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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이름 ‘여호와’에 관한 연구

by 【고동엽】 2022. 4. 19.
- 로고스신학연구원 보고서 -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에 관한 연구

권 우 강1)


Ⅰ. 서론


1. 문제 제기


수년전 한국 교계는 보혁 갈등으로 인해 심한 상처를 입은 적이 있다. 그것은 일부 진보교단들2)이 보수교단들을 제외한 채, 성서공회와 손을 잡고 <표준새번역성경>3) 을 발간하여 배포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보수교단들은 즉각 반발하였고, ‘성경공회’4)를 발족하여 정면대결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서 하나의 성경과 찬송가로 통일되었던 한국 교회가 두 종류의 성경으로 분열될 지경에 이르게 되자 다급해진 성서공회가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하여  <새성경>을 전량 회수하고 폐기처분 함으로서 겨우 일단락 되었다.
왜 수십년의 산고 끝에 나온 <새성경>이 환영은 고사하고 장벽에 부딪혀 폐기처분 되어야 했는가?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결정적으로는 ‘여호와’ 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모조리 사라졌다는 것 때문이었다.
기독교가 전래된지 100여년동안 변함없이 한국강단에서 불리어지던 유일신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가 사라지고 일반적인 용어인 ‘주(主)’로 바뀌어진 것에 대해 보수계는 경악을 금치 못했고,5) 이로 말미암을 성도들의 혼란과 신학적 재정립의 문제가 대두되자 일제히 공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해여 <새성경>의 번역진들은 “<헬라어 70인역(Septuagint)>6)을 원문으로 삼아 ‘퀴리오스(κυριος)’를  ‘주’로 번역하여 원문에 충실하였으니 전혀 하자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새성경>이 문제가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번역의 오류 때문이 아니라 <헬라어 70인역>7)을 원문으로 삼은 것에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70인역>은 그것은 히브리어 필사본이 아니라 헬라어 번역본이기 때문에 원문으로는 쓰기에는 결함 투성이이다. 이 성경은 <히브리어 성경>에 비해서 오역이 많고, ‘여호와’가 전부 ‘퀴리오스’로 의역되는 바람에 의미가 완전히 변질되어서 제아무리 번역에 충실했다 할지라도 원문 자체의 결함 때문에 근본적으로 잘못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새성경>의 내용을 비난하면서도 정작 <70인역>을 원문으로 삼은 것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결국 과녁도 모르고 화살을 쏘아댄 꼴이 되어 논리적으로나 학적으로 뒷받침하지 못했기 때문에 도리어 저들에게 무식하다는 핀잔을 들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이 계속 물고 늘어진 부분은 ‘여호와’를 ‘주’로 바꾼 것에 대해서였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단어의 변질이 아니라 의미의 변질이다. 만약에  ‘여호와’가 무슨 뜻을 지니고 있는지를 모른다면 설령 그 단어가 조금 바뀌어진들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단어란 어차피 인간 상호간의 약속부호로서 시대에 따라 변천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서로 의미만 정확히 전달된다면 ‘홍길동’이라고 해도 좋고 ‘주인님’이라고 해도 상관없는 것이다.
그래서 성서공회는 “여호와를 ‘주’로 바꾼 것이 잘못됐다면, 당장 현재 쓰고 있는 개역성경의 신약전서와 각종 영어성경과 다른나라 성경들을 모두 폐기 처분하라”고 다그쳤다. 그것은 현재 쓰고있는 <개역신약성경>과 대부분의 영어성경들이 모두 ‘주(LORD)’로 표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호와’란 단어의 중요성”을 모른채, 단어만 바꾸었다고 따지는 것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고, 자칫하면 도리어 저들에게 설득당하고 봉변 당할 일이 되는 것이다. 


2. 논의 목적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성경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인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가 전통신학에서는 그다지 비중있게 다뤄지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이름일 뿐이고, 그 의미도 “스스로 있는 자”로 쉽게 이해하고 넘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호와에 관한 책이 별로 없고, 그 분야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지 못한 형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여호와’로 알려주시고, 성경 여러 곳을 통하여 “이러 이러함으로 나는 여호와라”, “내가 여호와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는 식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여호와’는 단순한 이름의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시는 중요한 속성이 함유된 표호(表號)이다.
그래서 논자는 이 연구를 통하여 단순히 하나님의 이름 하나를 알아내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구체적으로 증거하고자 한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여호와’의 이름을 통한 “하나님 계시의 원리”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맥이요, 성경을 풀어가는 핵심 열쇠임을 증거하려고 한다. 마치 실 끝을 찾으면 얽힌 실타래가 술술 풀려지듯이, 하나님의 표호인 “여호와의 의미”를 제대로 확인하면 틀림없이 성경 66권 전체가 하나의 일관된 논리와 통일성 있는 구조로 되어있음을 확인하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를 섭리해 가시는 분이심을 확인하게 되어 하나님을 알고 믿고 따르며 섬길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바이다. 


