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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첫 증인 막달라 마리아의 헌신! (막 16:1-11)
이젠 완연한 봄입니다. 서울에도 개나리꽃이 만개했습니다. 봄은 부활의 계절입니다. 얼어붙어 생명의 흔적이 사라졌던 산천에 파란 생명의 화사한 꽃들이 웃는 얼굴을 내미는 계절입니다.
그래서 봄은 우리들의 가슴속에 희망과 기쁨의 노래를 선물합니다. 죽음을 이긴 생명의 찬미입니다. /할/ 오늘은 우리 예수님이 사망 권세 이기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부활의 새 아침입니다. 이 아침에 부활의 주님을 찬양합시다! /아멘!/ ◀제목 소개!▶
주전 490년에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이 그리스를 침략을 했습니다. 페르시아 군은 승승장구하며 아테네를 향해 쳐들어 갔습니다. 결국 한 광야에서 아테네 군과 페르시아 군 사이에 대 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이 때 아테네는 나라의 존망이 걸린 이 전투에서 목숨을 걸고 싸워 크게 승리하여 나라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때 '페이디피데스'라는 아테네의 한 용사가 이 소식을 본국에 알리기 위해 약 40Km의 길을 달려가서 승전보를 전했습니다. 하지만 쉴 새 없이 달려오느라 탈진한 그는 승리의 소식만 전하고 죽었습니다.
이 전투가 벌어진 광야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마라톤입니다. 지금의 마라톤 경기는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생긴 것입니다.
여러분, 승전보를 전하기 위해 숨이 끊어지도록 달려간 용사의 심정이 이해가 되시지요? 이 승리의 소식을 아테네 시민들이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페이디피데스는 목숨을 내놓고 달려가서 이 승리의 소식을 전한 것입니다. 이런 승리의 소식을 헬라 사람들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유앙겔리온',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신앙적인 용어로 복음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전도하는 것을 복음을 전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원래 복음이라는 말은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 말이 어떨 때 많이 쓰였을까요?
가장 대표적으로 쓰인 것이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입니다. 세상에 승전보보다 더 좋은 소식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새 왕이 즉위할 때도 쓰였습니다. 새 왕이 즉위하면 나라가 더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됩니다. 우리도 박근혜 정부가 들어섬으로 기대가 부풀어 있습니다. 그래서 새 왕이 즉위하는 것을 '좋은 소식'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복음에도 이렇게 새 왕이 즉위했다는 뜻과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자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왕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얼마나 좋은 소식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것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할/
사망 권세를 깨고 죽음에서 승리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키시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얼마나 좋은 소식입니까? 그래서 복음입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절기가 뭡니까? 성탄절과 부활절입니다. 왜 이것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신 부활은 그야말로 복음 중에 복음입니다. /할/
군대의 승리가 백성에게 복음이 되는 이유가 뭡니까? 군대의 승리는 그 나라 모든 백성의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승리가 우리에게 복음이 되는 것도 예수님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 15장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가 죽음에게 승리한 것입니다.
그런데 승리했다는 것은 싸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무엇과 싸우셨습니까? 죽음과 싸우셨습니다. 죽음의 무기가 무엇입니까? 죽음의 무기는 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은 죄라는 독침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사망의 세력, 사탄의 세력에게 승리하신 것입니다. 죄의 독침을 꺾어버린 것입니다. 우리의 대장이 이겼으니 우리가 이긴 것입니다. /할/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 부활이 내 부활입니다. /믿/아멘!/
①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후 부활하시기까지는 삼일간입니다. 시간으로는 금요일 오후 세 시에서 일요일 새벽까지로 보아서 대략 35시간 내외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고요히 무덤에 계신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 지상에서는 매우 분주한 시간이었습니다. 아마 그 날의 안식일보다 긴장이 감돌던 안식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무리들은 과연 예수가 살아날 것인가? 또 살아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긴장과 두려움 속에서 보낸 안식일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아침에 먼저 활동한 사람은 여자들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부활의 아침입니다. 그런데 그 아침 그 무덤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돌이 무덤에서 옮겨져 있습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돌은 무덤에 출입하는데 절대 방해물입니다. 그리고 군병들이 무덤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옮겨져 있습니다. 천사가 그 돌을 굴려 내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무덤에는 시체가 없습니다. 놀랍고도 놀라운 일입니다. 빈 무덤입니다. /할/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순서를 잠깐 추측해 보자!
