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목차 돌아가기] |
예수님은 원수를 완전히 이기신 분이십니다. 십자가에서 원수 마귀의 머리를 깨뜨리고 그 무장을 해제시켜 완전한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예수님의 승리는 반토막의 승리가 아니라 온전한 승리입니다. 불완전한 승리가 아니라 완전한 승리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이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는 것을 볼 때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이미 이겨 놓은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수 마귀와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대충 싸우거나 중도에 포기하면 마귀는 물러가지 않습니다. 원수 마귀와의 싸움은 천국가는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기도> 십자가에서 승리를 이루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이미 이겨 놓으신 예수님의 권세로 원수 마귀를 완전히 물리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날마다 마귀를 이기고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용서와 증오
우리 교회 김 집사가 투병하고 있을 때 심방을 갔다.
“천국은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이 예비하신 곳이니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위대한 소망을 가지세요. 이 세상은 하나님을 위한 곳이니 투병까지도 하나님을 위한 사명과 영광으로 알아야 합니다.”
나는 이런 설교를 했다. 구원의 확신을 갖고 살아온 김 집사는 내 오른손을 꼬옥 잡았다. “목사님, 이 집사와 20년 전 크게 싸우고 서로 원수가 됐습니다. 이 집사에게 저를 용서해달라고 말해주십시오.” 나는 두 사람을 모두 만나 화해의 시간을 가졌다. 두 사람이 20년만에 서로 용서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동을 받았다. 먼저 용서하는 사람이 승리자다. 마음 속에 증오를 품고 화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패배자다.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을 생각해보라. 용서받지 못할 사람, 용서하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고훈 목사(안산제일교회)
3.창조적인 사랑
종교개혁자 루터는 ‘두 종류의 의’라는 설교에서 그리스도인을 세 부류로 나눈 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관리에게 자신이 받은 손해에 대해 복수나 판결을 내려줄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둘째는 복수를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그들은 복음서에 따라 속옷을 취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겉옷도 줄 준비가 되어 있으며, 어떤 악에도 대항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고 그리스도의 형제들이며 장래 축복의 상속자들입니다. 셋째는 사고 관념에서는 둘째 유형과 같으나 실천에서는 그들과 같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소유를 반환하기를 요구하거나 그것에 상응하는 처벌을 요구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자신들의 유익을 구함이 아니라 처벌이나 배상을 통해 훔치거나 피해를 준 사람에게 변화된 삶을 유도하고자 함입니다. 기독교의 상징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자기희생적 사랑이 없다면 기독교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죄인을 사랑하여 의인으로 변화시키는 창조적인 것입니다.
「영혼의 눈을 뜰 때」/ 이양호
4.복수의 시편
복수의 시편은 모든 시편 중에서도 우리를 가장 곤란하게 만듭니다. 원수에 대한 하나님의 복수를 바라는 이 사상은 놀랍도록 빈번하게 시편 전체를 관통합니다. 어떻게 복수의 시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시편에서 말하는 원수들이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일하는 우리를 공격하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복수에 대한 시편은 그 어디에도 사적 다툼을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복수를 바라는 기도는 심판의 때에 그분의 정의가 집행되길 바라는 것입니다. 나 자신도 죄 때문에 심판 아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심판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놀라운 방식으로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수는 죄인에게 행해진 것이 아니라 죄인을 대신해 유일하게 죄가 없으신 그분의 아들에게 행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시편에서 간구하는 하나님의 복수를 친히 당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육체에 하나님의 복수를 행해 달라고 직접 하나님께 기도하신 것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해 주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복수의 시편은 우리를 예수님의 십자가로, 곧 원수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도해 줍니다. 오늘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복수를 통과해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원수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복수의 시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가 됩니다.
