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사랑하면 기도한다 시116:1~2
이 시간 성령께서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고 감동하셔서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그저 듣고 지나가는 설교가 아니고
나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에 보면, 기도하라는 명령이 참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명령의 강도가 평범하지 않아요.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부르짖으라' '마음을 토하라'
이런 표현들을 우리가 종합해 보면
기도하라는 명령이, 단순하게 그냥 듣고 지나갈 만한 내용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힘을 주어서 강조해서, 우리에게 권고하시는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신학자인 포사이스는 이런 말까지 했어요.
'우리가 범죄할 수 있는 가장 큰 죄가 뭐냐? 그건 기도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너무 중요하게 명령을 하시기 때문에
그 명령에 순종 안 하면, 죄 중의 죄다.. 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성경안에는 약 650편 이상 되는 기도문들이 들어있어요.
그래서 성경은 어쩌면 '기도 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기도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 보면, 기도를 잘 하지 못해서 고민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기도를 해야 된다는 것은 알면서도, 이런 저런 이유로 기도가 잘 안 되고
또 결국 기도하지 못하고 살기 때문에..
항상 '기도'라는 말 앞에서는, 무거운 짐처럼 느끼는 분들도 계세요.
또 어떤 분들은 아예 기도 좀 하려다가 안 되니까 포기해버리고
주일날 교회만 왔다 갔다 함으로 인해서
그 마음에 남이 모르는 죄책감을 안고 있는 사람들도 있어요.
'자기가 기도 못 하는데 대한 죄책감'이죠.
참 이것은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어떻게 보면, 뭐 그런 심정도 이해할 수가 있어요.
혹자는 말하기를 기도가 뭐냐?
'하나님께 가는 가장 쉬운 길이면서, 가장 어려운 길이다' 라고 했어요.
'기도란, 하나님께 나아가는 가장 쉬운 길 같지만, 가장 어려운 길이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는 현실에 발붙이고 삽니다.
한줌의 흙으로 빚어져서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참 하찮은 존재 아닙니까.
이런 존재가, 기도를 통해, 지금 누구하고 대화를 하는 겁니까?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영으로 계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게 어떻게 쉽겠습니까?
또 대화의 대상이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불러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아요.
우리가 한두 시간 엎드려 기도해도, 하나님은 일언반구 대꾸도 안 하십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임재하신다는 것을 느끼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그런 임재 경험이 썩 물러갈 때도 있습니다. 종 잡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만족스러운 접촉점을 찾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은 기도입니다.
그래서 어느 조사를 보았더니, 678 명의 성도들에게 '당신의 기도생활에 만족합니까?'
라고 물었더니, 그중에서 '그렇다'고 대답한 사람이 불과 23명이었습니다.
대부분 성도들은, 기도가 자기에게 무거운 짐이 된다는 것이고
기도생활에 충실하지 못해서 갈등하는 부분이 있고
기도를 성실히 하지 못해서, 마음에 죄책감을 갖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가 힘든 짐이요, 무거운 짐이요, 마음에 은근히 부담스러운 것이 되니까
이 시간 성령께서 그 짐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말씀을 통해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을 사랑해서.. 기도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가끔 도전을 받습니다.
시116:1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2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이 시편을 누가 썼는지 정확히 모르는데요. 저는 다윗이 썼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116편 전체를 보면, 그 내용이나 흐름이 다윗의 시편과 거의 닮아 있기 때문이죠.
제가 본문에서 무슨 도전을 받느냐 하면,
한번 본분을 다시 한번 우리 마음에 두고 묵상을 좀 해 봅시다...
시116:1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2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이 말씀이 얼마나 대단한 말씀인지요.
정말 우리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이요, 굉장히 은혜스런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가만히 묵상하면, 다윗은 기도를 굉장히 즐거워 하는 사람 같이 느껴져요.
기도가 하기 싫은데 안 할 수가 없어서 억지로 하는 사람이 아니고
다윗은 참 기도가 좋아서.. 기도하는 것이 너무 행복해서..
날마다 기도하는 사람으로 우리에게 비춰집니다.
이게 우리에게 도전이 된단 말이에요.
▲90세 평생을 맹인으로 살면서 위대한 찬양과 위대한 기도의 모범을 보여 주었던
훼니 크로스비 여사가 남긴 찬송가 중에 하나가 219장입니다.
