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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바울서신 녹취 2

by 【고동엽】 2022. 5. 14.

바울서신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바울서신의 앞부분을 보시게 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건, 즉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는지 이걸 말하고 있는 게 바로 바울서신의 앞부분이고요, 뒷부분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거예요. 자 하나님 백성 된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그 순간까지 이 땅 가운데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걸 기록하고 있는 게 바로 후반부입니다. 그러니까 좀 단순하게 보자면 앞부분은요 약간 교리적인 내용이 있는 거죠. 어떻게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는가, 우리를 당신의 백성 삼아주셨는가, 이걸 말하고 있는 것이 바울서신의 앞부분이고, 뒷부분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가 이 땅 가운데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우리의 삶과 관련된 윤리 도적적인 내용이 후반부에 나옵니다.

 

바울서신을 기록했던 이 바울이라고 하는 인물에 대해서 우리가 짧게 살펴보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도행전 13장 9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바울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에요. 유대인은 유대인이지만 가나안 땅에 살고 있지 않은 교포 유대인입니다. 이런 사람을 ‘디아스포라 유대인’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태어날 때부터 유대식 이름도 가지고 있었고요, 그 다음에 바울이 태어났던 곳이 바로 길리기아 다소라고 하는 이방지역입니다. 이 길리기아 다소는요,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는 땅이죠. 그래서 바울은 태어날 때부터 그리스-로마식 이름도 있었습니다. 유대식으로는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요, 그리스-로마식으로는 바울이라고 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도행전 13장 9절을 보게 되면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 이런 표현이 나오거든요. 우리 한국교인들 가운데에 ‘원래 사도 바울의 이름은 사울이었는데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다음에 바울로 이름이 개명되었다.’ 마치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고 사래가 사라가 된 것처럼 원래는 사울이었는데 나중에 이름이 바울이 되었다’ 라고 이해하는 분들이 많이 계신데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성경 어딜 보셔도요 ‘사울이 바울 되었다’라고 하는 표현은 나오지 않습니다.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 이런 표현이 사도행전 13장 9절에 나오거든요. 그런데 여러분 그걸 가지고요, ‘원래 사울이었는데 바울이 되었다’라고 이야기 한다면 사도행전 12장 12절에는 ‘마가라 하는 요한’이런 표현이 나와요. 초대교인들이 모여 있었던 마가의 다락방이 있잖아요? 그 마가라는 요한도 바로 디아스포라 유대인입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태어났을 때부터 유대식 이름 하나, 그리고 자기가 태어났던 그 지역의 이름 하나, 그래서 2개의 이름을 태어났을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 ‘사울이 바울 된 것은 아니다’ 이걸 꼭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고요.

 

사도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태어났을 때부터 바울의 집안은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어요. 당시에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던 집안의 자녀로 태어나게 되면 태어났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로마 시민이 됩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었고요, 10대 초반에 예루살렘으로 와서 당시 바리새파 가운데 최고의 학파라고 일컬어지던 가말리엘 문하에서 정통 랍비교육을 받습니다. 그래서 이 사도바울은 어떻게 보면 엄친아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집안도 워낙 좋고, 학벌도 워낙 좋아요. 그리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정통 율법교육을 받으면서 신명기 21장 23절에 근거하여서 ‘예수가 나무에 매어 달려 죽임을 당했다’라는 말씀, 이것을 바꿔 이야기하자면 ‘예수는 하나님께 저주 받아 죽임을 당했다’라고 하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그 확신 가운데서 예수를 여전히 메시아로 추종하는 사람들을 유대교로 되돌리기 위해서 열심을 다 했던 겁니다. 자, 그러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자기가 행하고 있는 이 모든 열심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하는 열심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죠. 여러분, 사도바울의 인생을 관통하는 한 단어를 들라고 한다면 ‘열정과 헌신’ 이렇게 이야길 할 수 있어요. 여러분 바울은 죽을 때까지요 ‘열정과 헌신’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인생을 정확하게 반으로 나누는 중간에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있거든요. 이것이 바로 다메섹 도상 사건이었습니다. 다메섹 도상 이전까지의 바울의 열정과 헌신은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하는 열정과 헌신이었고, 다메섹 도상 이후의 바울의 열정과 헌신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열정과 헌신이었어요. 자,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열정과 헌신을 다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것보다 중요한 것이 뭐냐면 ‘분별’을 갖추는 겁니다. 하나님이 진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이 분별을 갖춘 열정과 헌신만이 의미를 갖습니다.