5.이슬람 자살특공대
이슬람권의 자살특공대는 1987년 12월 1차 팔레스타인 인티파다(이스라엘을 겨냥한 민중무장봉기) 이후 형성돼 2000년 12월 2차 인티파다를 거쳐 무장세력들이 자폭을 ‘순교행위’로 채택하면서 본격화됐습니다. 자살특공대의 종교적 기반은 코란에 명시돼 있는 지하드(성전)입니다. 지하드는 자기 정화와 깨달음,자기 계발을 위한 스스로와의 싸움이 우선이고 두번째가 이슬람의 가치를 훼손당했을 때 적과 상대해 싸우는 외부세계를 향한 전쟁입니다. 자살특공대를 조직하는 급진세력은 두번째만을 강조하면서 “지하드 도중 죽으면 천국으로 직행한다”고 주장합니다. 자살특공대원들은 아버지가 이스라엘 군에 의해 희생돼 고아로 자라면서 이스라엘과 서방국가에 뿌리깊은 복수심을 갖고 있는 10대 후반이나 20대가 많습니다. 이슬람권 곳곳에서 죽어가는 영혼들을 보십시오. 자살특공대 지원자는 차고 넘치는데 영혼구원을 위해 나서는 성도들은 적습니다.
/장자옥 목사(간석성결교회)
6.오른빰을 치는 자에게 왼뺨을 돌려대는 것은
1920년에 김인서 장로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방에는 또 한 사람의 독립운동가가 있었는데, 바로 그 유명한 윤병구 선생입니다. 이 사람은 비폭력과 무저항주의에 대해서 비난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김인서 장로를 만나게 되자, 대뜸 한마디 합니다.
“성경에 보면, 누구든지 네 오른빰을 치면 왼뺨을 돌려대라 했는데, 그따위로 해가지고 어떻게 독립운동을 하겠소? 폭력을 쓰는 자는 폭력으로, 무력을 쓰는 자는 무력으로 대항해야 될 게 아니오?”
그 때에 김인서 장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뺨을 치는 자에게 마주 대하여 치는 것은 혈기의 용맹이요, 소인의 용맹이요, 필부의 용기일 뿐입니다. 또, 한 사람밖에 대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른빰을 치는 자에게 왼뺨을 돌려대는 것은 거룩한 용기요, 만인을 감복하게 하는 대용(大勇)이요, 영적 용기입니다.”
이 말을 듣고 감동해서 윤병구 선생은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7.아무에게도 보복하지 말라
미국 남북전쟁에서 남부가 패배한 뒤 존 윌키스 부스는 링컨 대통령에 대한 보복을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다짐대로 링컨을 암살한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링컨은 남북 전쟁에서 승리하고 노예 제도를 폐지하면서 대통령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그는 재선된 대통령 취임식 연설에서
“아무에게도 악으로 대하지 말고 모든 자에게 사랑으로 대하라.” 라고 말하며 전쟁으로 관계가 악화된 남부와 북부의 화해, 흑인에 대한 백인들의 인식 변화를 촉구했습니다. 윌키스는 평생 한 사람에 대한 복수심으로 살아갔으며, 링컨의 삶은 적을 두지 않는 사람으로 남아 있습니다. 한 사람은 희대의 암살범으로 기억되었지만 다른 한 사람은 미국을 상징하는 대통령으로 남아있습니다. 이해관계로 인한 정쟁, 계층 간의 갈등으로 혼란한 우리나라의 현실을 바라볼 때, 링컨의 연설이 더욱 절실함을 느끼게 됩니다.
/김상복 목사 | 할렐루야 교회
8.가장 훌륭한 일
세 아들을 가진 부자가 있었다. 재산을 고루 나누어 주었지만 다이야몬드는 셋을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들 중 가장 훈륭한 일을 한 자에게 주기로 약속을 했다. 3개월의 기한이 되어 자식들이 아버지에게 착한 일을 보고했다.
첫째는 "저는 보석상의 신용을 얻어 일시 그 보석의 보관을 맡았습니다. 그 때 그 보석 중한 둘을 슬쩍 할 수 있었지만 모두 돌려 주었습니다."
아버지가 말하기를, "맡은 것을 돌려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뭘 잘한 것처럼 말하노?"
둘째는 "저는 냇가에서 익사 직전의 아이를 보고 뛰어 들어가 살려 주었습니다."