Ⅱ.  본론


1. ‘여호와’의 일반적인 개념


광주개혁신학교 교장이신 정규오 박사는 <새성경>의 번역진들을 향하여 “켈러사전에 의하면 구약에 ‘여호와’ 혹은 ‘야훼’의 이름은 6,823번이 나오고, 하나님의 이름은 2,550번이 나오는데 6,823번이나 나오는 ‘여호와’의 이름을 ‘주’로 바꾸는 까닭이 무엇인가?” 그리고 “고대 이방신들도 κυριος(주)로 부름(애굽, 바벨론, 헬라, 로마, 수리아 등)”8) 이라고 지적하며 ‘주’로 바꾼 것을 종교다원주의(多元主義)9)적 발상이라고 공격하였다.
이에 대해 성서공회는 “그러면 어떻게 번역하란 말인가? 성경을 원문에 따라서 그대로 번역한 것에도 문제가 있단 말인가? 창세기 1:1에는 원문에 ‘엘로힘’이라고 되어 있으니 ‘하나님’이라고 번역하였고, 2:4에는 원문에 ‘아도나이 엘로힘’으로 되어 있으니 ‘주 하나님’으로 번역했고, 6:5에는 ‘아도나이’라고 되어 있으니 ‘주’라고 번역했는데, 그러면 원문을 이탈하여 어떻게 달리 번역하란 말인가?”10) 라고 하며 반박하였다.
그리고 ‘여호와’를 ‘주’로 바꾸어서 신관이 변했다는데 대해서는 “한마디로 무지의 소치가 아니라면 억지일 뿐이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읽혀지고 있는 여러 언어 성경 중에서 ‘여호와’가 나오는 성경은 ‘여호와의 증인’의 성경 외에는 없다. 현재로서는 개역성경만이 지구상에서 마지막으로 ‘여호와’를 쓰고 있다. 그렇다고 전세계의 기독교가 쓰고 있는 모든 성경을 놓고서, ‘신관이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가 한 세기 동안 써온 개역성경도, 신약에서는 ‘여호와’를 쓰지 않고 ‘주’를 쓴다. 그렇다면 우리의 「개역 신약전서」가 불온한 성경이란 말인가? 예수께서도 구약을 인용하여 말씀하실 때는 의례히 ‘주’라고 했으며, ‘여호와’란 이름을 알지도 못하셨다”11) 라고 반박하면서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을 한마디로 일축하고, 전부 무식자로 취급해 버렸다. 뿐만아니라 예수께서도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고 단정해 버렸다. 


1) “'스스로 있는 자'”이다?


대부분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쉽게 ‘여호와’라고 답변한다. 그리고 ‘여호와’가 무슨 뜻이냐?고 물으면 “스스로 있는 자”라고 답변한다. 이에 대한 성경적 근거로는 출3:13-15을 제시하는데, 본문만 보면 틀림없이  “하나님의 이름 = 여호와 = 스스로 있는자”라는 도식으로 이해하게끔 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원전부터 스스로 자존하신 분이시고 이름은 ‘여호와’이시다” 라고 이해하는 수준에서 그치고 더 이상 의문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문장의 앞 뒤를 연결해서 자세히 살펴보면 본문은 단순히 하나님의 이름과 존재 상태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너희에게 보내신 이 = 조상의 하나님(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약속하신 하나님) = 여호와 = 영원한 이름 = 대대로 기억할 표호” 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여호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영원히 기억될 표호로서 “언약하시고 언약대로 이루시는 자”가 되시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3-2)항에서 더 확인해 보기로 한다. 