⑴금요일 아침에 빌라도의 사형 선고가 떨어졌습니다.
⑵금요일 오전 9시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⑶오후 3시 운명하십니다.
⑷예수님의 옆구리에 창을 맞아 물과 피를 쏟으셨습니다(심장 파열의 증거).
⑸그 당시 부자인 아리마대 요셉이 무덤을 제공하고, 니고데모가 장사지냄.
⑹돌문(2톤)으로 무덤의 문을 막고, 로마 황제 인 봉을 침.
⑺3일간 로마 병정이 지킴(국권 발동).
⑻새벽에 큰 지진이 일어나고 하늘나라 천사들이 내려와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음. 형상이 번개같고 옷은 흰 눈같이 희었음(마28:2-3).
⑼수직하던 자들이 무서워 떨며 죽은 자 같이 되었음(마28:4).
⑽천사가 여인들에게 세 가지로 음성을 들려주었습니다.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세상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우리를 억압하고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삶의 현장에서 무서워 말라, 두려워 말라고 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할/ 예수 그리스도는 무덤에 계시지 않습니다. 살아 나셔서 하늘에 계시고 만 왕의 왕으로 우리의 경배를 받고 계십니다.
▶'가서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라' 부활의 소식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⑾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제자들에 알리려 갈 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여인들은 만나주심(마28:8-9).
⑿파수 군들은 성에 들어가 예수 부활 사실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림(마28:11).
⒀대제사장들은 장로들과 함께 고민에 빠져서 의논 결과 파수 군에게 돈을 많이 줘서 거짓보고를 하게 함(그의 제자들이 훔쳐갔다고 하는 도난 설)(마28:12-15).
또 일시 기절했을 뿐이며 장사를 한 후 정신이 되돌아와서 살아났다는 기절 설이 있고, 어두운 새벽길에 잘 못 찾아서 빈 무덤을 보고 주님이 부활한 것으로 오해했다는 무덤을 잘 못 찾았다는 설, 제자들이 너무 예수를 그리워하다가 환상을 보았다는 환상 설이 있지만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할/
②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빈 무덤의 종교입니다.
기독교의 구속 사에는 무덤이 없습니다. 아담의 무덤도 없고, 노아, 아브라함, 다윗의 무덤도 없습니다. 유대의 역사에서 가장 존경을 받았던 히스기야 왕의 무덤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나 바울이나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의 무덤도 큰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무덤의 요소는 시체입니다. 시체가 있어야만 무덤이 성립됩니다. 그러나 시체가 없는 빈 무덤은 무덤으로서 성립되지 않습니다.
⑴빈 무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만일 제자들이 숨겨 놓고 부활했다고 거짓말한다면 그 거짓말을 위하여 제자들이 순교하였겠습니까? 진리를 위하여 죽을 수는 있어도 거짓을 위하여 죽은 이는 없습니다. 잠시 동안은 속일 수 있어도 2,000년 동안 속일 수는 없습니다. 몇 명을 속일 수는 있어도 전체를 속일 수는 없습니다. 남은 속일 수가 있어도 자기는 속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석가모니'는 인도 능수 해안에 묻혀 있습니다. '마호멧'은 사우디 아라비아의 메카에 묻혀 있습니다. '공자'는 중국의 장평양에 묻혀 있습니다. 그들은 무덤에서 나오지 못하고 거기에서 썩었고 흙이 되었습니다.
중국 북경에 가면 천안문 광장 한 쪽에 모택동이의 미이라를 보려고 뱀처럼 길게 줄을 서 있는 장면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구 쏘련 모스크바 붉은 광장 한 쪽에는 레닌의 미이라 시신을 보려고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무덤은 빈 무덤입니다.
