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돌아가기 |
효도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엡 6:1-3)
최근 우리사회에 낯선 사업체 하나가 등장했습니다. 상호명이 [키퍼스 코리아]입니다. 고독사가 늘면서 고인의 집과 유품을 정리해 주는 “유품정리업체”입니다.
유족들이 의뢰를 하면, 직원들이 현장을 찾아가 견적을 봅니다. 필요 없는 물건은 처리하고, 보관 가치가 있는 물건들만 골라서 유족들에게 배송합니다.
이 회사의 김석중 대표는 “가족이 전국에 뿔뿔이 흩어져 살 경우, 장례식이 끝나면 다시 모이기 어렵고, 부모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유품을 정리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이들의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그리고 “일기장이나 앨범을 보면 독거노인들의 경우 자식이나 주변 사람들을 그리워하다가 돌아가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인이 남기고 간 그리움의 흔적을 볼 때마다 가슴이 저민다.”고 속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세태가 효도와는 점점 멀어져 가는 것만 같습니다. 부모들이 자식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심지어 버림받기까지 합니다. 그러다 홀로 쓸쓸히 생을 마감하는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부모님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십니까? 여러분들로부터 외면당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여러분에게 버림 받지는 않으셨습니까? 자칫 고독사로 생을 마감하실 상황은 아닙니까? 부모님들을 가까이 모실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도 마음까지 멀어지면 안 됩니다.
성경을 보면 효도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단순한 인륜의 차원에서 마땅한 도리로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비와 사랑의 차원에서 전하는 권고사항도 아닙니다. 지엄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효도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은 십계명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는 약 600여 가지의 계명이 있는데, 그 중에 가장 기본적인 계명이 십계명입니다. 이 10계명은 또 둘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명령으로 1에서 4계명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명령으로 5에서 10계명입니다.
출 20:12를 보면, 제 5계명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이 계명에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교훈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효도가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계명 중에 첫 번째 계명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인간다움의 우선적 요건이 효도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낳아 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 오늘의 자기를 있을 수 있도록 해주신 부모님께 감사하고, 그 은혜를 갚는 것이 인간다움의 첫걸음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효도가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계명 중에 유일하게 적극적 계명이라는 점입니다.
십계명 중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다른 계명들은 다 “... 하지 말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이 효도에 대한 계명만은 “...하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효도는 적극적으로 찾아서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효도라는 것은 잘하면 잘 할수록 더 좋은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효도만이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다른 계명과 달리 약속이 덧붙여진 계명이라는 점입니다.
다른 계명들은 “...하지 말라”고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포괄적으로 “이 계명들을 지키지 않으면, ...” 하고 경고가 붙어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효도라는 계명만은 하나님께서 잘 지킬 경우 장수의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인센티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서라도 꼭 지키게 하시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이 십계명 외에도 효도에 대한 말씀은 성경 여러 곳에서 발견됩니다. 예를 들면 레 19:3을 보면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 23:25를 보면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 30:17을 보면 “아비를 조롱하여 어미를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그렇습니다. 효도는 이처럼 하나님께서 힘주어 강조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래서 효도는 반드시 해야 하고, 만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효도는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점에서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효도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1. 부모에게 순종하라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즉 효도는 우선 구체적으로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순종이라는 말은 헬라어 원어로는 ‘휘파쿠오’ (hypakuo)입니다. 이 말은 기본적으로 ‘귀 기울여 듣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순종이란 거창한 무엇이 아니라 부모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실 부모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 말씀을 납득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도저히 그 말씀을 납득할 수 없을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무시해 버리기도 하고, 때로는 그 말씀을 정면으로 반박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씀하시는 부모님의 마음을 읽는 것입니다. 납득할 만할 때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납득하기 힘들 때는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님을 믿고, 그 말씀을 따를 필요가 있습니다. 정 따를 수 없을 때는, 당장 판단하기 보다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창 22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를 하나님께 드리는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의 나이 127세이고, 아들 이삭의 나이가 27살 되던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에게 뜻밖의 지시를 합니다. 함께 모리아산에 가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도록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이삭이 번제에 쓸 나무를 지었고, 두 사람의 종이 불과 칼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볼 때, 납득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번제에 쓸 제물인 양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이 아버지께 물었습니다. 아버지가 알쏭달쏭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이삭은 아버지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대해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더 기가 막힌 일이 생겼습니다. 모리아 산에서 아버지가 번제단을 다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아무런 말씀도 없이 자기를 결박하시는 것입니다. 이삭은 아버지가 자기를 제물로 하나님께 바치려 하신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아무런 말이 없이 선선히 결박을 받았습니다.
