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론의 축복기도 (민 6:22-27)
이스라엘과 우리나라의 공통점은 인사의 내용이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인사는‘살롬’입니다. 살롬의 뜻은 안전의 의미가 담긴 평화를 비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안녕’과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나라는 오천 년의 역사 중에 외세의 침입이 많았습니다. 자고나면 마을이 불태워지고 수많은 이웃이 죽거나 끌려가는 불행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밤새 안녕하셨습니까?”라고 안부를 먼저 물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시 불행한 역사가 많았습니다. 이방나라의 침입으로 많을 고통을 당하기도 했고, 심지어 나라가 망하는 불행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살롬’이라고 상대방에게 인사를 합니다. 이스라엘의 수도가 예루살렘인데 ‘평화의 터’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된 평화(평강)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초대 제사장이었던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통해 백성들에게 축복하게 하기를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는 그의 백성들에게 참된 복을 주실 뿐만 아니라 그 복을 지속적으로 지켜주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얼굴을 그를 신뢰하고 순종하는 백성들에게 향하여 은혜를 베푸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3. 여호와는 얼굴을 향하여 평강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호와의 얼굴은 복과 저주를 결정하는 기준이 됩니다. 그래서 신앙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그 얼굴을 향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의 얼굴을 향하여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복은 ‘살롬’(평화, 평강)입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걱정, 근심, 불안, 절망의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최고의 권력자 대통령에서부터 가난한 서민에 이르기까지 이런 것들이 없는 평화를 누리는 사람들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걱정, 근심, 불안, 절망이 최고조에 이르면 인생을 포기하게 됩니다. 얼마 전에 20대의 인기연예인이 자살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인터넷의 악성 댓글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환경에 따라 걱정과 근심, 불안, 절망에 이릅니다. 그래서 무당을 찾아가 그런 것들을 해소하려고 합니다.
사울 왕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가리어진 그의 삶은 걱정, 근심, 불안, 절망의 연속이었습니다. 악신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그는 변장하여 무당을 찾아가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참된 평화(평강)를 얻지 못하고 전투에서 부상을 입어 자살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찾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다면 결코 그렇게 비참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찾는 행복(평화)도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행복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있습니다. 세계의 평화를 위해 창설한 기구가 유엔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강대국들의 실리 때문에 약소국들의 평화를 제대로 지켜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할 수 있는 것이 유엔을 만드는 것이지만 그것이 이 땅에 참된 평을 안겨주지 못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폭력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전쟁과 테러의 위협으로 평화가 상실되고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일시적이지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론을 통해 참된 평화를 축복하기를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평화)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릅니다. 이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왕이요, 평화의 완성자입니다.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를 볼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된 평화를 주셨다는 사실을 고백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마귀는 평화를 깨드리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으로 평화를 누리며 살던 아담 부부에게 마귀는 뱀을 이용하여 그들을 유혹하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평화를 깨드리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불행의 출발이 마귀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 마귀와 귀신에게 행복을 구하고 있습니다. 서울에는 목사의 숫자보다 무당의 숫자가 더 많다고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도둑(마귀)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고 말씀 했습니다.
대하 20장에 여호사밧이 유다의 왕으로 있을 때 암몬 나라가 침략을 했습니다. 이 사실을 보고 받은 여호사밧은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의 숫자가 유다의 군대보다 많았던 것 같습니다. 여호사밧은 여호와께 간구했습니다. 그리고 온 백성들에게도 금식하게 했습니다. 여호사밧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기를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대하20:12)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사밧과 유다 백성들을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기를 암몬의 큰 군대를 칼 한 번 쓰지 않고 전멸시켜버렸습니다. 대하20:30절에 “여호사밧의 나라가 태평하였으니 이는 그의 하나님이 사방에서 그들에게 평강을 주셨음이더라”고 했습니다.
시29:11에 다윗은“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고 했습니다. ‘자기 백성’은 곧 하나님의 신뢰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의 특징은 믿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전혀 신뢰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복은 임하지 않고 진정한 평화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실패자들의 특징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신뢰하지 않고 자신을 의지하거나 하나님을 떠날 때에 어려움과 불행이 주어졌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멸망된 사건입니다. 그들이 왜 멸망당했습니까? 군사력이 약해서 멸망당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그들에게서 평화를 거둬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배척하고 기독교를 핍박했던 이스라엘이 A.D 70년 로마에 의해 비참하게 멸망당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고, 정신적인 지주였던 성전이 파괴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전 세계로 흩어져 핍박을 받았습니다. 독일의 히틀러에게 600만이 죽임을 당하는 치욕을 당했습니다. 이들이 왜 그렇게 당했습니까? 하나님의 참된 평화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자유입니다. 믿음을 가지든지 믿음을 가지지 않든지 선택은 자유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화, 참된 행복, 참된 구원은 우리의 선택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없는 평화, 행복, 구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참된 행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평화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참된 평화는 우리에게 참된 행복과 참된 구원으로 이어집니다. 아론은 백성들에게 축복하기를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평화)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평화’는 인간이 가져야 할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이 평화는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게 아담에게 주셨던 선물입니다. 평화는 하나님과 하나된 것이고, 자연만물과도 하나된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하여 평화가 깨어졌을 때 인간의 비참함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은 물론이지만, 자연과도 하나되지 못했습니다. 자연은 인간으로 하여금 땀을 흘리게 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영생을 상실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상실된 영생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로만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참된 평화의 실체였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어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고 선언했습니다. 주님은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고 했습니다.
아론을 통해 백성들에게 축복하게 하신 하나님의 본심은 인간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복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지 않고는 인간이 추구하는 참된 행복, 참된 평화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에게 주어지며, 그 복의 실체는 평화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평화에는 우리가 구하는 행복과 구원이 있습니다. 평화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이 복이 충만하게 채워질 것입니다. 재물과 건강, 명예와 권력을 얻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신앙을 가지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은 곧 하나님의 평화(평강)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자들에게 평화의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의 복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참된 행복과 천국을 소망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강정태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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