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Ⅱ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마6:9-13)
유명한 화가 파블로 피카소와 한 병사와의 만난 일화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카페에서 만나 예술에 관하여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피카소는 자신이 아는 예술 스타일에 대하여 병사에게 설명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런데 병사가 말했습니다. “나는 현대 예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피카소가 그 이유를 묻자 병사는 현대 예술이 실제적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상상으로 그린 것보다는 실제로 보이는 모습을 그대로 그린 그림을 더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피카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 병사는 자신의 여자 친구 사진 몇 장을 지갑에서 꺼내 보여주었습니다. 피카소가 그 사진들을 들여다보다가 그 사진 중 한 장을 손에 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 좋군요. 여자 친구가 실제로 이렇게 작은가 보죠?”
인생의 모든 상황은 여러 가지 관점과 다양한 각도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직 한 가지 실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인생을 보는 것입니다. 모든 평범한 일상의 그림 뒤에는 영원한 더 큰 그림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비록 당신이 그것을 볼 수 없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항상 그곳에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기도할 수 있고, 또 실제로 기도합니다. 제자들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 바른 기도를 드리는 기도의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가르쳐 주시기를 주님께 요청한 것입니다.
누가복음11:1 하반 절입니다.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님께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기도의 소중함을 알고 교회에 처음 나오는 신입교인들에게 이 기도를 가르칩니다. 그리고 외워서 예배 때마다 암송하게 합니다. 교회학교 아이들도 다 할 수 있을 만큼 이 기도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빨리하면 22초면 한 번 거뜬히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시간에 다 같이 합창을 해도 1분 30초 정도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이 기도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수난을 당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별로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너무 쉽게 외워버리기 때문에 기도의 의미도 깊이도 잊어버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교우 여러분 모두가 정말 기도의 사람으로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이 기도의 뜻을 되새기며 깊은 영성의 삶으로 인도하기를 원하여, 오늘 이 기도문 전체를 함께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1.이 기도는 바른 하나님을 부름으로 시작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이라 불리는 존재는 대단히 많습니다. 각 종교마다 그들이 믿는 최고의 신에게 붙이는 이름 모두가 ‘하나님’ 이라고 불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로 가나 길로 가나 서울만 가면 되는데 어느 종교를 갖든지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진실하게 믿기만 하면 다 천당은 가게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가르쳐 주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다른 종교의 하나님과는 처음부터 다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하늘에 계시다”는 말은 무소부재 하시다는 뜻입니다. 어디에나 계시는 ‘만유의 주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에베소서4:6입니다.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찬송48장에서는 이렇게 찬양합니다.
“만유의 주재, 존귀하신 예수, 인자가 되신 하나님.
나 사모하여 영원히 섬길 내 영광되신 주로다.”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엄위하신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우리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아바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미국의 신학자 ‘A.W.토저의 하나님’이라는 책에서 오늘 날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의 개념이 너무 세속화되었음을 걱정하며 쓰고 있습니다.
“내가 볼 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회복해야 할 필요성이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가장 절실한 때가 바로 지금인 것 같다.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지난 약 40년 동안 아주 많이 늘어났다. 현재 성경이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많이 팔리고 있다. 말 그대로 지금 이시기에 성경이 베스트셀러이다. 현재 신학교는 세계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이 세워지고 있다. 기독교 서적이 산더미처럼 출판되고 있다. 선교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어디가 어딘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이다. 전도가 아주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믿기 힘든 얘기이지만 과거 어느 때보다 지금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닌다. 이런 일들은 다 좋은 것이다. 누가 부정하겠는가?
그러나 최근에 기독교에는 심각한 손실이 발생했다. 고상한 신관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현재 많은 교회들이 전하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너무나 저급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누(累)를 끼치며, 기독교에 불명예를 안겨준다. 기독교는 위엄을 잃어버렸다. 우리는 위엄의 개념과 예배의 거룩한 기술을 잃어버렸다. 교회가 고상한 신관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현재의 기독교는 얄팍하고, 무기력하고, 저급하고, 경박하여 세상적이 되었다.
오늘 날의 설교는 대부분 경박하고 조악(粗惡)하고 얄팍하고, 개그맨 흉내를 낸다. 개그맨처럼 사람들을 웃겨서 즐겁게 해주지 않으면 사람들이 다시는 교회를 찾지 않는다고 믿는다. 이 모든 것은 참으로 끔찍하고 비극적이다.
