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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 (눅 24:13-35)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십니까? /할/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요, 생명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앙의 기초가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사건입니다. 다른 종교에는 부활절이 없습니다. 오직 기독교에만 부활절이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보면 오히려 성탄절보다 부활절이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불교의 석가모니는 죽어서 무덤에 들어갔습니다. 인도의 능수해안에 그 무덤이 있습니다. 유교의 공자도 죽어서 중국 창평향(지금의 산둥성)에 무덤이 있다고 합니다. 이슬람의 창시자 마호메트도 죽어서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 무덤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예수님께서 죽으신 무덤이 없습니다. 잠시 다른 사람의 무덤을 빌리셨지만 죽음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무덤이 비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요, 빈 무덤의 종교입니다. 모든 종교, 종파들이 탄생을 축하하는 행사는 있어도 부활절 절기는 없습니다. 오직 기독교에만 부활절 예배가 있습니다.
'칼 바르트'는 <부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선언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 인간으로서 살다가 인간으로 죽지만, 예수님은 인간의 형상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죽음으로 속죄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다릅니다. ▶요11:25~26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부활'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기독교의 중심교리가 부활입니다.
하나님의 관한 지식은 대부분이 그렇지만 특별히 부활은 이해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믿음의 대상입니다. '마틴 루터'는 자연을 통해서 부활을 발견한다고 하면서 부활은 '성경에만 기록된 것이 아니다. 봄날에도 풀잎에도 약속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엄동설한 추운 겨울에는 죽은 것 같은 나무가 봄이 돌아오면 마른 나무에 물기가 오르고 파랗게 움이 트고 아름답게 꽃이 피는 것은 마치 부활을 연상케 합니다.
신앙은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마음의 문을 닫고 있으면 모두가 자갈밭과 같아서 길가에 뿌려진 말씀이 되어 자라거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이 절대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죄의 문제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셨다는 승전보입니다. /할/
①부활은 신약 성경의 중심 교리이며 초대교회 설교의 중심이었습니다. 부활은 기독교의 본질적 요소입니다.
②부활은 예수님의 중심 메시지입니다(요6:39-44).
39절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믿는 자를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 즉 부활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40절에도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44절에도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고 하셨습니다. 즉 세상 끝 날,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생명의 부활을 얻게 하기 위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 신앙을 성경에서 빼 버리면 계란에서 노른자를 빼 버린 것과 같습니다.
③부활은 사도 바울의 중심 메시지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뒤부터는 늘 십자가와 부활을 전했습니다. 고전15장 전체를 통해서 부활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지 않느냐"고 하셨습니다.
봄에 옥수수나 콩을 심으면 죽어 없어지고 맙니까? 다시 수십 배, 수백 배로 다시 사는 것을 보면서 어찌하여 사람은 죽음으로 끝난다고 생각하느냐, 어리석은 사람들아! 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전15:14절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라고 했고, 15절에서는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고 했고, 17-18절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또 19절에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했습니다. 즉 부활과 내세가 없다면 예수님 믿는 사람이 제일 불쌍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④부활은 수제자 베드로의 중심 메시지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전 제자들의 설교 중심은 바로 부활입니다. 행2:31-32절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 지라"고 했고, 행3:14-15절에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다."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제자들은 겁에 질려 다 도망가 숨었으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다음에는 환희에 차서 순교 당하면서고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부활의 영이 임한 것입니다. /할/
▶오늘도 부활의 능력은 사람들에게 소망으로 이끌어 냅니다. 오래 전에 국민일보에 <주님 음성 듣고 희망을 발견했어요>라는 간증이 실렸습니다.
