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목차 돌아가기] |
1. 집행관의 나팔소리
제롬은 그의 귀에 마지막 날의 나팔이 언제나 "너 죽은 자여, 일어나 심판을 받으러 오라."고 말하는 듯 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무섭고 중요한 시기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헝가리의 어느 기독교도 왕이 슬픔에 잠겨 있자 쾌활한 성격을 지닌 그의, 아우가 슬픔의 원인을 알고 싶어했다. 왕이 말했다.
"아우여, 나는 하나님께 큰 죄인인데 어떻게 죽어야 할지도 모르고 심판 때에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타나야 할지도 모르겠네."
그러자 그의 아우는 농담으로 말했다.
"그런 것은 단지 우울한 생각에 불과할 뿐입니다."
왕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든 그 사람의 집 앞에 와서 사형 집행관이 나팔을 불면 그는 곧 사형 집행장으로 끌려가는 것이 그 나라의 관례였다.
어느 날 밤이 아주 깊었을 때에 왕이 사형집행관을 보내 그의 아우의 집 앞에서 나팔 불게 했다. 그의 아우는 그 나팔 소리를 듣고 죽음의 사자를 보더니 황급히 달려가 왕을 배알하고 자신이 어떤 죄를 범했는지 알려 달라고 간청했다. 왕은 이렇게 말했다.
"아우여, 자네는 결코 나에게 죄를 범한 적이 없네. 그런데 내 사형집행관을 보는 것이 그토록 무서운가? 그렇다면 큰 죄를 범한 내가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앞에 끌려나가기를 두려워하는 것에 대해서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2. 현재 진행형인 심판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운동장보다 더 큰 방주를 지었다. 그러나 동시대 사람들은 그와 같은 노아를 비웃었다. 그들은 단지 그들의 본능이 명령하는 대로 욕구를 따라 살았을 뿐이다.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었다. 홍수가 시작된 것이다. 방주를 지었던 노아 가족은 그 심판을 통해 인류의 두 번째 시조가 되는 영광을 얻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멸망당하고 말았다. 그 심판 역시 어느 한 시점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방주를 짓기 시작하던 순간부터, 나머지 사람들이 노아에게 콧방귀를 끼면서 자기 쾌락만 탐닉하던 그때부터, 하나님의 심판은 현재 진행형으로 그들의 삶 속에서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대가 하나님의 셈하심의 심판대에 직접 서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셈하심은 그날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대 삶 속에서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음을 잊지 마라.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 심판의 원칙이다. 그대가 주님의 말씀을 좇아 울더라도 말씀의 씨앗을 뿌리면, 그대의 삶 속에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의 열매가 영원한 현재 진행형으로 결실될 것이다. 그러나 단지 욕망을 좇아 욕망의 씨앗만을 뿌리고 있다면, 지금 이 순간 그대의 삶-외형적으로 아무리 거창하게 보여도 속엔 실은 허망한 물거품만 현재 진행형으로 명멸하고 있을 것이다.
/ 이재철
3. 더딘 심판
어떤 사람이 돼지를 도축장으로 몰고갑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돼지는 아무 저항도 없이 꼬리를 흔들면서 도축장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연출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비결을 묻습니다 "어째서 돼지가 도축장에 즐겁게 들어갑니까?"
그 사람은 그의 손에서 콩을 내 보입니다. 어떤 사람은 돼지가 가야할 도축장의 길에 콩을 조금씩 떨어뜨리고 앞서가면 돼지는 그 콩을 먹는 맛에 도살장에 제 발로 꼬리를 흔들며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당장의 눈앞에 콩 주워 먹는 맛에 죽음의 길을 걷게 됩니다. 사람들은 어렴풋이 하나님의 심판과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재물과 권세와 쾌락과 명성이라는 달콤한 콩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콩을 주워 먹는 재미때문에 지옥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콩의 유혹이란 너무나 달콤해 지옥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지금 수많은 젊은이가 성적 타락과 인터넷과 위성TV에 돌아다니는 음란의 콩을 주워먹으며 지옥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또 외도 때문에 수많은 가정이 깨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현대인들은 롯의 사위들처럼 심판을 농담으로 받아들인다. 하늘을 손으로 가린다 해서 하늘이 없어지지 않듯이 심판을 외면한다고 해서 심판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심판은 더뎌 보이지만 반드시 임한다.
