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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새 아침 (막 16:1-11)
영어 찬송가 가운데 “Morning has broken”이라는 곡이 있습니다. 가수 캣 스티븐스(Cat Stevens)가 불러서 팝송으로도 널리 불리어졌습니다. 이 곡의 가사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Morning has broken like the first morning
(태초의 아침처럼 아침이 밝아옵니다 )
태초의 첫 번째 아침이 어둠을 깨뜨리고 처음 밝아온 것처럼 아침이 밝아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침이 밝아온다는 표현을 “깨뜨린다”는 뜻을 가진 “break”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또 영어로 아침 식사를 “Breakfast” 고 합니다. 이 말은 “단식”이라는 뜻의 “fast”와 “깨뜨린다, 중단한다”는 뜻의 “break"가 합성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침식사는 한 밤의 긴 단식을 끝내고 무엇인가를 먹는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아침은 한 밤 동안 지배하던 어둠을 깨뜨리고(break), 빛이 주도하는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는 시점인 것입니다. 무엇인가 계속되던 것을 중단시키고, 무엇인가가 새롭게 시작되는 시점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두 차례 특정한 시점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2절을 보면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라고 되어있고, 9절을 보면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라고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이아침에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인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이 아침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아침에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침에 밤새 세상을 지배하던 어둠이 쫓겨 가고 빛이 온 누리를 지배하는 새 날이 시작되는 것처럼, 그동안 세상을 지배하던 영적 어둠이 쫓겨 가고 영적 빛이 온 누리를 지배하는 새 날이 시작됐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시간적으로 아침에 일어났을 뿐 아니라 영적인 새 아침을 여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부활의 새아침에 일어난 영적인 아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새아침
본문 2절을 보면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1절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 이 세 여인이 안식일 바로 다음날 새벽 일찍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들이 그렇게 이른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믿었기 때문일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먼저 만나보기 위해서 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예수님의 장례는 안식일이 시작되기 직전에 급하게 치러졌습니다. 안식일에는 장례를 치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워낙 경황이 없는 가운데 준비 없이 장례가 치러졌기 때문에 이 여인들은 사랑하는 예수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에 제대로 사랑과 존경을 표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이 여인들은 안식일이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끝난 토요일 늦은 시간에 향품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밤이 지나고 새벽이 되자 이 여인들은 부지런히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예수님께 향품을 발라드리고, 자기들의 마지막 사랑과 존경을 표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급히 무덤을 향해 가다가 한 가지 걱정거리가 생각났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커다란 돌로 막혀있었던 것이 생각난 것입니다. 자기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 돌을 치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향해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큰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본문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한 가지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이 여인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점을 전혀 믿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여러 차례 죽었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물론이고 예수님을 사랑하던 사람들은 그 말씀을 다 들은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말씀을 믿고, 예수님의 부활을 기다린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특히 제자들은 이 예언의 말씀을 가장 가까이에서 서너 번 들었지만 저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이미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들은 극도의 공포와 슬픔에 잠겨있었습니다. 비록 이 여인들은 예수님 곁을 지키고 있었지만 저들도 예수님께서 부활하리라는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직전 이 여인들에게 짙은 영적 어둠이 깔려 있었습니다. 바로 주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불신입니다. 말씀을 들었지만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에게는 두려움과 큰 슬픔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막 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갈릴리 바다를 건널 때 있었던 일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날이 저물어 어둠이 짙어진 가운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셨습니다. 배가 바다 한 가운데 들어섰을 때 갑자기 큰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풍랑이 일면서 바닷물이 배에 들이쳐 가득 차게 됐습니다. 자칫 배가 파선할 상황입니다.
이런 다급한 위기 상황 속에서 제자들은 두려워 떨기 시작합니다.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 요동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뱃머리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도움을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잠에서 깨어나셔서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를 진정시키셨습니다. 그리고 난 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예수님께서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진단하셨습니다. 배가 침몰하기 직전의 이 다급한 상황 속에 문제는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광풍이 문제가 아니고 요동치는 바다가 문제가 아니고,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 인생을 힘들게 하는 것은 우리 밖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를 위협하는 인생의 위기가 우리 인생을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가 믿지 못하는 불신이 우리 인생을 힘들게 합니다.
표범이 독수리를 사냥하곤 합니다. 이 때 표범이 사용하는 전술은 기습공격입니다. 독수리가 땅에 내려앉기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독수리가 땅에 내려앉은 후 기습적으로 덮칩니다. 이 때 독수리는 너무 다급한 상황 속에서 당황하게 됩니다. 그리고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그러다가 발로 뛰며 도망치다가 결국 표범에게 잡히고 맙니다. 날개를 치고 하늘로 날아오르면 될 텐데 날지 못하고 뛰다가 잡히고 마는 것입니다. 너무 당황한 가운데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날개가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날면 살 수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잡히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으면 조그만 풍랑이 일기만 해도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마치 독사에 물린 쥐가 독이 퍼져 온 몸이 마비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것처럼 생각이 마비됩니다. 그래서 인생의 위기 가운데 깊이 빠져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믿음 없이 살아갑니다. 그래서 인생의 바다에 조그만 풍랑이 일기만 해도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그리고 생각과 판단이 마비되어 우왕좌왕하며 살아갑니다. 바로 이런 불신이 우리 인생을 힘들게 하는 인생의 어둠입니다.