아버지가 말하기를, "아이들이 물에서 허우적 거린다면 누구나 뛰어 들어가 살려주어야 안되겠는가?"
셋째는 "저에겐 전부터 저를 죽이려고 틈을 엿보는 원수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가 술에 취해 곤드레 만드레가 되어 절벽 위에서 위험도 모르고 자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생명이 내 수중에 있었지만 저는 그를 깨우고 업어서 자기 집으로 데려다 주었습니다."
아버지가 "너야 말로 잘했다. 자기의 원수를 도와 악을 선으로 갚았으니 가장 훈륭한 일을 했다. 다이야몬드는 너의 것이다"하고 주었다고 한다.
9.적도 친구다
"사람에겐 친구와 적이 필요하다. 친구는 충고를, 적은 경고를 준다."
소크라테스는 "적"을 사상적 대립자나 사업적 경쟁자, 직장동료라고 규정한다. 사람들은 일하다가 자신의 뜻에 반대하는 적이 있으면 몹시 언짢게 생각한다. 그러나 주변에 친구만 있고 적이 없다면 긴장이 풀리고 만다. 친구는 내 잘못에 대해 마음이 상할까봐 충고하기를 주저할 것이다. 적은 평범한 일상에서 저지를 수 있는 과오를 예방하고 진보와 성장을 가져다주는 또 다른 이름의 친구다.
* 기도: 저를 힘들게 했던 사람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그 사람을 제가 미워하지 않게 하시고, 제게 상처가 되었던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용서하게 하소서.
10.참된 승리
미국 켄터키 산기슭에 브라운가와 스미스가의 두 가족이 나란히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소한 일로 총격전이 벌어져 브라운가의 가장이 죽었습니다. 브라운가의 맏아들 빌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리라고 굳게 결심했으나, 그는 곧 군대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가족들을 부양하느라 모진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크리스마스 날, 스미스 가족은 오랫만에 교회에 출석하였습니다. 그 날의 설교는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스미드는 큰 감동을 받았고, 브라운가의 가장을 죽인 죄를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남몰래 그들을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한 꼬마를 시켜 날마다 브라운가에 양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복수의 칼을 갈던 빌이 제대해서 집으로 왔습니다. 그는 누군가가 매일 양식을 전해 준다는 말을 듣고는, 그 고마운 분을 만나 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꼬마의 뒤를 밟았는데, 그곳이 바로 스미드가였습니다. 분노와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보고 있는 빌을 향하여, 스미드는 웃으면서 "빌, 원한다면 나를 쏘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빌은 자신이 군대에 있는 동안 가족을 돌보아 준 그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 왔다고 말했습니다.
11.소풍가는 날처럼
천상병이란 시인이 있습니다. 군사정권 시절에 그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푸르른 꿈도 펼쳐보지 못한 채 그의 삶은 시들어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죽음이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왔음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는 그는 <귀천>이라는 시를 남겼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좌절과 분노와 원망과 불평을 퍼부어대며 살 수 밖에 없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그는 생각를 달리하여 하루하루를 '소풍가는 날'처럼 즐겁게 살았노라고 이 시에서 노래했습니다.
유명한 미술가 루오의 판화에 재미있는 제목의 판화가 한 점 있습니다. 그 판화의 제목은 '향나무는 자기를 찍는 도끼날에도 향을 묻힌다'입니다. 괴롭히고, 아픔을 주고, 상처를 주는 도끼날에도 독을 묻혀주지 않고 오히려 향을 묻혀주는 향나무. 올 한 해에도 우리가 넘어야 할 산과 건너야 할 강이 많습니다. 그것들이 우리에게 좌절을 주고 아픔을 주고 때론 분노와 절망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그때마다 '소풍가는 날처럼' 생각을 바꾸어 살고 싶습니다. 또 '자기를 찍는 도끼날에도 향을 묻혀주는 향나무처럼' 일년을 달려가고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그런 삶이었습니다. 비방하고 멸시하고 죽이려는 자들 앞에서 오히려 그들을 용서하고 기도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를 찍으려 달려오는 사람들 앞에서도 예수의 향을 묻혀주는 그런 삶을 살고 싶습니다.