/백금산
4. 큰 심판을 면키 위한 작은 심판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던 어느 자매에게 어느 순간인가 주님께 헌신하는 모든 일이 무의미해지고 싫증을 느끼게 되었다.
주일 낮 예배만 간신히 드리고 개인적인 시간을 충분히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에 찾아오는 건 허전함과 공허함뿐이었다. 그녀가 전에 하나님께 본인도 모를 만큼 수없이 약속했던 헌신의 약속들. 그녀는 잊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잊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삶 속에 개입하셔서 사인을 보내셨다. 본인과 가족들에게 크고 작은 고통을 쉬지 않고 내리신 것이다.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부끄럼 당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한 그녀를 향한 심판의 회초리는 사랑 그 자체였다.
5. 악인의 멸망
안티오쿠스 왕은 페르샤에 침입하여 페르세폴리스를 점령하려고 하였으나, 그곳 주민들의 맹렬한 방어전으로 극도의 혼란에 빠져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안티오쿠스 왕은 화가 치밀어 올라 유다인들에게 앙갚음할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목적지에 다다를 때까지 쉬지 말고 병거를 몰아가라고 마부들에게 명령하며, "예루살렘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곳을 유대인들의 공동묘지로 만들겠다"라고 큰소리 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내장이 뒤틀리고 격심한 복통이 일어났습니다. 그래도 그는 유대인들에게 불같이 화를 내고 폭언을 퍼부으면서 행군을 독촉했습니다. 그러다가 질주하는 병거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들것에 실려 가는 신세가 되었는데, 그의 몸은 썩어 들어가 구더기가 들끓었습니다. 그는 제 몸에서 나는 악취를 견딜 수 없어하며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죽어야 할 인간이 하늘과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치않다"라고 신음하면서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예루살렘에 자유를 주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의의 심판은 거두어지지 않아, 그는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이국의 산골짜기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악인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언젠가는 심판하십니다. 오늘도 악을 멀리하며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아름다운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악인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는 어린 양의 기름 같이 타서 연기되어 없어지리로다 "(시37:20)
6. 하나님의 심판
우리는 언젠가 하나님의 엄격하고 두려운 심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미국에 두 사람의 농부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이고 한 사람은 불신자였습니다. 한 날은 불신자 친구가 그리스도인 친구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나는 하나님도 모르고 그리스도도 모르고 믿지도 아니한다. 그러나 지난 봄에 파종을 잘하였고 여름엔 순풍으로 물대기와 김매기를 잘하였고 가을엔 풍성한 수확을 거두었다. 신자 친구들보다 훨씬 많은 수확을 하였다. 나는 하나님의 심판을 이해하거나 깨달을 수 없었다."
그때 그리스도인 친구는 이렇게 답신했습니다.
"하나님은 10월의 결과를 보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심판은 자기의 정하신 날에 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심판은 그 언젠가 갑자기 밤의 도둑같이 이른다고 했습니다. 세상에서는 죽으면 모두가 끝입니다. 지명 수배가 되었어도 수십 억의 채무가 있어도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죽음으로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신앙과 행위를 따라 추호의 가감도 없이 심판하는 것입니다.
* 기도: 삶과 죽음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 때때로 삶의 덧없음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오 주님, 그러나 하늘의 소망 가운데 주님만을 바라보고 언제나 최선의 삶을 살아가며 최선의 경주를 하게 하옵소서.