2)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시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봉사하시는 분으로 이해하고 있다. 왜 그럴까? 실례로 인간의 감성에 호소하는 복음성가 중에서 여호와의 이름과 관계되는 곡 「그는 여호와 전능의 하나님」의 가사를 소개하면서 확인해 보고자 한다.    
그는 여호와 창조의 하나님  그는 여호와 전능의 하나님...,  지존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 살롬 평강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영원한 하나님...,  여호와 이레 그는 나의 공급자  구원의 하나님 구주의 하나님...,  그는 여호와 치료의 하나님..., 12)


여기에 등장하는 ‘여호와’는 한결같이 인간을 위해 봉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서 여호와와 함께 복합명사로 쓰여진 단어가 몇 곳 나오는데 모두 인간을 위한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3) 하나님의 이름은 수 없이 많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가리켜 여러 이름으로 부른다. 그래서 크게는 ‘엘’, ‘여호와’, ‘아도나이’로 부르고, 이 셋이 서로 복합되어 엘로힘 여호와, 아도나이 여호와 등으로 불리어진다. 그리고 각각 세분하여 엘로힘, 엘벧엘, 엘로헤이, 엘엘룐, 엘샤다이, 엘로힘 체바오트 등등 30여개의 이름들이 있고, 그리고 ‘여호와’에서 파생된 이름만도 여호와 닛시, 여호와 삼마, 여호와 살롬, 여호와 치드케누, 여호와 로이 등등 40여개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러한 80여개의 단어들을 전부 하나님의 이름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단어들은 대부분 보통명사나 서술명사이고 이름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는 오직 하나 ‘여호와’ 뿐이다. 13)
그러므로 하나님은 영원세계에서 홀로 자존하신 ‘스스로 있는 자’이시지만 친히 인간들에게 자기를 계시하실 목적으로 당신을 온전히 함유하여 이름하신 표호(表號)는 오직 하나이신 ‘여호와’ 뿐이시다. 따라서 ‘여호와’에다가 보통명사나 서술명사를 덧붙여서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을 더 자세히 구체적으로 드러내시기 위해서이다.
예를 들면, 늙은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겠다”라고 약속하시더니 100세에 이삭을 주시고는 또 제물로 바치게 하신다. 아브라함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없는데서 있게하신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도 살리실 것을 믿고 제단에 바치려하자 하나님이 미리 준비하신 수양으로 제물을 대신해 주신다. 그제사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미리 다 준비하시고 약속을 지키시는 여호와”이심을 확실히 깨닫고 그 하나님을 가리켜 「여호와 이레」 즉, “여호와께서 미리 다 준비하셨다”라고 찬양하였다. 따라서 여호와 이레는 그 자체가 전부 이름이 아니라 “여호와”만 이름이고, “이레”는 하나님의 준비하시는 속성을 표현한 말이다. 그래서 원문은 여호와와 합성된 단어들이 40여곳 있지만 우리 성경에는 4곳만 음역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명사가 아니라 서술적으로 번역하여 하나님의 속성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ex) 원문에는 창14:22이 “여호와 엘 엘룐”으로 기록되었지만 개역성경에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로 번역되어 ‘여호와’만 고유명사이고, ‘엘’은 하나님, ‘엘룐’은 지극히 높으시다는 뜻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  


4) 성경의 지엽적인 문제이다?


구약성경을 필사하고 보관해 오던 소페림(서기관)들은 제3계명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컽지 말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서 ‘여호와’란 단어를 전부 ‘아도나이’나 ‘엘로힘’으로 바꾸어 읽고 또 그렇게 변경하여 기록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어떻게 이름을 함부로 부르기는 두려워 하면서 그 이름을 함부로 고치는 것은 두려워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어쨋든 ‘여호와’란 단어는 인간들의 무지로 말미암아 “아도나이, 퀴리오스, LORD, 주님” 등으로 마구 번역되어 하나님의 수많은 이름들 중의 하나로 전락되었고, 마침내 근본적인 “여호와의 의미”가 그리 중요하지 않은 지엽적인 문제로 돌려지게 된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5) 이름은 곧 인격이다.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려면, 먼저 그의 자녀들이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부터 정확히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이 다양하고 그 이름들마다 각각 뜻이 다르다면 도대체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진리는 항상 단순하고 명쾌한 법이다. 답이 여럿이면 진짜를 가려낼 수 없듯이 하나님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도 여러가지 답이 필요한게 아니라 오직 하나 ‘여호와’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성경의 이름은 인격을 표현한다. 그것은 이름을 지을 때 이미 각각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도 정확히 알면 그분의 존재와 함께 속성을 알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이 밝히신 ‘여호와’가 사라지고 대신 ‘주’라는 대명사가 등장하게 되면 도대체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되면 결국 막연한 하나님을 믿을수 밖에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려면, 먼저 그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분명하게 깨우쳐 주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을 알지 못하는 미련한 인생들에게 언약하시고 언약대로 이루어 주셔서 ‘여호와’이심을 알게 하셨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언약하시고 언약대로 이루시는 신실하신 여호와이심을 깨달으면 그를 믿고,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양하게 되며, 경외하게 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