▶노숙자로 지내며 알코올중독에 빠졌던 김영철씨의 간증입니다. 그는 원래 두 아들과 식당 일을 하던 아내도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여 안수집사가 되고, 건축위원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아내가 이단 종파에 빠지면서 가정을 돌보지 않아 마음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것을 믿음과 기도로 극복하지 못하고 절망해서 술을 입에 대기 시작하고 술로 인생을 위로하고 달래다가 그만 하루에 소주 6-7병을 마시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아내와 별거를 하게 되었고, 아버지의 주벽을 견디다 못한 두 아들도 가출을 하고 말았고 직장에서도 쫓겨났습니다. 그는 하루하루 노숙하면서 거지 행세를 하고 동정을 받아 그 돈으로 소주만 마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노숙자 쉼터에서 성경을 읽다가 자신이 하나님을 떠난 것을 깨닫게 되었고, 다시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서 잃어버렸던 믿음을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으며 마음속에 감동을 받고 새로운 용기와 희망이 생겼습니다. 예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말씀을 읽고 크게 은혜를 받고 "주님, 술에 중독이 되고 노숙자가 되어 이미 죽은 나를 부활의 영으로 새롭게 거듭나게 해 주세요" 기도하며 매달리자 그 마음에 소망이 생기고, 새롭게 인생을 출발하겠다는 결심이 생겼습니다. ▶마음을 새롭게 고쳐먹은 그에게 강남의 한 아파트 경비원으로 취직을 하게 되었고, 이단에 빠져있던 부인도, 가출한 두 아들도 돌아와 새롭게 가정을 출발하게 되었다는 간증입니다. /할/
▶'조지 포먼'은 1968년에 올림픽 금메달을 딴 권투선수로 항상 시합 초반에 상대방을 KO시켜 KO 머신이라는 별명을 가진 그는 1미터 92센티의 거구에 주먹이 강해서 헤비급 최고의 주먹으로 평가받게 되었습니다. 1973년에 챔피언이 되었는데, 그때부터 자신의 주먹을 과신하며 방탕한 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술을 마시고 불규칙한 생활을 하고 성격도 난폭하고 사나워져 고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챔피언이 되었으나 오래가지 못하고 그만 알리에게 역전 KO패하고 말았습니다. 챔피언 자리를 빼앗기자 그는 낙심하고 절망해서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하는 등 방황했습니다.
그가 절망적인 삶을 살 때, 친구의 전도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새롭게 변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본격적으로 주의 복음을 전파하는 복음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텍사스의 휴스턴 길거리에서 마약 중독자와 범죄자와 불량배들을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털어 교회를 지었고, 불량 청소년들을 위해서 청소년 회관을 지었습니다. 불량 청소년들을 인도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선교활동과 전도를 하는 그를 보고 전 세계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암흑의 장소에서 방황하던 그가 빛의 전도사로 변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선교활동을 시작하면서 재정적으로 어려워지고 지원이 더 필요하게 되자 하나님 앞에 "앞으로 제가 일하기 위해서는 재정이 더 필요하고 지원이 필요한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그에게 능력을 주시고 새로운 힘을 주셨습니다.
그는 자신이 아직도 힘과 젊음이 있다는 것을 믿으며 권투에 재도전하게 되었습니다. 1977년에 은퇴해서 10년 이상 선수활동을 하지 않은 이 조지 포먼이 1987년 39살의 나이로 재기를 하겠다며 시합에 나갔습니다. 1994년 46살의 나이로 '마이클 무어러'에게 도전해서 세계 최고령의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재기에 성공한 그는 많은 돈과 명성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 "이제는 내가 남은 인생을 통해서 충성·봉사·헌신하겠습니다." 고백했습니다. 그는 계속 해서 불량 청소년들, 마약 중독자와 범죄자들을 향해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그를 그렇게 변화시킨 것입니다. /믿/
오늘 본문에 보면 '엠마오'라는 동네가 나옵니다. '따뜻한 우물'이란 이름의 뜻을 가진 이 마을은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약 25리쯤 가면 나오는 마을인데, 이 마을을 향하여 예루살렘을 떠나 실망과 슬픔에 잠긴 두 제자가 노을이 깊어 가는 황혼녘에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이 두 제자는 열 두 제자 중에 인물이 아니라 아마도 70인 중에 끼어있는 인물이 아닌가하는 추측이 됩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의 이름이 '글로바'입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하면서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한 낮선 나그네가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낮선 동행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 때 낮선 나그네가 예루살렘을 등지고 걸어가는 두 제자에게 "너희가 길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고 물으시자 그러자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인 글로바가 대답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던 사람으로서 며칠 동안에 거기서 일어난 일을 모르다니. 그런 사람이 당신말고 어디 또 있겠습니까?" 핀잔을 하자 주님이 또 "무슨 일이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때에야 그들은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에 관한 일이오. 그분은 하나님과 모든 백성들 앞에서 그 하신 일과 말씀에 큰 능력을 보이신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우리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분을 관헌에게 넘겨 사형선고를 받아 십자가형을 당하게 했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실 분이라고 희망을 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처형을 당하셨고, 더구나 그 일이 있은 지도 벌써 사흘째나 됩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인이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을 찾아 가 보았더니 그분의 시체가 없어졌더랍니다.