요 20장을 보면 의심 많던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저녁에 제자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이 때 제자들이 여인들이 전해 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 도마가 없었습니다. 이후에 제자들이 자기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던 이야기를 전해주었습니다. 그러니까 도마는 여인들의 증언도 들었고, 이제 함께 동거동락하던 제자들의 증언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믿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8일이 지났습니다. 제자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또 나타나셨습니다. 이 때 그 자리에 도마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부러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이 때 도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없던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에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뒤에 저를 사로잡고 있던 영적인 어둠이 다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저가 믿음의 아침을 맞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부활의 아침에 여러분에게 믿음의 아침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도마처럼 믿음을 잃어버렸던 사람들이 믿음을 되찾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희망의 새아침
본문 10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제일 먼저 막달라 마리아를 직접 만나셨습니다. 이 마리아는 너무 기쁘고 놀라워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 때 소식을 전하러 갔던 마리아의 눈에 비친 제자들의 모습은 슬퍼하며 울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왜 슬퍼하며 울고 있었을까요? 물론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것 자체가 슬프고 비통한 일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의 슬픔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자기들의 꿈과 희망이 사라져버린 것 때문일 것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희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저들은 지난 3년 동안 오직 예수님에게만 희망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직업도 버리고, 심지어 가족들도 뒤로 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허망하게 저 십자가에서 속절없이 죽으신 것입니다. 이제 자기들의 희망이 다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슬퍼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뒤 제자들에게는 걷잡을 수 없는 절망이 밀려들었습니다. 그 절망에 인생 자체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절망이 저들에게는 또 하나의 영적인 어둠이었습니다.
미국 심리학회 회장을 지낸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심리학 교수인 마틴 셀리그만 박사가 주목할 만한 실험을 했습니다. 쥐 300마리의 몸속에 암세포를 주입한 뒤, 100마리씩 A, B, C 세 그룹으로 나누었습니다. 먼저 A그룹 100마리에게는 바닥에 약간의 전기 충격을 가하여 스트레스를 주고, 이에 놀란 쥐가 다른 방으로 도망가면 역시 같은 전기 충격을 주어, 쥐들이 “피할 수 없다. 속수무책이다.”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다음으로 B그룹 100마리에게도 같은 전기 충격으로 스트레스를 주되, 놀란 쥐가 다른 방으로 도망갔을 때는 전기 충격을 주지 않아 “피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C그룹 100마리에게는 스트레스를 주지 않고, 편안한 방에 두었습니다.
3개월 후에 암이 퍼진 결과를 살펴보았습니다. 예상대로 A그룹에 암이 가장 많이 퍼져 73퍼센트의 발병률을 보였다. 그런데 예측한 것과 달리 암이 B그룹은 31퍼센트, C그룹은 50퍼센트가 발병됐습니다.
그러니까 A와 B그룹을 비교했을 때, “피할 방법이 없다.”라고 절망하는 쥐는 암 발병률이 73퍼센트였고, “피할 방법이 있다”라고 희망을 가진 쥐의 암 발병률은 31퍼센트였다는 것입니다. 이 42퍼센트의 발병률 차이는 바로 희망이 있고 없고의 차이인 것입니다.
그리고 B와 C그룹을 비교했을 때, 아무런 스트레스를 주지 않고 편안한 상태를 유지하게 해 준 C그룹의 경우 암발병률이 50%인데 비해 스트레스를 받지만 그 속에서 희망을 가지게 된 B그룹의 경우 암발병률이 31퍼센트였습니다. 이것은 암환자에게 단순히 편안한 환경만 만들어주는 것보다 암을 고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우리 밖의 환경이나 상황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절망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이 절망이 영적인 어둠이 되어 우리 인생을 짓누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눅 23장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를 만나시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두 제자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뒤에 낙심하여 엠마오라고 하는 마을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저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애통해 하면서도 자기들의 희망이 무너진 것 때문에 힘들어하며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믿고 희망을 걸었지만 십자가에 죽으신 뒤 그 희망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절망가운데 힘없이 낙향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저들을 만나주셨습니다. 저들에게 말씀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 때 저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리고 식사 자리에서 지금 자기와 함께 하시는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저들의 마음에 잃어버렸던 희망이 다시 샘솟듯 솟구치기 시작했습니다. 저들을 무겁게 짓누르던 절망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자기들이 절망하며 떠났던 그 예루살렘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주신 새 희망을 나누기 위해서 절망하고 있을 제자들에게 달려갔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 자기들을 짓누르던 절망을 떨쳐버릴 수 있었습니다. 새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됐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저들에게 희망의 아침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분이 우리에게 새 희망을 주십니다. 우리를 무섭게 짓누르는 절망을 떨쳐버릴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우리를 뒤덮고 있던 저 영적 어둠을 물리치고 희망의 새아침을 맞게 해 주십니다.
오늘은 우리 예수님께서 다시 사신 부활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둠을 물리치고 새벽에 부활하셔서 새 아침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들에게 영적인 새 아침을 열어주셨습니다.
불신이라는 영적 어둠에 사로잡혀 두려워 떨며 살던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믿음의 새아침을 맞게 됐습니다. 굳건한 믿음으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됐습니다. 절망이라는 영적 어둠에 사로잡혀 곤고한 삶을 살던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희망의 새아침을 맞게 됐습니다. 활기찬 새 희망으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됐습니다. 바로 여러분이 이아침 그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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