7. 막을 수 없는 심판
1842년 프랑스 정부는 폴 에밀 보타(Paul Emile Botta)를 티그리스의 모술에 보내 그 일대 지역에 옛 도시인 니느웨의 잔재가 혹 남아 있는지를 고고학적으로 탐사해 보도록 했다. 모술 및 그 일대에서 탐사 활동을 벌였던 학자들은 마침내 그 지역들에서 그 옛날 교만했던 도시, 니느웨의 잔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니느웨라는 도시가 과연 존재했느냐 하는 논란이 있어 왔는데,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니느웨라는 도시에 임한 심판이 얼마나 심각하고 처절했는가를 시사해 준다고 할 수 있겠다. 심지어 역사학자들조차 그 도시가 어디쯤에 위치했었는지를 가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원래 니느웨는 약 664만m2에 이르는 매우 큰 도시였다. 그 도시 한편으로는 티그리스 강이 흐르고 있었다. 사실상 도시 전체는 열다섯 개의 성문을 가진 내벽과 외벽으로 된 성곽으로 싸여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해자(moats)와 강으로 둘러싸여 있는 견고한 성채였다. 그러나 이 모든 수비책이 있다 할지라도 메대와 바벨론의 군대를 막아 내기란 역부족이었다. 니느웨는 결국 처절하게 멸망당했다. 나훔은 하나님이 니느웨를 심판하시는 것을 보고 있다. 그는 지존자께서 교만한 니느웨를 치실 것이라고 선포한다. 그분의 심판을 막아설 자는 아무도 없다.
-「반더발 성경연구」/ 코넬리스 반더발
8. 개미 떼를 심판하는 사람
배가 가라앉자, 한 사람이 온통 신의 불공평에 대해서 항의를 뱉아 놓는다.
"참으로 억울한 일이요. 신에 대하여 경건한 마음을 안 가진 사람이 이 배에 탔기 때문에 죄 없는 사람들까지 죽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럴 때 바닥을 기어다니던 개미 떼 중 한 마리가 그의 발등을 물었다. 자기 발등을 깨문 개미는 한 마리 였는 데도 그 사람은 개미 떼를 모두 밟아 죽였다.
이에 헤르메스가 기다란 막대를 하나 가지고 그 사람 앞에 나타나더니 그의 배를 찌르면서 야단을 쳤다.
"그대가 개미 떼를 심판하듯이 신들이 인간을 심판해도 되겠는가?"
* 금언: 재앙이 있는 날 신을 모독하지 말고 겸손히 자신의 잘못을 살펴보아라.
9. 우물에 침을 뱉는 자는 언젠가 반드시
<탈무드>에는 다음 과 같은 얘기가 기록되어 있다.
어떤 랍비가 길을 가고 있는데 한 사나이가 자기 집안의 돌을 길 밖으로 던져 버리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랍비는 '왜 그런 짓을 하시오?'하고 물었으나 사나이는 웃기만 하였다. 20년이란 세월이 흘러서 이 사나이는 자기 땅을 다른 사람에게 팔았다. 땅을 남의 손에 넘기고 다른 고장으로 가려고 첫발을 떼는 순간 전에 자기가 버렸던 돌멩이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이것은 자기가 한짓을 설사 잊고 있었더라도 반드시 자신에게 돌아오고 만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와 비슷한 속담으로, '자기가 마실지도 모르는 우물에 돌을 던지지 말라'는 것과 '화살을 만드는 자는 그로 인해서 죽는다'는 말이 있다.
