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듣고 행하라 (누가복음 8장 19-21절)
< 가정은 들어주는 공동체다 >
공동체에는 학술적이고 수리적인 ‘좌뇌가 발달된 사람’뿐만 아니라 예술적이고 감성적인 ‘우뇌가 발달된 사람’도 필요하다. 즉 시험을 잘 치는 사람과 성품이 좋은 사람이 다 필요하다. 중간 리더 자리는 시험을 잘 치는 사람이 차지해도 좋지만 상위 리더 자리는 성품이 좋은 사람이 차지하는 것이 좋다. 그런 원리대로 사람이 배치되면 보다 나은 공동체가 되고 시험도 잘 치고 성품도 좋은 사람이 높은 자리에 있으면 더욱 복된 공동체가 된다.
좌뇌가 발달해 논리 실력만 있는 사람이 사회를 주도하면 사회가 많이 메말라지고 치열한 경쟁으로 정신은 치이게 되고 치우치게 된다. 또한 그런 사람만 다 머리를 차지하면 시는 누가 쓰고 목회는 누가 하고 후대를 사랑으로 키우는 일은 누가 하는가? 우뇌가 발달된 리더도 꼭 필요하다. 법학도 필요하지만 문학도 필요하다. 시험을 잘 치는 사람만 높여주지 말고 사랑과 지혜와 배려가 넘치고 믿음이 좋은 사람을 잘 발굴해서 높여줄 필요도 있다.
요즘 사회를 보면 사법시험에 붙은 사람의 큰 힘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사법시험 한번 잘 친 것으로 판검사로서 몇 십년간 너무 큰 권한을 가지는 것은 불합리하고 그들 자신에게도 좋은 것만은 아니다. 법을 앞세워 검사로서 정죄하고 판사로서 판단하다가 높아진 마음이 고착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을 극복하고 자신을 늘 성찰하며 법조인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일상에서는 겸손하게 사는 신실한 법조인들도 있다. 결국 시험을 잘 친 사람보다 여러 면에서 잘 배우고 종합적인 실력과 선한 가치를 가진 사람이 리더인 사회가 복 받은 사회다.
사법시험에 붙으면 오랫동안 큰 권세를 얻는다고 수많은 사람이 사법시험에만 매달리면 안 된다. 다양한 분야의 실력자가 필요하다. 과학 실력자도 필요하지만 문학 실력자도 필요하다. 자기가 잘하는 분야에서 인류와 공동체에 기여하며 살아야 한다. 사회의 리더 위치에는 수리적인 좌뇌가 발달해서 잘 말하는 ‘양지의 사회적인 실력자’도 필요하지만 감성적인 우뇌가 발달해서 잘 듣는 ‘음지의 가정적인 실력자’도 필요하다.
사회에서 성공하려면 말을 잘 해야 하지만 가정에서 성공하려면 말을 잘 들어야 한다. 가족은 같은 핏줄로 태어난 사람이지만 더 중요한 가족 개념은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다. 사회에서는 말을 잘해도 가정에서는 말을 잘 들어주라. 잘 들어주는 것은 가족의 기본 의무다. 가정이란 들어주는 공동체이고 가족은 들어주는 존재다. 교회도 큰 가정이기에 교회에서 가장 잘해야 할 일은 잘 들어주는 일이고 교인의 가장 훌륭한 일은 잘 들어주는 일이다.
< 순종하는 믿음의 축복 >
구원받은 성도는 크게 보면 모두 천국 가족이다. 결국 구원받은 성도가 우선적으로 잘 배워야 할 일도 잘 들어주는 일이다. 그래서 구원받은 성도가 천국 가족으로서 의식적으로 훈련해서 갖춰야 할 자세가 불신자 때보다 한 마디라도 덜 말하고 더 들으려는 자세다. 그 훈련이 잘 될수록 훌륭한 제자나 리더가 된다.