2. ‘여호와’ 이름의 역사


1) ‘'여호와'가 성경에서 사라진 배경


구약성경에 가장 많이 기록된 단어는 6,823회나 기록된 ‘여호와’이다. 그러나 기독교사 2000년 동안 “여호와에 관한 연구”는 거의 전무했다. 그 이유는 여호와란 단어가 성경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지난 2000년간 기독교의 성경에서는 불행하게도 ‘여호와’란 단어가 삭제되었다. 그러므로 이 단어에 대해 심도 깊게 연구되거나 중요한 의미로 부각되지 못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고, 심지어 이 단어의 사용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지는 경향까지 발생하였다. 그러나 세계 교회의 성경에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여호와’가 한국의 개역성경에 살아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어떻게 이러한 역사의 굴곡이 발생하게 되었는가? 역사에 대한 증언 몇 곳을 찾아보기로 한다.   
① “하나님의 이름 중 하나, 네 개의 자음(YHWH) 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것의 본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유대인은 제3계명을 엄숙하게 지켜 그 거룩한 이름을 경망되이 부르지 않기 위하여 BC 300년경에 이것을 전혀 발음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들이 이것을 읽어야 하는 때에는 ‘주님(Lord)’을 의미하는 ‘아도나이’로 읽었는데, 후대에 이에 대한 원래의 발음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70인역에서는 ‘아도나이’라는 이름이 그대로 채택되어 거기에서는 거룩한 이름이 ‘퀴리오스(κυριος)’ 즉 ‘주님’으로 번역되었다.”14)
② “기원전 3세기부터 번역되기 시작한 그리스어 칠십인역이 이 이름을 주(퀴리오스)라고 번역한 이래, 신약의 사도들이 신약성서를 기록할 때도 그 이름을 ‘주’(퀴리오스)라고 적었고, 제롬의 라틴어역 불가타가 이 이름을 ‘주’(도미누스)라고 하였다. 또한 루터의 독일어역도 이 이름을 ‘주’(헤르)라고 하였고, 대다수의 영어 성서가 이 이름을 ‘주’(로드)라고 해 왔으므로, 우리말   「개역」의 신약성서도 ‘주’라고 번역했다.”15)
③ “에스라 시대부터 예수 시대에 이르기까지 히브리어 성경을 복사하던 사람들을 서기관 곧 소페림이라고 불렀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들은 본문의 내용을 마음대로 바꾸기 시작하였다. (중략) 소페림은 여호와란 이름을 발음하는데 대한 미신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혀, 134군데를 아도나이(주님)로, 얼마의 경우는 엘로힘(하나님)으로 바꾸어 읽게 하였다.”16)
④ “히브리어에는 모음이 없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הוהי(요드.헤.와우.헤) 라고만 표기하였다. 이 어휘는 모음을 붙이지 않으면 발음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정확하게 어떤 음으로 읽었는지를 우리는 모른다. 그런데 구약이 현재의 형태로 쓰여졌을 때 유대의 종교 교사들은 하나님 개인의 이름은 말하기에도 너무 신성하다고 간주하였다. 그래서 이 이름이 나올 때에는 아도나이(י???) 곧 ‘나의 주(主)’ 라는 의미의 히브리 단어로 대체되었다.”17)
이상의 증언을 통해서, 우리는 구약성경이 말라기서로 완성된 후 하나님의 계시가 중단되고 진리가 혼탁할 때, 바리새파들이 등장해서 성경의 모든 “여호와”란 명칭을 “아도나이”로 부르게 하였고, 헬라어 70인역으로 번역될 때는 여호와가 고유명사로 기록된게 아니라 대명사인 아도나이를 헬라어로 번역하여 퀴리오스로 기록되었고, 그것이 영어로 ‘The LORD’로 표기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성경을 오해한 일부 바리새파 학자들이 십계명의 제3계에 기록된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말씀이 두려워서 함부로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여호와의 이름은 일년에 1차 대속죄일에만 대제사장이 10번씩 불러서 겨우 명맥을 유지할 뿐, 다른 사람은 아무도 부르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어 성경에는 6,823회나 기록되었지만 아무도 읽을 수 없었고, 70인역에는 ‘여호와’가 ‘퀴리오스’로 바뀌어서 마침내 라틴어와 영어 성경에도 모두 고유명사인 ‘여호와’란 가 사라진 것이다. 그리하여 2000년간이나 사람들의 입에서는 여호와가 사라지게 되었고, 아울러 여호와의 의미도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2) ‘여호와’가 성경에 되살아난 배경


