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를 수용하고 대비하라 (마태복음 21장 23-32절)
이번 코로나 사태는 사람들의 기존 생각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외형적으로 많은 사람을 모으는 것이 성공 지표처럼 인식된 기존 개념도 바꾸어 놓았고 사회적 거리 두기가 배려와 사랑의 지표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했다. 또한 사회에서 활동적으로 살고 많은 사람과 교제해야만 성공과 행복 지수가 높아지는 줄 알았지만 활동을 줄이면서도 깊이 있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음도 깨닫게 했다. 실제로 사람의 활동이 줄어들자 곳곳에서 하늘과 물이 맑아지고 자연이 회복되는 소식들이 들리고 있다.
한국 교회에도 큰 의식 변화를 낳았다. 그동안 교인이 몰려 교회 의자에 다닥다닥 붙어 앉으면 뭔가 있는 것 같아서 성장이 성장을 낳았다. 그러나 앞으로는 예배당에 사람이 꽉 들어찬 것을 오히려 덜 선호할 것이다. 또한 성장도 무조건적인 성장보다 바른 삶을 동반한 성장이 더 추구될 것이고 성 인지 감수성의 강조로 인적인 접촉을 남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고려하며 적절하게 거리를 두는 사랑 방식이 점차 세를 얻을 것이다.
이번 코로나 사태는 세계의 힘의 지형도 변화시킬 것이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영국 국력의 상대적 약화로 유럽 제국간 패권 경쟁이 심화되다가 그것이 충돌로 이어진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유럽은 폐허가 되었다. 결국 2차 세계대전 후 세계 패권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완전히 넘어갔다. 당시 두 나라의 3배에 달하는 인구 차이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 후 미국은 세계 최강대국으로 군림했다. 그 힘은 최대 원천은 압도적인 경제력이었다.
지금 미국은 경제력이 옛날만큼 압도적이지 않고 지나친 자국 경제 보호로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리더십이 약해졌다. 특히 트럼프 정부가 들어선 후 심한 자국 우선 전략으로 동맹들의 신뢰까지 잃어서 잠깐의 경제적인 이익은 얻었지만 장기적으로는 더 많은 것을 잃었다. 앞으로 미국의 경제적 비교 우위는 더 낮아질 가능성이 크기에 다자 패권 시대를 냉철히 대비해야 한다. 예전의 영국과 독일의 충돌보다 미국과 중국의 충돌은 훨씬 더 많은 피를 부를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후 유럽에서 미국으로 패권이 넘어갔듯이 코로나 사태 후 미국에서 중국으로 패권이 점차 넘어갈 수 있다. 우리는 중국보다 미국이 계속 힘이 세기를 희망하지만 현실은 희망과 다르게 펼쳐질 수 있음을 기억하고 대비해야 한다. 중국이 미국보다 4배 이상 인구가 많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중국은 미국은 절대 이기지 못해.”라고 믿고 싶지만 중국에 내전이 벌어지지 않는 한 점차 중국이 미국을 앞설 가능성이 높다. 미국의 압도적인 힘이 약해지면 오히려 미국이 갈라질 가능성도 있다.
시진핑 집권 후 중국의 오만은 도를 넘고 있다. 인간적으로는 정이 안 가지만 민족의 미래를 감정적으로만 풀어갈 수는 없다. 그래서 선견지명을 발휘해 중국 시장을 계속 두드리는 기업가도 있다. 중국의 실체를 잘 알고 중국에 대해 싫은 감정이 있어도 기업과 민족의 미래를 위해 기업가 정신을 품고 앞으로 중국의 힘이 더욱 커질 것을 예측하며 미래를 대비하는 것이다. 그런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지 않는다면 기업과 민족의 역량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의의 측면만 보면 의가 부족한 중국과 좋은 관계를 맺기 싫다. 그런 마음을 조절하고 많은 사람에게 먹을 것과 일터를 주려는 기업가 정신과 선견지명을 가진 사람을 향해 “왜 중국과 거래해?”라고 하면 안 된다. 국부 증진에 일익을 담당하고 작은 이윤이라도 찾기 위해 길을 뚫는 기업가는 중국 사장을 무조건 외면하기보다 어떻게든 활용하려고 할 것이다. 세상의 변화를 인정해야 한다. 중국의 개방 전 경제력이 미국의 10분의 1도 안 되었던 시대를 생각하고 국제 흐름을 읽지 못하면 미래를 선도하는 나라와 민족이 되기 힘들다.
