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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와 가룟 유다! (요12:1~8)

by 【고동엽】 2022. 4. 8.

마리아와 가룟 유다! (요12:1~8)

 

요12: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요12: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요12: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요12: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요12: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요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요12: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요12: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의 주제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밝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서, 또한 표적들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사랑하며, 예수님의 은혜를 깊이 감사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예수님을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미워하며,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더해갈수록 사람들의 반응도 점차 극에서 극을 달렸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장인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 대한 반응은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을 보고서,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놀라운 표적을 보고서도,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하고 아울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까지도 죽이려고 모의하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요12:10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요12:11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그 당시의 대제사장들은 두 가지 면에서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는 정치적 이유였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에게 몰려들었습니다. 그러한 광경을 보면서 로마인들은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요11:48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이와 같이 대제사장들은 로마인들이 폭동을 진압한다고 하면서, 자기들의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지는 않을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땅과 민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화근이 되는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낫겠다고 모의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신학적 이유였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사두개파에 속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난 나사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제사장들의 신학은 설자리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기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했습니다. 나사로가 부활의 증거가 되기 때문에, 아예 증거 자체를 없애버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정말 악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에 대한 반응이 정반대인 두 사람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 사람은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은혜를 깊이 감사하면서,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의 소중한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지도 않았고, 예수님을 사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은혜를 감사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불평과 원망에 사로 잡혀서, 예수님 앞에서 서슴없이 독설을 내뱉기까지 했습니다.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이 예수님의 곁에 있으면서, 어떻게 이와 같이 극에서 극에 이르는 상반된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 정말 의아스러울 정도입니다. 가룟 유다와 같이 되지 맙시다. 우리 모두는 마리아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마리아의 감사입니다. 둘째, 가룟 유다의 불평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평가입니다. 마리아와 같이 감사한 마음으로, 늘 예수님께 기쁨으로 헌신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로, 마리아의 감사입니다(1~3절).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은 경우가 두 번 있었습니다. 한번은 누가복음 7장에 나옵니다. 장소는 이스라엘의 북쪽 갈릴리였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의 집에 초청을 받으셨습니다. 그 때 한 여자가 예수님에게 향유를 붓고서, 그의 죄를 사함 받았습니다.

또 다른 한 경우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또한 같은 경우가 마태복음 26장과 마가복음 14장에도 나옵니다. 장소는 이스라엘의 남쪽 유대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마을인 베다니에 사는 마리아도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었습니다. 

 

요12: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때는 유월전 엿새 전이었습니다. 유월절에는 수많은 양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바로 그 날 예수님은 유월절 양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까 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바로 엿새 전이었습니다.

이제 엿새만 지나면, 예수님은 채찍에 맞으셔야 했습니다. 침 뱉음을 당하셔야 했습니다. 가시에 얼굴이 찔리셔야 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했습니다. 십자가에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또한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셔야 했습니다. 

이와 같은 일들을 내다보시면서, 예수님은 그 날 하루만이라도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마음 편한 시간을 보내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데리시고,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마을인 베다니로 다시 오셨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동쪽으로 약 오 리, 그러니까 불과 2km 정도밖에 안 되는 거리였습니다. 본시 베다니는 자그마한 동네였습니다. 무명의 동네였습니다. 그러던 베다니가 유명해졌습니다. 예수님도 그 마을을 자주 찾으셨습니다. 

그러면 무명의 동네였던 베다니가 누구 때문에 유명해졌습니까? 그 곳에 살았던 한 사람 나사로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나사로가 유명합니까? 오늘 본문은 그 이유를 이와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예나 지금이나 베다니라고 하면, 사람들은 나사로를 떠올립니다. 그리고 나사로라고 하면, 사람들은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자라는 사실을 떠올립니다. 바로 이 때문에 나사로가 유명해졌고, 바로 이 때문에 베다니가 유명해졌습니다.

 

요12: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우선 여기서 말하는 “거기”는 베다니를 가리킵니다. 베다니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했습니다. 베다니는 작은 동네였습니다. 따라서 아마도 이 때 동네 사람 전체가 합심해서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을 것입니다.

그 때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앉은 자 중에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나사로는 손님의 신분으로 그 자리에 앉아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날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가 베풀어졌던 곳은 나사로와 그의 누이들, 곧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이 아니었습니다.