시편 116편 말씀을 묵상하다보면, 찬송가 219절이 생각납니다.
3절에 '주의 보좌로 나아갈 때에 어찌 아니 기쁠까
주의 얼굴을 항상 뵈오니 더욱 친근합니다'
실제 이 찬송가의 영어는 '하나님 앞에 1시간 기도드리는 그 기도의 시간이
얼마나 나에게 기쁨이 충만한지요, 이것만큼 행복한 것은 없습니다!' 하는 내용입니다.
3. O the pure delight of a single hour
That before Thy throne I spend,
When I kneel in prayer, and with Thee, my God,
I commune as friend with friend!
'주의 보좌로 나아갈 때에 어찌 아니 기쁠까'
기도하러 주님 앞에 나아갈 때.. 그 얼마나 기쁜가! 하는 고백입니다.
기도하면서 주의 얼굴을 항상 뵈올 수 있으니
이것만큼 나에게 큰 행복이 없다는 가사입니다.
이 찬송가 가사와, 다윗이 지금 시116편 1~2절에 고백한 내용이 일치합니다.
이게 제게 도전이 되는 것입니다.
'아! 기도를 해도 정말 기분 좋게 하네.. 기도가 그렇게 행복한가?
다윗은, 또한 크로스비 여사는 그렇다고 고백하는데,
그런데 나는 그렇지 못할 때가 너무 많은데...' 하는 생각이 드니까 도전을 받는 거지요.
여러분께도 이런 도전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이렇게 <행복한 기도자>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우리가 본문을 놓고 가만히 음미해보면, 그 비결은 한 마디에 집중되어 있어요.
그것은 사랑이에요! 다윗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에요.
자기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에요!
'내가 그를 사랑하나이다!' :1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그의 기도는 너무나 행복한 기도가 되었고
기쁨이 넘치는 기도가 되었습니다.
다윗이 어떻게 하나님을 그토록 사랑하게 되었는지 이 본문에는 설명이 없습니다만
우리가 이 본문을 묵상하면, 두 어 가지 추리를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어떻게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면서 기도할 수 있었을까?'
▲저는 처음부터 다윗이 하나님을 사랑해서 기도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도의 연륜이 점점 쌓이면서, 하나님이 자기 음성을 들어 주시고
자기 간구를 들어 주시고,
자기가 하나님을 부를 때마다 귀를 기울여 주신다는 사실이
이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점점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내 음성을 들으신다' :1
'이같은 기적 같은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하는 생각이 그에게 든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렘32:17절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시니이다'
저 높이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광대하셔서 전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몇 바퀴 돌면서도, '와! 황홀하다' 하고 외치는데
이 큰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그 크신 능력으로, 펴신 팔로
모든 세상에 있는 존재를,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이.. 우리가 기도하는 하나님 아닙니까!
그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시는 거예요.
그러면 '나'라는 존재는 어떤 존재입니까?
<욥기>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욥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욥9:2~3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를 좋아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 하나님이 주시는 질문 1천 개 중에
하나도 대답 못 할 어리석은 인간,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창조주 하나님과, 흙 속에 사는 인간과의 격차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는데
그 두 사이의 간격을 도저히 메꿀 수가 없어요. 이게 현실이거든요.
이렇게 엄청난 격차를 느끼기 때문에, 다윗은 이런 고백을 할 적도 있어요.
시편 144:4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 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하나님, 제가 뭔데..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말입니까?
하나님, 제가 뭔데.. 주님께서 제 기도에 귀를 기울이고
내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를 주목하신다는 것입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다윗의 입에서는 자연히 그런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었어요.
이런 것을 하나하나 깨달으면서, 다윗은 자기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를 들어주시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거든요!
기도를 기쁘고 즐겁게 하려면,
나같은 비천하고 죄 많은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의 기도,
그것도 어떤 때는 진실하지도 못하는 기도가 많잖아요.
그 기도를,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다...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얼마나 크신가)를 생각할 때
감동해서 나도 모르게 그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 이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50년 하고 기도해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감정이 전혀 없이 기도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배경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는 거 같아요.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다윗은 참 험한 세상을 오래 살았습니다.
