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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지도/솔로몬의 성전건축

by 【고동엽】 2022.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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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몬 성전(1차)과 헤롯 성전(2차) 비교 ⓒ로고스 바이블 소프트웨어

 

 

위의 그림은 로고스 바이블에서 제공하고 있는 1차 성전(솔로몬 성전)과 2차 성전(헤롯 성전) 비교 그림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예루살렘 성전은 주전 19-20년경 ‘헤롯 대왕’이 증축한 성전입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성전은 ‘헤롯 대왕’의 성전만큼 크고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왜소해 보일 정도입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열왕기상 6장 38절」에 나타난 바와 같이 이 성전을 건축하는데, 7년이 걸렸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아래에서 대략적인 크기를 살펴보게 되겠지만, 약 70평의 네모반듯한 건물 하나를 짓는데, 7년이 걸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하나씩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솔로몬’에 의해 건축됩니다. ‘솔로몬’의 성전 건축 이야기와 성전의 형태에 관한 진술은 「열왕기상 6-8장」에 나타납니다.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의 대략적인 모형도를 그려보면 아래와 같이 됩니다.

솔로몬 성전 평면도 ⓒ위키피디아

고대 근동 지방에서 사용된 단위인 ‘규빗’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긴 규빗(52.5cm)과 짧은 규빗(44.7cm)입니다. 지난 글에서 보았던 ‘히스기야 터널’에서 발견된 비문 내용을 보면, ‘히스기야’ 시절에는 짧은 규빗 44.7cm가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단위가 ‘솔로몬’ 시절에도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략적인 모형이기 때문에 짧은 규빗을 소수점에서 반올림하여 45cm로 계산한 것입니다.

위 그림은 잘못된 부분, 알 수 없는 부분, 빠진 부분이 있습니다. 먼저 잘못된 부분은 아래에 있는 평면도를 봤을 때, 위아래로 나 있는 출구입니다. 「열왕기상 6장 5-8절」에는 성소를 둘러싼 다락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문은 성전 ‘오른쪽’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때 ‘오른쪽’도 문제인 표현입니다. ‘오른쪽’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예마니(ימני)’는 방위를 뜻할 때는 ‘남쪽’을 의미하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 ‘오른쪽’, ‘왼쪽’은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을 기준으로 합니다. ‘예마니’가 남쪽이라는 뜻이라면 다락의 문은 아래쪽에 표시된 문만 있던 것입니다. 만약 성전을 바라보고 있는 상태에서 성전을 설명하면서 ‘예마니’를 썼다면 그건 오른쪽인 북쪽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어디에 있는 문이 맞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열왕기상 6장」에서 다락의 문은 한 방향으로 나 있었다고 말하는 점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어떤 신앙적 의미를 담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점은 또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개역개정 성경의 번역이 잘못된 것으로도 볼 수 있는데, 「열왕기상 6장 8절」에서 ‘중층 골방의 문은’이라고 말하는 부분입니다. 중층(티콘, תיכון)은 아래층과 윗층이 아닌 층을 의미합니다. 개역개정 성경에 따른다면, 성전 다락으로 들어가는 문은 2층에만 있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1층에 문을 만들지 않고 2층에만 문을 만드는 것이 어떤 신앙적 이유가 있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중층’을 ‘중앙’으로 해석합니다. 다락의 문은 가운데에 있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저도 아무리 생각해봐도 중앙에 문이 있었다고 번역하는 편이 옳다고 봅니다. 따라서 위의 그림은 잘못되었습니다. 문의 위치가 어디인지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부분은 ‘놋쇠 바다’의 위치입니다. 「열왕기상 7장 23-39절」에는 놋쇠 바다와 놋 받침, 물두멍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타납니다. 이는 성전 전체의 설계도보다 절수는 짧지만, 더 구체적인 설명이 적혀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이 놓인 위치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놋쇠 바다가 어디에 놓여 있었는지 우리는 알 방법이 없습니다. 다만 감성적으로 성전 정문 앞에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기에, 대부분의 성전 그림에서는 성전 정문에서 남쪽에 위치한 것으로 표시합니다.

위 그림에서 빠진 부분도 있습니다. 바로 ‘제단’의 위치입니다. 제단은 조금 애매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열왕기상 8장 64절」을 보면, ‘솔로몬’이 ‘성전 앞뜰 가운데’에서 제사를 지내고 그 장소를 거룩하게 구별하였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에 따라 생각한다면, 제단은 성전 정문 앞에 있었습니다. 이는 아래에서 살펴보겠지만, 남왕국 ‘아하스’가 제단의 위치를 바꿨다는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제단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솔로몬 성전 상상도 ⓒESV Bible

위의 그림은 ESV(English Standard Version) 성경에 삽입된 성전 조감도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을 한눈에 이해하기 쉽게 그려놓긴 했지만, 제단이 성전 정문 앞 가운데에 위치해 있지 않고, 오른쪽 위쪽의 평면도를 보면, 위아래로 다락 출입구가 그려진 모습을 보았을 때, 「열왕기상 6장」에 맞지 않는 조감도입니다.

솔로몬 이후 성전의 모습

‘솔로몬’ 이후 성전에 물리적 영향을 끼친 왕은 몇 명 등장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남왕국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남왕국 왕들입니다. 「열왕기상」에는 성전에 있는 보물을 이웃 국가에 바친 왕들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는 성전 건물의 형상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에 제외하도록 하겠습니다.