그뿐만 아니라 천사들이 나타나 그분은 살아 계시다고 일러 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 보았으나 과연 그 여자들의 말 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했습니다."
여기까지 듣고 있던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였습니다. "너희는 어리석기도 하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그렇게도 믿기가 어려우냐? 그리스도는 영광을 차지하기 전에 그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하시면서 모세의 율법서와 모든 예언서를 비롯하여 성경 전체에서 당신에 관한 기사를 들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마침 그들이 찾아가던 동네에 거의 다다랐을 때에 두 제자는 "이젠 날도 저물어 저녁이 다 되었으니 여기서 우리와 함께 묵어가자"며 강권하여 붙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후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셨습니다. 바로 그때서야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님을 보았는데 이미 예수의 모습은 사라져서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성경을 설명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고 했습니다. 두 제자들은 발걸음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옮겨 제자들과 함께 합류했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오늘 이 아침에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처럼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할/
▶우리는 오늘 두 제자의 행보 속에서 몇 가지 산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1. 두 제자의 잘 못을 먼저 생각해 보자!
그들 두 사람의 행보는 다음과 같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잘못이 곧 오늘 나의 잘못일수도 있습니다.
①그들은 믿음의 현장을 떠났습니다.
그들이 다른 제자들과 함께 어울려 살던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이 있는 곳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을 약속하신 곳입니다. 그 곳을 떠났다는 것은 주님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즉 성전(교회)을 떠난 것은 주님을 떠난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교회를 절대로 떠나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난 자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 세상으로 내려가면 영적인 강도를 만나 우리의 심령이 기쁨을 잃어버리고 의심과 불평 속에 살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본문의 두 제자들은 언제 떠났는가? 13절에 '그 날'에 떠났습니다. 그 날이 어떤 날인가? 주님이 부활하신 그 날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신 그 날, 부활의 아침에 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내려갔습니다.
여러분! 너무 성급하게, 조급하게 떠난 것이 아닙니까? 신앙은 인내입니다.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 가지를 경계해야 합니다. 그것은 <방관주의와 회피주의와 또 하나는 도피주의>입니다.
방관주의는 무관심한자들입니다. 오늘 날 교회 안에는 무관심한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교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무관심합니다. 목사님이 무엇 때문에 기도하고 있는지 무관심합니다. 심지어 천국도 지옥도 예수님의 부활도 무관심합니다.