그런데 어떻게 사라졌던 이름이 되살아 나서 한국의 <개역성경>에 실리게 되고 한국의 성도들에게 그대로 불리어지게 되었는가?
「기독교사전」에 의하면 “미국표준판(ASV)에서는 그 이름을 ‘여호와’라고 번역했다. 마소라학파가 모음부호를 히브리어 자음 부호에 추가할 때, 아도나이에 대한 모음을 그 히브리어 자음 본문에 삽입시켰고, 그래서 여호와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중략) ‘여호와’라는 이름은 특별히 자기 백성과 관계하시는 ‘언약의 하나님을 나타내며 성경에 6,823회 사용된 반면......”18)
워치타워협회의 책에서도 “변경시킨 곳들을 마소라가 밝혀내다. (중략) 이들은 이전 소페림들이 변경시킨 곳들을 찾아내서 히브리어 본문의 난외 혹은 끝에 기록해서 주(註)를 달았다. (중략) 마소라 학자들은 그들이 전달한 본문에는 아무 것도 결코 변경하는 일이 없었고,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곳에는 마소라에 난외주를 기입하였다.”19)
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본래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키는 자음 요드.헤.와우.헤(הוהי, YHWH) 네 글자가 있었지만 문자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바리새파의 두려움 때문에 이름을 부르지 못하여 아도나이(주)로 부르다가 그것이 마소라 학자들에 의해서 ‘הוהי’ 네 글자에다가 아도나이의 모음인   ‘oַoָ’을 붙어서 ‘ה?ה?(야훼,여호와)’로 부활된 것이다. 그래서 <예루살렘 바이블>에는 여호와로 기록되었고, 1901년판 <미국표준역본(ASV)>에도 그대로 음역되어 실렸으며,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 복음을 전파할 때 그대로 음역하여 <구역성경>에 실리게 되었고, 마침내 오늘날의 성경인 <개역성경>에도 그대로 실려서 우리에게까지 전수된 것이다. 20)
참고로 번역에는 의역(意譯)과 직역(直譯), 그리고 음역(音譯)이라는 것이 있는데, 문장의 흐름이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의역도 괜찮지만 의미의 변화 때문에 도저히 의역을 해서는 안되는 부분이 종종 있다. 그것이 바로 “아멘, 메시야, 여호와” 등 특수한 고유명사들인데, 유감스럽게도 우리 성경에는 아멘을 ‘진실로’(요3:5외)로 의역하였으며, 메시야를 “기름부음 받은 자”(단9:25외)로 의역하였다. 그리고 영어에서는 여호와를 "LORD=나의 주”로 의역하였는데, 이러한 것들은 철저히 음역을 해야만 본래의 의미가 살아나는데 의역을 하는 바람에 본래의 의미가 많이 퇴색한 것을 알 수 있다.


3.‘여호와’란 무슨 뜻인가?


1) 일반적 견해- '그는 되게 하신다'  또는 '스스로 있는 자' 이다. 


‘여호와’의 뜻을 알려면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지만 사실은 저들도 무슨 뜻인지는 모르고 다만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아는 정도이다. 그래서 저들의 책을 찾아 보았더니 “여호와(הוהי)는 ‘되다’를 뜻하는 동사 ‘하와’에서 유래한 말이며, ‘그는 되게 하신다’를 의미한다.”21) 고 말한다.
그리고 「기독교 사전」에는 “이 거룩한 이름은 ‘존재한다(to be)’라는 동사로부터 유래한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은 영원하시다(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I AM>)와 그는 절대적인 분, 즉 원인이 없으신 분이라”는 의미이다.22) 라고 말한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에 관한 책에서는 “주(LORD)라는 말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는 뜻인 여호와를 가리킨다. 이 말의 어원은 ‘되다(to become)’는 뜻의 하야(hayah)이다. 출3:14에서 하나님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THAT I AM)’고 말씀하셨을 때, 이 어원이 두 번 나왔다. 따라서 하나님은 유일하게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 즉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존재이시다. 하야라는 말에는 또한 하나님이 끊임없이 자신을 계시하시는 존재라는 사실도 함축되어 있다. (중략)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이름은 언제나 하나님께 적합한 이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과거에도 항상 존재하셨고, 미래에도 항상 존재하실 것이기 때문이다”23) 라고 증언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상의 증언을 통해서는 진정한 여호와의 의미를 찾는데 한계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2) 성경의 증거-“'언약하시고 언약대로 이루시는 자'”이다.


