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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死後) 이후 어떻게 될 것인가?

by 【고동엽】 2022. 4. 19.
 
 
글쓴이: 목창균

서   론

    종말론은 마지막 일들에 대한 교훈으로 정의된다.  종말은 본질적으로 마지막 해결에 대한 신앙이다.  하나님에 대한 현재의 불완전한 경험이 해결되고, 하나님에 대한 갈증이 충족되며, 구원에 대한 욕구가 실현될 것이라는 신자의 복된 소망이 종말이다.
    종말론은 전통적으로 죽음, 사후 영혼의 상태, 그리스도의 재림, 죽은 자의 부활, 최후 심판, 세상의 종말, 천년 왕국, 천국과 지옥 등의 주제를 포함한다.  특히 그리스도의 재림은 2000년 기독교 역사를 통해 일관되게 믿어 온 신앙 항목이다.  
    한국 교회는 최근 몇 년 동안 시한부 종말론이라는 극단적 종말론으로 인해 많은 폐해와 혼란을 겪으며, 시한부 종말론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다. 한국교회에 종말론과 관련된 혼란과 이단 시비가 자주 일어나는 것은 세기말적 현상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으나 그 근본적 원인은 종말론에 대한 바른 교육과 이해 부족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강의는 종말론의 여러 주제 가운데 죽음에서 부활에 이르는 기간 동안 우리의 영혼이 어떤 상태에 있게되는지를 성서적으로 해명할 것이다.  이 강의에서 세 가지 문제를 다루려한다.
    첫째는 죽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는 죽음의 본질문제다. 신구약 성경을 통해 죽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논의할 것이다.
    둘째는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이다.  이는 영혼의 상태문제다.  구약, 중간기 문헌, 신약성경을 통해 이 문제를 해명하고 연옥설과 영혼수면설을 살펴볼 것이다.
    셋째는 사후상태는 확정적인가 하는 것이다.  죽음 후에는 복음을 믿거나 죄를 회개할 기회는 없는가 하는 문제다. 부자와 나사로 비유와 그리스도의 음부전도를 분석하여 이 문제를 해명할 것이다.