‘솔로몬’ 이후 성전과 가장 깊은 연결고리를 가진 왕은 ‘요아스’입니다. ‘예후’의 반란으로 남북왕국 왕들이 모두 죽었던 시기, 남왕국은 북왕국 왕 ‘아합’의 딸이자, 남왕국 왕 ‘여호람’의 아내이며, 남왕국 왕 ‘아하시야’의 어머니인 ‘아달랴’가 통치하게 됩니다. 이는 ‘예후’의 혁명이 남왕국까지 미치지 못했음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열왕기하 11장 1절」을 보면 남왕국 왕권을 잡은 ‘아달랴’는 남아있는 다윗의 자손들을 멸절시키는데, ‘아달랴’의 손자이자 ‘아하시야’의 아들인 ‘요아스’는 몇몇 사람들의 손길에 의해 목숨을 구하게 됩니다. 「열왕기하 11장 3절」에 따르면 ‘요아스’는 6년 동안 예루살렘 성전에 숨어서 살아갑니다.

성전에서 자라서인지 ‘요아스’는 종교개혁을 일으킨 당시의 제사장 ‘여호야다’를 지원하였으며, 성전 보수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점에 대해 제사장들을 문책하며 성전 보수를 제대로 진행하도록 규정을 세우기도 합니다(왕하12:4-16). ‘여호야다’의 종교개혁은 ‘요아스’가 7세일 때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지원했다고 말하기에 어려움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왕하11:17-21).

‘요아스’가 진행한 것은 성전 증축은 아니었습니다. 성전의 파손된 곳을 보수하는 일이었습니다(왕하12:5). 따라서 ‘요아스’ 시절에 성전의 형태가 크게 바뀌지는 않았으리라고 봅니다.

‘요아스’ 이야기에서 한 가지 주목해서 살펴볼 부분은 「열왕기하 11장 11절」입니다. 제사장 ‘여호야다’는 ‘아달랴’에게 반역을 일으킬 때, 호위병을 ‘성전 오른쪽에서부터 왼쪽까지, 제단과 성전 곁에 세웠다’고 말합니다. 오른쪽은 앞서 살펴봤던 ‘예마니’이고 왼쪽은 ‘쉐마알리(שׂמאלי)’입니다. 앞서와 마찬가지로 북쪽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어 성경도 번역된 개역개정 성경과 비슷하게 해석할 수 있기는 합니다만, 학자들은 ‘북쪽과 남쪽에’로 번역하곤 합니다. 북쪽에서부터 남쪽까지 호위병을 둔 것이 아니라 북쪽과 남쪽에 호위병을 둔 것입니다. 왜 북쪽과 남쪽에만 호위병을 두었을까요? 성전 문이 북쪽과 남쪽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전 동쪽에도 문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문은 사람이 드나드는 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들어오시고 나가시는 문이기 때문에 성전 건축 이후로 열리지 않는 문입니다(겔11:1-25 참고). ‘여호야다’는 어린 ‘요아스’를 보호하기 위해 성전 북문과 남문에 호위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열왕기하」를 열심히 읽으신 분들이라면 여기에서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실 수 있습니다. ‘성전 문은 어디에 있었을까?’라는 점입니다.

 

                                      성전 일러스트 ⓒ 『A History of All Nations from The Earliest Times』

위의 그림은 하버드 대학에서 1905년에 출간된 『A History of All Nations from The Earliest Times』에 실린 일러스트입니다. 이 그림을 보면 성전에 외벽이 있고, 그 밖을 둘러싼 외벽이 또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는 성전 바로 바깥에 있는 벽 안쪽을 ‘성전뜰’, 그 바깥 외벽 안쪽은 ‘바깥뜰’이라고 써놓았지만, 「열왕기」에서 ‘안뜰’은 성전 건물 바로 옆을 둘러싼, 땅보다 한층 높은 곳이고, 나머지 부분이 ‘바깥뜰’입니다.

위의 첫 번째 그림에 있는 솔로몬 성전 그림을 자세히 보시면 계단이 두 개 있는데, 한 계단을 올라오면 ‘바깥뜰’이고 두 계단 올라오면 ‘안뜰’입니다. ‘안뜰’과 ‘바깥뜰’의 구분은 「열왕기」 뿐만 아니라 「에스겔 8-11장」에도 똑같이 나타납니다.

위의 그림을 보았을 때, 성전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외벽이 있고 그 벽에 문이 있습니다. 남왕국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던 주전 586년 이 문은 분명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열왕기」에서 이 문을 만들었다고 기록된 사람은 ‘요담’입니다. ‘요담’은 ‘요아스’의 증손자입니다. 「열왕기하」에 나타난 시간차만 봐도 100년이 넘습니다.

「열왕기하 15장 35절」을 보면 ‘요담’이 성전의 윗문을 건축했다고 나타납니다. 이때 ‘윗문’은 우리가 잘 아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사아르 베이트 아도나이 하엘리온(שׁער בית־יהוה העליון)’ 교회에서 ‘높이 계신 하나님’을 말할 때 쓰는 단어 ‘엘리욘’이 등장합니다. ‘엘리욘’은 ‘높다’는 뜻도 있지만, ‘위쪽’이라는 뜻도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윗문’이라고 번역됩니다. 이 ‘윗문’은 ‘북쪽에 있는 문’을 의미합니다.

