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의 감정 조정과 표현의 문제
Q. 지난 호에서 설교자에게 절대로 필요한 파토스에 대하여 잘 읽었습니다. 설교자로서 하나님의 말씀과 말씀을 들어야 할 회중을 열렬히 사랑해야 하는 기본 마음이 설교자에게 있어져야 한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설교자의 감정이라는 것과 파토스의 차이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좀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A. 설교학에서 말하는 파토스는 단순하게 사전적 의미를 적용하는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 민족의 정서에 가장 특유한 정(情)을 생각해 보시면 이해에 보탬이 됩니다. 흔히들 말하는 사랑이란 만남의 초기에 발생하여 그 지속 시간이 짧습니다. 그러나 정(情)은 감정의 밀도가 차원을 달리하고 그 지속시간이 길게 이어집니다. 그래서 사랑은 미움으로 쉽게 바뀔 수 있어도 정은 가슴속에 오래토록 남게 되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설교에서 파토스를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이 필요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열정(熱情)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열정은 설교자 자신이 그 말씀에 몰입되고 이 말씀에 만족하여 거기에 깊이 빠져 심취되는 사건이 발생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충동이 발생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설교를 기다리는 회중들이 자신과 같은 경지에 이르지 못함이 불쌍히 여겨지는 현상이 설교자 자신에게서 생겨납니다. 이것을 파토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설교자의 감정(感情)이란 설교자의 심리 상태를 말합니다. 상쾌하고 불쾌하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감정의 표현입니다. 그 감정은 피리를 부는 현장에서는 춤을 함께 춤을 출 수 있고 애곡을 하는 현장에서는 가슴을 칠 수 있는 설교자의 정서입니다. 설교자에게서 이 감정의 파도가 보이지 아니하면 설교의 전달에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Q. 그러나 감정이 풍부한 설교자의 설교에서는 메시지의 지적인 바탕이 빈약하고 지성적인 느낌의 교류가 형성되지 못함을 봅니다. 오직 감정만 부추켜 올려서 흥분의 도가니로 몰고 가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정의 유발을 가급적 억제하려는데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A. 아주 핵심적인 질문을 던져주시었습니다. 바로 이 문제가 우리 한국 강단을 위기로 몰고 온 주범(主犯)중의 하나입니다. 사실 우리의 설교역사는 불과 한 세기를 넘긴 정도로 짧습니다. 한국교회 초기의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외치는 열심은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지적인 바탕은 빈약했습니다. 사실 그 때는 회중들의 교육수준이 낮았기에 설교자의 높은 지적 수준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메시지의 지적인 바탕이나 지성적인 논리의 형성 등이 설교에서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때는 이성적인 호소보다는 느낌과 경험과 감정을 유발시키는 요소가 훨씬 큰 효과를 가져 왔습니다. 특별히 성령님의 역사라는 이름으로 많이 나타난 사례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즉, 설교를 듣는 회중들의 삶의 환경이나 교육 수준의 변화는 놀라운 속도로 급진전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교육제도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전파를 타고 동시에 보고들을 수 있는 전자 매체의 발달은 도시나 농촌의 구별 없이 우리의 사회를 평준화하는데 큰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시대의 변화를 외면하고 강단에 서게되는 설교자의 문제입니다. 회중들의 감정만을 이용하려는 설교자들이 지금도 허다합니다. 자신의 모자란 성경지식을 비롯하여 빈약한 설교 내용을 감출 수 있는 유일한 방편으로 신령한 음성이나 경험이나 각종 예화들을 나열하면서 회중의 감정을 흥분시킵니다. 이 가운데 회중은 설교자의 의도대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그 가운데 젖어 내용 없는 감정의 정화(catharsis)를 하고서는 "은혜를 많이 받았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회중을 붙잡고 그 날의 설교를 통한 메시지를 물을 때는 그날의 본문이나 그 내용은 전혀 기억하지 못한 기현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설교의 현상은 설교의 공동화(空洞化) 현상을 나타내고 설교는 순간의 뜨거움으로 끝날 뿐 말씀으로 뿌리를 내리는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현대를 살면서 지성의 틀을 잘 갖추고 있는 설교자들은 감정의 유발을 억제하고 이성을 통한 진리의 전달에만 관심을 두는 경향을 낳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설교자의 풍부한 감정의 활용은 비지성적인 설교자들의 전유물로 여기는 경향이 최근에 서서히 보이는 현실입니다.