12. 사랑하기보다 더 어려운 일
나는 될수록 미워하지 않으려고 참는다. 나는 정말로 노력한다. 말 한 마디도 절대로 감정 내키는 대로는 하지 않는다. 내 마음의 한 길 위에도 '일단정지'의 패쪽을 세웠다. 미워해서는 아니 되지, 반성하고 반성한다.
"하나님 제발 미운 마음으로 하지 않게 해줍시사!"
기도하고 기도한다. 부끄러운 고백이다. 내 딴으로는 이제라도 바른 길에 들어섰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다.
- 함석헌의 《너 자신을 혁명하라》중에서 -
미워하지 않으려는 마음가짐은 사랑하기보다 더 실천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미워해도 가책을 느끼지 않고, 미워해도 정당화되는 감정이 이 세상에 가장 무서운 마음의 적입니다. 설령 미워는 했을지라도 용서하고 이해하는 후덕(厚德)한 마무리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13.원 한
수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한 살인범이 어떤 한 재판에서 사형언도를 받았다. 그런데 이 살인범의 형이 되는 사람은 공직에 있는 동안에 아주 많은 공로를 세워서 잘 알려진 사람이었다. 이 형은 주지사를 찾아갔다. 그리고 자기 동생을 사면해주기를 간청했다. 주지사는 동생을 위하여 탄원하는 형의 잊혀질 수 없는 공로를 참작하여 그 동생의 죄를 사면해주었다. 양복 안주머니에 주지사의 사면장을 받아 넣은 형은 곧바로 감방 안에 갇혀 있는 동생를 찾아갔다. 동생을 만나본 형은 물어보았다.
"만약 네가 사면을 받고 살아 나간다면 너는 무엇을 하겠니?"
그러자 동생은 안면을 찡그리더니 즉시 대답을 했다.
"만약에 내가 살아서 감방을 나간다면, 첫째로, 나에게 사형언도를 내린 판사를 찾아 그 놈을 죽이는 일이고, 그 다음에는 내 재판에서 증인으로 섰던 놈을 찾아서 그 놈을 쏘아 죽이는 일이야!"
형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나왔다. 그래서 형무소 문을 나서는 형의 양복 안주머니에는 주지사로부터 받은 사면장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당신의 마음이 용서와 사랑으로 채워져 있지 않으면 천사도 가지고 왔던 하나님의 축복을 당신에게 전달하고 갈 수가 없는 것이다.
14.까닭 없는 저주
성경: 잠26:2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의 떠도는 것과 제비의 날아가는 것같이 이르지 아니하느니라"
이락크의 회교 지도자 호메이니는 전 세계 회교신도들을 향하여 오늘부터 원수인 레이건 대통령이 죽도록 저주의 기도를 하라고 명령한 적이 있습니다.
조선왕조 말기의 명성황후(1851-1895)는 자기의 시아버지요 볼품 없는 자기를, 일국의 국모로 삼아준 대원군을 빨리 죽도록 무당을 시켜서 집요하게 저주를 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요? 명성황후는 대원군이 78세로 천명을 다하고 세상을 떠나기 무려 3년 전에, 그야말로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처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호메이니 경우도 매한가지입니다. 그는 레이건과 달리 이미 한 줌 흙이 되어버렸습니다. 저주는 하나님을 떠나거나 율법을 어기는 사람이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저주 외에 사람들이 자기의 감정에 따라 저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까닭 없이 저주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그들의 저주를 겁낼 이유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저주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복을 받았습니다(갈3:13).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외치며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 묵상: 당신은 사람들의 저주에서 보호해주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십니까?
15.원수를 용서
성경: 잠20:22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
아일랜드에 있는 어떤 학교에서 한 소년이 다른 소년을 때렸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으로부터 처벌을 받으려는 순간에 맞은 소년이 그를 용서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선생님은 그에게 "왜 그를 용서해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우리의 원수를 용서해 주어야만 한다고 하신 말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를 용서해 주며, 나로 인해 그가 처벌을 받지 않게 되기를 원합니다."
