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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만남 】예화모음 13편

by 【고동엽】 2022. 6. 10.
[처음 목차 돌아가기]
 
 
1.미래산업

소망교회에 정문술 집사님이라고 있어요. 전 미래산업 회장이신데 이 분이 요 근자에 300억이라고 하는 재산을 카이스트에 연구비로 이렇게 기증을 했습니다. 그래서 화제가 됐습니다. 장안에 화제예요. 300억을 과학기술원에 바쳤다. '도대체 어떤 이유일까?' 했더니 이야기는 간단합니다. 그가 그 사업이 부진하고 연구발전이 안되어가지고 고민하고 있을 때, 회사가 아주 어려울 때,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찾아가서 얘기한 것도 아닌데, 본인이 직접 찾아와서 첨단기술을 전수해 줌으로써 회사가 살아났습니다. "그 고마움, 한평생 내가 잊을 수가 없습니다." 본인이 찾아와서 그 첨단기술을 전수해 주었기에 어떻게 해서든지 나는 이 은혜를 갚고 싶었어요.



그래서 300억을 드렸다 하는 얘기입니다. 그 사람은 누구냐? 이광형이라고 하는 현재 카이스트의 교수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또 묻습니다. "당신은 어째서 그 회사에 찾아가서 그 좋은, 훌륭한 기술을 전수해 주었습니까?" 그분은 대답합니다. "국가가 저를 선진국 유학까지 시켜서 그래서 나로 하여금 과학기술인을 만들게 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봉사하고 보답하고 싶었습니다." 이제 이 정문술 회장과 이광형 교수의 만남, 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만남이요, 또 은혜로 생각하고 은혜를 아는 그런 사람들의 만남의 관계로 그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여러분, 내가 찾아가서 만나는 것을 탐구적 만남이라고 하겠지만 타인이 나를 찾아와서 만나 주실 때, 이것은 은총적인 것입니다. 인연이 아니라 이것은 은총입니다. 그걸 잊지말아야 합니다.




2.좋은 사람과 사귀십시오

본문: 잠언 1: 10∼19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좇지 말라”(10절)

인생은 혼자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홀로 계시지 않습니다. 삼위로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보시기에 좋지 않자 돕는 배필을 만드셨습니다.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남은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만남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다음은 좋은 사람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시고 하나님 자신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실 때에도 사람을 통해서 주십니다. 인생의 좋은 기회를 주실 때에도 사람을 통해서 주십니다. 그러므로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축복입니다. 무엇보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좋은 만남을 위해 항상 기도할 것입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말할 때에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지혜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부모님의 교훈과 훈계를 소중히 여기라고 했습니다. 지혜가 그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혜가 어디 있느냐? 좋은 사람을 만나는데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본문은 사람 사귀는 것을 조심하라고 교훈합니다.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좇지 말라” 누구와 함께 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에게서 배우기 때문입니다.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와 같아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하여 자기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19절) 결국 운명이 그와 같아집니다. 우리 자녀들 중에 친구를 잘못 만나서 삐뚤어지는 일이 있습니다. 본래 좋은 아이였는데 좋지 않은 친구를 만나서 잘못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내 자녀가 누구와 사귀는지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지혜로운 자와 사귀면 지혜를 얻고 어리석은 자와 사귀면 욕을 얻습니다. 선한 자로부터 선을 배우고 악한 자로부터 악을 배우게 됩니다. 아무리 부하고 성공하고 출세했어도 그 사람이 악하다면 그 사람으로부터 배우지 말아야 합니다. 그를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가난하고 어렵고 실패했어도 바른 사람이라면 그로부터 배울 것입니다. 결과만 보고 사귈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에도 그렇습니다. 좋지 못한 말을 하는 사람과 함께 하지 말 것입니다. 지나치게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사람과 함께 하지 말 것입니다. 불평하는 사람과 함께 하면 자기도 불평하는 사람이 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습니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시1:1∼2) 감사하는 사람, 긍정적인 사람, 적극적인 사람, 순종하는 사람과 함께 하면 나도 그와 같이 됩니다. 내가 함께 하는 사람, 내가 만나는 사람, 내가 사귀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복받을 사람인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하나님께 복받을 사람이면 그와 함께 하는 나도 복을 받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사람을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좋은 사람을 만나게 하셔서 삶이 복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창환 목사





3.만남에는 그리움이 따른다

꽃은 향기로 서로를 느낀다. 서로의 향기로써 대화를 나누는 꽃에 비해 인간들은 말이나 숨결로써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다. 꽃이 훨씬 우아한 방법으로 서로를 느낀다. 인간인 우리는 꽃에게서 배울 바가 참으로 많다. 적게 만나고, 적게 말하는 것. 만남에는 그리움이 따라야 한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마음의 그림자처럼 서로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으신지요. '한 때의 마주침'이 아닌, 서로의 향기를 오래
주고 받을 수 있는 '그리운 만남'으로 가꿔 나가시기 바랍니다.