Q. 한국교회 설교자들이 갖추어야 할 요소로서 지적인 바탕과 정적인 바탕을 요구하신 말씀에는 동감합니다. 그러나 좀더 구체적으로 설교의 전달에서 설교자의 감정이 필요한 이유를 좀더 실제적으로 설명해 주시면합니다.
A. 저는 영화나 TV의 배우들의 연기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관심은 어느 장면에서 탤런트가 정말로 눈물을 줄줄 흐르는 순간입니다. 그 감정의 표현은 그 연기자 자신이 처한 순간의 사건을 시청자가 함께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일을 해냅니다. 저는 그 때마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 꼭 묻습니다. 저 배우의 눈물은 눈에 보조물을 넣고 조작한 것인지. 아니면 실지로 자신의 감정이 작동하여 복받쳐 나오는 눈물인지를 묻습니다. 그 때마다 그들의 눈물은 가짜가 아니고 진짜라고 일러줍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저를 연기자의 순수한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 수준 이하의 사람처럼 여기면서 이상한 눈길을 보냅니다.
그 때마다 저는 이런 질문을 합니다. 어떻게 저 연기자는 꾸며낸 이야기(fiction)를 가지고 저렇게도 사실화(事實化) 시켜 시청자을 끌고 갈 수 있을까? 어떻게 그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자신이 그토록 깊히 파고들어가 빠질 수 있을까? 왜? 우리의 설교자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실화(nonfiction)인 본문을 가지고 회중들에게는 가상된 이야기처럼 들리게 할까? 외 설교자들은 진리를 가지고 말하는데 설교자와는 무관하게 들리며 회중들은 옛날 옛적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하고 있을까?
바로 여기에 설교자의 감정이 설교의 순간에 작동되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연기자는 비사실을 사실로 받아 드립니다. 그리고 그 내용에 깊이 몰입되어 그 순간의 내용을 자신의 것으로 승화시켜 그렇게도 확실하게 시청자에게 파고듭니다. 진정 설교자가 깊이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설교자가 감정은 메마른 체 머리만을 작동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는데는 참으로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예를 들어,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설교자 앞에서 느끼는 일들입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처절한 희생을 당하신 구원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설교자 자신이 그 십자가의 사건에 도취되어 끝없이 감격하고 그 감정이 복받쳐 올라 눈물을 흘리면서 외치는 모습이 보이지 아니합니다. 거의 모두가 하나의 지식으로 십자가 사건을 전하는 설교로 끝을 맺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설교자가 두뇌만을 이용하여 설교를 하게 되면 회중도 머리만을 굴리면서 설교를 듣습니다. 설교자가 머리를 거쳐 가슴으로 설교를 하면 회중도 머리를 통하여 깨닫고 가슴 속 깊이 그 설교를 간직하게 됩니다.
Q. 오늘의 많은 설교자들, 특히 젊은 설교자들이 지식의 이입에 열중하고 감정의 이입이 빈약하게 될 우려가 있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여기에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일까요?