옛날에는 이런 말이 많았다. “예수쟁이들은 참 말을 잘해.” 그 말은 조롱과 모욕이 깃든 말이다. 앞으로는 이런 말을 듣기에 더욱 힘쓰라. “예수 믿는 사람은 참 말을 잘 들어줘.” 복음을 전파할 때도 말로만 전하지 말고 말씀대로 행동함으로 전하라. 말씀을 삶으로 번역해내는 모습이 천국 가족의 핵심 표식이다. 예수님도 말씀을 듣는 것이 천국 가족의 핵심 표식임을 본문에서 친히 말씀하셨다.
본문 19절을 보라. “예수의 어머니와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로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니.” 왜 당시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께 왔는가?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 때문에 걱정되어 예수님을 데려가기 위해서였다(막 3:21). 그러나 많은 무리들이 몰려든 상태였기에 가족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하지 못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말했다.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했다.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육신적인 가족을 경시한 말씀이 아니라 영적인 가족을 중시한 말씀으로서 영적인 가족이 되는 핵심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란 말씀이다. 매년 가정주일이 되면 말과 말씀을 잘 듣겠다고 새롭게 다짐하라. 그런 사람이 참된 가족이 될 수 있고 참된 가정을 얻을 수 있다.
내가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을 가지면 신기하게 사람과 환경도 내게 순종하면서 상황도 내 뜻과 일치된 모습으로 펼쳐질 때가 많다. 내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하나님도 대개 내 뜻을 받아들여주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축복과 행복도 따라온다. 믿음의 핵심 속성은 순종이고 순종은 잘 듣는 것에서 시작된다.
< 말을 듣고 행하라 >
필자는 총회 실행위원회 의장이지만 회의 때는 거의 듣는 편이다. 대신에 회의 전에 예배할 때는 회의를 은혜롭게 진행하도록 정지작업을 하려고 며칠 전부터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한 후 회의 전 예배 때 회의 진행과 관련된 말씀을 전한다. 며칠 전 실행위원회 때는 어떤 말씀을 전할까 기도하다가 교단도 큰 의미의 가정인데 가정 구성원들의 핵심 자세가 말을 잘 듣는 것이란 사실을 일깨우려고 오늘 본문 말씀으로 예배를 인도했다.
말씀을 인도하면서 의견이 달라도 복음이나 교단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문제가 아니라면 말을 하고 의견 내는 것은 줄이고 말을 듣고 의견 듣는 것을 잘해서 교단을 잘 발전시켜 나가자고 했다. 그런 사전 정지작업이 있었기에 약간 의견 충돌이 있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서로의 소리를 낮춰 그 상황을 은혜롭게 넘길 수 있었다. 또한 실행위원회 예배 때 <월새기(월간새벽기도)> 교정 사역과 관련된 말씀도 전했다.
<월새기>를 교정할 때 교정 팀으로부터 교정 제안을 받는 부분이 몇 백 군데나 된다. 대부분 표현 문제로 인한 교정 제안이다. 그때 어려운 표현은 쉽게 만들고, 과한 표현은 절제하고, 너무 강한 표현은 약화시키고, 성 인지 감수성을 고려하고, 정치적인 치우침이나 편견적인 어투도 최대한 없게 한다. 그런 교정 제안은 주로 받아들이는 편이다. 서로 의견이 다르면 교정 팀 3명 중 2명이 찬성하는 쪽의 표현을 채택한다. 그렇게 교정 팀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전체적으로 확실히 더 글이 좋아진다.