또 ‘사아르(שׁער)’는 지붕이 없는 벽에 붙은 문을 의미합니다. 우리나라식으로 말하자면 ‘대문’을 뜻합니다. 지붕이 있는 건물에 붙어 있는 문은 보통 ‘페타흐(פתח)’를 사용합니다. 가끔 이 단어가 혼동되어 사용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렇게 사용됩니다.

‘요담’이 건축했다고 말하는 이 문은 바벨론 포로기가 시작될 즈음에 분명 존재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레미야 20장 2절」에도 거의 똑같은 표현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제사장 ‘바스훌’에 의해 성전에 있는 베냐민 문 위층에 묶이게 됩니다. 이때 베냐민 문이 히브리어로 ‘사아르 빈야민 하엘리온(שׁער בנימן העליון)’입니다(겔9:2에도 같은 표현이 나타납니다).

이런 기록들 속에서 우리는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요담’이 벽을 만들고 문을 만든 것인지, 벽은 있었는데 ‘요담’ 때에야 문이 생긴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또는 북문이 이미 있었는데 ‘요담’이 새로운 문을 만들었는지, 증축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만약 동문은 닫힌 상태로 있었다면 서쪽은 절벽이기 때문에 문을 만들 수가 없고, 북쪽과 남쪽에 문을 만들어야 하는데, 남쪽은 왕궁으로 통하는 문입니다. 따라서 일반 백성이 성전 바깥뜰에 들어갈 수 있는 분은 북문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북문은 ‘요담’ 때에야 만들었다는 「열왕기」의 기록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와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은 「열왕기하 16장 18절」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성전에 건축한 낭실’과 ‘왕이 밖에서 들어가는 낭실’로 번역되어 있는데, ‘낭실’ 자체가 요즘에는 사용하지 않는 표현입니다. ‘낭실’이라는 말은 지금으로 보자면 현관문을 지나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통로 정도로 말할 수 있습니다. 출입구가 되는 통로가 ‘낭실’입니다.

전자의 ‘낭실’은 여러 가지 논쟁이 있습니다만, 통로보다는 가구의 일종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후자의 ‘낭실’은 왕궁과 성전을 연결하는 통로로 해석되는데, 위의 그림에서 본다면 성전 남쪽에 문이 있었고, 이 문은 왕궁에 있는 사람들만 사용할 수 있는 통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하스’는 아시리아 왕 ‘디글랏빌레셀 Ⅲ세’의 눈치를 보며 왕궁에서 성전으로 통하는 통로를 봉해버렸다고 「열왕기」는 기록합니다. 만약 성전 북문이 ‘요담’ 때에 만들어졌다면 이전에는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문은 왕궁을 통한 문인 남문과 하나님만이 들어가실 수 있는 동문밖에 없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예루살렘 성전은 모호하게 생겼고, 접근성도 좋지 않습니다. 심지어 목사인 제가 봤을 때, 성전에서 활동하는 제사장에게도 상당히 불친절한 구조입니다.

성전과 관련된 열왕기 평가

「열왕기」에는 ‘요아스’ 뿐만 아니라 ‘히스기야’와 ‘요시야’가 성전을 보수했다고 말합니다. 이 세 사람은 열왕기 역사가에 의해 ‘좋은 왕’으로 평가받은 사람들입니다. 성전 북문을 건축한 ‘요담’도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 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왕하15:34).

반면에 성전 리모델링을 시도했던 ‘아하스’와 성전에 각종 신상을 들여놓았던 ‘므낫세’는 똑같이 최악의 왕으로 선정됩니다. 두 사람 다 ‘이스라엘 왕의 행위를 따라 악을 행하며 자녀를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했다’라는 설명 문구가 붙어 있습니다(왕하16:3-4; 21:3-6).

앵커바이블 주석(Anchor Bible Commentary)에서 『열왕기하』를 적은 ‘코간(Mordechai Cogan)’은 ‘아하스’의 우상숭배는 당시 주변국에 퍼진 종교 현상을 받아들였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열왕기하 16장 10-11절」에 나타난 ‘아하스’가 다메섹에 있는 제단의 구조와 양식을 예루살렘에 보내서 똑같이 만들게 했던 행위가 아시리아의 속국임을 보이기 위한 종속적 행위가 아니라 당시 주변국에 널리 퍼져있던 종교 방식을 받아드리려고 했던 문화 유입의 일종이라는 의미입니다.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 문화 유입일 수도 있지만, 열왕기 역사가는 이를 죄악이라고 말합니다.

‘아하스’의 영향으로 인해 변화된 성전의 모습도 있습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Logos Bible과 ESV Bible이 제안한 성전 모형에서 ‘제단’은 모두 성전 정문에서 약간 북쪽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이는 ‘아하스’가 아시리아에서 보고 온 새로운 제단을 성전 정문 앞에 두고 예전의 제단을 그보다 북쪽으로 옮겼기 때문입니다. ‘아하스’의 제단은 ‘요시야’가 부숴버렸기 때문에 모형도에서 사려졌고(왕하23:12 참고), 본래 있었던 제단을 다시 옮겨놨다는 말이 없기 때문에 성전 정문 앞이 아닌 약간 북쪽에 제단이 놓인 것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성전은 ‘요시야’ 이후 완성형에 가까운 성전입니다. 이 성전의 모형은 「에스겔 8-11장」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열왕기」에 따르면 이런 성전의 모습은 ‘요아스’ 이후로 보수되고 증축된 결과물입니다.