A. 여기에 대한 개선책으로서의 인위적인 방안이란 없습니다. 눈물을 보여 주어야 할 부분에 눈물이 나지 아니하니까 인위적인 보조물을 눈에 뿌릴 수 있는 경우가 배우에게는 있을 수 있으나 설교자에게는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설교자는 고정적인 음정과 기계적인 눈물을 흘리는 것 때문에 오히려 설교사역에 감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 회중들은 설교자가 그 특유한 음정에 돌입하면 아예 따라오는 설교자의 눈물을 기다리고 구경을 한다는 안타까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배우들이 한 컷의 장면을 연출할 때 감독은 "준비!"를 지시하고 그 다음에는 "감정정리"를 명령합니다. 이 때의 감정정리란 잡다한 모든 생각을 멈추고 자신이 외어야 할 대사를 생각하면서 그 장면에 스스로를 몰입시킬 준비를 말합니다. 설교자에게도 이러한 감정정리가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설교의 내용과 자신이 일체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먼저 그 완성된 설교 원고를 반복하여 읽으면서 깊은 감동에 젖어야 합니다. 그 설교 원고에 때로는 눈물 자국이 보여져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하나를 더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설교란 성령님의 역사 아래서 (under dynamic of Holy Spirit)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의 거듭된 확인입니다. 그럴 때 설교자의 정리된 감정은 바로 성령님을 찾고 그 도움을 절박하게 구하는 기도와 매달리는 자세가 일게 됩니다. 자신의 지식을 나열하기 위한 설교가 아니라 성령님의 손에 붙잡힌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절차입니다. 전폭적인 의존의 자세입니다. 하나의 도구로서 혼신의 힘을 다 내놓으려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이 기본 자제가 없이는 어떤 경우도 설교자의 감정은 발산될 수 없습니다.
Q. 설교하는 순간에 설교자의 감정이 실로 중요함을 새롭게 인식합니다. 그렇다면 설교자의 감정이 움직이지 아니할 때 보여지는 현상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요?
A. 여기에 대한 대답은 컴퓨터를 조작하여 기계적인 기능과 요소만을 갖추어 내 보내는 안내 방송을 들어보면 바로 알게 됩니다. 언어와 감정이 언제나 수반되지 않으면 그것은 기계언어 이거나 생명력이 없는 언어라는 사실을 바로 알게 됩니다. 인간의 감정이 섞이지 아니한 언어는 이질적인 세계에서 전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외계(外界人)의 언어로 들립니다. 이러한 감각이 없는 이상한 언어는 E.T 세계를 그리는 영화에서 흔히들 나타나고 있습니다.
저는 설교의 실제시간에 가장 속이 상하고 고민스러운 것은 학생들이 설교를 하는데 완전히 외계인으로 보일 때입니다. 이 때 이 교수는 그들의 모습을 다음의 몇 가지 범주로 분류합니다.
먼저는, 우선 뜨거운 설교자의 감각이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저 서 있는 냉혈동물로 보입니다. 마지못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인상을 풍깁니다. 어쩔 수 없이 피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모습입니다.
둘째는, 그 날의 설교자 자신이 깨닫고 감격하고 그 메시지를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준비한 흔적이 보이지 아니합니다. 즉, 그 소중한 말씀을 전하려는 의지의 표현이 보이지 않아 한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셋째로, 감정이 움직이지 아니한 까닭에 설교가 끝날 때까지 몸과 손이 전혀 움직이지 아니합니다. 얼굴의 표정언어(facial language)가 전혀 나타나지 아니합니다. 넷째로, 음정의 변화가 전혀 보이지 아니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똑 같은 음정으로 이어집니다. 끝으로, 회중을 설득시키려는 적극적인 자세가 보이지 아니합니다.
설교자는 살아있는 생명체 가운데서도 가장 활기가 넘치는 생명체입니다. 죽은 생명을 대상으로 하거나 순간을 채우는 직업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어가는 생명에게 영원히 사는 생명의 말씀을 불어 넣어주는 존재가 설교자입니다. 30분간이라는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필요하다면 피를 토하고 쓰러질 때까지 외치고 또 외쳐야 하는 특수한 사명자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살아 운동력이 있는 말씀이 전해질 때는 살아 움직이는 말씀의 종에 의하여 살아있는 회중의 가슴을 파고 들어야 합니다.