▶한 때 석가모니의 뼈가 발견되었다고 인도를 위시한 불교 국에서는 한동안 떠들썩했었습니다. 그 때 석가모니의 뼈들은 잘 진열되어 수백 만 인도사람들의 경의 속에 시가행진을 했다고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뼈가 지나갈 때 땅에 엎드려 절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한 선교사가 그의 친구에게 말하기를 '만약 예수의 무덤에서 그리스도의 뼈 하나라도 발견했다면 기독교는 산산 조작이 나고 말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 무덤은 빈 무덤입니다. 빈 무덤을 부활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의 빈 무덤을 자랑합니다. /할/
⑵빈 무덤은 승리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군중들이 이기는 것 같았습니다. 로마가 승리하는 것 같았습니다. 가룟 유다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마귀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모든 질서를 뒤집어 놓았습니다. 군중은 놀랐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자복하며 하루에 5천명씩 예수님을 믿으며 예수님에게로 돌아 왔습니다. 로마는 패하여 자기 나라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마귀는 사망 권세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예수 이름 앞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할/
⑶빈 무덤의 보상은 부활의 새 생명입니다.
사망은 죽고 영생이 문을 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믿는 자는 그 다음 열매로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입니다. /믿/ 그렇다면 어떻게 부활하는가?
요6:40절에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기독교는 영생 부활을 빼놓으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죽어서 장사되었던 몸이 그대로 부활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령한 몸으로, 영광의 몸으로 부활'합니다. 콩이나 옥수수 알갱이를 심으면 그것은 썩어 없어지고 그와 꼭 닮은 다른 알갱이 열매를 맺듯이 우리가 죽으면 요 모습, 요 나이 그대로 부활하는 것은 아닙니다.
빌3:21절에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이 몸이 그대로 부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장례식으로 매장을 해도 좋고 화장을 해도 좋습니다. /믿/
㈁썩지 않는 불후불멸(不朽不滅)의 몸으로 부활합니다. 고전15:42절에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부활의 몸은 늙지도 썩지도 않으며 영원히 죽지 않는 몸입니다. /할/
㈂태양과 같이 빛을 발하고 눈부시게 빛나는 몸으로 부활합니다. 마13:43절에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또 단12:3절에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부활의 몸은 그 영광이 각각 다릅니다. 고전15:41-42절에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즉 해와 달과 별들의 영광이 각각 다 다른 것같이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갔지만 순교한 바울이나 베드로가 누리는 영광과 십자가에 달려 죽을 때 간신히 구원받은 강도의 영광이 결코 같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냥 대충 대충 신앙생활 하는 자들과 열심을 품고 헌신하는 자들의 상급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상급도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이 적용됩니다. /믿/ 그러므로 많이 심는 참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미국의 한 때 유명한 설교자였고 목회자였던 '아이언 사이드' 박사가 어느 날 마을길을 지나가다가 항상 열려 있는 어떤 상점의 문이 닫혀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창문에는 커튼이 내려져 있었습니다. '이상하다 이 집에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자세히 봤더니 창문 밖에다 다음과 같이 써 놓았더랍니다. '내부 수리 중'
그 후 여러 날 동안 그 가게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내부 수리 중' 이라는 팻말만 붙어 있었습니다. 드디어 어느 날인가 가게문이 활짝 열려서 들어가 봤더니 가게 안이 얼마나 멋지게 장식이 되었는지 모든 것이 새로웠습니다. 들어가는 손님들마다 아주 기분 좋게 물건을 사서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아이언 사이드 박사는 깨달았다고 합니다. '아,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내부 수리중인 것과 같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할/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 몸이 주님의 몸과 같이 영화롭게 변화되는 부활의 날까지 내부 수리 중 팻말을 걸어 놓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멘!/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여러분, 빌리 그래함이 죽었다는 소식이 신문에 나거든 그 신문 기사를 믿지 마시오. 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주소를 옮긴 것뿐이오.'라고 말했습니다.