그런데 역으로 생각해보면 ‘요아스’ 이전까지의 성전은 너무나 불완전합니다. ‘솔로몬’이 7년이나 들여서 건축하였다는 그 성전은 모든 면에서 불완전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조심스러운 추측을 하게 됩니다. ‘성전 보수’나 ‘성전 증축’이 실제 역사에 기록된 사건이 아닐 수 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는 이미 완성되었지만, 「열왕기」의 내용이 성전이 점차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성전에 관한 내용은 열왕기 역사가의 저작이 아니라 후대 제사장 집단의 첨가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저는 조금 다르게 봅니다. 제사장 집단의 첨가라기보다 역사가 집단이 왕에 대해 평가할 때, 자신들이 좋은 왕이라고 평가하는 왕은 성전 완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기록하였고, 나쁜 왕이라고 평가하는 왕은 완성된 성전의 모습을 망가뜨렸다고 기록하였다고 봅니다. 왕에 대한 평가와 성전에 관한 기록은 거의 일치되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와 정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 그 왕들이 성전을 보수하고 증축했기 때문에 그 왕들은 좋은 왕이라고 평가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말하기에 예루살렘 성전은 왜 존재했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불완전한 상태로 보이기 때문에 저는 정반대의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개인적으로 예루살렘 성전 모형은 성경공부 때에 사용하려고 준비하다가 1년 가까이 준비만 하게 된 내용입니다. 성전의 마지막 형태만을 전해드리는 일은 쉽지만, 성전이 왜 이렇게 만들어져 왔는지, 누가 이렇게 했는지, 실제로 이런 건축들이 이루어졌는지를 따져보면 어려운 점이 참 많습니다.

어쩌면 너무 쉽게 지나쳐 버릴 수 있는 건축물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그 이야기 하나하나에도 역사가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솔로몬’이 건축했다는 성전 다락은 왜 문이 한쪽에만 있었는지, 이 문을 왜 중층(2층)에 만들었다고 기록했는지, 여기에 어떤 신앙적 의미가 담겨있는지 더 연구해보려고 합니다만 이 글은 여기에서 마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형태에 관해서는 이후 필요한 부분이 있을 때, 잠깐씩만 더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나중에 ‘솔로몬’에 대해 다룰 때에도 이번 글과 같이 구체적인 성전 이야기는 다루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에는 남왕국의 ‘요담’, ‘아하스’, 북왕국의 ‘베가’ 시대의 역사적 배경과 이 세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joey8100@naver.com

 

 

출처 : http://m.ecumen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52 

 

 

 

<예루살렘 성전의 위치는 다윗의 도시(Ir David, City of David)에 있었다.>

 

** 이 글은 유튜브에서 Robert Cornuke라는 성경 탐험가의 주장을 담은 30분 길이의 다큐 영상(https://youtu.be/zKqDx3RDCos)과 어네스트 L.마틴 박사의 웹사이트 "Associates for Scriptural Knowledge (http://www.askelm.com/temple/) 보고 요약 정리한 글임을 밝힙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은 물론이고, 믿지 않는 사람들도 성경에 나온 역사적 사건, 인물, 유적에 대한 관심은 상당히 높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 바벨탑, 바빌론 느부갓네살 시대의 공중 정원, 십계명 석판이 담긴 성궤, 출애굽 관련 유적, 등 숱하게 많습니다. 그 중에서 솔로몬이 건축한 최초의 성전에 관한 관심도 매우 뜨겁습니다. 성경적 종말론 관점에서 보면 마지막 때에 성전이 예루살렘에 존재하고, 그 성전에 적그리스도가 들어가 본색을 드러낸다는 예언이 있기 때문에 대환난기 들어가기 전에 성전이 다시 건축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필수조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재 예루살렘에는 황금색 지붕의 바위 사원과 알 아크사 모스크가 있는 성전 산에 성전의 흔적은 전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 했던 모리아산이 성전 산인데, 솔로몬이 지은 첫번째 성전은 바빌론에 패망할 때(BC 588년) 완전히 파괴되었고, 스룹바벨이 지은 두번째 성전은 AD 70년 로마의 타이투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어서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역사를 아는 사람들은 세번째 성전이 지어진다면 말세가 한걸음 더 가까워지는 사건임을 알기 때문에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현재 이스라엘에는 성전 건축을 위한 재단이 오래 전부터 성전에 사용될 기물들을 다 제작했고, 유대인들은 성전산에 있는 모스크 자리에 다시 하나님의 성전을 짓겠다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역사가나 정치가들은 만일 그런 일이 생긴다면 큰 분쟁이 생길 것이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슬람 세력이 가만 있을 리 없기 때문이죠. 2018년 5월 14일은 이스라엘 건국 70주년 기념일인데 이 날 예루살렘으로 미국 대사관이 옮기자 마자 팔레스타인 시위대가 과격 시위를 하고 그 과정에서 60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하니, 이슬람 모스크를 없애고 성전을 짓겠다고 하는 건 전쟁이 날 것이라는 예상을 불러오기 충분합니다.