Q. 생명력이 있는 말씀은 살아 있는 설교자의 감정에 용해되어야 회중들의 가슴에 그 말씀이 심어질 수 있다는 말씀에 동감합니다. 그러면 설교의 효과를 내기 위하여 설교마다 설교자가 거대한 음정을 발산하면서 열을 뿜어 내야 하는지요?
A. 아닙니다. 감정의 표현은 반듯이 목이 쉬도록 외치고 예배당이 떠나도록 마이크 앞에서 소리를 지른 것이 아닙니다. 땀과 눈물을 설교마다 흐르면서 감격의 함성을 지른 것이 아닙니다.
저는 2000년 성탄 주일 예배를 보스톤에 유서 깊은 트리니티 감독교회(Trinity Episcopal Church)에서 드렸습니다. 그날의 설교자인 그 교회의 부목인 제니커(Bruce W. B. Jenneker) 목사는 필자가 모처럼 만난 타고난 설교자였습니다. 그의 설교는 천 여명이 넘은 회중들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부동의 자세로 고개를 반듯이 들고 그에게 눈과 귀를 모으고 있었습니다. 설교가 끝났을 때에야 회중들의 숨소리가 들리고 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필자 자신도 그의 설교에 깊이 빠져있었습니다. 분명히 그 날의 설교는 생명력이 있는 말씀으로 회중들의 가슴 깊이 심어졌습니다. 그가 준비한 설교의 내용과 전달은 탁월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탁월한 설교자의 모습에서는 예배당이 떠날 정도의 우렁찬 함성이 없었습니다. 음향시설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면서 음정의 높낮이 폭을 적절히 지킬 뿐이었습니다. 정확한 발음으로 이어진 그의 설교 문장의 구(句)와 절(節)은 언제나 적절한 감정의 파도를 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누가 보아도 그 자신이 그 날의 메시지에 심취되어 있음을 곧 바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에게서는 눈물도 없었고 땀을 흘리는 모습도 보이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의 음정과 몸의 동작과 시선과 어감에서 얼마든지 그의 감정이 타오르고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대화의 정리
설교자로서 자신의 삶을 던지고 오늘을 이어가는 사람들은 때로는 고단하고 때로는 행복하다. 한 편의 설교를 탈고함으로 설교자의 임무가 끝난 것이 아니다. 준비된 말씀의 메시지가 회중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Communication) 되지 못했을 때 그 설교는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주일 설교단에서 설교가 끝나고 회중들의 반응을 볼 때까지 긴장을 풀 수가 없다. 단순한 문자로서의 메시지 전달이라면 그것은 원고의 탈고로서 그 임무를 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충성된 설교자는 자신이 섬기는 회중들의 지성과 감성의 세계에 메시지를 심어 주어야 하기에 그 긴장을 풀 수가 없다.
특별히 설교자의 머리가 아니라 마음의 바탕에서 울어 나오는 메시지를 오늘의 회중들이 기다리고 있기에 설교자의 부담은 더욱 짙어간다. 현대는 모든 것이 물질 문명과 더불어 기계화되어 가는 시대이다. 양심이 작동할 무대가 서서히 좁아지고 있다. 그 결과 감정의 메마름은 삶의 구석구석에서 발견되어진다. 그래서 죄악은 세상에 가득해지고 살벌한 비바람만 현대인의 피부를 스치고 있다. 그래서 예배의 현장에는 일그러진 정서의 소유자들이 가득하다. 이들은 그날의 말씀에서 웅크려졌던 그들의 가슴이 녹아지기를 바라고 기다린다. 그 차가운 가슴들을 녹일 수 있는 지름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뜨거워진 설교자의 가슴이다. 그 가슴이 성령님의 감동 속에 도구로 이용되어질 때 거기에 진정한 은혜의 불길이 일게 된다.