4.인생은 만남

인생은 나그네이고 복음은 주변 지향적이므로 인생에게 필요한 것은 만남이다. 고달픈 나그네의 삶이 행복한 삶이 되기 위해서는 만남이 필요하고, 복음적인 삶이 되기 위해서는 만남의 확장이 필요하다. 인생의 보람과 기쁨과 행복은 만남에서 온다. 구원도 목회도 선교도 만남이다. 성경의 이야기는 만남의 이야기이다. 나는 유학생활 초기에는 만남의 중요성을 바로 알지 못했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것이 전부인 줄 알았다. 그러나 차츰 보람된 인생은 만남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나가는 외국인 학생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고 주말엔 내 처소에 초청하여 음식을 나누며 교제를 했다. 아이오와 시에서는 서로 만나지 않던 한인들을 함께 만나게 해서 피크닉과 운동회도 했다. 결국 한인회와 한인교회가 만들어졌다. 귀국후의 나의 삶은 불신자, 새신자, 성도, 어린이, 교회지도자, 아시아인, 세계인, 북한인들과의 만남의 확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첫째, 아브라함과 모세의 삶은 만남으로 이루어졌다. 아브라함의 삶의 시작은 하나님 만남에서 시작되었고 주변 사람들과 이방 사람들을 만남으로 이어져 갔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서 그곳 사람들을 만났고 애굽으로 가서 그곳 사람들을 만났으며 그랄로 가서 그곳 사람들을 만났다. 모세의 삶도 하나님 만남에서 시작되었고 사람들을 만남으로 이어져 갔다. “하나님이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출3:4).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10). 모세의 삶은 하나님 만남에서 시작되었고 그의 사역은 바로와 이스라엘 백성 만남으로 이루어졌다. 만남에서 모세와 모세를 만난 사람들의 삶이 변화되었다.


둘째, 수가성 여인의 삶도 만남으로 이루어졌다. 사마리아의 수가성 여인이 주님을 만났을 때 그리고 수가성 사람들을 만났을 때 그녀의 삶과 수가성 사람들의 삶이 변화되었다. 실패와 좌절에 빠져있던 수가성 여인이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녀의 삶에는 기쁨과 희망의 샘이 솟아나기 시작했고, 물동이를 버려두고 수가성으로 들어가서 사마리아인들을 만났을 때 사마리아인들의 삶은 물론 그녀의 삶도 다시 변화되었다. 구원도 전도도 복음화도 만남이고 기쁨과 행복과 소망도 만남이다.


셋째, 베드로와 바울의 삶도 만남으로 이루어졌다. 베드로가 주님을 만나고 다시 또 다시 만났을 때 그리고 도르가와 고넬료를 만났을 때 베드로의 인생관이 바뀌어졌고 욥바와 가이사랴의 역사가 바뀌어졌다. 이방에 대해서 가졌던 부정적인 선입견이 산산이 부서져버렸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다시 또 다시 만났을 때 그리고 빌립보에서 루디아를 만났을 때 바울의 인생관이 바뀌어졌고 마게도냐와 유럽의 역사가 바뀌어졌다. 빌립보 강변에서의 두 나그네의 만남은 두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루디아는 마음과 영혼과 집을 모두 열어 바치는 유럽 복음화의 문이 되었고 바울 또한 만남과 나눔을 통한 진정한 기쁨을 누리며 땅끝을 향해 달려가는 이방의 사도가 되었다. 구원도 전도도 복음화도 만남이고 기쁨과 행복과 소망도 만남이다. 인생은 만남이다. 만남을 확장할 때 그만큼 우리들의 삶은 부요해지고 풍부해진다. 동서남북의 만남이 필요하다. 우선 인사부터 하자.
/김명혁 목사





5.그리스도의 사람을 만나면

일본의 토키치 이시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잔인하고 무정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못하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다 살해했다. 그러다가 결국 감옥에 갇혀 사형 날짜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감옥에 있는 동안 캐나다 여인 두 명이 그를 방문하여 창살 너머로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그는 이맛살만 찌푸렸을 뿐, 전혀 귀담아 듣지 않았다. 결국 두 여인은 포기하고 성경만 건네주고 떠났다.