왜 죽음을 끝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또 다른 시작으로 받아들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던 실낙원의 저자 밀턴은 '죽음은 영원한 하나님나라 궁전의 문을 여는 열쇠다.'라고 말했습니다. /할/
⑷빈 무덤은 부활의 완성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의 완성이 바로 부활입니다. /아멘!/
⑸빈 무덤은 이제 우리에게 부활의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부활을 기뻐하고 축하하고 감사하고 부활의 주님께 경배하는 이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 안에 부활의 영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양심이 부활되어야 합니다. 양심은 하나님의 지성소입니다. 양심이 마비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윤리적, 도덕적인 부활이 일어나야 합니다. 세상이 온통 가치관의 상실로 어두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빛이 되고 소금이 되라'고 하십니다.
㈂심령의 부활이 일어나야 삽니다. 죽은 심령, 잠을 자고 침체된 심령이 영적인 부활(부흥)을 경험하여 풍성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성령님을 모셔들이고 의지해야 합니다. 기도로! 찬양으로! 말씀으로! 우리의 심령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축복의 부활이 일어나야 합니다. 불통이 형통으로! 가난이 부자로! /할/ 신통하면 영통하고, 영통하면 인통하고, 인통하면 물통합니다. /아멘!/
③부활 후 주님의 40일의 행적을 알아보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시면서 11번 제자들에게 오셨고 후에 스데반 집사와 핍박자 사울에게도 보이셨습니다.
⑴무덤 가에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오셨습니다(막16:9/요20:14-18).
⑵무덤에 갔던 여인들에게 오셨습니다(마28:8-10). 주일 새벽에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⑶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오셨습니다(눅24:13-35/막16:12-13). 제자 중 두 명이 예루살렘에서 25리 되는 엠마오로 가면서 일어난 체험인데 '이 일을 이야기하고 문의할 때' 예수님이 동행하며 자신에 대한 성경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⑷베드로에게 오셨습니다(눅24:34/고전15:5). 주님은 당신을 부인한 제자에게도 나타나셔서 그 좌절과 절망과 낙심과 후회 속에 있는 그를 다시 격려하고 일으켜 세웠습니다.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⑸도마를 제외한 열 제자에게 오셨습니다(막16:14/눅14:36-37). 주일저녁 방에 숨어있던 열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제자들 앞에 예수의 영(靈)이 나타난 줄 알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보아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나는 살과 뼈가 있다'고 하시고 제자들이 먹다 남은 생선을 받아서 잡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으로만 부활한 것이 아니라 육신과 함께 온전히 부활하신 것입니다. /할/
⑹도마를 포함한 열 한 제자에게 오셨습니다(요20:26-29). 한 주일 후에 도마와 함께 열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왜냐하면 한 주일 전에 도마는 예수님이 나타날 때 없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이 나타났다니까 비웃었습니다.
'참 정신 없는 소리하지 말라. 나는 예수님의 손에 내 손가락 넣어보고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고야 믿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후 한 주일이 지나서 도마가 열 제자와 함께 있을 때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의심 많은 도마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도마야 이리 오너라 네 손을 내어서 내 못 자국에 넣어 보아라 내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라 그리고 믿지 않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도마는 너무나 놀라고 감탄하고 탄복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는 그렇게 고백할 때 '본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이 있다'고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⑺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일곱 제자에게도 오셨습니다(요21:1-14). 갈릴리 호수에 이른 아침 나타나셨습니다. '날이 새어 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그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떡과 고기를 먹이시고 베드로를 다시 회복시켰습니다. 세 번 부인했기 때문에 세 번 예수님이 회복을 시켰습니다. '베드로야 이 모든 사람들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또 잠시 후에 '베드로야 이 모든 사람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마지막으로 '베드로야 이 모든 사람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부인한 만큼 세 번 그의 입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해서 상처 입은 베드로를 다시 회복시켜 수석제자로 복귀시켰습니다. /아멘!/
⑻갈릴리 산에서 열 한 제자에게 오셨습니다(마28:16-20/막16:15-18). 갈릴리 한 산 위에서 지상명령을 내리시면서 나타나셨습니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⑼500명의 성도들 알에 오셨습니다(고전15: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한 두 사람이 주님을 본 것이 아니라 500명이 동시에 보았으니 500명이 동시에 다 최면술에 걸렸다고 말할 수는 결코 없을 것입니다.