십대 중반에 갑자기 국민적인 영웅이 된 것이 화근이 되어 가지고
실세인 왕의 미움을 받아서 15년이 넘도록 쫓겨 다니면서 엄청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온 세상은 다윗을 향해서 돌을 던지는 원수들인데,
갈데도 없고, 기댈 데도 없고, 속을 털어 놓을 데도 없고, 도움을 받을 때도 없는
그런 최악의 상황에 빠졌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 밖에 없었어요.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향해서 부르짖고, 부르짖고, 부러짖었는데
그 때마다 하나님이 응답을 하셨어요. 여러분 성경을 찾아보실까요?
시편 116:3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한 마디로 죽음의 고비를 만났을 때)
4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막 부르짖었어요. 그랬더니)
6 '여호와께서는 순진한 자를 지키시나니 내가 어려울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하나님이 응답해서 그의 생명을 구해 주셨습니다)
8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다윗은 기도하면서, 이런 기막힌 체험들을 자주 자주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귀만 귀울이고 가만히 들어만 주시지 않고
내가 위급할 때,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 아무도 나를 일으켜 주지 않을 때
하나님이 크신 팔을 내미셔서, 나를 일으켜 주시고, 도와주시고, 치유해 주시고
힘을 주시는 것을.. 다윗이 체험했습니다.
그러니 이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1
는 고백이 그의 입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할 것입니다' :2
'평생 주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할 것입니다' 하는 마음을 그가 가지고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윗과 우리와 비교할 때, 누가 더 나은 입장에 있습니까?
지금 우리가 훨씬 더 나은 입장에 있습니다.
다윗은 일생동안 하나님을 향해서 '아버지'라는 말을 한 마디도 못 했어요.
'두려우신 하나님'으로만 알았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그는 항상 그렇게만 보았지
오늘날 우리처럼 '아빠 아버지!' 그건 당시에 어림도 없는 소리였어요.
다윗은 평생 그렇게 한 번도 못 불렀어요.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돼었잖아요.
그러니 자식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 부모가 있습니까?
요즘은 부모들이 자녀 말에 너무 예민해 가지고 탈이지요.
그래서 모두 자녀의 종이 되어버렸잖아요. 부모는 그런 거예요.
자녀의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숨소리만 좀 거칠게 나와도 '무슨 일이 있나?' 하고 귀를 기울여 주는 것이 부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세요.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내 입에서 나오는 말, 내 마음에 있는 생각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귀를 기울여 주십니다. 들으십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필요 할 때는 항상 응답하십니다.
기도에 응답이 없다고요?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응답이 지금은 없는 것 같아도, 나중에 인생을 살고 지나고 돌아보세요.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찬송가 가사)
우리가 그렇게 큰 은혜를 받아서 지금까지 살고 있잖아요.
이런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가 모시고 살고 있어요.
그러니 다윗이 하나님을 사랑했다면, 우리는 10배 20배 100배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해야 됩니다.
이것이 행복한 기도, 복된 기도, 능력있는 기도를 계속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본몬의 다윗의 고백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진리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기도가 사랑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다시 말하면, 다윗에게 있어서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나님을 만나고 싶고, 하나님과 함께 있고 싶고, 하나님과 무엇이나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나누고 싶어하는 사랑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만나고 싶잖아요. 그렇죠?
과거에 여러분, 연애하실 때 얼마나 연인을 만나고 싶어 했습니까?
또 만나면 어떻게 그렇게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는지...
만나면 조금이라도 더 함께, 오래 있고 싶어해요.
그리고 만나면 말이 많아집니다. 입 꾹 다물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다윗처럼 사랑하면
내 기도가 '사랑의 행위'가 되어버려요.
그래서 하나님을 항상 만나고 싶어해요.
만나면, 기도하는 시간에, 하나님 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참 행복해요.
그리고 뭐든지 말하고 싶어요.
우리의 기도가 이런 기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가 사랑의 행위가 되면, 기도는 더 이상 거래가 되지 않습니다.
기도에도 거래가 될 때가 있어요.
'내가 제가 이 문제로 사흘 금식했습니다. 그러니 들어주세요!'
이런 기도는 거래에 가깝습니다.
'하나님, 이번에 내 기도 들어주시면, 십의 삼조 내겠습니다' 이것도 거래죠.
우리가 험한 세상을 살기 때문에, 참 어려운 고비를 만나면
이런 거래와 같은 기도를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이해하세요.
이런 기도를 받으실 때도 가끔 있습니다.