이시는 그렇게 받은 성경을 읽어 내려가다가, 마침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힌 이야기를 읽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는 말씀에 그만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 구절에서 멈추었다. 마치 17~18cm 가량 되는 대못이라도 박힌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그것을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해야 할까? 그것을 무엇이라고 해야 할지 나는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오직 내가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강퍅한 내 마음이 변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그를 형장으로 끌고 가기 위해 온 간수는 자기가 예상했던 야수 같은 강퍅한 인간이 아니라, 얼굴에 광채 나는 웃음을 띤 사람을 발견했다고 한다. 살인마 이시가 거듭났던 것이다.
- 「십자가 주변의 사람들」/ 톰 휴스턴





6.예수를 만난 자의 축복

누가복음 7장에 등장하는 나인성 과부는 순종의 삶으로 향기를 풍기며 살았던 사람입니다.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청천병력 같은 일이 생겼습니다. 늘 병약하던 아들이 그만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어쩌면 그 아들은 그에게 남편이요 정신적인 지주였을 것입니다. 당시 가장 천대받던 계층은 고아와 나그네 그리고 과부였습니다.그렇지 않아도 과부로 많은 설움을 받고 살던 그녀가 이제는 정신적인 지주와도 같은 아들마저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비통하고 비참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이러한 슬픔과 비통함이 기쁨으로 변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녀는 절망에서 건짐받는 행복을 얻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절대 절망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절대절망을 절대희망의 디딤돌이 되게 해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실패자들은 절망속에 무너집니다. 그러나 많은 성공자는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자들입니다. 나인성은 ‘아름답다’의 뜻을 가진 성입니다. 그러나 그 성에 살았던 과부는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아픔의 시간들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런 중에 아들을 잃었으니 그 절망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유대 세계에서는 아들을 잃어 대가 끊어지는 것을 하나님의 징벌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과부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 절망이 기쁨이 되었던 것입니다.또한 그녀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현실적 문제에서 구원을 받는 행복을 누렸습니다. 기독교는 추상적인 종교가 아니라 현실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여 줍니다. 예수님은 나인성 과부를 보고 “울지 말라” 하시고 아들을 살려서 과부에게 다시 돌려주었습니다.말로만 울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2장 15∼16절에 보면 “가난한 자가 왔을 때 더웁게 하라 평안히 가라 하면서 그의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기독교는 죽은 종교가 아닙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 과부는 죽었던 아들이 살아남은 물론 자신의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았다는 강박관념에서 해방되고 아들과 함께 살 수 있게 된 기쁨을 얻은 것입니다.마지막으로 과부는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영혼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문제 때문에 헤매다가 주님을 만나고 그분 앞에서 기도하다가 분명한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는 예가 많습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과부도 추상적인 신앙생활에서 자신의 삶속에 직접 관여해주시는 주님을 만났기에 평생 주님을 좇는 영생을 소망하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믿음의 결국은 곧 영혼의 구원입니다.




7. 보아스의 밭에서 보아스를 만나다

본문: 룻 2:1 ~ 7

룻기서는 신앙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부모에 대한 효도, 노동의 신성, 근면하고 성실한 삶, 그리고 사랑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모든 의미가 다 담겨져 있는, 너무 아름다운 내용이 가득 찬 책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도 핵심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방인인 룻이라고 하는 소녀, 불쌍한 소망 없는 이 버림받은 여인이 보아스를 만나는 내용입니다. 보아스를 만나는 이것이 바로 핵심인 것입니다. 보아스는 누구입니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룻이 아무리 노동을 하여 부모에게 효도를 하고 그의 마음이 아름답고 고상할지라도, 아무리 이삭을 주워서 부모에게 효도했을지라도 보아스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 여인은 슬픈 여인이요, 불쌍한 여인입니다.