마26:6과 막14:3에 의하면, 그 때의 잔치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열렸습니다. 물론 이제 더 이상 시몬은 나병환자가 아니었음이 분명합니다. 만일 그가 아직도 나병을 앓고 있었다면, 그의 집에서 잔치가 베풀어졌을 리 만무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나병환자는 동네에서 함께 살지 못하도록 되어있었습니다. 반드시 격리된 곳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시몬의 나병을 고쳐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몬은 감사한 마음으로 자기 집에서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지금 그 곳에는 예수님의 은혜를 받은 두 사람이 산 증인으로 함께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나병에서 고침을 받은 시몬이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였습니다. 그러니 동네 전체가 예수님의 은혜를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도중이었습니다. 베다니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그 하루의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날 온 동네가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했던 것입니다.

그 때 마르다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천성이 부지런했습니다. 지금 그 곳은 마르다의 집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그저 얌전하게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그가 도울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열심히 자기 몸을 움직였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일전에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과 함께 마르다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그 때 마르다는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했습니다. 그러다가 마르다는 예수님에게서 책망을 받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는 마르다에 대한 책망이 전혀 없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사랑하며, 예수님의 은혜를 깊이 감사하며,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서 지금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은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요한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오늘 본문에 “마르다는 일을 하고”라고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마르다의 섬김도 잊혀지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요12: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마르다와 마리아는 자매였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성격은 달랐습니다. 언니 마르다는 외향적이었습니다. 활달했습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어디를 가든지 자기의 팔 소매를 걷어올리고서,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활동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동생 마리아는 내성적이며 조용한 성품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조용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마리아는 감정이 풍부해서, 그의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었을 때는 가장 슬프게 울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마리아는 그의 언니 마르다가 부지런히 왔다갔다하는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가만히 생각해보았을 것입니다. “언니는 저렇게 열심히 섬기고 있는데, 나는 과연 무엇으로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까?”

그 때 마리아에게 생각나는 것이 있었습니다. 전에 갈릴리의 한 여인이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었던 일이었습니다. 지금 마리아에게도 귀한 향유가 있었습니다. 사실 너무나도 귀한 것이기에, 그 동안 쓰지도 못하고 아끼면서 그대로 간직해온 향유였습니다.

마리아는 자기도 예수님에게 그 향유를 부어서,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리아의 마음은 뜨거워졌습니다. 그만큼 그는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얼른 가서 향유를 가지고 왔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때 마리아가 가지고 온 향유를 이와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 마치 그 때 마리아의 사랑과 감사와 헌신이 얼마나 크고 뜨거웠던가를 보여주시려는 듯이, 성령님은 자세하게 이 향유에 대해서 설명하셨습니다.

먼저 향유의 종류는 나드향입니다. 본시 나드는 인도의 북부 히말라야의 고산지대에서 자라는 식물의 이름입니다. 이 나드의 뿌리를 짓이겨서, 거기서 추출해낸 향유가 바로 나드향입니다. 이 나드향은 구약성경 아1:12; 4:13, 14에도 나올 만큼 유명한 것이었습니다.

아무튼 나드향은 본시 인도에서 생산되는 향유입니다. 나드향은 인도에서부터 이스라엘까지 그 머나먼 길을 낙타의 등에 실려와야 했습니다. 그러니 그 당시에 이스라엘 땅에서는 이 나드향이 얼마나 귀하고 비쌌겠습니까?

게다가 오늘 본문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부은 향유는 순전한 나드라고 했습니다.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나드향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에 기록된 말씀대로, 그것은 비싼 향유, 그것도 지극히 비싼 향유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향유의 양은 한 근이나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한 근이 많을 때는 600g, 그리고 적을 때는 375g입니다. 어떻거나 마리아가 가지고 온 향유의 양은 한 근이나 되었습니다. 향유로서는 엄청나게 많은 양입니다.

 

막14:3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마26: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마리아는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그 안에 들어있는 향유 전체를 예수님에게 다 붓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너무도 귀한 향유였기에, 마리아는 자기를 위해서는 아까워서 쓰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마리아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먼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리하고도 향유는 남았습니다. 그만큼 많은 양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남은 향유를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의 발에 부었던 것입니다.

 

막14: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그 때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은 이 향유를 팔면, 삼백 데나리온 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룟 유다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정도의 향유라면, 적어도 삼백 데나리온은 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 한 데나리온은 일꾼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안식일은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안식일을 제하면, 삼백 데나리온은 일꾼의 일년 치 품삯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일꾼 한 사람의 일년 치 연봉에 해당합니다.