정장복 교수 -
[본 글은 월간목회에 연제된 글입니다]
Q. 지난 호에서 설교자에게 절대로 필요한 파토스에 대하여 잘 읽었습니다. 설교자로서 하나님의 말씀과 말씀을 들어야 할 회중을 열렬히 사랑해야 하는 기본 마음이 설교자에게 있어져야 한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설교자의 감정이라는 것과 파토스의 차이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좀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A. 설교학에서 말하는 파토스는 단순하게 사전적 의미를 적용하는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 민족의 정서에 가장 특유한 정(情)을 생각해 보시면 이해에 보탬이 됩니다. 흔히들 말하는 사랑이란 만남의 초기에 발생하여 그 지속 시간이 짧습니다. 그러나 정(情)은 감정의 밀도가 차원을 달리하고 그 지속시간이 길게 이어집니다. 그래서 사랑은 미움으로 쉽게 바뀔 수 있어도 정은 가슴속에 오래토록 남게 되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설교에서 파토스를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이 필요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열정(熱情)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열정은 설교자 자신이 그 말씀에 몰입되고 이 말씀에 만족하여 거기에 깊이 빠져 심취되는 사건이 발생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충동이 발생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설교를 기다리는 회중들이 자신과 같은 경지에 이르지 못함이 불쌍히 여겨지는 현상이 설교자 자신에게서 생겨납니다. 이것을 파토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설교자의 감정(感情)이란 설교자의 심리 상태를 말합니다. 상쾌하고 불쾌하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감정의 표현입니다. 그 감정은 피리를 부는 현장에서는 춤을 함께 춤을 출 수 있고 애곡을 하는 현장에서는 가슴을 칠 수 있는 설교자의 정서입니다. 설교자에게서 이 감정의 파도가 보이지 아니하면 설교의 전달에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Q. 그러나 감정이 풍부한 설교자의 설교에서는 메시지의 지적인 바탕이 빈약하고 지성적인 느낌의 교류가 형성되지 못함을 봅니다. 오직 감정만 부추켜 올려서 흥분의 도가니로 몰고 가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정의 유발을 가급적 억제하려는데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A. 아주 핵심적인 질문을 던져주시었습니다. 바로 이 문제가 우리 한국 강단을 위기로 몰고 온 주범(主犯)중의 하나입니다. 사실 우리의 설교역사는 불과 한 세기를 넘긴 정도로 짧습니다. 한국교회 초기의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외치는 열심은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지적인 바탕은 빈약했습니다. 사실 그 때는 회중들의 교육수준이 낮았기에 설교자의 높은 지적 수준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메시지의 지적인 바탕이나 지성적인 논리의 형성 등이 설교에서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때는 이성적인 호소보다는 느낌과 경험과 감정을 유발시키는 요소가 훨씬 큰 효과를 가져 왔습니다. 특별히 성령님의 역사라는 이름으로 많이 나타난 사례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즉, 설교를 듣는 회중들의 삶의 환경이나 교육 수준의 변화는 놀라운 속도로 급진전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교육제도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전파를 타고 동시에 보고들을 수 있는 전자 매체의 발달은 도시나 농촌의 구별 없이 우리의 사회를 평준화하는데 큰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시대의 변화를 외면하고 강단에 서게되는 설교자의 문제입니다. 회중들의 감정만을 이용하려는 설교자들이 지금도 허다합니다. 자신의 모자란 성경지식을 비롯하여 빈약한 설교 내용을 감출 수 있는 유일한 방편으로 신령한 음성이나 경험이나 각종 예화들을 나열하면서 회중의 감정을 흥분시킵니다. 이 가운데 회중은 설교자의 의도대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그 가운데 젖어 내용 없는 감정의 정화(catharsis)를 하고서는 "은혜를 많이 받았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회중을 붙잡고 그 날의 설교를 통한 메시지를 물을 때는 그날의 본문이나 그 내용은 전혀 기억하지 못한 기현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설교의 현상은 설교의 공동화(空洞化) 현상을 나타내고 설교는 순간의 뜨거움으로 끝날 뿐 말씀으로 뿌리를 내리는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현대를 살면서 지성의 틀을 잘 갖추고 있는 설교자들은 감정의 유발을 억제하고 이성을 통한 진리의 전달에만 관심을 두는 경향을 낳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설교자의 풍부한 감정의 활용은 비지성적인 설교자들의 전유물로 여기는 경향이 최근에 서서히 보이는 현실입니다.