초신자일 때는, 하나님 앞에서는 이런 거래하는 기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리고 위급할 때는, '주여 이렇게 해 주시면, 제가 앞으로 이렇게 제대로 하겠습니다!'
하는 서원기도를 드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거래가, 기도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기도의 본질은, 전능하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모든 것을 다 가지신 하나님,
무궁한 사랑으로 우리를 품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너무 좋아서
그분 앞에 가서 앉는 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이 너무 크시고 좋으시고 자비로우시고 나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냥 그 앞에 나가서 앉고 싶어 하는 것, 이게 기도의 본질입니다.
주고받고, 내가 얻고 하는 것은 차제의 일이고,
먼저는 그냥 하나님이 좋아서.. 내가 그 앞에 가서 앉는 거예요. 엎드리는 거예요.
그리고 교제하고 대화하며 즐거워하는 것이.. 기도의 본질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기도가 '사랑의 관계'에서 나오는 사랑의 행위임을 몸소 보여 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어떻게 사셨어요?
사복음서를 우리가 살펴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 라고 적이 170번 나오는데요.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에 아무도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부르고 하나님을 찾은 사람이 없어요.
예수님이 처음이에요. '아버지!' 라고 부르신 분.
그러므로 그분께 있어서 기도하는 것은 무엇이었느냐?
사랑하는 아버지를 찾는 일이었습니다.
무슨 말이라도 다 나눌 수 있는 자상한 아버지에게
나아가서 마음을 털어놓고 그분의 품에 조용히 안겨 있기를 원하는 것이
주님에게는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과 단 둘이 있고 싶어서,
조용한 시간을 어떤 때는 구별 하시기도 하고
하나님과 단둘이 있는 것을 방해 받지 않기 위해서 한적한 곳을 찾아가 기도하시고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하고 만나서 기도하셨어요.
그래서 어떤 분은 예수님을 일컬어서 '개인기도의 개척자이시다' 이런 말도 했어요.
대부분 공적기도가 많았습니다. 근데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만나서 기도한 것을
사실 개척하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라고 말한 분도 있어요.
또 어떤 사람은 '새로운 기도 방식을 탄생시키신 분이시다' 라고 말했어요.
아무도 하나님을 '아버지!' 하면서 그렇게 매달리면서 하나님에게 안기는 기도를 해 본 일이 없는데
예수님이 그런 스타일의 기도를 개발하셨다는 말이에요.
그러므로 예수님이야말로, 기도가 서로 사랑하는 두 인격 간의 대화라는 것을
몸소 보여 주신 분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기도는 어떠합니까?
날마다 달라고 하는 떼를 쓰는 거래에 불과한 기도로써
날마다 그냥 거기에 머물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사랑해서, 마음을 열고 모든 것을 나누는
사랑의 행위로서의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세요! 사랑하면 행복한 기도자가 됩니다. 할렐루야!
기도를 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중요한 말입니다!
기도를 하면 할수록,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아빌라의 테레사 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분이 이런 말을 했어요.
'기도하는 가운데서만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기도할 때만,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고 그랬어요.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세요. 그러면 기도하게 됩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처럼 기도를 사랑의 행위로 이해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시시때때로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을 기뻐하면
참 좋은 게 한 가지가 있어요.
사랑의 행위이기 때문에 좋은 점이 하나 있어요.
'무슨 말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 할까?' 하는 고민을 별로 안 해도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격식을 따지면, 기도라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딱딱해집니다.
기도할 때 처음에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되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 다음에는 감사해야 되고, 그 다음에는 회개해야 되고.. 이런 격식을 차리는데,
그러나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찾아서 만날 때마다
그런 격식 차리느라고 우리가 신경 곤두세울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만나면 서로 격식을 안 따집니다.
종이에 말하는 순서 첫 번째, 두 번째 적어서, 격식 있게 대화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만나면, 무엇을 말할 거냐.. 그것은 큰 문제가 안 됩니다.
왜냐면 무슨 말을 해도 관심의 대상이 되니까요.
무슨 소리를 해도 듣고 싶어 하니까요. 이게 사랑하는 관계라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서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내가 무슨 말씀을 드릴까?
그런 거 신경 별로 안 써도 돼요. 여러분 중에 기도 못 하는 분들 대부분이 왜 못하느냐?
'할 말이 없어서...' 이게 문제거든요.
5분만 기도로 말하면 할 말이 바닥나요.