가장 강력한 해답은 사전이나 참고서에 있는게 아니라 역시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을 올바로 주해하기 위해서 출3:13-14까지를 보면,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로 되어 있어서 여기까지만 읽으면 틀림없이 하나님의 이름이 “스스로 있는 자”처럼 들린다. 하지만 성경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15∼18절에서, 스스로 있는자가 곧 여호와이시며, 여호와는 아브라함을 비롯한 열조들의 하나님으로서 그들(열조)에게 언약하신대로 이루셔서 여호와이심을 입증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삭의 하나님,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너는 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실로 너희를 권고하여 너희가 애굽에서 당한 일을 보았노라 내가 말하였거니와 내가 너희를 애굽의 고난 중에서 인도하여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족속 헷족속 아모리족속 브리스족속 히위족속 여부스족속의 땅으로 올라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면 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니 너는 그들의 장로들과 함께 애굽 왕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사흘길쯤 광야로 가기를 허락하소서 하라


위의 고딕체를 자세히 살펴보면 여호와는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대로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다 올라가게 하셔서 “약속하시고 약속대로 이루시는 여호와”이심을 확증케 해 주고 있다.
그리고 ‘여호와’가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라고 하신 말씀은 마치 표어가 짧은 단어로 이루어져 있지만 엄청난 의미를 담고 있듯이, 표호(表號)24)는 짧은 이름 속에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대표하는 엄청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여호와’는 단순한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전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모조리 총괄해서 대표로 부르는 말이다. 그래서 여호와를 알고 믿는다는 것은 단순한 이름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 즉 언약하시고 언약대로 이루시는 것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이고, 여호와의 뜻이 “언약대로 이루시는 자”라는 명료한 진리는 단순한 문자적 해석이나 성경의 어느 한 부분을 파서 드러난 결실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다 섭렵한 후에 비로소 나올 수 있는 결과적 이론이다. 그리고 ‘여호와’에 대해서는 구약성경에만도 6,823회나 기록되어 있어서 그 의미를 발췌해 내기에는 성경의 자료가 너무나 방대하다. 그러나 지면상 에스겔서에 기록된 곳 몇군데를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에스겔 6:7,10,13,14에는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일찌기 약속하신대로 다 이루셔서 여호와이심을 알게 하시겠다는 말씀이며, 17:24에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고 했으며, 24:14에는 “나 여호와가 말하였은즉 그 일이 이룰지라” 고 하였고, 24:24에는?이 일이 이루면 너희가 나를 주 여호와인줄 알리라?고 하였으며, 37:14에는?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모든 말씀으로 미루어서 “여호와는 언약하시고 언약대로 이루시는 자”가 틀림없는 것이다.
그리고 선지서에는 언제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또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라고 기록되어있는데, 이 말씀은 “내가 말하니 너희가 지키라”는 식의 계약적인 명령이 아니라 “여호와 즉 언약대로 이루시는 자가 말하였으니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정의 말씀이다. 그래서 에스겔은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할 때에 ...나를 그 하나님 여호와인줄 알리라”25)는 식으로 기록하였고,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여호와의 말이니라”26)는 식으로 기록하였으며,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홀연히 그 일을 행하여 이루었느니라”27)는 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이사야 48:11에는 “내가 나를 위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하셔서 하나님께서 언약하시고 언약대로 이루시는 이유가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즉 ‘여호와’의 이름을 걸고 이루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언약하시고 언약대로 이루시는 것은 ‘여호와’를 계시하시기 위함이며, 여호와를 계시하시는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 선포”를 위해서이다. 그리하여야 하나님의 존재가 확인되어 믿고 경외하게 되며,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서 찬양을 받으실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4.‘여호와’의 의미의 중요성