때로는 팀원의 느낌도 중시한다. 예를 들어 원래 표현은 “많이 사랑을 합시다.”인데 교정 팀원이 “사랑을 많이 합시다.”라는 표현이 더 낫게 느껴진다고 하면 그런 제안도 대개 받아들인다. 거의 같은 말이지만 팀원의 느낌을 통해 전달되는 작은 소리도 중시하기 때문이다. 또한 교정 팀이 필자의 저작권과 표현을 존중하고 은혜도 크게 받으면서 그저 자기 존재 의미를 드러내려고 한 제안이 아님을 아니까 열린 마음으로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때로는 “사랑과 희망과 용기와 근면을 앞세워 나아가자.”라고 표현했을 때 4가지 가치를 3가지로 줄여 “사랑과 희망과 용기를 앞세워 나아가자.”라고 표현하자는 제안 등도 대개 받아들인다. 사실상 안 고쳐도 되지만 독자 입장에서 어떻게 읽힐까를 중시하기에 주로 받아들이는 편이다. 그때 작은 표현 차이로 왜 시비를 거느냐고 자존심 상하게 여길 수도 있지만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니까 교정 시간이 한 달 사역 중 가장 웃음꽃이 피는 시간이 된다.
어떤 때는 다른 교정 팀 두 명이 같은 의견을 내도 최종적으로 필자가 강력히 주장하면 그때는 1대 2라도 필자의 의견이 통과된다. 교정 팀이 리더이자 저자인 필자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그때는 교정 팀원이 말한다. “목사님이 그렇게 강력히 주장하면 저희들은 깨갱 하고 물러서야지요.”라고 하면서 거의 100% 제안을 철회한다. 그렇게 열린 마음으로 서로를 받아들이니까 상흔이 남기보다 웃음이 넘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말만 잘 들어도 행복이 찾아온다.
< 말씀을 듣고 행하라 >
사람 말을 잘 듣고 행해도 행복이 찾아오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행복이 얼마나 더 찾아오겠는가? 말씀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의 최대 원천이다. 꿈이나 환상보다 덜 화려해 보여도 말씀은 훨씬 더 영혼을 변화시킨다. 물론 성경 자체가 신비한 마술 도구는 아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끼고 있으면 귀신이 범접하지 못하고 성경을 품고 자면 마음이 평안해져서 잠이 잘 든다고 한다. 성경을 그런 신비적인 도구로 여기지 말라. 말씀이 능력이란 말은 말씀을 듣고 행동할 때 인격과 인생에 선한 변화가 이뤄진다는 뜻이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처럼 복된 삶은 없다. 물론 말씀대로 살면 잠시 세상적인 번영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 약삭빠른 사람은 말씀대로 살면서 계속 당하며 살고 돈도 벌지 못하는 길로 가는 성도를 동정하듯이 불쌍하게 본다. 그런 동정심을 사양하라. 말씀대로 살면 지금의 좁은 길이 나중에는 넓어지고 세상 보상은 적어도 나중에 천국 보상은 커진다. 또한 말씀 안에 있으면 점차 언어와 표정과 인격도 변하고 그로부터 선한 영적인 영향력이 나타난다.
옛날에 한 목사가 영국 버밍햄에서 교회를 섬길 때 교인 중 한 장의사가 담배상 친구를 어떻게 교회로 인도할까 고민했다. 어느 주일에 장의사가 잘 설득해서 담배상 친구를 교회로 데려왔다. 예배가 시작될 때 목사가 강단에 올라서자 담배상 친구가 놀란 표정으로 목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예배 후 귀가할 때 담배상 친구가 장의사 친구에게 말했다. “여보게, 그 강대상에 있던 분을 보기만 해도 내가 추하게 느껴졌네. 앞으로 나는 더 이상 담배를 팔지 않겠네.” 다음 날 담배상 친구의 가게 유리창에 이런 팻말이 붙었다. “점포 매매.”
왜 그 목사의 얼굴빛을 통해서도 선한 영향력이 나타났는가? 그가 오랫동안 말씀대로 행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순교하던 스데반에게도 그런 얼굴빛이 있었고 시내산에서 40일 금식기도 후 내려온 모세에게도 그런 얼굴빛이 있었다. 말씀을 듣고 행동하면 어투도 달라지고 표정도 달라지고 얼굴도 달라지면서 그의 내면에는 기쁨과 만족과 행복이 넘치게 된다. 늘 말씀을 잘 듣고 행해서 천국 가정의 일원이 되고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성도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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