억울한 소리를 듣고 누명을 쓰고 짓밟히거나 심한 타격을 받으면 원수를 갚겠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최소한 자신이 받은 만큼은 보복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기회를 엿보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니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악을 갚으면 그로 인한 원한의 고리가 이어져서 또 다시 악을 반복하는 일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보응이 있음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기도: 저를 힘들게 했던 사람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그 사람을 제가 미워하지 않게 하시고, 제게 상처가 되었던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용서하게 하소서.
16.원수를 위해 기도하라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주님이 하신 이 말씀은 실천하기 쉽지 않습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원수나 핍박자들이 죽기를 바라지 않으면 오히려 다행이라 할 것입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그러나 이렇게 해야만 하고 만일 성도가 그렇게 못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못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가벼이 여기고 넘길 일이 아닙니다. 왜 그런지는 하나님의 성품을 알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성품을 말씀하시고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오.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이같은 말씀을 다 하신 다음에 하신 말씀이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는 더욱더 못할 일입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말씀을 그냥 넘겨서야 되겠습니까. 힘이라도 써봐야 하고 최대한의 노력이라도 기울여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왜,무엇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지 않고 핍박자를 위해 기도하지 못할까요?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교계의 한 모임에 참석했는데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그리스도교 침례교 등이 모였습니다. 교파는 행정이 다르고 성경해석이 다르고 교리적 차이에 따라 나뉩니다. 그 교파들이 모여 기독교 단체를 만들었는데 그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입니다. KNCC는 역사성, 한기총은 정체성을 강조하면서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요즘엔 기독교가 한 목소리를 내자는데 뜻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한 뜻을 모았지만 그래도 항상 작은 일에 갈등이 일어날까 조심스럽습니다. 이를 극복하고 해결해 나가는 것이 한국교회의 과제입니다.
지난 연초에 저는 기독교장로회의 경동교회 제직세미나에 갔습니다. 경동교회의 담임목사이신 박종화 목사님께서 강사를 소개하면서 “합동측에서는 기장을 이단시하는데 그곳의 부총회장 한목사께서 강사로 오셨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저는 “방금 소개받은 사람인데 기장에서는 합동을 밥통시한다죠”하고 말했습니다.
세 번째 예로는 이념의 문제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닫힌 사회로부터 열린 사회로 가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반공의 시대를 지나 공존의 시대로 가고 있습니다. 아직도 흑백논리에 젖은 사람들은 공산주의 하면 붉은 색만 봐도 적대감을 갖습니다. 그밖에도 민족주의 인종주의 등 나와 같지 않으면 적대시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우리와 다르면 원수시하는 것은 극복해야 할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고 넓게 생각하고 하나님처럼 모든 사람을 차별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원수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하고 핍박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온전하고 건전하고 성숙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명수 목사(경기도 수원 창훈대교회 담임)
17.먹이우라
성경: 잠25:21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
중국사람의 고부 싸움은 개방적입니다. 아더 스미드의 `중국인의성격''''이란 책에 보면 언성을 높여 싸우면서 서로가 집 밖에 오가는 행인이 있나 없나를 열심히 넘나본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유리한 판정을 해줄 만한 사람이 지나가고 있으면 그를 끌어들여 자기 입장을 누누이 설명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전혀 안면이 없는 행인일지라도 이 고부 싸움에 개입을 요구받으면 개입해서 판단해 주는 것이 예의요, 관례가 돼 있다 합니다. 이렇게 외부 사람들을 끌어들여 편싸움으로 커 나갑니다. 너그러운 마음이 없기에 끊임없이 싸웁니다. 오늘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송태승 목사
18.복수가 아닌 사랑으로
본문 : 출애굽기 21;23∼25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출 21;24)
라멕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부인이 둘이며 자식도 여럿 두었는데 모두 사회적으로 출세했습니다. 야발이라는 아들은 낙농업계를 주름잡는 사업가가 되었고 유발은 음악계의 거장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크게 성공한 아들은 두발가인인데 세계 철강업계를 주도하는 강철왕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4장 19절 이하에 나오는 라멕 집안 얘기입니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큰소리 떵떵 칠 만하지 않습니까!