그래서 기도가 굉장히 힘들다고..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마음으로 진정 사랑하는 그런 마음으로 바뀌면.. 자연히 해결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너무 사랑하시고, 나도 하나님을 너무 사랑해서
사랑하는 두 사람이 만났는데, 그 그 관계는
무슨 말이든지 다 들어주는 관계입니다. 무슨 말이든지 다 듣고 싶어 하는 겁니다.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좋지 못한 감정도 털어 놓을 수 있고요. 하나님 앞에서.
내 마음에 있는 짜증스러운 이야기도 풀어 놓을 수 있고요.
어떤 때는 시급한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을 달달 볶을 수도 있고요.
그래서 이런 때 우리의 기도는 예비 타이어가 아니고 핸들 이에요.
예비타이어는 어떤 겁니까? 펑크 날 때 씁니다.
기도가 예비타이어가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만 기도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나 핸들은, 차만 타면,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손에 쥐고 돌립니다.
사랑의 기도는 그런 겁니다. 하나님 앞에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나가서 기도하는 사람은
핸들과 같아요. 예비타이어가 아닙니다.
핸들 stirring wheel 을 트는 것처럼, 대화의 방향을 이리 틀면서 기도하고,
또 저리 틀련서 기도하고..
항상 손에서 놓지 않는 핸들과 같이, 내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시편을 보면 아주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시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건한 자들이 하나님께 아뢴 온갖 기도들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위대한 종교개혁자 칼빈은 이런 말까지 했어요. 시편을 가리켜서 말하기를
'영혼의 구석구석을 모두 꺼내 보여주는 해부도와 같다'
그냥 아예 배를 가르고 속에 있는 것을 다 드러내서 해부하는 의사처럼
영혼 안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을 다 끄집어내서 보여주는 해부도와 갔다...
칼빈은 그런 말을 했어요.
시편을 보면 정말 그래요. 인간의 모든 감정이 다 녹아있어요.
시편을 잘 읽어보세요. 두려움에 떠는 사람도 있습니다. 찬양하는 소리도 있습니다.
불안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분노해서 부들부들 떠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근심에 찌들린 사람도 있습니다. 절망에 빠진 사람도 있습니다.
감사하며 춤을 추는 사람도 있습니다. 슬픔에 땅을 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의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고통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을 저주하는 사람도 있고, 복수 하려는 사람도 있고.. 시편 안에 다 있는 거예요.
이건 뭘 의미하느냐?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면, 내놓지 못할 것이 없다는 말이에요.
▲그 중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이 있다면 "저주하는 기도"입니다. *저주시
어떻게 하나님 앞에 기도 할 때, 남을 저주합니까? 있을 수 없어요!
그런데 시편 109편을 읽어 보세요.
<시편>에 저주하는 시가 몇 개 있는데,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109 편이에요.
이것도 다윗이 지은 것 같은데, 너무 사람들이 자기를 괴롭히고
중상모략 하고, 거짓말 하고..
다윗은 그 사람을 품어 주려고 해도, 그 다윗을 받아 주지를 않고
죽이려고 노리고.. 온갖 악한 짓을 다 하니까, 다윗도 인간인데 가만히 참다 참다 폭발하지요.
그래서 못 견뎌가지고, 하나님앞에 엎드려서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저주하기 시작합니다.
뭐라고 저주하는지 아세요?
'하나님 사탄이 그의 오른편에 서게 하소서!
하나님, 그가 기도할 때마다 그 기도가 죄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 그 사람 오래 살지 못하고, 요절하게 하옵소서!' 기가 막히죠.
'하나님 그 사람의 직분을 빼앗아 타인에게 주소서.
하나님 그 자식들을 다 고아가 되게 하시고,
그 아내들은 다 과부가 되게 하소서.
하나님 그 자녀들이 유리하면서 빌어 먹을 때,
그 자녀에게 동정을 베푸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하시고,
고리대금 하는 자가 그가 가진 소유를 다 빼앗게 하소서.
(그것 만으로 성이 안 찹니다) 하나님, 그의 자손이 다 끊어지게 하소서
(그것도 안 되겠어요) 조상의 죄값을 전부 그 자식들에게 갚으시옵소서!'
저는 이런 저주의 기도를 보면서, *시109편
오랫동안 곤혹스러움을 금치 못 했어요. 세상에 이런 기도가 어디 있나?