1.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은 무엇이며 죽음 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문제는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관심사 중 하나다.  사람들은 흔히 죽음을 인간 경험 가운데 가장 슬픈 사건으로 취급하여 애써 외면하려고 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죽음은 자연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많은 질문이 제기되고 적절한 설명이 요구되는 신비한 현상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천사 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시8:5)고 한다면,  왜 인간은 식물이나 다른 동물 보다 더 짧은 삶을  살아야 하는가? 나무들은 몇 백년 동안 사는데 비해, 사람은 백년도 살기 힘든 것인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면,  왜 죽어야 하는가?  
    인간의 삶은 어떤 의미에서 죽음에 대한 준비과정이다.  죽음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삶에 보다 진지하고 성실할 수 있는 법이다.  따라서 죽음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의 본질에 관한 세 가지 다른 견해가 있다.  존재의  절대적인 종국으로 보는 견해, 환생으로 보는 견해, 분리로 보는 견해가 그것이다.  죽음을 존재의 종료로 보는 대표적인 예는 고대 유대의 사두개파, 헬라의 에피큐러스학파와 현대의 휴매니즘이다.  사두개파는 죽음을 개인의 소멸(extinction)로 취급하여 사후의 삶을 부정했던 유대 종파였다(마22:23, 행23:6-8).  에피큐러스 학파  역시 죽음 후 세계를 무(無)의 세계로 간주하고 현세의 삶을 강조하는 쾌락주의적  윤리관을 주장했다.  휴매니즘은 인간의 불멸을 부정하는 현대의 풍조 중 하나다.  
    죽음을 환생(reincarnation) 과정의 한 단계로 보는 견해는 동양사상에 뿌리를  둔 죽음관이다. 힌두교와 불교는 일반적으로 인간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출생과 죽음의 순환을 되풀이한다는 윤회설을 주장한다.  
    기독교 신학은 죽음의 본질을 분리로 정의한다.  육체적 죽음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 (전12:7, 마27:50)요 동물적 생명의 종결을 말한다(마2:20, 막3:4, 눅6:9, 요12:25). 영적 죽음은 영혼이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마8:22,엡2:1-3). 이것은 범죄한 아담에게 내린 형벌이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이 당하게 되는 죽음이다.  아담을 선악과를 따먹은 후 즉사하지 않았다.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했는데, 어찌 죽지 않았는가?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하나님과의 단절이 곧 영적 죽음이다.  영원한 죽음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완전 분리되는 것이다(계20:14). 이는 영적 죽음의 절정이요 완료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둘째 사망으로(계2:11, 20:6), 바울은 영벌(살후1:9) 혹은 부패(갈6:8)로 표현했다.  이는 생명 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아니한 사람들이 받게 되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성서적 개념을 분석해보면, 죽음을 육체와 영혼의 분리로 간주하는 기독교의 죽음관이 점진적 발전을 통해 형성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구약성서 초기 사상에서는 죽음을 분리나 존재의 다른 형태로의 전환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육체적 생명의 종국으로 보는 경향이 강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라는 것이 구약성경의 기본적 인간이해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 인간은 흙으로 지음을 받은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면에서는 다른 동물들과 같으나, 생명의 호흡, 즉 생기를 받았다는 면에서는 다르다.  인간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의 호흡을 받았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은 호흡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반면, 죽는다는 것은 생명의 호흡의 중단을 의미한다. 생명과 호흡이 상실된 인간은 단지 육체만이 남는다. 생명의 호흡이  중단되면,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은 땅 위에 쏟아진 물처럼 흩어져 다시 모을 수 없다(삼하14:14). 흙으로 환원된 인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고대 히브리인들은  죽음을 일종의 생명의 종국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욥기와 시편에 나타난 죽음관이  그러했다.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부지런히 찾으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  하리라"(욥7:  21).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시39:13).