Q. 한국교회 설교자들이 갖추어야 할 요소로서 지적인 바탕과 정적인 바탕을 요구하신 말씀에는 동감합니다. 그러나 좀더 구체적으로 설교의 전달에서 설교자의 감정이 필요한 이유를 좀더 실제적으로 설명해 주시면합니다.
A. 저는 영화나 TV의 배우들의 연기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관심은 어느 장면에서 탤런트가 정말로 눈물을 줄줄 흐르는 순간입니다. 그 감정의 표현은 그 연기자 자신이 처한 순간의 사건을 시청자가 함께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일을 해냅니다. 저는 그 때마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 꼭 묻습니다. 저 배우의 눈물은 눈에 보조물을 넣고 조작한 것인지. 아니면 실지로 자신의 감정이 작동하여 복받쳐 나오는 눈물인지를 묻습니다. 그 때마다 그들의 눈물은 가짜가 아니고 진짜라고 일러줍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저를 연기자의 순수한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 수준 이하의 사람처럼 여기면서 이상한 눈길을 보냅니다.
그 때마다 저는 이런 질문을 합니다. 어떻게 저 연기자는 꾸며낸 이야기(fiction)를 가지고 저렇게도 사실화(事實化) 시켜 시청자을 끌고 갈 수 있을까? 어떻게 그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자신이 그토록 깊히 파고들어가 빠질 수 있을까? 왜? 우리의 설교자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실화(nonfiction)인 본문을 가지고 회중들에게는 가상된 이야기처럼 들리게 할까? 외 설교자들은 진리를 가지고 말하는데 설교자와는 무관하게 들리며 회중들은 옛날 옛적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하고 있을까?
바로 여기에 설교자의 감정이 설교의 순간에 작동되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연기자는 비사실을 사실로 받아 드립니다. 그리고 그 내용에 깊이 몰입되어 그 순간의 내용을 자신의 것으로 승화시켜 그렇게도 확실하게 시청자에게 파고듭니다. 진정 설교자가 깊이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설교자가 감정은 메마른 체 머리만을 작동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는데는 참으로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예를 들어,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설교자 앞에서 느끼는 일들입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처절한 희생을 당하신 구원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설교자 자신이 그 십자가의 사건에 도취되어 끝없이 감격하고 그 감정이 복받쳐 올라 눈물을 흘리면서 외치는 모습이 보이지 아니합니다. 거의 모두가 하나의 지식으로 십자가 사건을 전하는 설교로 끝을 맺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설교자가 두뇌만을 이용하여 설교를 하게 되면 회중도 머리만을 굴리면서 설교를 듣습니다. 설교자가 머리를 거쳐 가슴으로 설교를 하면 회중도 머리를 통하여 깨닫고 가슴 속 깊이 그 설교를 간직하게 됩니다.
Q. 오늘의 많은 설교자들, 특히 젊은 설교자들이 지식의 이입에 열중하고 감정의 이입이 빈약하게 될 우려가 있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여기에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일까요?