 

그렇다면 진짜 성전의 위치가 성전산 모스크가 있는 자리였을까요?

성경과 역사적 근거를 믿는다면, 성전산 모스크 자리가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근거들을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24:1-2) 예수님께서 성전을 떠나서 가실 때에 그분의 제자들이 성전의 건물들을 보여 드리려고 그분께 나아 오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아니하느냐?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서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지 아니하고 다 무너지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이 성전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 예언하고 있습니다. 현재 유대인들이 기도문을 남기며 애곡하는 ‘통곡의 벽’은 성전산의 서쪽 벽입니다. 성전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성경 말씀과 맞지 않습니다. 또한 3세기 역사가였던 유세비우스의 기록에는 "The hill called Zion and Jerusalem, the building there, that is to say, the temple, been utterly removed or shaken."(그 언덕은 시온과 예루살렘이라 불리며, 거기 있던 건물, 소위 성전은 완전히 제거되었거나 사라졌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1세기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을 보면, "It was so thoroughly laid even with the ground by those that dug it up to the foundation, that there was left nothing to make those that came thither believe it had ever been inhabited."(그것은 완전히 땅만 남을 정도로 사라져서 그 기초까지 파더라도 아무것도 남지 않았고, 아무도 살지 않았던 곳이라 믿게 될 정도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로마군에 대항한 유대인들이 마지막 항전을 위해 마사다에서 옥쇄를 했는데 당시 유대인들의 지휘관이었던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의 기록에도 "It (Jerusalem) is now demolished to the very foundations, and hath nothing left but that monument of it preserved, I mean the camp of those (Romans) that hath destroyed it, which still dwells upon its ruins."(예루살렘은 이제 그 기초까지 파괴되었고 흔적만 남고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파괴한 자들(로마군)의 주둔지가 그 폐허 위에 거하고 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 지도에서 1번이 황금 지붕의 바위 사원, 2번이 알 아크사 모스크, 3번이 서쪽벽인 ‘통곡의 벽’, 4번은 성묘교회, 6번이 기혼 샘, 7번이 다윗의 도시 또는 시온이라고 불리는 지역이고 여기에 성전이 있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도시는 사무엘하 5장에 유래가 나와 있는데 “(삼하 5:7)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시온의 요새를 빼앗았는데 그것이 곧 다윗의 도시니라. (삼하 5:9) 이처럼 다윗이 그 요새에 거하면서 그것을 다윗의 도시라 하고 밀로(Millo)에서부터 또 안쪽으로 사방을 둘러 쌓으니라.”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다윗 왕이 헤브론에서 7년 동안 통치를 하다가 여부스 족속이 차지하고 있던 예루살렘을 빼앗은 사건이 기록된 것입니다. 이 때 다윗이 그곳을 다윗의 도시라고 불렀고, 성경에는 시온이라고 자주 표현됩니다. 즉, 예루살렘을 지칭할 때 시온이라고도 하지만 구체적으로 따지면 예루살렘 도시 중에서 다윗이 최초로 차지한 곳을 시온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도시는 성전산과 약 250미터 떨어진 남쪽 기슭 지역을 말하는데, 그림과 같습니다. 성전산보다 약간 낮은 지역입니다. 이 다윗의 도시에 성전이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들도 성경에 나옵니다.

 

“(사무엘하 24:18) 그 날에 갓이 다윗에게 와서 그에게 이르되, 올라가 여부스 족속 아라우나(Ornan)의 타작마당에서 주께 제단을 쌓으소서, 하매”

“(역대하 3:1) 그때에 솔로몬이 예루살렘의 모리아 산에 주의 집을 건축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곳은 전에 주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족속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예비한 곳이더라.”

(역대상 21:18) 그때에 주의 천사가 갓에게 명령하여 다윗에게 이르기를 다윗은 올라가 여부스 족속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주께 제단을 쌓으라고 하시므로

(역대상 21:19) 갓의 말 곧 그가 주의 이름으로 말한 말대로 다윗이 올라가니라.

(역대상 21:26) 다윗이 거기서 주께 제단을 쌓고 번제 헌물과 화평 헌물을 드리며 주를 부르니 그분께서 하늘로부터 번제 헌물 제단 위에 불을 내려 그에게 응답하시고

(역대상 22:1) 그때에 다윗이 이르되, 이것은 주 하나님의 집이요, 이것은 이스라엘을 위한 번제 헌물 제단이라, 하였더라.

다윗이 어느 정도 세력이 커진 후 백성 숫자를 계수한 사건으로 하나님이 크게 노하여 징계를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 후 하나님께서 갓 대언자를 통해서 다윗에게 여부스 족속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제단을 쌓고 번제를 드리라고 하셨고, 불로 응답을 하셨다는 기록입니다. 즉, 이 곳이 나중에 성전이 지어지게 되는 성전 터이고 다윗의 잘못을 징계하는 과정에서 성전 터 구매가 이루어지는 오묘한 사건이기도 합니다.