    한편, 구약성경은 죽음을 인간존재의 소멸이나 완전한 종국으로 보지는 않았다.  죽음은 생명의 힘이 가장 낮은 정도에 있는 상태이며 살아있는 것의 그림자와 같다.  죽은 사람은  "존재하기를 완전히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의 영역, 곧 스올에서 그림자와 같은 존재로  존속한다.  이 존재는 육체로부터  분리된  영혼의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육체와 영혼의  통일체의 계속이다." 죽은 자는 살았을 때와 같은 육체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창37:35,  42:38, 44:29, 왕상2:6, 겔32:27). 예를 들어, 사무엘이 사울의 요청에 의해 음부로부터 불려 올려졌을 때, 그가 입은 외투를 보고 사울이 사무엘인줄 알았다(삼상 28:14).
    구약성경에서 흔히 음부로 번역되는 스올은 의인과 악인 구별 없이 모든 죽은 자가 가는 장소다. 음부는 지하에 있는 망각의 장소요 어둠의 땅이다(욥10:21-22). 음부에서는 징벌도 보상도 없으며 일도 없고 계획도 없다"(전9:10). 음부는 죽음 후 삶으로 기술될 수는 없다. 죽음 후 "인간은 음부에서 존재하나 삶이라고 불릴 수 없는 형태로 존재한다." 죽은 자는 존재하나 살아있지는 않다. 그림자와 같은 것이다.
    구약성경의 초기 저술에는 죽음 후의 개인의 삶에 대한 분명한 교훈이 없었다.   죽음을 살아 있는 것 보다 못하게 보는 비극적인 죽음관이 지배적인 흐름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되고 바벨론 포로생활을 겪으면서 개인의 운명과 하나님의 목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구약시대 말 경 죽음에 대한 견해나 내세에 대한 신앙이 중요성을 지니게 되었다.  후기 예언서에서는 죽은 자에 대한 부활의 소망이 언급되기 시작했다.  이사야는 의인에게만 부활이 약속된 반면, 악인은 부활에서 배제되어 어두운 망각 속으로 내버려진다고 했으며(사26:10-14, 16-19),  다니엘은 구원이 살아있는 사람뿐 아니라 박해 시 생명을 잃은 사람에게도 임할 것이라고 예언했다(단12:2).  따라서 죽음을 축복으로 보는 견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요약하면, 구약성경은 죽음 후의 삶을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호흡을 상실하고 음부에서 그림자와 같은 존재로 존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구약시대 후기에 부활에 대한 소망이 제시되고 비극적인 죽음관으로부터 낙관적이며 긍정적인 죽음관으로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으며 영혼과 육체의 분리개념이 발전하게 되었다.
    신약성경은 죽음문제에 대해 구약성경 보다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교훈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약성경의 중심주제는 아니다.  고린도 전서 15장의 경우를 제외하면, 다른 문제에 덧붙여서 취급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신약성서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신약성경은 죽음을 인간존재의 종국으로 간주하지 않고 새 삶의 영역에로의 전환으로 이해했다.  이것은 죽음을 "잠"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에 의해서도 입증된다.  예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과 친구 나사로가 죽은 것을 "잔다" 또는 "잠들었다"고 말했다(마9:24, 요11:11).  또한 누가 역시 스데반의 죽음을 잔다는 말로 나타냈으며(행7:60), 바울은 죽음에 대해 잠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살4:13).  죽음을 잠으로 비유한 것은 죽음 후에도 인간의 생명이 존속된다는 것을 나타내는데 목적이 있다. 잠자는 자는 자고 있는 동안에도 생존해 있는 것처럼, 죽은 사람은 육체적 기능의 중단에도 불구하고 존재하기를 계속한다.  죽은 자의 영혼은 중간 상태에서 육체의 부활을 기다린다.  따라서 죽음은 존재의 끝이 아니다.
    신약성경은 죽음을 육체적 생명의 종결로 설명하거나(마2:20, 막3:4, 눅6:9) 영혼과 육체의 분리로 암시하고 있다.  야고보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야2:26)고 했으며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운명했다(눅23:46).  바울은 인간이 육과 영으로 이루어져 서로 대립하고 있다고 보았다(롬7: - 8: ).
    한편 신약성경은 구약성경 처럼 죽음을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으로 보지는 않았다.  죽음은 인간에게 환영받을 사건은 아니며 인간에게 죽음의 두려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죽음은 신자들에게 공포의 힘을 상실했다(고전15:54-57).  예수께서 죽음을 잠으로 비유한 것은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하려는 시도였다. 또한 그리스도 자신은 죽음을 극복하고 승리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기독교 진리의 토대가 된다(고전15: 13-14).  죽은 신자와 하나님의 계속적인 교제가 약속되고 있다.
    요약하면, 구약성서는 죽음을 생명의 종국으로, 죽음 후의 인간상태를 음부에서의 그림자 같은 존재로 이해했다.  이에 비해, 신약성경은 죽음을 육체와 영혼의 분리에 의한 육체적 생명의 종국으로 설명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했다는 사실이 신약성경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죽음은 인간에게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이질적이요 적대적인 것이다.  일종의 원수다(고전15:26). 그것은 죄의 결과이며 아담의 타락에서 시작되었다. 이것은 초기 기독교부터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신앙항목이었다.  