하고 생각하고 고민을 했는데, 얼마 전에 제가 읽은 책을 통해서 큰 깨달음을 얻었어요.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마음으로 악마 같은 생각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저주하고, 복수 하고 싶고, 심하면 죽이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옥목사 마음에도 그런 마음이 생겨요. (성도들 웃음)
그런데 이런 독한 마음이 생길 때, 우리가 대처하는 방법이 몇 가지 있어요.
하나는 진짜 복수하는 겁니다. 근데 이것은 하나님 앞에 죄니까 못하지요.
또 법이 금하는 일이니, 대부분이 포기하죠.
두 번째 방법은, 모든 분하고 억울한 마음을 그냥 끙끙거리며 참고 억누르는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이 그런 식의 방법을 선택하죠.
그 다음에 세 번째 방법이 있어요.
하나님 앞에 들고 나아가는 거예요.
저주의 기도를 드린 시편 저자들은, 세번째 선택을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의 감정을 다 들고 나갔어요.
저주하고 싶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을, 하나님 앞에 그대로 들고 나갔어요.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런 악한 감정을 원수에게 직접 대면해서 쏟아 놓으면.. 그것은 저주가 됩니다.
그러나 선하신 하나님 앞에, 그 악한 감정을 다 쏟아 놓으면.. 그것은 탄원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탄원이 되는 거예요.
저주와 탄원은 성격이 달라요!
그러니까 기도는 저주를, 탄원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편의 저주가, (탄원)기도가 되는 거예요.
실제로 하나님께, 그 사람이 그런 저주를 받기를 원해서가 아니라
너무 자기 마음이 힘들고 고달프로 고통스러우니까
그냥 하나님 앞에서 마음놓고 다 털어 놓는 거예요.
그게 그 사람을 저주하는 것이냐?
아니에요.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내놓고 탄원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래서 공의대로 그 기도를 다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탄원의 기도를 주님 앞에 드리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아픈 감정과 그 고통스러운 소리를 다 들으실뿐 아니라
그를 위로하시고, 그래서 마음을 누그려뜨려 주시고, 변화시켜 주시고, 치료해 주시고,
단잠을 주시고, 나중에는 원수도 포용할 수 있는 넓은 마음도 주시고,
억울한 일이 있으면 풀어주시고..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나가면, 여러분 못할 말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사실 나의 이 모든 억울한 사연을 다 못 들어줍니다.
남편이 집에 퇴근해 와서, 집사람에게 모든 얘기를 다 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집사람이 내 얘기 들으면 기절할지도 모르고, 잠을 못 잘 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하고 싶은 말도 그냥 꾹 참고.. 좋은 말만 하고, '아무 일도 없어 괜찮아!'
우리는 보통 이렇게만 말합니다. 친한 친구도 사실 내 얘기를 다 못 들어 줍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는 내 이야기 다 들어줄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우리 마음에 있는 좋은 감정도 / 나쁜 감정도
선한 감정도/ 악한 감정도.. 한 시간도 좋고 / 밤 새워도 좋고..
실증내지 않고 다 들어 주시는 분이 한 분이 계세요. 누구십니까?
우리 좋으신 하나님이세요.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시편 62: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누가복음 18:7~8절에 이런 말씀을 주님이 하셨어요.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므로 그 귀를 우리에게 기울이시는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그 앞에 나갈 때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될지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예수 잘 믿고 기도 열심히 하는 사람 치고
스트레스 받아가지고 우울증 걸린 사람을 한 사람도 못 봤어요.
스트레스를 풀 데가 있는데, 왜 우울증에 걸리겠습니까.
날마다 그 속에 다 차곡차곡 담고 있으니까 우울증에 걸리는 거지요.
날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눈물 흘리면서 '주여, 그 인간 미워 죽겠어요.
우리 남편 저거 가만히 두지 마십시오. 나에게 이렇게 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억울해서 못 살겠습니다. 하나님의 내 사정 아시지요? 뭐 하십니까?
하나님 일어나세요. 오늘을 넘기지 말고 좀 다리를 분질러 주세요!'
이렇게 하나님 앞에 그냥 막 털어놓는데, 거기에 무슨 스트레스가 쌓입니까?
▲신혼 때부터 사사건건 부딪히면서 주도권 싸움을 하는 젊은 부부가 있었어요.
보통은 결혼하고 나면, 서로 파워 게임을 하지 않습니까.