⑽야고보(알패오의 아들)에게도 오셨습니다(고전15: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⑾부활 후 40일 째 되는 날 감람산에서 500문도들이 보는 가운데 승천하시면서 마지막 모습을 보이셨습니다(막16:19-20/눅24:44-53/행1:1-11).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친히 보았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그들 옆에 서서 '갈릴리 사람들이 왜 하늘을 처다 보느냐? 하늘로 들리운 이 예수님 네가 본대로 오시리라'고 말한 것을 들었습니다.
⑿스데반이 순교할 때 하나님 우편에 주님이 앉아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스데반은 유대인들에게 끌려나가서 돌로 얻어맞고 죽을 때 예수님을 보셨습니다(행7:55-56). 스데반은 죽기 전에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예수님이 서서 친히 스데반의 영혼을 받아 주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⒀교회를 열렬히 대적하던 사울에게도 다메섹 도상에서 나타났습니다(행9). /할/
④부활의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부활의 주님은 그 당시 40일간 지상에 계시면서 13번이나 제자들에게 오셔서 만나주셨습니다. 요20:19절에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예수께서 오사'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찾아오신 것처럼,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 역사 하시는 예수님은 우리들도 찾아와 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야 하고 그 분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아멘!/
⑴'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부활의 주님의 제 일성입니다. 그 당시 제자들은 두렵고 떨렸습니다. 그 때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보고 요20:20절에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그들은 더 이상 슬픔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기쁨의 사람들로 바뀌어졌습니다. /할/
⑵'성령을 받으라!' 요20:22절에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두려움을 물리쳐 주신 후, 제자들이 담대할 수 있도록 영적으로 무장시키셨습니다. '성령을 받으라' 이 성령을 우리도 받아야 합니다. /아멘!/
⑤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어떤 영적인 변화가 일어났는가?(눅24:24-34)
⑴어두웠던 영안이 밝아졌습니다. 눅24:31절에 '저희 눈이 밝아져 그 인줄 알아보더니' 드디어 예수님이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바로 알고 믿는 것이 능력이고, 축복입니다.
⑵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눅24:32절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말씀을 들을 때 그들 심령이 뜨거워졌습니다. 이것은 헬라어에서 '현재분사 수동형'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만 뜨거워진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뜨거워져있다는 것입니다.
이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마다 용기가 생기고 힘이 생겼던 것입니다. '뜨거워졌다'라는 말은, '감동되었다'라는 말입니다. /할/
⑶내려가던 길을 돌이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눅24:33절에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엠마오로 내려가던 길을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사람,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만난 사람은 올라가게 되어있습니다. 신앙이 올라갑니다. 사랑이 올라갑니다. 능력이 올라갑니다. 소망이 올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하는 일들이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올라가게 됩니다. 신앙 인격이 올라가게 됩니다.
어떤 사람에게 이런 은혜가 임하는가? 마음의 문을 열고 여호와를 앙망하는 마음으로,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게 될 때,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심으로 새 힘을 얻게 됩니다. /믿/ 그래서 우리가 올라가고 또 올라가 차원 높은 신앙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⑷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한 일간지 기사 가운데 웃지 못 할 내용을 본 적이 있습니다. '로또 1등 당첨 후 행동요령'입니다. 가장 강조하고 있는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이순신 장군의 어록을 인용하여 '나의 당첨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단 잠적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심한 것은 '무조건 주변을 정리하라'는 것입니다. 사귀던 애인이 있으면 일단 헤어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인과도 이혼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이혼수속이 끝나고 난 후 당첨금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참 씁쓸한 이야기입니다. 정말 기쁜 소식을 함께 나눌 수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은 기쁜 소식을 함께 나눌 사람들이 있으십니까? 정말 깜짝 놀랄만한 소식이 있을 때 누구에게 제일 먼저 알리시겠습니까? 네 이웃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아멘!/
엠마오로 내려가든 두 제자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부활의 증인이 죄었습니다. 눅24:34절에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예루살렘에 올라가 보니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만난 일을 증거 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일생동안 부활하신 예수님을 힘차게 증거 하다가 죽음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들의 삶입니다.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소식을 접한 우리들도 그냥 있어서는 안됩니다. 나가서 전해야 합니다. /할/
⑥막달라 마리아의 헌신을 배워야 합니다(막16:1-11).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부활하셨을 때 제일 먼저 그 소식을 알리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놀랍게도 그 대상이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상식적으로 부활의 기쁜 소식을 맨 처음 어머니 마리아에게 알려야 했지 않았을까요? 아들의 죽음 때문에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을 어머니에게 먼저 알려야 하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장차 주님의 뒤를 이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이끌어 가게 될 베드로에게 먼저 알려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3년 동안 함께 하던 제자들에게라도 먼저 알려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께서 부활의 소식을 제일 먼저 알린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그러면 왜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을까요? 물론 이것은 주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기록이 무려 13번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마리아의 아름다운 헌신을 유추해 볼 수가 있습니다. /할/