II.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인간이 죽으면, 어떤 상태로 있게 되는가 하는 것은 아직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문제다. 또한 이것은 장례식이나 추도식 등에서 자주 질문되어지는 실제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성경과 기독교 신학은 죽음으로부터 부활에 이르는 기간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의 인간상태에 관해 성경은 거의 침묵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육체의 부활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인간의 미래와 관련해 그것을 부차적으로 취급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어떤 구절들은 육체적 죽음 후에도 인간은 의식과 인격을 지닌 존재로 존속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기독교 신학은 중간상태(intermediate state)라는 전문적 용어를 사용하여 육체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영혼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정통 기독교는 인간의 영혼은 죽음 이 후에도 의식 있는 개별적 존재로서 계속 존속한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재림 시, 영화롭게 변화된 육체가 영혼과 재결합되어 부활할 것을 믿고 있다. 따라서 전통신학은 중간상태의 개념을 근거로 영혼불멸과 육체의 부활을 조화시키려했다.
    신구약 성경은 중간상태에 관해 많은 언급을 하고 있지는 않으나 인간은 사 후에도 의식과 인격을 가진 존재로 존속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구약성경 저자들은 인간은 죽음과 더불어 소멸되는 것이 아니며, 의인과 악인 모두 음부(스올)로 내려간다고 보았다.  의인에 대하여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그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건지리이까" (시89:48) 하였으며, 악인에 대하여 "그들과 그 모든 소속이 산채로 음부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합하니 그들이 총회 중에서 망하니라"(민16:33)고 하였다. 따라서 음부란 말은 "죽음이 인간 존재의 종국이 아님을 보여주는 구약적 표현방법"이다.
    의인과 악인 모두 음부로 내려간다고 해서, 그들이 동일한 운명에 처한다는 것은 아니다.  의인은 음부의 권세로부터 구원받게 되는데 반해, 악인은 그 권세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양 같이 저희를 음부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저희 목자일 것이라...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하시리로다"(시49:14-15).  따라서 악인이 음부로 돌아가는 것은 파멸을 의미한다(시9:17, 사14:15).  특히 시편 49편과 73편은 스올의 형벌적 성격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한편 구약성경 저자들은 음부로부터의 구원에 대한 소망을 분명히 표현하는 동시에 육체적 부활에 대한 소망도 암시하고 있다.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 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라"(시16:9-10).  
    욥은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 수 있느냐는 질문을 제기한 후(14:14), "나의 이 가죽, 이 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19:25)는 것을 확신했다.  선지자 이사야는 "주의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라고 부활신앙을 증거했으며(26:19), 에스겔은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환상을 통해 부활소망을 나타냈다.  뿐만 아니라 다니엘은 의인은 물론 악인도 부활할 것을 암시했다.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12:2).
    구약과 신약 사이의 시대에 나온 문헌들을 중간기 문헌이라 한다. 중간기 문헌에서는 스올의 개념에 변화가 일어났다.  구약성경에서는 스올이 죽은 자의 영역 일반을 의미했다면, 중간기 문헌에서는 의인과 악인에 대한 영역이 구분되기 시작했다.  스올은 의인에게는 영원한 처소가 아닌, 임시 처소다.  왜냐하면 의인은 부활할 때, 그 곳을 떠나기 때문이다(솔로몬의 시 14:67, 제2 마카비서 7:9, 14:46).  한편 스올이 악인에 대한 징벌의 장소로 간주될 때, 의인의 처서는 낙원으로 되는 겨우도 있다.  [모세의 묵시]에 따르면, 아담이 죽었을 때, 그의 영혼은 낙원으로 인도되었다(33:4).
    신약성경 역시 인간은 죽음과 동시에 멸절되는 것이 아니라 음부(하데스)나 낙원 중 한 곳에 존속한다고 가르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 오른 편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고 하신 것이나,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부자는 죽은 후 음부로 간 반면,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으로 들어간 것(눅16:19-31) 그리고 사도 바울이 "우리가 담대히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 고백한 것(고후5:8)이 이를 말해준다.
    중간상태에서 불 경건한 자는 하데스에서 최후 심판 날 까지 고통과 형벌을 당하게 된다.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 까지 지키시며..."(벧후2:9).   반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낙원에 있게 된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낙원이란 말은 신약성서에서 세번 사용되었으며 (눅23:43, 고후12:4, 계2:7) 하나님의 특별 처소인 천국(Heaven)을 말한다. 따라서 신자는 죽는 즉시 천국에서 완전한  의식을 가진 채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되는 안식과 축복의 상태를 누리게 된다(눅16:19-31, 빌2:21-23, 살전5:10).
    신약성경은 중간상태에 관한 독립된 교리를 가지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초대교회가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 그리고 사람들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기간이 비교적 짧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중간상태는 잠정적인 것이므로, 천국과 지옥에서의 최종 상태 만큼 초대교회 신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기 때문 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이 의외로 지연되자, 초기 교부들 사이에서 중간상태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중간상태에 관한 교부들의 견해는 세 가지 흐름으로 정리된다. 첫째, 사후에 지하의 하데스에서 의인은 어느 정도 상급을 누리는 반면, 악인은 형벌을 받게 된다 는 견해이다. 그러나 상급과 형벌은 천국과 지옥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약하다.  이는 교부시대의 지배적인 견해였다.
    둘째, 중간상태는 영혼의 점진적인 정화의 과정이라는 견해이다.  이것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에서 제시되었으며, 중세교회에서 발전된 연옥교리의 시작이었다.
   셋째, 의인의 영혼은 죽으면 즉시 음부가 아닌, 천국으로 간다는 견해이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유세비우스 등이 이를 주장했다.  반면, 이레네우스, 터툴리안 등은 그리스도께서 사흘 동안 음부에 내려갔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영혼이 사후에 즉시 천국에 간다는 견해를 비판했다.