오늘 날 부르는 찬송가라고 부르는 노래들 가운데는 너무 저급한 곡들이 있다.
지금은 보통 사람들의 시대이다. 우리 모두는 평범한 사람들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평범한 수준으로 끌어내렸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높으신 분인지를 다시 깨닫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은 믿고 있는 하나님의 개념이 저급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번에 며칠동안 몽골에서 느낀 것입니다. 몽골인들은 한 때 세계를 재패한 탁월한 ‘징기스 칸’의 후예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성격은 강하고 진취적입니다. 언어의 습득능력이 탁월합니다. 한국어든지, 영어든지, 일본어든지 6개월 정도만 배우면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상황에 적응 능력이 뛰어나고, 두뇌 회전이 빠르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 번 잘못된 신앙을 선택함으로서, 그리고 구소련의 지배를 받는 동안 그 위대한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은 것 같았습니다. 만약에 그들이 바른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위대한 자존감을 회복하는 날이면 다시 한 번 세계 속에 뛰어난 민족으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라는 비전을 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이루 기독교인들의 기도가 바른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회복하고 바른 기도를 제대로 회복할 수 있다면 세상을 밝히는 빛, 세상에 맛을 내는 사람들로 바로 설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기도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2.주님의 기도는 기도의 우선순위를 바로잡아 줍니다.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서 한 가지 큰 문제에 봉착합니다. 자신의 삶의 경험을 정당화하고 심지어 절대화하므로, 스스로의 격고한 세계를 구축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판단합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다 자신의 생각대로 되어야 올바르다고 봄으로 그 기준에 따라 세상을 판단하고 다스리려고 합니다.
세상을 함께 살아가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의 세계를 인정하고, 서로를 수용하는 관용의 사람이 큰 사람인데 갈수록 좁아지고 아집으로 똘똘 뭉쳐져 갑니다. 결국 그렇게 그의 세계는 점점 패쇄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기도마저 그렇게 패쇄 되어 가는 것을 막으시려 하셨습니다.
보통 우리가 정신을 차리지 아니하면 대부분의 기도는 내 문제에 집착하게 됩니다. 내 자신이 당면하고 있는 일부터 시작하여, 내 가정, 내 자녀들, 내 남편, 내 아내, 심지어 내 교회, 내 나라 등, 온 통 내 개인과 관계된 문제들의 해결을 간구합니다. 그러다가 무엇이 그렇게도 바쁜지 얼마지 나지 않아 훌쩍 자리를 박차고 일어납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에서 기도의 우선순위를 가르친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예수님은 기도의 시작에서부터 자신의 문제에 집착하는 것을 철저히 배제합니다.
가장 먼저 나의 삶을 통하여, 믿음으로 행하는 내 모든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나라는 다스리심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다스려 주시기고, 내 가정, 내가 섬기는 교회와 국가를 다스려주심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삶의 진정한 성공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 계획이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실패로 단정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이 기도의 순서는 존재의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기도입니다. 생각만 바뀌어도 삶의 변화가 오는데, 기도가 바뀌면 세상에 변화가 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신 기도는 이 엄청난 변화를 인도합니다.
3.이 기도는 우리의 가장 절실한 필요를 구하게 하십니다.
“오늘 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주님은 우리의 일상에서 가장 필요한 것을 구하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이 기도는 그날그날 필요한 먹거리를 달라는 기도는 아닙니다. 우리의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루의 삶 속에 하나님의 돌보시는 은혜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아는 사람은 이 기도를 놓치지 않습니다.
지난 한 주간은 참으로 길고도 길었습니다. 월요일 아침 교회를 출발하여 오늘 아침 교회에 도착하기까지 일주일간을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모임이 있어서 갔다가 화요일저녁 발을 잘못 디뎌서 넘어져서 갈비뼈를 다쳤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수요일 아침 일본에서 출발하여 인천공항에 들어와서 몽골을 향했습니다. 다행히 동행한 안태원 장로님이 주치의가 되셔서 오늘까지 편안하게 일을 수행하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복용약, 복대, 파스까지 완벽하게 치료해주었습니다. 몽골에서 신학교기공예배를 드리고, 공사를 위한 협의를 다 마치고 토요일 낮에 공항으로 나갔는데 비행기가 결항이 되었습니다. 오후1시35분에 예정했던 비행기가 밤11:00에 출발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오늘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은 크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일용할 양식, 은혜의 양식은 얼마나 절실한지 모릅니다. 이 은혜를 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아무 일없이 지나면서 내 공로라고 생각하거나 누구에게나 있는 당연한 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교만이거나 배은망덕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 기도의 가르침은 근본적으로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 위에서 용서하고 용서받아야 할 존재임을 전재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내 자신이 용서받아야 할 죄가 많음을 먼저 일깨워줍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끌을 보기 전에 먼저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라 하셨습니다. 이 들보의 죄를 용서받기 원한다면 티끌과 같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야합니다.