그만큼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마리아는 그의 오라버니 나사로를 살려주시고, 또한 그의 가족을 구원해주신 예수님의 은혜가 그만큼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자기의 재산목록 제1호였던 나드 향유 전부를 아낌없이 예수님에게 부어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여자가 머리털을 푼다는 것은 유대 사회에서는 하나의 치욕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자기의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오직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만을 바랐습니다. 그는 자기가 낮아짐으로 예수님이 높아지신다면 그것으로 족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남들이 어떤 생각을 하든지, 또한 남들이 무슨 말을 하든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3절은 이와 같이 끝맺음을 합니다.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순전한 나드 한 근이 예수님에게 부어졌습니다. 그러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바친 사랑과 감사의 향기도 온 집에 가득했을 것입니다.

 

삼하24:24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은 자기가 값 없이는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행여 우리는 값없이 예수님을 사랑하려고 들지는 않습니까? 그것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그의 독생자를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자신을 아낌없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참 사랑은 아낌없이 주는 것입니다. 참 사랑은 모든 것을 다 주고서도, 더 주고 싶어서 아쉬워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마리아의 사랑과 마리아의 감사와 마리아의 헌신을 배웁시다. 행여 우리에게도 앞날을 위하여 예비해둔 옥합이 있다면, 그것을 아낌없이 예수님에게 기쁜 마음으로 드립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은 계산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다른 사람들의 말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다 드리고서도, 더 드릴 것이 없어서 오히려 아쉬워하는 것입니다.

“오 주여, 이것을 받으옵소서.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것입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제게 있는 모든 것이 다 예수님의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마음으로 우리도 우리의 옥합을 깨뜨립시다. 예수님은 우리가 드린 향기를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우리를 칭찬하시며, 우리에게 큰 복을 내리실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가룟 유다의 불평입니다(4~6절).

 

우리말 성경에는 빠져있습니다. 그러나 본시 오늘 본문 4절은 “그러나”라는 단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물품으로 인하여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요12: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여기에 가룟 유다가 나옵니다. 유다는 그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가룟은 그의 출신지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남쪽에 있는 한 자그마한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식으로 하면, 전라도나 경상도의 어느 동네 사람 아무개 하는 식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룟 유다는 두 가지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첫째, 그는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였습니다. 둘째, 그는 예수님을 잡아 줄 사람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을 잡아 주었습니다. 그만큼 그는 가증스러운 인물이었다는 뜻입니다. 

 

요12: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가룟 유다의 말은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그는 가난한 자들을 많이 생각하는 듯합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의하면, 다른 제자들이 처음에는 가룟 유다의 속셈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때는 다른 제자들도 똑같이 가룟 유다의 말에 동조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요한도 그 당시로서는 가룟 유다의 속셈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도 가룟 유다의 말에 동조를 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사도 요한은 성령 하나님의 감동하심에 따라서, 가룟 유다가 그와 같이 말한 진짜 동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요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서 돈궤를 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도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돈궤에 넣는 것을 훔쳐가곤 했습니다. 아니 어떻게 도적이 돈궤를 맡을 수가 있었습니까? 그러니까 그는 그만큼 위선적이었던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다른 제자들을 잘 속여넘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요6:70에서, 가룟 유다를 마귀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었음을 이미 아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도 가룟 유다가 실제로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삼백 데나리온의 돈이 가난한 자들에게 가지 못해서 아까워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돈을 가로채서 자기의 것으로 삼지 못해서 아쉬워했던 것입니다.

그 동안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서, 예수님으로 인해서 자기가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의 생각대로 되지를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의 세력이 만만치를 않았습니다.

게다가 예수님 스스로도 그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되면 가룟 유다의 꿈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지난 삼 년간의 삶을 물질로 보상받고, 아울러 앞날을 위한 대비책을 강구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기회 있는 대로 자기가 맡은 돈궤에서 조금씩 훔쳐 갔습니다. 그런 찰나에 그는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많은 돈을 훔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생겼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 기회가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러니 가룟 유다가 얼마나 약이 올랐겠습니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의하면, 바로 이 일이 있은 뒤에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들을 찾아갔습니다. 말하자면 가룟 유다는 바로 그 날 그 밤중에 혼자서 베다니를 떠나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그들에게 팔아 넘겼습니다. 