    세시대에는 악인은 사후에 즉시 지옥으로 가는 반면, 죄 없는 의인은 천국으로 간다는 견해가 일반적이었다. 한편 지옥과 천국에 해당되지 않는 대다수 사람들의 영혼은 연옥에서 죄의 정도에 따라 일정 기간 동안 정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연옥교리가 유행했다.  
    교개혁자들은 연옥설을 부정하고, 신자는 사후 즉시 천국에 가는 반면, 불신자는 지옥으로 간다고 가르쳤다.

    연옥논쟁
    중간상태와 관련하여 일어난 신학논쟁 중 하나가 연옥문제였다.  천주교에서 가르치는 연옥교리에 따르면, 연옥은 천국과 지옥 사이의 중간적 장소다.  지옥과 천국으로부터 배제된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는 곳이다.  그것은 시련과 징벌의 장소가 아니라 정화의 장소다.  직접 천국으로 가지 못하고 연옥에서 정화의 과정을 통과해야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 안에 있기 때문에 결국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확실하지만, 현세에서 지은 가벼운 죄로부터 정결함이나 그에 합당한 형벌을 받지 않고 죽은 사람들이다.
    천주교에서는 인간영혼은 연옥에서 수동적으로 당하는 고통을 통해 정화된다고 주장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면하지 못하는 영혼의 고통을 포함한다.  연옥에 체류하는 기간 이나 고통의 강도는 정화의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그것은 지상에 있는 신자들 의 미사, 기도 및 선행에 의해 단축되거나 경감될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영혼이 완전히 정화될 때,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
      천주교회가 연옥교리의 성서적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마카비 후서 12장 43-45절이다.  
  또 이튿날 유다 마카비우스가 그의 동료들과 더불어 그 전사한 자들의 시체를
  드러내어 그들 조상의 무덤에 그들의 친척과 같이 매장하기 위해 왔었다. 그리
  고 그들은 죽은 자들의 외투 밑에서 우상인 잠니아의 장식물을 발견하였다. 그런
  데 그것은 율법으로 유대인에게 금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우상 때문에    
  죽임을 당하였다는 것을 저들은 분명히 알았다...  그들은 열심히 기도하여 그 범죄한  
  바가 사죄되기를 하나님께 간구했다.  그러나 가장 용감한 유다는... 부에 대하여
  종교적으로 잘 생각하여 각 사람으로부터 은 일만 이천 드라크마를 모금하여 그 죽은
  자들의 죄를 위해 드릴 희생을 위해 예루살렘에 보냈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죄로부터 벗어나게 하기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하나의 거룩하고 건전한 생각이다.

이 본문은 연옥이란 말을 사용하거나 연옥교리를 직접 가르치고 있지는 않다. 그것은 죽은 자를 위한 희생제사,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소망에 대해 언급하고 우상 숭배 죄로 죽은 군인조차도 구원받을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연옥교리의 근거로 자주 인용되는 본문은 마태복음 12장 32절이다.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사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천주교는 이 본문이 성령을 거역하는 죄를 제외한, 어떤 죄는 오는 세상에서 용서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연옥개념은 성경이나 기독교 고유의 사상이 아니라 그것은 이교사상의 영향이 고대와 중세교회에 들어온 것으로 이해된다. 연옥개념은 사람이 죽으면 불로 정결함을 받는다는 고대 인도와 페르시아 사상에서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이집트와 헬라인들 역시 이런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유대교 랍비들은 이러한 사상의 영향으로 자녀들이 속죄제를 드림으로 죽은 부모의 수난을 경감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연옥의 고통이 헌금, 신부의 기도, 미사로 단축될 수 있으며, 그것을 생전에 준비할 수도 사후에 친척들이 할 수도 있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교황이 연옥의 관할권을 가지고 있어 그 고통을 사면, 경감 또는 종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연옥교리는 때로 신부(神父)의 금광이라고 불리 울 만큼 로마교회 수입의 원천이 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 시대에 이르러는 연보 궤에 돈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연옥의 영혼이 천국으로 옮겨진다고 주장할 정도로, 연옥교리와 면죄부 판매는 로마교회와 교황권 부패의 상징과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다.
     개신교회는 연옥설을 반대하고 이를 "로마주의자들의 조작물" 또는 마귀가 만들어 낸 속임수로 간주했다.  연옥교리에 반대하는 개신교의 입장을 정리하면 몇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연옥교리는 성서적 근거가 없다.  그것의 주 근거로 제시된 것은 마카비 후서 12장 43-45절이다.  그러나 마카비서는 정경이 아니라 외경(Apocrypha)이다.  따라서 개신교회는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마카비서 본문 자체도 연옥교리를 말하고 있지 않으며 우상을 섬긴 죄로 죽은 병사의 구원 가능성을 암시하고 잇을 뿐이다.   또한 마태복음 12장 32절 역시 성서적 근거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죄가 내세에서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 연옥교리는 성서적 구원론과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행위에 의한 구원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는 연옥의 불과 고통에 의해 정화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된다(요일1:7).  의롭게 되는 것은 행위 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갈2:16).  연옥 개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에 의한 죄의 완전한 사유라는 복음진리와 모순된다.
    셋째, 연옥교리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목회적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니라 교황이 연옥에 대한 관할권을 가진다는 주장은 교황권을 강화하고 교인을 지배하려는 의도와 목적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영혼수면설
    중간상태와 관련하여 논란이 되는 또 다른 문제는 영혼수면에 관한 것이다. 중간상태의 인간영혼은 의식이 있는가, 아니면 무의식 상태에 있는가?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가, 아니면 긴 수면 속에 있는가?  전통신학은 죽음 이 후에도 인간의 영혼은 의식적, 인격적 존재로 존속한다고 가르치는데 반해, 죽음으로부터 부활에 이르는 기간 동안 영혼은 무의식적 수면상태에 있다고 주장하는 입장이 영혼수면설이다. 영혼수면설에 따르면, "죽은 자들의 영혼은 지식, 의식 혹은 활동이 없는 침묵의 세계인 무덤에서 잠자고 있다."  
    영혼 수면설이 성서적 근거로 삼고 있는 것은 몇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성서가 죽음을 잠이라는 비유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께서 회당장 아이로의 딸의 죽음에 대해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마9:24)고 하신 것이나 누가가 스데반의 죽음을 잠으로 묘사한 것(행7:60), 또는  바울이 다윗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었다"(행13:36)고 말한 것 등(요11:11, 고전16:51)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 4장 13-14절에서 죽음 후의 영혼이 잠자는 상태에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영혼수면설은 이러한 본문에 대한 문자적 해석에 근거하여 죽음을 영혼의 잠으로 간주한다.