 

또 다른 근거는 성전에는 물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기혼 샘(Gihon spring)은 물이 귀한 예루살렘에서 보기 드물게 지금까지도 맑은 샘물이 솟아나는 곳인데, 기혼 샘 근처에 성전이 있었다는 근거로 들 수 있는 성경 구절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시편 87:5) 또 사람들이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과 저 사람이 그녀 안에서 태어났으며 가장 높으신 이께서 친히 그녀를 굳게 세우시리라, 하리로다.

(시편 87:6) 주께서 백성들을 기록하실 때에 이 사람이 거기서 태어난 것으로 여기시리로다. 셀라.

(시편 87:7) 노래하는 자들과 악기를 연주하는 자들이 거기 있으리니 나의 모든 샘들이 네 안에 있도다.

(요엘 3:17) 그러므로 내가 나의 거룩한 산 시온에 거하는 주 너희 하나님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그때에는 예루살렘이 거룩할 것이요, 다시는 타국인이 그리로 지나다니지 못하리로다.

(요엘 3:18) 그 날에는 산들이 새 포도즙을 떨어뜨리고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리며 유다의 모든 강에 물이 흐르고 주의 집에서 샘이 나와 시팀 골짜기에 물을 대리로다.

(에스겔 47:1) 그 뒤에 그가 다시 나를 데리고 그 집의 문에 이르렀는데, 보라, 그 집의 문지방 밑에서부터 물들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더라. 이는 그 집의 앞면이 동쪽을 향해 서 있었기 때문이더라. 그 물들이 그 집의 오른쪽 곧 제단의 남쪽 편에서부터 내려오더라.

(에스겔 47:2) 그때에 그가 나를 북쪽을 향한 문의 길에서 데려다가 바깥 길로 인도하여 동쪽을 바라보는 길 옆의 바깥문에 이르렀는데, 보라, 거기서 오른쪽에서 물들이 흘러나오더라.

(열왕기상 1:38) 이에 제사장 사독과 대언자 나단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그렛 족속과 블렛 족속이 내려가서 솔로몬을 다윗 왕의 노새에 태우고 그를 기혼으로 데리고 가서”

 

이렇게 많은 구절들이 성전 근처에 샘이 있었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그럼 왜 성전에 물이 필요할까요? 제사장들이 몸을 깨끗이 씻고 번제를 드려야 했고, 동물을 죽여서 피를 흘리게 하는 구약시대 제사의 모습을 상상할 때 그 피를 씻어낼 물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샘이 멀리 있다면 매우 힘든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상 8:63을 보면 “솔로몬이 화평 헌물의 희생물을 드렸는데 그가 주께 드린 것은 소가 이만 이천 마리요, 양이 십이만 마리더라. 이와 같이 왕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집을 봉헌하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엄청난 동물의 숫자를 상상해 봅시다. 그 피의 양도 엄청날 것이며, 이걸 다 씻어내려면 상당한 양의 흐르는 물이 없다면 불가능한 상황일 겁니다. 성경 기록만이 아니라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의 기록에서도 “성전에는 마르지 않는 샘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930년대 다윗의 도시 모습. 밭을 갈아 놓은 모습만 있고 아무런 흔적도 없음을 보여주고 있음)

또 다른 근거는 시온이라는 명칭입니다. 성경에서는 시온을 다윗의 도시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미가 3:12) 그런 즉 너희로 인하여 시온은 밭같이 쟁기로 갈리고 예루살렘은 돌무더기같이 되며 그 집의 산은 숲의 높은 곳과 같이 되리라. (열왕기상 8:1) 그때에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지파들의 모든 우두머리들 곧 이스라엘 자손의 아버지들의 우두머리들을 예루살렘에 있던 솔로몬 왕에게로 모으니 이것은 그들이 주의 언약 궤를 다윗의 도시 곧 시온에서 가져오게 하려 함이더라.” 이처럼 시온은 예루살렘을 두루 칭하는 용례로 쓰일 때도 있으나 대부분은 다윗의 도시를 한정해서 지칭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그림은 어네스트 마틴 박사(Dr. Ernest L. Marin)가 성경과 역사의 기록을 그대로 믿으면 지금의 바위 사원이 있는 곳은 성전 터가 아니다라는 주장을 하면서 재구성한 상상도입니다. 지금의 바위 사원이 있는 곳은 로마군의 주둔지가 있었고, 군단이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병력만 6천명에 보조 인원까지 합하면 대략 만 명 가량이 생활을 해야 하는 공간이어야 했습니다. 바위 사원 자리 면적이 약 4만 5천평 정도 된다고 하니 그 정도 인원이 생활할 수 있었을 겁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이런 정황을 뒷받침하는 기록이 있습니

다. “(사도행전 21:32) 그가 곧 군사들과 백부장들을 데리고 그들에게로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총대장과 군사들을 보고 바울을 때리는 것을 그치니라. (사도행전 21:40) 총대장이 그에게 허락하거늘 바울이 계단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아주 조용하게 하고 그들에게 히브리말로 말하여 이르니라.” 이 내용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설교하던 중에 군중들에게 뭇매를 맞는 일이 생기자, 주둔군이었던 로마군 지휘관이 백부장들과 병사들을 데려가서 성전으로 “달려 내려갔다(ran down)”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그림에서처럼 주둔하던 곳은 성전산 위였으니 높은 곳이었고 성전은 그보다 약간 낮은 다윗의 도시에 있었기에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달려갔다는 정황을 나타내고 있는 겁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서도 "Now as to the tower of Antonia, it was situated at the corner of two cloisters (colonnades) of the court of the temple; of that on the west, and that on the north."(안토니아 탑을 향한 방향에서 성전은 두 개의 다리의 구석에 위치해 있었고, 하나는 서쪽에 하나는 북쪽에 있었다)라고 되어 있어서 위의 상상도처럼 생겼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습니다.