10. 심은 대로 거둡니다
영국의 어느 제과업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빵을 만들어 마을 사람들에게 팔았습니다. 그 제과업자에게는 매일 아침, 버터를 만들어 공급해주는 가난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납품되는 버터를 보니 정량보다 조금 모자라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며칠을 두고 납품된 버터를 저울로 일일이 달아 보았습니다. 예측한 대로 정량에 미달되었습니다. 화가 난 이 업자는 버터를 납품하는 농부에게 변상할 것을 요구하며 법정에 고발했습니다. 농부는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습니다. 재판을 하던 재판관은 농부의 진술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가난한 농부의 집에는 저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버터를 만들어 그 제과업자가 파는 1파운드짜리 빵의 규격에 맞추어 버터를 자르고 포장해서 납품을 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제과업자가 이익을 남기기 위해 그 1파운드짜리 빵의 양을 줄였던 것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이 농부는 줄여서 만들어진 빵에 맞추어서 버터를 만들고 납품을 한 것입니다. 누구의 잘못입니까?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빵을 줄인 결과가 자신에게 돌아오고야 만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헐뜯고 비난하고 거짓말을 하게 되면, 그 비난과 헐뜯음과 미움과 증오, 거짓은 결국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하면 그 선한 결과가 자기에게로 되돌아옵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만고 불변의 진리가 있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
11. 의로우신 재판장
성경: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시75:7)
몇 년 전에 대전에서 일부 판사들이 조직 폭력배와 술자리를 함께했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판사는 양심과 법에 따라 판결을 해야 하는데, 조직 폭력배와 함께 어울림으로 인하여 그들의 판결이 잘못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일부이기는 하지만 재판 과정에 공정성이 결여되었다고 호소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사람이 내리는 판결은 불완전합니다. 의도적으로 판결을 굽게 할 수도 있고, 실수로 잘못된 판결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은 실수나 잘못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속까지 꿰뚫어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은 지금 사람들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아벨이 흘린 피의 호소를 들으셨던 하나님께서 판결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런 사실은 발각되지 않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에게는 큰 두려움이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형벌을 받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벌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 기도: 주님 보시기에 선한 삶을 살게 하소서.
12. 심판의 날이 다가옵니다.
본문: 시96: 13
"저가 임하시되 땅을 판단하려 임하실 것임이라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
세계적인 부흥사 찰스 피니(Charls Finny)가 변호사 개업을 준비하는 중 뉴욕의 한 치안판사의 사무실에 앉아 있을 때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피니야, 너 변호사가 되면 무엇 할래?”, “부자가 되겠지요”, “그 다음에는?”, “은퇴하겠지요”, “그 다음에는?”, “죽겠지요”, “그 다음에는…”, “심판이 있겠지요” 이 대답을 한 다음에 피니는 떨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약 반 마일 되는 숲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과 화목하기 전에는 떠나지 않겠다”라고 결심하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생각하며 이기적인 생활, 공허한 삶, 세상 쾌락을 즐기는 생활을 그만두고 이제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기로 결심하고 간절히 기도한 끝에 성령을 충만히 받고 나왔습니다. 그 후로 50년 동안 복음을 전했는데 축복이 그의 삶에 충만했고 수천, 수만 명의 영혼을 구원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한 말씀대로 찰스 피니는 죽음과 심판을 깨닫고 생의 목적을 바꾸어 영광스럽고 보람 있는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최종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하려는 데 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31절에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달력에는 온천하 만민을 공의로 심판할 날이 작정되어 있습니다. 죄의 심판과 그로부터의 구원이 없다면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심판의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은 참 크리스천도 아니고 구원받은 사람도 아닙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12::1,2)
/한태완 목사 설교 중에서
13. 심판
성경: "심판은 거만한 자를 위하여 예비된 것이요 채찍은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니라"(잠19:29)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학자이면서 설교자인 미국의 아이언사이드 박사가 교회에서 회의를 한참 진행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청년 하나가 손을 들더니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듯 말했습니다. "여러 얘기하지 말고 법대로 합시다." 이 말을 듣던 아이언 사이드 박사가 그 청년에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젊은이, 법대로 자네를 다루었다면 자네는 어떻게 되었겠는가? 자네는 벌써 지옥에 가 있어야 마땅할 것일세."
거만하고 악한 사람은 공의를 업신여기고 조롱하고 자신의 형편을 생각지 않고 함부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형태를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보십니다. 그리고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셔서 오래 참고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죄악이 가득 차면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징계하시고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행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선하고 의롭게 살아야하겠습니다.
