 없는 안식, 이것은 곧 자유입니다. 이 안식이야말로 무한한 자유가 깃들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떤 장소에서 어떤 자세로 휴식을 하며 안식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됨이 결정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번민하고 피곤할 때 술집을 찾아서 쉼을 얻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곳에서 무슨 안식이 있겠습니까? 그 정도의 수준밖에 안 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참으로 자유 하는 안식은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안식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은 선한 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통 때 하는 일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깨끗한 선한 일입니다. 즉 생명을 구하는 일로서 안식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한적한 곳에서 쉬셨습니다. 요즘 현대인들은 맑은 정신으로는 도저히 갈 수 없는, 시끄럽고 혼을 빼는 장소를 휴식하겠다고 찾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곳을 찾아서 휴식하셨습니다.
둘째로는 홀로 쉬셨습니다. 사람들을 다 보내고 제자들까지도 물리치시고 홀로 지내신 것입니다. 요즈음 현대인들은 꼭 동반자가 있어야 하고, 와글와글 하는 가운데서 휴식한다고 야단입니다. 고독을 즐길 줄 아는 자는 혼자서 조용히 명상하고 좋은 책을 가까이 하며, 좋은 음악을 듣는 고상한 휴식을 취할 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휴식이 왜 이렇게 시끄럽고 저속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본래 본질적으로 혼자입니다. 아무리 가족과 함께 산다고 하더라도 때로는 홀로 생각하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나만이 홀로 조용한 시간을 갖는 휴식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기도하시며 안식하셨습니다. 홀로 신비한 대화를 하시며 하나님 앞에서 안식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신령한 휴식을 배워야 하며 여기에 참 안식이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일을 시작할 때, 즉 제자를 임명하거나, 십자가를 앞에 놓았을 때 기도하셨습니다. 또 일이 끝났을 때도 기도하셨습니다. 5천명을 먹이신 다음에 그 많은 사람들을 감격하고 놀라워하며 그를 높이고 마침내 그를 강제로 유대의 왕으로 삼으려고 하는 그 시간에 이 모든 것을 다 거절하시고 홀로 광야에 남아서 하나님과 대화하시며 기도하시고 쉬셨습니다. 이런 휴식은 게으름이 아니라 새로운 힘을 얻는 생산적 휴식입니다.
넷째로는 예수님은 일하심으로 휴식하셨습니다. 일을 끝내고는 물론 일 자체를 휴식으로 생각하셨습니다. 본문에 예수님은 사마리아 땅을 지나가십니다.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요 4:6). 지금으로 말하면 낮 12시쯤입니다. 햇빛이 뜨겁게 내리쪼이는 시간에 우물가에 곤해서 앉아 쉬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대접하기 위해 음식을 구하러 마을에 들어간 사이입니다.
이 때 한 여인이 물을 길러 나왔는데 그녀는 품행이 좋지 못한 여자였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또 지금은 남의 소실로 있는 듯했으므로 다른 사람과 같이 물을 길러 다니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햇빛이 내리쪼이는 어려운 시간에 짜증을 내며 혼자 물을 길러 나왔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아시고 전도를 하며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라는 귀한 말씀을 주십니다. 이 때 그 여자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았고, 기뻐했으며,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 내가 예수를 만났고 메시야를 만났다고 기뻐 전도를 합니다. 이 소리를 들은 많은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모여듭니다. 바로 이 순간에 제자들은 떡을 사와서 예수님께 잡수시라고 권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음식이 내게 있으며,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답답하게도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누가 잡수실 것을 드렸는가 하고 둔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미 한 심령을 구원하시고 한 사람에게 자유를 주시고 그가 기뻐하는 것을 보는 순간 배고프고 피곤한 생각이 다 없어지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양식이다. 