예전에는 일본과 한국의 경제력 격차가 매우 컸다. 그때만 생각하고 일본이 한국을 지나치게 깔보는 것이 일본의 발전이 더딘 이유 중 하나다. 삼성이 소니를 추월한 상황이 국가 차원에서도 진행됨을 자각하지 못하면 일본은 더욱 뒤떨어질 것이다. 오래 전에는 프랑스에 비해 크게 가난했던 스위스 청년들이 프랑스 용병이 되어 월급을 고국으로 보내 스위스에 있는 가족들이 먹고 살았다. 지금은 스위스가 프랑스보다 더 잘 산다.
국력도 중요하지만 각 개인의 능력과 의식과 생각과 비전의 수준도 중요하다. 일본이 과거의 영화에 매여 옛날 방식의 체제와 국가주의를 고수하면 더 수렁에 빠지고 동양의 변방으로 점차 밀려날 것이다. 그런 모습을 반면교사로 삼아 시대의 흐름을 잘 읽고 대비해야 한다. 리더는 더욱 그래야 한다. 성도는 더욱 더 지혜롭게 변화를 수용하고 대비해야 한다. 좋은 것을 고수하는 끈질김도 있어야 하지만 세상 변화에 지혜롭게 적응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의롭게 세상의 선한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
< 지혜롭게 대응하고 말하라 >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며칠 전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말했다(23절).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당시 백성을 가르칠 권위를 부여하는 최고 기관은 유대 의회였던 산헤드린이었다. 예수님은 그런 공적 권위를 부여받지 못했고 가말리엘 같은 권위 있는 랍비로부터도 권위를 부여 받지 못했다. 그때 예수님이 말 한 마디라도 잘못하면 교권주의자들의 함정에 빠질 수 있었다.
그때 예수님이 대답하셨다. “내가 묻는 말에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당시 백성들이 선지자로 여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했다. 그런 증언을 한 요한의 세례가 하늘과 사람 중 어디로부터 왔느냐고 되물었기에 교권주의자들이 오히려 대답하기가 난처해졌다. 하늘로부터라고 하면 왜 그를 믿지 않았느냐고 할 것이고 사람으로부터라고 하면 모든 사람이 그를 선지자로 여기니까 백성이 무섭게 대들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결국 교권주의자들은 모르겠다고 했다. 그들은 위선적인 태도로 진리보다 교권에 관심이 있었기에 참과 거짓을 가리는 중요한 질문에서도 애매하게 모른다고 한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도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라고 하셨다(27절). 교권주의자들의 함정을 판 질문을 받고 오히려 그들을 함정에 빠뜨린 예수님의 지혜로운 대응과 말씀을 보면 지혜로운 대응과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된다.
살다 보면 지혜롭게 대응하고 말해야 할 때가 수시로 생긴다. 무작정 하나님의 섭리와 믿음만 내세워서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지 말고 지혜롭고 전략적으로 살라. 그것을 위해 평소에 깊은 묵상으로 지혜로운 대응과 말을 준비하라. 그래도 다양한 상황에서 지혜롭게 대응하고 말하기가 쉽지 않기에 수시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라.