* 묵상: 내 생각만을 주장하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한 일은 없습니까?
14. 심판
성경: "악인을 두호하는 것과 재판할 때에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것이 선하지 아니하니라"(잠18:5)
한 간악한 스코틀랜드인 변호사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말을 빌렸는데 사고였는지 거칠게 다루었는지 모르지만 그 말이 죽고 말았습니다. 자연히 주인은 자기가 입게 된 손해보상과 함께 말 값을 지불하라고 주장했습니다. 변호사는 손해배상은 기꺼이 지불하겠지만, 당장 현금이 없으니 현금대신 약속 어음을 받겠냐고 말 주인에게 묻자, 그 말 주인은 기꺼이 승낙했습니다. 그러자 변호사는 지불할 기한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시간은 마음대로 하시죠."라고 말주인이 말했습니다. 그러자 간악한 그는 심판의 날에 지불하도록 어음을 발행했습니다. 결국 말 주인은 그 문제를 법정에 가져갔고, 거기에서 변호사는 자신의 변호에서 판사에게 어음을 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판사는 어음을 보고 나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약속어음은 완전히 유효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심판의 날이므로 내일 지불할 것을 판결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맷돌은 쉬지 않고 천천히 돌아갑니다. 마치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쉬지 않고 돌고 있는데도 느끼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의 맷돌이 돌아감에 따라 갈린다는 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맷돌은 천천히 돌아가는 것 같아도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악의 모양을 버리고 정의롭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 묵상: 당신은 매일 심판을 준비하며 살고 있습니까?
15. 정의의 심판
성경: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잠24:19-20)
전 보르도 지역 경찰 책임자인 모리스 파퐁(87세)은 반인류적 범죄로 징역 20년을 구형 받았습니다. 파풍은 나치의 프랑스 지배가 끝난 뒤에도 샤를 드골 대통령의 밑에서 파리 경찰국장을 지냈으며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 시절에는 예산 장관을 역임하는 등 탄탄대로를 달려왔습니다. 그가 정의의 심판을 받게 된 계기는 81년 한 신문에 의해 유대인들을 대거 아우슈비츠 수용소 등에 보내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실을 입증하는 서류들이 공개되면서부터 입니다. 모든 공직을 사퇴하고 조용히 살기를 원했던 그였지만 유태인 희생자 가족과 단체들의 고발에 따라 지난 83년 정식으로 기소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중의 반인류 범죄로 프랑스 전직관리가 법정에 선 것은 파퐁이 처음입니다. 악인 중에는 당대에 재앙을 받아 죄 값을 치르는 사람도 있지만, 죽을 때까지 형통하고 잘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나는 날 그가 평생 누렸던 것들은 더 이상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그는 빈손으로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죽음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반드시 악의 실체는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역사 속에서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야 할 것입니다.
* 묵상: 혹시 당신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공의의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않았습니까?
16. 엄숙한 하나님의 심판
‘로댕’하면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조각상이 얼른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덕수궁에서 열렸던 그의 작품전에 가서 문제의 작품 ‘생각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단테의 「신곡」 중에 지옥편을 소재로 해서 지옥문 위에 만들어진 조각품이 바로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 작품을 보며 제목을 누가 붙였는지는 모르지만 지옥문 위에 붙여진 글귀로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지옥문 앞에까지 갔다면 이미 끝난 것입니다. 지옥문에서 무슨 생각을 할 시간이 있으며 무슨 생각이 필요하겠습니까? 때가 너무 늦습니다. 그 작품을 감상하면서 약간의 모순을 느꼈지만 그것대로 우리에게 상당한 의미를 부여해 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나,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는 모든 사람들 앞에 다가올 최후의 심판에 대해 마치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우리도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깊이 머리를 숙이고 손으로 턱을 고이고 조용히 겸손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정말 그런 곳이 있단 말인가?’, ‘내가 비록 예수 믿고 교회에 다니지만 그곳에 가지 않는다는 확신이 나에게 있는 것일까?’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그 무엇보다도 심각한 문제요, 또한 엄숙한 과제입니다.