라멕은 자신만만하게 부인들에게 큰소리를 칩니다. 창세기 4장 23∼24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누가 나에게 해를 입히면 그는 내 손에 죽을 것이다. 누가 내게 조그마한 피해를 입힌다고 해도 나는 상대방의 아이를 죽일 것이다. 우리 조상 가인을 해롭게 하면 벌이 일곱 배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지만 누가 나에게 해롭게 한다면 일흔일곱 배로 갚아줄 것이다” 라멕 시대에 잔인하고도 무제한적인 개인적인 복수가 자행되고 있었음을 확인하게 해주는 기록입니다.
라멕 시대의 무법성에 비교한다면 오늘 본문의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곧 ‘피해를 입힌 모양대로 당해야 한다’는 이 법의 기본 정신은 복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자비하고 무제한적인 사적 복수를 방지하는 데 있습니다. 당한 것보다 더 지나치게 복수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법의 집행을 사적인데서 공적인 영역으로 옮김으로써 개인 멋대로 복수하는 것을 예방하고 있습니다. 동시대에 만들어진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에도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함무라비 왕은 ‘질서와 정의를 세운 왕’으로도 평가되는 인물입니다.
예수님은 이 법을 더 발전시킵니다. 하나님의 본디 가르침은 사적인 복수의 ‘방지 정도’가 아니라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것이지요. 마태복음에 나오는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원수를 사랑하며…”
남에게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당한 그대로 또는 더 심하게 갚아주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런 감정을 넘어서야 합니다.
* 기도: 복수의 감정을 넘어서게 하소서. 사랑을 열망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지형은 목사(서호교회)
19.원수 사랑
미 공군 중위 ‘드 샤저’는 2차 세계대전 때 일본 정부의 사기를 꺾기 위해 최초로 도쿄를 폭격한 두리틀 소장의 폭격대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폭격대원에 자원한 것은 일본의 진주만 공격시 아내를 잃은 원수를 갚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당시 도쿄 폭격은 항공모함에서 출격해 폭격을 마친 후 중국의 중경으로 귀환하는 매우 위험하고 모험적인 작전이었습니다. 그는 미친 듯이 도쿄에 폭탄을 투하하고 중경으로 귀환하다가 엔진 고장으로 중국내 일본군 점령지역에 불시착해 포로가 됐습니다. 그는 4년 동안 여러 포로수용소를 전전하는 고난 중에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종전 후 신학교를 졸업한 뒤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일본 선교사로 파송된 샤저는 가장 먼저 진주만 폭격기 편대장 후지타 대위를 전도했습니다. 진정한 승리는 복수가 아니라 사랑인 것입니다. 복수는 복수를 낳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복수를 하는 사람입니다.
20. 원수를 사랑하라
어떤 사업가가 사업차 뉴욕에 갔다가 그곳에서 고등하교 2학년생인 아들의 사망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사고로 죽은 것도 아니고 상급생으로부터 폭행을 당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분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급히 귀국을 서둘렀습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는 복수심으로 이를 갈았습니다. 금지옥엽으로 키운 아들을 살해한 상급생과 학교 관계자들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분은 기독교인인지라 비행기 안에서 탄식하며 기도하는데 심령 깊은 곳에서 모든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면서 용서하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비행기 타고 오는 15시간 동안 마음속으로 원수를 수없이 죽이고 살리고 하다가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착륙했을 때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리라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용서를 통해 얻은 결과였습니다. 이분은 관계 기관에게 아들을 죽인 피의자를 관대하게 처리해 달라는 탄원서를 보냈을 뿐만 아니라 아들의 학교에 장학금을 기탁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은 이보다 더 큽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십니다.