본문에 두 제자들도 예수님의 부활에 무관심한자들입니다. 우리는 지난주간에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아침금식을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그 선언에 무관심한자들이 있습니다. 사랑은 관심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무관심은 불 신앙입니다. 우리는 이런 방관주의자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또 회피주의자들이 있습니다. 회피주의는 편의주의자들을 말합니다. 오늘날 많은 신앙인 들이 하나님의 뜻을 제쳐놓고 자기 편한 대로 예수를 믿습니다. 자기 편한 대로 행동하고, 자기 편한 대로 봉사하고 자기 편한 대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주일날도 자기 편한 대로 지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가 복을 받습니다. /할/ 마7:21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또 하나 주의해야 할 것은 도피주의입니다. 기도하는 자리를 피합니다. 봉사하는 자리를 피합니다. 대표기도 하라면 피합니다. 직분을 주어도 피합니다. 도피주의는 적극적인 외면이며 부인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외면하거나 부인해서는 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현대 크리스천의 특징이 바로 '방관자, 회피자. 도피자'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귀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믿음의 현장을 떠나면 안 됩니다. 부활의 현장인 예루살렘을 떠났다는 것은 그들의 믿음이 떠난 것입니다. 떠나면 영적인 강도를 만납니다. 떠나면 망합니다. 믿음을 굳게 지키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
②그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 앞에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왜 알아보지 못했는가? 16절 "저희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 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눈이 가리어져서 못 알아봤다는 것입니다.
의사들의 말에 의하면 뇌에 충격을 받거나 손상을 입으면 기억 상실증에 걸리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두 제자의 경우는 사흘 전까지 곁에 있었던 자기의 스승인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비극입니다.
'눈이 가리어졌다'는 것은 신령한 것과 신령한 세계를 보는 눈이 어두워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근심의 눈으로! 인생의 눈으로! 세상의 눈'으로는 신령하신 우리 주님을 알아 볼 수가 없습니다. 신령한 눈, 영의 눈을 통하여 부활의 예수님을 볼 수가 있습니다. /믿/
안과 의사들의 말에 의하면 사람의 눈에 발생할 수 있는 질환이 수십 가지라고 말합니다. 그 가운데 가장 심각한 질환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름다운 이 세상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우리들은 감사해야 합니다.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보지 못하는 질환 중에 가장 큰 질환은 신령한 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깨달아지면 아멘 합시다! /할/
사람에게는 크게 두 종류의 눈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신의 눈이고 하나는 영혼의 눈입니다. 육신의 눈은 사물을 보고 산하를 보고 하늘과 땅을 보는 눈입니다. 육신의 눈은 신기해서 눈 속에 30만개의 회로가 있고 안구에는 1억 만개의 신경세포가 있어서 거리나 광도, 색상을 자동 조절한다고 합니다.
육신의 눈으로 ▶사물을 봅니다.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봅니다. 지금 여의도 윤중로에 벚꽃이 만발하였답니다. 먼데 갈 것이 없이 계단 화분에 동백꽃이 너무 화사하게 피었습니다. 사물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런데 이 눈이 대기오염에다가 황사 때문에 점점 어두워져 가고 있습니다.
▶이웃을 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이 눈은 정신의 눈이며 연민의 눈이며 사랑의 눈입니다. 그런데 이 눈도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이웃은 보이지 않고 나만 보는 눈으로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세계를 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눈 자체의 가시거리는 그리 멀리 보지 못합니다. 천리안이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천리를 보는 눈은 없습니다. 그러나 만원 경을 이용하면 월세계도 볼 수 있고, 내시경을 통하여 사람의 위장도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세계화입니다. 세계를 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이번에 미국풋볼선수인 워드가 세계의 눈을 떠 주었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단일민족이 아닙니다. 혼혈 인들을 가슴에 품어야 합니다. 어떤 분이 <세계란 넓고 깁니다. 모든 것을 포용하고 통합하고 이해하는 것>이 세계를 보는 눈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파스칼이 지적한대로 육신의 눈으로는 지극히 큰 것도 못보고 지극히 작은 것도 못 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눈으로는 우주를 볼 수 없고 아메바 같은 미생물도 볼 수 없습니다. 아무리 눈을 치켜 떠도 눈 위에 붙어있는 자기 눈썹도 못 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또 하나의 눈이 있는데 그건 영혼의 눈입니다. 이 눈은 믿음이라는 보조수단이 없는 한 보이지 않는 눈입니다. 이 눈은 영의 눈이요, 신령한 눈입니다.