믿음이 참 좋은 사람들이고, 참 하나님 앞에 기도도 많이 하는 사람들인데
이상하게 결혼하고 났는데 그런 일이 일어났어요. 어느 쪽도 양보를 안 하는 거예요.
중요한 일이든/ 사소한 일이든.. 이야기를 서로 나누었다 하면 싸움이 시작되는 거예요.
왜냐면 줄다리기를 하고, 서로가 양보를 안 하는 것입니다.
얼마동안은 그렇게 하다가 '이러다가는 큰일 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가지고
한 번도 그때까지 해보지 않았던 방법을 하나 실행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게 뭐냐면, 함께 기도 하기로 한 것입니다.
저녁이 되었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또 무슨 이야기를 하면서 티격태격할 시간인데
둘이서 손을 꼭 잡고 소파에 앉아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어요.
기도하면서, 남편에 대해서 기분 나쁜 감정을 있는 대로 다 털어 놨어요.
그 시간에, 서로가 다투던 문제가 어떤 문제인지.. 자기 의견을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그냥 다 틀어 놨어요.
눈 뜨고 서로 쳐다보고는 말 못 할 것, 기도로는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요.
하나님 앞에 그냥 하고 싶은 얘기 다 하는 거예요.
남편도 다 하고, 아내도 다 하고.. 그렇게 기도했어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둘이서 서로 마음을 이렇게 솔직하게 열기 시작하니까
누가 이기느냐 / 누가 지느냐 하는 이런 주도권 다툼을
나중에는 문젯거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서로 마주보고 으르렁 거리는 대신에, 주님 앞에서 나란히 서게 되니까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그들을 하나하나 손질하기 시작하셨어요.
매일 저녁마다 기도를 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감정을 다스려 주셨어요.
인내하는 법도 배우게 하셨어요. 서로 이해하는 법도 배우게 하셨어요.
서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하나 하나 깨닫게 하셨어요.
그래서 그때 기도하기 시작해서, 그 기도를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부부싸움을 혹시 하더라도, 기도하면서 하십시오!
▲그런데 끝으로 한 가지 꼭 알아두세요.
기도가 사랑의 행위라고 해도, 가만히 있는데 자연스럽게 절대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서 가치있는 일 치고, 연습 안 하고, 훈련 안 하고 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악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사탄은 어떻게 하든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가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기도하지 못하게 우리의 입을 틀어 막습니다.
모든 기도 시간을 다 도둑질해 갑니다. 우리의 관심을 세상으로 향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얼마나 기도하기가 어려운 세상이지 몰라요.
그러므로 하나님을 진정 사랑해서 기도하기를 원하면
기도하기를 원하는 것만큼 내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기도'라는 말과 통하는 것이 '묵상'이란 말입니다.
묵상은 영어로 meditation 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라틴어로
영어의 리허설과 어근이 같습니다.
그러니까 '기도'하고 '리허설'과 통하는 말입니다.
리허설은 무대에서 배우들이 반복해서 연습하는 것을 뜻합니다.
기도도 리허설처럼, 연습을 안 하면, 훈련을 안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장애물을 제거하는 훈련을 해야 돼요.
기도할 시간이 이거밖에 없는데, 텔레비전 보고 싶어서 안달 하면
그 텔레비전을 끌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한 거예요.
기도해야 될 시간인데 자꾸 핸드폰으로 손이 가면
핸드폰을 집어 던지는 훈련을 해야 되는 거예요.
이런 연습, 이런 훈련을 안 하면, 우리는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어요.
인도의 성자 테레사가 한 번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행복하게 기도하는 모습을 하고 있으니까
옆에 있던 사람이 물었어요. '어떻게 그렇게 행복하게 기도하느냐고, 비결을 가르쳐 달라고..'
그랬더니 그가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기도하는 비결요? 기도하면 됩니다.
더 잘 기도하고 싶다고요? 그렇다면 기도를 더 많이 하세요!'
이것은 진리입니다. 연습하고 훈련해야 됩니다.
오늘 우리 모두 신앙 생활하면서, 기도 때문에 행복한 사람, 아름다운 삶을 사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매일 나가면
우리는 하나님과 정말 행복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를,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열심히 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기쁜 산책을 날마다 할 수 있는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본문을 마지막으로 한 번 외워 봅니다.
시115:1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2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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