 

사도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 사건 이후에 유대교로부터는요 배신자로 낙인이 찍히죠. 사도행전 23장에 보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라고 하는 40명의 결사대가 구성될 정도로 바울은 유대교에서는 완전히 배신자가 됩니다. 자,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바울이 회심한 다음에 초대교회 안에서도 바울을 두 팔 벌려 환영하지 않았어요. 바울은 초대교인들에 의해서 ‘이 사람이 진짜 회심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에 대해서 오랜 기간 동안 검증의 시간을 갖게 됩니다. 심지어 이후에 목숨을 걸고 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했을 때에도 계속해서 사도로서의 자격을 의심받게 됩니다. 심지어 바울 자신이 개척한 교회 안에서조차도 바울은 사도로서 인정을 잘 받지를 못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바울의 과거 전력 때문입니다.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책임을 맡았었고, 그 다음에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기 위해서 열정과 헌신을 다했던 사람이 사도 바울 아닙니까? 그런데 바울이 지금 “나 회심했습니다”라고 하면서 초대교인들이 예배드리는 장소에 와서 함께 예배드리면서 ‘아~ 이 사람들이 여기에서 지금 예배를 드리고 있구나! 이런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구나!’ 라는 정보를 다 취합한 다음에 바울이 어느 날 예배드리는 교인들을 일망타진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러니까 초대교회 안에서도요 “바울이 정말 예수를 만났는가? 정말 회심했는가?” 이걸 검증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단 말이에요. 어떻게 되면 바울은 회심한 이후에 자신이 그동안 몸 담았던 유대교로부터는 배신자로 낙인이 찍히고, 그 다음 회심한 이후에 새로운 멤버가 된 초대교회 안에서도 상당한 기간 동안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두 군데로부터 다 의심과 버림을 받은 것이 바울이 처해 있던 실존적인 모습입니다. 유대교로도 버림 받고, 초대교회 안에서도 자기를 두 팔 벌려 환영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열정을 가지고 바울은 1차, 2차, 3차 전도 여행을 힘 있게 감당했던 것들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자, 그러면 왜 초대교회에서는 바울의 사도성을 인정하지 못했을까요? 사도행전에 나와 있는 것처럼 사도로 인정을 받으려면 예수 공생애에 함께 했어야 합니다. 예수 부활에 증인이어야 됩니다. 그 다음에 예수께서 보내주셨던 성령이 임했을 때에 그 성령을 받은 자들이 사도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도를 좁혀 말하게 되면 12사도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예수 공생애에 함께 하고, 부활의 증인이고, 예수께서 파송하신 성령을 받은 자가 사도인데 바울은 예수 공생애와 함께 하지 않았잖아요.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되지 못했잖아요. 성령을 파송해 주실 때에 마가 다락방에 모여 있던 120문도 가운데 들지 못했잖아요. 그러니깐 사도에 대한 엄격한 기준에 근거해 보면 바울을 사도라고 칭하는 것이 쉽지가 않은 거거든요. 그래서 여러분 나중에 보겠지만 바울은 자기가 개척했던 교회 안에서 조차도 사도로 인정을 잘 받지를 못합니다. 오랜 기간 동안 사도로서 인정받지 못해요. 그런 실존적인 괴로움 가운데 처해 있었지만 바울은 하나님이 맡겨주셨던 사명에 최선을 다했어요. 갈라디아서 1장과 2장에 보시게 되면 다메섹 회심 사건 이후 17년 만에,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같은 지도자였던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으로부터 드디어 바울은요 악수를 했다는 말이 나와요. 교제의 악수를 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사도로서 인정을 받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보통 바울의 다메섹 사건을 32년, 예루살렘 회의를 49년으로 봅니다. 이 17년의 기간 동안 사도로서 인정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셨던 그 사명에 최선을 다했던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사도 바울이라는 거죠.