-「문밖에서 기다리시는 하나님」/ 옥한흠
17. 심판을 비웃는 사람들
‘죽음’이나 ‘마지막 심판’이라는 말을 아주 우습게, 장난끼 있는 말로 가볍게 다루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이것은 참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곰처럼 우직한 사람들도 있고, 세상적으로 보면 용감하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어리석게 담이 센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화가 페루지노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그가 임종할 때 성직자가 급히 찾아와서 마지막으로 기도를 해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페루지노는 “나는 회개하지 않고 죽는 사람이 저 세상에서 어떻게 되는지를 알아 보고 싶소”라며 성직자의 기도를 거절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용감한 사람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런 사람을 일컬어서 ‘어리석은 자’라고 합니다. 지옥을 우습게 보는 사람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모른다고 그저 덮어 두고 안심할 문제도 아닙니다. 이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가올 최후의 심판에 대해 겸손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옥에서 면제받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 「문밖에서 기다리시는 하나님」/ 옥한흠
18. 최후의 심판
다니엘 웹스터라는 미국의 유명한 정치가요 학자가 있었습니다. 이 분이 한 번은 국무장관으로 있을 때 된 일인데 뉴욕의 어떤 호텔에서 저명한 사람 약 20명과 같이 저녁을 먹을 때 저녁을 다 먹고 다른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웹스터는 머리를 숙이고 가만히 있더랍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친구가 "웹스터 씨, 당신의 일생을 통해서 당신의 마음 속에 들어온 생각 가운데 제일 중요한 생각은 무엇이라 말할 수 있습니까?"하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웹스터는 얼굴을 들고 대답하기를 "제일 나에게 엄숙하고 중요한 생각은 내가 지금하는 모든 일을 이 다음에 내가 하늘 나라에 가서 내가 책임질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 생각을 할 때에 내 마음이 제일 엄숙해집니다."하고 말했습니다.(계20:4-14)
19. 결코 지워지지 않는 기록
인간의 두뇌에는 120억 개의 뇌세포가 있으며 그 각각의 세포가 기억을 저장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몬트리올 시 맥길대학교의 저명한 신경외과 의사인 월더 펜필드 박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의 인식 속으로 들어온 것은 무엇이든 상세하게 기록되고 머리 속에 저장되어 언제라도 밖으로 재생될 수 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 법정에 서게 될 때 그리하여 그의 삶의 기록이 있는 그대로 재생되어 제시될 때 무슨 수로 그것을 부인할 수 있겠는가? 인생의 기록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정하신 사람(구세주)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여 놓으셨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순간 순간의 삶을 진지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 참조: 행17:31, 롬5:10, 14:10, 벧후2:4, 9, 요5:22, 30
20. 노벨상 제도
1833년 스웨덴에서 노벨이라는 사람이 태어났습니다. 그는 화학자요 발명가로서 두각을 나타내게 됩니다. 33세에 최초로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여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그 후 3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조간신문에 난 가사를 보고 노벨은 깜짝 놀랐습니다. 기사 내용인즉슨 알프레드 노벨이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프랑스 기자가 동명이인(同名異人)을 잘못 알고 "노벨이 죽었다"하니까 그 노벨인 줄 알고 당장 '노벨 사망하다'하고 기사를 실었던 것입니다. 버젓이 살아있는 사람을 죽었다고 한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노벨한테는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이너마이트의 왕 죽다, 죽음의 사업가, 파괴의 발명가 죽다'라고 되어있는 기사내용이었습니다. 그 기사를 보는 순간 노벨은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내가 살아있기에 망정이지 정말로 죽는다면 이 기사가 사실이 되지 않겠는가, 오늘이라도 내가 죽으면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평가하겠는가' 노벨은 마음속으로 깨닫는 것이 있었습니다. 다이너마이트의 발명으로 모은 전 재산을 이제는 생명을 살리는 일에 쓰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자기 것을 다 내놓고 인류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공헌한 사람에게 그것을 나누어주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제도가 바로 노벨상 제도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이 세상을 떠난다면 사람들은 무엇으로 결론을 맺으며, 어떻게 평가될 것 같습니까? 또 주님은 여러분을 좌측과 우측, 알곡과 쭉정이, 양과 염소 중 어느 쪽으로 분류 심판하실까요?