자기는 지금 피 끓는 청년입니다. 이에 비해 아버지는 127세의 힘없는 노인입니다. 살려고 한다면, 아버지를 뿌리치는 일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묵묵히 아버지의 뜻을 따릅니다. 아버지를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순종입니다. 부모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18세기 영국의 시인이자 저명한 문학가인 사무엘 존슨(Samuel Johnson)의 일화입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장터 한 쪽에서 이 분이 홀로 몇 시간을 서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인사를 하거나 말을 걸어도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냥 서서 눈물만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반나절이 지났을까, 그의 낯선 행동에 걱정이 되었던 제자가 다가가 스승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물었습니다. “선생님,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그 때 이분이 이렇게 답했습니다. “사실은 50년 전, 우리 아버지께서 이 자리에서 헌책장사를 하셨다네. 그날도 장사를 위해 일어나셨지만 몸이 몹시 안 좋으셨는지, 나에게 대신 하루만 시장에 나가 장사를 해 줄 수 있냐고 물으셨었지…”
“선생님은 뭐라고 대답하셨나요?” “우리 집이 헌책장사 하는 것도 창피한데, 내가 그런 일을 어떻게 하냐며 거절했지. 그런데 너무 무리를 했던 탓인지, 아버지는 그날 이후 몸이 약해져서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시고 말았다네. 오늘은 그때의 기억이 지워지지 않아 이 자리를 떠날 수가 없다네.”
사무엘 존슨은 50년이 지난 후에도 아버지의 부탁을 거절한 자신의 행동을 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부모님께 순종하는 것도 다 때가 있습니다. 그 때를 놓치면 안 됩니다. 부모님의 마음에 큰 아픔을 드리기 때문입니다. 깨닫고 나면 때늦은 후회를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모님께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효도입니다.
2. 부모를 공경하라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효도란 구체적으로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공경이라는 말은 원어로는 “티마”(Tima)입니다. 이 말은 구약의 히브리 “카베드”(Kabed)를 번역한 말입니다. 이 카베드라는 말은 원래가 “무겁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공경이라는 말의 원 뜻은 “중하게 여긴다”, “존중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우선 부모를 존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작가 조연경씨가 쓴 <효도별곡> 이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서울에서 만두집을 경영하며 살아가는 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부부는 이상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매주 수요일 오후 3시만 되면, 어김없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만두가게에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노인들은 늘 따로따로 가게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두를 시켜놓고는 마치 연애하는 사람들처럼 애틋하게 서로에게 먹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두집 주인은 이 두 노인이 아마도 젊은 시절 사랑했던 사이였다가 말년에 그 사랑을 잊지 못해 1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수요일, 그날따라 할머니의 안색이 영 좋지 않아 보였습니다. 할아버지가 만두 하나를 집어 할머니에게 권했지만, 할머니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 저을 뿐 드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날따라 할머니는 자주 눈물을 닦으며 어깨를 들먹이곤 했습니다. 한참 뒤에 일어나 만두 값을 치룬 할아버지는 그 날만큼은 할머니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만두집을 나섰습니다. 곧 쓰러질 듯 휘청거리며 걷는 할머니를 마치 어미 닭이 병아리를 감싸듯 감싸 안고 가는 할아버지. 그 두 노인의 뒷모습이 왠지 가슴 아프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이 만두집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두 달여가 지난 어느 수요일 정각 오후 3시에, 할아버지가 문을 열고 만두집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만두집 부부는 너무 반가웠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얼굴은 예전과 달리 몹시 초췌해 보였고, 진심으로 반가워하는 부부를 향해 할아버지가 답례로 보인 웃음은 울음보다 더 슬퍼보였습니다. 만두집 여자가 물었습니다. “할머니도 곧 오시지요?? 할아버지는 고개를 가로 저었습니다.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할아버지는 마치 독백하듯 울먹이는 목소리로 사연을 이야기했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첫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어엿한 부부지간이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수원에 있는 큰 아들의 집에서, 할머니는 서울에 있는 둘째 아들의 집에서 각각 떨어져 살아야만 했습니다. 두 분의 사이가 나빠서가 아니라, 자식들끼리 싸운 결과였습니다. 큰 며느리가 다 같은 며느리인데 자기 혼자만 시부모를 모실 수 없다고 강경하게 나서는 바람에, 아들들이 공평하게 한 분씩을 모시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서울과 수원으로 생이별을 하게 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매주 수요일 오후3시만 되면 마치 견우와 직녀처럼 그 만두집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온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이야기의 끝을 맺었습니다.?이제 나만 죽으면 돼. 천국에서는 같이 살 수 있을 거야.?
오늘 자식들이 부모를 귀찮케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큰 부담이요 짐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공경은 부모님을 존중하는 데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부모님을 귀하게 여기시고, 존중해 드리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공경이란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려 드리는 것입니다. 부모님들은 때로 자식 생각에, 할 말씀도 하지 못하실 때가 많습니다. 또 때로는 속마음과 다른 말씀을 하실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공경은 부모님의 속마음을 헤아려서, 그 마음을 흡족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심순덕님의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라는 시가 있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 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 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썩여도 끄덕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한밤중에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식들이 부모님의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모를 때가 많습니다. 효도를 한다고 해도 다 자기 좋으려고 효도할 때가 있습니다. 남에게 보이려고 효도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려 드리시기 바랍니다.
효도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효도는 부모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결국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효도를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차원에서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효도는 구체적으로 부모님에게 순종하는 것이고,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 자료 18,185편 ◑ > 자료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추수감사절/범사에 감사하라! (살전 5:16-18) (0) | 2022.04.06 |
---|---|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 (눅 24:13-35) (0) | 2022.04.06 |
부활의 새 아침 (막 16:1-11) (0) | 2022.04.06 |
주님이 오신 날! (눅 2:1-14) (0) | 2022.04.06 |
얼마나 하나님께 충성했는가? (고전 4:1-2/딤전 1:12) (0) | 2022.04.06 |
댓글