 

여러분이 갈라디아서를 이해하는데 있어 정말 중요하게 이해하셔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바울은 율법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인 주장을 많이 하거든요. 자 이것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바울은 율법폐기론자 라고 하는 의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기억해야 될 것은 뭐냐면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를 보시게 되면 바울이 율법에 대한 비판을 굉장히 많이 합니다. 여전히 그 율법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책망을 많이 한단 말이에요. 우리가 그런 말씀들을 쭉 읽다 보면 ‘아 바울은 율법을 부정하는구나! 율법의 시대는 끝났다고 주장하는구나!’ 이런 이해를 갖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꼭 알아두셔야 할 것이 뭐냐면 바울이 비판했던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좁게 이해하게 되면 ‘할례’를 말하는 것이고 조금 넓게 이해하게 되면 ‘율법 가운데 제의법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비판하는 겁니다. 율법을 단순하게 우리가 구분해 보면 율법 안에는 제의법이 있고 도덕법이 있어요. 자, 제의법에는 어떤 것들이 포함됩니까? 할례, 음식법, 정결법, 절기 준수법 이런 것들이 제의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제의법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서 끝났다고 보는 것이 바로 바울의 입장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들이 제의법을 지키는 것은 인정해 주지만, 이방 기독교인들에게도 이 제의법을 지킬 것을 강요하는 것을 반대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봤던 것 처럼요, 바울은 유대인들이 유대인들의 문화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꽃 피우는 것은 인정해 줘요. 다만 유대인들의 신앙문화를 이방인들에게 강요하는 것을 바울은 반대합니다. 즉 바울의 대원칙이 뭐냐면 유대인은 유대인의 문화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꽃 피울 수 있고, 이방인은 이방인의 문화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꽃 피울 수 있다는 거예요. 유대인의 신앙문화를 이방인에게 강요하는 것을 철저하게 반대했던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자,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뭐냐면 유대인들이 행했던 율법의 제의법, 그 율법의 제의법을 이방인에게도 동일하게 요청하는 것을 바울은 반대한 거예요. 대신 바울은 뭐를 인정하냐면 율법 가운데 도덕법은 여전히 유효하다,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직하게 살아야 된다, 진실하게 살아야 된다, 거룩하게 살아야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등의 도덕법, 사람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행해야 될 도덕법은 여전히 예수 사건 이후에도 유효하다,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 될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렇게 본 것이 바로 바울의 입장입니다. 바울이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안에서 율법에 대해 비판적인 주장을 했다고 해서 ‘아~ 바울은 율법의 시대가 끝났다고 보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바울이 비판했던 것은 뭐냐하면 율법 가운데 제의법에 대한 지나친 집착, 그리고 이방 기독교인들에게 여전히 그런 율법의 제의법을 준수할 것을 강요하는 거에 대한 반대라는 거예요. 대신 바울은 뭐를 인정한 겁니까? 율법 가운데 도덕법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걸 강조한 것이 바로 바울의 주장입니다.

 

바울은 몸 안에 육체의 가시, 사단의 사자가 있었고요, 고린도후서 12장에 나와 있는 것처럼 이것을 없애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지만 그것이 자기에게 존재하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하다 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고요, 이후에 보겠지만 바울은 굉장히 엄격하게 목회를 했습니다. 왜 엄격하게 목회를 했냐면요,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그리고 이 땅의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봐요. 자, 신랑이 곧 이 땅에 오시게 될터인데 신랑을 맞이하기 위한 신부의 가장 중요한 자세가 뭐냐? 순결함을 지키는 걸로 본 거예요. 그래서 교회 공동체의 순결함, 교회의 교회됨을 훼손하는 일과 관련해서 바울은 굉장히 엄격하게 목회를 했던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와 고린도전서에서 보는 것처럼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이 부르신 그 부르심의 목적을 기억했던 사람이다. 여러분, 구약 이스라엘이 실패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가 뭡니까? 부르심의 목적을 망각했던 거 아니에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민으로 부르심 받은 것은 맞죠? 어떤 선민으로 부름 받은 겁니까? 만민을 위한 선민으로 부름받았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것을 망각하고 배타적 선민사상에 빠져버렸는데 ‘하나님이 왜 나를 구원하셨는가? 하나님이 왜 나를 당신의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사용하시는가?’ 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끝까지 물으면서 부르심의 목적에 최선을 다했던 자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우리가 이후에 바울서신을 직접 보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오늘은 바울서신과 관련된 좀 총체적인 내용들을 한 번 살펴봤고요, 다음 시간부터 이 바울 서신의 본문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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