    둘째, 성서는 죽은 자에게는 의식이 없음을 암시한다.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시6:5).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시115:17).

 

 셋째, 성서는 사람의 운명이 마지막 심판에 의해 결정되며 그것이 어떤 에게는 놀라운 일이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  또한 바울이 "우리가 담대히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후5:8)고 한 것은 신자는 죽음 속에서 눈을 감은 후 몇 천년이 지나 의식을 되찾는 순간 주와 함께 있을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안식교와 여호와의 증인은 현대에 영혼수면설을 가장 분명하게 주장하는 집단이다. 그들은 그것을 그들의 주요 교리 가운데 하나로 간주하고 있다. 안식교는 "죽은 사람은 무의식이며, 모든 사람은 동일하게 죽음과 부활 사이에 무덤에 머물러 있게 된다"고 믿고 있다.  이것은 엘렌 화이트(Ellen G. White)의 초기 사상과 저술에서 발견된다.  화이트는 영혼의 불멸에 관하여 어머니와 대화를 나눈 후 이 견해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 새롭고 아름다운 신앙이 나에게 왜 영감을 받은 저자들이 육체의 부활을 그렇게 많이 강조했는가를 가르쳐주었다. 그것은 전 존재가 무덤에서 잠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제 그 문제에 대한 우리의 이전 입장의 오류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한편, 럿셀(Charles Taze Russell)이 창설한 여호와의 증인은 안식교와 유사한 중간상태에 관한 교리를 가지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의 내세관은 영혼불멸과 지옥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들은 성경 어디서도 인간영혼이 불멸한다고 가르친 곳은 없다고 믿는다.  인간의 영혼은 단순히 육체를 살게 하는 생명력 또는 원리로 보고, 그것은 육체의 죽음과 더불어 소멸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죽음을 잠으로 간주하고 죽은 자들의 영혼은 잠자다가 마지막 심판 때에 하나님에 의해 영적 존재로 다시 창조되어 생명을 부여받는다고 주장한다.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새로운 창조를 의미한다.  천년왕국 동안 악인들은 두 번째 기회를 갖게되는데 처음 백년 동안 개선의 표시를 보이지 못하면 그들은 멸망당하고 만다.  그 기간 동안 개선된 삶의 증거를 보이면 그들의 시련은 계속되지만, 계속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은 멸망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여호와의 증인은 영원한 형벌의 장소로서 지옥의 존재를 부정한다. 지옥의 존재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지옥은 항상 불이 붙어있는 뜨거운 곳도 끝 없는 고통의 장소도 아니다.  죽은 자는 생명도 의식도 없기 때문에 고통을 받을 수 없다.  따라서 지옥으로 번역된 헬라어 '게헨나'는 예루살렘 성밖에 있는 힌놈의 골짜기를 의미 하며 통상적인 무덤을 상징한다고 본다.
    기독교 정통신학은 영혼수면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인간은 죽은 후에도 의식을 가진 존재로 존속한다는 것이 교회의 전통적 교훈이었다.  영혼수면의 개념 역시 비 성서적이므로 거부되어야 한다.
    첫째, 그것은 성서적 근거가 없다.  죽음을 잠으로 언급한 성경본문들은 죽은 자들의 부활 이전의 상태를 묘사한 것이 아니다.  단지 생명의 중단을 비유로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영혼수면설은 잠이란 표현을 오해하거나 확대 해석했다.  
    둘째,  인간은 죽음과 동시에 의식이 없는 수면상태에 들어가거나 영혼이 소멸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영혼불멸과 중간기의 인간영혼은 의식과 인격을 지닌 존재로 존속한다는 성서의 교훈과 모순된다.  
    셋째, 죽음 후 악인의 영혼 역시 안식을 누린다고 주장하는 것은 신자들은 죽음과 동시에 축복을 누리지만, 불신자들은 고통과 형벌을 받게된다는 성서진리와 맞지 않는다.  