막달라 마리아는 갈릴리 호수 서쪽 연안에 자리하고 있는 '막달라'라는 마을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는 일곱 귀신에 눌려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일단 귀신이 들린 사람은 사회로부터 격리가 됩니다. 가족으로부터 버림받고 마을에서 쫓겨나 거리를 떠돌며 방황하게 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여인으로서 가족을 떠나 미쳐 방황하며 참혹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그 삶이 고달팠을까요? 아마도 차라리 죽고 싶은 생각을 여러 차례 했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선 아무도 가까이 해주지 않았던 자신, 공격적이고 더럽고 추악한 자신을 불쌍히 바라봐 주셨습니다. 그리고 따뜻하게 맞아주셨고, 놀라운 능력으로 그 무섭다는 일곱 귀신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자신을 깨끗하게 낫게 해 주셨습니다. /할/
막달라 마리아는 이 사건 이후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주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주님 때문에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기에 남은 생애를 다 바쳐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께서 공생애 기간 사역하실 때 주님을 따르며 섬겼습니다.
눅8:1-3절에 보면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을 따르며 주님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주님의 식사와 주님의 일상생활을 뒷바라지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고난의 현장을 지키며 주님을 따랐습니다.
마27:55-56절에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배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에 달려 운명하시는 그 자리에 막달라 마리아가 지키고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께서 무덤에 장사되실 때 또 거기에 있었습니다.
마27:58-61절에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돌을 굴려 무덤 문 위에 놓고 가니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예수님께서 장사되신 그 무덤에 막달라 마리아가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도망친 그 자리 심지어 예수님의 가족들마저 떠난 그 자리를 막달라 마리아가 지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오늘 본문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안식 후 첫날에 새벽같이 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가서 알렸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막달라 마리아를 따라 무덤으로 달려왔습니다. 무덤 안을 살펴보니 막달라 마리아의 말대로 무덤이 비어있었습니다. 빈 무덤은 확인했지만 두 제자는 또 그대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요20:11절을 보면 이 때 막달라 마리아는 혼자서 그 빈 무덤을 지키고 울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경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한 가지 결론을 지을 수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 누구보다 주님을 사랑했었다' /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토록 주님을 사랑하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 처음 그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본문 1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그 때 막달라 마리아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아마도 온 몸에 전율이 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슴이 터지도록 기뻤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일 먼저 막달라 마리아를 찾으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 사랑에 끌려 막달라 마리아를 찾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주님은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뜨겁게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은 바로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믿/ 그러면 막달라 마리아의 헌신은 무엇인가?
⑴주님의 깊은 은혜를 깊이 새기며 살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께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자신을 장악하고 있던 귀신을 내 쫓아주셨습니다. 그리고 몸도 고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해 주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 은혜를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살았습니다. 바로 이 모습이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 모습을 귀히 여기셔서 제일 먼저 막달라 마리아를 찾으신 것입니다. /할/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받은 상처는 오래 기억합니다. 그것은 사소한 상처라고 해도 두고두고 마음에 간직합니다. 이에 비해 은혜는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것이 큰 은혜라고 해도 얼른 망각해 버립니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모의 은혜, 이웃의 은혜, 특별히 주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할/
▶중국 진나라 때 '위무자'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아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너의 새어머니는 아직 젊으니 내가 죽거든 개가시키도록 하여라' 한참 세월 흐른 후에 위무자가 죽게 되자 아들을 불러놓고 이번에는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내가 죽거든 너의 새어머니는 나를 따라 순장(殉葬)하도록 하여라'
아들 '위과'는 아버지의 두 유언 가운데 어떤 것을 따라야 할 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병중에 혼미하여 남긴 유언보다는 맑은 정신일 때 남긴 유언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여 젊은 새어머니를 개가시켜 드렸습니다.