만일 현재 다수의 사람들이 주장하는 대로 모리아산 위 바위 사원 자리가 성전 터라면, 로마군단이 주둔하던 캠프 위치가 있어야 하는데 그럴 자리가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림에서처럼 성전산 북쪽 지역은 그럴 면적이나 여건이 전혀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주둔지로서 사용하려면 모리아산 위 바위 사원이 있는 그 자리가 안토니아 요새 자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요약>

누가복음 8장 17절에 “은밀한 것 중에서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어 둔 것 중에서 알려지지 아니하고 널리 퍼지지 아니할 것이 없느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마지막 때에 가까워지면서 과거에 전혀 생각하지 못 했던 일들이 드러나고 밝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이전 그 어느 행정부보다 가장 강력한 친 이스라엘 정책을 표방하고 있고, 예루살렘 수도 인정과 미대사관 이전으로 행동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트럼프의 사위 쿠슈너는 유대인이고 쿠슈너의 아내 이방카는 유대교로 개종까지 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정책은 계속될 것으로 예상이 되고, 성전을 짓는 일도 돕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 멀지 않은 미래에 제3성전이 다윗의 도시에 다시 서게 되는 모습을 CNN 생중계로 보게 될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만일 마틴 박사와 로버트 코누크 같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대로 성전터가 바위 사원 자리가 아닌 다윗의 도시가 맞다면, 이슬람 세력과의 정면 충돌을 피하고도 성전을 지을 수 있으므로 정치적, 종교적 영향이 막대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혹시 그 날이 트럼프 임기 내에 벌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고 하셨으니 두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출처] 솔로몬 성전 위치는 다윗의 도시 (City of David)에 있다.|작성자 슈렉

 

출처 : https://dongtanms.kr/39343

 

 

그는 이 시리즈에 그의 사상과 신학, 신앙과 정신, 그리고 그의 열정을 다 쏟아 넣은 것입니다.

역작(力作)이라는 말은 이런 경우에 쓰는 말이 아닌가

손석태 박사 _ 前 개신대학원대학교 총장, 한국 복음주의 구약학회 회장, 기독대학인회(ESF)이사장, 現 아시아신학협회(ATA) 이사

박 목사님은 “족보”라는 길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찾은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정상에 이르는 새로운 길(route)을 개척한 것입니다. 나는 박 목사님이 찾은 이 길이야말로 우리 성도들이 그리스도께 이르는 정확한 지름길 중의 하나라고 믿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그리스도를 알기 원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 책을 꼭 한 번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3천년만에 밝혀진 솔로몬 성전 건축 기간 정리


열왕기상 6:37-38 제 사년 시브월에 여호와의 전 기초를 쌓았고 제 십일년 불월 곧 팔월에 그 설계와 식양대로 전이 다 필역되었으니 솔로몬이 이 전을 건축한 동안이 칠년이었더라
열왕기상 7:1 솔로몬이 자기의 궁을 십삼년 동안 건축하여 그 전부를 준공하니라
열왕기상 9:10 솔로몬이 두 집 곧 여호와의 전과 왕궁을 이십년 만에 건축하기를 마치고
(참고 - 대하 3:1-2, 8:1)

솔로몬은 그의 아버지 다윗이 준비만 하고 이루지 못한 성전 건축을 완성한 인물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기간에 대하여는 제 4년 시브월(종교력 2월)에 기초를 쌓기 시작하여 제 11년 불월(종교력 8월)에 완공되었다는 열왕기상 6:37-38 말씀을 근거로 7년 6개월이 걸렸다는 해석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정작 솔로몬의 성전 건축 기간의 근거가 되는 위의 세 구절을 통해 볼 때, 성전 건축 기간을 '7년 6개월'이나 '8년'으로 기록하지 않고 '7년'이라고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열왕기상 6:37-38에 등장하는 '시브월', '불월'은 성경의 달력에서 각각 제 2월과 제 8월을 가리키는 고유한 이름입니다.
솔로몬 성전 건축 기간을 보다 정확히 계산하기 위해서는 위와 같은 성경의 달력에 대한 이해와 함께 '제 4년', '제 11년'이라고 언급되어 있는 솔로몬의 통치 연대 계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당시 민간인들이 쓰던 달력은 니산월(종교력 1월)부터 그 다음해 니산월까지를 1년으로 계산하는 반면, 남 유다의 경우 왕의 통치 연대를 계산할 때는 니산월부터 니산월까지가 아닌 티쉬리월(종교력 7월)부터 그 다음해 티쉬리월까지를 왕의 통치 한 해로 계산하였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왕의 통치 기간은 종교력으로 1월이 아닌 7월에 시작된 것입니다.
남 유다의 경우 왕의 통치 연대 계산시에는 티쉬리월을 사용했다는 것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요시야 왕의 종교 개혁 기간

남 유다의 제 16대 왕이었던 요시야왕은 제 18년에 성전 수리를 비롯한 대대적인 종교 개혁을 시작하였는데(왕하 22:3), 그것을 모두 마친 후 요시야 18년 니산월에 유월절(1월 14일) 행사를 거행하였습니다.(왕하 23:23, 대하 35:1-19).