   요약:
    중간상태는 인간이 죽음과 부활의 중간에 경험하는 영적 존재의 상태를 말한다.  신구약 성서는 중간상태에 대해 많은 언급을 하고 있지는 않으나, 그것이 존재한 다는 것과 인간의 영혼은 의식과 인격을 가진 존재로 존속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신자들은  죽음과 동시에 축복을 누릴 장소로 가게되지만, 불신자들은 고통과 형벌을 받을 비참한 장소로 가게된다.
    개신교회가 중간상태는 존재하지만, 중간장소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반면, 로마 가톨릭교회는 중간장소로서 연옥의 존재를 강조한다. 전통신학은 영혼의 불멸, 즉 영혼이 사후에도 의식을 지닌 상태로 존속한다고 가르치는 반면, 재 세례파, 안식교,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집단에서는 이를 부정하고 영혼 수면설을 주장한다.


III. 사후에도 복음을 믿을 기회가 있는가?

 

 불신자는 사후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는가, 아니면 전혀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없는가? 악인이나 불신자의 사후 상태는 많은 논란과 혼란이 일어나는 문제다. 이에 대한 기독교적 논의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된다. 하나는 사후 불신자의 상태를 확정적인 것으로 보고 구원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개신교 전통교회의 입장이다. 악인의 영혼은 죽으면 지옥에 떨어져 고통 속에서 대 심판을 기다리며, 지옥을 빠져 나올 수 있는 길은 없다.
    다른 하나는 불신자의 상태를 확정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구원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로마 가톨릭교회, 일부 종파 및 학자들의 입장이다. 전자는 부자와 나사로 비유(눅 16:19-31)를, 그리고 후자는 그리스도의 음부 전도(벧전 3:19)를 성서적 근거로 간주한다.

1. 부자와 나사로
    사후 불신자의 영혼은 영원한 멸망의 세계, 즉 지옥으로 들어간다. 예수께서ꡒ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
가라ꡓ(마25:41).ꡒ 너희가 만일 내가 그 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 죽으리라ꡓ(요 : 24). 악한 자의 최후 상태는 영원한 벌(마25:46), 고난(계14:10-11), 무저갱 (계9:1-2,11), 하나님의 진노(롬2:5), 둘째 사망(계21:8) 등으로 묘사되고 있다.
    성경은 인간의 운명은 이 세상 행적에 의해 결정되며, 중간상태는 대 심판에 어떤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일관되게 말하고 있다(마7:22-23, 10:32-33, 25:34-46, 눅12:47-48, 고후5:9-10, 갈6:7-8, 살후1:8, 히9:27).  
    성경은 사후 구원의 기회에 관하여 결코 말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불신자의 상태는 확정적인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 대표적 본문이 누가복음16:19-21의 부자와 나사로 비유다. 부자는 음부 고통의 완화를 간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낙원과 음부는 서로 교류할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ꡒ너희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이 끼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 느니라.ꡓ이는 불신자의 상태는 영원히 변경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2. 불신자의 사후 구원
    불신자의 사후 상태를 확정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성서적 교훈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부정하고 사후 구원 가능성을 주장하는 이론이 기독교 역사에서 끊임없이 일어났다. 불신자의 사후 구원 가능성을 주장하는 견해들은 그리스도가ꡒ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ꡓ하신 것(벧전3: 18 -20)을 성서적 근거로 한다는 것과 그것을 하나 같이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공통적 특징이다. 그리스도가 그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기간에 지옥의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그들을 구원했다는 것이 그들의 해석이다.