뒷날에 위과가 두회와 전쟁을 벌일 때의 일입니다. 두회가 워낙 용맹한 장수인지라 위과의 군대는 싸움에서 지고 있었는데, 갑자기 두회가 탄 말이 누군가 묶어놓은 풀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위과는 두회를 사로잡고 전쟁을 이겼습니다. 그 날 밤, 위과의 꿈에 한 노인이 찾아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당신이 개가시킨 새어머니의 아비가 되는 사람이오. 그대가 지혜로운 판단으로 나의 딸을 개가시킨 것이 고마워 내가 풀을 묶어 적장의 말이 걸려 넘어지게 한 것이오. 작게나마 은혜를 갚게 되어 기쁘오'
이 고사에서 결초보은(結草報恩)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죽어서 무덤의 풀을 묶어서라도 은혜를 갚는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저마다 주님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사랑하며 사는 삶입니다. /할/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 우리가 더 수지 맞습니다. 잠8:17-18절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부귀가 내게 있고 장구한 재물과 의도 그러하니라' /할/
⑵주님의 필요를 채우며 살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을 따랐습니다. 아마도 열두 제자들과 함께 주님과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을 것입니다. 이 때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이 가진 것으로 주님을 섬겼습니다. 식사 문제를 담당했을 것입니다. 공동체의 안살림을 맡아 수발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역에 전념하실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했을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필요를 채우며 살았던 것입니다.
이 모습이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할/
공동체의 필요를 채우며 사는 성도들이 주의 일꾼입니다. 이런 성도들을 바울은 귀히 쓰는 그릇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딤후2:21절에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할/ 우리 모두 귀히 쓰임 받는 참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⑶항상 주님 곁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어떤 일이 있어도 주님 곁을 지켰습니다. 주님께서 집을 떠나 두루 다니시며 사역하실 때 그 곁을 지켰습니다. 주님께서 잡히셔서 끌려가실 때도 뒤를 따르며 그 곁을 지켰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실 때도 그 곁을 지켰습니다. 주님께서 무덤에 장사되실 때도 그 곁을 지켰습니다. 때로는 아끼시던 제자들이 다 도망치고 없는 그 자리를 끝까지 지켰습니다. 가족들마저 다 떠나버린 그 자리를 끝까지 지켰습니다. 이 모습이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런 사람을 찾으십니다.
▶세계 제1차 대전 중에 있었던 실화입니다. 어떤 같은 마을에서 자라났던 두 친구가 같이 전쟁터에 나가게 됐습니다. 그런데 전쟁도중 한 친구가 아군진영에서 떨어져 격리되었습니다. 그때 포탄이 날아와 한 친구는 온 몸에 파편을 입어 피 흘리고 쓰러집니다.
그 광경을 멀리 참호 속에서 바라보고 있던 다른 친구가 견딜 수가 없어서 부상당한 친구에게 달려가려 할 때 분대장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분대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친구에게 달려갔고 천신만고 끝에 친구를 들쳐업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때 친구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분대장이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것 봐라 너까지 죽을 뻔하지 않았느냐 그래서 내가 말렸던 거야' 이 때 그 병사가 말하기를 '분대장님! 제가 그 친구에게 갔을 때 아직 살아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가 숨을 헐떡이며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친구야 네가 올 줄 알았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주님 곁에 있는 것입니다. 비록 내게 손해가 된다고 해도 주님 곁을 지키는 것입니다. 비록 내가 큰 희생을 감수해야만 해도 주님 곁을 지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할/ 우리 모두 이런 헌신 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부활절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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