열왕기하 22:3 "요시야왕 십 팔년에 왕이 므술람의 손자 아실리야의 아들 서기관 사반을 여호와의 전에 보내며 가로되"
열왕기하 23:23 "요시야왕 십 팔년에 예루살렘에서 여호와 앞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
역대하 35:1 "요시야가 예루살렘 여호와 앞에서 유월절을 지켜 정월 십 사일에 유월절 어린 양을 잡으니라"

성전 수리(왕하 22:3-6, 대하 34:8), 율법책의 발견(왕하 22:8-13, 대하 34:14-21), 언약 준수의 다짐(왕하 23:1-3, 역대하 34:29-32), 대대적인 우상 제거(열왕기하 23:4-20) 등 많은 일들이 요시야 제 18년 한 해에 그것도 니산월(종교력 1월) 14일 전에 행해진 것을 볼 때 남 유다는 확실히 티쉬리월(종교력 7월)을 왕의 통치 연대 계산의 기준점으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시야 왕은 예루살렘에서의 개혁을 시작으로(왕하 23:4-7), 유다 전역에 개혁을 단행하였으며(왕하 23:8-14), 심지어 북방 이스라엘의 지역까지 개혁을 실행하였는데(왕하 23:15-20) 왕의 통치 연대 계산시 니산월을 기준으로 했다면, 요시야 제 18년이 시작되는 니산월에 종교개혁을 시작해 14일만에 모든 개혁을 마치고 유월절을 지켰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2. 느헤미야서에 나타난 사건의 순서

바벨론 왕 아닥사스다의 술 맡은 관원이었던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성의 훼파 소식을 들은 후,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합니다(느헤미야1:1-11). 이후 아닥사스다 왕에게 술을 드리던 느헤미야는 그의 얼굴에 나타난 수색을 발견한 아닥사스다 왕에게 예루살렘 성의 훼파 소식을 전하며 자신을 예루살렘으로 보내 그 성을 중건케 할 것을 요청합니다(느헤미야 2:1-5). 이러한 사건의 흐름을 볼 때, 재고의 여지없이 느헤미야 1장에 나타난 예루살렘 훼파 소식을 들은 것이 먼저이고, 왕에게 술을 드리는 것이 나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 1장과 2장에 기록된 각 사건이 일어난 시점은 1장이 아닥사스다 왕 제 20년 기슬르월(종교력 9월), 2장이 아닥사스다 왕 20년 니산월(종교력 1월)로 기록된 시점으로만 볼 때는 2장의 사건이 1장의 사건보다 먼저 일어난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느헤미야 1:1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 왕 제 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궁에 있더니"
느헤미야 2:1 "아닥사스다 왕 이십년 니산월에 왕의 앞에 술이 있기로 내가 들어 왕에게 드렸는데 이전에는 내가 왕의 앞에서 수색이 없었더니"

따라서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 제 20년 기슬르월(느 1:1)에서 4개월이 지난 니산월을 아닥사스다 왕 21년이 아닌 20년 (느 2:1)이라고 표현한 것은 왕의 통치 연대를 티쉬리월부터 그 다음해 티쉬리월까지로 계산하는 유대식 방법에 따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다른 나라의 왕이지만 왕의 통치 연대를 유대식으로 바꾸어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적 근거들을 토대로 솔로몬 성전 건축 기간을 계산할 때, 왕의 통치 연대를 니산월(종교력 1월)을 첫 달로 기준하면 8년(7년 6개월 정도)이지만, 티쉬리월(종교력 7월)을 첫 달로 기준하면 7년(6년 6개월 정도)이 나옵니다. 이것을 자세히 계산해 보면, 솔로몬 제 11년에 속한 불월(종교력 8월)은 티쉬리월을 기준으로 할 때나 니산월을 기준으로 할 때나 똑같은 시점에서 끝납니다. 그러나 솔로몬 제 4년에 속한 시브월(종교력 2월)은, 왕의 통치 연대를 티쉬리월을 기준으로 할 대와 니산월을 기준으로 할 때, 1년의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열왕기상 6:38에 성전 건축 기간을 '8년'이라고 표기하지 않고 '7년' 이라고 기록한 것은, 남 유다가 솔로몬 때부터 이미 티쉬리월을 사용하였음을 보여 줍니다.

왕의 통치 연대 : (니산월 기준) : 7년 6개월(햇수로 8년)
                         (티쉬리월 기준) : 6년 6개월(햇수로 7년)

성전 건축을 마친 솔로몬 제 11년 불월(종교력 8월)은 티쉬리월이나 니산월, 어떤 것을 기준으로 하든 똑같은 시점입니다. 그러나 성전 건축을 시작한 솔로몬 제 4년 시브월(종교력 2월)은 티쉬리월과 니산월 기준에서 1년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남 유다는 티쉬리월을 왕의 통치 연대 기준으로 사용하였으므로, 솔로몬 성전 건축 기간의 정확한 표현은 6년 6개월(햇수로 7년)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왕상 6:38에서도 성전 건축기간을 ‘8년’이 아닌 ‘7년’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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