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강 엘리멜렉 가족의 이주(1:1-2)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사사 시대는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대단히 어둡고 혼란한 시대였습니다. 왜 사사 시대가 그토록 어둡고 황량하고 혼란했을까요? 성경에서 다음 구절들을 찾아보겠습니다.
삿 17:6,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삿 18:1,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단 지파는 이때에 거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지파중에서 이때까지 기업의 땅 분배함을 얻지 못하였음이라."
삿 21:25,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윗 구절들은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없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대단히 어둡고 혼란했던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룻기가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바로 그런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서 한 이상적인 임금을 미리 준비해두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상적인 임금이 누구겠습니까?
룻 4:21∼22,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 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 더라."
룻기의 기록 목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가 하나님께서 이상적인 임금, 다윗 왕을 예비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윗 왕의 탄생을 가르쳐주기 위한 것입니다.
룻기는 "사사 시대에"라는 말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사사 시대는 어둡고 혼란한 시대였습니다. 따라서 무엇인가 비극적이고도 아주 좋지 못한 일이 있을 것같은 예감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일제시대에," 또는 "6.25 동란시에"라고 하면 헐벗고 굶주린 인상이 먼저 떠오릅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사사 시대에"라고 하면 비극적이고 슬픈 일을 연상케 합니다. 안 그래도 시대적으로 어두운 시기였는데 거기에 더해서 "그 땅에 흉년이 들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더 비극이 심했겠습니까? 슬프고도 우울한 이야기로 룻기가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장소는 "유다 베들레헴에"라고 하였습니다. 베들레헴이란 말의 뜻은 "떡집," "떡방앗간"이라는 뜻입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6마일, 약 10킬로 정도 떨어진 곳으로 예수님이 탄생한 곳입니다. 이 베들레헴은 보리, 밀, 감람, 포도와 같은 농산물이 많이 나는 곡창지대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베들레헴으로 지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그냥 "베들레헴"이라고 하지 않고 거기다 유다를 붙여서 "유다 베들레헴"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수 19:10, "셋째로 스불론 자손을 위하여 그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그 기업의 경계는 사릿에 미치고."
이 성결 구절은 지금 스불론 지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그 아래에 있는 15절을 보겠습니다.
수 19:15, "또 갓닷과 나할랄과 시므론과 이달라와 베들레헴이 니."
유다 지파에 속해 있는 베들레헴도 있지만, 스불론 지파에 속한 베들레헴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같은 이름의 두 지역을 분간하기 위해서 오늘 본문에 "유다 베들레헴"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떡집이라고 불리는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떡집에 떡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었다는 기사가 종종 나옵니다. 예컨대 아브라함 때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흉년이 들었을 때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아브라함이 사라를 데리고 애굽으로 갔습니다.
창 12:10,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 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때에도 흉년이 들었습니다. 이삭은 블레셋 지방 그랄로 갔습니다.
창 26:1,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 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 게 이르렀더니."
이삭의 아들인 야곱 때에 또 흉년이 들었습니다. 야곱은 애굽으로 갔습니다. 흉년이 들었을 때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기거하던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본문에도 흉년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저들도 어디론가 떠나야 될 것 같은 예감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룻 1:1,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 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유다 베들레헴의 한 사람이 흉년을 견디지 못하고 가족과 함께 베들레헴을 떠났습니다. 베들레헴을 떠난 그 사람의 가족으로는 아내와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두 아들"이 주는 어감은 어떻습니까? 두 아들'씩이나'일까요? 두 아들'밖에'일까요? 아니면 적당한 것입니까? 이 말이 뜻하는 것은 두 아들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아들이 몇 명 있었습니까? 열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들 많은 것이 축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에는 자녀가 둘밖에 없습니다. 만약에 두 아들이 다 죽고 나면 가문을 이어나갈 아들이 없게 됩니다. 대가 완전히 끊어지게 됩니다.
이 사람이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어서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으로 갔습니다. 모압 지방은 이스라엘의 사해 동쪽에 있는 곡창 지대입니다. 그러나 이방 땅입니다. 이 모압의 선조는 롯입니다. 이 가족은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여행을 간 것이 아닙니다. 영주권을 얻어 거기에 살기 위해 이민을 떠난 것입니다. 고향에서는 살기가 어려워서 고향 땅, 친척, 친구들을 떠나서 외국 땅에 이민가는 처량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엘리멜렉의 이주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엘리멜렉은 현재 닥쳐온 흉년에 대해 그 어려움을 피해보겠다는 단순한 생각만을 했던 것같습니다. 그래서 그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나라이지만 모압을 선택했습니다. 우리도 단지 먹고 사는 일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육신의 일 때문에 보다 더 중요한 영의 일을 망각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 옛날 에서가 범한 실수를 한번 생각해봅니다. 에서는 배가 고픈 나머지 하나님이 주신 귀한 장자권을 소홀히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차자인 야곱이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육신의 일로 염려하는 우리들을 향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마 6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채워주시고 책임져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비록 어려운 일이 닥쳐와도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내 스스로 발버둥치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문제를 내놓고 도우심을 구해야겠습니다.