내게 저지른 남의 잘못은 한없이 크고 많아 보이는데, 내가 저지른 잘못과 죄는 전혀 없는 것처럼 생각할 때, 자기는 의인이 되고 다른 모든 사람들을 정죄하는 무서운 독선주의자가 되고 맙니다. 주님은 이런 잘못된 사람을 만드시기를 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먼저 용서받아야 할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시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용서를 받아야 할 죄인인 것처럼 다른 사람도 내게 잘못을 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의 죄를 먼저 용서하라 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우리를 시험 들게 하는 악들이 주변에 항상 있음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이런 악한 일들 때문에 우리 마음이 시험에 들기 쉽습니다. 우리는 내 개인의 삶과는 관계가 멀지만, 잘못된 주변의 일들 때문에 속상해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속상해도 아무것도 변하는 것이 없음을 알면서도 마치 내가 가만히 있으면 불의가 더 성행할 것 같아 의분을 느끼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상의 한 일들을 때문에 괴로워하지 말고, 선으로서 악을 이기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내 자신을 돌아보아 나 역시 얼마든지 잘못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겸손히 자신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내가 세상을 다 바꾸려고 하는 정의파가 되기보다 기도로 하나님께 맡기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세상의 악한 일들 때문에 나까지 악해져서야 되겠습니까?
4.마지막으로 이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의 삶의 목적을 바로 잡아 줍니다.
왜 주님께서 이 기도를 드리도록 가르치신 것일까요? 내가 기도하는 것은 내 기도를 통해서 세상을 다 내가 원하는 세상으로 바꾸고 나의 천국을 만들기 위해서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다 이루어짐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기도를 이렇게 마무리 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시편24:1의 말씀입니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고 그 모든 것을 통하여 하나님께 마땅히 영광이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가로챈 것이 사탄입니다. 사단은 사람을 충동하여 그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끊임없이 가로채게 하려고 인간을 부추깁니다.
그래서 모든 일들이 다 이루어진 일들에 대하여 주어를 교체시키게 합니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사도는 좋은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바울은 두 차례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자신의 사역을 보고하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처음은 1차 전도여행을 마친 다음 사도행전15:12입니다. “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 고하는 것을 듣더니,”
그리고 바울이 2차전도 여행을 끝내고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보고한 내용이 사도행전21:19,20에 있습니다.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니,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여기 바나바와 바울의 표현을 주의하여 보십시오. 모든 사역의 주체가 하나님이이십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무엇을 한 것이 아닙니다. 나를 통하여 일하신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의 모든 삶에서 이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주어진 모든 일들 우리가 최선을 다하여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지만 일을 이루시는 여호와 그 일을 성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은 바울처럼 고백하고 간증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다 하나님께 올려 드립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예수님은 기도의 결론을 이렇게 가르치시고, 당신 스스로 최후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그렇게 하셨습니다. 마태복음26:42입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이루려고 그렇게 애를 쓰며 기도하십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세상에 외서 이루어야할 하나님의 사명, 하나님의 비전이 있습니다. 그것이 주기도문에서 가르친 것입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삽니다. 기도합니다. 그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도 기꺼이 가겠습니다. 그 십자가를 기꺼이 질수 있는 힘을 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 속에서 그 십자가 뒤에 감추어진 영광스런 부활의 새 아침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우리 인생의 눈앞에 펼쳐지는 그림들 뒤에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변하지 않는 큰 그림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시기를 기도할 것입니다.
오늘 당신의 인생을 바라보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시각으로 그 일을 한 번 볼 수 있다면 세상은 정말 다른 세상을 볼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어 기도하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기도의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는 진정한 인생의 승리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이 기도를 따라 한 시간 동안 주님과 함께 기도하며 깊은 영성의 사람으로 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출처/최이우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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