▶왕하 6장을 보면 참 재미있는 기록이 나옵니다.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아람군대가 완전히 성을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깜짝 놀라 뛰어 들어와서 자기 선생인 엘리사에게 이제 큰일났다고 온 성이 아람군대에게 포위돼 우리는 이제 다 죽게 되었다고 호들갑을 떨었을 때 엘리사는 게하시의 영안이 열리기를 기도했고, 마침내 영안이 밝아진 게하시는 자기들을 포위하고 있는 아람군대를 다시 포위하고 있는 천군 천사의 어마어마한 모습을 보고 기가 질리는 그런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세상만사가 두렵고 세상만사가 우리를 놀라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항상 고달프고 항상 외롭고 항상 쓸쓸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안이 열리면 나와 함께 동행하시는 주님을 느끼며 보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믿/
그렇습니다. 육신의 눈은 완전치 못하지만 영혼의 눈은 하나님을 보고 영원한 세계까지 볼 수 있는 눈입니다. 그런데 이 눈은 죄를 범하는 즉시 어두워집니다. 창세기의 아담의 눈도 범죄하자 어두워 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제자의 눈도 어두운 상태입니다.
15절 "예수께서 가까이 가셔서 그들과 함께 걸으셨으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일단 어두워진 눈은 믿음이라는 수건으로 깨끗이 닦아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보이고 부활의 주님이 보이고 천국이 보입니다. /믿/
③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길을 가면서 그들은 예수님과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어주는데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정상적인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면 네 가지 단계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듣는 것이요, 둘째는 느끼는 것이요, 셋째는, 깨닫는 것이요, 넷째는 실천하는 것입니다.
듣기는 듣는데 느낌이 없다든지, 느끼긴 하지만 깨달음이 없다든지, 깨닫긴 깨닫는데 실천이 없다면 인격을 갖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두 제자가 말씀을 깨닫지 못한 원인을 25절이 밝혀주고 있는데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했습니다. 여기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이란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한 선지자들의 예언을 의미합니다. 그 예언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도 믿지 못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약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신약도 믿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믿는 일에 익숙한 사람은 무엇이나 잘 믿습니다. 그러나 안 믿고 의심하는데 길들여져 있는 사람은 무엇이나 안 믿고 믿지 못합니다. 우리 모두 믿는 자가 됩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을 때 역사가 일어나고 기적이 일어납니다. /믿/할/
④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남의 이야기처럼 말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남의 얘기하듯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나 처자를 그리고 남편을 남처럼 여기거나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리고 내가 믿는 예수님을 남처럼 여기는 것은 더 큰 잘못입니다. 그리고 내가 다니고 은혜 받는 내 교회를 남의 교회처럼 생각하는 것도 큰 잘못입니다.
▶두 제자들의 잘못은 ▶믿음의 현장을 떠난 것이고,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고, ▶말씀도 깨닫지 못한 것이고, ▶예수의 부활 사건을 남의 이야기처럼 했습니다. 이 얼마나 부정적인 믿음입니까? 우리도 이렇게 살지 안 했는가? 정검해 보아야 합니다. /할/
▶두 제자의 이야기가 여기서 부정적으로 끝나버리면 제가 왜 본문을 설교하겠습니까? 그들의 삶에 놀랍고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언제 그들이 변화되었는가?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에! /할/ 우리도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그들처럼 변화가 됩니다. /믿/
2. 두 제자의 변화를 살펴봅시다!
①신령한 눈이 열렸습니다. 다시 말하면 눈이 밝아졌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눈이 밝아져 허물과 자신들의 벌거벗은 수치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눈이 밝아지면 예수님이 보이고 천국이 보이고 영원한 세계가 보입니다. 반대로 죄의 눈이 밝아지면 세상 것들이 보이고, 쾌락이 보이고, 죄 짓는 법이 보이고, 불의한 길이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두 제자의 눈이 언제 어떻게 밝아졌는가?'입니다. 30절을 보면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라고 했고 31절을 보면 "저희 눈이 밝아져 그 인줄 알아보더니"라고 했습니다.