성경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서 그 말씀대로 이뤄지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래서 창세기1:3은 “하나님이 가라사대”라고 시작하고, 계시록 22:20에는 “아멘28)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로 끝을 맺는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그 말씀대로 이루시는 내용을 가르쳐서 하나님이 “언약대로 이루시는 자 = 여호와”이심을 계시한다.29) 그래서 여호와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역과 속성을 알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신학의 목표인 하나님의 존재 증명까지 확실히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수많은 신학자들과 성경교사들은 이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지난 2000년간 여호와의 의미를 “스스로 있는자”라는 좁은 의미로만 해석하여 성경 전체와는 별 상관없는 것으로 이해하고 지나쳤는가? 그것은 성경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면서도 성경 66권을 일관된 논리로 연결된 통일성 있는 말씀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파편적으로 나누어 분석하고 구분하여 해석하였기 때문에 성경 중 어느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지만, 다른 성경은 언약과는 상관없는 생활의 지혜서로 이해하고, 또 다른 성경은 윤리적 도덕 수준으로 각각 이해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언약하시고 언약대로 이루시는 자”란 의미는 성경의 어느 한 부분에서 발췌한 진리가 아니라 성경 전체를 통하여 내린 총체적 결론이다. 그래서 이 이론체계로 언약과 성취라는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으며, 성경 전체를 거시적인 안목으로 한꺼번에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Ⅲ. 결론


‘여호와’가 “언약대로 이루시는 자” 즉 “언약과 성취의 하나님”이심을 발견함으로 해서 얻게 된 소득은 참으로 엄청나다. 그것은 첫째, 성경 전체에 대한 윤곽을 한 눈에 잡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동안 사람들은 성경을 전부 토막적으로 이해하여 논리적 통일성이나 일관성을 생각지 않았다. 
두 번째는 성경이 정확하게 하나님을 계시해 준다는 점이다. 그동안 교사들은 너무나 많은 것을 어렵게 가르쳤다. 그래서 때로는 억지같은 말씀도 믿음으로 소화하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성경은 많은 것을 다양하게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하고 계시하려고 계시의 방편으로 언약하시고 성취하셔서 오늘도 살아 역사하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하게 하시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계를 말씀으로 여시고, 또 말씀으로 복을 언약해 주셨다. 그리고 언약대로 복의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그를 통하여 생육번성 시키시고, 땅을 정복하며, 통치하도록 섭리하신다. 그리고 미련한 인생들에게 이 사실을 깨우쳐 주시려고 모형적으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시고, 생육 번성시켜서 출애굽하고, 가나안 땅을 정복케 하시고, 약속대로 다윗 왕을 보내서 통치하게 하셨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약속대로 이루시는 여호와이심을 깨닫고 찬양하게 되었으며, 오늘날 영적 이스라엘인 우리까지도 언약성취섭리를 통하여 하나님을 확실히 깨달아 알고, 믿으며, 영광돌리는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인생의 본분과 목적에 부합된 삶을 살게 하시려고 깨닫게 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참으로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망령되이’란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의미보다는 언약하시고 언약대로 이루시는 여호와를 잊고 의식적으로만 이름 부르는 행위를 금하시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워 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호와’로 불러야 한다. 실제로 구약의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고 그 약속대로 이루어 달라고 여호와를 부르며 구하고 찾았다.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것처럼, 지난 2000년간 잊혀지고 사장되었던 ‘여호와’가 다시 살아나서 한국교회에 주어진 <개역성경>에 다시 등장하게 되었고, 또 그 의미까지 밝히 드러나게 되었으니 이것이 한국 교회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더욱이 우리에게 “여호와의 의미”를 깨닫게 해서 성경을 언약과 성취라는 금맥으로 쉽게 깨달을 수 있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만약에 이것을 깨닫지 못했다면 위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파편적으로 적용하고 윤리적인 삶을 살자고 오늘도 목청 돋구고 있을 것이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아무 것도 자랑할 것 없는 우리에게 어찌하여 이런 감격스런 은혜를 맛보고 뜨거움의 눈물을 흘리게 하시는지......, 다시 한번 하나님의 음성을 떠올린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30)


우리가 지혜롭고 힘이 세고 많이 배우고 숫자가 많아서 하나님이 택하신게 아니라 “다만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택하셨다”는 말씀 앞에 그저 감격의 눈물을 흘릴 따름이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https://cafe.daum.net/kmc4755/AT6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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