이 여인의 눈물과 슬픔을 아무도 위로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보아스를 만나면서 그의 발걸음은 아름답습니다. 그의 모든 상처는 싸매어졌습니다. 보아스의 품안에 안기면서 그는 개인적으로 길이길이 만 대에 복 있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이 여인의 슬픔을 다 씻어주신 보아스가 있다면 오늘도 우리를 찾아오셔서 주의 밭에서 이삭을 줍는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한없는 은혜와 사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구약 성경은 앞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요, 신약은 오신 그리스도입니다. 그가 온 인류의 보아스가 되신 것입니다. 나이가 많든지 적든지, 천하든지 귀하든지, 임금이든지 어떠한 노예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그 삶에 성경은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서도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인류의 가장 복 있는 믿음의 조상이 되고 야곱도 길을 떠나 가다가 정처 없이 유랑생활 하다가 하나님을 만나므로 그가 복을 받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만나는데 맞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민족, 보아스가 없는 민족과 개인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애굽의 영광이 황금으로 칠해져 있고 바벨론의 영광이 세계를 지배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나라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영원히 우리 온 인류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김삼환 목사 설교 중에서





8.수가성 우물가에서의 어떤 만남

본문: 요한복음 4:2∼26

오늘 본문에서 아무도 물을 긷지 않는 뜨거운 대낮에 한 여인이 물가로 나옵니다.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서 나온 여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인생에서 실패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무려 남편을 다섯 번을 바꾸어야만 했던 기구한 인생을 살았던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사람과의 만남에서 부분적인 만남으로 인해 인생의 고통을 맛 본 여인이었습니다. 마음속에 외로움과 고독이 많았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오지 않는 대낮의 수가성 물가에서 이 여인은 예수님과의 첫 만남을 통해서 자기가 찾고 있었던 만남,즉 전면적인 만남을 갖게 됩니다. 지금까지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재능이나 기술,혹은 노동력만 필요해서 만났지만 수가성 여인의 예수님과의 만남은 자기의 마음 속 아픔을 털어놓을 수 있는 변화의 시작이었습니다. 슬픔과 고독 속에 허덕이던 그 여인을 예수님은 만나주셨을 뿐아니라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전면적인 만남이었습니다. 설명하지 않아도 그 여인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수용해 주는 만남이었습니다.
우리들도 인간 관계에 있어 부분적인 만남으로 인해서 아픔을 겪고 있지 않는지요? 이제 수가성의 여인처럼 주님과의 전격적인 만남을 갖기를 바랍니다. 자기의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는 주님과의 만남은 그 만남으로 인해 놀랍게 역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만남을 중심으로 모든 사람과의 만남을 행복한 만남으로 변화시켜나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9.하나님을 만나려면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한 어린 소년이 있었다. 그래서 소년은 초콜릿과 음료수를 배낭에 챙겨 들고 여행길에 나섰다. 한참을 걸었을 때 소년은 길에서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할머니는 지치고 배도 고파 보였다. 그래서 초콜릿을 꺼내 할머니에게 드렸다. 할머니는 고맙게 받아드시고 소년에게 웃음을 지어보이셨다. 할머니의 그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웠기에 이번에는 음료수를 건네드렸다. 할머니는 또다시 웃어보이셨다. 할머니와 소년은 가끔씩 서로를 바라볼 뿐 다른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날이 어두워지자 소년은 피곤함을 느꼈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몇 걸음 걸어가다 말고 달려가 할머니를 꼭 껴안아드렸다. 집으로 돌아온 소년의 얼굴에는 행복이 넘쳐흘렀다. 소년의 어머니는 소년의 행복한 표정을 보고 소년에게 물었다. “오늘 무엇을 했기에 그렇게 행복해 보이니?” “오늘 하나님과 함께 점심을 먹었어요. 엄마도 아세요? 하나님은 내가 여태껏 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가지셨어요.” 할머니의 아들 역시 할머니의 얼굴에 나타난 평화로운 표정을 보고 놀라서 물었다. “어머니, 오늘 무슨 일이 있으셨기에 그렇게 행복해 보이세요?” 그녀가 대답했다. “오늘 공원에서 하나님과 함께 초콜릿을 먹었단다. 너도 아니? 그분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젊더구나.” 마더 데레사는 하루에 다섯 번만이라도 미소를 지으라고 하였다. 그러면 주위 사람들이 하나님으로 바뀔 것이고 쉽게 하나님을 뵐 수 있을 것이라고.
/ 권상혁 엮음