즉 선한 일을 하고 그가 기뻐하고 구원을 얻었고 자유함을 얻고 생명을 얻는 것을 볼 때에 피곤함이 사라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휴식을 하셨으며 무엇을 얻었습니까? 어떤 힘을 얻었습니까? 일 자체를 휴식으로 생각하는 귀한 진리를 깨달았으면 합니다. 하고 싶은 일, 당연히 해야 할 일, 그리고 사랑해서 하는 일을 하면 그것이 곧 휴식입니다. 일 자체가 휴식입니다. 제가 아는 음악 교수 한 분은 하루에 피아노를 5시간씩 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휴식으로서 피곤해도, 머리가 아파도, 짜증이 나도 피아노를 치면 다 해소되기 때문입니다. 이분이야말로 피아노를 침으로써 휴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림을 그리는 자는 그림 그리는 것이 휴식이며 목사는 설교하는 것이 휴식입니다. 이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야곱은 참 힘들게 장가를 간 사람입니다. 14년 동안 머슴을 살고 장가갔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29:20에 보면, 7년 동안 장가 갈 조건으로 양을 치는데 7년을 수일같이 여겼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자와 연애하면서 7년 후에는 결혼할 것을 생각하니 7년을 며칠처럼 지냈다는 것은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인생은 바로 이렇게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아내는 부엌에서 일하는 것이 휴식이고, 즐거움이어야 합니다. 일 자체가, 기쁨이요, 영광인 삶을 살아갈 수 없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17,18에서 "너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피를 쏟아서 관제를 드릴지라도 기뻐하리라 나와 함께 기뻐하자." 피를 쏟아 부어도 기뻐하리라는 말씀 앞에 다시 무슨 휴식이 필요합니까?
어느 자가용 기사가 공휴일날 주인 가족과 함께 청평 유원지에 놀러 갔습니다. 고급 차를 타고 좋은 장소에 가서 평소에 먹어보지도 못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돌아왔습니다. 그는 자기 집에 들어가자마자 몹시 피곤함을 느꼈습니다. 그 다음날 어제 공휴일날 수고했었다고 주인이 하루 쉬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 가족들과 함께 변변찮은 점심을 싸서 먼저 나는 시외버스를 타고 바로 어제 갔던 그 장소에서 종일 놀다가 집으로 왔습니다. 집에 오자마자 오늘 하루 잘 쉬었다는 소리가 그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진정한 휴식이 어디 있는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좋은 음식이나 좋은 차가 있다고 휴식이 되지 않습니다. 보람이 있고, 칭찬이 있고, 자유가 있고 사랑이 넘치는 곳에 휴식이 있습니다.
언제, 얼마나 쉬었다고 생각합니까? 우리의 휴식을 통해서 얻은 바가 무엇이며 발견한 것이 무엇입니까? 얼마나 새 힘을 얻었습니까? 얼마나 거룩해졌고 순수해졌습니까? 안식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목적이 분명하고, 결과가 분명하고, 약속이 있고 그리고 종말적인 의미가 확실하고, 사랑의 현재성이 분명할 때 여기에 휴식이 있습니다. 한 심령을 구원하시고 기뻐하며 피곤함도 잊어버리는 휴식을 우리도 배웠으면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온 생은 그대로가 안식이어야 합니다. 삶 자체가 휴식이어야 합니다. 항상 감격하고, 항상 즐거워하며 독수리와 같이 항상 새로운 힘을 얻어 나가는 그러한 생활이어야 합니다. 우리 앞에는 영원한 안식이 있습니다.
기도 : 휴식이 없는 세상에 사는 저희들에게 오늘 거룩한 안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시간시간 하나님 앞에 나와 휴식을 구합니다. 우리의 영혼의 안식을 주시고 우리의 몸의 소생함을 주시고 우리의 뜻에 새로움을 주시옵소서. 항상 그리스도와 함께 하며, 그 사랑을 재확인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으며, 우리의 생 자체가 거룩한 휴식이 되게 하옵소서. 날마다 소생하며, 날마다 힘을 얻고 날마다 새롭게 되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생활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자료 18,185편 ◑ > K자료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행의 윤리(누가복음 14:7-14) (0) | 2024.06.24 |
---|---|
선행의 윤리(누가복음 14:7-14) (0) | 2024.06.24 |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고린도전서 9:11-17) (0) | 2024.06.24 |
지혜로운 악한 종(누가복음 16:1-9) (0) | 2024.06.24 |
안 믿는 자와 못 믿는 자(요한복음 5:37-47) (0) | 2024.06.2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