21. 죽음과 심판
성경: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
전쟁터에서 고참 병사가 총탄에 쓰러지자 군목이 달려와서 “병사, 죽는 것이 두렵지 않는가?”라고 묻자 병사는 눈을 크게 치켜뜨고 불쾌하다는 듯이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서 수없이 싸우면서 죽음을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두렵다니요, 저는 겁장이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하필 죽어가는 시간에 나의 감정을 건드리십니까?” “하지만 병사, 죽음 후의 일은 준비되었나?” 병사는 한숨을 쉬었습니다. “목사님, 바로 그것이 나를 두려움에 떨게 합니다.” 기독교인이 아닌 병사는 죽음 후에 올 일을 두려워 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경험한 이 세상의 위험에는 용감했을지 모르나 하나님께서 심판을 주관하시는 문제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기력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해하셨습니까? 그리스도는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며 지금 당신의 손을 하나님께서 붙잡으시도록 요청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당신에게 구원이 있고 용서가 있고 천국이 있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지 않으면 영원한 죽음밖에는 남을 것이 없습니다. 지금 그리스도께로 나오시면 당신은 결코 심판대 앞에 서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만 바라보면서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송태승 목사
22. 피할 수 없는 심판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재판장이시기 때문에, 아무도 그 손을 피해 달아날 수 없습니다. 악인은 마땅히 멸종당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옥에 던지시고 철저히 멸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가벼운 징계를 받고 벗어날 수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마땅한 바대로 하나님의 진노를 알지 못합니다. 영원한 사망에 대해서 생각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감옥에 갇혀 자신이 교수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범죄자가 “아마 나는 채찍을 몇 대 맞는 것으로 이 감옥에서 방면되겠지”라고 스스로를 달래며 믿도록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매일 잘못을 백 번이나 저지르고, 그러면서도 한 번이나 생각할 둥 말 둥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감찰하신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또한 우리가 그 목전에서 아무것도 하나님께 섬긴 것이 없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행실과 생각을 하나도 잊지 아니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짓말과 악함으로 그들의 잘못을 덮는다 할지라도 그러한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빛 가운데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안목은 결코 혼선을 빚지 않습니다.
-「욥과 하나님」/ 존 칼빈
23. 심판 날에 서기 위해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필연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날을 대비하며 우리의 할 바를 행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어느 성주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의 성을 막강한 군사들이 포위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부하들에게 전투태세를 갖추라고 명하지 않겠는가? 그러한 명령을 듣고도 복종하지 않으면 그것은 성주에 대한 나태함을 통한 일종의 반역행위가 아니겠는가? 우리의 영혼은 마치 하나님의 성과 같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사탄이 우리의 영혼을 위협하고 있다는 경계경보를 줄곧 듣고 있다. 어둠의 세력이 몰려올 때는 바로 ‘악한 날’이다. 따라서 우리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전투 방어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군수품을 쓸데없는 곳에 허비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재능을 개인의 영화를 위해 다 써버리면 나중에 악한 날이 도래했을 때 무슨 수로 변명을 할 것인가? 현명한 주인은 하인들이 제 일을 안하고 쓸데없는 일에만 정신 팔려 있을 때엔 결코 물품을 공급해주지 않는다. 우리의 시간 사용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여지지 않는다면 그 귀한 시간들이 어이없이 허비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매순간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 또한 하나님의 명령에 순응하여 매순간을 지혜롭게 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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