A. 여기에 대한 개선책으로서의 인위적인 방안이란 없습니다. 눈물을 보여 주어야 할 부분에 눈물이 나지 아니하니까 인위적인 보조물을 눈에 뿌릴 수 있는 경우가 배우에게는 있을 수 있으나 설교자에게는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설교자는 고정적인 음정과 기계적인 눈물을 흘리는 것 때문에 오히려 설교사역에 감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 회중들은 설교자가 그 특유한 음정에 돌입하면 아예 따라오는 설교자의 눈물을 기다리고 구경을 한다는 안타까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배우들이 한 컷의 장면을 연출할 때 감독은 "준비!"를 지시하고 그 다음에는 "감정정리"를 명령합니다. 이 때의 감정정리란 잡다한 모든 생각을 멈추고 자신이 외어야 할 대사를 생각하면서 그 장면에 스스로를 몰입시킬 준비를 말합니다. 설교자에게도 이러한 감정정리가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설교의 내용과 자신이 일체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먼저 그 완성된 설교 원고를 반복하여 읽으면서 깊은 감동에 젖어야 합니다. 그 설교 원고에 때로는 눈물 자국이 보여져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하나를 더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설교란 성령님의 역사 아래서 (under dynamic of Holy Spirit)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의 거듭된 확인입니다. 그럴 때 설교자의 정리된 감정은 바로 성령님을 찾고 그 도움을 절박하게 구하는 기도와 매달리는 자세가 일게 됩니다. 자신의 지식을 나열하기 위한 설교가 아니라 성령님의 손에 붙잡힌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절차입니다. 전폭적인 의존의 자세입니다. 하나의 도구로서 혼신의 힘을 다 내놓으려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이 기본 자제가 없이는 어떤 경우도 설교자의 감정은 발산될 수 없습니다.
Q. 설교하는 순간에 설교자의 감정이 실로 중요함을 새롭게 인식합니다. 그렇다면 설교자의 감정이 움직이지 아니할 때 보여지는 현상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요?
A. 여기에 대한 대답은 컴퓨터를 조작하여 기계적인 기능과 요소만을 갖추어 내 보내는 안내 방송을 들어보면 바로 알게 됩니다. 언어와 감정이 언제나 수반되지 않으면 그것은 기계언어 이거나 생명력이 없는 언어라는 사실을 바로 알게 됩니다. 인간의 감정이 섞이지 아니한 언어는 이질적인 세계에서 전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외계(外界人)의 언어로 들립니다. 이러한 감각이 없는 이상한 언어는 E.T 세계를 그리는 영화에서 흔히들 나타나고 있습니다.
저는 설교의 실제시간에 가장 속이 상하고 고민스러운 것은 학생들이 설교를 하는데 완전히 외계인으로 보일 때입니다. 이 때 이 교수는 그들의 모습을 다음의 몇 가지 범주로 분류합니다.
먼저는, 우선 뜨거운 설교자의 감각이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저 서 있는 냉혈동물로 보입니다. 마지못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인상을 풍깁니다. 어쩔 수 없이 피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모습입니다.
둘째는, 그 날의 설교자 자신이 깨닫고 감격하고 그 메시지를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준비한 흔적이 보이지 아니합니다. 즉, 그 소중한 말씀을 전하려는 의지의 표현이 보이지 않아 한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셋째로, 감정이 움직이지 아니한 까닭에 설교가 끝날 때까지 몸과 손이 전혀 움직이지 아니합니다. 얼굴의 표정언어(facial language)가 전혀 나타나지 아니합니다. 넷째로, 음정의 변화가 전혀 보이지 아니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똑 같은 음정으로 이어집니다. 끝으로, 회중을 설득시키려는 적극적인 자세가 보이지 아니합니다.
설교자는 살아있는 생명체 가운데서도 가장 활기가 넘치는 생명체입니다. 죽은 생명을 대상으로 하거나 순간을 채우는 직업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어가는 생명에게 영원히 사는 생명의 말씀을 불어 넣어주는 존재가 설교자입니다. 30분간이라는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필요하다면 피를 토하고 쓰러질 때까지 외치고 또 외쳐야 하는 특수한 사명자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살아 운동력이 있는 말씀이 전해질 때는 살아 움직이는 말씀의 종에 의하여 살아있는 회중의 가슴을 파고 들어야 합니다.