함께 음식을 먹었다는 것은 예수님과의 깊은 교제를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만나고 교제하는 사람은 신령한 눈이 밝아지고 신령한 마음이 열려집니다. 그들은 밝아진 눈으로 예수를 알아보았습니다.
여러분! 세상을 보는 눈은 죄악으로 가는 눈입니다. 그러나 신령한 눈은 하나님을 보는 눈입니다. 천국을 보는 눈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보는 눈입니다. 그런데 신령한 눈을 뜨려면 늘 주님과 깊은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믿/
31절(하)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지금은 창경원의 짐승들이 이사를 가고 없습니다. 그러나 20년 전만 해도 창경원은 대단한 인기였습니다. 그곳에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가면 어린아이들은 눈이 동그라집니다. <저건 코끼리, 저건 사자, 저건 호랑이. 저건 공작새, 저건 곰>이라고 가르쳐 줄 때마다 아이들은 '와!'하고 탄성을 지르며 신기해했습니다. 그러나 같이 따라 같은 어른들은 감탄도 탄성도 지르지 않습니다. 이유는 이미 다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실물교육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른들에게 코끼리 그림을 그려주고 호랑이나 사자 그림을 보여줄 필요가 없습니다. 왜?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두 제자의 눈이 밝아져 다시 사신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는 순간! 주님은 의심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곳을 떠나셨던 것입니다. /이해가 가십니까?/할/
②그들의 마음이 뜨거워 졌습니다.
32절을 보면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라고 했습니다.
육체가 뜨거운 것이 아니라 마음이 뜨거워 졌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육체가 뜨겁다고 하는 분들이 있어서 문제입니다.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이 말씀은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⑴마음이 감동되었다는 말입니다. 감동이 되어야 움직입니다.
⑵깨달음이 왔다는 것입니다.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예수께서 성경을 풀어 말씀하실 때 "아! 그 말씀이로구나! 지금까지 배워온 말씀이 예수님의 오심과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한 말씀이었구나!" 무릎을 쳤다는 말입니다. 깨닫는 것이 축복입니다. /할/ 우리 모두 말씀을 들을 때 깨닫는 영이 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믿/
⑶성령 체험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그 날 거기서 성령을 받고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차가웠던 믿음이 불처럼 뜨거운 신앙으로! 침체되었던 신앙이 다시 살아나고, 탕진했던 신앙이 활기찬 신앙으로, 의심하던 신앙이 확신하는 신앙으로 회복되었습니다. /할/ ▶그들이 언제 뜨거워졌습니까? 32절을 보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라고 했습니다. 두 제자들이 엠마오 도상에서 성경 말씀을 듣다가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행10장에 보면, 로마의 백부장인 고넬료가 베드로를 자기 집으로 초청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 날 베드로의 설교 주제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말씀을 듣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리고 방언이 터져 나왔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깊은 관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이 말씀을 받는 순간에 불같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 ▶미국의 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은 <성경은 세상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을 만든다.>고 했습니다. 이 지구에 수많은 나라들이 있지만, 성경을 믿고 성경 말씀대로 사는 민족이 선진 국가이고 우수한 민족입니다. /믿/
③다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습니다.
33절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신앙의 원상복귀입니다. 탕자가 돌아온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행동이 없는 변화는 참 변화가 아닙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인 줄 알고 마음이 뜨거워진 뒤에도 그냥 엠마오로 내려갔다면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향하였습니다. ▶29절에 보면 그 때는 이미 저물었을 때입니다. 예루살렘까지 되돌아가려면 25리를 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그 시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할/ 이것이 신앙의 결단입니다.