이 때 예루살렘에서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정에 공회가 모여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흉계로 잡아죽이려고 의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하나인 가룟 유다가 와서 예수님을 자기들에게 넘기겠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기뻐하면서 가룟 유다에게 은 삼십을 달아주었습니다. 은 삼십은 일백 이십 데나리온 정도가 되는 돈입니다. 그러니까 가룟 유다는 자기가 베다니에서 훔치지 못했던 돈 삼백 데나리온의 삼분의 일 정도를 예수님을 팔아서 대신 챙긴 것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 가룟 유다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 은 삼십을 돌려주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은 도로 받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 돈을 성소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길로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행1:18에 의하면, 그 때 그의 몸이 곤두박질했습니다. 그의 목을 맨 끈이 풀렸든지, 아니면 목을 매었던 나뭇가지가 부러졌을 것입니다. 그 결과 그의 배가 터지고, 그의 배 밖으로 창자가 다 흘러 나왔습니다. 이와 같이 그의 삶은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삼 년 동안이나 예수님과 함께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멸망의 자식이 되어, 자기의 곳 곧 지옥에 던져지고 말았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가장 빛난 곳에서 지내다가, 가장 어두운 곳으로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룟 유다는 마리아와 너무나도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가 소중히 여기던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그리고는 그 안에 든 향유를 아낌없이 예수님에게 부어드렸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시지 않는다고, 예수님을 몹시도 미워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사랑하며, 예수님에게 많은 물질을 드리는 것조차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더니 그는 예수님을 팔아 넘기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룟 유다와 같이 불평하지 맙시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을 배신하지도 않을 것이며, 더군다나 예수님을 팔아 넘기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말로는 장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한번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위하여 우리의 옥합을 깨뜨리지 못한다면, 결국 그것은 우리가 그 옥합 때문에 예수님을 배신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깨뜨리지 못한 그 옥합의 값으로 예수님을 파는 셈이 되고 말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돈이나 명예, 또는 쾌락 때문에 예수님을 배신하며, 예수님을 팔 때도 있습니다. 더 이상 가룟 유다와 같이 되지 맙시다. 마리아와 같이 예수님을 위하여 늘 옥합을 깨뜨리면서,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평가입니다(7~8절).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이 때 제자들은 아무도 가룟 유다의 속셈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제자들이 가룟 유다의 위선적인 말에 동조하면서, 마리아를 못마땅한 듯이 바라보며 질책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가련한 마리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셨습니다.

 

요12: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예수님은 먼저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를 가만 두어.” 이것은 명령형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좀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이와 같이 됩니다. “너는 그를 가만 두어라.” 말하자면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독설로부터 가련한 마리아를 보호해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이 말씀의 끝 부분에서 “간직하게 하라”하면서, 이것을 하나의 명령형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옥합은 깨뜨려졌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향유가 예수님에게 부어졌습니다. 따라서 더 이상 향유를 간직할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뜻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풀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은 뜻이 됩니다. “너는 그를 가만 두어라. 그가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지금까지 간직하여 왔노라.”

마리아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것도, 그 곳에서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하나님께 바치시기 위함인 것도 마리아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곧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붙잡히실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곧 로마인들의 손에 넘어가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리아는 더 이상 예수님에게 가까이 갈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는 더 이상 자기가 예수님을 뵈올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마지막 기회를 마리아는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자기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 곧 옥합을 가져다가 깨뜨렸습니다. 그리고는 그 안에 든 향유 전체를 예수님에게 부어드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마리아는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똑같은 날, 똑같은 장소에서 마리아의 생각과 가룟 유다의 생각은 너무도 달랐습니다. 마리아는 오직 예수님만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어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돈 때문에, 예수님을 팔아 넘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요12: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는 예수님이 모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물론 여기서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을 무시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사실 예수님도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지만, 예수님은 머리를 둘 곳도 없이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은 우선 순위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와 같이 묻고 계십니다.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일이 먼저냐?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며,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 우선적이냐?

가난한 자들은 항상 제자들과 함께 하기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일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 엿새 후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 했습니다. 그러니 어디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하겠습니까?

물론 우리가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일은 중요합니다. 우리는 늘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일은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예수님을 높이며,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가룟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끝내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회개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결국 가룟 유다는 저주 받은 사람이 되어,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면 자기에게 좋을 뻔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축복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랑과 감사의 향기로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습니다. 그리해서 마리아는 다음과 같은 칭찬을 예수님에게서 받았습니다.

 

마26: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이 시간 예수님에게 우리의 사랑을 드립시다. 바로 오늘 이 시간 이 자리에서, 우리의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은혜를 깊이 감사합시다. 언제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실 지, 우리는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두 사랑과 감사와 헌신의 향기로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며, 예수님을 영화롭게 합시다. 그리해서 우리가 예수님에게 드리는 아름다운 향유의 냄새로 이 전을 가득하게 채우며, 하나님 아버지께 큰 영광을 돌리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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