3. 그리스도의 음부 전도
    불신자의 사후 구원 가능성 여부는 그리스도의 음부 전도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타당성 여부가 판가름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베드로 전서 3장 18절은 흔히 성경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 중 하나로 취급될 만큼, 여러 가지 다른 뜻으로 해석되어 왔으며, 그로부터 많은 환상적 이론들이 생겨났다. 종교개혁자 말틴 루터가 그 구절이 신약성경 가운데서 가장 모호하다는 것과 자신도 그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한다고 고백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따라서 불신자의 구원 문제에 대한 해답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음부전파에 대한 해석사적 검토가 필요하다.
    그리스도가 옥에서 전파했다는 구절에 대한 해석은 몇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기간에 그의 활동이다. 이 해석에 따르면, 그 기간에 그는 지옥에 내려가서 노아의 홍수로 멸망당한 영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이것은 본문에 대한 문자적 해석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이 해석의 지지자들도 그 전파한 내용과 목적 및 대상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어떤 이는 모든 죽은 사람에게 다시 한번 회개할 수 있는 제2의 기회를 제공한 것으로, 다른 이는 구약 성도의 영혼에게 옥으로부터의 석방을 전파한 것으로, 또 일부는 악인의 영혼에게 그들의 현재 운명의 정당성을 선포한 것 등으로 이해했다.
    둘째, 그것은 성육신 이전 그리스도의 활동이다. 선재하는 그리스도의 영이 노아를 통해 당시 불신자들에게 전도하였으나, 그들은 끝내 그것을 거부하고 지금도 지옥에 있다. 이 것은 본문에 대한 영적 해석에 근거한 것이다.
    셋째, 그것은 부활 후 그리스도의 활동이다. 어떤 이는 그리스도가 부활 후 타락한 천사들에게 그의 승리와 그들의 운명을 선포한 것으로, 다른 는 오순절 이후 성령께서 사도들을 통해 불신 유대인들에게 전도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리스도가 옥에서 전파했다는 구절은 난해구 중 하나로 고대부터 수많은 해석상의 논란이 일어났다. 그리스도께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신 때는 언제인가? 성육신 전 노아 때, 죽으신 후 부활 전, 아니면 부활 후인가? 누구에게 전파했는가? 인간의 영, 타락한 천사, 아니면 양자 모두인가? 무엇을 전파했는가? 구원의 복음을 전도한 것인가, 아니면 정죄의 심판을 선포한 것인가?

    개신교 정통교회는 대체로 노아를 통한 영적 전파설과 죽음과 부활 사이 기간의 전도설 중 하나를 가르친다. 후자는 외견상 자연스러운 해석이며 베드로전서 4장 6절의 죽은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구절과 조화가 되고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기회를 준다는 합리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죽은 자가 어떻게 구원받는가가 불확실하며, 결국 연옥설로 연결된다는 것과 모든 불신자에 대한 전파가 아닌, 일시적이며 일회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전자의 영적 해석이 더 적절한 것으로 간주된다. 선재하는 그리스도의 영이 노아를 통해 그 시대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전파하고 회개를 촉구했다. 그것을 거부했던 사람이 지금도 지옥의ꡒ옥에 있는 영들ꡓ이다.
    그리스도가 옥에서 전파했다는 구절은 사후 회개 가능성이나 구원 기회에 대해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구원에 대한 전파가 아니라 심판의 선고와 불 신앙에 대한 경고로 이해된다. 그럼에도 이 구절에 근거하여 불신자의 사후 구원을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인도주의적 발상에서 시작된 것이며, 성경 전체 교리와 일치하지 않는다. 설사 그 구절이 그리스도가 음부에 가서 전도한 것으로 간주한다 해도,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 이전 사람들에게 한정되는 것이다.
    예수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 불신자의 사후 상태는 영원히 변경될 수 없다는 것을 교훈했다. 생전에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만 사후에 구원받을 수 있으며, 죽은 후에는 회개나 구원의 기회가 전혀 없다는 것이 성서적 신앙이다.

결    론

   종말은 신자들에게 두렵고 무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복된 소망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현 역사의 종말과 더불어 완전히 실현되기 때문이다. 반면, 불신자에게 종말은 무섭고 두려운 것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이 임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종말론이 갖는 진정한 의미는 휴거나 지구 최후의 날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천국 복음을 선포한 때부터 이미 이 세상에는 종말이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는 것에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천상적이면서도 지상적이고, 현재적 이면서도 미래적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내면의 영적 경험이다.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  하나님의 나라는 신자 개개인의 마음이나 영혼 안에서 경험되어야 할 현실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을 내면에서 경험하는 것이다. 롬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요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한편,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의 소망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 땅의 삶 너머에 있는 더 궁극적이고 완전한 것을 지시해주는 지침이었다.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이미와 아직 사이의 종말론적 긴장이 필요하다. 기독교의 종말론은 다가올 미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늘의 삶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오늘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랑을 실천하고 믿음의 열매를 어떻게 맺었느냐가 중요하다.  하나님의 나라는 기다리고 준비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따라 산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https://cafe.daum.net/kmc4755/AT6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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