10. 3종류의 만남

만남에는 3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생선같은 만남,꽃과 같은 만남,손수건같은 만남입니다.
첫째, 생선같은 만남이란 만지기만 하면 비린내가 나는 만남을 말합니다. 만나면 서로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우고 원한을 남기게 되는 만남입니다. 이런 만남은 오래 갈수록 더욱 부패한 냄새를 풍깁니다.
둘째, 꽃과 같은 만남은 만나면 향기가 나고 좋아 어쩔 줄 모르지만 금세 시드는 만남을 말합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습니다. 풀은 쉬 마르고 꽃은 10일을 넘지 못합니다. 꽃과 같은 사랑은 풋사랑입니다.
셋째, 손수건같은 만남이 있습니다. 상대가 슬플 때 눈물을 닦아주고 그의 기쁨이 내 기쁨인 양 축하하고 힘들 때는 땀도 닦아주며 언제나 함께 하는 만남을 말합니다. 부부나 목자와 성도의 만남은 손수건의 만남이 되어야 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는 날 주님께서도 손수건으로 우리 눈물을 닦어주신다 하셨습니다.
/장자옥 목사(간석제일교회)





11.처음 만난 사람처럼

공동생활을 오래했던 한 목사님이 이탈리아의 한 공동체를 방문했습니다. 4백 명이 함께 공동 생활하는 곳인데 서로를 대하는 이들의 모습은 매일, 아침이나 저녁이나 따뜻하고 변함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공동생활의 어려움을 너무도 잘 알고 있던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답니다.
"어떻게 이런 신선한 사랑을 매일 나눌 수 있습니까? 서로 지겹지 않습니까?"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희들은 매일 아침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주님, 오늘 내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내가 처음 만나는 사람인 것처럼 대하게 하소서.'"
우리는 아내와 남편, 가족들을 대할 때 이미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대합니다. 그들에 대한 계산은 이미 끝났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가장 친한 벗에게 처음 만나는 사람인 것처럼 기대감을 가지고 선입견 없이 대할 때 신선한 사랑의 바람은 그곳에서 불어올 것입니다.

▧ 기도: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주신 주님, 제게 생명주심을 먼저 감사 드립니다. 제가 다른 사람들, 또 다른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해서도 귀하게 여기며 그들과 조화롭게 살며 잘 가꾸게 하소서.





12.처칠과 플레밍의 만남(인연)

영국의 한 시골에서 부잣집 소년이 연못에 빠져 거의 죽게 됐을 때, 가난한 집의 수영 잘 하는 소년이 그를 구해줬다. 그후 둘은 친한 친구가 됐다. 어느 날 부잣집 소년이 그 친구에게 말했다. “친구, 소원을 하나만 말해 줄래? 너의 소원을 꼭 듣고 싶어!” 그러자 가난한 집 친구가 대답했다. “내 꿈? 내 꿈은 런던에 가서 의학을 공부하는 거야!” 그 부잣집 소년은 친구의 소원을 자기 아버지에게 얘기했고 마침내 플레밍은 친구 아버지의 도움으로 런던에서 의학공부를 하고 의사가 됐다. 그가 바로 페니실린을 발견한 알렉산더 플레밍이었다. 그런데 페니실린을 발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플레밍은 그 부잣집 친구가 폐렴으로 위독한 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플레밍은 페니실린을 들고 급히 달려가 그 친구를 간신히 살려냈다. 그렇게 살아난 친구가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윈스턴 처칠이었다. 성경은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베드로전서 4:10)고 권면하고 있다.
/김의환 목사





13.창조주와의 만남

오랜만에 만난 이에게 별일 없이 잘 지냈느냐고 물었더니 한숨을 쉬며 "하나가 지나가면 또 하나가 오고 끝이 없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인생은 문제의 시작과 끝이 되풀이되며 종착역에 이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문제를 곤혹스러워 하는 어떤 이에게 문제없는 곳을 알려준 이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말없이 공동 묘지를 가리켰습니다. 죽음이 오기 전의 삶은 문제의 연속인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의 골짜기를 지날때도 험악한 바위 틈에 피어 오른 한 송이 꽃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삶의 비밀스러움이기도 합니다. 밤이 어두울수록 별은 더욱 아름답게 빛나고, 이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향기를 내는 발칸 산맥의 장미는 가장 춥고 어두운 자정과 새벽 두 시 사이에 딴다는 데 고난의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성경 속의 욥이라는 사람은 폐허가 된 집터에서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난 악창을 기와 조각으로 긁고 개에게 핥게 하며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창조주와 인간의 만남은 자아의 실존에 대한 자각입니다.
피상적인 존재의 의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고난을 통해 온다면 고난은 삶을 황폐하게 하기보다 삶을 향기롭게 하는 값진 의미가 될 것입니다.
(사랑은 사흘분의 설탕이예요/오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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