Q. 생명력이 있는 말씀은 살아 있는 설교자의 감정에 용해되어야 회중들의 가슴에 그 말씀이 심어질 수 있다는 말씀에 동감합니다. 그러면 설교의 효과를 내기 위하여 설교마다 설교자가 거대한 음정을 발산하면서 열을 뿜어 내야 하는지요?
A. 아닙니다. 감정의 표현은 반듯이 목이 쉬도록 외치고 예배당이 떠나도록 마이크 앞에서 소리를 지른 것이 아닙니다. 땀과 눈물을 설교마다 흐르면서 감격의 함성을 지른 것이 아닙니다.
저는 2000년 성탄 주일 예배를 보스톤에 유서 깊은 트리니티 감독교회(Trinity Episcopal Church)에서 드렸습니다. 그날의 설교자인 그 교회의 부목인 제니커(Bruce W. B. Jenneker) 목사는 필자가 모처럼 만난 타고난 설교자였습니다. 그의 설교는 천 여명이 넘은 회중들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부동의 자세로 고개를 반듯이 들고 그에게 눈과 귀를 모으고 있었습니다. 설교가 끝났을 때에야 회중들의 숨소리가 들리고 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필자 자신도 그의 설교에 깊이 빠져있었습니다. 분명히 그 날의 설교는 생명력이 있는 말씀으로 회중들의 가슴 깊이 심어졌습니다. 그가 준비한 설교의 내용과 전달은 탁월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탁월한 설교자의 모습에서는 예배당이 떠날 정도의 우렁찬 함성이 없었습니다. 음향시설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면서 음정의 높낮이 폭을 적절히 지킬 뿐이었습니다. 정확한 발음으로 이어진 그의 설교 문장의 구(句)와 절(節)은 언제나 적절한 감정의 파도를 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누가 보아도 그 자신이 그 날의 메시지에 심취되어 있음을 곧 바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에게서는 눈물도 없었고 땀을 흘리는 모습도 보이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의 음정과 몸의 동작과 시선과 어감에서 얼마든지 그의 감정이 타오르고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대화의 정리
설교자로서 자신의 삶을 던지고 오늘을 이어가는 사람들은 때로는 고단하고 때로는 행복하다. 한 편의 설교를 탈고함으로 설교자의 임무가 끝난 것이 아니다. 준비된 말씀의 메시지가 회중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Communication) 되지 못했을 때 그 설교는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주일 설교단에서 설교가 끝나고 회중들의 반응을 볼 때까지 긴장을 풀 수가 없다. 단순한 문자로서의 메시지 전달이라면 그것은 원고의 탈고로서 그 임무를 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충성된 설교자는 자신이 섬기는 회중들의 지성과 감성의 세계에 메시지를 심어 주어야 하기에 그 긴장을 풀 수가 없다.
특별히 설교자의 머리가 아니라 마음의 바탕에서 울어 나오는 메시지를 오늘의 회중들이 기다리고 있기에 설교자의 부담은 더욱 짙어간다. 현대는 모든 것이 물질 문명과 더불어 기계화되어 가는 시대이다. 양심이 작동할 무대가 서서히 좁아지고 있다. 그 결과 감정의 메마름은 삶의 구석구석에서 발견되어진다. 그래서 죄악은 세상에 가득해지고 살벌한 비바람만 현대인의 피부를 스치고 있다. 그래서 예배의 현장에는 일그러진 정서의 소유자들이 가득하다. 이들은 그날의 말씀에서 웅크려졌던 그들의 가슴이 녹아지기를 바라고 기다린다. 그 차가운 가슴들을 녹일 수 있는 지름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뜨거워진 설교자의 가슴이다. 그 가슴이 성령님의 감동 속에 도구로 이용되어질 때 거기에 진정한 은혜의 불길이 일게 된다.
정장복 교수 -
[본 글은 월간목회에 연제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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