21.원수까지 사랑
성경: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5:46)
레오나드 그리피스 목사의 설교집 <십자가 밑에서>에는 필라델피아에서 발생한 한국 학생 피살 사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1958년 4월 25일 교환학생으로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유학 중이던 한국인 학생이 편지를 부치러 가다가 불량배에게 몰매를 맞고 사망한 사건이었습니다. 살인자는 체포되었고, 대학가의 높은 여론과 시민의 분노로 사형이 언도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피살자의 부모가 담당 판사에게 탄원서를 보냈습니다. 탄원서에서는 자식을 죽인 살인자의 생명을 구해주면 그의 재활까지 책임지겠으며 이런 탄원을 하는 이유는 우리를 멸망의 길에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조금이라도 실천하기 위해서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막상 우리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답답하기만 합니다. 도저히 우리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과 환경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 기도: 사랑의 주님,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 묵상: 나는 원수를 용서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가?
* 성경: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 6:27∼28)
22.원수까지 사랑
일본에서 창간된 한 잡지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습니다. 그것은 잡지의 표지 때문이었습니다. 그 표지에는 평범하게 보이는 회색 나비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표지에 사람의 손이 닿아 그 사람의 체온이 전달되면 순식간에 회색 나비는 총천연색의 아름다운 나비로 변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존에 있던 사랑의 관념을 깨뜨리셨습니다. 그때까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던 사랑이란 가족과 이웃, 친구와 국가에 한정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랑은 하나님 나라 확장의 새로운 도구로 쓰여지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사랑은 원수에게까지도 베풀어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단순히 준다고 받아들여지는 것도 아닙니다. 거기에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누군가가 희생의 십자가를 질 때, 회색으로 음산했던 세계는 총천연색의 아름다운 세계로 변합니다. 이 세상이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십자가의 온기가 필요합니다.
23.용서로 복수한 동생
한 청년은 자기의 형이 집안 사업의 약속된 몫에서 자기를 제외시키려고 모략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였다. 그래서 그는 크게 분개했으며 그의 형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사업에서 동생을 완전히 배제시킨 형의 사업은 결국 실패로 끝났으며 설상가상으로 병까지 얻게 되었다. 형의 사업실패와 병 악화 소식을 누군가로부터 전해 받은 동생은 그 길로 모든 것을 제쳐두고 형에게로 달려갔다.
동생은 형을 시설이 좋은 병원으로 옮겨 주었고, 그 치료비 일체를 부담하였다. 또한 그는 형의 사업 일부를 재건시켰고, 정당한 절차로 형에게 그 일을 다시 맡겼다. 솔직히 그 청년은 형을 쉽게 용서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오랫동안 참아 온 울분을 극복하고 복수의 유혹을 과감히 이겼던 것이다. 용서란 용서를 받는 사람과 똑같이 용서하는 사람에게도 기쁨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어쩌면 사랑으로 용서하는 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그리스도인다운 일인지도 모른다.
24.2차대전
1968년 조용한 사건이지만은 위대한 일이 있었습니다. 세계 제 2 차대전 당시에 나치 독일이 유대사람 600만을 죽였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학살에 원흉이었던 아이히만 이라는 사람이 체포되어 가지고 재판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았고 이제 사형집행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바로 그 시점에서 유대사람 중에 꼴 란즈라고 하는 사람은 아이히만을 석방해 달라고 대대적으로 데모를 했어요. 대대적으로 석방 운동을 했습니다.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그는 상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아이히만을 죽인다고 해서 죽은 유대사람이 살아나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사형하지 않고 내 버려두어도 인생은 다 죽듯이 저 사람도 곧 죽을 텐데 뭐 미리 죽일 거 없지 않느냐? 셋째는 하나님은 그의 영혼을 이미 심판 하셨으니 우리가 심판할 것 없지 않느냐? 넷째는 동생을 죽인 가인도 하나님은 용서 하셨는데 우리가 누구를 정죄해서 그것이 옳단 말이냐고? 마지막 다섯째가 너무나 가슴을 뜨겁게 합니다. 사랑이 식어지는 세상에 이제부터라고 참 사랑을 심어가야하지 않겠느냐고. 여러분 언제까지 보복을 할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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