좋은 일을 미루면 그만큼 손해입니다. 엠마오는 서쪽에 자리 잡고 있었고, 예루살렘은 동쪽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해지는 곳을 떠나 해뜨는 곳으로 갔습니다. 다시 말하면 절망 역을 떠나 희망 역으로 간 것입니다. /할/
국민가수 조용필은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불러 한국과 일본에서 수십만 장의 디스크 판매고를 올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은 부산항이 아닙니다. 떠났던 예루살렘으로! 떠났던 하나님께로! 떠났던 믿음의 길로 속히 돌아와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개인적인 실패나 고난 때문에 예루살렘을 떠나서는 아니 됩니다. 또 사사로운 감정이나 이유 때문에도 떠나서는 아니 됩니다. 반대로 잘 먹고 잘 살고 성공했고 출세했기 때문에 떠나서도 아니 됩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죽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모양대로 지음 받은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영혼이 병들어 죽고 맙니다. 영혼이 잘 되어야 범사가 잘 되고 영 육간에 강건함이 있습니다. /믿/ 우리 모두 다시 한번 예루살렘으로 돌아갑시다! /할/
④부활의 주님을 증거 하는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여기 예루살렘은 부활의 현장, 선교의 현장, 사명의 현장입니다. 두 제자는 돌아와 길에서 만난 예수님을 증거 했습니다. 한마디로 듣고 본대로 사실을 전했습니다. 35절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다시 만하면 길에서 만난 부활의 주님을 증거 했습니다. 우리도 이 사명을 받았습니다. 나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고, 나 위하여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전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믿/
두 제자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유는 바로 길에서 만난 예수를 증거 하려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36절을 보면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다시 사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다시 나타나 그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그렇습니다. 돌아온 사람들, 회개한 사람들,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주님은 평강을 주십니다.
⑤부활의 능력을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릅니다(막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우리가 믿는 척만 하지말고 올바로 믿으면 표적이 나타납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겉으로만 믿는 척 하는, 가짜로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진짜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표적이 나타나고 그 결과가 나타납니다.
믿음 속에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가 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믿음을 통해 언어가 달라집니다. 부정적인 말 대신 긍정적인 말을 하게 됩니다. 미움의 말 대신 사랑의 말을 하게 되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선포함으로 그 사람의 말이 힘있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면 모든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일도 해낼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을 갖게 됩니다.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입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어떤 분이 뱀은 잡아먹으면 보약이 되는데, 물리면 독이 퍼져 죽는다고 말했습니다. 만약 에덴동산에 하나님께서 우리 한국 사람을 먼저 만드셨다면 뱀을 보자마자 잡아먹어서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을 텐데, 그것이 안타깝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낫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면 여러분의 손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역사 하여 주십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서 병 고침이 나타나는 손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초대 교부 '크리소스톰'이 로마 황제에게 붙잡혀서 고문을 당했습니다. 황제는 명령하기를 "저 녀석을 독방에 쳐 넣어라. 아무도 만나지 못하게 하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하라." 그러자 옆의 신하가 말합니다. "그것은 안 됩니다. 저들은 그리스도인입니다." 황제가 "그리스도인이 별거냐? 속히 독방에 넣어라!" 신하가 설명을 합니다. "그런 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독방을 좋아합니다. 독방에 넣으면 하루 종일 찬송하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예수의 영이라는 것이 있어서 함께 있답니다. 독방에 넣으면 저들 좋은 일만 시키는 거랍니다." "그러면 이 자를 극악무도한 죄인들 틈에 넣어라"고 황제가 말했습니다. "그것도 안 됩니다. 이들은 전도할 기회를 얻었다고 좋아합니다. 며칠만 지나면 모두 예수쟁이를 만들어 버릴 겁니다." 황제가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얼른 이 자를 데려다가 목을 베어라." "아니 되옵니다. 저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 순교입니다. 순교하는 것이 저들에게는 가장 큰 상급이랍니다." "그러면 어쩌란 말이냐?" "속 편하게 석방해 줍시다." 그래서 나오게 되었답니다. /할/
이런 성도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하여도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할/
▶말씀을 마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났던 두 제자는 ▶신령한 눈이 열렸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주님을 증거 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 지어다."하고 복을 주셨습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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