이와 같이 비극적인 내용으로 룻기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2절에서 그 가족의 이름을 한 사람씩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이 가정의 가장의 이름은 엘리멜렉입니다. 엘리멜렉의 뜻은 무엇입니까? "엘리"라는 것은 "나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입니다. "멜렉"은 "왕"이라는 뜻입니다. 즉 엘리멜렉은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왕으로 삼고 살아가는 백성 엘리멜렉인데 하나님께서 어디에 가셨는지 먹을 것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어찌 그러실 수가 있단 말인가?"라는 의구심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삼고 살아가는 백성이 먹을 것이 없어서 고향을 떠나야 하는 고달픈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다음은 아내의 이름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엘리멜렉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입니다. 나오미는 "즐겁다," "기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나오미가 처한 현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즐겁고 기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이름과는 정반대의 슬픈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아들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라."
이 이름의 뜻이 무엇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성씨를 보면 성마다 본이 있어서 김해 김씨라든지 경주 이씨라고 합니다. 우리 나라식으로 보면 이 엘리멜렉의 가족의 본이 에브랏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즉 야곱의 열두 아들의 자손들이 애굽에서 큰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날 때 장정이었던 사람들은 광야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다 죽었습니다. 단 두 사람만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두 사람이 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지파를 대표했고, 갈렙은 유다 지파를 대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갈렙의 부인 이름이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본문에 에브랏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에브랏이 갈렙의 부인 이름입니다. 성경에서 확인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대상 2:19, "아수바가 죽은 후에 갈렙이 또 에브랏에게 장가 들었더니."
에브랏은 누구의 아내라고 했습니까? 갈렙의 부인이었습니다.
대상 2:50, "갈렙의 자손 곧 에브라다의 맏아들 훌의 아들은 이러하니 기럇여아림의 아비 소발과."
대상 4:4, "그돌의 아비 브누엘과 후사의 아비 에셀이니 이는 다 베들레헴의 아비 에브라다의 맏아들 훌의 소생이며."
에브라다는 에브랏과 같은 말입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했던 갈렙의 부인 이름이 에브랏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에브랏 사람들이더라"고 한 것은 이 가족이 베들레헴 지방에서 대대로 살아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지방을 떠나야 하는 심정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임에도 불구하고 큰 흉년이 들어서 어쩔 수 없이 가족을 다 이끌고 유다 베들레헴 땅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이제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우거합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이런 생각이 들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들을 이렇게 버려두시는가?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가?" 엘리멜렉의 가족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이 계신 곳을 떠나 우상을 섬기고 있던 하나님 부재의 땅 모압으로 건너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그대로 내버려두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일의 뒤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이 흉년이 들어서 애굽에 가긴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서도 아브라함과 사라를 지켜주셨습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나올 때는 오히려 거부가 되어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또 이삭이 블레셋 그랄에 갔지만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복을 주셔서 나올 때는 오히려 거부가 되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이 애굽에 들어가서 4백년 동안 종살이를 했지만 거기서 큰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나올 때에는 4백년 동안 종살이 한 대가로 애굽 사람에게서 은금을 다 구해서 많은 것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마찬가지로 엘리멜렉과 그 가족이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어서 이방 땅인 모압으로 떠나야 했지만 하나님께서 저들을 잊어버리시거나 비참한 상태에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반드시 그 뒤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의 손길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에게 어려움이 있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내게 이런 어려움을 주시는가? 왜 나를 저버리시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잊어버리셨나?"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이것은 오히려 나를 더욱더 귀하게 사용하시고, 나를 통해서 큰 사역을 성취하시려고 하나님께서 나를 훈련시키시고 단련시키시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요셉은 억울하게 종살이를 했습니다.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습니다. 그것이 끝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요셉을 크게 쓰시기 위한 준비였습니다. 억울한 종살이, 억울한 옥살이는 하나님이 요셉을 위해 예비한 축복의 길이요, 징검다리였다는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룻기를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이 가정을 저버리신 것이 아니라는 것과, 그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을 이루어나가시는 것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 룻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저들의 가정을 축복해주신 놀라운 이야기를 훑어나가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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