며칠 전에 둘째 딸이 웃으며 질문했다. “아빠! 만약 누가 저를 납치해 성경 전권파일을 폐기해야 돌려주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실래요?” 대답하기가 난처해서 순간적으로 좋은 대답과 결과를 위해 기도한 후 말했다. “그런 상황은 없을 거야.” 그때 둘째 딸이 말했다. “만약 그런 상황이 되면 제가 희생할게요. 성경 말씀으로 많은 영혼을 구해야 하니까요.” 마음이 흐뭇했다. 어디서든지 지혜로운 대응과 말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하면서도 기도하라. 주님은 성도가 지혜로운 언행으로 주변에 덕을 끼치고 기쁨과 행복을 주는 삶을 기뻐하신다.
< 의를 앞세울 때 복을 받는다 >
권위의 원천과 관련한 논란 후 예수님은 ‘의의 도’를 강조하셨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삶을 의의 도를 따르는 삶으로 표현한 것은 2가지 교훈을 준다. 예수님을 영접해야 의롭게 된다는 교훈과 구원받은 성도는 의의 도를 따라 살아야 한다는 교훈이다. 어떤 교인은 구원받은 성도가 의를 추구하는 것을 무조건 율법주의적인 태도로 여긴다. 그렇지 않다. 기독교에서 의롭게 살라는 말은 구원받으려고 의롭게 살라는 말이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로서 의롭게 살라는 말이다.
한국 교회가 고속 성장 시대에 많이 잃었던 삶이 의를 추구하는 삶이다. 율법주의에 빠지지는 말되 의를 추구하는 삶을 지속적인 인생 과제로 삼으라. 이번 코로나 사태로 앞으로 교회에 사람을 빽빽이 채우는 방식의 성장 모델이 지양될 것이다. 무조건 교인 숫자 늘이는 데 몰두했던 방식을 깨뜨리고 빠른 성장보다 바른 성장을 추구할 때 하나님은 그 모습을 더 기뻐하시고 한국 교회에는 더 건강해질 것이다. 이제까지 한국 교회는 의를 통한 부흥의 역사가 부족했다. 실제로 의를 내세우면 교회 부흥이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예전에 한 목사가 미국의 한인 교회에 부임했다. 처음에는 성도들이 다 좋아했다. 그런데 점차 불평이 돌았다. 목회자가 너무 의를 강조한다는 불평이었다. 점차 교회 헌금도 줄었다. 3년 후 그 교회 장로가 조용히 교단 감독에게 말했다. “감독님! 우리 목사님이 다 맞는 말씀을 하지만 은혜가 안 됩니다. 은혜가 되어야 주머니를 비우지 은혜가 없는데 어떻게 주머니를 비웁니까? 지친 이민 생활에서 너무 의를 강조하고 야단치는 설교만 들으니까 힘듭니다.” 얼마 후 그 목사는 교회를 떠났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오랫동안 한국 교회는 의를 내세우기보다 복을 내세워 부흥했다. 의를 내세우는 것이 복이고 점차 진짜 복이 주어지는데 사람들은 의보다 복을 내세우는 교회를 더 찾았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부흥했지만 교회와 교인이 의의 나무가 되는 이미지는 얻지 못했다. 한국 교회의 큰 불행이다. 의의 길을 추구할 때 덜 재미있고 덜 신나고 성장이 조금 더뎌도 기쁘게 그 길을 걸으라. 그러면 당대의 축복도 있겠지만 당대의 축복이 더디면 축복의 기초를 잘 쌓았기에 후대의 축복은 더욱 넘칠 것이다.
교회와 교인의 궁극적인 사명은 영혼 구원에 영혼 변화에 두어야 한다. 다만 그 사명을 이루는 방법은 무엇보다 정당하고 의로운 방법이어야 하고 거짓은 더욱 없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천국 확장에 귀하게 쓰임 받는 복된 교회를 꿈꾸라. 더 나아가 의로운 길을 가면서도 부흥의 역사를 이루는 의의 모델 교회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세상의 복된 변화를 일으키는 거룩한 지렛대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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